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키스카 탈환 

 

일본군이 키스카를 탈출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던 미해군은 상륙을 앞두고 키스카 섬에 일련의 포격을 가했다.

1943년 7월 30일, 구축함 패러것과 헐이 일본군 주둔지에 200 발의 5인치 포탄을 쏟아 부었다.

8월 2일에는 구형전함 2척(아이다호, 테네시), 중순양함 2척(솔트레이크시티, 인디애나폴리스), 경순양함 3척(리치먼드, 디트로이트, 랠리), 구축함 9척으로 이루어진 함대가 키스카 섬에 14인치 고폭탄 120발, 8인치 고폭탄 250발, 6인치 고폭탄 605발 그리고 5인치 포탄 1,337발, 합계 185톤의 포탄을 발사했다.

이후로도 상륙일인 8월 15일까지 구축함 6척(애브너리드, 에일윈, 패러것, 헐, 모내헌, 펠프스)가 교대로 매일 키스카 섬을 포격하여 합계 994발의 5인치 포탄을 쏟아부었다.

12일에는 다시 중순양함 2척(솔트레이크시티, 인디애나폴리스), 경순양함 3척(리치먼드, 디트로이트, 랠리), 구축함 5척이 키스카 섬을 포격했다.

오전 7시12분부터 33분까지 21분간 지속된 포격에서 미함대는 8인치 포탄 85발, 6인치 포탄 450발, 그리고 5인치 포탄 1,072발 등 총 60톤의 포탄을 퍼부었다.  

 

제11육군항공대도 공습을 실시했다.

8월 2일에 날씨가 맑아지자 제11육군항공대는 B-24 폭격기 8대, B-25 쌍발폭격기 9대, P-38전투기 8대를 투입하여 해군의 포격과 발맞추어 키스카 섬을 폭격했다.

8월 4일에는 134회 출격하여 152톤의 폭탄을 키스카 섬에 쏟아부었다.

 

8월 5일과 6일은 그때까지의 폭격을 평가하는 시간을 가지느라 폭격을 중단했으며, 이후 날씨가 나빠져서 4일간 폭격을 중단했다.

 

8월 10일부터 날씨가 좋아지자 제11육군항공대는 폭격을 재개하여 상륙일인 15일까지 모두 355톤의 폭탄을 키스카 섬에 투하했다.

 

쿠릴 열도 폭격도 실시되었다.

8월 11일에 B-24 폭격기 9대가 쿠릴 열도로 날아가서 가타오카 해군기지와 가시와바라 육군기지를 폭격했다.

저번과 달리 이번에는 치열한 대공포화와 함께 약 40대의 제로기, 2식 수상전투기 및 하야부사 전투기들이 요격하여 B-24 폭격기 9대 중 2대가 격추되고 3대가 피해를 입었다.

일본전투기들은 5대가 격추되었다.

 

그동안 미군이 키스카 섬에서 이상한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8월 6일에 열린 제11육군항공대의 폭격평가회에서 키스카 항을 찍은 사진 몇장이 주목을 끌었다.

8월 2일과 4일의 폭격과정 중에 촬영된 이 사진에서는 키스카 항 주위에 일본군 트럭들이 완전히 노출된 상태로 모여 있었다.

이전에 일본군 트럭은 섬의 곳곳에 주의깊게 분산되어 잘 은폐되어 있어서 공중촬영으로는 그 존재를 알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데 8월 2일에 찍은 사진에는 트럭들이 모두 키스카 항 주위에 완전히 노출된 상태로 모여 있었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틀 뒤의 찍은 사진에도 똑같은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는 점이었다.

 

수상한 점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미군의 통신부대는 7월 28일 이후로 키스카 섬의 통신소에서 발신하는 무선통신을 전혀 잡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해안에 바짝 다가가서 매일같이 포격을 가한 구축함들은 전혀 반격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적의 기지에서 아무런 움직임도 발견할 수 없었다.

제11육군항공대의 조종사들도 8월 들어서 키스카 섬의 일본군 대공포화가 거의 무시할만큼 약해졌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북태평양군 사령관 토머스 킨케이드 중장은 이러한 의문에 답을 찾기 위하여 본격적인 상륙 이전에 소규모의 정찰대를 상륙시키는 방안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그러나 육군항공대의 조종사들은 일본군의 대공포화가 약해졌지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했으며 심지어는 도망치는 일본군을 기총소사했다는 전투기 조종사의 보고까지 있었다.

홀랜드 스미스 해병소장은 육군조종사들의 보고를 믿을 수 없다면서 정찰대 파견을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결국 킨케이드 중장은 정찰대 파견을 포기했다.

무엇보다 어설프게 정찰대를 상륙시켰다가 일본군에게 생포되기라도 하면 8월 15일로 예정된 상륙작전에 큰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키스카 섬 상륙부대는 애투 섬의 경우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찰스 콜렛 소장이 지휘하는 지상부대의 규모는 제7보병사단을 중심으로 5,300 명의 캐나다 제13보병여단을 포함하여 34,426명에 달했다.

지상부대는 툰드라 지형에 익숙해지기 위하여 승함하기 직전까지 애닥 섬에서 전투훈련을 강도높게 실시하고 있었다.

 

록웰 소장이 95척에 달하는 키스카 침공함대를 지휘했다.

수송함대는 공격수송함(APA) 4척, 병력수송함(AP) 10척, 화물수송함(AKA 및 AK) 4척, 고속수송함(APD) 1척, 전차상륙함(LST) 14척, 보병상륙정(LCI) 9척, 전차상륙정(LCT) 19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구형전함 3척, 중순양함 1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19척이 수송함대의 호위 및 화력지원을 담당했고, 이외에 경량기뢰부설함 2척, 고속소해함 3척, 예인선 3척, 수로측량함 1척이 포함되어 있었다.

부대를 직접 지휘하는 주요 지휘관들 이외에도 제4군 사령관이자 서부방어사령관인 존 드윗 중장, 존 맥클로이 전쟁성 차관, 그리고 홀랜드 스미스 해병소장 등이 옵저버로 참관할 예정이었다.

 

(애닥 섬에 집결해 있는 키스카 침공함대)

 

키스카 침공함대는 금요일인 1943년 8월 13일에 애닥 섬을 출항하여 15일 새벽에 키스카 섬에 도달했다.

소해함이 수로를 청소하자 구형전함, 순양함 및 구축함들이 일본군 기지를 포격했다.

일본군을 기만하기 위하여 다음날 키스카 섬의 북쪽 서해안에 상륙예정인 캐나다 제13 보병여단을 실은 수송함 5척이 커트루드 협만 바깥쪽에 정박했고 이어서 오전 7시 30분부터 거트루드 협만 내로 위장한 어뢰정 5척이 진입했다.

이 어뢰정들은 판자로 씌워 위장했는데 이 판자에는 실제 크기로 정교하게 병사들을 그려넣어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병력이 가득 타고 있는 상륙주정처럼 보였다.

 

주력인 제7보병사단은 키스카 섬 중부의 서해안에 상륙했다.

최초 상륙은 오전 8시 21분이었으며 오전 8시 40분까지 3,000 여명의 병력이 상륙하여 깊이 4,000m 의 교두보를 확보했고, 10시까지는 7,200 여명이 장비 및 보급품들과 함께 상륙해 있었다.

다음날에는 키스카 섬 북부의 서해안에 캐나다 제13보병여단을 중심으로 한 7,000 여명의 병력이 상륙했다.

 

(키스카 탈환전. 원본은 여기로)

 

미군과 캐나다군은 8월 17일에 키스카 항에 있는 일본군 기지 부근에서 합류했다.

상륙부대는 이어서 일본군 기지 내로 쳐들어 갔는데 자욱한 안개 속에서 아군끼리 수많은 오인 사격이 발생하여 21명의 사망자와 31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날 밤에 해상에서도 커다란 피해가 있었다.

8월 18일 오전 1시 34분에 구축함 애브너리드가 일본군이 설치한 기뢰에 접촉했다.

기뢰의 폭발로 5번 포탑 후방의 함체가 떨어져 나가 물 속에 가라앉았다.

더욱 나쁜 것은 연막탄 보관탱크가 터지면서 연막이 새어나와 수많은 승무원들이 질식사한 것이었다.

살아남은 승무원들의 응급처치로 겨우 침몰을 모면한 애브너리드는 동료 구축함 뱅크로프트에게 이끌려 애닥 섬으로 향했다.

애닥 섬에서 긴급수리를 받은 애브너리드는 본격적인 수리를 위하여 미본토 서해안 브레머튼의 퓨젯사운드 조선소까지 가야만 했다.

애브너리드에서는 70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으며 47명이 부상을 입었다.

 

(함체 후방이 떨어져 나간 상태로 퓨젯사운드 조선소에 도착한 DD-526 애브너리드)

 

키스카 섬에서는 텅 빈 일본군 기지를 장악한 미군과 캐나다군의 정찰대가 며칠 동안 키스카 섬을 샅샅이 훑었으나 일본군은 단 1명도 없었다.

1943년 8월 22일 오전 11시 50분, 북태평양군 사령관 토머스 킨케이드 중장은 키스카 섬의 탈환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리하여 35,000 명에 달하는 미국-캐나다 연합군은 일본군이 버려둔 개 4마리를 생포하는 전과를 올리면서 키스카 섬을 탈환했다. 

