8. 웨이크 및 마르쿠스 공격(1942.2.14-3.10)

 

1942년 2월 5일, 엔터프라이즈는 엄청난 환영을 받으면서 진주만에 입항했다.
엔터프라이즈가 진주만 입구에 들어서자 진주만 내의 모든 함선에서 뱃고동을 울려댔으며 함정의 수병들 뿐 아니라 지상근무자들도 모두 부두에 몰려 나와서 엔터프라이즈를 환영했다.
태평양함대 사령관 니미츠 제독은 엔터프라이즈가 접안하여 현문을 설치하는 것도 기다리지 못하고 함정의 현측에 매달린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핼시 중장을 환영했다.

곧이어 진주만에 있던 수십 명의 기자들이 운집한 가운데 핼시 중장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상당히 나서기 좋아하고 허풍도 좀 심한, 그리고 어린애같은 면도 좀 있는 핼시 중장이었지만 기자들에게는 그가 진정한 국가적 영웅으로 비쳤다.
인터뷰에 능숙하지만 말투에서 가식적인 냄새가 풍기는 루즈벨트 대통령이나 말투나 행동에서 귀족적인 품격이 느껴지지만 동시에 귄위적이고 독선적인 느낌을 주는 맥아더 장군의 스타일에 다소 식상해 있던 기자들에게 핼시 제독의 친근하면서도 솔직하고 직선적인 매너는 상당히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이 회견에서 기자들이 적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냐고 물어보자 핼시 중장은 기자들 앞에서 아주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는데 이 표정은 곧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고, 이후 기자들은 그에게 '황소(Bull)'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런데 사실 마셜 제도 공격의 전과는 지나치게 부풀려져 있는 상태였다.
먼저 작전에 참가했던 조종사들부터가 적의 피해상황을 분석하는 훈련이 부족하여 전과를 부풀려 보고했다.
예를 들어 핼시 중장은 공격에 참가했던 조종사들의 보고를 기초로 하여 소형 항공모함 1척, 2,500 톤급 잠수함 1척, 수송선 1척, 소형함정 4척을 격침하고 최소한 20-30 대가 넘는 쌍발폭격기를 포함하여 많은 숫자의 일본군 항공기를 지상에서 파괴했다고 보고하였으나 실제로 격침된 일본군 함정은 수송선 1척과 소형함정 2척에 지나지 않았고, 지상에서 파괴한 일본군 항공기도 불과 9대였다.
그리고, 핼시 제독의 보고와는 달리 공격 당시 마셜 제도에는 단지 9대의 쌍발폭격기가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엔터프라이즈에 동승하고 있던 종군기자들은 조종사들의 이러한 과장된 보고를 그대로 받아들여 진주만으로 보냈고, 진주만에서 원고를 받아본 기자들은 이걸 더 부풀려서 본사에 보고했다.
게다가 본사의 데스크에서 이걸 한번 더 뻥튀기하여 많은 신문들이 '일본판 진주만(Japanese Pearl Harbor)' 이란 말도 안되는 헤드라인으로 마셜 제도 공격기사를 실었다.

한편 핼시 제독은 작전보고서(Action Report)에서 미해군 함대의 대공사격기술이 미숙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함정이 25노트 이상의 속력으로 기동중일 때에도 정확하게 대공사격을 가할 수 있도록 대공사격훈련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돈틀레스 2-3대가 긴밀하게 협조하며 움직일 경우 일본군 전투기에 대해서 상당한 정도로 대항할 수 있다는 점도 발견했다.
그러나 마셜제도 공격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무엇보다도 다가오는 함대항공전에 대비하여 함정과 항공기 승무원들이 귀중한 실전경험을 쌓을 기회를 가졌다는 점이었다.

