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이 마리애나 제도를 점령하기까지의 과정에서 강력한 일본군 기지였던 트럭 환초와 팔라우 제도를 공격하여 무력화시키는데 성공하자 통합참모본부에서는 전쟁을 더 빨리 진행시키기 위하여 전략을 재검토했다.
통합참모본부가 내놓은 안 중 가장 대담한 계획은 마리애나 제도에서 항공모함의 엄호 하에 이오지마가 있는 보닌제도로 북상한 후 그곳을 발판으로 삼아 바로 일본본토를 침공한다는 것이었다.
니미츠 제독과 맥아더 장군은 둘 다 이러한 위험천만한 계획에 반대했다.
맥아더 장군은 보겔캅 반도와 모로타이를 경유하여 민다나오 섬과 레이테 섬에 상륙한 후 루존 섬에 상륙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니미츠 제독의 계획은 레이테 섬까지는 진공하되 루존 섬은 우회하여 대만과 중국 연안 또는 오끼나와를 거쳐 규슈와 혼슈 방향으로 북진한다는 것이었다.
통합참모본부는 또다시 조정에 실패하여 일단 1944년 12월 20일에 레이테 섬에 상륙한다는 것까지만 정해놓고 다음에 루존에 상륙할 것인지, 대만으로 갈 것인지는 나중에 결정하기로 했다.
레이테 상륙 이전까지 태평양 함대는 팔라우 제도의 펠렐류 섬과 앙가우르 섬, 야프 환초와 울리시 환초를 점령하기로 되어 있었다.
남서태평양해역군은 뉴기니아와 민다나오 중간에 있는 모로타이, 탈라우드 섬을 거쳐 민다나오 섬에 상륙한 후 태평양함대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중부 필리핀의 레이테 섬에 상륙하기로 되어 있었다.
1944년 8월 26일에 제58기동부대에서 제38기동부대로 이름이 바뀐 고속항공모함 기동부대는 29일에 보닌 제도와 팔라우 제도, 야프 섬을 폭격하기 위하여 에니웨톡 환초를 떠났다.
제5함대의 사령관이 스프루언스 제독에서 핼시 제독으로 바뀌면서 제3함대로 이름이 바뀌었고, 그에 따라 제58기동부대는 제38기동부대로, 제5상륙작전 부대는 제3상륙작전 부대로, 제5상륙군단은 제3상륙군단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전투함대의 사령관을 해임조치가 아닌 사유로 주기적으로 교체하는 태평양함대의 이러한 독특한 방식은 1944년 5월 5일과 6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니미츠와 킹의 회담에서 해군본부의 작전참모인 쿠크 소장이 제안한 것으로 이제 수비군의 위치로 전락한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인 핼시 제독의 능력을 활용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실제로 이 방식은 훌륭하게 작동했다.
태평양함대가 이러한 방식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대규모의 전투함대를 훌륭하게 지휘할 수 있는 스프루언스 제독과 핼시 제독이라는 걸출한 제독을 2명씩이나 가지는 행운을 누렸기 때문이었다.
1944년 7월 10일에 제8대 함장인 가드너 함장의 뒤를 이은 Thomas J. Hamilton대령을 제9대 함장으로 맞아들인 엔터프라이즈는 진주만에 돌아가서 7월 29일까지 수리를 받고 그 기간동안 새로이 제20비행전대를 받아들였다.
7월 29일에 수리를 마친 엔터프라이즈는 제10대 함장인 Cato D. Glover 대령의 지휘 하에 진주만을 떠나 에니웨톡으로 돌아왔다.
엔터프라이즈는 정규항공모함 프랭클린, 경항공모함 샌야신토, 벨로우드와 함께 Ralph E. Davison 소장의 지휘 하에 제38.4전단을 형성한 후 다른 전단들과 헤어져 북상, 보닌제도를 폭격했다.
제38.4전단은 8월 31일부터 9월 3일까지 매일 보닌제도의 이오지마와 치치지마를 폭격하여 비행장을 비롯한 지상시설에 심각한 피해를 입히고, 2척의 수송선을 격침했다.
9월4일에 남하하여 사이판 근해에서 급유를 받은 제38.4전단은 9월 5일에 사이판을 떠나 제38기동부대에 합류했다.
제38기동부대는 9월 6일부터 8일까지 팔라우 제도를 폭격했다.
9월6일에 핼시 제독의 기함인 고속전함 뉴저지가 제38.2전단에 합류했다.
제38기동부대는 9월8일에 민다나오 섬을 폭격하기 위하여 팔라우 제도를 떠났다.
제38.4전단은 9월 15일에 실시되는 펠렐류 섬 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이 지역에 남았다.
제38기동부대는 9월 9일과 10일 양일간에 걸쳐 민다나오 섬과 다바오 섬을 폭격하여 이 지역의 비행장에 피해를 입히고 6척의 수송선을 격침했다.