제11육군항공대는 키스카 상륙 이후 항복을 권유하는 전단 10만 장을 뿌렸으나 불행하게도 이 개들은 글을 읽지 못했다.

 

이로써 일본군은 1942년 6월에 애투 섬과 키스카 섬에 상륙한 이래 1년 2개월 만에 알류샨 열도에서 완전히 쫓겨났다.

애투 섬 수비대는 전멸했으며 키스카 섬 수비대는 귀중한 무기와 장비 및 보급품들을 모두 놓아두고 몸만 빠져나왔다.

일본해군은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둘러싼 전투에서 구축함 3척, 잠수함 6척, 수송선 9척을 상실했다.

 

그러나 일본은 알류샨 열도에서 결코 손해본 장사를 한 것이 아니었다.

1942년 6월 초에 아무런 어려움 없이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장악한 이래 일본군은 1만명 미만의 병력과 약간의 함정 및 항공기를 투입하여 미국 함대와 제11육군항공대 그리고 많은 병력들을 전략적으로 별로 가치가 없는 북태평양에 1년 이상 붙잡아 두는데 성공했는데 키스카 섬 탈환 당시에는 그렇게 붙잡혀 있던 미군 병력이 10만명을 넘었다.

만일 남태평양군 사령관 헐지 제독이 애투 섬과 키스카 섬 탈환에 동원된 병력과 함정들의 일부만이라도 지원받았다면 뉴조지아 섬 점령을 빨리 마무리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이 함정들과 병력들의 일부라도 당시 미군 보급선의 끝에 매달린 채 일본군과 악전고투를 거듭하고 있던 맥아더 장군의 남서태평양지역군에 돌려졌다면 후온 반도 전투를 좀 더 수월하게 치를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은 다시 미국의 품으로 돌아왔고 미국 국민들은 이제 본토의 일부를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다는 불쾌한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합동참모본부에서는 힘들게 탈환한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의 본전을 뽑기 위하여 1943년 9월 7일에 바라무시로 공략을 토의했으나 직접 부대를 이끌었던 지휘관들의 의견을 들어본 뒤 18일에 포기했다.

무엇보다 1943년 11월에 길버트 제도 공략이 예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바라무시로 공략에 필요한 병력을 빼낼 곳이 없었다.

또한 바라무시로 공략은 향후 홋카이도 침공을 전제로 할 때에만 의미가 있었는데 홋카이도 침공은 영국이 절대 반대하고 있었다.

만일 소련이 대일전에 참가한다면 바라무시로 공략은 충분히 의미가 있었으나 1943년 9월의 시점에서 소련은 일본과 전쟁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일본은 다시는 알류샨 열도를 넘볼 생각도 없었고 그럴 여력도 없었다.

실제로 대본영은 키스카 탈출이 성공한 직후인 1943년 8월 4일에 북방방면군을 폐지했으며 제5함대와 제12항공함대를 북동방면 함대로 통폐합하고 사령관에 도즈카 중장을 임명했다.

가와세 중장이 지휘하는 북동방면 함대의 수상함 세력은 중순양함 1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6척, 수송선 7척과 약간의 소형 함정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는 쿠릴 열도의 방어에 필요한 최소한의 수준이었다.

 

1943년 11월의 충격 작전을 앞두고 알류샨 열도의 미군은 전반적으로 축소되었으며 지휘관들도 이동했다.

9월 11일에 데븐포트 존슨 소장이 버틀러 소장의 뒤를 이어 제11육군항공대 사령관이 되었다.

제11육군항공대는 세력이 삭감되었고 임무도 가끔씩 쿠릴 열도에 견제 공격을 하는 정도로 축소되었다.

 

북태평양군 사령관 토머스 킨케이드 중장은 1943년 10월 11일에 맥아더 해군이라고 불리던 남태평양지역군의 제7함대 사령관으로 옮겼고 플레처 중장이 뒤를 이었다.

이 방면에서 특기할만한 해군의 활동이라면 1944년 2월 2일에 와일더 베이커 소장이 지휘하는 경순양함 2척(리치먼드, 랠리)과 구축함 7척이 쿠릴 열도를 포격한 사건 정도였다.

 

이후 종전시까지 알류샨 열도에서는 전쟁사가의 관심을 끌만한 사건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이 지역에서의 군사적인 활동은 주로 미군의 간헐적인 쿠릴 열도 공습과 드물게 감행되는 일본군의 애투, 키스카 및 애닥 섬에 대한 소규모 보복공습 정도였다.

 

- 참고문헌

 

<History of U.S. Naval Operations in World War II, Vol. IV: Coral Sea, Midway and Submarine Actions, May--August, 1942 > Samuel Eliot Morison, 1949

 

<Guarding the United States and Its Outposts>, Stetson Conn, Rose C. Engeman & Byron Fairchild, 1964

 

<THE ARMY AIR FORCES IN WORLD WAR II,  Vol. 1 -- Plans and Early Operations, January 1939 to August 1942> W.F. raven & J. L. Cate, The University of Chicago, 1948

 

<The Corps of Engineers: The War Against Japan>, Karl C. Dod, Center of Military History United States Army, 1966 

 

 <Building the Navy's Bases in World War II, Volume 2>, Bureau of Yards and Docks, 1947

 

<Aleutian Islands: 3 June 1942--24 August 1943> 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92

 

<The Barrier and the Javelin> H. P. Wilmott, Naval Institute Press, 1983

 

<Shattered Sword> Jonathan Parshall, Anthony Tully, Potomac Books, 2007

 

<Silent Victiry> Clay Blair, Lippincott, 1975

 

<Sunk> Hashimoto Mochitsura, Henry Holt & Co., 1954 

 

<The Japanese Submarine Force and World war 2>, Carl Boyd & Yoshida Akihiko, Bluejacket Books, 1995

 

<Japanese Naval Air Force Fighter Units And Their Aces 1932-1945>, Hata Ikuhiko, Izawa Yasuo & Christopher Shores, 2011

 

<The Aleutians Campaign>, Naval Historical Center, 1943

 

<제2차세계대전해전사> 이정수. 남영문화사, 1981년
<타임라이프북스 - 회오리치는 일장기 편> 한국일보-타임라이프사, 1981년

<니미츠 전기> 김주식 역, 신서원, 1997년

<왜 일본제국은 실패하였는가?> 박철현 옮김, 주영사

<연합함대 그 출범에서 침몰까지> 박재석, 남창훈 지음, 가람기획, 2005년

<대동아전쟁비사-제1권 태평양편> 한국출판사, 1971년

<대동아전사-제6권 태평양전쟁> 오바다 아츠시로 지음, 유준수 옮김,  한양문화사, 1974년

<세계 최강의 미해병대> 우에다신 지음, 홍희범 번역, (주)호비스트, 1997년

<미드웨이 1942> 마크 힐리 지음, 김홍래 옮김, 플래닛미디어, 2008년

 

- 참고 웹사이트

 

http://www.google.co.kr

http://www.wikipedia.org/

http://blog.naver.com/mirejet (도위창 님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naljava69 (쿵디담 님의 블로그)

http://www.navsource.org/

Posted by 대사(PW)
,

24. 키스카 탈출(2) - 해상철수 

 

애투 섬이 함락되었을 때 키스카 수비대는 육군인 북해수비대와 해군인 제51근거지대를 주축으로 하여 약 6,000 명 규모였으며, 북해수비대 사령관 미네기 도이치로 소장이 지휘하고 있었다.

키스카 수비대는 잠수함을 사용하여 단계적으로 철수를 시작했으며 1943년 5월 26일부터 7월 21일까지 820명이 철수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3척의 잠수함을 상실하고 다른 3척이 풍랑이나 좌초 등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되자 잠수함을 사용한 철수는 중단되었다.

 

일본제5함대 사령관 가와세 시로 중장은 어차피 잠수함만으로 키스카 수비대를 모두 철수시킬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잠수함 철수가 진행되는 동안에 이미 과달카날처럼 경순양함과 구축함을 사용하여 단번에 키스카 수비대를 철수시키기로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이를 위하여 먼저 키스카 섬에 직접 돌입할 제1수뢰전대 사령관으로 기무라 마사토미 소장을 임명해 주도록 대본영에 요청했다.

그리하여 남태평양에서 근무하던 기무라 소장은 오모리 센타로 소장의 뒤를 이어 제1수뢰전대 사령관이 되었다.

 

(기무라 마사토미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가와세 중장은 이어서 구원함대를 호위할 구축함을 구하러 나섰다.

키스카 섬에 돌입할 함대는 모두 제5함대 소속인 경순양함 2척, 구축함 6척이었는데 여기에 약 5,200 명인 키스카 수비대를 모두 수용하려면 경순양함 1척당 약 1,200 명, 그리고 구축함 1척당 약 470명을 수용해야만 했다.

 

일반적으로 구축함의 경우 완전무장한 병력을 약 150 명까지 수송할 수 있었는데 이 경우 구축함은 예비어뢰를 포기해야만 했다.

따라서 몸만 빠져나온다고 해도 구축함에 470명을 실으려면 사실상 항해에 필수적인 인원과 장비 및 보급품들을 제외하고는 탄약을 포함하여 함내를 모두 비워야만 했다.

이럴 경우 무장 조작을 담당할 승무원도 승함할 필요가 없으므로 더 많은 병력을 태울 수 있었다.

