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더치하버 공습과 애투 및 키스카 상륙
얄류샨 공격을 담당한 일본해군 북방부대는 1942년 5월에 혼슈 북쪽의 오미나토에 집결했으며, 상륙부대는 무츠카이 만과 인근의 북해도 해안에서 상륙연습을 실시했다.
1942년 5월 25일, 가쿠다 가쿠지 소장의 제2기동부대가 오미나토를 떠나 더치하버로 향했고, 27일에는 키스카 점령대가 오미나토를 출발했다.
키스카 점령대는 쿠릴 열도의 파라무시로에서 급유를 받은 다음 키스카 섬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28일에는 애닥-애투 점령대가 오미나토를 출항했다.
급유함을 동반한 호소가야 중장의 주력부대는 먼저 파라무시로에 갔다가 6월 2일에 서부 알류샨 남쪽 해상에서 제2기동부대를 만나 급유를 할 예정이었다.
파라무시로에는 키스카 섬이 점령되면 전개할 수 있도록 경비정 및 비행정들이 대기했다.
더치하버를 향하여 접근하던 제2기동부대는 6월 2일 이른 오후에 키스카 섬 남쪽 640km 해상에서 미해군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에게 발견되었다.
즉시 제로기가 추격했고 카탈리나 비행정은 구름 사이로 도망치는데 성공했으나 대신 제2기동부대와의 접촉을 놓쳐버렸다.
이 카탈리나가 제2기동부대의 침로와 속력을 잘못 보고하는 바람에 공중수색부대의 지휘관 게레즈 대령은 제2기동부대가 알류샨 열도 북쪽의 베링 해로 들어갔다고 착각했다.
2일 밤 늦은 시간에 제2기동부대는 해상수색부대의 초계선을 들키지 않고 통과했는데 안개가 짙은 이유도 있었지만 초계정들이 대부분 시간 내에 초계선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 더 큰 이유였다.
사실 해안경비대의 경비정 오논다가는 더치하버가 공습을 받을 때 항 내에 정박하고 있었다.
(AL 작전 상황도. 출처 : History of U.S. Naval Operations in World War II, Vol. IV: Coral Sea, Midway and Submarine Actions, May--August, 1942 , P. 94, 일부 발췌)
제2기동부대는 미군에게 들키지 않은 채 3일 오전 2시 40분에 더치하버에서 남쪽으로 270km 떨어진 발진해역에 도달하여 공격대를 발진시켰다.
류조에서는 지상공격용 폭탄을 장비한 97식 함공 15대와 호위를 맡은 제로기 3대가 이함했고, 준요에서는 99식 함폭 15대와 호위를 맡은 제로기 13대가 출격했다.
제2기동부대의 상공은 구름 높이가 120m 밖에 안 될 정도로 시계가 불량하여 류조와 준요의 함재기들은 스트라이크 패키지 형성을 포기하고 각자 더치하버를 향하여 날아갔다.
준요의 함재기들은 더치 하버를 찾지 못하고 제로기 2대를 제외한 모든 함재기가 모함으로 돌아왔으며, 제로기 2대는 도중에 류조 공격대를 만나 합류했다.
그런 기상 상태에서 준요의 모든 함재기가 무사히 돌아온 것도 사실 기적적인 일이었다.
(일본해군의 경항모 류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류조 공격대를 이끈 야마구치 마사유키 대위는 뛰어난 항법능력을 발휘하여 부하들을 더치하버로 이끌었다.
6월 3일 오전 5시 40분, 더치하버에 정박 중에던 수상기 모함 길리스의 레이더가 접근하는 일본기들을 발견했다.
길리스의 보고를 받은 더치하버에서는 즉시 경보를 발령했는데 이 경보는 앵커리지, 코디액 섬, 그리고 코디액 섬 남쪽 해상의 테오발드 소장에게까지 전달되었으나 하필이면 더치하버 상공을 책임지고 있던 움낙 섬의 포트 글렌에는 통신불량으로 전달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불과 100km 서쪽에서 P-40 전투기들이 전투초계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기들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더치하버 상공에 도달했다.
