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미군의 반응

 

1942년 6월 초에 일본이 점령한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은 군사적으로 가치가 없었다.

일본군은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발판으로 알래스카나 미본토를 위협할 능력이나 의지가 없었으며 미군 또한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탈환하여 활용할 용도가 없었다.

 

소련이 대일전에 참가한다면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은 미국에게는 시베리아로 항공기를 보내는 중계기지로서, 일본에게는 미서해안과 소련 사이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기지로서 의미가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독일과 사생결단의 혈전을 치르고 있던 소련은 후방에 또다른 적을 만들기를 원하지 않았고 일본 또한 중국과 남방전선을 지탱하는 데에도 허덕거리던 처지라 소련을 공격할 의향이 없었다.

실제로 미서해안과 블라디보스톡을 연결하는 해상보급로는 일본이 마음만 먹으면 애투 섬이나 키스카 섬의 점령 유무와 상관없이 방해할 수 있었으나 일본은 항복할 때까지 일본 근처를 통과하는 이 중요하면서도 취약한 보급로를 끝내 모른 척했다.

 

따라서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은 남태평양과 중부태평양에서 미국이 우회해버린 많은 거점들처럼 종전시까지 그냥 놔 둘 수도 있었다.

사실 미국이 우회해버린 라바울이나 트럭에 비하면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의 군사적 가치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수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침공했으며 애투 섬의 일본군 수비대는 처절한 방어전 끝에 전멸하는 참극을 겪어야만 했다.

이러한 비극의 뒤편에는 일본과 미국의 국내정치가 긴밀하게 관여하고 있었다.

 

사실 일본해군은 1942년 6월 초에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점령할 때까지만 해도 6월 말까지 철수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의 참패를 호도하기 위하여 애투 섬과 키스카 섬 상륙을 커다란 전과라고 국민들에게 대대적으로 선전했으므로 1달도 안 되어 그 섬은 쓸모 없는 섬이라면서 철수하기가 곤란해졌다.

일본군은 애투와 키스카에 대한 확실한 장기 계획이 없이 어정쩡한 상태에서 미군이 키스카 섬을 계속 공습하자 키스카 섬의 수비대를 야금야금 늘리다가 결국 애투와 키스카 섬을 계속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실제로 일본군은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점령하여 주둔해 본 결과 알류샨 열도의 기후가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비행과 항해에 훨씬 불리하며 따라서 군사적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국내정치적 요인에 밀려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계속 점령하기로 결정하고 수비대를 증강함으로써 과달카날에 이어 또다시 이길 자신도 없는 노름판에 판돈을 더 집어넣어서 판을 키우는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다.

그러나 일본군의 증강도 어차피 방어가 목적이었으며 비록 증강되었다고 해도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의 일본군은 미국을 위협할 힘도, 의지도 없었다.

따라서 일본의 오판이 있었더라도 미국이 맞장구를 쳐주지 않았으면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은 종전시까지 라바울이나 트럭처럼 지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국내사정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민주국가인 미국에서는 아무리 전쟁 중이라고는 해도 기본적으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었으므로 국민들은 중요한 기밀이 아닌 한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수많은 아마추어 전략가들이 심심하면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이 미국의 심장을 노리는 일본군의 창끝이며 미국인들이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남태평양의 이름도 모르는 섬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에 정신이 팔린 사이 일본군의 대부대가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경유하여 알래스카나 심지어 미본토 서해안에 쏟아져 들어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아마추어 전략가 중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언론인들도 있었으므로 진주만 기습 이후 완전히 새가슴이 되어버린 미의회를 비롯한 여러 방면의 높으신 분들 중에서는 그런 엉터리 경고가 신문이나 잡지에 실릴 때마다 미함대 총사령관이자 해군참모총장인 킹 대장을 찾아와서 이것저것 캐물으며 귀찮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안 그래도 미해군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멍청이로 생각하고 있던 킹 제독에게 해군과 그 전략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아마추어 전략가들이 끄적거린 신문 기사 따위나 읽고 찾아와서 감히 자신이 지도하는 미해군의 전략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간섭하려 드는 이런 높으신 분들은 단지 경멸의 대상일 뿐 이해시키려고 노력할 가치가 없는 인간들이었다.

