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애투 섬 포격 

 

1943년 2월 중순 경에 잠수함 S-28이 애투섬으로 향하는 일본선단을 확인하고 보고했다.

북태평양군 사령관 토머스 킨케이드 소장은 전투함대를 지휘하던 찰스 맥모리스 소장에게 함대를 이끌고 가서 애투섬을 포격하고 일본선단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경순양함 리치먼드에 승좌한 맥모리스 제독은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 및 구축함 4척을 이끌고 2월 18일에 정오 경에 북쪽으로부터 애투섬에 접근했다.

알류샨 열도에서는 드물게 애투 섬의 날씨는 맑았다. 

 

(애투 섬)

 

미함대는 단종진을 형성하고 오른쪽으로 홀츠 만을 보면서 서서히 남동쪽으로 항진했는데 홀츠 만과 치차고프 항에는 일본 선박이 없었다.

오후 2시 50분에 치차고프 항의 동쪽에서 180도 변침한 미함대는 이번에는 치차고프 항을 왼쪽으로 보면서 북상했다.

일본군의 주둔지인 치차고프항 주위는 위장을 잘 해서 함상에서는 하얀 눈 밖에 보이지 않았다.

탄착관측기들은 버려진 참호와 포좌를 발견했을 뿐이었으나 앞선 항공정찰의 결과로는 여기에 일본군의 기지가 있는 것이 확실했다.

맥모리스 소장은 포격을 명령했고 이어서 일제사격이 가해졌으나 일본군의 반격은 전혀 없었다.

홀츠만 북쪽에 도달한 미함대는 다시 180도 전환하여 이번에는 해안에 바짝 접근하여 우현으로 일제사격을 가했는데 역시 일본군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남하하면서 홀츠만 및 치차고프항 주위를 포격한 미함대는 오후 4시 37분에 포격을 마치고 북서쪽으로 물러갔다.

이날의 포격으로 애투 섬에서는 23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건물 1동이 부서졌다.

 

애투섬 포격을 마친 맥모리스 소장은 함대를 둘로 나누어 애투섬으로 접근 중이라고 알려진 일본선박들을 수색했다.

인디애나폴리스의 함장 비틀라실 대령은 구축함 코글란 및 길레스피와 함께 애투섬 남서쪽 190km 해상에 초계선을 폈다.

그날 밤에 인디애나폴리스는  탄약을 가득 싣고 애투섬으로 접근하던 3,100톤 짜리 아카가네마루를 수평선에서 발견하고 전속력으로 다가갔다.

아카가네마루에서 인디애나폴리스를 발견하고는 일본어로 전문을 보내왔다.

인디애나폴리스는 6,100m 거리에서 8인치 주포로 일제사격을 가하여 3번째 일제사격에 명중탄을 기록했다.

아카가네마루는 싣고 있던 탄약이 유폭하면서 어마어마한 폭발을 일으켰다.

비틀라실 대령은 빨리 끝장내기 위하여 구축함 2척에게 뇌격을 명령했다.

 

코글란이 먼저 다가가서 3발의 어뢰를 발사했다.

첫번째 어뢰는 정상적으로 아카가네마루의 아랫 쪽을 통과했으나 어뢰의 자기감응신관이 작동하지 않았다. 

두번째 어뢰는 미처 도달하기도 전에 폭발해 버렸고 세번째 어뢰는 선미 쪽으로 빗나갔다.

이어서 길레스피가 다가가서 3발의 어뢰를 발사했다.

첫번째 어뢰는 불발이었고 두번째 어뢰는 마치 돌고래처럼 방향을 잃고 사방으로 헤매고 다니다가 빗나갔고 세번째 어뢰는 다가가기도 전에 폭발해버렸다.

코글란과 길레스피의 승무원들은 이따위 어뢰를 가지고 작전하는 잠수함 승무원들의 좌절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코글란과 길레스피는 근거리에서 5인치 함포로 집중사격을 퍼부어 19일 오전 1시 24분에 아카가네마루를 격침했다.

 

아카가네마루의 뒤를 따르던 2척의 수송선은 운좋게 미함대에게 들키지 않고 일본으로 도망침으로서 싣고 있던 병력과 장비 및 보급품을 전달하지는 못했지만 목숨은 건졌다.

 

애투섬의 포격에 관하여 보고를 들은 킨케이드 제독은 애투섬의 방어가 허약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공중정찰과 맥모리스 소장의 보고에 따르면 애투섬에는 비행장과 해안포가 없었으며 대공포는 빈약했다.

당시 북태평양해역군은 먼저 키스카섬에 상륙하기 위하여 준비를 진행시키고 있었으나 최대 1만명으로 예상하고 있던 키스카섬 수비대를 제압할만한 병력과 장비 및 보급품, 그리고 수송함들을 1943년 7월이 되기 전에 확보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거기다가 9월이 되면 상륙작전이 힘들어지기 때문에 7월과 8월에 키스카 섬과 애투 섬에 연속적으로 상륙하기에는 시간이 빠듯했다.

 

그런데 키스카섬에 비하면 애투섬은 방어가 허술하여 이미 준비되어 있는 병력 중 일부만을 사용하여 충분히 탈환할 수 있고 필요한 수송함의 숫자도 훨씬 적었다.

게다가 애투섬을 장악하고 그곳에 비행장을 건설하면 키스카섬을 완전히 고립시켜 일본군의 증원을 차단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킨케이드 제독은 서부방어사령관 드윗 장군과 의논한 후 키스카섬보다 애투섬에 먼저 상륙하겠다는 내용의 제안을 1943년 3월 3일에 니미츠 제독에게 제출했다. 

니미츠 제독은 이 제안을 킹 제독에게 전달했고 1943년 3월 22일에 합동참모본부는 니미츠 제독에게 애투섬에 먼저 상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상륙예정일은 안개가 많이 끼는 6월이 되기 전인 1943년 5월 7일로 결정했다.

 

(알류샨 열도. 출처는 여기로)

 

한편 앰치트카에 진출한 제11육군항공대는 키스카섬에 맹렬한 공습을 가했다.

앰치트카의 P-40들이 3월 3일부터 키스카섬에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3월 12일부터는 폭장량이 많은 P-38 전투기 10대가 공습에 가세했다.

더하여 애닥섬의 폭격기들도 매일 키스카섬을 폭격했으므로 키스카섬은 날씨가 좋을 때에는 하루에 예닐곱번이나 공습을 받았고 날씨가 나쁜 날에도 공습을 받았다.

일본군의 반격은 미약했다.

1943년 3월 16일에 2식수상전투기 2대가 10대의 P-38 전투기와 교전하다가 격추된 것을 마지막으로 키스카섬의 항공력은 전멸했다.

 

애투섬과 키스카섬의 일본군들은 제5함대사령관 호소가야 제독에게 매일처럼 더 많은 병력과 무기 및 보급품을 요청했다.

보급함대가 3월 9일에 바라무시로를 출항했으나 미군의 봉쇄를 뚫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호소가야 제독은 1943년 3월 22일에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4척 및 수송선 2척을 이끌고 다시 바라무시로를 출항하여 애투섬으로 향했다.

일본함대의 출항을 눈치챈 미군이 요격을 위하여 함대를 파견함으로써 코만도르스키 해전이 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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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앰치트카 섬 상륙 

 

북태평양군 사령관 테오발드 소장은 애닥섬 상륙이 실시되기도 전인 1942년 8월에 애닥섬 다음에는 키스카섬으로부터 남동쪽으로 불과 140km 떨어진 앰치트카섬에 상륙할 계획을 합동참모본부에 제시하여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알류샨 열도. 출처는 여기로)

 

한편 서부방어사령관 드윗 중장은 8월에 앰치트카에 투입했던 정찰대의 보고를 근거로 앰치트카에는 비행장을 만들기 어려우며 따라서 앰치트카 대신 1942년 11월 1일로 예정된 타나가섬 상륙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육군참모총장 마셜 대장은 타나가 상륙보다는 앰치트카 상륙이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하여 10월 말에 드윗 중장에게 앰치트카 상륙을 긍정적으로 검토하도록 강력하게 권고했다.

어쩔 도리가 없어진 드윗 중장은 타나가 상륙을 무기한 연기함으로써 사실상 취소하고 정찰대를 다시 앰치트카로 보내어 그 결과에 따라 다시 결정하기로 했다.

앰치트카 정찰대의 재파견은 사실상 요식행위로서 타나가섬 상륙을 고집하던 드윗 중장이 물러날 명분을 얻고자 한 제안이었다.

 

그런데 테오발드 소장은 앰치트카 재정찰을 위하여 해군에서 카탈리나 비행정을 내주기를 딱 잘라 거부했다.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앰치트카 주변 해상에서 일본군에게 공격당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지만 누가 보아도 드윗 중장에 대한 불쾌감의 표출이었다.

그리하여 정찰대는 움낙섬의 포트글렌에서 1달이상을 허송세월하게 되었는데 이 사건은 일본군이 애투 및 키스카에 상륙한 이래 6개월 동안 쌓여온 테오발드 소장에 대한 육군 측의 불만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어 결국 테오발드 소장의 교체를 가져왔다.

사실 테오발드 소장과 육군의 알력은 테오발드 소장의 교체로 일단락되었지만 원인을 테오발드 소장에게만 돌리기는 어렵고 오히려 북태평양군의 복잡한 지휘체계로 인한 필연적인 결과에 가까웠다.

 

1942년 3월의 합동참모본부 결정에 따르면 알래스카 연안을 포함한 북태평양 해역은 니미츠 제독 관할이었다.

따라서 1942년 5월 말에 테오발드 소장이 니미츠 제독에 의하여 북태평양군사령관으로 임명되자 알래스카의 해군 뿐만 아니라 육군과 육군항공대 병력도 테오발드 소장의 지휘를 받아야 했다.

 

한편 알래스카방어사령부를 독립시키려던 시도가 실패하면서 알래스카의 육군은 서부방어사령관 드윗 중장의 지휘를 계속 받고 있었다.

드윗 중장은 계급도 테오발드 소장보다 높은 데다가 니미츠 제독의 지휘를 받지도 않았다.

게다가 미드웨이 해전 이후 미본토 서해안에 대한 침공 위협이 사실상 사라지면서 드윗 중장의 관심은 온통 애투섬과 키스카섬에 집중되었다.

 

알류샨 열도에서 대부분 기간동안 주력을 담당한 제11육군항공대는 유럽을 중시하던 육군항공대 사령관 아놀드 장군이

 

"알래스카 방어는 해군 책임"

 

이라고 공언한 이래 끈  떨어진 연 꼴이 되어 있었다.

따라서 제11육군항공대가 워싱턴의 육군항공대 수뇌부와 연락하려면 알래스카 방어사령부와 서부방어사령부를 통하는 길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은 알류샨 열도 작전에 대한 서부방어사령관 드윗 중장의 발언권을 더욱 높여주었다.

 

게다가 과달카날 섬에서 처절한 소모전이 계속되면서 태평양함대는 테오발드 제독 지휘 하의 해군 세력을 지속적으로 빼낼 수 밖에 없었고 이런 상황은 알류샨 열도 작전에 대한 테오발드 소장의 발언권을 더욱 약화시켰다.

그리하여 공식적으로 알류샨 열도 작전은 테오발드 소장의 관할이었으나 실제로는 테오발드 소장과 드윗 중장 사이에 이견이 생기면 각자 합동참모본부에 자신의 안을 제시하여 합동참모본부의 결정에 따르는 일종의 경쟁관계로 변질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작전을 매끄럽게 이끌어가려면 수뇌부 사이의 인간적 관계가 중요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테오발드 제독은 두뇌는 명석하나 화를 너무 잘 내어서 해군 내에서도 악명이 자자했고 북태평양군 사령관으로서 육군 지휘관들을 대하면서 이러한 자신의 성격을 제대로 억누르지 못했다.

결국 1942년 12월이 되자 테오발드 소장과 드윗 중장을 비롯한 육군 및 육군항공대 지휘관들과의 관계는 수습이 불가능할만큼 악화되었다.

 

만일 니미츠 제독이 애투섬과 키스카섬의 일본군들을 그냥 눌러두는 것으로 만족할 생각이었으면 이런 문제는 대충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니미츠 제독은 중부태평양 진격을 시작하기 전에 애투섬과 키스카섬을 탈환하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당시 미군은 키스카 섬의 일본군을 최대 1만명으로 추산하고 상륙군으로 최소한 1개 보병사단을 중심으로 한 25,000 명을 상륙시킬 계획이었는데 기후여건상 1943년 9월이 되기 전에 두 섬에 상륙을 완료해야 했다.

복잡하고 챙길 것이 많은 상륙작전의 특성상 25,000 명을 상륙시키는 대규모 상륙작전을 위해서는 상당한 준비기간이 필요했으므로 2번의 상륙작전을 하기에는 시간이 빠듯했다.

이런 상황에서 육군과의 사이가 극도로 나쁜 테오발드 소장에게 상륙작전을 총괄해야 할 북태평양군사령관직을 계속 맡길 수는 없었다.

결국 니미츠 제독은 1942년 12월 초에 테오발드 소장을 보스턴의 제1해군관구사령관으로 보내고 그 후임에 미해군 제일의 마당발로 유명한 토머스 킨케이드 소장을 임명했다.

 

(토머스 킨케이드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니미츠 제독은 남태평양에 있던 킨케이드 제독을 불러 1942년 12월 9일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니미츠-킹 회담에 데리고 갔다.

이 회담에서 킹 제독은 1943년 1월 4일자로 북태평양군 사령관 테오발드 소장을 보스턴의 제1해군구 사령관으로 보내고 대신 킨케이드 소장을 그 자리에 앉히겠다는 니미츠 제독의 제안을 승인했다.

이때 북태평양군의 전투함대를 지휘하던 윌리엄 스미스 소장도 찰스 맥모리스 소장으로 교체되었다. 

 

킨케이드 소장은 샌프란시스코까지 간 김에 그곳에 사령부를 두고 있던 서부방어사령관 드윗 중장을 12월 13일에 방문하여 앰치트카 상륙에 대하여 논의했다.

훌륭한 지휘관인 동시에 외교수완도 탁월했던 킨케이드 제독은 드윗 중장과의 만남에서 그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테오발드 소장과 불화를 겪으면서 해군과 제독에 대하여 나쁜 인상을 가지고 있던 드윗 중장은 킨케이드 제독과 토론을 마치고 나서 자신의 지론이었던 타나가 상륙을 포기했을 뿐 아니라 킨케이드 제독의 역량과 태도를 칭찬하면서 앰치트카 상륙을 적극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포트글렌에서 대기하고 있던 정찰대가 12월 17일-19일에 걸쳐 앰치트카를 정찰하여 섬에 아직 일본군이 없으며 2-3주면 전투기용 활주로를 만들 수 있는 평지가 있음을 확인했다.

 

앰치트가 상륙이 1943년 1월 9일로 결정되자 제11육군항공대는 애투와 키스카에 대한 공습을 강화했다.

1943년 1월 5일에 안개가 걷히자 애닥섬에서 출격한 폭격기들이 애투섬의 홀츠만에서 6,577톤짜리 몬트리올마루를 격침했고, 같은 날 쌍발폭격기들은 증원병력과 보급품들을 싣고 키스카로 접근하던 6,101톤짜리 고토히로마루를 격침했다.

이후로는 안개가 끼어 폭격이 불가능했다.

 

로이드 존스 준장이 지휘하는 2,000 명 규모의 앰치트카 상륙부대는 맥모리스 소장이 지휘하는 중순양함 1척(인디애나폴리스), 경순양함 2척(랠리, 디트로이트) 및 구축함 4척으로 이루어진 함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앰치트카에 접근했으나 날씨가 나빠서 해상에서 대기해야 했다.

1943년 1월 11일 밤에 윌리엄 포그 소령이 지휘하는 구축함 워든이 앰치트카섬의 콘스탄틴항에 진입하여 선발대를 상륙시켰고 다음날인 12일 저녁까지 본대를 실은 수송함 4척이 상륙을 완료했다.

적의 저항은 없었으나 앰치트카의 험난한 자연이 희생을 강요했다.

