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4월 중순경, 킹 제독이 태평양함대 사령부의 로슈포트 소령에게 향후 일본해군의 전략방향에 관한 정보평가를 요구했다.
로슈포트 소령은 주로 일본군의 무선통신을 해독하여 얻은 정보들을 중심으로 분석하여 다음과 같은 4가지의 요점을 담은 보고서를 제출했다.
(1)일본함대는 인도양에서의 작전을 완료하고 본국기지로 철수하는 중이다.
(2)오스트레일리아를 공격하려는 계획은 가지고 있지 않다.
(3)뉴기니아 동쪽 끝부분을 차지하려는 작전을 곧 시작할 것이다.
(4)이러한 움직임 이후 그들은 태평양에서 훨씬 대규모의 작전을 전개할 것인데, 이 작전에는 일본 연합함대의 대부분이 참가할 것이다.
1942년 4월 25일, 둘리틀 공격대 발진 임무를 무사히 마친 제16기동부대가 진주만에 입항했다.
핼시 제독 이하 장병들은 모두 휴가를 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들에게는 보급과 함의 정비를 위한 5일간의 기간이 주어졌을 뿐이었다.
4월 30일, 제16기동부대는 일본해군의 포트모레스비 공략을 저지하려는 요크타운과 렉싱턴을 지원하기 위하여 진주만을 떠나 산호해로 발길을 재촉했다.
진주만과 산호해 사이의 5,600km 라는 거리를 생각해볼 때 제16기동부대가 시일 내에 도착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지만 일본군의 진격이 예상보다 늦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산호해 해전은 제16기동부대가 전투 해역에 도달하기 하루 전인 5월 8일에 끝나버렸다. 산호해 해전은 사상 최초의 함대항공전이자 엔터프라이즈가 참가하지 않은 유일한 함대항공전이었다.
이 해전은 전술적인 면에서는 일본해군의 판정승이었다.
일본해군은 경항공모함 쇼호를 잃었고 정규항공모함 쇼가꾸가 큰 피해를 입었지만, 미국의 대형항공모함인 렉싱턴을 격침시켰고, 또한 요크타운에게 쇼가꾸보다 더 심한 피해를 입혔다.
(산호해 해전에서 격침되는 미국항공모함 렉싱턴 CV-2)
하지만 일본측 사령관이었던 이노우에 제독이 포트모레스비 공략을 중지시킴으로써 일본은 개전이래 처음으로 연합군에 의해 진격이 저지되었다.
따라서, 전략적으로는 포트모레스비 방어라는 작전 목적을 달성한 미국의 승리라고 볼 수도 있다.
(산호해 해전에서 격침되는 일본의 경항공모함 쇼호. 렉싱턴의 함재기가 찍은 사진)
산호해 해전이 끝난 직후 제16기동부대는 북상하여 오션 섬과 나우루 섬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북상 도중 5월 14일에 니미츠 제독으로부터 묘한 명령을 받았다.
그 내용인즉슨
핼시 제독에게 제16기동부대를 이끌고 일본군의 툴라기 기지 전방 900km 까지 다가가서 적의 정찰기에게 일부러 발각되라는 것이었다.
핼시 제독은 이 명령에 숨은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했고, 그대로 실행했다.
다음 날인 5월 15일, 툴라기에 접근하던 엔터프라이즈의 레이더가 110km 전방에서 일본정찰기를 포착했으나 일부러 접근을 허용했다.
잠시후 엔터프라이즈의 통신실에서 이 정찰기가 무선보고를 보내는 것을 탐지했다.
그때서야 와일드캣이 급히 이함하여 이 정찰기를 추격하였으나 이미 격추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엔터프라이즈의 통신실에서는 다시 이 정찰기가 긴 통신을 보내는 것을 탐지했다.
이제 두 척의 항모를 보유한 제16기동부대의 존재가 일본해군에게 확실하게 알려졌다고 판단한 핼시 중장은 그때서야 침로를 돌렸다.
다음 날인 5월 16일, 제16기동부대는 적에게 들키지 않게 최대한 빨리 진주만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정보보고를 통하여 6월 초에 중부태평양에서 일본연합함대의 대공세가 있을 것을 이미 알고 있던 니미츠 제독은 이런 속임수로 일본해군에게 미해군이 일본연합함대의 의도를 전혀 모르고 있으며, 일본해군의 다음 목표가 남태평양 지역일 것으로 예상하여 남아있던 미태평양함대의 항공모함들을 몽땅 남태평양에 투입했다는 인상을 주고 싶어했다.