9월 11일에 해상에서 연료보급을 받은 제38기동부대는 9월 12일부터 14일까지 중부 필리핀의 비사얀, 세부, 네그로스 섬 등지를 맹폭하여 지상의 비행장에 큰 피해를 입히고 20척의 수송선을 격침했다.
이 공격에 대한 일본군의 저항은 미약했으며 또한 해상에 추락했다가 부근의 어민에게 구조된 조종사가 레이테 만에는 일본군이 없다는 말을 어민에게 듣고서 핼시 제독에게 보고해왔다.
핼시 제독은 이 지역의 일본군이 완전 무방비 상태라는 결론을 내리고 니미츠 제독에게 전보를 보내어 이미 결정된 상륙작전들을 미루고 대신 12월 20일로 예정된 레이테 섬 상륙을 앞당기자고 제안했다.
니미츠 제독은 이미 결정된 상륙작전 중 팔라우 제도와 울리시에 대한 작전은 취소하지 않았다.
그러나, 야프 상륙작전에 쓰일 제3상륙작전부대와 육군제2군단을 제38기동부대를 제외한 제3함대의 모든 함정들과 함께 남서태평양해역군에 넘겨서 레이테 상륙을 앞당겨 실시하면 어떻겠느냐 하는 제안을 9월 11일부터 퀘벡에서 미영 정상회담을 하고 있던 통합참모본부로 보냈다.
자체적으로 필리핀에 대한 정보망을 가지고 있던 남서태평양해역군에서는 레이테에 일본군이 없다는 핼시 제독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지만 제3함대가 전폭적으로 지원해 준다면 레이테 상륙을 조기에 실시하는데 찬성했다.
그리하여 레이테 상륙은 원래 예정되었던 12월 20일에서 두달 앞당겨진 10월 20일에 실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원래 제5함대가 제3함대로 바뀌면서 제5함대 사령관 뿐 아니라 제58기동부대 사령관, 제5상륙부대 사령관, 제5상륙군단장 등도 모두 교체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1943년 8월부터 사령관을 맡아온 다른 지휘관들과 달리 미처 제독만은 1944년 1월부터 제58기동부대의 지휘를 맡았다는 이유로 레이테 상륙이 끝난 후인 10월 30일에 맥케인 제독과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랬지만 진짜 이유는 남서태평양해역군의 레이테 상륙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제38기동부대가 만에 하나 커다란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맥아더 장군 앞에서 태평양함대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대규모의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다루는 능력이 아직 검증되지 않은 맥케인 제독에게 맡기는 모험을 감수하는 것보다 지난 8개월 동안 이미 실력이 충분히 검증된 미처 제독에게 이 중요한 일을 맡기는 것이 좋겠다는 공감대가 태평양함대의 수뇌부 사이에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불과 8개월 전 마셜 작전에 실패하면 사령관 자리에서 쫓겨난다는 조건 하에 전임 사령관인 파우널 제독이 제5함대 사령관 스프루언스 제독의 항공관계 고문이라는 직함을 달고 해상까지 따라나와서 버티고 있는 굴욕적인 상황에서 제58기동부대의 지휘를 시작했던 미처 제독으로서는 실로 감개가 무량한 일이었다.
맥케인 제독은 이번 작전에서 5척의 항공모함으로 구성되어 제38기동부대의 4개 전단 중에서 단연 가장 강력한 전력을 가진 제38.1전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제38.1전단은 9월 13일 오후에 남서태평양해역군의 모로타이 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제38기동부대를 떠났고, 14일에는 남하하는 도중 다바오를 폭격하여 비행장 시설에 피해를 입히고 소형함정 1척을 격침한 후 모로타이에 도착하여 15일에 실시된 모로타이 상륙작전을 지원했다.
15일에는 동쪽의 팔라우에서도 상륙작전이 실시되어 이 지역에 남아있던 제38.4전단의 지원 하에 앙가우르에 육군제81사단의 2개 연대가 상륙하여 1,600 명 정도의 일본군을 간단히 제압했다.
곧 해군건설대대가 비행장을 만들기 시작하여 10월 17일까지 1,800m 짜리 활주로를 가진 비행장을 건설했다.
간단히 점령된 앙가우르와 달리 펠렐류 섬에 상륙한 해병제1사단은 태평양전쟁에서 가장 힘든 전투 중의 하나를 치루어야 했다.
굴 속에 숨은 1만여명의 일본군을 전멸시키기 위하여 해병제1사단과 앙가우르에서 증원되어 온 육군제81사단이 꼬박 2달 이상 걸려 11월 25일에야 섬을 완전히 점령했다.
미군은 펠렐류 작전에서 약 2,000 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많은 전사자를 내었어도 대부분 그 필요성을 인정받았던 다른 작전들과 달리 이 펠렐류 작전은 그만한 희생을 무릅쓸 가치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펠렐류에서 항공지원을 담당하던 제38.4전단은 18일에 펠렐류를 떠나 21일에 마누스 섬의 시들러 항에 도착했다.