 

선발대를 상륙시키고 나오던 워든은 사나운 조류에 휩쓸리면서 암초에 부딪혀 기관실 바로 아래에 구멍이 났다.

구축함 듀이가 달려와 워든을 암초에서 끌어내었으나 갑자기 예인 케이블이 끊어지면서 워든은 사나운 조류에 휩쓸려 다시 암초에 부딪히면서 더 큰 구멍이 났다.

워든이 바위 투성이의 해안에 좌초하면서 함체 후방이 물에 잠기자 함장 포그 소령은 함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긴박한 탈출 과정에서 섭씨 2도 밖에 안되는 차가운 바닷물에 빠진 승무원들 중 14명이 사망했다. 

 

(좌초된 구축함 워든의 모습)

 

상륙부대는 일단 무사히 상륙했으나 그날밤에 심한 폭풍우가 몰아쳐서 수송함 아서미들턴과 수많은 상륙주정이 침수되었다.

1월 13일이 되자 폭풍우가 멎는가 싶더니 눈보라가 휘몰아치기 시작해 12일간 계속되었다.

24일에 겨우 눈보라가 멎자 일본군의 수상기가 날아와서 미군을 발견하고는 폭격을 가했으나 피해는 미미했다.

공병들이 곧 활주로 공사를 시작하여 2월 16일에 8대의 P-40 전투기들이 최초로 키스카섬 상공에 초계비행을 실시했다.

 

미군의 앰치트카 상륙은 일본군으로 하여금 양자택일을 강요했다.

이제 일본은 애투섬과 키스카섬에서 철수하든지 아니면 수비를 강화하고 비행장을 건설하여 미군의 보급선을 공격하는 맞불작전으로 나가야만 했다.

일본제5함대 사령관 호소가야 중장은 일본군에게 시간이 얼마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일 철수하려면 1달내로 하는 것이 안전했으며 일단 미군기가 앰치트카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면 수상함의 통행은 큰 지장을 받을 것이었다.

 

1943년 2월 5일, 일본해군은 미군의 공격으로부터 쿠릴 열도를 보호하기 위하여 애투와 키스카를 끝까지 지키기로 결정했다.

애투와 키스카의 방어를 위해서는 비행장이 반드시 필요했으므로 이후 일본군은 비행장 건설에 매진했으나 지형적인 불리함과 건설용 중장비의 부족, 그리고 미군의 집요한 공습 때문에 비행장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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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동계작전

 

북태평양을 담당한 제8임무부대의 함정세력은 1942년 10월부터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남쪽의 과달카날에서 일본해군과 무시무시한 소모전을 치르고 있던 니미츠 제독은 상대적으로 조용한 북태평양으로부터 점점 더 많은 함정들을 뽑아갔다.

1942년 10월 말까지 중순양함 1척(루이스빌)과 경순양함 2척(호놀룰루, 세인트루이스)이 과달카날로 불려갔고, 굴뚝 4개를 가진 구형 구축함 6척이 고속수송함으로 개조되기 위하여 미본토 서해안으로 떠났다. 

11월에도 함정 빼가기는 계속되어 결국 12월 1일이 되자 테오발드 소장 휘하에 남은 함정이라고는 경순양함 2척(디트로이트, 랠프), 구축함 4척, 그리고 어뢰정과 소형초계정 몇척이 전부였다.

 

북태평양의 미국잠수함 세력도 구형의 S보트 6척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수했으나 그 와중에서도 S-31은 10월 26일에 파라무시로 근해에서 일본수송선 케이잔마루를 격침했다.

 

북태평양의 해군세력이 줄어들자 제11육군항공대의 역할이 커졌다.

제11육군항공대도 중폭격기 상당수가 철수했으나 그 빈자리를 향상된 기량으로 메꾸었는데 특히 정박한 함선을 공격하는 기술은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

 

애닥섬의 11월은 엄청난 폭풍우로 시작되었다.

많은 비와 함께 시속 150km에 달하는 폭풍우가 몰아쳐서 애닥섬의 활주로는 30cm 깊이로 물에 잠겼고 모든 항공기의 이착륙이 불가능했다.

11월 7일에 폭풍우가 그치자 일본의 2식수상전투기 몇 대가 애닥섬의 활주로에 기습을 가하여 약간의 피해를 입히고 도망갔다.

 

이 2식수상전투기들은 전날 애투섬에서 키스카섬으로 날아온 것들이었다.

일본은 11월에 접어들면서 미군의 공습이 심해지자 수상기모함을 무리하게 키스카항에 보내는 대신 애투섬에 2식수상전투기들을 내려놓은 다음 키스카섬까지 날아가도록 했다.

그리하여 수상기모함 기미가와마루가 11월 6일에 애투섬에 6대의 2식수상전투기를 내려놓았고, 이들은 그날로 키스카섬까지 날아가서 다음날 애닥섬 공격에 참가했다.

키스카섬의 2식수상전투기들은 11월 8일에 폭풍우가 몰아쳤을 때 큰 피해를 입었다.

 

11월 9일에 B-17폭격기 1대, B-26쌍발폭격기 2대가 P-38전투기 4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키스카섬을 폭격했다.

B-17 폭격기가 해안의 시설물을 폭격하는 사이 B-26 쌍발폭격기 2대는 거트루드만에서 일본수송선을 폭격했으나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P-38 전투기 4대는 전날의 폭풍우로 큰 피해를 입고 홀츠만의 해안에 밀려나와 있던 2식수상전투기들에게 기총소사를 퍼부어 파괴했다.

이로써 키스카섬에 남아있던 2식수상전투기 8대는 전멸했다.

이후 키스카섬의 일본군들은 1달 이상 전투기없이 지내다가 12월 24일에 기미가와마루가 다시 애투 섬에 7대의 2식수상전투기를 내려놓았고 이들 중 6대가 다음날 키스카섬에 도착했다.

 

11월 10일부터 다시 폭풍우가 몰아쳐서 애닥섬의 미군기들은 지상에 머물러야 했다.

애닥의 미군기들은 11월 25일에 날이 개자 다시 키스카로 날아가 홀츠만에서 4,016톤짜리 체리본마루를 공격했고 다음날에는 2,427톤짜리 가초산마루를 공격했다.

두척 모두 큰 피해를 입고 침수가 심해져서 해안에 좌초되었다.

 

12월에는 애닥섬의 기상 때문에 폭격이 거의 불가능했다.

1942년의 마지막날인 12월 31일에 애닥섬의 미군기들은 키스카섬을 공격하여 3,100톤짜리 수송선 1척을 격침하고 다른 1척에 큰 피해를 입혔다.

 

(알류샨 열도. 출처는 여기로)

 

그동안 육군공병대와 해군건설대대는 건설작업에 매진했다.

미군은 애닥섬을 알래스카 최대의 군사기지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 계획에 따라 애닥섬에 15,000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소를 비롯하여 창고와 통신소등이 들어섰다.

비행장에는 격납고와 2층짜리 관제탑이 들어섰고 쿨룩만에는 부두와 건선거가 만들어졌다.

 

(미군의 전진기지로 변모한 애닥 섬의 모습. 앞에 보이는 것은 활주로다.)

 

육군공병대는 애닥섬의 동쪽에 위치한 애트카섬에 상륙하여 12월 27일까지 900m 길이의 비상활주로를 완성했다.

애닥섬과 애트카섬 사이에 있는 그레이트시트킨섬의 샌드만에는 보급기지가 만들어졌다.

이곳에는 급유용부두와 연료 및 탄약 저장고가 들어섰다.

 

카탈리나정찰비행정을 운용하는 해군의 제4초계비행단에게 알류샨열도의 겨울은 힘든 계절이었다.

정찰비행은 도저히 비행이 불가능한 날씨가 아니라면 웬만큼 바람이 불거나 구름이 끼어도  빼먹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카탈리나의 엔진을 토치로 가열하고 날개에 낀 얼음을 긁어내고 곱은 손으로 어뢰나 폭탄을 장착하고 가끔씩 하강 기류를 정면으로 받으면서 무거운 정찰비행정을 이륙시켜야 했다.

해상에서 운용하는 카탈리나는 창에 부딪히는 물보라가 얼어붙어 와이퍼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나마 레이더 덕분에 악천후 속에서도 정찰비행이 가능했다.

기압을 측정하여 높이로 나타내는 고도계는 기압이 다른 기상전선을 통과할 때는 오차가 크게 나타났으며 까딱 실수로 조난이라도 당하여 해상에서 탈출할 경우 즉시 구조되지 않는 이상 체온저하로 금방 사망했다.

 

군수지원이 부족했던 초기에는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의 지상요원들이 마치 거지들처럼 여기저기서 얻어먹으면서 임무를 수행했다.

그들은 육군이나 해군의 함정에게서 음식과 옷, 공구, 심지어는 옹벽을 만드는데 쓸 널빤지나 철판까지 구걸해가면서 카탈리나 비행정들을 돌보았다.

 

(PBY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어뢰정들 또한 애닥섬의 겨울날씨에 고생했다.

 

 

 

 

 

 

미해군은 알류샨열도에 안개가 자주 끼기 때문에 어뢰정들이 활약하기 좋다고 생각해서 미드웨이에 배치되어 있던 클린턴 맥켈러 중위의 제1어뢰정편대(PT-22, 24, 27, 28)를 파견했다.

어뢰정들은 8월 20일에 미드웨이를 떠나서 알래스카 연안을 따라 자력으로 4,000km 를 항해하여 9월 1일에 더치하버에 도착했다.

이들은 얼마후 일본군의 상륙에 대비하여 애닥섬으로 보내졌다.

애닥섬에 대한 일본군의 상륙은 없었으므로 어뢰정들은 해상을 초계하거나 육군을위하여 보급품을 실어주기도 하고 기뢰를 부설하기도 했다.

겨울에 바다에 나서면 매서운 바람이 들어와 실내에 5cm 두께로 얼음이 얼 정도였는데 어뢰정 내에는 주방의 휘발유 스토브 이외에는 별도의 난방장치가 없었다. 

이런 날에는 갑판에 얼어붙은 얼음의 무게로 인하여 위험해질 정도로 흘수가 깊어지고는 했다.

 

어느 겨울날 해상에서 폭풍우를 만난 어뢰정 4척은 후미진 만내로 대피했으나 그곳에서 조난당했다.

정박하기 위하여 투묘한 닻은 폭풍우에 힘없이 끌려 다녔고 어뢰정끼리 묶어둔 로프는 끊어졌다.

결국 어뢰정 4척 중 1척은 침몰하고 나머지 3척은 해안에 좌초되었다.

다음날 애닥섬의 경비정들이 다가와서 죄초된 어뢰정들을 해안에서 끌어내려고 하자 로프가 끊어지거나 걸쇠가 망가져 버렸다.

그러나 다행히 그날 오후까지 3척의 어뢰정들은 무사히 바다로 다시 나왔다.

사망자가 없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1942년 12월 27일에는 조셉 레버튼 소령이 지휘하는 구축함형 소해함 와스무스가 악천후의 희생자가 되었다.

와스무스가 심한 폭풍우를 만나 만내에서 6노트로 느린 속력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 폭뢰 2발이 떨어져서 물속에서 폭발했다.

같이 있던 유조선 라마포가 와스무스를 예인하려 했으나 용골에 치명타를 입은 와스무스는 결국 침몰했다.

다행히 와스무스의 승무원들은 모두 라마포에 의하여 구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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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애닥 섬 상륙 

 

미본토 서해안과 알래스카를 담당하던 서부방어사령관 존 드윗 중장은 일본군이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장악한 지 1주일도 지나지 않은 6월 14일에 전쟁성에 전문을 보내어 일본군이 방어를 굳히기 전에 이 두 섬에 상륙하여 탈환하자고 주장했다. 

미함대총사령관이자 해군참모총장인 킹 해군대장이 전쟁성에 키스카 및 애투 상륙작전에 대한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히자 드윗 중장은 한발 물러났다.

그는 1942년 7월 16일에 합동참모본부에 전문을 보내어 키스카 섬에서 동쪽으로 320km 떨어진 타나가 섬에 상륙하여 비행장을 만들자고 제의했다.

 

당시 북태평양군 사령관 테오발드 해군소장도 움낙섬 서쪽에 전진 비행장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는데 그는 타나가섬에서 동쪽으로 80km 떨어진 애닥섬에 상륙하기를 원했다. 

애닥섬의 쿨룩만은 4계절 내내 사용할 수 있는 양항이었으나 타나가 섬에는 그러한 양항이 없어서 겨울철에는 보급에 지장이 예상되었다.

제11육군항공대는 타나가섬을 선호하여 타나가섬에는 2-3주면 활주로를 만들 수 있는 평지가 있지만 애닥섬에 활주로를 만들려면 4달은 걸린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타나가섬을 주장하는 육군과 애닥섬을 주장하는 해군이 대립하다가 결국 8월 21일에 육군참모총장 마셜 대장이 양보함으로써 다음날인 8월 22일에 애닥섬에 상륙하라는 합동참모본부의 명령이 나왔다.

상륙날짜는 8월 30일이었다.

 

(알류샨 열도. 출처는 여기로)

 

애닥섬이든 타나가섬이든 둘중 한곳에 곧 상륙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알래스카의 육군과 해군은 미리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8월 25일부터 움낙 섬의 포트 글렌에서 P-38 전투기들이 애닥섬 상공을 초계하기 시작했고 상륙 이틀전인 28일에는 37명으로 이루어진 정찰대가 애닥섬에 상륙하여 일본군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콜드베이를 출발한 선두 제파는 8월 30일에 쿨룩만에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상륙했다.

다음날 저녁까지 제807공병항공대대를 포함하여 4,500 여명의 병력 및 장비, 보급품들이 요트, 개조한 어선 및 예인선에 끌려온 바지선 등으로 이루어진 약 250척의 잡동사니 함대에 실려와서 무사히 상륙을 마쳤다.

비행장 부지를 찾아 애닥 섬을 수색하던 육군공병대는 스위퍼 샛강이 바다로 흘러가는 부분에서 기가 막힌 활주로 부지를 찾아내었다.

공병대는 스위퍼 샛강의 흐름을 돌리고 배수로를 만드는 동시에 샛강 바닥을 돋우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간척지를 다지고 그 위에 마스덴 매트를 깔자 열흘 만에 활주로가 완성되었다.

1942년 9월 10일에 벌써 B-18 쌍발폭격기가 최초로 착륙했고 이후 13일까지 B-24 중폭격기 16대와 P-38 및 P-39 전투기 41대가 추가로 도착했다.

 

(애닥섬의 작은 만에서 미군 공병대의 불도저들이 활주로 건설에 사용할 모래들을 준설하고 있다.)

 

한편 일본군은 8월에 애투섬 수비대를 모두 키스카섬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애투섬 수비대의 이동은 수송선과 구축함을 사용하여 8월 27일부터 9월 16일까지 3차에 걸쳐 무사히 실시되었다.

 

이 기간에 키스카섬 주변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하여 초계중이던 일본잠수함 RO-61 이 8월 29일에 애트카섬의 나잔만에서 미군의 애닥섬 상륙을 지원하기 위하여 정박중이던 수상기모함 카스코를 발견했다.

RO-61의 함장 도쿠토미 대위는 어뢰를 발사하여 1발을 명중시켰다.

5명의 사망자와 20명의 부상자를 기록한 카스코는 해안에 안전하게 좌초하여 긴급 수리를 마친 후 코디액섬에 들렀다가 수리를 위하여 워싱턴주에 있는 퓨젯사운드 조선소의 건선거에 들어갔다.

 

(RO-61 이 발사한 어뢰에 맞은 카스코의 함저 부분을 퓨젯사운드 조선소의 기술자들이 살펴보고 있다.)

 

다음날인 8월 30일에 해상을 수색하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이 RO-61을 발견하고 폭뢰를 투하하여 손상을 입혔다.

RO-61은 급히 잠항했으나 손상된 함체에서 기름이 흘러 나왔다.

카탈리나의 보고를 받고 현장에 도착한 구축함 레이드의 함장 해리 맥킬헤니 소령은 해상의 기름자국을 따라 추적하여 결국 소나로 RO-61을 탐지하는데 성공했다.

레이드는 2차례의 폭뢰공격을 퍼부어 RO-61 에 큰 피해를 입혔고 RO-61 이 부상하자 포격을 가하여 격침했다.

