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애닥 섬 상륙
미본토 서해안과 알래스카를 담당하던 서부방어사령관 존 드윗 중장은 일본군이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장악한 지 1주일도 지나지 않은 6월 14일에 전쟁성에 전문을 보내어 일본군이 방어를 굳히기 전에 이 두 섬에 상륙하여 탈환하자고 주장했다.
미함대총사령관이자 해군참모총장인 킹 해군대장이 전쟁성에 키스카 및 애투 상륙작전에 대한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히자 드윗 중장은 한발 물러났다.
그는 1942년 7월 16일에 합동참모본부에 전문을 보내어 키스카 섬에서 동쪽으로 320km 떨어진 타나가 섬에 상륙하여 비행장을 만들자고 제의했다.
당시 북태평양군 사령관 테오발드 해군소장도 움낙섬 서쪽에 전진 비행장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는데 그는 타나가섬에서 동쪽으로 80km 떨어진 애닥섬에 상륙하기를 원했다.
애닥섬의 쿨룩만은 4계절 내내 사용할 수 있는 양항이었으나 타나가 섬에는 그러한 양항이 없어서 겨울철에는 보급에 지장이 예상되었다.
제11육군항공대는 타나가섬을 선호하여 타나가섬에는 2-3주면 활주로를 만들 수 있는 평지가 있지만 애닥섬에 활주로를 만들려면 4달은 걸린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타나가섬을 주장하는 육군과 애닥섬을 주장하는 해군이 대립하다가 결국 8월 21일에 육군참모총장 마셜 대장이 양보함으로써 다음날인 8월 22일에 애닥섬에 상륙하라는 합동참모본부의 명령이 나왔다.
상륙날짜는 8월 30일이었다.
(알류샨 열도. 출처는 여기로)
애닥섬이든 타나가섬이든 둘중 한곳에 곧 상륙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알래스카의 육군과 해군은 미리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8월 25일부터 움낙 섬의 포트 글렌에서 P-38 전투기들이 애닥섬 상공을 초계하기 시작했고 상륙 이틀전인 28일에는 37명으로 이루어진 정찰대가 애닥섬에 상륙하여 일본군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콜드베이를 출발한 선두 제파는 8월 30일에 쿨룩만에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상륙했다.
다음날 저녁까지 제807공병항공대대를 포함하여 4,500 여명의 병력 및 장비, 보급품들이 요트, 개조한 어선 및 예인선에 끌려온 바지선 등으로 이루어진 약 250척의 잡동사니 함대에 실려와서 무사히 상륙을 마쳤다.
비행장 부지를 찾아 애닥 섬을 수색하던 육군공병대는 스위퍼 샛강이 바다로 흘러가는 부분에서 기가 막힌 활주로 부지를 찾아내었다.
공병대는 스위퍼 샛강의 흐름을 돌리고 배수로를 만드는 동시에 샛강 바닥을 돋우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간척지를 다지고 그 위에 마스덴 매트를 깔자 열흘 만에 활주로가 완성되었다.
1942년 9월 10일에 벌써 B-18 쌍발폭격기가 최초로 착륙했고 이후 13일까지 B-24 중폭격기 16대와 P-38 및 P-39 전투기 41대가 추가로 도착했다.
(애닥섬의 작은 만에서 미군 공병대의 불도저들이 활주로 건설에 사용할 모래들을 준설하고 있다.)
한편 일본군은 8월에 애투섬 수비대를 모두 키스카섬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애투섬 수비대의 이동은 수송선과 구축함을 사용하여 8월 27일부터 9월 16일까지 3차에 걸쳐 무사히 실시되었다.
이 기간에 키스카섬 주변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하여 초계중이던 일본잠수함 RO-61 이 8월 29일에 애트카섬의 나잔만에서 미군의 애닥섬 상륙을 지원하기 위하여 정박중이던 수상기모함 카스코를 발견했다.
RO-61의 함장 도쿠토미 대위는 어뢰를 발사하여 1발을 명중시켰다.
5명의 사망자와 20명의 부상자를 기록한 카스코는 해안에 안전하게 좌초하여 긴급 수리를 마친 후 코디액섬에 들렀다가 수리를 위하여 워싱턴주에 있는 퓨젯사운드 조선소의 건선거에 들어갔다.
(RO-61 이 발사한 어뢰에 맞은 카스코의 함저 부분을 퓨젯사운드 조선소의 기술자들이 살펴보고 있다.)
다음날인 8월 30일에 해상을 수색하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이 RO-61을 발견하고 폭뢰를 투하하여 손상을 입혔다.
RO-61은 급히 잠항했으나 손상된 함체에서 기름이 흘러 나왔다.
카탈리나의 보고를 받고 현장에 도착한 구축함 레이드의 함장 해리 맥킬헤니 소령은 해상의 기름자국을 따라 추적하여 결국 소나로 RO-61을 탐지하는데 성공했다.
레이드는 2차례의 폭뢰공격을 퍼부어 RO-61 에 큰 피해를 입혔고 RO-61 이 부상하자 포격을 가하여 격침했다.
RO-61 의 승무원 5명이 포로로 잡히자 맥킬헤니 소령은 이 포로들을 애트카 섬에 좌초한 채 수리 중이던 카스코로 보냈다.
9월 14일에 애닥섬을 출격한 미군기가 최초로 키스카섬을 폭격했다.
거리가 가까워졌으므로 이제 12대의 B-24 중폭격기들은 28대의 P-38 및 P-39 전투기의 호위를 받으면서 저공폭격을 가할 수 있었다.
