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동계작전
북태평양을 담당한 제8임무부대의 함정세력은 1942년 10월부터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남쪽의 과달카날에서 일본해군과 무시무시한 소모전을 치르고 있던 니미츠 제독은 상대적으로 조용한 북태평양으로부터 점점 더 많은 함정들을 뽑아갔다.
1942년 10월 말까지 중순양함 1척(루이스빌)과 경순양함 2척(호놀룰루, 세인트루이스)이 과달카날로 불려갔고, 굴뚝 4개를 가진 구형 구축함 6척이 고속수송함으로 개조되기 위하여 미본토 서해안으로 떠났다.
11월에도 함정 빼가기는 계속되어 결국 12월 1일이 되자 테오발드 소장 휘하에 남은 함정이라고는 경순양함 2척(디트로이트, 랠프), 구축함 4척, 그리고 어뢰정과 소형초계정 몇척이 전부였다.
북태평양의 미국잠수함 세력도 구형의 S보트 6척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수했으나 그 와중에서도 S-31은 10월 26일에 파라무시로 근해에서 일본수송선 케이잔마루를 격침했다.
북태평양의 해군세력이 줄어들자 제11육군항공대의 역할이 커졌다.
제11육군항공대도 중폭격기 상당수가 철수했으나 그 빈자리를 향상된 기량으로 메꾸었는데 특히 정박한 함선을 공격하는 기술은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
애닥섬의 11월은 엄청난 폭풍우로 시작되었다.
많은 비와 함께 시속 150km에 달하는 폭풍우가 몰아쳐서 애닥섬의 활주로는 30cm 깊이로 물에 잠겼고 모든 항공기의 이착륙이 불가능했다.
11월 7일에 폭풍우가 그치자 일본의 2식수상전투기 몇 대가 애닥섬의 활주로에 기습을 가하여 약간의 피해를 입히고 도망갔다.
이 2식수상전투기들은 전날 애투섬에서 키스카섬으로 날아온 것들이었다.
일본은 11월에 접어들면서 미군의 공습이 심해지자 수상기모함을 무리하게 키스카항에 보내는 대신 애투섬에 2식수상전투기들을 내려놓은 다음 키스카섬까지 날아가도록 했다.
그리하여 수상기모함 기미가와마루가 11월 6일에 애투섬에 6대의 2식수상전투기를 내려놓았고, 이들은 그날로 키스카섬까지 날아가서 다음날 애닥섬 공격에 참가했다.
키스카섬의 2식수상전투기들은 11월 8일에 폭풍우가 몰아쳤을 때 큰 피해를 입었다.
11월 9일에 B-17폭격기 1대, B-26쌍발폭격기 2대가 P-38전투기 4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키스카섬을 폭격했다.
B-17 폭격기가 해안의 시설물을 폭격하는 사이 B-26 쌍발폭격기 2대는 거트루드만에서 일본수송선을 폭격했으나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P-38 전투기 4대는 전날의 폭풍우로 큰 피해를 입고 홀츠만의 해안에 밀려나와 있던 2식수상전투기들에게 기총소사를 퍼부어 파괴했다.
이로써 키스카섬에 남아있던 2식수상전투기 8대는 전멸했다.
이후 키스카섬의 일본군들은 1달 이상 전투기없이 지내다가 12월 24일에 기미가와마루가 다시 애투 섬에 7대의 2식수상전투기를 내려놓았고 이들 중 6대가 다음날 키스카섬에 도착했다.
11월 10일부터 다시 폭풍우가 몰아쳐서 애닥섬의 미군기들은 지상에 머물러야 했다.
애닥의 미군기들은 11월 25일에 날이 개자 다시 키스카로 날아가 홀츠만에서 4,016톤짜리 체리본마루를 공격했고 다음날에는 2,427톤짜리 가초산마루를 공격했다.
두척 모두 큰 피해를 입고 침수가 심해져서 해안에 좌초되었다.
12월에는 애닥섬의 기상 때문에 폭격이 거의 불가능했다.
1942년의 마지막날인 12월 31일에 애닥섬의 미군기들은 키스카섬을 공격하여 3,100톤짜리 수송선 1척을 격침하고 다른 1척에 큰 피해를 입혔다.
(알류샨 열도. 출처는 여기로)
그동안 육군공병대와 해군건설대대는 건설작업에 매진했다.
미군은 애닥섬을 알래스카 최대의 군사기지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 계획에 따라 애닥섬에 15,000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소를 비롯하여 창고와 통신소등이 들어섰다.