RO-61 의 승무원 5명이 포로로 잡히자 맥킬헤니 소령은 이 포로들을 애트카 섬에 좌초한 채 수리 중이던 카스코로 보냈다.

 

9월 14일에 애닥섬을 출격한 미군기가 최초로 키스카섬을 폭격했다.

거리가 가까워졌으므로 이제 12대의 B-24 중폭격기들은 28대의 P-38 및 P-39 전투기의 호위를 받으면서 저공폭격을 가할 수 있었다.

키스카항의 함정들을 노린 6대의 B-24 폭격기는 450kg 짜리 고폭탄을 장비했고 막사와 잠수함 기지를 비롯한 지상목표를 노린 6대의 B-24 폭격기는 소형폭탄과 소이탄들을 장비했다.

 

공습은 성공적이었다.

저공으로 진입한 P-39 전투기들이 37mm 기관포로 사격을 가하여 키스카 항에 정박 중이던 잠수함 3척에게 피해를 입히고 0식수상정찰기 1대를 파괴했다.

450kg 짜리 고폭탄을 장착한 B-24 폭격기 6대는 키스카 항 내에 정박 중이던 소해정 2척과 수송선 1척을 격침했다.

다른 6대의 B-24 폭격기들은 일본군 막사와 잠수함 기지를 폭격하여 피해를 입히고 화재를 일으켰다.

 

일본군의 2식수상전투기들이 반격을 위하여 떠오르자 P-38 전투기들이 요격하여 3대를 격추했다.

이 와중에 1대의 2식수상전투기를 동시에 쫓던 P-38 전투기 2대가 공중충돌하여 추락했다.

이렇게 상실한 P-38  전투기 2대가 미군공격대의 유일한 피해였다.

공습이 끝나자 키스카의 2식수상전투기는 1대만 남았다.

이후 열흘간 애닥섬의 미군기들은 악천후 때문에 지상에 머물러야만 했다.

 

9월 24일에 일본의 수상기 모함 기미카와마루가 키스카 섬에 도착하여 2식수상전투기 6대와 0식수상정찰기 2대를 내려놓았다.

 

다음날인 25일에 날씨가 개자 애닥섬의 미군기들이 다시 키스카섬을 공습했다.

B-24 폭격기 9대 및 B-17 폭격기 1대가 폭격을 담당했으며 사진촬영을 위하여 B-17 폭격기 1대가 동행했다.

P-39 전투기 11대와 P-40 전투기 17대가 호위를 담당했는데 P-40 전투기 중 11대는 캐나다 공군 소속이었다.

폭격기들이 키스카 항에서 수송선 1척을 격침하고 다른 선박 몇척에 피해를 입히는 동안 전투기들은 리틀키스카섬을 기총소사하여 탄약고를 폭파시키고 화재를 일으켰다.

전투기들은 또한 해상에 계류중이던 0식 수상정찰기 5대를 파괴하고 요격에 나선 2식 수상전투기 2대를 격추했다.

 

이후 애닥섬의 미군기들은 3주 동안 거의 매일 키스카섬을 공습하여 주로 지상시설에 큰 피해를 주었다.

9월 한달동안 애닥섬의 미군기들은 키스카섬에 116톤의 폭탄을 투하했는데 이것은 키스카섬에 일본군이 상륙한 이후 지난 3개월간 투하한 폭탄의 합계보다 2배가 더 많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합계 15,000 톤의 수송선 2척과 소해정 2척을 격침하고 잠수함 3척에 피해를 입혔으며 0식수상정찰기 6대를 해상에서 파괴했다.

또한 일본군의 막사와 창고 및 잠수함기지 등에 큰 피해를 입혔고 그 과정에서 요격에 나선 일본의 2식수상전투기 5대를 격추했다.

 

10월에 들어와서도 폭격은 거의 매일 계속되었다.

10월 14일에는 애닥섬에서 쌍발폭격기가 최초로 공습에 나섰다.

이날 중폭격기들이 일본군의 탄약고를 폭격하여 커다란 화재를 일으키는 동안 B-26 쌍발폭격기 3대가 키스카항에 정박중인 일본선박을 겨냥하여 어뢰 3발을 발사했으나 모두 빗나갔다.

 

이틀 후인 10월 16일에 쌍발폭격기들은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1대가 보급선단을 호위하여 키스카섬에 온 일본구축함 오보로와 하츠하루를 키스카섬 북쪽 50km 해상에서 발견했다.

즉시 애닥 섬에서 B-26 쌍발폭격기 6대가 출격하여 오보로와 하츠하루에게 136kg 짜리 폭탄 24발을 퍼부었다.

오보로는 탄약고가 명중되어 순식간에 침몰했다.

219명의 승무원들 중 202명이 사망했으며 함장 야마나 소좌를 비롯한 생존자 17명은 하츠하루에게 구조되었다.

하츠하루도 후갑판에 명중탄을 맞아 프로펠러가 손상되는 등 대파되었으나 다행히 침몰은 면했다.

오보로의 생존자 17명을 구조하여 철수한 하츠하루는 이후 일본 본토의 건선거에 들어앉아 수리를 받아야 했으며 1년이 지난 1943년 10월에야 전열에 복귀할 수 있었다. 

 

애닥섬의 미군기들은 10월 한달동안 약 200톤의 폭탄을 키스카에 투하했다.

 

일본군은 안개 때문에 미군의 애닥섬 상륙을 9월 말이 되어서야 알아차렸다.

10월 초에 일본군의 수상기들이 애닥섬의 활주로를 기습했으나 거의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미군이 애닥섬에 상륙하자 일본은 미군이 애투와 키스카에 상륙할 의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수비대가 키스카 섬으로 옮겨간 뒤 비어있던 애투 섬에는 10월 말에 1,000 명 규모의 수비대가 상륙했다.

12월 2일에는 1,115명의 병력을 태운 수송선 2척이 순양함 2척과 구축함 2척의 호위를 받으면 키스카 섬에 도착하여 이제 키스카섬의 병력은 약 4,000 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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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키스카 섬 포격 

 

북태평양군 사령관 테오발드 소장은 지지부진한 폭격 대신 함대를 끌고가서 키스카 섬을 포격하기로 결심했다.

1942년 7월 18일, 중순양함 2척(인디애나폴리스, 루이스빌), 경순양함 3척 (호놀룰루, 내쉬빌, 세인트루이스), 구축함 5척(케이스, 레이드, 그리들리, 멕콜, 모내헌), 구축함형 소해함 4척(램버트, 엘리엇, 롱, 챈들러)이 키스카 섬 포격을 위하여 코디액 섬을 떠났다.

7월 21일에 급유함 과달루페로부터 급유를 받은 미함대는 키스카 섬에 접근했으나 안개가 너무 짙어서 포격이 불가능했다.

기함 인디애나폴리스 함상의 테오발드 소장은 22일 하루동안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렸으나 안개가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할 수 없이 포격을 연기하고 돌아왔다.

 

테오발드 제독은 7월 27일에도 같은 함정들을 거느리고 출격했는데 가는 도중 안개 속에서 변침하다가 두 번의 충돌사고가 일어나서 구축함 모내헌과 구축함형 소해함 램버트, 롱, 챈들러를 돌려 보내야 했다.

소해함 4척 중 3척이 없어진 상황에서 소해작업도 하지 않고 키스카 섬에 접근하기를 꺼린 테오발드 소장은 코디액 섬으로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만일 테오발드 소장이 이때 키스카 섬 포격을 감행했다면 좋은 전과를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키스카 항 내에는 구축함 3척, 소형 기뢰부설함 2척, 유조선 1척, 10,000톤급 수송선 1척, 소형 수송선 2척 등 키스카에서는 보기 드물게 많은 배들이 몰려 있었다.

 

8월 3일, 미함대는 3번째로 키스카 섬을 포격하기 위하여 코디액 섬을 출항했다.

이번에는 윌리엄 스미스 소장이 함대를 지휘했고 테오발드 소장은 코디액 섬에 머물렀다.

함대의 구성은 지난번에 충돌 사고를 일으킨 4척을 제외하고 그대로였다.

 

8월 7일 오후 4시가 되자 키스카 섬 상공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으로부터 키스카 섬의 상공이 잠깐 개었다는 기상보고가 들어왔으나 미함대 부근의 해상은 여전히 짙은 안개로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미함대는 이틀 전에 천체관측으로 측정한 위치를 기반으로 조류의 영향이 최소화되기를 빌면서 2시간 동안 추정항법으로 항해했다.

오후 6시 30분에 최종 접근 항로로 접어들자 스미스 소장은 함대 속력을 20노트로 줄이고 각 순양함에서는 2대씩 수상정찰기들을 발진시켰다.

그러나 육안으로 키스카 섬을 확인하기 전에 다시 안개가 짙어지자 스미스 소장은 일단 함대를 뒤로 뺐다.

잠시 후 다시 실시한 2번째 접근 시도에서 오후 7시 34분에 선두에 섰던 구축함 케이스의 견시가  키스카 섬 북쪽의 키스카 화산을 쌍안경으로 확인했고 이어서 전 함대의 장병들이 환성을 질렀다.

 

(키스카 섬 포격 상황도. 출처 : Aleutians, Gilberts and Marshalls, P.11)

 

키스카 섬은 애벌레처럼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비스듬히 누웠으며 폭은 약 5km - 6km 정도이고, 길이는 약 35km 정도이다.

동해안의 중앙쯤에 키스카 항이 움푹 들어가 있으며 키스카 항의 남쪽 면이 리틀키스카 섬과 함께 키스카 항의 남쪽 방벽을 이룬다.

일본군의 기지는 대부분 키스카 항의 북쪽 및 서쪽 해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미함대의 계획은 일본군 해안포의 위협을 의식하여 표적을 육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고 키스카 항의 남쪽에서 간접사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포격 거리는 5인치 포를 가진 구축함들은 약 13,000m, 6인치 포를 가진 경순양함들은 약 15,000m, 그리고 8인치 포를 가진 중순양함들은 약18,000m 였다.

이러한 간접사격에는 수상정찰기의 탄착관측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나 제로기의 수상기형인 2식 수상전투기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미해군의 수상정찰기들을 모두 쫓아버렸으므로 미함대는 탄착보정을 받지 못한 채로 간접사격을 실시해야만 했다.

 

북상하던 미함대는 오후 8시 정각부터 우측으로 90도 변침하면서 키스카 섬의 일본군 기지를 향하여 20분 간 일제사격을 실시했다.

일분군의 해안포도 지지 않고 2식 수상전투기의 탄착수정을 받으면서 반격을 가해왔으나 명중탄을 기록하지는 못했다.

폭탄을 장착한 2식 수상전투기 1대와 97식 비행정 1대가 낮게 깔린 구름을 뚫고 내려와 선두의 구축함 케이스를 노리고 폭탄을 투하했으나 빗나갔다.

20분 간의 포격을 끝낸 미함대는 오후 8시 21분에 남쪽으로 변침하여 철수했다.

 

키스카 남쪽 해상에서 순양함들은 수상정찰기들을 회수했다.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의 수상정찰기 중 1대가 격추되었고, 나머지 수상정찰기들도 2식 수상전투기와 일본군의 대공포에 의하여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는데 3대는 기체에 100 개 이상의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중의 1대는 167개의 구멍이 뚫려 있었으며 조종사는 발뒤꿈치에 총탄을 맞았다.

경순양함 세인트루이스의 수상정찰기 1대는 모함을 찾지 못하고 안개 속에서 섬들을 더듬어 움낙 섬의 포트 글렌까지 무사히 돌아갔다. 

 

미함대의 포격은 키스카 섬의 일본군에게 어느 정도의 피해를 주었으나 썩 만족한 수준은 아니었다.

키스카 항에 계류 중이던 97식 비행정 3대가 파괴되었으며 선박과 해안 사이로 화물을 운반하던 바지선도 산산조각이 났다.

또한 7월 30일에 미잠수함 그러니언의 어뢰를 맞고 대파되었던 가노마루도 포탄에 맞아 불이 났다.

그날 밤에 미해군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들이 키스카 섬에 찾아와 불타는 가노마루에게 추가로 어뢰공격을 가하여 끝내 격침했다.

키스카 항 북쪽에 있던 일본군 막사도 포탄에 맞아 화재가 발생했다.

그러나 키스카 항 내에 있던 일본군의 구축함 2척, 구잠함 3척 및 잠수정들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으며 사망자도 몇 명 되지 않았다.

 

일본군은 이 포격 이후 남아있던 97식 비행정 2대를 키스카 섬으로부터 철수시키고, 대신 0식 수상정찰기 10대를 배치했다.

 

(아이치 E13A 0식 수상정찰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한편 스미스 소장은 함정들에 대한 위험 부담에 비하여 포격의 효과가 적다고 결론내렸으며 따라서 1943년 1월 4일에 테오발드 소장이 교체될 때까지 키스카 섬에 대한 함포사격은 두 번 다시 실시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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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미군의 반응

 

1942년 6월 초에 일본이 점령한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은 군사적으로 가치가 없었다.

일본군은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발판으로 알래스카나 미본토를 위협할 능력이나 의지가 없었으며 미군 또한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탈환하여 활용할 용도가 없었다.

 

소련이 대일전에 참가한다면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은 미국에게는 시베리아로 항공기를 보내는 중계기지로서, 일본에게는 미서해안과 소련 사이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기지로서 의미가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독일과 사생결단의 혈전을 치르고 있던 소련은 후방에 또다른 적을 만들기를 원하지 않았고 일본 또한 중국과 남방전선을 지탱하는 데에도 허덕거리던 처지라 소련을 공격할 의향이 없었다.

실제로 미서해안과 블라디보스톡을 연결하는 해상보급로는 일본이 마음만 먹으면 애투 섬이나 키스카 섬의 점령 유무와 상관없이 방해할 수 있었으나 일본은 항복할 때까지 일본 근처를 통과하는 이 중요하면서도 취약한 보급로를 끝내 모른 척했다.

 

따라서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은 남태평양과 중부태평양에서 미국이 우회해버린 많은 거점들처럼 종전시까지 그냥 놔 둘 수도 있었다.

사실 미국이 우회해버린 라바울이나 트럭에 비하면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의 군사적 가치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수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침공했으며 애투 섬의 일본군 수비대는 처절한 방어전 끝에 전멸하는 참극을 겪어야만 했다.

이러한 비극의 뒤편에는 일본과 미국의 국내정치가 긴밀하게 관여하고 있었다.

 

사실 일본해군은 1942년 6월 초에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점령할 때까지만 해도 6월 말까지 철수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의 참패를 호도하기 위하여 애투 섬과 키스카 섬 상륙을 커다란 전과라고 국민들에게 대대적으로 선전했으므로 1달도 안 되어 그 섬은 쓸모 없는 섬이라면서 철수하기가 곤란해졌다.

일본군은 애투와 키스카에 대한 확실한 장기 계획이 없이 어정쩡한 상태에서 미군이 키스카 섬을 계속 공습하자 키스카 섬의 수비대를 야금야금 늘리다가 결국 애투와 키스카 섬을 계속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실제로 일본군은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점령하여 주둔해 본 결과 알류샨 열도의 기후가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비행과 항해에 훨씬 불리하며 따라서 군사적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국내정치적 요인에 밀려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계속 점령하기로 결정하고 수비대를 증강함으로써 과달카날에 이어 또다시 이길 자신도 없는 노름판에 판돈을 더 집어넣어서 판을 키우는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다.

그러나 일본군의 증강도 어차피 방어가 목적이었으며 비록 증강되었다고 해도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의 일본군은 미국을 위협할 힘도, 의지도 없었다.