사실 더치하버 동쪽에는 콜드베이 비행장이 있었으나 이 비행장의 일차적인 임무는 포트 글렌와 코디액 섬에 비행기들을 공급하는 역할이었으므로 해군인 더치하버의 지휘관은 콜드베이 비행장에 요격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었을 뿐 아니라 구태여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당시 콜드베이 비행장에 요격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제11육군항공대 사령관 버틀러 준장은 하필이면 그때 코디액 섬의 지휘 중추를 떠나 알래스카 방어 사령관 버크너 소장과 함께 앵커리지에 머물고 있었으며 제8임무부대 사령관 테오발드 소장은 무선침묵을 유지한 채로 코디액 섬 남쪽 640km 해상에 있었다.
이렇게 미군의 지휘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으므로 더치하버의 지휘관은 자신이 가진 것만으로 어떻게든 대응해야만 했다.
일본기들이 도착했을 때 더치하버 상공은 구름 높이가 약 3,000m 정도로 폭격에 적당한 날씨였다.
가장 먼저 진입한 제로기들이 저공으로 기총소사를 가한 후 97식 함공들이 소대 단위로 목표물인 연료저장고, 통신소, 육군기지인 포트미어스의 막사, 그리고 계류 중인 카탈리나 정찰비행정들을 폭격하여 피해를 입혔다.
폭탄 1발은 대공포대를 명중시켰으며 빗나간 폭탄 1발이 교회에 떨어졌다.
(일본기의 공습을 받아 불타는 더치하버의 건물들. 1942년 6월 3일에 찍은 사진이다.)
미군의 사망자는 25명이었으며, 카탈리나 비행정 1대가 부서졌다.
일본측에서는 97식 함공 1대가 대공포에 의하여 격추되었다.
폭격 도중 일본기 1대가 우날래스카 섬 북해안의 마쿠신 만에 정박 중인 구축함 5척을 발견했다.
돌아온 조종사들로부터 미군의 구축함에 대하여 들은 가쿠다 제독은 오전 9시 45분에 이 구축함들으로 노리고 2차 공격대를 발진시켰다.
류조에서 제로기 6대와 97식 함공 6대, 그리고 준요에서 제로기 6대와 99식 함폭 15대가 발진했다.
여기에 더하여 중순양함 마야와 다카오에서 각각 2대씩의 95식 수상정찰기를 참가시켰다.
(나카지마 E8N 95식 수상정찰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2차 공격대가 더치하버 상공에 도달했을 때에는 구름이 너무 짙게 끼어서 도저히 목표를 확인할 수가 없었으므로 결국 2차 공격대는 공격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이때 95식 수상정찰기 4대는 더치하버 부근을 헤매다가 움낙 섬 상공에 들어섰고 여기서 전투초계 중이던 P-40 전투기 4대로부터 공격을 받아 2대는 격추되고 2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살아남은 2대는 겨우 모함까지 돌아오기는 했으나 다시는 사용하지 못할만큼 심하게 부서졌다.
포트 글렌의 존재를 모르던 제2기동부대의 참모들은 95식 수상정찰기들을 공격한 미군 전투기들이 도대체 어디서 날아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3일 정오가 되어 2차 공격대를 수용한 제2기동부대는 애닥 섬을 폭격하기 위하여 서쪽으로 물러났다.
그동안 미군 측에서는 제2기동부대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으나 수색에 실패했다.
구름이 많이 낀 날씨가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었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6월 2일의 잘못된 정찰보고로 인하여 카탈리나 정찰비행정들을 지휘하고 있던 공중수색부대 지휘관 게레즈 대령이 일본항모기동부대가 북쪽인 베링해에 있다고 착각한 점이었다.
따라서 카탈리나 정찰비행정들은 더치하버의 북서쪽을 집중적으로 뒤졌으나 실제로는 남서쪽에 있던 제2기동부대를 찾을 수가 없었다.
