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알류샨 열도 

 

알류샨 열도는 알래스카 반도의 서쪽으로부터 러시아의 캄차카 반도에 걸쳐 늘어서 있으며 약 300 개 이상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으나 지도에 표시될만한 큰 섬은 14개 정도이다. 

길이는 약 1,900km 에 달하고 섬들의 면적을 합치면 18,000㎢ 정도 된다.

가장 서쪽의 코만도르스키 섬은 러시아 령이며 코만도르스키 섬의 동쪽에 있는 애투 섬은 미국 영토의 최서단이다. 

 

기후는 해양성 기후로서 위도에 비하면 추위는 그리 심하지 않은 편인데 알래스카 반도에 인접한 우날래스카 섬의 연평균 기온은 섭씨 3도 정도이며, 가장 추운 1월은 섭씨 -1도이고 가장 더운 8월은 섭씨 11도 정도로 연교차가 크지 않다.

연평균 강우량은 2,000mm 정도로 미국에서 가장 비가 많이 오는 지역에 속하며 우날래스카 섬의 경우 1년에 비가 오는 날이 250일 가량이며 안개도 자주 끼어서 맑은 날은 1년에 8일 -10일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알류샨 열도)

 

알류샨 열도는 러시아 황제의 명령으로 북태평양을 탐험하던 비투스 베링과 알렉세이 치리코프가 1741년에 발견한 이래 주로 시베리아의 가죽 사냥꾼들이 알류샨 열도의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향하여 진출했고, 알래스카에도 진출했다.

이후 알류샨 열도와 알래스카는 러시아령으로 인정을 받았다.

1799년에 러시아-아메리카 회사가 설립되어 알류샨 열도와 알래스카에 식민지를 건설했는데 이 과정에서 원주민인 알류트 족과 러시아 이민자 사이에 심심찮게 충돌이 벌어졌다.

충돌이 벌어지면 주로 숫적으로 열세면서 무력도 그리 강하지 못한 러시아 이민자들이 희생되었다.

결국 알류샨 열도를 비롯한 알래스카에 이주한 러시아 인들은 원주민과 공존하는 길을 택했고 이후 약 2세대 만에 대부분의 식민지가 러시아 이민자와 알류트 족의 혼혈인 알래스카 인들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알래스카 인들은 알류트 족으로부터 카약 사용법, 수달 사냥법을 물려받았고 전통적인 구리광산에서 구리를 채취했다.

이들은 또한 러시아 인들로부터 러시아 정교와 정규 교육 제도를 받아들였으며 키릴 문자를 사용하여 알류트 어를 적었다. 

알류샨 열도를 비롯한 알래스카 식민지는 경제적으로 러시아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으므로 러시아 정부는 1867년에 720만 달러를 받고 알류샨 열도를 포함한 알래스카를 미국에 팔았다.

 

알래스카가 미국령으로 바뀐 이후에도 알류샨 열도의 개발은 지지부진하여 우날래스카 섬에 공립 학교가 들어선 것이 1883년이었다.

이후 1890년대부터 알래스카 내륙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내륙과 미국에 가까운 남부 지역은 어느 정도 개발이 이루어졌으나 북쪽의 알류샨 열도는 여전히 개발이 더뎠다.

1924년 미국의회의 결정으로 알류샨 열도를 포함한 알래스카 지역의 모든 거주민들에게 미국시민권이 부여되었고 1933년에 알류샨 열도 최초의 병원이 우날래스카 섬에 들어섰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알래스카 전체의 주민은 대부분 미본토에서 건너간 백인들로서 70,000명 가량이었고, 그 중 알류샨 열도의 주민은 대부분 원주민인 알류트 족으로서 통틀어서 800 명 정도였다.

 

알류샨 열도에서 경제적으로 가치있는 산물은 수달의 모피 정도이며 주변 해역에 물고기가 상당히 많으나 고립된 위치와 함께 안개와 갑작스런 돌풍을 비롯한 험난한 기후 탓에 대규모 어업이 힘들었다.

 

군사적으로 보았을 때도 알류샨 열도는 매력이 없었다.

산이 높은 편이어서 몇몇 섬들을 제외하고는 비행장을 만들 평지를 찾기가 어려웠고 좋은 항구를 만들만한 섬도 별로 없었다.

지면은 약 30cm- 1.2m 에 달하는 이끼가 죽어서 쌓인 툰드라 지대거나 늪지대로서 걷기가 불편했으며 차량운행은 거의 불가능했다.

또한 이끼 아래의 화산토 때문에 비가 오면 지면이 진흙탕으로 변해버렸는데 비는 거의 1년 내내 왔다.

따라서 힘들게 평지를 찾아 비행장을 만들려고 해도 지면을 확실하게 배수하고 단단하게 다진 다음 포장하여 영구적인 활주로를 만들어야 했으므로 건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은 시간에 쫓겨 어쩔 수 없이 움낙 섬의 오터포인트에서 툰드라 위에 마스덴 매트를 깔아 활주로를 만들었는데 지반이 불안정하여 항공기의 이착륙에 상당한 지장을 주었다.

 

거기다가 지속되는 비, 눈보라, 안개로 인하여 알류샨 열도 부근의 비행이나 항해는 큰 지장을 받았다.

특히 거의 1년 내내 끼는 안개와 현지어로 '윌리와우' 라고 부르는 태풍과 맞먹는 풍속의 돌풍은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당시 미해군 장교들이 알래스카 해역을 어떻게 생각했는가에 대하여 알래스카 방어사령관이었던 사이먼 버크너 육군소장은 이렇게 기록했다.