따라서 일본의 오판이 있었더라도 미국이 맞장구를 쳐주지 않았으면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은 종전시까지 라바울이나 트럭처럼 지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국내사정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민주국가인 미국에서는 아무리 전쟁 중이라고는 해도 기본적으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었으므로 국민들은 중요한 기밀이 아닌 한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수많은 아마추어 전략가들이 심심하면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이 미국의 심장을 노리는 일본군의 창끝이며 미국인들이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남태평양의 이름도 모르는 섬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에 정신이 팔린 사이 일본군의 대부대가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경유하여 알래스카나 심지어 미본토 서해안에 쏟아져 들어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아마추어 전략가 중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언론인들도 있었으므로 진주만 기습 이후 완전히 새가슴이 되어버린 미의회를 비롯한 여러 방면의 높으신 분들 중에서는 그런 엉터리 경고가 신문이나 잡지에 실릴 때마다 미함대 총사령관이자 해군참모총장인 킹 대장을 찾아와서 이것저것 캐물으며 귀찮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안 그래도 미해군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멍청이로 생각하고 있던 킹 제독에게 해군과 그 전략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아마추어 전략가들이 끄적거린 신문 기사 따위나 읽고 찾아와서 감히 자신이 지도하는 미해군의 전략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간섭하려 드는 이런 높으신 분들은 단지 경멸의 대상일 뿐 이해시키려고 노력할 가치가 없는 인간들이었다.

가뜩이나 바쁜데 이런 멍청한 인간들 상대하느라고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기 싫었던 킹 제독은 높으신 분들이 자신을 찾아와 귀찮게 굴 때마다 일일이 설명하는 대신 태평양함대 사령관 니미츠 제독에게 전문 한 장을 달랑 보내고는

 

"의원님께서 우려하시는 바에 대하여 태평양함대 사령관에게 만전을 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라고 말하고는 돌려보냈다.

그러면 니미츠 제독은 다시 북태평양해역군 사령부에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공략할 준비에 만전을 기하라."

 

는 뻔한 전문을 보냈고 그때마다 보급순위의 맨 아랫쪽에서 불만이 가득 쌓여있던 북태평양해역군에서는 발끈하여 애투 섬과 키스카 섬 공략을 위해 필요한 병력과 항공기를 비롯한 무기 및 장비 , 그리고 보급품의 길다란 목록을 태평양함대 사령부에 제출하는 양상이 되풀이되었다.

 

이런 상황이 반복하여 벌어지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의 소속 때문이었다.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은 알류샨 열도에 속해 있었는데 알류샨 열도는 알래스카의 일부였으며 알래스카는 미본토, 하와이 및 파나마 운하와 함께 미국의 방어전략상 서반구(Western Hemisphere)에 속해 있었다.

일반적인 미국인들에게 서반구란 곧 미본토를 의미했으며 따라서 미본토의 일부를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에 일반 국민들은 적잖은 당혹감과 불편함을 느꼈다.

이러한 불편한 감정은 미본토 서해안과 알래스카의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서부방어사령관 드윗 중장도 마찬가지였으며 실제로 드윗 중장은 일본군이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점령한 직후부터 미군이 상륙작전을 실시하여 이 두 섬을 탈환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했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 자신이 맡은 미본토 서해안이 침공당할 위험이 사실상 없어지면서 애투 섬과 키스카 섬에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던 드윗 중장과 달리 미함대 총사령관 킹 제독이나 태평양해역군 총사령관 니미츠 제독에게는 군사적으로 아무 가치도 없는 애투 섬과 키스카 섬 탈환보다 훨씬 급하게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들이 아주 많았다.

그러나 미본토의 일부인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계속적으로 여론의 압력을 받게 된 킹 제독과 니미츠 제독은 마침내 짜증을 내기 시작했으며 점차 이 두 섬을 눈 위에 난 혹처럼 거추장스럽게 여기기 시작했다.

결국 킹 제독과 니미츠 제독은 과달카날 전투가 끝나고 태평양함대에 여력이 생기면 1943년 하반기로 예정된 중부태평양 진공을 시작하기 전에 이 귀찮은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1942년 10월, 미군 수뇌부는 다음 해인 43년 9월 이전에 애투와 키스카에 상륙하기로 합의했다.

 

미군이 애투 섬과 키스카 섬에 일본군이 상륙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42년 6월 10일이었다.

더치하버에 있던 제4정찰비행단장 게레즈 대령은 애투 섬과 키스카 섬으로부터 기상통신이 끊기자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수상기 모함 길리스를 키스카 섬과 더치 하버 사이의 애트카 섬에 진출시켜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을 띄웠다.

10일 오후에 카탈리나 1대가 키스카 항에 정박한 4척의 일본함정과 애투 섬에 새로 생긴 천막들을 발견하고 보고했다.

 

(알류샨 열도)

 

일본군이 애투 섬과 키스카 섬에 상륙했다는 보고를 받은 니미츠 제독은 즉시 폭격을 명령했다.

이 명령에 따라 6월 11일부터 13일까지 애트카 섬에 정박한 수상기 모함 길리스를 기지로 하여 카탈리나들이 키스카 섬을 폭격했다.

이 과정에서 카탈리나 3대가 격추되었다.

 

(PBY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육군항공대도 폭격에 가세했다.

6월 11일 아침에 5대의  B-24 리버레이터 폭격기가 움낙 섬의 포트 글렌 비행장을 이륙하여 키스카 폭격에 나섰다.

B-24 폭격기들은 5,400m 높이에서 폭격을 가했으며 이 과정에서 잭 토드 대위가 조종하던 리버레이터 1대가 일본군의 대공포에 맞아 격추되었다.

그날 오후에 5대의 B-17 폭격기가 추가로 폭격을 실시했고, 육군항공대의 중폭격기들은 12일에도 폭격을 실시했다.

6월 11일 - 13일의 폭격으로 미군항공기들은 일본구축함 1척에 손상을 입히고, 97식 비행정 1대를 파괴했다.

 

키스카 섬의 일본군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쿠릴 열도의 바라무시로에서 키스카로 전진배치된 97식 비행정들이 6월 14일에 미국의 수상기모함 길리스가 정박 중이던 애트카 섬으로 반격을 가해왔다.

게레즈 대령은 태평양함대의 암호해독반으로부터 미리 경고를 받아 13일 오후에 길리스를 철수시킴으로써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

이때 길리스를 호위하던 구축함 헐버트는 모두 알류트 족이던 애트카 섬의 주민 62명을 태우고 철수했다.

길리스의 철수 이후로는 육군항공대의 중폭격기들이 키스카 섬 폭격을 담당했다.

 

(97식 비행정.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6월 18일에는 러셀 콘 소령이 지휘하는 8대의 중폭격기가 4,500m 높이에서 폭격을 가하여 키스카 항에 정박 중이던 수송선 닛산마루를 격침했다.

닛산마루의 격침에 놀란 일본군의 수상기 모함 기미카와마루는 황급히 키스카 섬을 떠나 서쪽으로 140km 떨어진 애가투 섬으로 도망쳤다.

 

키스카 섬 폭격의 가장 큰 장애는 날씨였으므로 육군항공대는 이에 적합한 폭격전술을 확립했다.

우선 아침에 1대의 기상정찰용 중폭격기가 키스카 섬에 날아가서 만일 날씨가 좋으면 포트 글렌에서 몇 대의 중폭격기가 출격하여 폭격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기상 관계로 폭격이 불가능했다.

실제로 1942년 6월 11일부터 30일까지 키스카 섬에 대한 폭격이 실시된 것은 6번 뿐이었으며 3번은 포트 글렌을 출격했던 폭격기들이 키스카 섬의 기상이 너무 나빠서 폭격을 포기하고 돌아왔다.

7월에도 사정은 비슷하여 포트 글렌에서 폭격기가 이륙한 것은 15번이었으나 7번은 키스카 섬의 기상이 너무 나빠 그대로 돌아왔고 실제로 폭격을 실시한 것은 8회에 지나지 않았다.

 

미미한 폭격의 성과에 화가 난 북태평양군 사령관 테오발드 해군소장은 중폭격기에 의한 키스카 폭격을 폭탄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하면서 중지시켰다.

이후 제11육군항공대는 주로 P-38 전투기를 사용하여 키스카 섬 주변 상공을 초계하고 중폭격기들을 이용하여 구름이 잠깐 개인 날을 찾아 사진촬영에 주력했다.

8월 4일에 초계 중이던 P-38 전투기들이 애트카 섬 상공에서 일본군의 97식 비행정 2대를 격추했다.

 

일본군은 미군의 공격에 맞서 키스카 섬의 증강을 실시했다.

1942년 7월 3일에 정규항모 즈이가쿠, 개장항모 준요, 경항모 류조 및 즈이호를 포함한 강력한 일본함대가 잠수정 6척을 실은 수상기모함 지요다, 그리고 1,200 명의 병력과 보급품들을 실은 수송선 아르헨티나마루를 호위하여 키스카 섬에 도착했다.

이로써 전투병력과 설영대를 포함하여 1,250 명이던 키스카 섬의 수비대는 거의 2배로 늘었으며, 다음날인 7월 4일에는 제로기의 수상기형인 2식 수상전투기 6대를 실은 수상기모함 기미카와마루가 키스카 섬에 도착했다. 

 

키스카 섬에 강력한 일본함대가 도착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미국 잠수함들이 사냥을 위하여 몰려들었다.

미국잠수함 트리톤은 7월 4일에 수상기 모함 기미카와마루를 호위하던 일본구축함 네노히를 격침했다.

다음날인 7월 5일에는 그라울러가 키스카 근해에서 일본구축함 아라레, 시라누이, 가츠카에게 뇌격을 가하여 아라레를 격침하고, 시라누이와 가츠카를 대파했다.

7월 15일에는 미국잠수함 그러니언이 키스카 섬에 배치된 일본해군의 구잠정 2척을 격침했다.

7월 30일에 그러니언은 8,572 톤 짜리 수송선인 가노마루를 공격하여 어뢰 1발을 명중시켰으나 그 직후 일본군이 키스카 근해에 뿌린 200 개의 기뢰 중 하나에 부딪혀 침몰했다.

가노마루는 그러니언의 어뢰에 맞아 큰 피해를 입었으나 침몰을 모면하고 키스카 항에 들어갔다.

 

8월 들어 과달카날 전투가 시작되자 니미츠 제독은 알류샨 열도 근해에서 활동 중이던 잠수함들 중 성능이 뛰어난 함대형 잠수함들을 모두 철수시켰다.

따라서 북태평양에는 성능이 떨어지는 구형의 S-보트들만 남게 되었다.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책임지고 있던 일본제5함대 사령관 호소가야 보시로 중장은 방어를 위하여 비행장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비행장이 완성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방어를 위하여 제로기의 수상기형인 2식 수상전투기들을 파견했다.

항해에 불리한 날씨와 불안정한 지반, 그리고 미군의 방해로 인한 수송의 어려움 때문에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의 비행장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으므로 마지막까지 이 두 섬의 방공은 대공포의 지원을 받은 2식 수상전투기들이 담당했다. 

1942년 7월 5일에 6대의 2식 수상전투기가 수상기모함 기미카와마루에 실려 키스카 섬에 도착한 이래 일본해군은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상실할 대까지 모두 37대의 2식 수상전투기들을 알류샨 열도에 투입했다. 

 

(2식 수상전투기. 자세한 애용은 여기로)

 

이들 2식 수상전투기들의 운용 결과는 알류샨 열도의 기후가 비행에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었다.

알류샨 열도에 투입된 총 37대의 2식 수상전투기들 중 2대를 제외한 35대가 상실되었는데 상실된 35대 중 전투 손실은 12대 뿐이었으며, 나머지 23대는 모두 나쁜 날씨 때문에 상실했다.

미군의 경우는 더 심했다.

제11육군항공대는 1942년 6월에서 10월 사이에 72대의 항공기를 상실했는데 이들 중 전투손실은 9대 뿐이었다.

 

7월 중순에 중폭격기와 더불어 다시 카탈리나 정찰비행정들도 폭격에 가세하자 키스카의 일본군은 미군의 수상기모함이 다시 키스카에 접근했다는 것을 알았다.

1942년 7월 20일, 3대의 97식 비행정이 기습적으로 애닥 섬에 정박 중이던 미국의 수상기모함 길리스를 폭격했으나 1발의 명중탄도 기록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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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더치하버 공습과 애투 및 키스카 상륙

 

얄류샨 공격을 담당한 일본해군 북방부대는 1942년 5월에 혼슈 북쪽의 오미나토에 집결했으며, 상륙부대는 무츠카이 만과 인근의 북해도 해안에서 상륙연습을 실시했다.

 

1942년 5월 25일, 가쿠다 가쿠지 소장의 제2기동부대가 오미나토를 떠나 더치하버로 향했고, 27일에는 키스카 점령대가 오미나토를 출발했다.

키스카 점령대는 쿠릴 열도의 파라무시로에서 급유를 받은 다음 키스카 섬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28일에는 애닥-애투 점령대가 오미나토를 출항했다. 

급유함을 동반한 호소가야 중장의 주력부대는 먼저 파라무시로에 갔다가 6월 2일에 서부 알류샨 남쪽 해상에서 제2기동부대를 만나 급유를 할 예정이었다.

파라무시로에는 키스카 섬이 점령되면 전개할 수 있도록 경비정 및 비행정들이 대기했다.

 

더치하버를 향하여 접근하던 제2기동부대는 6월 2일 이른 오후에 키스카 섬 남쪽 640km 해상에서 미해군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에게 발견되었다.

즉시 제로기가 추격했고 카탈리나 비행정은 구름 사이로 도망치는데 성공했으나 대신 제2기동부대와의 접촉을 놓쳐버렸다.

이 카탈리나가 제2기동부대의 침로와 속력을 잘못 보고하는 바람에 공중수색부대의 지휘관 게레즈 대령은 제2기동부대가 알류샨 열도 북쪽의 베링 해로 들어갔다고 착각했다.

 

2일 밤 늦은 시간에 제2기동부대는 해상수색부대의 초계선을 들키지 않고 통과했는데 안개가 짙은 이유도 있었지만 초계정들이 대부분 시간 내에 초계선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 더 큰 이유였다.

사실 해안경비대의 경비정 오논다가는 더치하버가 공습을 받을 때 항 내에 정박하고 있었다.

 

(AL 작전 상황도. 출처 : History of U.S. Naval Operations in World War II, Vol. IV: Coral Sea, Midway and Submarine Actions, May--August, 1942 , P. 94, 일부 발췌)

 

제2기동부대는 미군에게 들키지 않은 채 3일 오전 2시 40분에 더치하버에서 남쪽으로 270km 떨어진 발진해역에 도달하여 공격대를 발진시켰다.

류조에서는 지상공격용 폭탄을 장비한 97식 함공 15대와 호위를 맡은 제로기 3대가 이함했고, 준요에서는 99식 함폭 15대와 호위를 맡은 제로기 13대가 출격했다.

제2기동부대의 상공은 구름 높이가 120m 밖에 안 될 정도로 시계가 불량하여 류조와 준요의 함재기들은 스트라이크 패키지 형성을 포기하고 각자 더치하버를 향하여 날아갔다.

준요의 함재기들은 더치 하버를 찾지 못하고 제로기 2대를 제외한 모든 함재기가 모함으로 돌아왔으며, 제로기 2대는 도중에 류조 공격대를 만나 합류했다.

그런 기상 상태에서 준요의 모든 함재기가 무사히 돌아온 것도 사실 기적적인 일이었다.

 

(일본해군의 경항모 류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류조 공격대를 이끈 야마구치 마사유키 대위는 뛰어난 항법능력을 발휘하여 부하들을 더치하버로 이끌었다.

6월 3일 오전 5시 40분, 더치하버에 정박 중에던 수상기 모함 길리스의 레이더가 접근하는 일본기들을 발견했다.

길리스의 보고를 받은 더치하버에서는 즉시 경보를 발령했는데 이 경보는 앵커리지, 코디액 섬, 그리고 코디액 섬 남쪽 해상의 테오발드 소장에게까지 전달되었으나 하필이면 더치하버 상공을 책임지고 있던 움낙 섬의 포트 글렌에는 통신불량으로 전달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불과 100km 서쪽에서 P-40 전투기들이 전투초계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기들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더치하버 상공에 도달했다.

 

사실 더치하버 동쪽에는 콜드베이 비행장이 있었으나 이 비행장의 일차적인 임무는 포트 글렌와 코디액 섬에 비행기들을 공급하는 역할이었으므로 해군인 더치하버의 지휘관은 콜드베이 비행장에 요격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었을 뿐 아니라 구태여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당시 콜드베이 비행장에 요격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제11육군항공대 사령관 버틀러 준장은 하필이면 그때 코디액 섬의 지휘 중추를 떠나 알래스카 방어 사령관 버크너 소장과 함께 앵커리지에 머물고 있었으며 제8임무부대 사령관 테오발드 소장은 무선침묵을 유지한 채로 코디액 섬 남쪽 640km 해상에 있었다.