키스카항의 함정들을 노린 6대의 B-24 폭격기는 450kg 짜리 고폭탄을 장비했고 막사와 잠수함 기지를 비롯한 지상목표를 노린 6대의 B-24 폭격기는 소형폭탄과 소이탄들을 장비했다.
공습은 성공적이었다.
저공으로 진입한 P-39 전투기들이 37mm 기관포로 사격을 가하여 키스카 항에 정박 중이던 잠수함 3척에게 피해를 입히고 0식수상정찰기 1대를 파괴했다.
450kg 짜리 고폭탄을 장착한 B-24 폭격기 6대는 키스카 항 내에 정박 중이던 소해정 2척과 수송선 1척을 격침했다.
다른 6대의 B-24 폭격기들은 일본군 막사와 잠수함 기지를 폭격하여 피해를 입히고 화재를 일으켰다.
일본군의 2식수상전투기들이 반격을 위하여 떠오르자 P-38 전투기들이 요격하여 3대를 격추했다.
이 와중에 1대의 2식수상전투기를 동시에 쫓던 P-38 전투기 2대가 공중충돌하여 추락했다.
이렇게 상실한 P-38 전투기 2대가 미군공격대의 유일한 피해였다.
공습이 끝나자 키스카의 2식수상전투기는 1대만 남았다.
이후 열흘간 애닥섬의 미군기들은 악천후 때문에 지상에 머물러야만 했다.
9월 24일에 일본의 수상기 모함 기미카와마루가 키스카 섬에 도착하여 2식수상전투기 6대와 0식수상정찰기 2대를 내려놓았다.
다음날인 25일에 날씨가 개자 애닥섬의 미군기들이 다시 키스카섬을 공습했다.
B-24 폭격기 9대 및 B-17 폭격기 1대가 폭격을 담당했으며 사진촬영을 위하여 B-17 폭격기 1대가 동행했다.
P-39 전투기 11대와 P-40 전투기 17대가 호위를 담당했는데 P-40 전투기 중 11대는 캐나다 공군 소속이었다.
폭격기들이 키스카 항에서 수송선 1척을 격침하고 다른 선박 몇척에 피해를 입히는 동안 전투기들은 리틀키스카섬을 기총소사하여 탄약고를 폭파시키고 화재를 일으켰다.
전투기들은 또한 해상에 계류중이던 0식 수상정찰기 5대를 파괴하고 요격에 나선 2식 수상전투기 2대를 격추했다.
이후 애닥섬의 미군기들은 3주 동안 거의 매일 키스카섬을 공습하여 주로 지상시설에 큰 피해를 주었다.
9월 한달동안 애닥섬의 미군기들은 키스카섬에 116톤의 폭탄을 투하했는데 이것은 키스카섬에 일본군이 상륙한 이후 지난 3개월간 투하한 폭탄의 합계보다 2배가 더 많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합계 15,000 톤의 수송선 2척과 소해정 2척을 격침하고 잠수함 3척에 피해를 입혔으며 0식수상정찰기 6대를 해상에서 파괴했다.
또한 일본군의 막사와 창고 및 잠수함기지 등에 큰 피해를 입혔고 그 과정에서 요격에 나선 일본의 2식수상전투기 5대를 격추했다.
10월에 들어와서도 폭격은 거의 매일 계속되었다.
10월 14일에는 애닥섬에서 쌍발폭격기가 최초로 공습에 나섰다.
이날 중폭격기들이 일본군의 탄약고를 폭격하여 커다란 화재를 일으키는 동안 B-26 쌍발폭격기 3대가 키스카항에 정박중인 일본선박을 겨냥하여 어뢰 3발을 발사했으나 모두 빗나갔다.
이틀 후인 10월 16일에 쌍발폭격기들은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1대가 보급선단을 호위하여 키스카섬에 온 일본구축함 오보로와 하츠하루를 키스카섬 북쪽 50km 해상에서 발견했다.
즉시 애닥 섬에서 B-26 쌍발폭격기 6대가 출격하여 오보로와 하츠하루에게 136kg 짜리 폭탄 24발을 퍼부었다.
오보로는 탄약고가 명중되어 순식간에 침몰했다.
219명의 승무원들 중 202명이 사망했으며 함장 야마나 소좌를 비롯한 생존자 17명은 하츠하루에게 구조되었다.
하츠하루도 후갑판에 명중탄을 맞아 프로펠러가 손상되는 등 대파되었으나 다행히 침몰은 면했다.
오보로의 생존자 17명을 구조하여 철수한 하츠하루는 이후 일본 본토의 건선거에 들어앉아 수리를 받아야 했으며 1년이 지난 1943년 10월에야 전열에 복귀할 수 있었다.
애닥섬의 미군기들은 10월 한달동안 약 200톤의 폭탄을 키스카에 투하했다.
일본군은 안개 때문에 미군의 애닥섬 상륙을 9월 말이 되어서야 알아차렸다.
10월 초에 일본군의 수상기들이 애닥섬의 활주로를 기습했으나 거의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미군이 애닥섬에 상륙하자 일본은 미군이 애투와 키스카에 상륙할 의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수비대가 키스카 섬으로 옮겨간 뒤 비어있던 애투 섬에는 10월 말에 1,000 명 규모의 수비대가 상륙했다.
12월 2일에는 1,115명의 병력을 태운 수송선 2척이 순양함 2척과 구축함 2척의 호위를 받으면 키스카 섬에 도착하여 이제 키스카섬의 병력은 약 4,000 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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