대신 전투능력은 전무하여 사실상 비무장의 고속 수송함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호위할 구축함이 반드시 필요했다.

 

가와세 중장이 도쿄에 가서 키스카 철수에 투입할 구축함 6척을 빌려달라고 요청하자 대본영은 6척이 그들이 가진 구축함 예비의 전부라면서 난색을 표했다.

당시 일본의 구축함 보유 상황을 보면 결코 거짓말이 아니었다.

일본은 111척의 구축함을 가지고 태평양전쟁에 뛰어들어 1943년 6월 말까지 19개월 동안 34척을 잃고 15척을 새로 건조함으로써 6월 말 현재 92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구축함 92척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이 모두를 당장 작전에 투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건조를 마친 구축함은 취역한 다음 해상에 나가 최소한 1-2개월 이상 걸리는 시험항해를 마쳐야 비로소 작전에 투입할 수 있다.

그리고 작전 중에 적의 공격이나 기타 이유로 피해를 입으면 몇 달이고 건선거에 들어앉아 수리를 해야만 한다.

피해를 입지 않더라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건선거에 들어가 오버홀을 받아야 하며 아니면 새로운 무장이나 장비 등을 장착하거나 구형 무기 및 장비들과 교체하기 위하여 건선거에 들어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주로 피해를 입고 건선거에 들어간 김에 오버홀과 새로운 무기나 장비의 장착 및 교체를 한꺼번에 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럴 경우 건선거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진다.

 

이런 이유로 구축함같은 전투함은 물론 어느 정도 복잡성과 크기를 가진 거의 모든 무기체계가 보유량 전부를 즉시 작전에 투입할 수는 없다.

전체 보유량에서 이런 식으로 당장 사용할 수 없는 숫자를 빼고 즉시 작전에 투입할 수 있는 비율을 가동률이라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함정이나 항공기의 가동률은 보급 및 정비 체계가 제대로 작동해도 70% 를 넘기면 양호한 편이었고, 80% 가 넘으면 뛰어난 편이었으며, 90% 를 넘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반면 대규모 전투를 치러서 피해를 입은 함정이 늘어나거나 예비부품의 보급이나 수리 체계에 혼란이나 지연이 일어나면 가동률이 60% 이하, 심지어는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경우도 심심찮게 발생했다.

 

따라서 1943년 6월 말 현재 일본해군이 작전에 투입 중이거나 즉시 투입할 수 있는 구축함은 아마 70척을 넘지 못했을 것이며 따라서 대본영의 예비가 6척이라는 말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호위를 위한 구축함 6척이 꼭 필요했던 가와세 중장은 제5함대의 중순양함 2척(마야, 나치)을 남태평양으로 보낸다는 조건으로 6척의 구축함 모두를 빌려오는데 성공했다.

당시 중순양함 마야는 가와세 중장의 기함이었으므로 기함을 뺏긴 제5함대 사령부는 바라무시로 섬의 냉동창고에 딸린 사무실로 옮겨야만 했다.

이것은 당시 가와세 중장이 키스카 철수작전에 얼마만큼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키스카 섬의 해상철수는 안개를 활용하여 기습적으로 이루어져야 했으므로 구원함대와 키스카 수비대 사이의 긴밀한 협조가 필수적이었으나 감청의 위험 때문에 무선통신은 최대한 억제해야 했다.

그리하여 조율을 위하여 북해수비대의 후지 가츠미 참모와 제51근거지대의 야스나미 마사도시 참모가 잠수함으로 바라무시로에 도착했으며 제5함대에서는 I-7 호에 도노다 참모를 태워 키스카 섬으로 보냈다.

 

1943년 7월 7일 오전 7시 30분에 기무라 제독의 기함인 경순양함 아부쿠마를 선두로 경순양함 2척(아부쿠마,기소), 구축함 6척, 그리고 호위를 위한 구축함 6척, 급유함 니폰마루와 호위함 쿠나시리로 이루어진 구원함대가 바라무시로를 떠났다.

앞으로 1주일 간 안개가 끼겠다는 일기예보를 믿고 케호 작전으로 일컬어지는 키스카 섬 해상철수작전을 시작한 것이었다.

키스카 섬 돌입예정일은 7월 11일이었다.

 

그런데 7월 10일 오전에 마지막 해상급유를 마치고 나자 해상의 안개가 걷혔다.

구원함대는 돌입날짜를 13일로 연기하고 기다렸으나 안개는 다시 낄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하루를 더 기다린  제1수뢰전대 사령관 기무라 소장은 7월 15일 아침에 기함 아부쿠마 함상에서 회의를 열었다.

참모들 대부분이 돌입하자고 주장했으나 기무라 소장은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15일 오전 8시 20분에 구원함대는 키스카 섬에 구원작전을 중단한다는 암호 전문을 보내고 바라무시로로 돌아갔다.

 

키스카 섬에서는 미리 정해진대로 구원함대가 바라무시로를 출항한 지 5일째 되는 7월 11일부터 매일 오후 4시에서 6시까지 2시간 동안 모든 병사가 키스카 항에 집결하여 2시간 동안 기다리다가 다시 돌아가는 일을 14일까지 반복했다.

15일 아침에 구원작전이 중단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병사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제1차 철수작전이 실패로 끝나자 이제 케호 작전의 기회는 딱 1번 남았다.

더 이상 철수작전을 실시하기에는 일본해군의 연료 사정이 허락하지 않았으며 8월이 되면 안개가 끼는 날이 현저히 줄어들기 때문에 어떻게든 7월 내로 철수작전을 성공시켜야만 했다.

다시 짙은 안개가 낄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있자 구원함대는 1943년 7월 22일에 바라무시로를 출항했다.

두번째이자 마지막 시도였다.

키스카 섬에 돌입할 함정은 지난번과 같았으며 이번에는 제5함대 사령관 가와세 중장이 직접 경순양함 다마를 타고 제1수뢰전대와 동행했다.

키스카 돌입예정일은 26일이었다.

 

25일에 안개 속에서 호위를 담당하던 구축함 와카바와 하츠시모가 충돌했다.

와카바는 바라무시로로 돌아가야 했으며, 속력이 떨어진 하츠시모는 급유함 니폰마루를 호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7월 25일 오후부터 안개가 옅어지기 시작하더니 26일 새벽이 되자 완전히 걷혔다.

돌입예정일인 26일은 물론 27일과 28일까지 계속 맑은 날이 지속되자 28일 오후에 가와세 중장은 기함 다마 함상에서 참모들과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가와세 중장은 다마 함장 진 시게노리 대좌, 그리고 하시모토 시게후사 통신참모의 의견을 받아들여 작전 속행을 결의했다.

일본군의 염원을 알아들었는지 그날 저녁부터 다시 짙은 안개가 해상을 감싸기 시작했다.

기무라 소장의 제1수뢰전대는 호위하는 구축함들과 함께 키스카로 직행했고 다마는 키스카 남쪽 130km 지점에서 제1수뢰전대와 헤어져 대기했다.

 

제1수뢰전대 사령관 기무라 소장은 최종 돌입 단계에서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

미함대의 초계선을 피하기 위하여 기무라 제독은 안전한 동쪽 항로 대신 수로 연구가 거의 되어 있지 않은 키스카 섬의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북쪽으로부터 키스카 항에 돌입하기로 결심했다. 

제1수뢰전대는 이전에 서쪽 항로를 이용한 적이 있는 짐수함 I-7 호가 남긴 단편적인 수로 정보에 의지하여 해도에 기입되지도 않은 수많은 암초가 도사리고 있는 위험한 수로를 안개 속에서 20노트라는 무모할만큼 고속으로 항진했다.

기무라 제독의 도박은 성공하여 29일 정오 경에 제1수뢰전대는 무사히 키스카 항으로 들어섰다.

 

(키스카 섬. 원본은 여기로)

 
그동안 키스카 섬의 병사들은 26일부터 다시 오후 4시에서 6시까지 키스카 항에 나와서 구원함대를 기다리는 일과를 시작했다.

 

 

 

 

 

 

이미 한번 실망을 맛본 병사들은 다시 실망을 맛보지 않기 위하여 가급적 기대하지 않으려는 심리와 혹시나 하는 심리 사이에서 괴로워하며 하루하루 간절한 심정으로 기다렸다.

 

29일 오전 9시, 키스카 섬의 통신소에 놀라운 무전이 들어왔다.

예정보다 4시간 빠른 정오에 구원함대가 도착한다는 암호통신이 들어왔던 것이다.

식사 중이던 일본군들은 즉시 식사를 마친 후 중요서류를 소각하고 서둘러 키스카 항으로 집결했다.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병력들은 키스카 항에서 10km 이상 떨어져 있었으나 모두들 서둘러서 1명도 빠지지 않고 정오까지 키스카 항에 집결하는데 성공했다.

과연 예고한대로 정오가 되자 제1수뢰전대의 기함 아부쿠마를 선두로 경순양함 2척과 구축함 6척으로 이루어진 구원함대가 키스카 항으로 들어왔고 호위를 맡은 구축함 4척은 키스카 항 바깥에서 미해군의 접근을 감시했다.

설마했던 구원함대가 실제로 나타나자 많은 병사들이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렸고 아예 주저앉아서 펑펑 우는 병사들도 있었다. 

