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앰치트카 섬 상륙
북태평양군 사령관 테오발드 소장은 애닥섬 상륙이 실시되기도 전인 1942년 8월에 애닥섬 다음에는 키스카섬으로부터 남동쪽으로 불과 140km 떨어진 앰치트카섬에 상륙할 계획을 합동참모본부에 제시하여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알류샨 열도. 출처는 여기로)
한편 서부방어사령관 드윗 중장은 8월에 앰치트카에 투입했던 정찰대의 보고를 근거로 앰치트카에는 비행장을 만들기 어려우며 따라서 앰치트카 대신 1942년 11월 1일로 예정된 타나가섬 상륙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육군참모총장 마셜 대장은 타나가 상륙보다는 앰치트카 상륙이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하여 10월 말에 드윗 중장에게 앰치트카 상륙을 긍정적으로 검토하도록 강력하게 권고했다.
어쩔 도리가 없어진 드윗 중장은 타나가 상륙을 무기한 연기함으로써 사실상 취소하고 정찰대를 다시 앰치트카로 보내어 그 결과에 따라 다시 결정하기로 했다.
앰치트카 정찰대의 재파견은 사실상 요식행위로서 타나가섬 상륙을 고집하던 드윗 중장이 물러날 명분을 얻고자 한 제안이었다.
그런데 테오발드 소장은 앰치트카 재정찰을 위하여 해군에서 카탈리나 비행정을 내주기를 딱 잘라 거부했다.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앰치트카 주변 해상에서 일본군에게 공격당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지만 누가 보아도 드윗 중장에 대한 불쾌감의 표출이었다.
그리하여 정찰대는 움낙섬의 포트글렌에서 1달이상을 허송세월하게 되었는데 이 사건은 일본군이 애투 및 키스카에 상륙한 이래 6개월 동안 쌓여온 테오발드 소장에 대한 육군 측의 불만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어 결국 테오발드 소장의 교체를 가져왔다.
사실 테오발드 소장과 육군의 알력은 테오발드 소장의 교체로 일단락되었지만 원인을 테오발드 소장에게만 돌리기는 어렵고 오히려 북태평양군의 복잡한 지휘체계로 인한 필연적인 결과에 가까웠다.
1942년 3월의 합동참모본부 결정에 따르면 알래스카 연안을 포함한 북태평양 해역은 니미츠 제독 관할이었다.
따라서 1942년 5월 말에 테오발드 소장이 니미츠 제독에 의하여 북태평양군사령관으로 임명되자 알래스카의 해군 뿐만 아니라 육군과 육군항공대 병력도 테오발드 소장의 지휘를 받아야 했다.
한편 알래스카방어사령부를 독립시키려던 시도가 실패하면서 알래스카의 육군은 서부방어사령관 드윗 중장의 지휘를 계속 받고 있었다.
드윗 중장은 계급도 테오발드 소장보다 높은 데다가 니미츠 제독의 지휘를 받지도 않았다.
게다가 미드웨이 해전 이후 미본토 서해안에 대한 침공 위협이 사실상 사라지면서 드윗 중장의 관심은 온통 애투섬과 키스카섬에 집중되었다.
알류샨 열도에서 대부분 기간동안 주력을 담당한 제11육군항공대는 유럽을 중시하던 육군항공대 사령관 아놀드 장군이
"알래스카 방어는 해군 책임"
이라고 공언한 이래 끈 떨어진 연 꼴이 되어 있었다.
따라서 제11육군항공대가 워싱턴의 육군항공대 수뇌부와 연락하려면 알래스카 방어사령부와 서부방어사령부를 통하는 길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은 알류샨 열도 작전에 대한 서부방어사령관 드윗 중장의 발언권을 더욱 높여주었다.
게다가 과달카날 섬에서 처절한 소모전이 계속되면서 태평양함대는 테오발드 제독 지휘 하의 해군 세력을 지속적으로 빼낼 수 밖에 없었고 이런 상황은 알류샨 열도 작전에 대한 테오발드 소장의 발언권을 더욱 약화시켰다.
그리하여 공식적으로 알류샨 열도 작전은 테오발드 소장의 관할이었으나 실제로는 테오발드 소장과 드윗 중장 사이에 이견이 생기면 각자 합동참모본부에 자신의 안을 제시하여 합동참모본부의 결정에 따르는 일종의 경쟁관계로 변질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작전을 매끄럽게 이끌어가려면 수뇌부 사이의 인간적 관계가 중요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테오발드 제독은 두뇌는 명석하나 화를 너무 잘 내어서 해군 내에서도 악명이 자자했고 북태평양군 사령관으로서 육군 지휘관들을 대하면서 이러한 자신의 성격을 제대로 억누르지 못했다.
결국 1942년 12월이 되자 테오발드 소장과 드윗 중장을 비롯한 육군 및 육군항공대 지휘관들과의 관계는 수습이 불가능할만큼 악화되었다.
만일 니미츠 제독이 애투섬과 키스카섬의 일본군들을 그냥 눌러두는 것으로 만족할 생각이었으면 이런 문제는 대충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니미츠 제독은 중부태평양 진격을 시작하기 전에 애투섬과 키스카섬을 탈환하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당시 미군은 키스카 섬의 일본군을 최대 1만명으로 추산하고 상륙군으로 최소한 1개 보병사단을 중심으로 한 25,000 명을 상륙시킬 계획이었는데 기후여건상 1943년 9월이 되기 전에 두 섬에 상륙을 완료해야 했다.
복잡하고 챙길 것이 많은 상륙작전의 특성상 25,000 명을 상륙시키는 대규모 상륙작전을 위해서는 상당한 준비기간이 필요했으므로 2번의 상륙작전을 하기에는 시간이 빠듯했다.