제2기동부대는 구축함에 대한 급유를 실시한 후 애닥 섬에 접근했으나 6월 4일 새벽이 되자 애닥 섬의 기상이 너무 나빠서 도저히 폭격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가쿠다 제독은 더치하버를 한 번 더 폭격하기로 하고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4일 오후 2시30분, 류조에서 제로기 6대, 97식 함공 9대, 준요에서 제로기 5대, 97식 함폭 11대를 이함시켰다.
일본기들은 더치하버를 정확하게 찾아와서 폭격을 가했다.
연료 저장고 3개가 추가로 폭격을 받아 이틀 동안 4개의 연료저장고에서 420만 리터가 넘는 경유가 불에 타서 사라졌다.
항내에 정박하여 막사 역할을 하던 노스웨스턴 호가 대파되었고 병원도 폭격을 받았으며 카탈리나 비행정 1대가 격추되었다.
이 폭격으로 18명의 미군이 추가로 전사함으로써 이틀에 걸친 일본군의 더치하버 폭격으로 전사한 미군은 육군 33명을 포함하여 43명이었고, 부상자는 64명이었다.
전날과 달리 이번에는 미리 경고를 받은 포트 글렌의 P-40 전투기 8대가 일본기들을 요격하여 99식 함폭 2대를 격추하고 다른 2대에 큰 피해를 입혔다.
피해를 입은 99식 함폭 2대는 준요로 돌아가지 못하고 부근 해상에 불시착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2대의 P-40 전투기가 격추되었다.
일본군은 이때서야 움낙 섬에 있던 포트 글렌 비행장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더치하버 폭격이 진행되는 동안 미해군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들이 제2기동부대를 발견했고 미육군항공대의 폭격기들이 공습을 가했다.
공습은 비효율적으로 이루어졌다.
테오발드 소장은 레이더를 장착한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이나 B-17 폭격기의 유도를 받아 쌍발폭격기들이나 B-17 중폭격기들이 대규모 집단을 이루어 한꺼번에 폭격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당시까지 해군과 육군항공대는 합동작전 경험이 없었으므로 이러한 작전을 제대로 실시할 수 없었다.
폭격기들의 제1진은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으로부터 적함대의 접촉을 놓쳤다는 보고를 듣자 기지로 돌아가 버렸다.
B-17 폭격기 8대로 이루어진 제2진은 접촉을 놓쳤다는 보고를 듣자 진형을 유지한 채로 추가 보고를 기다리지 않고 사방으로 흩어져서 일본함대를 찾아 다녔다.
그들은 대부분 마지막 접촉 보고에 따라 일본함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위치에 도달하자 구름 때문에 해면이 보이지도 않는 상태에서 높은 고도에서 폭탄을 떨어뜨렸다.
나중에 테오발드 제독은 그런 식의 폭격으로는 키스카 섬도 제대로 맞출 수 없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제2기동부대는 B-17 폭격기들의 공습 당시 당시 자신들이 공격을 받는 줄도 몰랐다고 한다.
B-17 폭격기 중의 1대만이 저공으로 내려와 육안으로 제2기동부대를 확인하고 폭격을 가했으나 1발도 명중시키지 못하고 일본함대의 대공포화에 맞아 격추되었다.
어뢰를 달고 출격한 B-26 쌍발폭격기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뢰 조작에 익숙하지 못한 조종사들은 대부분 너무 높은 고도에서 어뢰를 투하했고 어뢰들은 해면에 닿는 충격으로 내부가 망가져서 그대로 가라앉았다.
테오발드 제독은 그런 식으로 아까운 어뢰를 낭비한 육군항공대를 비난했다.
6월 4일 하루동안 게레즈 대령의 공중수색부대는 제2기동부대에 접근하다가 제로기의 요격을 받아 카탈리나 비행정 4대를 상실했다.