북해수비대 사령관 미네기 소장도 경순양함 아부쿠마에 승함한 직후 기무라 제독에게 뭔가 감사의 말을  건네려 했으나 감정이 북받쳐서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구원함대가 해안 가까이 닻을 내리자 곧이어 주정들이 병사들을 실어나르기 시작했다.

좁은 함내에 최대한 많은 병사들을 실어야 했으므로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소지품 이외에는 일체 허용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소총마저 전부 버리고 승함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시간이 관건이었으므로 함정들의 뱃전에는 빨리 기어오를 수 있도록 수많은 줄사다리가 드리워져 있었고,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승함했다.

병사들이 모두 승함하면 주정은 다시 해안으로 돌아가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을 실어왔으며, 마지막으로 주정 승무원들이 승함했다.

그리하여 구원함대가 닻을 내린 지 불과 55분 만에 키스카 섬 수비대 5,183 명 전원이 승함을 완료했다.

제1수뢰전대는 재빨리 닻을 올리고 키스카 항을 빠져나가 호위하던 구축함들과 만난 다음 키스카 섬 남쪽으로 내려가 가와세 중장의 기함 다마와 만났다.

1943년 7월 31일, 구원함대는 단 1명의 희생자도 내지 않고 키스카 섬 수비대 전원을 구출하여 바라무시로에 도착했다. 

 

일본군의 케호 작전이 성공하는 데에는 큰 행운이 따랐다.

사실 미해군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이 23일에 애투 섬 남방 320km 해상을 항진 중이던 구원함대를 레이더로 포착했다.

킨케이드 제독은 보고를 받자 즉시 기펜 제독의 지휘 하에 구형전함 아이다호와 미시시피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함대를 파견하고 키스카 섬을 봉쇄하고 있던 구축함 애일윈과 모내헌도 담당 위치를 떠나 기펜 함대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대신 구축함 패러것과 헐이 키스카 섬 봉쇄임무에 투입되었다.

 

1943년 7월 25일 저녁에 기펜 함대는 키스카 섬에서 남서쪽으로 130km 떨어진 해역을 항진 중이었다.

알류샨 열도에서는 드물게 맑은 날씨였다. 

자정이 막 지난 1943년 7월 26일 오전 0시 7분, 구형전함 미시시피의 레이더가 북쪽으로 24km 떨어진 해역에서 함영을 발견했고 이어서 구형전함 아이다호와 중순양함 위치타 및 포틀랜드도 잇달아 같은 함영을 발견했다.

기펜 제독은 즉시 북쪽으로 변침한 다음 거리가 13km 까지 줄어들자 포격 명령을 내렸다.

26일 새벽 0시 13분부터 구형전함과 중순양함들의 주포가 레이더에 의존하여 불을 뿜기 시작했고 구축함들은 전방으로 나아가서 어뢰를 발사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적에게서는 전혀 반격이 없었다.

0시 44분에 적의 함영이 홀연히 레이더에서 사라질 때까지 31분 동안 기펜 함대는 14인치 포탄 518발과 8인치 포탄 487발을 포함하여 수많은 포탄과 어뢰를 발사했다.

기펜 제독은 레이더에서 적의 함영이 사라지자 포격 중지 명령을 내리고 수상정찰기를 사출했다.

정찰기의 조종사는 놀랍게도 해면에 아무 것도 없다고 보고해왔다.

적함은 물론 적함의 잔해나 부유물 심지어는 죽은 고래도 없었으며 오로지 차갑게 넘실거리는 끝없는 북태평양의 바다 뿐이었다.

 

사실 포격전 당시부터 적의 함대가 레이더 허상일 것이라는 의심이 있었다.

그렇게 치열한 포격을 퍼붓는데도 적의 함대에서는 어떠한 반격도 없었고 무엇보다 중순양함 샌프란시스코와 구축함들의 레이더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체가 무엇이든 기펜 함대가 교전한 상대는 일본함대는 아니었다.

당시 일본함대는 키스카 섬에서 800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미해군은 당시 구형전함과 중순양함들이 포착한 함영의 정체를 멀리 떨어진 앰치트카나 다른 섬의 모습이 밀도가 다른 공기의 경계층이나 해면에 반사되어 비친 일종의 신기루 현상이라고 추측했다.

이 정체불명의 함영이 대형함으로서 레이더 안테나의 위치가 높은 구형전함과 중순양함들의 레이더에만 나타나고, 상대적으로 안테나의 위치가 낮은 구축함들의 레이더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한다.

 

킨케이드 제독은 다음날인 27일에 기펜 함대에게 해상급유를 받으라고 명령했다.

기펜함대는 28일 오전 9시부터 키스카 섬에서 남동쪽으로 170km 떨어진 해상에서 급유함 페코스로부터 해상급유를 받았는데 기무라 제독의 구원함대는 미함대가 해상 급유를 받고 봉쇄 위치에 다시 전개하기 이전에 키스카 섬으로 들어가 병사들을 싣고 빠져나갔다.

구축함 에일윈과 모내헌을 대신하여 키스카 섬을 봉쇄하던 구축함 2척 중 기무라 함대의 접근 코스인 키스카 섬 남쪽을 담당하던 구축함 패러것도 그때 마침 연료가 떨어져서 기펜 함대와 함께 해상급유를 받고 있었다.

키스카 섬 북쪽을 담당했던 구축함 헐은 담당 해역을 초계 중이었으나 짙은 안개 속에서 키스카 섬 해안에 바짝 붙어서 항진하던 기무라 함대를 레이더로 포착하는데 실패했다.

Posted by 대사(PW)
,

23. 키스카 탈출(1) - 일본잠수함들의 수난

 

미군이 애투 섬에 상륙하자 갈팡질팡하던 일본해군은 1943년 5월 19일에 애투 섬과 키스카 섬 수비대의 철수를 결정했다.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애투 섬 수비대는 일본제5함대의 경순양함들과 구축함들을 이용하여 해상철수를 하기로 하고 키스카 섬은 잠수함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그런데 애투 섬 수비대는 구원함대가 출항하기도 전에 전멸해 버렸으므로 이제 일본제5함대 사령관 가와세 시로 중장의 관심은 키스카 철수에 집중되었다.   

 

제5함대 휘하의 제1잠수전대에는 총 17척의 잠수함이 있었는데 이들 중 키스카 철수에 동원된 잠수함은 I-2, I-7, I-9, I-21, I-24, I-34, I-36, I-155, I-156, I-157, I-169, I-171, 그리고 I-175 의 13척이었다.

제1잠수전대 사령관 고타 다케로 소장이 지휘한 이 잠수함들은 보급품을 싣고 키스카 섬에 도착하여 병력들을 싣고 철수했다.

1943년 5월 26일에 최초로 병력 철수에 성공한 이래 6월 21일에 잠수함에 의한 철수작전을 중단할 때까지 제1잠수전대의 잠수함들은 20회 이상의 철수항해를 시도하여 13번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잠수함들은 키스카 섬에 125톤의 장비 및 탄약과 수백톤의 식량을 비롯한 보급품을 전달하고, 6,000 여명의 수비대 중 약 13%에 해당하는 820 여명을 철수시켰다.

 

키스카 철수를 처음으로 성공시킨 것은 I-7 호였다.

I-7 호는 애투섬 전투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1943년 5월 26일 밤에 키스카 섬에 도착하여 무기와 탄약 및 식량을 내려놓고 60명을 싣고 빠져나와 바라무시로에 무사히 돌아왔다.

이후 몇 번의 성공적인 철수가 이루어졌으며 그 와중에 심각한 피해라고는 6월 4일에 바라무시로를 출항했던 I-155 호가 다음날 심한 폭풍우 속에서 크게 망가져서 돌아온 것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의 의도를 눈치챈 미군이 키스카 섬 주변의 대잠경계를 강화하면서 철수에 동원된 일본잠수함들 사이에서 희생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1943년 6월 10일 아침에 월리스 코넬 대위가 지휘하는 구잠정 PC-487 호가 키스카 섬에서 북쪽으로 60km 떨어진 셰미야 섬 부근 해상에서 소나로 I-24 호를 탐지했다.

이어서 레이더가 700m 거리에서 잠망경을 발견했고, 최종적으로 PC-487 호의 승무원이 자욱한 안개 속에서 육안으로 I-24 호의 잠망경을 확인했다.

PC-487 호는 전속력으로 달려들었고, I-24 호가 황급히 잠항하자 5발의 폭뢰를 투하했다.

정확한 폭뢰 투하로 큰 피해를 입은 I-24 호가 부상하자 정장 코넬 대위는 충각공격을 명했다.

 

(PC-487. 배수량 : 280톤, 길이 : 52m, 폭 : 7m, 최고속력 : 20노트, 승무원 : 65명, 무장 : 3인치 양용포 1문, 40mm 대공포 1문, 20mm 기관포 3문, 로켓발사기 2문, 폭뢰투하기 4문, 폭뢰투하레일 2조, 출력 : 2,880 마력)

 

배수량 280톤짜리 구잠정 PC-487 호는 배수량이 2,554톤으로 자신의 9배가 넘는 I-24 호에게 19노트의 속력으로 달려들어 세차게 들이받았다.

고속으로 달려오던 탄력으로 뱃머리가 I-24 호의 갑판 위로 튀어 오르면서 PC-487 호는 I-24 호의 뱃전에 걸터 앉았다.