이렇게 미군의 지휘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으므로 더치하버의 지휘관은 자신이 가진 것만으로 어떻게든 대응해야만 했다.

 

일본기들이 도착했을 때 더치하버 상공은 구름 높이가 약 3,000m 정도로 폭격에 적당한 날씨였다.

가장 먼저 진입한 제로기들이 저공으로 기총소사를 가한 후 97식 함공들이 소대 단위로 목표물인 연료저장고, 통신소, 육군기지인 포트미어스의 막사, 그리고 계류 중인 카탈리나 정찰비행정들을 폭격하여 피해를 입혔다.

폭탄 1발은 대공포대를 명중시켰으며 빗나간 폭탄 1발이 교회에 떨어졌다.  

 

(일본기의 공습을 받아 불타는 더치하버의 건물들. 1942년 6월 3일에 찍은 사진이다.)

 

미군의 사망자는 25명이었으며, 카탈리나 비행정 1대가 부서졌다.

일본측에서는 97식 함공 1대가 대공포에 의하여 격추되었다.

폭격 도중 일본기 1대가 우날래스카 섬 북해안의 마쿠신 만에 정박 중인 구축함 5척을 발견했다.

 

돌아온 조종사들로부터 미군의 구축함에 대하여 들은 가쿠다 제독은 오전 9시 45분에 이 구축함들으로 노리고 2차 공격대를 발진시켰다.

류조에서 제로기 6대와 97식 함공 6대, 그리고 준요에서 제로기 6대와 99식 함폭 15대가 발진했다.

여기에 더하여 중순양함 마야와 다카오에서 각각 2대씩의 95식 수상정찰기를 참가시켰다.

 

(나카지마 E8N 95식 수상정찰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2차 공격대가 더치하버 상공에 도달했을 때에는 구름이 너무 짙게 끼어서 도저히 목표를 확인할 수가 없었으므로 결국 2차 공격대는 공격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이때 95식 수상정찰기 4대는 더치하버 부근을 헤매다가 움낙 섬 상공에 들어섰고 여기서 전투초계 중이던 P-40 전투기 4대로부터 공격을 받아 2대는 격추되고 2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살아남은 2대는 겨우 모함까지 돌아오기는 했으나 다시는 사용하지 못할만큼 심하게 부서졌다.

포트 글렌의 존재를 모르던 제2기동부대의 참모들은 95식 수상정찰기들을 공격한 미군 전투기들이 도대체 어디서 날아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3일 정오가 되어 2차 공격대를 수용한 제2기동부대는 애닥 섬을 폭격하기 위하여 서쪽으로 물러났다.

 

그동안 미군 측에서는 제2기동부대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으나 수색에 실패했다.

구름이 많이 낀 날씨가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었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6월 2일의 잘못된 정찰보고로 인하여 카탈리나 정찰비행정들을 지휘하고 있던 공중수색부대 지휘관 게레즈 대령이 일본항모기동부대가 북쪽인 베링해에 있다고 착각한 점이었다.

따라서 카탈리나 정찰비행정들은 더치하버의 북서쪽을 집중적으로 뒤졌으나 실제로는 남서쪽에 있던 제2기동부대를 찾을 수가 없었다. 

 

제2기동부대는 구축함에 대한 급유를 실시한 후 애닥 섬에 접근했으나 6월 4일 새벽이 되자 애닥 섬의 기상이 너무 나빠서 도저히 폭격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가쿠다 제독은 더치하버를 한 번 더 폭격하기로 하고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4일 오후 2시30분, 류조에서 제로기 6대, 97식 함공 9대, 준요에서 제로기 5대, 97식 함폭 11대를 이함시켰다.

일본기들은 더치하버를 정확하게 찾아와서 폭격을 가했다.

연료 저장고 3개가 추가로 폭격을 받아 이틀 동안 4개의 연료저장고에서 420만 리터가 넘는 경유가 불에 타서 사라졌다.

항내에 정박하여 막사 역할을 하던 노스웨스턴 호가 대파되었고 병원도 폭격을 받았으며 카탈리나 비행정 1대가 격추되었다.

이 폭격으로 18명의 미군이 추가로 전사함으로써 이틀에 걸친 일본군의 더치하버 폭격으로 전사한 미군은 육군 33명을 포함하여 43명이었고, 부상자는 64명이었다.

 

전날과 달리 이번에는 미리 경고를 받은 포트 글렌의 P-40 전투기 8대가 일본기들을 요격하여 99식 함폭 2대를 격추하고 다른 2대에 큰 피해를 입혔다.

피해를 입은 99식 함폭 2대는 준요로 돌아가지 못하고 부근 해상에 불시착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2대의 P-40 전투기가 격추되었다.

일본군은 이때서야 움낙 섬에 있던 포트 글렌 비행장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더치하버 폭격이 진행되는 동안 미해군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들이 제2기동부대를 발견했고 미육군항공대의 폭격기들이 공습을 가했다.

공습은 비효율적으로 이루어졌다.

테오발드 소장은 레이더를 장착한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이나 B-17 폭격기의 유도를 받아 쌍발폭격기들이나 B-17 중폭격기들이 대규모 집단을 이루어 한꺼번에 폭격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당시까지 해군과 육군항공대는 합동작전 경험이 없었으므로 이러한 작전을 제대로 실시할 수 없었다.

 

폭격기들의 제1진은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으로부터 적함대의 접촉을 놓쳤다는 보고를 듣자 기지로 돌아가 버렸다.

B-17 폭격기 8대로 이루어진 제2진은 접촉을 놓쳤다는 보고를 듣자 진형을 유지한 채로 추가 보고를 기다리지 않고 사방으로 흩어져서 일본함대를 찾아 다녔다.

그들은 대부분 마지막 접촉 보고에 따라 일본함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위치에 도달하자 구름 때문에 해면이 보이지도 않는 상태에서 높은 고도에서 폭탄을 떨어뜨렸다.

나중에 테오발드 제독은 그런 식의 폭격으로는 키스카 섬도 제대로 맞출 수 없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제2기동부대는 B-17 폭격기들의 공습 당시 당시 자신들이 공격을 받는 줄도 몰랐다고 한다.

B-17 폭격기 중의 1대만이 저공으로 내려와 육안으로 제2기동부대를 확인하고 폭격을 가했으나 1발도 명중시키지 못하고 일본함대의 대공포화에 맞아 격추되었다.

 

어뢰를 달고 출격한 B-26 쌍발폭격기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뢰 조작에 익숙하지 못한 조종사들은 대부분 너무 높은 고도에서 어뢰를 투하했고 어뢰들은 해면에 닿는 충격으로 내부가 망가져서 그대로 가라앉았다.

테오발드 제독은 그런 식으로 아까운 어뢰를 낭비한 육군항공대를 비난했다.

6월 4일 하루동안 게레즈 대령의 공중수색부대는 제2기동부대에 접근하다가 제로기의 요격을 받아 카탈리나 비행정 4대를 상실했다. 

 

코디액 남쪽 640km 해상에서 무선 침묵을 유지한 채로 휘하 부대들 사이의 무전을 듣고 있던 테오발드 소장은 전투에 참가한 부대들이 우왕좌왕 헤매는 모습을 도저히 참지 못하고 직접 지휘하기 위하여 4일 오후에 기함 내시빌을 타고 주력부대를 떠나 코디액 섬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내시빌이 코디액 섬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인 5일 새벽 5시로서 이미 상황이 종료된 다음이었다.

 

더치하버 공습이 진행되고 있던 4일 오후에 야마모토 제독이 북방부대 사령관 호소가야 제독에게 키스카 공략대와 애닥-애투 공략대를 일본본토로 돌려보내고 제2기동부대와 북방부대의 본대는 즉시 미드웨이 방면으로 남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미드웨이 근해에서 제1기동부대가 몰살당하는 참사가 벌어진 것이었다.

제2기동부대는 공격대를 수용하자마자 남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몇 시간 후 다시 키스카 섬과 애투 섬 공략을 실시하라는 야마모토 제독의 명령이 도착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제2기동부대는 호소가야 제독의 본대와 만나기 위하여 서쪽으로 변침했다.

 

이로서 이틀에 걸친 더치하버 공습이 끝났다.

더치하버는 연료저장고를 비롯한 몇몇 시설이 폭격을 받아 43명의 전사자와 64명의 부상자를 기록했지만 여전히 기능을 발휘했다.

해군은 6대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을 상실했고 제11육군항공대는 P-40 전투기 2대와 B-17 폭격기 1대를 상실했다.

이틀 간의 공습과정에서 일본군은 수상정찰기 4대, 97식 함공 1대, 99식 함폭 4대 그리고 제로기 1대를 상실했는데 일본군이 상실한 유일한 제로기가 미군에게는 크나큰 선물이 되었다.

 

류조 소속의 제로기 조종사인 코가 타다요시 1등비조는 6월 4일에 더치하버 상공에서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1대를 격추했는데 카탈리나의 반격을 받아 기체가 손상을 입었다.

류조까지 돌아가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코가 1등비조는 더치하버 바로 북서쪽에 있는 아쿠탄 섬이라는 조그만 섬에 불시착했다. 

착륙에 적당한 평지를 발견한 코가 1등비조는 동체 착륙을 하지 않고 바퀴를 내렸는데, 평지처럼 보였던 곳은 사실 늪이었다.

제로기의 바퀴가 늪에 닿는 순간 제로기는 그대로 뒤집혔고 코가 1등 비조는 그 충격으로 목이 부러지면서 즉사했으나 기체 자체는 크게 부서지지 않았다.

 

(미군 병사들이 코가 1등 비조의 제로기를 살펴보고 있다.)

 

1달 후인 1942년 7월 10일에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이 우연히 아쿠탄 섬의 제로기를 발견했고 다음날인 11일에 정찰대가 상륙했다.

15일에 제로기는 더치하버로 옮겨졌으며 8월 1일에는 미본토 서해안의 시애틀로 옮겨졌다.

미해군은 이 제로기를 샌디에이고로 옮겨 수리를 마친 후 1942년 9월 20일부터 10월 15일까지 24회의 시험비행을 실시했다.

그리하여 제로기의 강점과 약점을 철저하게 파악한 미군은 이 정보를 바탕으로 제로기를 상대로 한 공중전의 전술을 다듬었다.

 

사실 아쿠탄 제로기보다 반년 이상 빠른 1941년 말에 중국전선에서 온전한 상태의 제로기가 연합군 손에 최초로 들어왔었다.

그러나 이 제로기는 여러가지 사정상 1943년이 넘어서야 본격적인 연구가 가능한 미본토로 들어왔고 그때는 이미 아쿠탄 제로기에 대한 분석이 끝나 자세한 보고서가 나온 다음이었다.

 

한편 일본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은 1942년 6월 4일에 미드웨이 근해에서 제1기동부대의 항공모함 4척이 전멸하는 참사가 벌어지자 북방부대가 실시 중이던 애투 및 키스카 상륙작전을 중단하고 제2기동부대를 남하시켜 전투를 지속하려고 했다.

그러나 제2기동부대가 미드웨이 근해에 도달하기까지 48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깨닫자 남하 명령을 취소하고 애투 및 키스카 상륙작전을 속행하도록 명령했다.

나중에 애투 및 키스카 섬은 일본 선전 기관이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를 호도하는 좋은 소재가 된다.

 

6월 4일 오후에 갑작스런 작전 중단 통보를 받고 일본으로 향하던 오노 다케지 대좌의 키스카 점령대는 키스카 상륙을 실시하라는 새로운 명령을 받고 변침하여 키스카 섬으로 접근했다.

도중에 애닥-애투 점령대로부터 수상기모함 기미가와마루와 구축함 쇼카제가 합류했다.

 

키스카 점령대는 1942년 6월 6일 오전 6시부터 키스카 섬에 상륙을 시작했다.

수송선 하쿠산마루에서 무카이 히푸미 소좌가 이끄는 해군 마이즈루 진수부 제3특별육전대 550명이 다이하츠로 옮겨타고 해안에 상륙했다.

예상과 달리 저항은 없었으며 이어서 설영대 700 명이 상륙하기 시작하여 상륙은 오전 8시 30분에 무사히 끝났다.

키스카 섬에서는 비무장의 미군 기상대원 10명이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애닥 섬을 향하여 가던 애닥-애투 점령대 사령관 오모리 센타로 소장은 5일 아침에 호소가야 중장으로부터 애닥 섬 침공을 생략하고 바로 애투 섬에 상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호소가야 중장이 애닥 섬 상륙을 포기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쩌면 6월 4일의 더치하버 공습에서 움낙 섬의 포트 글렌에 미군 비행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움낙 섬으로부터 560km 떨어진 애닥 섬에 접근했다가 상륙함대가 미군의 공습을 받을 수 있다고 걱정했을 수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6월 5일 아침에 애닥 섬 남서쪽 1,100km 해상까지 접근했던 애닥-애투 점령대는 애투 섬을 향하여 변침했다.

 

애닥-애투 점령대는 6일 오전 6시 30분에 애투 섬 북쪽의 홀츠 만에 들어섰으나 자욱한 안개와 부실한 지도 때문에 상륙지점을 찾는데 애를 먹었다.

상륙부대인 북해지대 1,143명이 지대장 호츠미 마츠토시 소좌의 지휘에 따라 홀츠 만의 일각에 상륙한 것은 홀츠 만에 들어선지 14시간 40분 만인 오후 9시 10분이었다.

북해지대는 상륙하자마자 남쪽의 치차고프 마을로 행군을 시작하여 상륙 12시간 만인 7일 오전 10시 경에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마을에 진입했다.

애투 섬에는 전도사인 존스 부부와 어린이 15명을 포함한 주민 42명 뿐이었다.

존스 부부는 일요일에는 목사 역할을 하고 평소에는 초등학교 선생님에다가 기상관측요원까지 겸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마을에다가 위협사격을 가하자 존스 씨는 무전으로 더치하버에 일본군 상륙 사실을 보고했으나 더치하버에서는 수신하지 못했다. 

잠시 후 마을이 일본군에 의하여 점령되자 존스 부부는 권총으로 자살했다.

 

애투 섬을 점령한 북해지대는 3개월의 점령기간 동안 모두 알류트 족인 42명의 주민들과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나 8월 말에 북해지대가 키스카 섬으로 옮길 때 주민들은 모두 북해도의 오타루로 이송되어 억류되었다. 

오타루에 억류된 애투 섬의 주민들은 열악한 환경과 비인간적인 대우로 인하여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3년 남짓한 억류 기간 동안에 42명 중 40% 가까운 16명이 사망하여 종전 이후에 애투 섬으로 돌아온 주민은 26명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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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AL 작전 

 

일본해군이 미드웨이 작전과 동시에 실시한 알류샨 침공 작전인 AL 작전은 오랫동안 미드웨이를 노린 MI 작전의 양동작전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사실 AL 작전은 MI 작전과는 별개의 작전이며 단지 미해군이 다른 곳에서 바쁜 틈에 쉽게 성공시키기 위하여 대본영 군령부가 MI 작전에 끼워넣은 것이다.

 

AL 작전의 목표는 알류샨 열도 서단의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장악하여 미군이 알류샨 열도를 통하여 일본을 침공하거나 이곳에 비행장을 만들어 일본을 폭격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그리고 만일 필요하면 애투와 키스카 섬을 활용하여 미국과 소련 사이의 보급로를 차단할 생각이었다.

 

일본군의 계획을 보면 그들이 알류샨 열도의 기후와 지형에 대하여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알류샨 열도의 기후는 비행과 항해에 끔찍한 수준이었다.

섬들은 기복이 심하여 비행장을 만들 평지가 드물었으며 스펀지처럼 물렁거리는 지반은 건물을 짓기에 부적당했다.

따라서 알류샨 열도를 거쳐 수십만 대군이 일본을 침공하거나 이곳에 거대한 비행장을 만들어 수백대의 장거리 폭격기로 일본을 폭격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AL 작전은 3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1단계는 더치하버를 공습하고 애투 섬과 키스카 섬에 상륙하여 장악하는 단계로서 6월 12일까지 끝내게 되어 있었다.