 

"해군 장교들은 알래스카 해역에 대하여 본능적인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알래스카 해역을 숨쉴 때마다 안개를 내뿜고 기침으로 돌풍을 일으켜 운나쁜 항해자를 해도에 기입되지 않은 암초에 부딪히게 만듦으로써 그가 제독이 될 기회를 영원히 앗아가는 사나운 괴물이 사는 곳으로 여겼다."

("the naval office had an instinctive dread of Alaskan waters, feeling that they were inhabited by a ferocious monster that was forever breathing fogs and coughing up 'wiliwaw' that would blow the unfortunate mariner into uncharted rocks and forever destroy his chances of becoming an admiral.")

 

이런 날씨 때문에 애투 섬에서 B-29 를 띄워 일본을 폭격했다면 날씨 때문에 상실하는 B-29 가 너무 많아서 보충이 손실을 따라가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알류샨 열도를 통하여 미국이 일본을 침공하거나 반대로 일본이 미국을 침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나운 기후가 지도상에서 보면 가장 가까운 길인데도 불구하고 일본이나 미국이나 알류샨 열도를 통하여 서로를 침공하려 시도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였다.

 

따라서 미해군은 일본의 해군력을 제한하고 태평양 도서의 요새화를 금지한 워싱턴-런던 조약이 효력을 발휘하는 한 알래스카에 대한 위협은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알류샨 열도를 포함한 알래스카 전체는 1930년대 말까지 사실상 비무장 상태였다. 

미국이 알래스카 방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1934년에 일본이 런던 조약 탈퇴를 예고하면서부터였고 실제로 방어력이 증강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말이 되어서였다.

(1940년 당시의 알래스카. 출처 :  The Corps of Engineers - The War Aginst Japan. P.13)

 

1936년에 미함대항공사령관(Commander Fleet Aircraft) 에 취임한 어네스트 킹 소장은 알래스카 남서해안에 있는 바라노프 섬의 시트카에 수상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예산을 줄기차게 요구하여 1937년에 결국 획득했는데 액수가 불과 수천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킹 소장은 푼돈에 지나지 않는 이 예산을 알뜰하게 사용하여 시트카 지역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조사를 철저하게 실시했다.

 

이러한 킹 소장의 사전정비 작업에 영향을 받은 헵번 위원회는 1938년 12월에 의회에 제출한 역사적인 보고서에서 바라노프 섬의 시트카, 코디액 섬, 그리고 알류샨 열도 동단의 우날래스카 섬에 있는 더치하버에 해군항공기지를 건설하고 코디액 섬과 더치하버에는 추가로 잠수함 기지를 건설할 것을 미의회에 권고했다.

미의회가 이 권고를 받아들여 시트카에 3,000,000 달러, 코디액 섬에 10,000,000 달러, 그리고 더치하버에 6,000,000 달러의 예산을 승인함으로써 1939년 9월부터 본격적으로 공사가 시작되어 1941년 9월까지 일단락되었다.

 

알래스카에서의 기지건설공사는 군과 계약을 맺은 민간회사가 담당하다가 점차 육군 공병대가 해군 건설대대가 추가되었으며 전쟁의 진행에 따라 알래스카의 방어가 해군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1943년 4월 1일부터 해군건설대대가 전담했다.

이에 따라 1944년 1월1일 현재 알래스카에 파견된 해군건설대대는 20,500명에 달했다.

 

미해군은 육군의 알래스카 방어사령부(Alaska Defense Command) 설치에 발맞추어 시애틀에 사령부를 둔 제13해군관구(13th Naval District) 예하에 알래스카 지구(Alaskan Sector)를 1940년 중반에 창설하고 랄프 파커 대령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파커 대령은 포함 찰스턴을 기함 겸 사령부로 사용했으며, 제13해군관구는 어선 3척을 구입하여 초계정으로 개조한 후 이 4척으로 알래스카 해군(Alaska Navy)을 발족시켰다.

 

(PG-51 찰스턴. 만재배수량 : 2,339 톤, 길이 : 100m, 폭 : 13m, 흘수 : 3m, 속력 : 20노트, 무장 ; 6인치 포 4문, 1.1인치 대공포 16문, 12.7mm 기관총 4정, 승무원 : 180명, 출력 : 7,000 마력, 항속거리 : 12노트로  22,000km, 항공기 1대)

 

알래스카 해군은 천천히 확장되어 2년 후인 1942년 5월에는 기함 찰스턴 이외에도 구형 구축함 4척(워터스, 덴트, 케인, 샌즈), 73m 짜리 포정 1척 및 50m 짜리 포정 2척, 그리고 어선을 개조한 초계정이 11척 더 추가되었다.

또한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10대가 도착하여 코디액 섬과 더치하버에 각 1대씩 배치되었고, 나머지 8대는 남쪽의 시트카에 배치되었다.

 

알래스카 해군의 주임무는 비행장과 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인원과 자재를 싣고 알래스카 연안을 항해하던 수송선들을 일본잠수함으로부터 지키는 것과 일본군의 접근을 먼거리에서 발견하는 것이었다.

호위 임무는 알래스카 해군에서 유일하게 소나를 장비한 기함 찰스턴이 구형 구축함 및 포정들과 함께 실시했고 일본군 접근 감시 임무는 주로 어선을 개조한 초계정들과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이 담당했다.

 

알래스카와 미본토 사이의 캐나다 서해안은 캐나다 해군의 태평양사령부가 담당했는데 6인치 포를 가진 7,000 톤짜리 보조순양함 3척, 1,170톤짜리 코르벳함 7척, 소해정 12척 및 다수의 초계정을 갖추어 알래스카 해군보다 훨씬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캐나다 해군의 태평양사령부는 1942년 6월 이후로 미해군의 알래스카 지구 사령부와 긴밀하게 협조하기 시작했으며 필요하면 합동작전을 실시하기로 되어 있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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