후진하여 빠져나온 PC-487 호는 I-24 호의 주위를 돌면서 3인치 양용포와 40mm 대공포 및  20mm 기관포로 포탄을 쏟아붓다가 다시 전속력으로 달려들었다.

이때 정장 코넬 대위는 잘못하면 자신의 배가 충각공격의 충격 때문에 두동강날 수도 있다고 각오했다고 한다.

두번째 공격에서 PC-487 호의 뱃머리는 다시 I-24 호의 갑판을 튀어올라 이번에는 I-24 호의 함교를 정통으로 들이받았다.

그러자 PC-487 호보다 9배 이상 더 큰 일본잠수함이 뒤로 넘어지면서 전복, 침몰했다.

I-24호의 승무원 104명은 전원 사망했다.

PC-487 호는 충각공격의 후유증으로 몇 군데서 물이 새기 시작하여 속력을 늦추고 해상에서 수리를 마친 다음 자랑스럽게 애투 섬으로 개선했다.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굴뚝에 일본잠수함을 격침했다는 표시를 그리고 있는 PC-487 호의 승무원들)

 

I-24 호가 격침된 지 불과 3일 후인 6월 13일에는 I-9 호가 미국 구축함 프레지어에게 격침되었다.

I-9 호는 6월 2일에 키스카 섬에 도착하여 17톤의 탄약과 2톤의 식량을 하역하고 79명을 싣고 6월 8일에 무사히 바라무시로에 도착했다.

6월 10일에 I-9 호는 두번째 철수임무를 위하여 바라무시로를 출항했다.

6월 13일 오후 5시 58분에 키스카 동쪽 25km 해상에서 엘리엇 브라운 소령이 지휘하는 미국 구축함 프레지어가 6,300m 거리에서 레이더로 부상한 상태의 I-9 호를 탐지하고 접근하기 시작했다.

프레지어가 접근하는 동안 I-9 호는 잠항했다.

 

서서히 접근하던 프레지어는 소나로 I-9 호를 탐지했고 저녁 8시 9분에 프레지어의 승무원이 불과 90m 거리에서 I-9 호의 잠망경을 발견했다.

프레지어는 일제사격을 퍼부으면서 고속으로 달려들었는데 최초의 일제사격 중 1발이 잠망경에 명중했다.

이어서 프레지어는 황급히 잠항하여 도망치려는 I-9 호의 머리 위에 3번에 걸쳐 폭뢰공격을 퍼부어서 격침했다.

I-9 호의 함장 후지이 대좌를 비롯한 승무원 101명 전원이 사망했다.

 

불과 사흘 사이에 2척의 잠수함을 상실한 잠수전단 사령관 코타 소장은 일단 구출작전을 중단했으나 상부의 압력으로 재개할 수 밖에 없었다.

 

6월 16일에는 I-157 호가 키스카 섬으로 향하던 도중 앰치트카 섬 부근에서 좌초하여 승무원들이 어뢰, 연료 및 윤활유는 물론 축전지 일부까지 버려서 함체를 가볍게 만든 다음에야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I-157 호는 잠항도 못하고 수상항주로 바라무시로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6월 22일에는 I-7 호가 최후를 맞았다.

I-7 호는 최초로 키스카 섬에서 병력을 철수시키는데 성공했었다.

1943년 5월 26일에 키스카 섬에 도착하여 식량과 13mm 및 7.7mm 총탄을 포함한 보급품 6톤을 하역하고, 대부분 환자나 부상자들인 60명의 병력과 전사한 병사의 유골 28점, 그리고 탄피 4톤을 싣고 무사히 바라무시로로 귀한했었다.

6월 8일에는 두번째로 키스카 섬에 도착하여 19톤의 탄약과 15톤의 식량을 하역한 후 101명을 싣고 6월 13일에 무사히 바라무시로로 귀환했다.

 

I-7 호는 1943년 6월 15일 오후 4시에 3번째 철수임무를 위하여 바라무시로를 출발했는데 함내에는 키스카에 양륙할 보급품과 함께 해상철수를 위하여 제5함대와 키스카 수비대 사이의 조율을 담당할 제5함대의 도노다 참모가 탑승하고 있었다.

이것이 I-7 호의 마지막 항해가 되었다.

6월 20일 오후 7시에 I-7 은 키스카 섬의 베가 만에서 남쪽으로 1.6km 떨어진 해상에 부상했다.

주변은 안개가 자욱했으므로 함장 다마키 대좌는 안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I-7 호로부터 약 13,000m 떨어진 해상에서는 피터 혼 소령이 지휘하는 구축함 모내헌이 초계중이었다.

모내헌이 SG 레이더로 I-7 호를 포착하자 함장 혼 소령은 즉시 전속력으로 접근하라고 명령했고 거리가 1,800m 까지 줄어들자 레이더 사격을 명령했다.

 

오후 7시 30분경에 갑자기 주변 해면에 포탄이 낙하하자 I-7 호의 함장 다마키 대좌는 즉시 잠항을 명했다.

그 순간 모내헌의 5인치 포탄 1발이 함교에 명중하면서 함장 다마키 대좌, 부장 나가이 소좌, 항해장 하나부사 대위를 포함한 6명이 사망하고 통신장교가 부상을 입었다.

지휘권을 인수한 어뢰장교 세키구치 로쿠로 대위는 반격을 명령했다.

I-7 은 140mm 갑판포 약 10발과 13mm 기관총 약 250발을 발사하며 반격을 가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개방되어 있던 후방 밸러스트 탱크를 잠그는 것을 난리통에 잊어먹은 탓으로 오후 7시 45분에 I-7호가 옆으로 심하게 기울어지면서 해안에 좌초하자 세키구치 대위는 퇴함명령을 내렸는데 이때 도노다 참모도 무사히 퇴함했다.

 

21일 새벽 2시에 세키구치 대위는 키스카 섬 수비대와 접촉하여 도노다 참모를 넘겨주었다.

키스카 섬 수비대가 I-7 호의 보급품을 회수하기 위하여 바지선 2척을 보낼 예정이라는 걸 알게 된 세키구치 대위는 자신들을 바지선에 실어 I-7 호에 실어달라고 부탁했다.

I-7 호로 돌아온 승무원들은 21일 하루종일 모내헌의 포탄에 의하여 구멍이 난 함교를 용접으로 떼우는 등 I-7 호의 수리에 매달렸다.

 

그 결과 저녁 6시 45분에 밀물이 들어오자 다시 잠수함을 띄울 수 있었으나 잠항은 불가능했다. 

I-7 호는 거트루더 협만으로 들어가 바지선들이 미처 다 옮기지 못한 보급품들과 전사자들의 시체를 내려놓았다.

이때 키스카 섬에 주둔 중이던 제51해군통신대의 파견대는 바라무시로와 통신할 수 있도록 I-7 호에 일본해군의 암호인 JN-25b 암호책을 두 권 주었다.

I-7 은 22일 0시에 키스카를 떠났다.

 

22일 오전 0시 35분, 키스카 섬 주변을 떠나지 않고 있던 미국 구축함 모내헌은 13,000m 거리에서 레이더로 다시 I-7 호를 발견하고 접근하여 오전 1시 30분부터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당시 해상에는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으나 모내헌은 레이더 조준으로 정확한 사격을 가하여 I-7 의 함교와 후방 밸러스트 탱크에 명중탄을 기록했다.

이때 세키구치 대위가 부상을 입고 기관장 한다 마사오 대위가 사망했으므로 포술장 신도 유시오 중위가 지휘권을 이어받았다.

모내헌은 10분 만에 포격을 중단했다.

 

오전 2시 10분에 모내헌은 조명탄을 발사하여 I-7 의 위치를 확인하더니 다시 포격을 시작했다.

2시 18분에 모내헌의 포탄 1발이 I-7 호의 조타 엔진 중 하나를 파괴하자 I-7 호는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키스카 섬으로 되돌아섰다.

I-7 호는 140mm 갑판포 70발과 기관총탄 2,000 발을 발사하며 저항했으나 모내헌의 함수에 약간의 생채기를 내는데 그쳤다.

 

(I-7 호와의 교전에서 가벼운 상처를 입은 모내헌의 함수)

 

잠시 후 모내헌의 포탄 1발이 I-7 호의 갑판에 쌓아두었던 140mm 포탄에 명중하여 화재를 일으켰고, 다른 1발은 좌현 후방 밸러스트 탱크에 명중하여 I-7 호는 왼쪽으로 30도 정도 기울어졌다.

오전 2시 30분, 신도 중위는 전속력으로 키스카 섬으로 도망치라고 명령했다.

모내헌은 좌초를 염려하여 추적하지 않았다.

 

오전 3시 15분, 침몰 직전의 I-7호는 베가만에 겨우 좌초했는데, 함미 쪽이 순식간에 물에 잠기면서 함수 약 15m 만이 물 밖으로 나왔다.

승무원들 중 약 2/3 가 함수 쪽으로 탈출하는데 실패하여 사망했고 귀중한 암호책이 들어있던 가방도 함미 구역에 남겨졌다.

오전 6시 30분에 일본군 주정이 다가와 생존자 43명을 구조했는데 10명은 부상을 입은 상태였으며, 부상자 중 1명은 끝내 사망했다.

I-7 에서는 통틀어 87명이 사망했다.

일본군은 폭약으로 물 밖에 나와 있던 I-7 호의 함수 부분을 폭파시켰다.