코디액 남쪽 640km 해상에서 무선 침묵을 유지한 채로 휘하 부대들 사이의 무전을 듣고 있던 테오발드 소장은 전투에 참가한 부대들이 우왕좌왕 헤매는 모습을 도저히 참지 못하고 직접 지휘하기 위하여 4일 오후에 기함 내시빌을 타고 주력부대를 떠나 코디액 섬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내시빌이 코디액 섬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인 5일 새벽 5시로서 이미 상황이 종료된 다음이었다.
더치하버 공습이 진행되고 있던 4일 오후에 야마모토 제독이 북방부대 사령관 호소가야 제독에게 키스카 공략대와 애닥-애투 공략대를 일본본토로 돌려보내고 제2기동부대와 북방부대의 본대는 즉시 미드웨이 방면으로 남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미드웨이 근해에서 제1기동부대가 몰살당하는 참사가 벌어진 것이었다.
제2기동부대는 공격대를 수용하자마자 남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몇 시간 후 다시 키스카 섬과 애투 섬 공략을 실시하라는 야마모토 제독의 명령이 도착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제2기동부대는 호소가야 제독의 본대와 만나기 위하여 서쪽으로 변침했다.
이로서 이틀에 걸친 더치하버 공습이 끝났다.
더치하버는 연료저장고를 비롯한 몇몇 시설이 폭격을 받아 43명의 전사자와 64명의 부상자를 기록했지만 여전히 기능을 발휘했다.
해군은 6대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을 상실했고 제11육군항공대는 P-40 전투기 2대와 B-17 폭격기 1대를 상실했다.
이틀 간의 공습과정에서 일본군은 수상정찰기 4대, 97식 함공 1대, 99식 함폭 4대 그리고 제로기 1대를 상실했는데 일본군이 상실한 유일한 제로기가 미군에게는 크나큰 선물이 되었다.
류조 소속의 제로기 조종사인 코가 타다요시 1등비조는 6월 4일에 더치하버 상공에서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1대를 격추했는데 카탈리나의 반격을 받아 기체가 손상을 입었다.
류조까지 돌아가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코가 1등비조는 더치하버 바로 북서쪽에 있는 아쿠탄 섬이라는 조그만 섬에 불시착했다.
착륙에 적당한 평지를 발견한 코가 1등비조는 동체 착륙을 하지 않고 바퀴를 내렸는데, 평지처럼 보였던 곳은 사실 늪이었다.
제로기의 바퀴가 늪에 닿는 순간 제로기는 그대로 뒤집혔고 코가 1등 비조는 그 충격으로 목이 부러지면서 즉사했으나 기체 자체는 크게 부서지지 않았다.
(미군 병사들이 코가 1등 비조의 제로기를 살펴보고 있다.)
1달 후인 1942년 7월 10일에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이 우연히 아쿠탄 섬의 제로기를 발견했고 다음날인 11일에 정찰대가 상륙했다.
15일에 제로기는 더치하버로 옮겨졌으며 8월 1일에는 미본토 서해안의 시애틀로 옮겨졌다.
미해군은 이 제로기를 샌디에이고로 옮겨 수리를 마친 후 1942년 9월 20일부터 10월 15일까지 24회의 시험비행을 실시했다.
그리하여 제로기의 강점과 약점을 철저하게 파악한 미군은 이 정보를 바탕으로 제로기를 상대로 한 공중전의 전술을 다듬었다.
사실 아쿠탄 제로기보다 반년 이상 빠른 1941년 말에 중국전선에서 온전한 상태의 제로기가 연합군 손에 최초로 들어왔었다.
그러나 이 제로기는 여러가지 사정상 1943년이 넘어서야 본격적인 연구가 가능한 미본토로 들어왔고 그때는 이미 아쿠탄 제로기에 대한 분석이 끝나 자세한 보고서가 나온 다음이었다.
