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꾸스이 2호 작전은 4월 12일과 13일에 걸쳐 실시되었다.
가미까제 특공기 200 대와 호위기 및 공격기 192대가 출격했다.
2호 작전에서는 일본의 신형특공기인 사꾸라바나 8기가 출동하여 구축함 에이벨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사꾸라바나는 전장 6.1m, 전폭 5.1m 인 일종의 유익 목제 미사일로서 기수 부분에 1,200kg의 폭약을 적재하고 추력 800kg 짜리 로켓 엔진 3개를 달아서 900km/hr의 고속으로 37km 를 비행할 수 있었다.
사꾸라바나는 베티 육상공격기에 매달려서 목표 근처에 도달하면 모기에서 분리하여 돌입하는 방식이었는데, 빠른 속력과 강력한 파괴력에 더하여 생산의 용이성 때문에 궁극의 특공병기로서 많은 기대를 모았으나 실제 전과는 상당히 부진하여 이날 격침한 에이벨이 유일한 격침 전과이다.
사꾸라바나의 전과가 부진했던 이유는

첫째로 모기인 베티 육상공격기가 목표에 접근하기 전에 대부분 격추되어 버렸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사꾸라바나가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한 고속인데다가 조종하기가 꽤 까다로운 편이었는데 기체의 용도상 조종사들이 한번도 실제로 몰아볼 기회를 가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안 그래도 미숙한 가미까제 조종사가 다루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쿠라바나.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43747583 )

 

기꾸스이 2호 작전에서 가미까제 특공기들은 에이벨을 격침하고, 구형전함 테네시를 비롯한 18척에 피해를 입혔다.
미군은 2호 작전에 참가한 일본기들을 거의 다 격추하는데 성공했다.
 
한편 제21폭격사령부의 사령관인 르메이 소장은 기꾸스이 2호 작전이 끝나자 다시 한번 니미츠 제독을 찾아가 자신의 B-29 들을 비행장 공격에서 빼달라고 요청했으나 또 거절당했다.
그러자 르메이 소장은 워싱턴의 아놀드 원수에게 직접 호소했다.
아놀드 원수가 이 문제에 대하여 킹 제독에게 불평하자 킹 제독은
 
“지금 육군항공대가 해군을 돕지 않겠다면 해군은 오끼나와에서 철수할 테니까 앞으로 그 섬의 보급 문제는 육군이 알아서 처리해야 할 것”
 
이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킹 제독이 이런 식으로 나오자 아놀드 원수는 이후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르메이 소장은 워싱턴에서 좋은 소식이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정작 날아온 것은
 
“제21폭격사령부의 최우선 과제는 해군을 도와서 일본군의 비행장을 무력화시키는 일” 
 

이라고 명시한 통합참모본부의 4월 18일자 명령서였다.
르메이 소장은 5월 5일에 같은 내용의 명령서를 한번 더 받아야 했다.
이제 제21폭격사령부로서는 일본군 비행장에 대한 폭격을 계속할 수 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기꾸스이 3호 작전은 4월 16일과 17일에 실시되었는데 특공기 192대와 호위기 및 공격기 306대가 참가했으며, 기꾸스이 4호 작전은 4월 26일과 27일에 걸쳐 실시되어 115대의 특공기를 포함한 150여대의 일본기가 참가하여 10척의 함정에게 피해를 입혔으나 격침된 함정은 없었다.
 
기꾸스이 5호 작전은 제32군의 역습에 발맞추어 5월 4일과 5일에 실시되었는데 159대의 가미까제 특공기가 참가하여 구축함 3척과 LSM 1척을 격침하고, 호위항모 생가몬과 경순양함 버밍햄을 비롯한 10척의 함정에 피해를 입혀서 450 여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이날 슈리 방어선 전면에서 실시된 제32군의 역습은 일본군에게 남아있던 포병화력의 절반인 59문의 화포를 상실하고, 병력의 15% 에 해당하는 6,000 여명의 전사자를 기록하면서 이틀 만에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기꾸스이 6호 작전은 5월 11일에 실시되었는데 이 작전에서 일본의 가미까제 특공기들은 미처 제독의 기함 벙커힐을 대파했다.
11일 오전 10시 5분에 제로기 1대가 벙커힐의 비행갑판에 격돌했고, 30초 뒤에 주디 급강하폭격기 1대가 사령탑 기부에 격돌했다.
비행갑판에 30대, 격납고 갑판에 48대의 함재기가 무장과 연료를 만재한 상태로 대기 중이던 벙커힐에서는 즉각 엄청난 유폭이 이어지면서 치명적인 화재가 발생했다.
우수한 손상관리시스템과 손상관리요원들의 6시간에 걸친 사투 덕분에 벙커힐은 겨우 화재를 진압할 수 있었으나, 396명의 승무원이 전사하는 치명적 피해를 입고 태평양 전쟁에서 물러나야 했다.
미처 제독은 사령기를 엔터프라이즈로 옮겨 달았다. 