제2단계는 미군의 반격을 막기 위한 것으로 경항모 즈이호를 포함하여 미드웨이 점령대 소속의 함정들이 북방부대에 합류하게 되어 있었다.

제3단계는 제2단계가 6월 20일까지 끝나지 않을 때에 발동하게 되어 있었으며 전함 4척(공고, 하루나, 기리시마, 히에이)를 포함하여 MI 작전에 참가했던 함정들이 대거 북방부대에 합류하게 되어 있었다.

 

실제로는 제1기동부대가 미드웨이 해전에서 참패하고 알류샨 열도 방면에서 미군의 반격이 미미함에 따라 AL 작전은 제1단계로 끝났다.

 

일본군은 알류샨 열도의 미군 병력을 실제보다 훨씬 강력하게 추정했다.  

미육군 5,425명과 해군 및 해병대 639명이 지키던 더치하버는 완편된 1개 보병사단이 지키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10명의 비무장 기상관측요원이 있던 키스카 섬은 1개 중대의 해병대가 지키는 것으로 생각했다.

군인은 1명도 없이 존스 부부가 목사 겸 지역 사회의 교사 및 지도자 역할을 맡고 있던 애투 섬에는 최소한 2개 중대 이상의 병력이 주둔 중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날씨 때문에 알류샨 열도에 대한 항공정찰이 실패하자 일본군은 잠수함을 파견했다.

I-9 가 5월 25일과 26일에 웨스턴 섬을, I-25 가 5월 26일과 27일에 코디액을, 그리고 I-19가 5월 28일과 29일에 더치하버를 정찰했으나 수면에서 잠망경으로 바라보는 정찰방식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예를 들어 더치하버를 정찰한 I-19 는 움낙 섬도 정찰했지만 포트 글렌 비행장을 발견하지 못했다.

 

AL 작전을 담당한 북방부대는 기함 나치에 승좌한 제5함대 사령관 호소가야 보시로 중장이 지휘했다.

북방부대는 크게 3개로 나뉘어져 있었다.

개장항모 준요와 경항모 류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제2기동부대는 류조에 승좌한 제4항공전대 사령관 가쿠다 가쿠지 소장의 지휘 하에 6월 3일부터 더치하버를 공습하여 미군이 애투와 키스카 상륙작전을 방해하지 못하게 만드는 역할을 맡았다.

해군특별육전대 550명과 설영대 700 명으로 이루어진 키스카 점령대는 키스카 섬을 점령한 후 방어시설을 건설할 예정이었다.

육군 1,143명으로 이루어진 애닥-애투 점령대는 먼저 애닥 섬에 상륙하여 방어군을 섬멸하고 미군 기지를 파괴한 후에 철수하여 다시 애투 섬에 상륙해 점령할 예정이었다.

 

알류샨 열도를 공격하려는 일본군의 의도를 1942년 5월 초에 알아낸 미태평양함대 사령관 니미츠 대장은 미드웨이 해전 준비에 주력하는 가운데서도 알래스카의 방어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는 미드웨이 해전 준비에 지장을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전 태평양을 샅샅이 뒤져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3척, 구축함 9척, 잠수함 6척을 찾아내어 로버트 테오발드 소장 지휘 하에 알래스카로 파견했다.

임박한 일본군의 공세를 앞두고 1942년 5월 21일에 제8임무부대(Task Force 8)가 편성되었는데 사령관 테오발드 소장은 파커 대령의 알래스카 해군은 물론 버틀러 준장의 제11육군항공대와 버크너 소장의 알래스카 방어 사령부에 대한 명령권까지 부여받았다.

제8임무부대가 편성되기 2주 전부터 알래스카 해군과 알래스카 방어 사령부는 태평양 함대 사령부로부터 일본군의 침공에 대한 경고를 받고 알류샨 열도를 포함한 알래스카에서 민간인과 상선들을 최대한 빨리 철수시키고 반면에 증원군을 투입하느라 정신없이 일하고 있었다.

 

제8임무부대의 함정들은 태평양 여러 곳에 흩어져 있어서 집결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실제로 테오발드 소장이 직접 지휘하는 제8임무부대의 주력부대인 순양함 5척과 구축함 4척이 코디액 섬 남방 640km 해상에서 합류한 것은 더치하버 공습 직전인 6월 3일 오전 5시였다.

 

테오발드 소장은 5월 28일에 코디액 섬에 도착하여 버틀러 준장, 파커 대령, 그리고 카탈리나 기들을 지휘하던 게레즈 대령을 포함한 주요 지휘관 및 참모들과 4일 간에 걸친 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제8임무부대는 6개의 부대로 나뉘어졌다.

 

1. 주력 부대 : 순양함 5척과 구축함 4척으로 이루어져 테오발드 소장이 직접 지휘했다.

코디액 섬 남쪽 해상을 지키다가 기회를 보아 일본함대와 교전할 예정이었다.

 

2. 해상 수색 부대 : 알래스카 해군의 초계정으로 이루어져 일본군의 접근을 감시하기로 했다. 

 

3. 공중 수색 부대 : 콜드 베이, 샌드 포인트, 그리고 더치하버에 정박한 수상기 모함 3척이 운용하는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20대와 육군 항공대의 B-17 폭격기 1대로 이루어져 매일 해상을 수색하면서 일본군의 접근을 감시하기로 했다.

 

4. 공습부대 : 포트 글렌, 콜드베이, 그리고 코디액에서 출격하는 육군항공대의 전투기 및 폭격기로 이루어져 일본함대의 위치가 파악되면 공습을 가할 임무를 맡았다.

필요하면 앵커리지로부터 항공기들을 증원받을 예정이었다.

 

5. 구축함 습격대 : 9척의 구축함으로 이루어져 우날래스카 섬 북안의 마쿠신 만에 대기하고 있다가 일본함대가 더치하버나 콜드베이에 접근하면 공격을 가할 예정이었다.

 

6. 잠수함 부대 : 6척의 잠수함으로 이루어져 일본함대의 접근로를 감시하고 공격할 예정이었다.

 

(1940년 당시의 알래스카. 출처 :  The Corps of Engineers - The War Aginst Japan. P.13)

 

협의 과정에서 가장 큰 난관은 육군항공대의 배치 문제였다.

일본함대가 최소한 2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항모가 없는 제8임무부대로서는 우선 일본항모를 처리해야만 수상전투가 가능했는데 항모 타격 임무는 육군항공대의 폭격기들이 담당해야 했다.

테오발드 소장은 최대한 많은 폭격기들을 항모 공격에 동원하기 위하여 전진 비행장인 포트 글렌과 콜드 베이에 모든 항공기들을 집결시키고 싶어했다.

그러나 제11육군항공대 사령관 버틀러 준장은 대부분의 항공기를 앵커리지와 코디액 섬에 주둔시키고 있다가 마지막 순간에 전방 비행장으로 진출시키기를 원했고 알래스카 방어 사령관 버크너 소장도 버틀러 준장을 지지했다.

강력한 반대에 직면한 테오발드 소장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휘두르는 대신 버틀러 준장을 간곡하게 설득하여 결국 총 163대의 육군항공대 항공기 중에서 57대를 포트 글렌과 콜드 베이에 전진배치시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두뇌는 명석하나 성격이 불같아서 육군으로부터 '역사상 가장 화를 잘 내는 제독' 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은 테오발드 소장으로서는 그야말로 최대한으로 인내한 셈이었다.

 

(제8임무부대 사령관 로버트 테오발드 소장)

 

하지만 제11육군항공대로서도 할 말은 있었다.

당시 포트 글렌과 콜드베이는 막 가동을 시작한 신생 기지로 격납고나 옹벽 등 지상의 항공기를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 전무했다.

전쟁 첫날 진주만과 필리핀의 클라크 기지에서 일본기의 공습에 의하여 다수의 항공기를 지상에서 상실한 뼈아픈 경험을 가진 육군항공대는 이후 항공기 보호 시설이 빈약한 기지에서 작전하는 것을 꺼렸다.

더구나 당분간 알래스카로의 항공기 증원은 없을 예정이었다.

 

워싱턴에서는 진주만을 기습당한데 이어 태평양 방면에서 연속적으로 일본군에게 끔찍한 패배를 거듭하면서 생긴 

 

'지금 당장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anything can happen now')

 

증후군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높으신 분들 중 많은 숫자가 일본이 미본토 서해안을 직접 공격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알래스카에서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는 항공기 수백대가 오지도 않을 일본함대를 기다리면서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한 미본토 서해안에 가득 쌓여 있었다.

심지어 일본해군과 건곤일척의 대해전을 앞두고 있던 니미츠 제독의 B-17 폭격기 증원 요청도 거절당하는 판이었으니 당시 미본토 서해안 침공에 대한 워싱턴의 공포와 편집증이 어느 정도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선 순위의 맨 뒤쪽에 있는 알래스카의 제11육군항공대가 추가로 비행기를 탐낸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소리였다.

 

항공기 보호 문제와 더불어 제11육군항공대는 콜드 베이 기지는 폭격기 12대와 전투기 24대, 포트 글렌은 기종을 불문하고 12대가 넘는 항공기의 작전을 지원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사실 콜드베이 기지는 차치하고라도 포트 글렌의 열악한 활주로 상태를 감안하면 육군항공대로서도 나름대로 테오발드 소장의 요구를 들어주려고 노력한 셈이었다.

 

태평양함대의 암호해독반에서는 1942년 5월 초에 일본군의 알류샨 열도 공격 의도를 알았지만 정확한 목표는 파악하지 못했으므로 테오발드 소장은 일본군의 목표가 더치하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5월 28일에 암호해독반이 일본군의 목표가 서부 알류샨의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이라는 사실을 파악하자 니미츠 제독은 테오발드 소장에게 이 내용을 통보했다.

그러나 테오발드 소장은 일본군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서부 알류샨의 두 섬을 노리고 있다는 새로운 정보가 진짜 목표로부터 그를 끌어내려는 일본군의 역정보가 아닐까 우려했다.

경찰병력이 얼마 없는 마을에 중무장한 은행강도단이 접근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와서 마을 중앙의 은행을 지키고 있는데 갑자기 은행강도단의 목표가 마을 외곽의 우체통이라는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다고 해서 경찰이 은행을 비워두고 아무 가치도 없는 우체통을 구하러 달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은행강도단은 진짜로 마을 중앙의 은행 대신 편지 몇 통만 들어있던 마을 외곽의 우체통을 털었다!'

 

이것이 일본의 애투 섬 및 키스카 섬 상륙을 바라보는 미해군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실제로 미드웨이 해전이 끝난 후에 일본군이  애투와 키스카에 상륙하기 위하여 상당한 전력을 할애했다는 것을 알게 된 해군장관 프랭크 녹스는

 

"일본은 현대전을 이해할 수 없거나 그것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

("Japan was either unable to understand modern war or not qualified to take part in it.")

 

고 말했으며, 해군전사를 집필한 새뮤얼 모리슨 제독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일본은 전쟁 중에 숱한 바보 짓을 했지만 적어도 우리가 아는 한 알류샨 열도를 거쳐 미국을 침공하겠다는 따위의 멍청한 짓은 한번도 심각하게 고려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우리가 그 짓을 거꾸로 시도할만큼 바보라고 생각했다!"

(The Japanese did many foolish things during the war, but never, so far as we know, did they seriously contemplate anything so idiotic as invading the United States via the Aleutians - yet they thought we were foolish enough to try the reverse!)

 

테오발드 소장의 계획은 일본군이 더치하버를 노리고 있다고 보고 더치하버에 접근하는 일본함대, 특히 항공모함들을 무력화시키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일본 항모를 제거하지 못하면 항모가 없는 제8임무부대의 수상함들이 서쪽으로 진출해봐야 일본 항모의 먹이가 될 뿐이었다.

구축함의 야간공격을 시도하려고 해도 북위 55도 이상의 고위도에서는 6월에 밤이 거의 없었다.

 

테오발드 소장의 계획에 따라 알래스카 해군의 기함인 찰스턴은 어선을 개조한 초계정 14척과 해안경비대의 경비정 5척과 함께 얄류산 열도 서쪽으로 나아가 초계선을 펼칠 예정이었다.

해안경비대의 경비정 5척은 움낙 섬 서쪽으로 나아가 북태평양에서 배링 해로 넘어가는 해협 출구를 감시하고 어선을 개조한 초계정 14척은 찰스턴과 함께 움낙 섬의 남서쪽 해상에 전개하여 접근해오는 일본함대를 감시할 예정이었다.

 

(AL 작전 상황도. 출처 : History of U.S. Naval Operations in World War II, Vol. IV: Coral Sea, Midway and Submarine Actions, May--August, 1942 , P. 94 에서 일부 발췌)

 

일본함대가 발견되면 해군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과 LB-30 장거리 초계기가 접촉을 유지하고 이어서 육군항공대의 폭격기들이 일본항공모함을 목표로 공습을 실시할 것이었다.

일단 일본항모들이 무력화되면 코디액 섬 남쪽 해상에서 대기 중이던 테오발드 소장의 주력부대가 더치하버로 접근하는 일본함대의 측면을 후려치고 마쿠신 만에서 대기중이던 구축함 9척이 튀어나와 육군항공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일본군 상륙함대를 공격할 것이었다.

잠수함들은 일본함대의 예상 침로에 매복하고 있다가 기회가 오면 언제든지 공격을 가할 예정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공격을 물리치고 소수의 일본군이 상륙에 성공한다면 더치하버를 지키던 증강된 1개 연대 규모의 수비대가 마무리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테오발드 소장의 예상대로 되지 않았다.

먼저 알래스카 해군의 초계선 진출이 늦어져서 일본함대가 초계선을 통과한 이후인 6월 3일에야 초계선에 도착했다.

이들은 곧 철수 명령을 받고 돌아왔는데 어쩌면 초계선 진출이 늦어진 것이 쓸데없는 희생을 줄이는 결과를 가져왔을 수도 있다.

 

일본함대를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해군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으로 1942년 6월 2일 이른 오후에 키스카 섬 남쪽 640km 해상에서 제2기동부대를 발견했으나 제로기가 쫓아오자 도망치다가 접촉을 잃어버렸다.

 

테오발드 소장은 하와이 방면으로부터 북상 중인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 경순양함 호놀룰루 및 구축함 2척과 합류하기 위하여 6월 1일에 경순양함 내쉬빌을 타고 코디액 섬을 떠났다.

무선 침묵을 유지한 채로 코디액 남방 해상으로 나아간 테오발드 소장은 6월 3일 오전 5시에 북상 중이던 함정들을 만나 제8임무부대의 주력부대(제8.6임무그룹)을 형성했다.

이때 이미 류조의 함재기들은 더치하버를 향하여 날아가고 있었다.

 

여기서 AL 작전에 참가한 일본해군 북방부대의 전투서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주력부대(제5함대 사령관 호소가야 보시로 중장)

중순양함 1척(나치), 구축함 2척(이나주마, 이카주치), 급유함 2척(후지산마루, 닛산마루), 수송선 3척

 

2. 제2기동부대(제4항공함대 사령관 가쿠다 가쿠지 소장)

경항모 류조(제로기 12대, 97식 함공 18대), 개장항모 준요(제로기 18대, 99식 함폭 15대), 중순양함 2척(마야, 다카오), 구축함 3척(아케보노, 우시오, 사자나미), 급유함 1척(데이요마루)

 

3. 애닥-애투 점령대

경순양함 1척(아부쿠마), 구축함 5척(와카바, 네노히, 하츠하루, 하츠시모, 쇼카제), 수상기 모함 1척(기미가와마루), 소해함 1척(마가네마루), 수송선 1척(기누가사마루)

상륙부대 : 육군 1,143명(호즈미 마츠토시 소좌)

 

4.  키스카 점령대

경순양함 2척(기소, 다마), 보조순양함 2척(아사카마루, 아와타마루), 구축함 3척(히비키, 아카츠키, 호카제), 소해함 3척(하쿠호마루, 가이호마루, 신코츠마루), 수송선 2척(하쿠산마루, 구마가와마루)

상륙부대 : 해군특별육전대 550명(무카이 히푸미 소좌, 하쿠산마루), 설영대 700명(구마가와마루)

 

이외에 전함 4척(휴가, 이세, 후소 , 야마시로), 경순양함 2척(기타가미, 오이), 구축함 12척, 급유함 2척으로이루어진 강력한 다카스 시로 중장의 함대가 북방부대를 지원하게 되어 있었다.