가뜩이나 바쁜데 이런 멍청한 인간들 상대하느라고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기 싫었던 킹 제독은 높으신 분들이 자신을 찾아와 귀찮게 굴 때마다 일일이 설명하는 대신 태평양함대 사령관 니미츠 제독에게 전문 한 장을 달랑 보내고는

 

"의원님께서 우려하시는 바에 대하여 태평양함대 사령관에게 만전을 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라고 말하고는 돌려보냈다.

그러면 니미츠 제독은 다시 북태평양해역군 사령부에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공략할 준비에 만전을 기하라."

 

는 뻔한 전문을 보냈고 그때마다 보급순위의 맨 아랫쪽에서 불만이 가득 쌓여있던 북태평양해역군에서는 발끈하여 애투 섬과 키스카 섬 공략을 위해 필요한 병력과 항공기를 비롯한 무기 및 장비 , 그리고 보급품의 길다란 목록을 태평양함대 사령부에 제출하는 양상이 되풀이되었다.

 

이런 상황이 반복하여 벌어지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의 소속 때문이었다.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은 알류샨 열도에 속해 있었는데 알류샨 열도는 알래스카의 일부였으며 알래스카는 미본토, 하와이 및 파나마 운하와 함께 미국의 방어전략상 서반구(Western Hemisphere)에 속해 있었다.

일반적인 미국인들에게 서반구란 곧 미본토를 의미했으며 따라서 미본토의 일부를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에 일반 국민들은 적잖은 당혹감과 불편함을 느꼈다.

이러한 불편한 감정은 미본토 서해안과 알래스카의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서부방어사령관 드윗 중장도 마찬가지였으며 실제로 드윗 중장은 일본군이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점령한 직후부터 미군이 상륙작전을 실시하여 이 두 섬을 탈환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했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 자신이 맡은 미본토 서해안이 침공당할 위험이 사실상 없어지면서 애투 섬과 키스카 섬에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던 드윗 중장과 달리 미함대 총사령관 킹 제독이나 태평양해역군 총사령관 니미츠 제독에게는 군사적으로 아무 가치도 없는 애투 섬과 키스카 섬 탈환보다 훨씬 급하게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들이 아주 많았다.

그러나 미본토의 일부인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계속적으로 여론의 압력을 받게 된 킹 제독과 니미츠 제독은 마침내 짜증을 내기 시작했으며 점차 이 두 섬을 눈 위에 난 혹처럼 거추장스럽게 여기기 시작했다.

결국 킹 제독과 니미츠 제독은 과달카날 전투가 끝나고 태평양함대에 여력이 생기면 1943년 하반기로 예정된 중부태평양 진공을 시작하기 전에 이 귀찮은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1942년 10월, 미군 수뇌부는 다음 해인 43년 9월 이전에 애투와 키스카에 상륙하기로 합의했다.

 

미군이 애투 섬과 키스카 섬에 일본군이 상륙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42년 6월 10일이었다.

더치하버에 있던 제4정찰비행단장 게레즈 대령은 애투 섬과 키스카 섬으로부터 기상통신이 끊기자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수상기 모함 길리스를 키스카 섬과 더치 하버 사이의 애트카 섬에 진출시켜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을 띄웠다.

10일 오후에 카탈리나 1대가 키스카 항에 정박한 4척의 일본함정과 애투 섬에 새로 생긴 천막들을 발견하고 보고했다.

 

(알류샨 열도)

 

일본군이 애투 섬과 키스카 섬에 상륙했다는 보고를 받은 니미츠 제독은 즉시 폭격을 명령했다.