킹 제독이 1월 초에 웨이크 섬 공격을 요구했을 때 니미츠 제독은 렉싱턴을 보내어 웨이크 섬을 공격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1월 11일 새러토가가 일본잠수함의 어뢰를 맞고 본토로 수리하러 가 버리자 니미츠 제독은 렉싱턴을 웨이크 섬 공격에 투입하는 것을 망설였는데, 킹 제독이 1월 15일에 다시 전보를 보내와서 웨이크 섬 공격을 빨리 실시하라고 요구했다.
1월 22일, 니미츠 제독은 할 수 없이 당시 진주만 남서쪽 900km 해역을 항해하고 있던 렉싱턴 호의 브라운 중장에게 웨이크 섬 공격을 명령했다.

그리고, 급유를 위하여 유조선 Neches 호를 급파하였는데 23일에 이 유조선이 적의 잠수함에 의하여 격침되어 버리자 결국 웨이크 섬 공격을 단념하고 렉싱턴 호를 도로 불러들였다.
1942년 1월 23일에 일본군이 라바울을 점령하자 미국은 ABDA 사령부 관할해역의 남동쪽인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뉴기니아,뉴칼레도니아,피지와 솔로몬 제도를 관할하는 ANZAC 방어지대를 황급히 설치하고, 뉴칼레도니아에 2만명의 미군을 파견하기로 했다.
이러한 정세변화에 따라 렉싱턴도 ANZAC 지역의 방위를 위하여 급히 파견되었다.

이제 엔터프라이즈와 요크타운이 무사히 진주만에 돌아오자 킹 제독은 2월 6일에 다시 전보를 보내어 ANZAC 지역에 대한 압력을 완화하기 위하여 본토 서해안에 있는 6척의 구형전함을 비롯한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일본이 점령하고 있는 중부 태평양의 여러 섬들을 공격하도록 다시 요구해 왔다.
니미츠 제독은 이런 요구에 대하여 세력이 열세한 태평양함대는 힛트앤드런 전법을 쓸 수밖에 없는데 그런 식으로는 ANZAC 지역에 대한 일본의 압력을 제거할 수 없으며 더군다나 구형전함은 그런 작전에는 사용할 수 없다면서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킹 제독이 2월9일에 다시 전보를 보내와서 계속적으로 공격을 요구하자 니미츠 제독은 킹 제독이 신뢰하는 유능한 함대사령관이자 킹의 몇 안되는 오랜 친구 중의 한 사람인 파이 중장을 워싱턴에 보내어 킹 제독을 설득하는 한편 휘하 참모들을 소집하여 킹 제독을 만족시킬 작전계획을 구상했다.

2월 10일에 열린 이 회의석상에서 일본의 수도인 도꾜를 공습하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북태평양의 기후가 험하여 해상급유가 곤란하고 무엇보다 효과에 비하여 위험이 지나치게 크다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이 회의에서 이리저리 의견을 모은 끝에 엔터프라이즈와 요크타운을 합쳐 1개의 기동부대를 편성하여 핼시 중장의 지휘 하에 웨이크 섬과 Eniwetok 환초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니미츠 제독은 공격에 구형전함을 사용하라는 킹의 지시에는 끝까지 반대했다.

핼시 중장은 웨이크 섬과 에니웨톡 환초를 공격한다는 작전 계획 자체와 자신이 공격부대의 지휘를 맡는다는 점에 대해서는 아무 이의도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지휘할 부대의 이름이 제13기동부대이고, 진주만을 출항하는 날짜가 하필이면 2월 13일 금요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불같이 화를 냈다.
그는 태평양함대사령부를 발칵 뒤집어 놓을 심산으로 역시 불같은 성격으로 유명한 자신의 참모장 브라우닝 대령을 사령부로 보냈다.
브라우닝 대령이 사령부 작전실에 들어와서 큰 소리로 항의하자 미신을 전혀 믿지 않는 태평양함대의 작전참모인 맥모리스 대령은 속으로 무척 아니꼽게 생각했다.