다카스 함대는 야마모토 제독의 MI 작전 주력부대와 행동을 같이하다가 6월 3일에 북방부대를 지원하기 위하여 북쪽으로 향했으나 실제로 전투에 개입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다카스 함대를 제외하면 일본해군의 북방부대는 합계 개장항모 1척, 경항모 1척, 수상기모함 1척, 중순양함 3척, 경순양함 3척, 보조순양함 2척, 구축함 13척, 소해함 4척, 급유함 3척, 수송선 6척의 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함재기는 63대였다.

 

여기에 맞서는 미군 제8임무부대의 전투서열은 다음과 같다.

 

1. 주력부대(제8.6임무그룹, 로버트 테오발드 소장)

중순양함 2척(인디애나폴리스, 루이스빌), 경순양함 3척(내시빌, 센트루이스, 호놀룰루), 구축함 4척(그리들리, 맥콜, 길머, 험프리)

 

2. 공중 수색 부대(제8.1임무그룹, 레슬리 게레즈 대령)

수상기 모함 3척(윌리엄슨, 길리스, 카스코), 카탈리나정찰비행정 20대

 

3. 해상 수색 부대(제8.2임무그룹, 랄프 파커 대령)

포함 1척(찰스턴), 해안경비대 소속 경비정 5척(하이다, 오논다가, 사이언, 오로라, 본햄), 어선을 개조한 초계정 14척, 급유함 1척(오리올)

 

4.공습 부대(제8.3임무그룹, 윌리엄 버틀러 준장)

콜드베이 기지(P-40 전투기 25대, B-26 쌍발폭격기 12대, B-17 중폭격기 5대, LB-30 장거리 초계기 1대), 포트 글렌(P-40 전투기 8대, B-26 쌍발폭격기 8대), 코디액 기지(P-39 전투기 15대, P-40 전투기 17대, B-17 중폭격기 5대, LB-30 장거리 초계기 2대), 엘멘도프 기지(P-36 전투기 4대, P-38 전투기 25대, P-39 전투기 15대, B-18 쌍발폭격기 5대, B-26 쌍발폭격기 12대, B-17 중폭격기 7대, LB-30 장거리 초계기 2대)

 

5.구축함 습격대(아이엇 크레이그 중령)

구축함 9척(케이스, 레이드, 브룩스, 샌즈, 케인, 덴트, 탤벗, 킹, 워터스)

 

6. 잠수함 부대(버튼 레이크 중령)

잠수함 6척(S-18, S-23, S-27, S-28, S-34, S-35)

 

7. 급유대(휴스턴 메이플즈 대령)

 

급유함 2척(새빈, 브라조스), 증기선 1척(코멧)

 

합계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3척, 구축함 13척, 잠수함 6척, 수상기모함 3척, 포함 1척, 해안경비정 5척, 어선을 개조한 초계정 14척, 급유함 2척, 증기선 1척이었다.

항공기는 해군이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20대와 LB-30 장거리 초계기 5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제11육군항공대는 전투기 109대, 쌍발폭격기 37대, B-17 중폭격기 17대, 합계 163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B-17 중폭격기 중에서 해상수색 레이더를 장착한 3대는 공중수색부대에 포함되어 일본함대를 수색하는 임무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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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방어준비 

 

1939년 9월 1일에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미국영토의 1/5에 해당하는 170만 ㎢ 이상의 넓이를 가진 알래스카를 지키던 미육군 병력은 스카그웨이 주변의 칠쿳 병영(Chilkoot Barracks)에 주둔 중이던 2개 소총중대 400 명이 전부였다.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전쟁성(=육군성)은 알래스카 방어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방어력 강화를 위한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의 목표는 5가지였다.

 

1. 알래스카 수비대의 병력을 증가시킨다.

2. 앵커리지 부근에 대규모 주둔지를 만든다.

3. 알래스카 내에 다수의 비행장을 만든다.

4. 3에서 만든 비행장들을 보호한다.

5. 시트카, 코디액, 그리고 더치하버에 있는 해군기지를 방어한다.

 

이 계획의 실천은 1941년 중반까지 지지부진했는데 그 이유는 전쟁성의 방어력 증강 계획상 알래스카의 우선 순위가 낮았던데다가 알래스카 자체의 문제가 있었다.

 

알래스카는 캐나다 영토에 의하여 미본토와 단절되어 있었으며, 1942년 11월에 캐나다 서부를 통과하여 미본토와 알래스카를 잇는 알래스카 하이웨이가 완성되기 전까지 미본토에서 알래스카로 가려면 비행기나 배를 타야만 했다.

알래스카의 군대와 민간인들을 위한 식량을 포함한 보급품들은 대부분 선박으로 수송해야 했으며, 이런 사정은 알래스카 하이웨이가 개통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인들의 개념으로 알래스카는 섬이었다. 

 

미본토와의 격리에 더하여 알래스카의 내부 교통로도 빈약했다.

알래스카는 해안에 가까운 태평양 산맥과 동쪽의 로키 산맥에 의하여 서부, 중부, 동부로 나눌 수 있었는데 험준한 산맥을 넘어 이 지역들을 횡으로 연결하는 교통로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정기적으로 운행하는 철도는 스카그웨이와 캐나다 유콘 주의 화이트호스를 잇는 민간철도인 화이트 패스 앤드 유콘 철도와 슈어드에서 출발하여 앵커리지를 거쳐 페어뱅크스에 이르는 760km 길이의 알래스카 철도가 있었는데 알래스카 철도는 내무부가 관리했다.  

알래스카 철도는 1923년에 내무부가 사들인 이래 투자를 거의 하지 않아서 선로와 기관차의 상태가 모두 안 좋았으며 특히 지형이 험한 남부 구간이 심했다.

남부 구간에서 기차는 험준한 지형을 달려야 했으며 눈보라가 심하게 치면 운행이 힘들었다.

슈어드 북쪽 80km 지점에서 철도는 굴을 지난 다음 나무로 만든 다리를 건너야 했는데 이 지점은 폭격이나 파괴활동에 취약했다.

(1940년 당시의 알래스카. 출처 :  The Corps of Engineers - The War Aginst Japan. P.13)

 

알래스카의 도로는 발데즈와 페어뱅크스를 잇는 리차드슨 하이웨이와 페어뱅크스와 북극권을 잇는 스티즈 하이웨이가 있을 뿐 동서를 연결하는 도로는 없었으며, 하천 수로도 제한되어 정기선이 다니는 강은 유콘 강과 쿠스코크윔 강 뿐이었는데 1년에 4개월 내지 5개월 동안만 운항이 가능했다.

 

1930년대를 통하여 급성장한 항공교통이 알래스카의 빈약한 교통망을 보충했다.

거의 완전히 고립되어 있던 많은 마을들이 1940년까지 항공로로 연결되었고, 판아메리칸 항공사에서는 시애틀과 케치칸 및 쥬노를 연결하는 정기 노선을 개통했다.

그러나  항공교통으로는 물자 수송에 한계가 있었다.

 

전쟁 전에 알래스카 내부의 통신은 미육군공병대가 관리하는 무선 통신 체계인 알래스카 통신 체계(Alaska Communication System)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했다.

20세기 초기에 깔렸던 유선 통신망들은 알래스카 철도를 따라 설치된 전화선을 제외하고는 모두 버려졌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알래스카 통신 체계가 처리하는 통신은 거의 모두 민간통신이었으므로 한때 전쟁성은 알래스카 통신 체계를 내무부에 넘기려 했으나 전쟁이 임박하자 생각을 바꾸었다.

전쟁성은 알래스카 통신 체계를 정비하고 확장하는 한편 알래스카 철도의 출발점인 슈어드와 미본토의 시애틀을 연결하는 유선 통신망을 비롯하여 버려졌던 알래스카의 유선 통신망들을 모두 복구했다.

유선 통신망은 도청이 어렵기 때문에 주로 비밀통신에 사용되었다.

 

알래스카를 포함한 미서해안 방어를 책임진 서부방어사령관 드윗 중장은 알래스카의 열악한 교통 상황을 잘 몰랐다.

그리하여 그는 앵커리지 부근에 강력한 기동예비대를 주둔시켜 놓고 일본군이 알래스카의 어느 지역으로든 공격해오면 즉시 출동하여 격멸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에 따라 1940년 6월 27일에 얼 랜드레스 중령이 지휘하는 최초의 육군 증원병력 753명이 앵커리지에 도착했다.  

이때 알래스카 현지를 시찰하고 있던 드윗 중장은 교통수단의 미비로 알래스카에서는 대규모 기동 예비대를 운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따라서 알래스카 수비대는 각 방어지구별로 분산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수비대는 별도의 지원없이도 자기 담당 구역을 지킬 수 있을만큼 충분히 강력하고 균형잡힌 전력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항공대의 지원을 받을 수 있어야 했다.

또한 해군 기지를 방어하기 위하여 수비대의 기지는 해군 기지와 인접하는 것이 유리했으므로 많은 병력이 해군 기지인 시트카, 코디액 및 더치 하버 인근에 주둔하기로 했다.

육군이 갑자기 해군 기지 주위에 예정에 없던 넓은 부지를 요구하자 자체의 기지 확장 계획을 가지고 있던 해군은 제대로 협조를 하지 않았다.

당시 알래스카의 기지 건설은 대부분 군과 계약을 맺은 민간업체들이 건설했는데 안 그래도 자재 및 중장비의 수송도 어렵고 건설인력을 구하기도 어려웠으며 기후도 공사에 불리했다. 

여기에 육군과 해군의 손발까지 맞지 않아 기지 건설은 답보상태를 면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1941년 여름이 되자 육군의 증원병력들이 알래스카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고 육군은 할 수 없이 코디액, 앵커리지, 그리고 슈어드 지역에 텐트를 치고 이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1941년 8월에 '방위계약조사를 위한 특별위원회'(Special Committee Investigating Defense Contracts, 일명 트루먼 위원회) 소속의 랄프 브류스터 상원의원을 단장으로 한 의회 조사단이 알래스카에 와서 현지조사를 했다.

여기서 기지 건설 공사의 지연으로 겨울에도 병사들이 텐트에서 지내야 한다는 것을 알게된 브류스터 상원의원은 격노했다.

 

그는 워싱턴으로 돌아오자 미국의 젊은이들을 징집하여 북극에 데려가서는 한겨울에 텐트에서 재우겠다는 육군이 과연 제 정신이냐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깜짝 놀란 마셜 참모총장이 드윗 중장에게 실태조사를 명령했고 서부방어사령부의 조사관들이 알래스카로 날아갔다.

조사 결과 월동준비는 양호했다.

겨울용 텐트는 바람과 추위를 충분히 막을 수 있는 대형 텐트로 각 텐트마다 난로가 배치될 예정이었다.

드윗 중장은 이런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고 전쟁성에서는 브류스터 의원의 알래스카 시찰에 동행했던 할리 킬고어 상원의원에게 텐트가 가장 많이 밀집한 코디액 섬의 겨울 평균 기온은 킬고어 의원의 지역구인 웨스트버지니아 주 힐링과 거의 비슷하다고 설명하여 겨우 의원들의 분노를 가라앉혔다.

 

기지 건설 공사의 지연 때문에 육군이 날벼락을 맞자 해군참모총장 스타크 대장은 해군에게 불똥이 튀지 않도록 알래스카 지구를 담당하던 제13해군관구에 즉시 육군과의 협의를 마무리지어서 하루빨리 기지를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알래스카의 기지 건설은 탄력을 받게 되었다.

 

알래스카의 육군 병력은 1939년 9월 초의 400 명에서 1940년 5월 말에는 3,100 명, 1941년 6월 말에는7,263명으로 늘어났다가 3개월 만인 41년 9월 말에 21,565명으로 증가했다.

당시 알래스카의 육군은 4개 보병연대, 3.5개 대공포 연대, 1개 155mm 롱톰 평사포 이동 해안포 연대, 그리고 1개 전차중대로 이루어져 있어서 비교적 장비도 충실하고 화력도 강한 편이었다.

진주만 기습으로 알래스카의 육군 병력은 계속 증강되어 미드웨이 해전 직전인 1942년 5월 말에는 45,417명으로 늘어났고, 일본이 6월 초에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장악하자 증강 속도가 빨라져서 42년 8월말에는 71,500명까지 늘어난다.

 

육군 수비대는 알래스카 철도의 출발점인 슈어드, 알래스카의 요충지인 앵커리지, 그리고 해군 기지가 있는 시트카, 코디액, 그리고 더치 하버 등의 주요 거점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다.

1942년 5월말 현재 주요 주둔지를 보면 앵커리지에 2,500명, 시트카에 2,020명, 코디액에 5,835명, 더치하버에 5,425명, 그리고 움낙 섬의 포트 글렌에 4,000 명, 콜드 베이에 2,500명 등이었으며 이외에도 상당수의 공병들이 알래스카 곳곳에서 비행장과 기지들을 건설하고 있었고 수비병력 또한 여러 곳에 분산되어 주둔하고 있었다.

 

전쟁성은 알래스카의 지휘계통도 정비했다.

1940년 7월까지 알래스카 방어는 제9군단이 관할했으나 7월 9일에 전쟁성은 사이먼 버크너 대령을 알래스카 주둔 미군 사령관으로 임명했고, 보름 뒤에는 알래스카 방위군(Alaska Defense Force)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버크너 대령은 9월 1일에 준장으로 승진했으며, 전쟁성은 1942년 2월에 알래스카 방어 사령부(Alaska Defense Command)를 창설하고, 역시 새로 만들어져 미서해안을 방어하는 서부 방어 사령부(Western Defense Command) 예하에 두었다.

 

알래스카 방어사령부의 출범과 동시에 알래스카를 서부 방어 사령부의 관할에서 빼내어 독자적인 방어구역으로 삼자는 주장이 일어났다.

육군항공대 참모장 칼 스파츠 준장은 알래스카를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서부 방어 사령부 아래에 둔다는 것은 하와이를 서부 방어 사령부 예하에 두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스파츠 준장의 주장은 전쟁성과 참모본부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았으나 이때 그는 실수를 저질렀다.

즉 그는 알래스카, 하와이 그리고 미서해안의 모든 육군항공대는 지역 사령관의 통제를 받지 않는 단일 육군항공대 사령관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스파츠 준장의 이런 주장은 알래스카 방어 사령부를 독립시키기 싫어하던 서부 방어 사령관 드윗 중장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었다.

결국 알래스카 방어 사령부는 1943년 말까지 서부 방어 사령부 휘하에 머물렀다.

 

알래스카 방어의 또다른 축인 육군항공대 증강은 지지부진했다.

우선은 비행장 건설이 급선무였다.

미육군공병대와 민간항공국(Civil Aeronautics Authority=CAA)의 노력으로 1941년 가을까지 엘멘도프, 래드, 코디액, 야쿠탓 그리고 노움 비행장이 최소한 1개 비행대대를 지원할 수 있는 규모로 작전가능상태에 들어갔다.

육군항공대는 더치하버의 방어를 위하여 서쪽으로 100km 떨어진 움낙 섬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해군은 움낙 섬에 항구를 만들기가 어려워서 보급이 곤란해질 것이라는 이유로 알래스카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하게 될 움낙 섬의 비행장 건설에 난색을 표했다.

지리한 논의 끝에 움낙 섬의 오터포인트에 비행장을 건설하기로 결정이 난 것은 진주만 기습이 2주도 채 남지 않은 1941년 11월 26일이었다.

 

1941년 2월 말에 앵커리지 부근에 엘멘도프 비행장이 작전가능상태에 도달하자 구형의 P-36 전투기 20대를 보유한 제18추격비행대대(18th Pursuit Squadron)가 전개했다.

추격기(Pursuit)는 1940년 5월 15일을 기하여 전투기(Fighter)로 이름이 바뀌었다.