한편 모로타이 상륙작전을 지원했던 제38.1전단이 제38기동부대에 합류하자 19일에 해상에서 급유를 마친 제38기동부대는 20일부터 24일까지 루존 섬을 맹폭하여 니콜스 비행장과 클라크 비행장에 큰 피해를 입히고 마닐라 항과 수빅 만, 그리고 루존 섬 근해에서 구축함 1척, 소형함정 11척, 유조선 12척, 수송선 29척을 격침했다.
23일에는 육군의 1개 연대가 무방비 상태의 울리시 환초에 상륙하여 30 x 15 km 이상의 크기를 가지고 700 척 이상이 정박할 수 있는 세계에서 4번째로 거대한 초호를 가진 이곳을 접수했다.
곧 해군건설대대와 지원함대가 몰려와서 이곳을 태평양 함대의 훌륭한 전진기지로 바꾸었다.
24일까지 루존을 공격한 제38기동부대는 보급과 급유를 위하여 제38.1전단은 시들러 항으로, 제38.2전단과 제38.3전단은 울리시 환초로 각각 철수했다.
21일에 시들러 항에 들어왔던 제38.4전단은 25일에 시들러 항을 떠나 펠렐류 섬의 전투를 지원했다.
보급과 급유를 마친 제38기동부대는 정박지를 떠나 10월 8일에 보닌 제도의 남서쪽에서 집결하여 해상급유를 마친 후 일로 오끼나와를 향하여 항진했다.
제38기동부대는 10월10일에 오끼나와를 공습하여 비행장에 피해를 입히고 나하 항과 오끼나와 근해에서 소형함정 13척과 수송선 16척을 격침했다.
11일 오전에 재급유를 실시한 제38기동부대의 제38.1전단과 제38.4전단은 오후에 제38.2전단과 제38.3 전단이 재급유를 받는 동안 북부 루존을 공격하여 비행장에 피해를 입히고 호위함 1척과 수송선 1척을 격침했다.
제38기동부대는 이어서 12일부터 14일까지 대만을 공격했다.
일본측에서 말하는 대만항공전의 시작이었다.
전투의 양상은 완전히 제38기동부대에 의한 일방적인 학살극에 가까웠다.
제 38기동부대는 12일 하루만에 일본기 230여 대를 파괴하고, 함대급유함 6척과 수송선 12척을 격침했다.
13일에는 일본기도 반격을 가하여 중순양함 캔베라가 어뢰에 맞아서 대파되었다.
제38기동부대는 14일에도 계속하여 대만을 맹타했고 일본기들도 결사적인 반격을 가하여 경순양함 휴스턴이 어뢰 1발에 기관실을 직격당하여 수리를 위하여 울리시로 끌려갔다.
또한 정규항공모함 핸콕과 경순양함 레노가 피격된 상태에서 충돌공격을 감행한 일본기들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
(대만항공전에서 공습을 마치고 착함하는 함재기를 바라보는 엔터프라이즈의 승무원들. 착함 방향의 바로 전면에 많은 항공기와 인원들이 몰려있는 이 사진은 비행갑판의 본질적인 위험성을 잘 보여준다. 1944년 10월 12일)
제38기동부대는 15일에는 루존을 공격했다.
일본기들은 또다시 결사적인 반격을 가하였으나 정규항공모함 프랭클린에 약간의 피해를 입히는데 그쳤다.
제38기동부대는 16일에는 지상공격은 그만두고 해상의 일본함정들을 수색하여 1척을 격침시켰다.
이로써 일본이 대만앞바다의 항공전이라고 부르는 전투가 끝났다.
도꾜방송은 이 전투의 결과에 대하여 항공모함 11척, 전함 2척, 순양함 1척, 기타 13척을 격침하고, 일본기는 312대를 상실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 기간동안 격침된 미국함정은 한 척도 없었으며 다만 중순양함 캔베라와 경순양함 휴스턴이 어뢰에 맞아 대파되고, 정규항공모함 프랭클린과 핸콕, 경순양함 레노, 구축함 2척이 소파되었으며 79대의 항공기가 격추당했다.
일본기의 피해는 다수의 항공모함 함재기를 포함하여 600 여대였다.
대만항공전에서 엔터프라이즈의 제20항공대에서는 3명이 전사하고 4명이 포로가 되었는데 그 중의 2명은 1945년 6월 19일에 처형되었다.
'엔터프라이즈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엔터프라이즈 이야기(43)-레이테 해전(2) (0) | 2018.01.09 |
---|---|
엔터프라이즈 이야기(42)-레이테 해전(1) (0) | 2018.01.09 |
엔터프라이즈 이야기(40)-필리핀해 해전(2) (0) | 2018.01.08 |
엔터프라이즈 이야기(39)-필리핀해 해전(1) (0) | 2018.01.07 |
엔터프라이즈 이야기(38)-1944.2.17 – 6.6 (0) | 2018.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