 

다음날인 6월 23일에 일본잠수부들이 해중에 잠긴 I-7 호의 함체에 접근하여 귀중한 암호책을 찾으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미군이 키스카 섬을 탈환한 후 1943년 9월 7일에 구조함 플로리칸이 미드웨이로부터 키스카 섬에 도착하여 I-7 호를 철저히 조사했다.

미해군 잠수부들은 1달 간의 노력 끝에 I-7 호의 내부로 들어가 귀중한 암호책을 비롯한 기밀 서류들을 입수하는데 성공했다.

 

I-7 호의 상실을 마지막으로 일본해군은 잠수함을 사용한 키스카 철수를 포기했다.

이제 제5함대사령관 가와세 시로 중장은 과달카날에서처럼 수상함대를 투입한 해상철수에 모든 희망을 걸 수 밖에 없었다.

Posted by 대사(PW)
,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21. 히요 뇌격

 

일본군이 애투 섬 전투를 계기로 미군함대와 결전을 벌이기 위하여 도쿄 만에 일본연합함대의 주력을 모으자 암호해독을 통하여 이 사실을 알아낸 미군 잠수함들이 몰려 들었다.

 

1943년 5월 20일에 유진 샌즈 소령이 지휘하는 미국잠수함 소피쉬가 최초로 연합함대의 주력을 포착했다.

도쿄 남쪽 해상에서 초계중이던 소피시는 11,000m 거리에서 18노트로 항진하는 적 함대의 함영을 레이더로 확인했다.

적 함대의 구성을 정규항모 1척, 전함 3척, 구축함 2척 및 기타 함정 2척으로 판단한 샌즈 소령은 공격 위치로 이동하려 하였으나 해상이 거칠어서 기동이 힘들었다.

그동안 일본함대는 사라지고 말았다.

 

이틀 후인 5월 22일 아침에 로이 벤슨 소령의 트리거가 도쿄 만에서 레이더로 접근 중이던 일본함대를 접촉했다.

레이더에 나타난 적의 세력을 정규항모 1척, 전함 3척, 다수의 순양함과 구축함으로 판단한 벤슨 소령은 즉시 잠항하고 잠망경을 올렸다.

잠시 후 잠망경에 일본 순양함이 나타났고 벤슨 소령은 전함이나 정규 항모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그때 갑자기 일본함대가 지그재그항해를 하면서 사정거리에서 벗어나 버렸다.

아쉽기 그지 없는 일이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SS-237 트리거. 수상 배수량 : 1,549톤, 수중 배수량 : 2,463톤, 길이 : 95m, 폭 : 8.3m 속력 : 수상 21노트, 수중 9노트, 항속거리 : 수상항해시 10노트로 20,000km, 수중항해시 2노트로 180km, 초계 기간 : 75일, 잠항심도 : 90m, 승무원 : 60명, 무장 : 21인치 어뢰발사관 함수 6문, 함미 4문, 어뢰 24발, 76mm 갑판포 1문, 40mm 보포스 대공포 1문, 20mm 오리콘 대공기관포 1문)

 

5월 말에 애투 섬이 함락되고 1주일이 지나자 일본 항공모함들이 도쿄 만을 떠나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태평양함대의 암호해독반에서 이 사실을 알아내고 통보했는데 당시 일본항모들의 침로 전방에는 트리거, 새먼, 그리고 스컬핀, 이 3척의 잠수함이 있었다.

 

1943년 6월 8일 밤에 트리거가 19,000m 거리에서 레이더로 일본항모들을 포착했다.

트리거는 부상하여 전속력으로 추격했으나 도중에 엔진 하나가 말썽을 일으켜서 최고 속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이때 트리거는 일본항모들의 10,000m 후방까지 따라잡은 상태였으며 함장 벤슨 소령은 함교에서 어두운 수평선을 배경으로 일본 항모의 실루엣을 뚜렷이 볼 수 있었으나 더 이상 접근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트리거는 2번째의 기회를 놓쳤다.

 

트리거의 남쪽에 있던 새먼은 일본항모의 침로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때 바로 부근에 구축함 1척이 호위하는 수송선 3척이 지나가자 함장 존 니콜라스 소령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따라가서 공격했다.

새먼은 수송함 2척에 어뢰를 1발씩 명중시켰으나 2척 다 살아 돌아갔다.

이 때문에 막상 일본항공모함들이 나타났을 때 새먼은 공격할 수 있는 위치를 벗어나 있었다.

태평양함대의 잠수함 사령관 찰스 록우드 제독은 새먼의 전투보고서에 배서하면서 니콜라스 함장이 절호의 매복 지점에서 일본항모들을 기다리지 않고 수송선을 공격하기 위하여 매복위치를 벗어난 것을 두고

 

"불행한"

("unfortunate")

 

판단이었다고 적었다.

 

가장 남쪽에는 루시우스 채플 소령의 스컬핀이 매복하고 있었다.

스컬핀은 6월 9일 자정 무렵에 레이더로 10,000m 거리에서 접근 중이던 함영을 발견했다.

레이더에 나타난 함영을 정규항모 2척과 호위함정들로 판단한 채플 소령은 잠항하여 기다렸다.

그러나 접근하던 일본함대는 갑자기 지그재그로 방향을 바꾸면서 멀어져 갔다.

채플 소령은 절망적인 심정으로 6,400m 거리에서 어뢰 4발을 발사했으나 1발은 조기 폭발해 버렸고, 나머지 3발은 빗나갔다.

 

태평양 함대의 암호해독반은 아직도 도쿄만에 1척 또는 그 이상의 일본항모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이미 2번의 기회를 놓친 트리거의 함장 벤슨 소령은 심기 일전하여 도쿄만으로 돌아갔다.

 

전투초계의 마지막 날인 1943년 6월 10일 오후에 트리거는 세번째이자 마지막 기회를 잡았다.

트리거는 잠망경으로 고가 미네이치 일본연합함대 사령관의 기함인 개장항공모함 히요를 발견했는데 히요는 2척의 구축함을 앞세우고 21노트의 속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트리거는 잠항 상태로 일본구축함에게 들키지 않고 히요에게서 1,100m 거리까지 접근한 다음 함수에서 6발의 어뢰를 발사했다.

 

(일본의 개장항공모함 히요.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발사된 6발의 어뢰 중 2발은 함수 쪽으로 빗나갔다.

3번째 어뢰는 히요에서 300m  떨어진 곳에서 조기 폭발해버렸다.

4번째 어뢰는 함수의 닻줄 보관고에 명중하여 거의 피해를 주지 못했다.

5번째 어뢰는 함수와 함교 사이에 명중했으나 불발탄이었다.

 

유일하게 실질적인 피해를 입힌 것은 마지막 6번째 어뢰로서 함교 바로 아래의 1번 보일러실에 명중했다.

탄두가 폭발하면서 1번 보일러실이 분쇄되었고 격벽이 무너지면서 2번 보일러실도 순식간에 물에 잠겼으며 3번 보일러실도 침수가 시작되었다.

히요는 동력을 잃고 해상에 멈추었으나 침몰은 면했고 경순양함 이스즈에게 이끌려 요코스카항으로 향했다.

 

트리거의 함장 로이 벤슨 소령은 6월 22일에 진주만으로 돌아와 의기양양하게 일본항공모함에 어뢰 4발을 명중시켜 격침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태평양함대의 잠수함 사령관 록우드 제독은 암호해독반의 보고를 통하여 히요가 격침되지 않았으며 실제로 피해를 준 어뢰는 단 1발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벤슨 소령의 보고를 듣고 트리거의 전투일지를 주의깊게 검토한 록우드 제독은 히요가 살아남은 원인이 신뢰성이 떨어지는 Mk6 자기감응신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Mk6 자기감응신관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해 있던 록우드 소장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틀 후인 6월 24일에 니미츠 제독을 찾아갔다.

 

록우드 제독은 니미츠 제독에게 만일 그 빌어먹을 Mk6 자기감응신관만 아니었다면 히요는 지금쯤 요코스카의 건선거가 아니라 도쿄만 바닥에 있을 것이라면서 지금 당장 Mk6 자기감응신관의 사용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록우드 제독은 니미츠 제독에게 벤슨 함장이 명중시켰다고 주장한 4발의 어뢰 중 3발이 제 역할을 못한 이유가 모두 Mk6 자기감응신관 때문이라는 확증을 제시하지는 못헸지만 록우드 제독의 능력과 통찰력을 신뢰하고 있던 니미츠 제독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날 오후에 태평양함대 사령관 명의로 태평양함대의 모든 잠수함에서 Mk6 자기감응신관의 사용을 금지하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미해군 병기국과 맥아더 장군 휘하의 제7함대 잠수함 사령관 랄프 크리스티 소장은 발끈했다.

Mk6 자기감응신관의 개발 책임자였던 크리스티 소장은 즉시 미해군 병기국과 함께 니미츠 제독에게 Mk6 자기감응신관의 사용을 금지한 이유를 따져 묻는 편지를 발송했다.

니미츠 제독은 답장에서 Mk6 자기감응신관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이유를

 

"어쩌면 적의 대응책 때문이거나 어떤 조건 하에서 신관이 효과적이지 못하고 요구되는 적절한 발사 조건이라는 것이 비현실적이기 때문"

("because of probable enemy counter-measures, because of the ineffectiveness of exploder under certain conditions, and because of the impracticability of selecting the proper conditions under which to fire.")