 

(커티스 P-36 호크 전투기. 승무원 : 1명, 길이 : 8.7m, 폭 : 11.4m, 출력 : 1,050마력, 최고 속력 : 500 km/hr, 순항속력 : 432 km/hr, 항속거리 : 1,385km, 상승고도 : 10,000 m, 무장 : 12.7mm 기총 1정, 7.62mm 기총 1정, 폭탄 45kg) 

 

3월에는 제36 및 제73폭격비행대대가 도착했다.

중형폭격비행대대는 원래 13대로 이루어진 편대 4개로 이루어져 52대의 쌍발폭격기를 보유하게 되어 있었으나 2개 폭격비행대대가 보유한 폭격기는 모두 합쳐 B-18 쌍발폭격기 12대 뿐이었다.

 

(더글러스 B-18 볼로 쌍발폭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알래스카의 여러 곳에 비행장이 추가로 완성되었어도 추가 비행기들은 오지 않았다.

미국의 항공기업체들은 놀라운 속력으로 생산을 늘리고 있었으나 수요가 공급을 앞질렀다.

게다가 태평양만 해도 필리핀과 하와이, 파나마 운하 등의 요충지에서 빨리 비행기를 보내라고 성화였으므로 이런 와중에 우선 순위가 낮은 알래스카에 돌아갈 항공기가 부족했다.

결국 진주만 기습 때까지 알래스카의 육군항공대는 P-36 전투기 20대와 B-18 쌍발폭격기 12대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전쟁에 돌입하자 알래스카 방어 문제가 급한 문제로 떠올랐다.

1941년 12월 10일에 전쟁성은 P-40 전투기 25대와 B-26 쌍발폭격기 13대를 알래스카에 파견하기로 결정했으나 동계 비행 훈련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조종사들을 한겨울에 알래스카로 파견하는 일은 위험천만한 모험이었다.

그리하여 전투기들과 폭격기들은 새크라멘토 항공 보급창에 도착하여 겨울 비행용 장비를 부착하고 조종사들은 겨울에 알래스카 지역을 비행할 수 있도록 집중적인 훈련에 돌입했다.

동계 장비를 갖추고 1달 이상의 훈련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1942년 1월 말에 페어뱅크스까지 날아가는 도중 전투기 6대가 추락했고, 쌍발폭격기들은 모두 도착은 했으나 그중의 5대는 완전히 망가졌다.

 

전쟁이 벌어지자 더치하버 서쪽의 움낙 섬과 동쪽의 콜드베이에 건설 중이던 비행장을 하루빨리 완성하는 일이 미육군공병대와 민간항공국의 주요 관심사로 떠올랐다.

움낙 섬의 오터포인트에 비행장을 건설하기 위하여 제807항공공병연대가 투입되었으나 움낙 섬에는 적당한 항구가 없어서 일단 우날래스카 섬의 체르노프스키 곶에 상륙하여 바지선으로 갈아탄 다음 거친 파도를 뚫고 18km 떨어진 움낙 섬으로 건너가야 했다.

미육군 공병대는 시간이 촉박하여 오터포인트의 지반을 완전히 배수하고 단단히 다진 다음 영구적인 활주로를 만들지 못하고 불안정한 지반 위에 약 80,000 장의 마스덴 매트를 깔아서 길이 1,500m, 폭 30m의 활주로를 만들었다.

1942년 3월 31일에 최초의 항공기가 상륙했으나 오터포인트의 포트 글렌 비행장이 본격적으로 작전가능태세에 들어간 것은 5월 20일부터였다.

 

포트 글렌 비행장의 활주로는 조종사들 사이에 악명이 높았다.

불안정한 지반 위에 마스덴 매트를 깔아서 만든 활주로는 마치 스프링이 내장된 침대 매트리스 같아서 한번은 활주하던 전투기가 10m 높이까지 튕겨오르기도 했고, B-26 쌍발폭격기가 착륙하면 마치 바다처럼 활주로 전체가 출렁거렸다.

활주로 상태가 훨씬 양호한 콜드 베이 비행장은 포트 글렌 비행장과 거의 동시에 작전가능 상태에 들어갔다.

 

알래스카 방어의 문제 중 하나는 조기경보  기지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알래스카 방어 사령부는 20 개소의 조기경보 레이더 기지를 원했으나 1942년 6월 초에 일본군이 공격해 왔을 때 가동 중이던 레이더는 단 2대(앵커리지와 코디액)에 불과했고, 레이더 2대가 설치를 위하여 수송 중이었다.

 

1941년 10월 17일에 알래스카 방어 사령부 항공대로 출발하여 42년 2월 5일에 이름이 바뀐 윌리엄 버틀러 준장의 제11육군항공대는 42년 6월 초가 되자 상당히 세력이 증가했다.

일본군이 더치하버를 폭격했을 때 제11육군항공대는 P-36 전투기 4대, P-38 전투기 25대, P-39 전투기 30대, P-40 전투기 49대, B-17폭격기 18대, B-18 폭격기 5대, 그리고 B-26폭격기 32대를 보유하여 전투기 108대, 폭격기 55대 등 총 163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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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류샨 열도 

 

알류샨 열도는 알래스카 반도의 서쪽으로부터 러시아의 캄차카 반도에 걸쳐 늘어서 있으며 약 300 개 이상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으나 지도에 표시될만한 큰 섬은 14개 정도이다. 

길이는 약 1,900km 에 달하고 섬들의 면적을 합치면 18,000㎢ 정도 된다.

가장 서쪽의 코만도르스키 섬은 러시아 령이며 코만도르스키 섬의 동쪽에 있는 애투 섬은 미국 영토의 최서단이다. 

 

기후는 해양성 기후로서 위도에 비하면 추위는 그리 심하지 않은 편인데 알래스카 반도에 인접한 우날래스카 섬의 연평균 기온은 섭씨 3도 정도이며, 가장 추운 1월은 섭씨 -1도이고 가장 더운 8월은 섭씨 11도 정도로 연교차가 크지 않다.

연평균 강우량은 2,000mm 정도로 미국에서 가장 비가 많이 오는 지역에 속하며 우날래스카 섬의 경우 1년에 비가 오는 날이 250일 가량이며 안개도 자주 끼어서 맑은 날은 1년에 8일 -10일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알류샨 열도)

 

알류샨 열도는 러시아 황제의 명령으로 북태평양을 탐험하던 비투스 베링과 알렉세이 치리코프가 1741년에 발견한 이래 주로 시베리아의 가죽 사냥꾼들이 알류샨 열도의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향하여 진출했고, 알래스카에도 진출했다.

이후 알류샨 열도와 알래스카는 러시아령으로 인정을 받았다.

1799년에 러시아-아메리카 회사가 설립되어 알류샨 열도와 알래스카에 식민지를 건설했는데 이 과정에서 원주민인 알류트 족과 러시아 이민자 사이에 심심찮게 충돌이 벌어졌다.

충돌이 벌어지면 주로 숫적으로 열세면서 무력도 그리 강하지 못한 러시아 이민자들이 희생되었다.

결국 알류샨 열도를 비롯한 알래스카에 이주한 러시아 인들은 원주민과 공존하는 길을 택했고 이후 약 2세대 만에 대부분의 식민지가 러시아 이민자와 알류트 족의 혼혈인 알래스카 인들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알래스카 인들은 알류트 족으로부터 카약 사용법, 수달 사냥법을 물려받았고 전통적인 구리광산에서 구리를 채취했다.

이들은 또한 러시아 인들로부터 러시아 정교와 정규 교육 제도를 받아들였으며 키릴 문자를 사용하여 알류트 어를 적었다. 

알류샨 열도를 비롯한 알래스카 식민지는 경제적으로 러시아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으므로 러시아 정부는 1867년에 720만 달러를 받고 알류샨 열도를 포함한 알래스카를 미국에 팔았다.

 

알래스카가 미국령으로 바뀐 이후에도 알류샨 열도의 개발은 지지부진하여 우날래스카 섬에 공립 학교가 들어선 것이 1883년이었다.

이후 1890년대부터 알래스카 내륙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내륙과 미국에 가까운 남부 지역은 어느 정도 개발이 이루어졌으나 북쪽의 알류샨 열도는 여전히 개발이 더뎠다.

1924년 미국의회의 결정으로 알류샨 열도를 포함한 알래스카 지역의 모든 거주민들에게 미국시민권이 부여되었고 1933년에 알류샨 열도 최초의 병원이 우날래스카 섬에 들어섰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알래스카 전체의 주민은 대부분 미본토에서 건너간 백인들로서 70,000명 가량이었고, 그 중 알류샨 열도의 주민은 대부분 원주민인 알류트 족으로서 통틀어서 800 명 정도였다.

 

알류샨 열도에서 경제적으로 가치있는 산물은 수달의 모피 정도이며 주변 해역에 물고기가 상당히 많으나 고립된 위치와 함께 안개와 갑작스런 돌풍을 비롯한 험난한 기후 탓에 대규모 어업이 힘들었다.

 

군사적으로 보았을 때도 알류샨 열도는 매력이 없었다.

산이 높은 편이어서 몇몇 섬들을 제외하고는 비행장을 만들 평지를 찾기가 어려웠고 좋은 항구를 만들만한 섬도 별로 없었다.

지면은 약 30cm- 1.2m 에 달하는 이끼가 죽어서 쌓인 툰드라 지대거나 늪지대로서 걷기가 불편했으며 차량운행은 거의 불가능했다.

또한 이끼 아래의 화산토 때문에 비가 오면 지면이 진흙탕으로 변해버렸는데 비는 거의 1년 내내 왔다.

따라서 힘들게 평지를 찾아 비행장을 만들려고 해도 지면을 확실하게 배수하고 단단하게 다진 다음 포장하여 영구적인 활주로를 만들어야 했으므로 건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은 시간에 쫓겨 어쩔 수 없이 움낙 섬의 오터포인트에서 툰드라 위에 마스덴 매트를 깔아 활주로를 만들었는데 지반이 불안정하여 항공기의 이착륙에 상당한 지장을 주었다.

 

거기다가 지속되는 비, 눈보라, 안개로 인하여 알류샨 열도 부근의 비행이나 항해는 큰 지장을 받았다.

특히 거의 1년 내내 끼는 안개와 현지어로 '윌리와우' 라고 부르는 태풍과 맞먹는 풍속의 돌풍은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당시 미해군 장교들이 알래스카 해역을 어떻게 생각했는가에 대하여 알래스카 방어사령관이었던 사이먼 버크너 육군소장은 이렇게 기록했다.

 

"해군 장교들은 알래스카 해역에 대하여 본능적인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알래스카 해역을 숨쉴 때마다 안개를 내뿜고 기침으로 돌풍을 일으켜 운나쁜 항해자를 해도에 기입되지 않은 암초에 부딪히게 만듦으로써 그가 제독이 될 기회를 영원히 앗아가는 사나운 괴물이 사는 곳으로 여겼다."

("the naval office had an instinctive dread of Alaskan waters, feeling that they were inhabited by a ferocious monster that was forever breathing fogs and coughing up 'wiliwaw' that would blow the unfortunate mariner into uncharted rocks and forever destroy his chances of becoming an admiral.")

 

이런 날씨 때문에 애투 섬에서 B-29 를 띄워 일본을 폭격했다면 날씨 때문에 상실하는 B-29 가 너무 많아서 보충이 손실을 따라가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알류샨 열도를 통하여 미국이 일본을 침공하거나 반대로 일본이 미국을 침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나운 기후가 지도상에서 보면 가장 가까운 길인데도 불구하고 일본이나 미국이나 알류샨 열도를 통하여 서로를 침공하려 시도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였다.

 

따라서 미해군은 일본의 해군력을 제한하고 태평양 도서의 요새화를 금지한 워싱턴-런던 조약이 효력을 발휘하는 한 알래스카에 대한 위협은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알류샨 열도를 포함한 알래스카 전체는 1930년대 말까지 사실상 비무장 상태였다. 

미국이 알래스카 방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1934년에 일본이 런던 조약 탈퇴를 예고하면서부터였고 실제로 방어력이 증강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말이 되어서였다.

(1940년 당시의 알래스카. 출처 :  The Corps of Engineers - The War Aginst Japan. P.13)

 

1936년에 미함대항공사령관(Commander Fleet Aircraft) 에 취임한 어네스트 킹 소장은 알래스카 남서해안에 있는 바라노프 섬의 시트카에 수상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예산을 줄기차게 요구하여 1937년에 결국 획득했는데 액수가 불과 수천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킹 소장은 푼돈에 지나지 않는 이 예산을 알뜰하게 사용하여 시트카 지역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조사를 철저하게 실시했다.

 

이러한 킹 소장의 사전정비 작업에 영향을 받은 헵번 위원회는 1938년 12월에 의회에 제출한 역사적인 보고서에서 바라노프 섬의 시트카, 코디액 섬, 그리고 알류샨 열도 동단의 우날래스카 섬에 있는 더치하버에 해군항공기지를 건설하고 코디액 섬과 더치하버에는 추가로 잠수함 기지를 건설할 것을 미의회에 권고했다.

미의회가 이 권고를 받아들여 시트카에 3,000,000 달러, 코디액 섬에 10,000,000 달러, 그리고 더치하버에 6,000,000 달러의 예산을 승인함으로써 1939년 9월부터 본격적으로 공사가 시작되어 1941년 9월까지 일단락되었다.

 

알래스카에서의 기지건설공사는 군과 계약을 맺은 민간회사가 담당하다가 점차 육군 공병대가 해군 건설대대가 추가되었으며 전쟁의 진행에 따라 알래스카의 방어가 해군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1943년 4월 1일부터 해군건설대대가 전담했다.

이에 따라 1944년 1월1일 현재 알래스카에 파견된 해군건설대대는 20,500명에 달했다.

 

미해군은 육군의 알래스카 방어사령부(Alaska Defense Command) 설치에 발맞추어 시애틀에 사령부를 둔 제13해군관구(13th Naval District) 예하에 알래스카 지구(Alaskan Sector)를 1940년 중반에 창설하고 랄프 파커 대령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파커 대령은 포함 찰스턴을 기함 겸 사령부로 사용했으며, 제13해군관구는 어선 3척을 구입하여 초계정으로 개조한 후 이 4척으로 알래스카 해군(Alaska Navy)을 발족시켰다.

 

(PG-51 찰스턴. 만재배수량 : 2,339 톤, 길이 : 100m, 폭 : 13m, 흘수 : 3m, 속력 : 20노트, 무장 ; 6인치 포 4문, 1.1인치 대공포 16문, 12.7mm 기관총 4정, 승무원 : 180명, 출력 : 7,000 마력, 항속거리 : 12노트로  22,000km, 항공기 1대)

 

알래스카 해군은 천천히 확장되어 2년 후인 1942년 5월에는 기함 찰스턴 이외에도 구형 구축함 4척(워터스, 덴트, 케인, 샌즈), 73m 짜리 포정 1척 및 50m 짜리 포정 2척, 그리고 어선을 개조한 초계정이 11척 더 추가되었다.

또한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10대가 도착하여 코디액 섬과 더치하버에 각 1대씩 배치되었고, 나머지 8대는 남쪽의 시트카에 배치되었다.

 

알래스카 해군의 주임무는 비행장과 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인원과 자재를 싣고 알래스카 연안을 항해하던 수송선들을 일본잠수함으로부터 지키는 것과 일본군의 접근을 먼거리에서 발견하는 것이었다.

호위 임무는 알래스카 해군에서 유일하게 소나를 장비한 기함 찰스턴이 구형 구축함 및 포정들과 함께 실시했고 일본군 접근 감시 임무는 주로 어선을 개조한 초계정들과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이 담당했다.

 

알래스카와 미본토 사이의 캐나다 서해안은 캐나다 해군의 태평양사령부가 담당했는데 6인치 포를 가진 7,000 톤짜리 보조순양함 3척, 1,170톤짜리 코르벳함 7척, 소해정 12척 및 다수의 초계정을 갖추어 알래스카 해군보다 훨씬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캐나다 해군의 태평양사령부는 1942년 6월 이후로 미해군의 알래스카 지구 사령부와 긴밀하게 협조하기 시작했으며 필요하면 합동작전을 실시하기로 되어 있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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