이런 상황에서 육군과의 사이가 극도로 나쁜 테오발드 소장에게 상륙작전을 총괄해야 할 북태평양군사령관직을 계속 맡길 수는 없었다.
결국 니미츠 제독은 1942년 12월 초에 테오발드 소장을 보스턴의 제1해군관구사령관으로 보내고 그 후임에 미해군 제일의 마당발로 유명한 토머스 킨케이드 소장을 임명했다.
(토머스 킨케이드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니미츠 제독은 남태평양에 있던 킨케이드 제독을 불러 1942년 12월 9일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니미츠-킹 회담에 데리고 갔다.
이 회담에서 킹 제독은 1943년 1월 4일자로 북태평양군 사령관 테오발드 소장을 보스턴의 제1해군구 사령관으로 보내고 대신 킨케이드 소장을 그 자리에 앉히겠다는 니미츠 제독의 제안을 승인했다.
이때 북태평양군의 전투함대를 지휘하던 윌리엄 스미스 소장도 찰스 맥모리스 소장으로 교체되었다.
킨케이드 소장은 샌프란시스코까지 간 김에 그곳에 사령부를 두고 있던 서부방어사령관 드윗 중장을 12월 13일에 방문하여 앰치트카 상륙에 대하여 논의했다.
훌륭한 지휘관인 동시에 외교수완도 탁월했던 킨케이드 제독은 드윗 중장과의 만남에서 그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테오발드 소장과 불화를 겪으면서 해군과 제독에 대하여 나쁜 인상을 가지고 있던 드윗 중장은 킨케이드 제독과 토론을 마치고 나서 자신의 지론이었던 타나가 상륙을 포기했을 뿐 아니라 킨케이드 제독의 역량과 태도를 칭찬하면서 앰치트카 상륙을 적극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포트글렌에서 대기하고 있던 정찰대가 12월 17일-19일에 걸쳐 앰치트카를 정찰하여 섬에 아직 일본군이 없으며 2-3주면 전투기용 활주로를 만들 수 있는 평지가 있음을 확인했다.
앰치트가 상륙이 1943년 1월 9일로 결정되자 제11육군항공대는 애투와 키스카에 대한 공습을 강화했다.
1943년 1월 5일에 안개가 걷히자 애닥섬에서 출격한 폭격기들이 애투섬의 홀츠만에서 6,577톤짜리 몬트리올마루를 격침했고, 같은 날 쌍발폭격기들은 증원병력과 보급품들을 싣고 키스카로 접근하던 6,101톤짜리 고토히로마루를 격침했다.
이후로는 안개가 끼어 폭격이 불가능했다.
로이드 존스 준장이 지휘하는 2,000 명 규모의 앰치트카 상륙부대는 맥모리스 소장이 지휘하는 중순양함 1척(인디애나폴리스), 경순양함 2척(랠리, 디트로이트) 및 구축함 4척으로 이루어진 함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앰치트카에 접근했으나 날씨가 나빠서 해상에서 대기해야 했다.
1943년 1월 11일 밤에 윌리엄 포그 소령이 지휘하는 구축함 워든이 앰치트카섬의 콘스탄틴항에 진입하여 선발대를 상륙시켰고 다음날인 12일 저녁까지 본대를 실은 수송함 4척이 상륙을 완료했다.
적의 저항은 없었으나 앰치트카의 험난한 자연이 희생을 강요했다.
선발대를 상륙시키고 나오던 워든은 사나운 조류에 휩쓸리면서 암초에 부딪혀 기관실 바로 아래에 구멍이 났다.
구축함 듀이가 달려와 워든을 암초에서 끌어내었으나 갑자기 예인 케이블이 끊어지면서 워든은 사나운 조류에 휩쓸려 다시 암초에 부딪히면서 더 큰 구멍이 났다.
워든이 바위 투성이의 해안에 좌초하면서 함체 후방이 물에 잠기자 함장 포그 소령은 함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긴박한 탈출 과정에서 섭씨 2도 밖에 안되는 차가운 바닷물에 빠진 승무원들 중 14명이 사망했다.
(좌초된 구축함 워든의 모습)
상륙부대는 일단 무사히 상륙했으나 그날밤에 심한 폭풍우가 몰아쳐서 수송함 아서미들턴과 수많은 상륙주정이 침수되었다.
1월 13일이 되자 폭풍우가 멎는가 싶더니 눈보라가 휘몰아치기 시작해 12일간 계속되었다.
24일에 겨우 눈보라가 멎자 일본군의 수상기가 날아와서 미군을 발견하고는 폭격을 가했으나 피해는 미미했다.
공병들이 곧 활주로 공사를 시작하여 2월 16일에 8대의 P-40 전투기들이 최초로 키스카섬 상공에 초계비행을 실시했다.
미군의 앰치트카 상륙은 일본군으로 하여금 양자택일을 강요했다.
이제 일본은 애투섬과 키스카섬에서 철수하든지 아니면 수비를 강화하고 비행장을 건설하여 미군의 보급선을 공격하는 맞불작전으로 나가야만 했다.
일본제5함대 사령관 호소가야 중장은 일본군에게 시간이 얼마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일 철수하려면 1달내로 하는 것이 안전했으며 일단 미군기가 앰치트카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면 수상함의 통행은 큰 지장을 받을 것이었다.
1943년 2월 5일, 일본해군은 미군의 공격으로부터 쿠릴 열도를 보호하기 위하여 애투와 키스카를 끝까지 지키기로 결정했다.
애투와 키스카의 방어를 위해서는 비행장이 반드시 필요했으므로 이후 일본군은 비행장 건설에 매진했으나 지형적인 불리함과 건설용 중장비의 부족, 그리고 미군의 집요한 공습 때문에 비행장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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