 

일 것이라고 밝혔다.

직접적인 표현을 삼가하고 있지만 Mk6 자기감응신관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과 불신을 보여주는 동시에 Mk6 자기감응신관 사용금지 명령을 철회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답장이었다.

 

크리스티 소장은 포기하지 않고 미해군 병기국과 함께 호주의 프레멘틀에서 Mk6 자기감응신관에 대한 토론회를 연 다음 록우드 제독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 결과를 알렸다.

이 편지에서 크리스티 소장은

 

1. Mk6 자기감응신관이 최소한 가끔씩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2. 자기감응신관은 흘수가 얕은 대잠함정에 대한 사실상 유일한 해결책이며

3. 만일 이대로 자기감응신관의 사용을 중지해 버리면 앞으로 자기감응신관의 문제를 확인하고 해결할 기회를 영원히 없애버리게 된다

 

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만일 Mk6 자기감응신관에 실제로 문제가 있다면 태평양함대와 제7함대, 그리고 해군 병기국이 공동으로 연구를 진행하여 사실을 밝히자면서 그렇게하여 결론이 날 때까지만이라도 자기감응신관 사용금지 명령을 철회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편지의 내용은 불과 1년 전에 록우드 제독이 제7함대 잠수함 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어뢰 문제를 제기했을 때 병기국이 보였던 고압적이고 무성의한 태도와는 완전히 딴판으로 Mk6 자기감응신관이 최대 수요처인 태평양함대에서 전면적으로 거부당한데 대한 크리스티 소장과 병기국의 당혹감과 절박함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미 1년 이상 어뢰 문제로 크리스티 소장 및 병기국과 충돌하면서 불신이 극에 달해 있던 록우드 제독은 1년 전과 비교하면 상상할 수조차 없이 너그럽고 진전된 내용을 담고 있는 이러한 제안에 콧방귀도 끼지 않았다.

 

록우드 제독에게 완전히 무시당한 크리스티 제독은 분해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는 일기장에 록우드 제독을 가리켜 Mk6 자기감응신관을 반대하는 자로서 곧 어뢰에 반대하는 자인데 그래놓고는 격침 톤수는 열심히 자랑하고 다니는 걸 보면 그 격침 톤수를 바로 어뢰가 만들었다는 사실도 모르는 얼간이라고 악담을 퍼부었다.

그러나 Mk6 자기감응신관의 문제는 미해군 병기국과 크리스티 소장을 제외한 미해군 모두가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오히려 크리스티 소장이 병기국과 작당하여 감히 니미츠 제독에게 그런 건방진 편지를 보내고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 이례적인 일이었다.

 

여기에는 당시 크리스티 소장의 직속상관인 제7함대 사령관 카펜더 중장이 남서태평양지역군 총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의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있었던 탓이 컸다.

맥아더 장군의 신임을 얻지 못하면 실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던 남서태평양지역군에서 총사령관의 신임을 얻지 못한 카펜더 제독은 비록 직속 부하라고는 하나 병기국이라는 해군본부의 막강한 부서와 한몸이나 다름없는 크리스티 소장의 전횡을 제지하지 못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미해군의 방침에 따라 태평양함대와 제7함대 사이에서 정기적으로 순환배치되고 있던 잠수함의 함장들은 고래 싸움에 등터지는 새우 꼴이 되지 않기 위하여 눈치껏 처신하는 수 밖에 없었다.

잠수함장들은 모두 태평양함대 잠수함 사령관  록우드 제독의 방침에 찬성이었으므로 제7함대로 배치되는 잠수함들은 진주만을 떠나 호주 프레멘틀 앞바다에 이르기까지는 어뢰의 Mk6 자기감응신관을 모두 죽여놓고 있다가 입항 직전에 마지못해 활성화시켰다.

반면 제7함대에서 태평양함대로 배속되는 잠수함들은 프레멘틀의 부두를 떠나자마자 즉시 어뢰의 Mk6 자기감응신관을 죽여 버렸다.

 

물론 미국 어뢰의 문제점이 단지 Mk6 자기감응신관만은 아니었으며 따라서 자기감응신관의 사용을 금지한 이후에도 어뢰의 신뢰성이 극적으로 높아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병기국과 크리스티 소장의 결사적인 반대를 물리치고 가장 큰 문제인 Mk6 자기감응신관 문제를 일단 해결하자 문제 해결에 가속도가 붙었다.

결국 록우드 제독은 1발에 10,000 달러나 하는 어뢰 3발을 실험용으로 소모한 끝에 불발탄 문제까지 해결함으로써 1943년 9월부터 태평양함대의 잠수함들은 제대로 작동하는 어뢰를 가지고 전투초계를 실시할 수 있었다.

 

크리스티 소장이 지휘하던 제7함대 잠수함 부대의 잠수함장들은 여전히 Mk6 자기감응신관의 사용을 강요당했으나 이들의 고생도 11월에 끝났다.

북태평양군 사령관이었던 유능하고 야심만만한 토머스 킨케이드 중장이 1943년 11월에 카펜더 중장의 후임으로 제7함대 사령관으로 옮겨 오면서 크리스티 소장의 전횡에 종지부를 찍고 제7함대 사령관 명의로 Mk6 자기감응신관의 사용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개전한지 실로 2년 만에 미국의 잠수함들은 제대로 작동하는 어뢰를 가지고 전투초계에 나설 수 있었다.

(미해군 어뢰 문제 해결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은 여기로)

 

크리스티 소장은 1년 후인 1944년 11월에 잠수함대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어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12월 30일에 파이프 소장이 제7함대 잠수함 부대 사령관이 되었다.

Posted by 대사(PW)
,

20. 비행장 건설과 S 보트들

 

미군 공병대는 1943년 5월 29일부터 애투 섬에 비행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건설 중이던 홀츠 만의 활주로를 조사한 공병대는 이곳이 비행장 건설에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내리고 새로운 활주로 부지로 매서커 만 동쪽의 알렉사이 곶을 골랐다.

 

(애투 섬의 동쪽 부분 출처 : http://www.loran-history.info/Attu/Attu_island_2096dpi.jpg 에서 일부 발췌)

 

제50 및 제13전투공병대대 이외에도 제807항공대대 A 중대와 제349일반지원연대의 파견대가 비행장 건설에 투입되었다.

공병대는 호수의 물을 빼고 불도저로 지표면의 툰드라를 걷어낸 다음 모래와 자갈을 채우고 다졌다.

그리하여 공사 시작 후 11일만인 1943년 6월 8일에 최초의 항공기가 활주로에 착륙했다.

 

(알류샨 열도. 출처는 여기로

 
애투 섬에서 동쪽으로 40km 떨어진 셰미야 섬에도 비행장 건설이 이루어졌다.
셰미야 섬은 무인도로서 알류산 열도에서 유일하게 평평하여 미군은 장차 이곳에 B-29 폭격기를 운용할수 있는 대형 비행장을 건설할 예정이었다.

 

 

 

1943년 5월 28일에 18명의 선발대가 상륙하여 일본군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고 이틀 후인 30일에 제4보병연대와 제18전투공병연대가 상륙했다.

공병대는 6월 3일부터 활주로 건설을 시작하여 21일에는 쌍발중형폭격기들이 셰미야 섬에서 작전을 시작했다.

 

애투 섬과 셰미야 섬에 건설된 비행장들의 임무는

 

1. 알류샨 열도를 지키고

2. 일본령인 쿠릴 열도를 공격하며

3. 키스카 섬을 고립시키는

 

것이었는데 3번 임무가 특히 중요했다.

 

키스카 섬 공격 준비는 애투 섬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도 착착 진행되고 있었으나 애투 섬 탈환전의 불만족스러운 경과와 커다란 인명피해에 놀란 미군 지휘관들은 최소한 2배 이상의 수비대가 지키고 있는 키스카 섬을 침공하는데 보다 신중해졌다.

그리하여 침공군은 규모가 커졌고 훈련도 훨씬 강해졌다.

북태평양상륙군은 키스카 섬의 위도와 비슷한 북위 50도 선에서 실질적인 상륙훈련을 실시했다.

 

애투 섬 탈환전이 진행되는 동안 더치하버에 기지를 둔 미군의 구형 잠수함인 S 보트들은 20번이나 전투초계를 나섰으나 성능 부족으로 대부분 일본선박을 격침하는데 실패했다.

1943년 5월에 일본선박을 격침하는데 성공한 것은 어빈 하트맨 소령의 S-41 호가 유일했다.

S-41 호는 1943년 5월 27일에 바라무시로 근해에서 일본의 범선 1척에 어뢰 2발을 발사하여 1발을 명중시켜 격침했으나 정식 기록에는 올라가지 않았다.

5월 31일에는 1,000 톤급의 소형 화물선 세이키마루에 2발의 어뢰를 발사하여 1발을 명중킴으로써 격침했다.

 

1943년 여름에도 S 보트들은 전투초계를 계속했다.

윌리엄 스티븐슨 소령의 S-30 호는 6월 11일에 바라무시로 근해에서 5,228톤짜리 수송선 진부마루를 격침했고, 7월 2일에는 헨리 먼로 소령의 S-35 호가 캄차카 근해에서 5,430톤짜리 게잡이 어선 반슈마루를 격침했다.