이 명령에 따라 6월 11일부터 13일까지 애트카 섬에 정박한 수상기 모함 길리스를 기지로 하여 카탈리나들이 키스카 섬을 폭격했다.

이 과정에서 카탈리나 3대가 격추되었다.

 

(PBY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육군항공대도 폭격에 가세했다.

6월 11일 아침에 5대의  B-24 리버레이터 폭격기가 움낙 섬의 포트 글렌 비행장을 이륙하여 키스카 폭격에 나섰다.

B-24 폭격기들은 5,400m 높이에서 폭격을 가했으며 이 과정에서 잭 토드 대위가 조종하던 리버레이터 1대가 일본군의 대공포에 맞아 격추되었다.

그날 오후에 5대의 B-17 폭격기가 추가로 폭격을 실시했고, 육군항공대의 중폭격기들은 12일에도 폭격을 실시했다.

6월 11일 - 13일의 폭격으로 미군항공기들은 일본구축함 1척에 손상을 입히고, 97식 비행정 1대를 파괴했다.

 

키스카 섬의 일본군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쿠릴 열도의 바라무시로에서 키스카로 전진배치된 97식 비행정들이 6월 14일에 미국의 수상기모함 길리스가 정박 중이던 애트카 섬으로 반격을 가해왔다.

게레즈 대령은 태평양함대의 암호해독반으로부터 미리 경고를 받아 13일 오후에 길리스를 철수시킴으로써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

이때 길리스를 호위하던 구축함 헐버트는 모두 알류트 족이던 애트카 섬의 주민 62명을 태우고 철수했다.

길리스의 철수 이후로는 육군항공대의 중폭격기들이 키스카 섬 폭격을 담당했다.

 

(97식 비행정.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6월 18일에는 러셀 콘 소령이 지휘하는 8대의 중폭격기가 4,500m 높이에서 폭격을 가하여 키스카 항에 정박 중이던 수송선 닛산마루를 격침했다.

닛산마루의 격침에 놀란 일본군의 수상기 모함 기미카와마루는 황급히 키스카 섬을 떠나 서쪽으로 140km 떨어진 애가투 섬으로 도망쳤다.

 

키스카 섬 폭격의 가장 큰 장애는 날씨였으므로 육군항공대는 이에 적합한 폭격전술을 확립했다.

우선 아침에 1대의 기상정찰용 중폭격기가 키스카 섬에 날아가서 만일 날씨가 좋으면 포트 글렌에서 몇 대의 중폭격기가 출격하여 폭격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기상 관계로 폭격이 불가능했다.

실제로 1942년 6월 11일부터 30일까지 키스카 섬에 대한 폭격이 실시된 것은 6번 뿐이었으며 3번은 포트 글렌을 출격했던 폭격기들이 키스카 섬의 기상이 너무 나빠서 폭격을 포기하고 돌아왔다.

7월에도 사정은 비슷하여 포트 글렌에서 폭격기가 이륙한 것은 15번이었으나 7번은 키스카 섬의 기상이 너무 나빠 그대로 돌아왔고 실제로 폭격을 실시한 것은 8회에 지나지 않았다.

 

미미한 폭격의 성과에 화가 난 북태평양군 사령관 테오발드 해군소장은 중폭격기에 의한 키스카 폭격을 폭탄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하면서 중지시켰다.

이후 제11육군항공대는 주로 P-38 전투기를 사용하여 키스카 섬 주변 상공을 초계하고 중폭격기들을 이용하여 구름이 잠깐 개인 날을 찾아 사진촬영에 주력했다.

8월 4일에 초계 중이던 P-38 전투기들이 애트카 섬 상공에서 일본군의 97식 비행정 2대를 격추했다.

 

일본군은 미군의 공격에 맞서 키스카 섬의 증강을 실시했다.