 

(가미카제 기에 피격당한 직후 벙커힐의 모습)

 

같은 날 니미츠 제독은 르메이 장군에 대하여 따뜻한 감사의 말을 전하면서 B-29들을 비행장 공격임무에서 풀어주었다.
르메이 장군은 일본의 비행기 엔진 공장을 전부 박살낼 수 있을 시간에 효과도 미미한 비행장 공격에 붙잡혀 있었다면서 왜 니미츠 제독이 자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툴툴대었지만 사실 제21폭격사령부는 해군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즉 제58기동부대는 3월 19일 이후 비행장 제압 작전은 중지했고, 3월 23일부터는 오끼나와 폭격에 전념했으며 일단 4월 6일부터 일본군의 대규모 가미까제 공격인 기꾸스이 작전이 시작되자 제5함대의 상공을 지키는 임무만으로도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이어서 기꾸스이 작전의 기세가 어느 정도 수그러진 5월 초까지 비행장 제압 같은 것은 꿈도 못 꿀 형편이었다.

 

따라서 가미까제 특공기들이 출격하는 비행장을 공격하는 일은 거의 제21폭격사령부 소속의 B-29들이 담당해야 했는데 이들은 처음에는 규슈 남부의 주요 비행장 17개를 목표로 했었으나 기꾸스이 1호 작전이 실시된 4월 6일 이후에는 니미츠 제독의 요청에 의하여 규슈와 시코쿠의 45개 주요 비행장 전부를 목표로 삼아서 공격을 가했다.
그리하여 제21폭격사령부의 B-29들은 3월26일부터 5월 11까지 이들 일본군 비행장에 6,000톤 이 넘는 폭탄을 퍼부어서 400 여대의 일본 항공기들을 파괴하고 비행장의 활주로와 항공기 정비 및 수리시설 등에 커다란 피해를 입혀서 결과적으로 일본의 특공작전인 기꾸스이 작전에 투입된 가미까제 특공기의 숫자를 상당히 줄였다.

 

사실 10회에 걸친 기꾸스이 작전기간 동안 출격한 가미까제 특공기의 숫자는 1,465 대로서 당초 계획인 4,500 대의 1/3에도 못 미치는 숫자였으며 기꾸스이 작전 기간 중에 우가끼 중장이 실제로 확보하는데 성공한 3,000 여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숫자였다.
이들 중의 일부는 3월 18일부터 22일까지 제58기동부대에 의하여 격추되거나 지상에서 파괴되었겠지만 대부분은 B-29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되거나 손상되거나 또는 활주로와 정비시설의 피해로 인하여 기꾸스이 작전에 참가하지 못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제21폭격사령부의 B-29들은 1945년 3월 26일부터 5월 11일까지의 7주 동안 규슈의 일본군 비행장에 6,000 톤 이상의 폭탄을 퍼부어서 가미까제 특공기들의 행동을 제약, 기꾸스이 작전에 실제로 참가한 기체의 수량을 절반 이하로 떨어뜨림으로써 최소한 100 척 이상되는 함정들의 피해를 막아주어, 해군장병들의 목숨을 1,000 명 이상 구해주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B-29 슈퍼 포트레스 폭격기.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rectek2/10046607334 )
 