실제로 일본해군은 이런 간단한 속임수에 그대로 걸려들어서 3주 후에 벌어진 미드웨이 해전에서 치명적인 판단미스를 범하게 된다.
즉 산호해 해전에서 렉싱턴 뿐만 아니라 요크타운까지 격침했다고 믿고있던 일본해군은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후인 5월 15일에 미태평양 함대의 잔존항모 2척이 모두 남태평양에서 작전 중인 것을 확인하자 미국은 미드웨이를 공격하려는 연합함대의 의도를 전혀 모르고 있다고 판단했으며, 따라서 나구모 제독은 미드웨이 해전 당일까지도 미드웨이 근해에는 미국항공모함이 없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실제로 전투도 없이 오션 섬과 나우루 섬을 일본군으로부터 지키는 부수적인 효과도 가져왔다.
즉 이 섬들을 공략하기 위한 함대가 5월 10일에 트럭제도를 출발했으나, 미국항모 2척이 모두 남태평양에 있다는 것을 알게되자 작전을 중지하고 다시 돌아가 버렸다.
남태평양에서 돌아온 제16기동부대는 5월26일에 진주만에 입항했다.
니미츠 제독은 소형보트를 타고 상륙한 핼시 중장을 보는 순간 충격을 받았다.
핼시 중장은 비록 웃고 있었으나 얼굴에는 초췌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몸무게가 거의 10kg 이나 빠졌고, 피부에는 악성 건선이 생겨 진물이 줄줄 흘러서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진주만 기습이래 거의 6개월 동안 상륙한 며칠을 제외하고는 줄곧 해상에서 전투를 지휘하며, 긴장된 생활을 했으니 어쩌면 병이 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핼시 중장은 다가오는 전투에서 자신이 항모기동부대의 지휘를 맡고 싶어했고, 니미츠 제독도 그러기를 원했지만 군의관은 핼시 중장의 모습을 보자마자 팔을 내저으며 즉시 입원명령을 내렸다.
다음날인 5월27일, 입원을 앞둔 핼시 제독은 사령부를 방문하여 니미츠 제독에게 자신의 후임으로 제16기동부대의 순양전대장인 Raymond Ames Spruance 소장을 추천했다.
스프루언스 소장은 핼시 중장과는 여러모로 대조적인 인물이었다.
핼시 중장이 조종사 재킷을 입고 돌아다니는 것과 달리 스프루언스 소장은 항상 단정하고 규정에 맞는 복장을 하고 있었으며, 핼시 제독이 항공계통에서 경력을 쌓아온 것과 달리 스프루언스 소장은 수상함 계통에서만 경력을 쌓아왔다.
핼시 중장이 불같은 성격의 공격적인 지휘관이라면, 스프루언스 소장은 냉정하고 빈틈없는 지휘관이었다.
그러나, 핼시 중장은 스프루언스 소장의 정확한 판단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고, 또한 그가 개전이래 순양전대장으로서 줄곧 핼시 중장과 같이 작전하여 브라우닝 대령을 비롯한 제16기동부대의 참모들과도 익숙한 사이인 만큼 그들의 협조를 얻으면 항공관계 경력이 전혀 없다는 약점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니미츠 제독 또한 스프루언스 소장의 자질을 높이 평가하여, 이미 그를 자신의 참모장으로 삼고 싶다고 킹 제독에게 요청해 둔 상태였다.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
이때 처음으로 항모기동부대의 지휘를 맡은 스프루언스 소장은 1주일 후에 벌어진 미드웨이 해전에서 대승함으로써 입지를 확고하게 굳혔고, 미드웨이 해전 직후인 1942년 6월 30일부터 태평양함대의 참모장이 되어서 1년 동안 니미츠 제독과 찰떡궁합을 과시했다.