1942년 7월 3일에 정규항모 즈이가쿠, 개장항모 준요, 경항모 류조 및 즈이호를 포함한 강력한 일본함대가 잠수정 6척을 실은 수상기모함 지요다, 그리고 1,200 명의 병력과 보급품들을 실은 수송선 아르헨티나마루를 호위하여 키스카 섬에 도착했다.

이로써 전투병력과 설영대를 포함하여 1,250 명이던 키스카 섬의 수비대는 거의 2배로 늘었으며, 다음날인 7월 4일에는 제로기의 수상기형인 2식 수상전투기 6대를 실은 수상기모함 기미카와마루가 키스카 섬에 도착했다. 

 

키스카 섬에 강력한 일본함대가 도착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미국 잠수함들이 사냥을 위하여 몰려들었다.

미국잠수함 트리톤은 7월 4일에 수상기 모함 기미카와마루를 호위하던 일본구축함 네노히를 격침했다.

다음날인 7월 5일에는 그라울러가 키스카 근해에서 일본구축함 아라레, 시라누이, 가츠카에게 뇌격을 가하여 아라레를 격침하고, 시라누이와 가츠카를 대파했다.

7월 15일에는 미국잠수함 그러니언이 키스카 섬에 배치된 일본해군의 구잠정 2척을 격침했다.

7월 30일에 그러니언은 8,572 톤 짜리 수송선인 가노마루를 공격하여 어뢰 1발을 명중시켰으나 그 직후 일본군이 키스카 근해에 뿌린 200 개의 기뢰 중 하나에 부딪혀 침몰했다.

가노마루는 그러니언의 어뢰에 맞아 큰 피해를 입었으나 침몰을 모면하고 키스카 항에 들어갔다.

 

8월 들어 과달카날 전투가 시작되자 니미츠 제독은 알류샨 열도 근해에서 활동 중이던 잠수함들 중 성능이 뛰어난 함대형 잠수함들을 모두 철수시켰다.

따라서 북태평양에는 성능이 떨어지는 구형의 S-보트들만 남게 되었다.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책임지고 있던 일본제5함대 사령관 호소가야 보시로 중장은 방어를 위하여 비행장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비행장이 완성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방어를 위하여 제로기의 수상기형인 2식 수상전투기들을 파견했다.

항해에 불리한 날씨와 불안정한 지반, 그리고 미군의 방해로 인한 수송의 어려움 때문에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의 비행장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으므로 마지막까지 이 두 섬의 방공은 대공포의 지원을 받은 2식 수상전투기들이 담당했다. 

1942년 7월 5일에 6대의 2식 수상전투기가 수상기모함 기미카와마루에 실려 키스카 섬에 도착한 이래 일본해군은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상실할 대까지 모두 37대의 2식 수상전투기들을 알류샨 열도에 투입했다. 

 

(2식 수상전투기. 자세한 애용은 여기로)

 

이들 2식 수상전투기들의 운용 결과는 알류샨 열도의 기후가 비행에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었다.

알류샨 열도에 투입된 총 37대의 2식 수상전투기들 중 2대를 제외한 35대가 상실되었는데 상실된 35대 중 전투 손실은 12대 뿐이었으며, 나머지 23대는 모두 나쁜 날씨 때문에 상실했다.

미군의 경우는 더 심했다.

제11육군항공대는 1942년 6월에서 10월 사이에 72대의 항공기를 상실했는데 이들 중 전투손실은 9대 뿐이었다.

 

7월 중순에 중폭격기와 더불어 다시 카탈리나 정찰비행정들도 폭격에 가세하자 키스카의 일본군은 미군의 수상기모함이 다시 키스카에 접근했다는 것을 알았다.

1942년 7월 20일, 3대의 97식 비행정이 기습적으로 애닥 섬에 정박 중이던 미국의 수상기모함 길리스를 폭격했으나 1발의 명중탄도 기록하지 못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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