 

하지만, 위험한 임무를 앞둔 기동부대 장병들의 정서를 고려하여 기동부대 이름을 제16기동부대(TF16)로 바꾸고 유조선의 도착이 늦어진다는 구실을 붙여 출항일을 예정보다 하루 늦춘 2월14일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엔터프라이즈 기동부대는 1943년에 대규모의 항모기동부대인 제58기동부대에 흡수되기 전까지 제16기동부대로서 미드웨이 해전을 비롯한 여러 해전사에 그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1942년 2월14일, 제16기동부대가 웨이크 섬 공격임무를 띄고 진주만을 출항했다. 

다음날인 2월 15일에 킹 제독이 진주만으로 전보를 보내왔다.
파이 중장의 설득과 웨이크 섬을 공격하려는 태평양함대 사령부의 행동 덕분에 마음이 좀 풀린 킹 제독은 지난번처럼 강력하게 공격을 촉구하지는 않았으나 항모기동부대 하나를 ANZAC 지역에 가까운 칸톤 부근에 배치하라고 요구했다.
그 요구에 따라 다음날인 2월 16일에 요크타운은 따로 제17기동부대를 편성하여 칸톤으로 떠났다.

이제 항공모함 세력이 엔터프라이즈 한 척으로 줄어든  제16기동부대는 에니웨톡 환초를 공격 목표에서 제외했다.

2월24일, 엔터프라이즈는 합계 49대로 이루어진 공격대를 내보내어 웨이크 섬을 폭격했다.
마셜제도 공격 때와 마찬가지로 스프루언스 제독이 2척의 중순양함(노댐턴, 솔트레이크시티)과 2척의 구축함(Benham, Mauri)을 이끌고 함포사격을 가하기 위하여 웨이크 섬에 접근했다.

이 함정들은 웨이크 섬 전방 33km 지점에서 적의 전투기들에 의하여 공습을 받았으나 다행히 아무 피해도 입지 않았다.

10시 5분, 스프루언스 제독의 함정들이 포격을 시작했다.
10시 8분, 엔터프라이즈에서 출격한 49대의 함재기들이 폭격을 시작했다.
공격할 목표 자체가 거의 없었던 탓에 전과는 미미했다.

 

(웨이크 섬 상공에서 촬영한 제6뇌격비행대 소속 데버스테이터 뇌격기. 폭격을 마치고, 귀환 중인 장면)

 

다음날인 2월 25일에 핼시 제독은 진주만으로부터 도꾜 남쪽 1,800km 에 있는 Marcus 섬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16기동부대는 이 명령에 따라 서쪽으로 항진하기 시작했다.

2월 28일, 마르쿠스 섬을 포격할 임무를 띠고 중순양함 2척을 기간으로 하는 스프루언스 제독의 부대가 또다시 제16기동부대에서 분리되어 전방으로 나섰다.

 

제16기동부대는 3월 4일에 마르쿠스 섬을 폭격했다.
이 폭격은 완전히 기습을 달성하여 공격대의 피해는 돈틀레스 한 대에 지나지 않았다.  

폭격을 마치고 돌아온 항공기들을 수용한 제16기동부대는 다음 날인 3월 5일, 스프루언스 제독의 수상함 부대와 합류했고 5일 후인 3월 10일에 진주만으로 돌아왔다.

 

(엔터프라이즈의 비행갑판에 놓여있는 제6전투비행대 소속의 와일드캣 전투기들. 마르쿠스 섬 폭격 직후에 촬영한 사진)

 

이번 웨이크 섬과 마르쿠스 섬에 대한 공격은 아군의 피해도 돈틀레스 2대로 가벼웠지만 전과 또한 빈약하기 짝이 없어서 겨우 적의 소형초계정 1척을 격침시켰을 뿐이었다.

이 공격에 참가했던 미해군의 어느 장교는

'일본군은 개가 벼룩을 생각하는 정도로 밖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고 자조했다.

결국 이 웨이크 섬과 마르쿠스 섬에 대한 공격은 -사실 마셜 제도 공격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동남아시아 지역에서의 일본군의 진격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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