비행장에는 격납고와 2층짜리 관제탑이 들어섰고 쿨룩만에는 부두와 건선거가 만들어졌다.
(미군의 전진기지로 변모한 애닥 섬의 모습. 앞에 보이는 것은 활주로다.)
육군공병대는 애닥섬의 동쪽에 위치한 애트카섬에 상륙하여 12월 27일까지 900m 길이의 비상활주로를 완성했다.
애닥섬과 애트카섬 사이에 있는 그레이트시트킨섬의 샌드만에는 보급기지가 만들어졌다.
이곳에는 급유용부두와 연료 및 탄약 저장고가 들어섰다.
카탈리나정찰비행정을 운용하는 해군의 제4초계비행단에게 알류샨열도의 겨울은 힘든 계절이었다.
정찰비행은 도저히 비행이 불가능한 날씨가 아니라면 웬만큼 바람이 불거나 구름이 끼어도 빼먹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카탈리나의 엔진을 토치로 가열하고 날개에 낀 얼음을 긁어내고 곱은 손으로 어뢰나 폭탄을 장착하고 가끔씩 하강 기류를 정면으로 받으면서 무거운 정찰비행정을 이륙시켜야 했다.
해상에서 운용하는 카탈리나는 창에 부딪히는 물보라가 얼어붙어 와이퍼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나마 레이더 덕분에 악천후 속에서도 정찰비행이 가능했다.
기압을 측정하여 높이로 나타내는 고도계는 기압이 다른 기상전선을 통과할 때는 오차가 크게 나타났으며 까딱 실수로 조난이라도 당하여 해상에서 탈출할 경우 즉시 구조되지 않는 이상 체온저하로 금방 사망했다.
군수지원이 부족했던 초기에는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의 지상요원들이 마치 거지들처럼 여기저기서 얻어먹으면서 임무를 수행했다.
그들은 육군이나 해군의 함정에게서 음식과 옷, 공구, 심지어는 옹벽을 만드는데 쓸 널빤지나 철판까지 구걸해가면서 카탈리나 비행정들을 돌보았다.
(PBY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미해군은 알류샨열도에 안개가 자주 끼기 때문에 어뢰정들이 활약하기 좋다고 생각해서 미드웨이에 배치되어 있던 클린턴 맥켈러 중위의 제1어뢰정편대(PT-22, 24, 27, 28)를 파견했다.
어뢰정들은 8월 20일에 미드웨이를 떠나서 알래스카 연안을 따라 자력으로 4,000km 를 항해하여 9월 1일에 더치하버에 도착했다.
이들은 얼마후 일본군의 상륙에 대비하여 애닥섬으로 보내졌다.
애닥섬에 대한 일본군의 상륙은 없었으므로 어뢰정들은 해상을 초계하거나 육군을위하여 보급품을 실어주기도 하고 기뢰를 부설하기도 했다.
겨울에 바다에 나서면 매서운 바람이 들어와 실내에 5cm 두께로 얼음이 얼 정도였는데 어뢰정 내에는 주방의 휘발유 스토브 이외에는 별도의 난방장치가 없었다.
이런 날에는 갑판에 얼어붙은 얼음의 무게로 인하여 위험해질 정도로 흘수가 깊어지고는 했다.
어느 겨울날 해상에서 폭풍우를 만난 어뢰정 4척은 후미진 만내로 대피했으나 그곳에서 조난당했다.
정박하기 위하여 투묘한 닻은 폭풍우에 힘없이 끌려 다녔고 어뢰정끼리 묶어둔 로프는 끊어졌다.
결국 어뢰정 4척 중 1척은 침몰하고 나머지 3척은 해안에 좌초되었다.
다음날 애닥섬의 경비정들이 다가와서 죄초된 어뢰정들을 해안에서 끌어내려고 하자 로프가 끊어지거나 걸쇠가 망가져 버렸다.
그러나 다행히 그날 오후까지 3척의 어뢰정들은 무사히 바다로 다시 나왔다.
사망자가 없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1942년 12월 27일에는 조셉 레버튼 소령이 지휘하는 구축함형 소해함 와스무스가 악천후의 희생자가 되었다.
와스무스가 심한 폭풍우를 만나 만내에서 6노트로 느린 속력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 폭뢰 2발이 떨어져서 물속에서 폭발했다.
같이 있던 유조선 라마포가 와스무스를 예인하려 했으나 용골에 치명타를 입은 와스무스는 결국 침몰했다.
다행히 와스무스의 승무원들은 모두 라마포에 의하여 구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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