5월 12일과 13일에 엔터프라이즈는 규슈의 일본군 비행장과 항만 시설에 대하여 야간공격을 실시했다.
제58기동부대로서는 3월 19일의 구레군항 폭격 이래 실로 8주만에 재개되는 규슈 공격이었다.
5월 14일 오전 3시 57분, 반격을 위하여 접근하던 일본기 편대가 제58기동부대의 레이더에 잡혔다.
3시간 후인 오전 6시 57분, 엔터프라이즈의 대공포화들이 함의 뒤쪽에서 접근하는 1대의 가미까제 특공기를 겨냥하여 사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가미까제 특공기는 교묘한 기동으로 대공화망을 피하면서 후방으로 접근하여 450m 상공에서 30도의 각도로 강하를 시작, 엔터프라이즈의 후방 180m 지점에 이르자 45도로 급강하하여 전방 엘리베이터의 바로 뒤쪽 약간 좌현 쪽에 충돌했다.
이 가미까제 특공기는 비행갑판에 3.6m x 6m 크기의 구멍을 만들면서 돌입하여 격납고 갑판에서 폭탄과 분리되면서 폭발하였고, 폭탄은 격납고 갑판 바닥을 통과하면서 폭발했다.
이 폭발로 무게가 15톤이나 나가는 전방 엘리베이터가 120m 상공까지 솟구쳤고, 격납고 갑판을 지나가는 청수 파이프가 터져서 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으며, 대량의 전기 케이블이 폭발 당시의 충격에 의하여 끊어지거나 파손된 파이프에서 흘러나온 물에 의하여 침수되어 함의 전기 계통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엔터프라이즈의 손상관리반이 재빨리 대응하여 피해가 확산되는 것을 막는데 성공함으로써 전사자 12명이라는 비교적 적은 피해로 상황을 마무리지었지만 이것으로 엔터프라이즈의 전쟁은 끝났다.
2일 뒤인 5월 16일, 엔터프라이즈는 수리를 위하여 미본토로 출발하여 6월 7일에 퓨젯 사운드 해군 조선소에 도착했다.

 

(엔터프라이즈가 가미카제 기에 피격당하는 순간. 엔터프라이즈의 제1번 엘리베이터가 120m 높이에 이르는 불기둥의 끝에 마치 올라앉은듯이 보인다. 1945년 5월 14일)
 
엔터프라이즈가 떠난 이후에도 오끼나와 전투는 계속되었으며 일본군의 기꾸스이 작전도 계속되어 7호가 24,25일에, 8호가 27,28 일에 실시되었으며 마지막 10호는 6월 22일에 실시되었다.
그동안 오끼나와에 상륙한 육군과 해병대도 사령관인 버크너 중장이 전사하는 등의 악전고투를 겪은 끝에 6월 23일에 섬을 완전히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오끼나와 전투에서 미군이 입은 피해는 상당했다.
육군제77사단이 게라마 열도에 상륙한 3월 26일부터 6월 30일까지 제10군은 7,374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동안 해군은  4,907명의 장병이 전사했는데, 전사자의 절반 가량이 가미까제 특공기의 격돌에 의한 것으로 추산된다.
따라서 오끼나와에서 전사한 미군의 숫자는 합계 12,281 명에 달했다.
함정 피해도 상당하여 36척의 함선이 침몰하고, 368척이 피해를 입었는데 이 중에서 가미까제 특공에 의하여 침몰한 함선은 26척, 피해를 입은 함선은 164척이다.
항공기 손실은 영국해군의 98대를 포함하여 763대이다.
 
같은 기간동안 일본군의 손실은 미군보다 훨씬 컸다.
1945년 3월 26일에서 6월 30일까지의 기간 동안 일본군의 전사자 숫자는 110,071 명이며, 포로는 10,755 명인데, 전사자 숫자에는 미군의 포격과 폭격에 희생되거나, 일본군과 미군과의 전투에 휘말려서 희생된 20,000 명 정도의 오끼나와 민간인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오끼나와 전투에서는 민간인의 피해도 적지 않았는데 최소한 52,000 명 이상의 민간인들이 치열한 전투의 와중에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
일본해군은 대형전함 야마또를 비롯한 16척의 함선이 격침되고, 4척이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의 항공기 손실은 총 7,830 대로서, 육군기 3,605대와 해군기 4,225 대이다.
이들 중 가미까제 특공기는 총 1,900 대로서 육군기 850대, 해군기 1,050 대이다.
가미까제 특공기 중에서 기꾸스이 작전에 참가한 항공기는 1,465 대이며, 185대는 기꾸스이 작전 기간의 중간중간에 개별적으로 출격했고, 250대는 대만에서 출격했다.
가미까제 특공기가 격돌한 함정은 총 190 척이지만 1척에 2대 이상의 특공기가 격돌한 경우도 많기 때문에 실제로 공격에 성공한 특공기의 숫자는 약 280 대 정도로 추정된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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