그리고,1943년 8월 5일에 태평양함대의 주력전투함들을 거의 망라한 제5함대가 창설되자 태평양함대 내에서 최고의 요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거대한 전투함대의 사령관직을 맡으면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스프루언스 제독은 핼시 제독과 비교하여 볼 때 대규모의 부대를 지휘하면서 수많은 부하들을 확고하게 장악하여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그들의 재능과 충성심을 최대한 이끌어내는 능력이나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안목으로 전쟁 전체의 흐름을 판단하고 그에 따라서 적절한 행동을 취하는 등의 능력은 확실히 핼시 제독에 비하여 좀 부족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대규모의 함대를 일사불란하게 지휘하고 전장에서 어차피 부족할 수밖에 없는 정보를 가지고도 상황을 재빨리 판단하여 시의적절하게 정확한 결정을 내리고 실행하는 전술적 능력에서는 오히려 핼시 제독보다 한수 위였다.
스프루언스 제독은 제5함대 사령관이 된 이후에도 전장에서 부딪히는 중요한 결단의 순간마다 신기하리만큼 정확한 판단력을 보여주었다.
필리핀해전 같은 경우 해전의 초기 단계에서 적을 찾아 적극적으로 서쪽으로 나가지 않고 미군의 상륙지점 부근에서 요격전에만 전념했던 전술적 판단에 대하여 전쟁을 최소한 6개월 이상 빨리 끝낼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다고 태평양전쟁의 나머지 기간 중 내내 태평양함대의 항공관계자들에게 비난을 받았고, 그 자신도 스스로의 판단에 확신을 못 가졌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일본측 자료를 검토한 결과는 당시 요격에 전념한 그의 판단이 최상의 것이었음을 증명했다.
1942년 5월 27일, 산호해 해전에서 대파된 요크타운이 18km에 걸쳐 기름을 흘리면서 진주만에 입항했다.
요크타운에 승함하고 있던 피치 제독은 귀환 중에 요크타운의 수리에 90일 가량이 걸릴 것이라고 보고했다.
요크타운은 진주만에 입항하자마자 제1번 드라이독으로 직행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드라이독의 물이 완전히 빠지기도 전에 니미츠 제독이 긴 부츠를 신고 검사관과 동행하여 요크타운을 직접 검사했다.
니미츠 제독은 초급장교 시절 엔지니어였고, 미해군 내에서 선박용 디젤기관의 최고권위자 중의 한 사람이었으므로 이런 행동은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그냥 남에게 보이기 위한 요식행위는 아니었다.
(산호해 해전에서 돌아온 요크타운 CV-5. 진주만에 입항한 직후의 모습)
니미츠 제독은 90일이라는 긴 시간을 들여 요크타운을 완전히 수리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단지 전투에 참가할 수 있을 정도로만 고치면 되는데 요크타운을 직접 검사해보고는 그러려면 훨씬 적은 시간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무엇보다도 요크타운은 동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수리에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엘리베이터도 정상작동하고 있었다.
나무로 된 비행갑판은 귀환하면서 이미 수리되어 있었고, 폭탄이 떨어진 부분은 목재로 임시보강을 하면 되었다.
니미츠 제독은 검사를 마친 직후 함정수리 담당관에게 3일 내에 요크타운을 전선에 복귀시키도록 명령했다.
즉시 수리작업이 시작되어 출항할 때까지 중단없이 계속되었다.
5월28일, 귀항한 지 불과 이틀만에 제16기동함대는 진주만을 출항했다.
5월 29일 오전 11시, 요크타운이 드라이독에서 나와 진주만에 들어왔는데 함내에서는 여전히 수리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5월 30일 아침, 니미츠 제독이 출동을 앞둔 요크타운에 승함하여 플레처 소장 이하 장병들을 격려하고 기록적인 시간 내에 수리를 완료한 기술자들에게 치하를 하는 그 순간까지도 막바지 수리가 진행되고 있었다.
마지막 기술자들은 니미츠 제독이 이함하고, 요크타운의 엔진이 가동된 이후에야 이함했다.
요크타운 중심의 제17기동부대는 곧 진주만을 출항하여 제16기동부대와의 합류지점인 진주만 북쪽 630km 해상에 있는 행운의 지점’(Point Luck)으로 향했다.
니미츠 제독은 미국항공모함의 이동상황을 탐지하기 위하여 일본의 잠수함들이 미드웨이와 하와이 사이에 전개하기 전에 미리 항모부대를 미드웨이 근해로 파견해 버렸다.
이것 또한 상당히 선견지명이 있었던 행위로서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측이 미국항공모함 부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큰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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