한편 일본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은 1942년 6월 4일에 미드웨이 근해에서 제1기동부대의 항공모함 4척이 전멸하는 참사가 벌어지자 북방부대가 실시 중이던 애투 및 키스카 상륙작전을 중단하고 제2기동부대를 남하시켜 전투를 지속하려고 했다.
그러나 제2기동부대가 미드웨이 근해에 도달하기까지 48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깨닫자 남하 명령을 취소하고 애투 및 키스카 상륙작전을 속행하도록 명령했다.
나중에 애투 및 키스카 섬은 일본 선전 기관이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를 호도하는 좋은 소재가 된다.
6월 4일 오후에 갑작스런 작전 중단 통보를 받고 일본으로 향하던 오노 다케지 대좌의 키스카 점령대는 키스카 상륙을 실시하라는 새로운 명령을 받고 변침하여 키스카 섬으로 접근했다.
도중에 애닥-애투 점령대로부터 수상기모함 기미가와마루와 구축함 쇼카제가 합류했다.
키스카 점령대는 1942년 6월 6일 오전 6시부터 키스카 섬에 상륙을 시작했다.
수송선 하쿠산마루에서 무카이 히푸미 소좌가 이끄는 해군 마이즈루 진수부 제3특별육전대 550명이 다이하츠로 옮겨타고 해안에 상륙했다.
예상과 달리 저항은 없었으며 이어서 설영대 700 명이 상륙하기 시작하여 상륙은 오전 8시 30분에 무사히 끝났다.
키스카 섬에서는 비무장의 미군 기상대원 10명이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애닥 섬을 향하여 가던 애닥-애투 점령대 사령관 오모리 센타로 소장은 5일 아침에 호소가야 중장으로부터 애닥 섬 침공을 생략하고 바로 애투 섬에 상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호소가야 중장이 애닥 섬 상륙을 포기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쩌면 6월 4일의 더치하버 공습에서 움낙 섬의 포트 글렌에 미군 비행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움낙 섬으로부터 560km 떨어진 애닥 섬에 접근했다가 상륙함대가 미군의 공습을 받을 수 있다고 걱정했을 수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6월 5일 아침에 애닥 섬 남서쪽 1,100km 해상까지 접근했던 애닥-애투 점령대는 애투 섬을 향하여 변침했다.
애닥-애투 점령대는 6일 오전 6시 30분에 애투 섬 북쪽의 홀츠 만에 들어섰으나 자욱한 안개와 부실한 지도 때문에 상륙지점을 찾는데 애를 먹었다.
상륙부대인 북해지대 1,143명이 지대장 호츠미 마츠토시 소좌의 지휘에 따라 홀츠 만의 일각에 상륙한 것은 홀츠 만에 들어선지 14시간 40분 만인 오후 9시 10분이었다.
북해지대는 상륙하자마자 남쪽의 치차고프 마을로 행군을 시작하여 상륙 12시간 만인 7일 오전 10시 경에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마을에 진입했다.
애투 섬에는 전도사인 존스 부부와 어린이 15명을 포함한 주민 42명 뿐이었다.
존스 부부는 일요일에는 목사 역할을 하고 평소에는 초등학교 선생님에다가 기상관측요원까지 겸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마을에다가 위협사격을 가하자 존스 씨는 무전으로 더치하버에 일본군 상륙 사실을 보고했으나 더치하버에서는 수신하지 못했다.
잠시 후 마을이 일본군에 의하여 점령되자 존스 부부는 권총으로 자살했다.
애투 섬을 점령한 북해지대는 3개월의 점령기간 동안 모두 알류트 족인 42명의 주민들과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나 8월 말에 북해지대가 키스카 섬으로 옮길 때 주민들은 모두 북해도의 오타루로 이송되어 억류되었다.
오타루에 억류된 애투 섬의 주민들은 열악한 환경과 비인간적인 대우로 인하여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3년 남짓한 억류 기간 동안에 42명 중 40% 가까운 16명이 사망하여 종전 이후에 애투 섬으로 돌아온 주민은 26명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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