가을에 접어들자 9월 19일에 빈센트 시슬러 소령의 S-28 호가 오호츠크 해에서 상선을 개조한 1,400톤짜리 포함 가츠라마루2호를 격침했다.

 

1943년 10월 8일에 프랜시스 브라운 소령이 지휘하던 S-44 호가 격침되었다.

S-44 호는 존 무어 소령의 지휘 아래에서 1942년 5월 12일에 구난선 쇼에이마루, 6월 21일에 상선을 개조한 포함 게이조마루를 격침한데 이어서 8월 10일에는 사보 섬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개선하던 일본중순양함 카고를 캐비엥 근해에서 격침한 쟁쟁한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카고는 당시까지 미국잠수함이 격침한 가장 큰 일본군함이었다.

 

(미국의 S 급 구형 잠수함 S-44. 수상배수량 : 864톤, 수중 배수량 : 1,144톤, 길이 : 69m, 폭 : 6.3m, 속력 : 수상 14.5노트, 수중 : 11노트, 항속거리 : 10노트로 9000km, 승무원 : 42명, 무장 : 21인치 어뢰발사관 4문, 어뢰 12발, 4인치 갑판포 1문)

 

S-44 호는 1943년 9월 26일에 애투 섬 기지를 떠나 바라무시로 방면으로 전투초계에 나섰다.

10월 7일 밤에 오호츠크 해에서 S-44 호는 레이더로 일본선박을 접촉했는데 브라운 소령은 소형 화물선으로 생각하고 부상한 채로 접근하여 갑판포를 발사했다.

그 순간 적으로부터 포격이 날아왔다.

상대는 소형 상선이 아니라 구축함이었다.

브라운 소령은 급히 잠항을 명령했으나 포탄1발이 함체를 뚫고 들어와 통제실과 후방 축전지를 파괴했다.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브라운 소령은 즉시 퇴함을 명령했고 수병 1명이 어뢰실 해치를 열고 갑판에 올라가 베갯잎으로 만든 백기를 흔들었으나 일본구축함은 사격을 계속하여 S-44 호를 순식간에 격침했다.

S-44 호의 승무원들 중 8명이 가라앉는 잠수함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했으나 일본구축함은 어네스트 두바와 윌리엄 윗모어만을 구조하고 나머지는 내버려두고 떠나 버렸다.

생포된 두 사람은 바라무시로에서 심문을 받고 오푸나의 포로수용소에 갇혔다가 아시오의 구리광산에 끌려가서 종전 때까지 강제노동을 해야만 했다.

이때 전사한 S-44 호의 함장 브라운 소령은 이전에 지휘하던 S-39 호가 오스트레일리아 근해에서 좌초하여 잃은 적이 있었다.

따라서 브라운 소령은 미해군에서 유일하게 2척의 함정을 상실한 잠수함장이 되었다.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한 미해군의 암호해독반으로부터 S-44 호의 격침을 보고받은 태평양함대 잠수함부대장 록우드 제독은 남아있던 S 보트들을 모두 일선에서 철수시켰다.

심각한 축전지 폭발을 일으켰던 S-45 호는 미본토에서 수리 겸 오버홀을 받고 남서태평양 해역군으로 보내졌으며 S-42 호와 S-47 호는 알래스카에서 바로 남서태평양해역군으로 보내졌고 S-46 호는 진주만으로 보내졌다.

이들 S 보트들은 더 이상 전투초계에 나서지 않고 잠수함 승무원의 훈련에 동원되거나 함대의 대잠훈련시 가상 적으로서 국가에 봉사하게 되었다. 

 

1942년부터 43년에 걸쳐 더치하버를 기지로 활동한 S 보트들은 총 70회의 전투출격을 통하여 5척의 일본선박을 격침했다.

파나마, 마닐라, 그리고 호주에서 출격한 횟수까지 모두 더하면 S 보트들은 태평양전쟁에서 총 190회의 전투출격을 통하여 14척의 일본선박을 격침했다.

이런 보잘것 없는 전과를 위하여 2년간 잠수함 승무원을 비롯하여 잠수모함 승무원 및 잠수함 기지 요원, 그리고 기술요원 등 적어도 1,000 명이 넘는 숙달된 인력들이 투입되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런 숙달된 인력들을 좀 더 빨리 낡은 S 보트에서 빼내어 만성적으로 인력난을 겪고 있던 함대형 잠수함부대에 충원했으면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Posted by 대사(PW)
,

19. 애투 탈환전(7) - 옥쇄 

 

1943년 5월 28일 저녁이 되자 애투 섬을 지키던 일본군들은 절망적인 처지가 되었다.

총 2,630명에 달하던 병력 중 전투가능한 병력은 800 명 남짓으로 줄어들었으며 무엇보다 탄약을 비롯한 보급품이 바닥났다. 

일본군 지휘관인 야마자키 야스오 대좌는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대신 남아있는 병력을 총동원하여 미군에 역습을 가하기로 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미군의 보급품이 쌓여있는 공병고지와 그 부근의 포병대를 장악한 후 탈취한 보급품을 가지고 일본군 증원부대가 올 때까지 버티자고 했다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믿었는지는 의심스럽다.

아무튼 5월 28일 오후가 되자 일본군들은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선 전투가 불가능한 부상자들에게 자결을 강요했으며 전투에 참가할 일본군들은 술을 포함하여 남아있던 약간의 식량을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29일 새벽이 되자 약 800 명의 일본군들이 안개가 자욱한 치차고프 계곡으로 내려왔다.

대부분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했는데 총탄은 거의 없었으며 일부는 단순히 대검을 막대기 끝에 묶은 창을 들고 있었다.

일본군은 미군의 아침 식사 시간에 맞추어 29일 오전 3시 25분에 미군 방어선에 들이닥쳤다.

애투 섬에서 6월이면 오후 11시에 어두워져서 오전 2시면 밝아진다.

 

당시 미군 초소에는 전날 정찰대의 보고에 따라 비상이 걸려 있었으나 대부분의 병사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따라서 일본군이 들이닥친 오전 3시 25분에는 방어선을 지키던 대부분의 병사들이 아침 식사를 위하여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방어선에 남아있다가 짙은 안개 속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은 소수의 미군 병사들은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식사 중이던 병사들이 총소리와 비명소리를 듣고 무슨 일인가 일어났다고 깨달은 순간 일본군들이 안개를 뚫고 괴성을 지르면서 기지에 난입했다.

대부분 비무장 상태였던 미군 병사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도망치는 방법 밖에 없었다.

병사들이 모두 도망쳐 버리자 일본군들은 주변 텐트에 닥치는대로 뛰어들어 텐트 내부에 숨어있던 병사들을 살해하고 물품을 약탈했는데 이 와중에 야전병원 텐트 2곳에도 일본군들이 뛰어들어 부상자들과 군의관 및 의무병들을 닥치는대로 살해했다.

야전병원의 텐트에는 분명히 적십자 표시가 되어 있었으나 일본군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야전병원과 대대본부 2개를 휩쓴 일본군은 잠시 숨을 고른 다음 원래 목표인 공병고지의 보급소를 목표로 진격했다.

보급소 부근에 텐트를 치고 자고 있던 제50전투공병대대의 3개 중대는 아랫쪽에서 들려오는 총소리와 비명 소리에 잠을 깨었다.

일본군에게 쫓겨 온 보병 몇몇이 1,000 명이 넘는 일본군들이 몰려온다고 고함을 질렀다.

 

(애투 섬 전투 상황도. 원본은 여기로)

 

그 순간에 제50전투공병대대장 버질 워멘도프 중령의 선견지명이 빛을 발했다.

워멘도프 중령은 제50전투공병대대에게 보병과 맞먹는 수준의 전투력을 갖출 것을 요구했다.

그는 애투 섬에 상륙하기 전 포트 오드에서의 훈련기간 중에 전투 훈련, 특히 진지방어훈련을 집중적으로 실시했으며 상륙 이후에도 항상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을 것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공병고지에 주둔 중이던 제50공병대대의 3개 중대는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텐트 주변에 미리 방어선을 설정해 두고 2정의 기관총을 설치한 것을 비롯하여 각 병사의 담당 위치를 미리 정해 두었고 각 담당 위치에는 적어도 1회의 전투를 치르기에 충분한 탄약과 수류탄 등도 미리 갖다 놓았다.

이런 식으로 대비하고 있던 제50전투공병대대원들은 비상사태가 발생하자 당황하지 않고 철모를 쓰고 총을 든 채 담당 위치로 달려갔다.

 

이윽고 짙은 안개 속에서 일본군이 소리를 지르면서 접근했으나 전투공병들은 사격군기를 유지하면서 적이 시야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시정이 10m 에 불과한 짙은 안개 속에서 일본군이 모습을 드러내자 맹렬한 일제사격이 터졌다.

전투공병들은 일본군의 기세에 위축되지 않고 일제사격을 가하여 일본군의 선두를 쓰러뜨리고 수류탄을 던진 다음 달려드는 일본군과 백병전으로 맞붙었다.

그동안 방어선에 배치되어 있던 2정의 기관총이 후속하던 일본군을 쓸어버리자 일본군의 기세가 꺾였다.

일본군이 멈칫거리자 전투공병들은 반격하여 야전병원 지역을 회복했으나 안개가 짙어서 추격이 불가능했다.

제50전투공병대대는 일본군의 예봉을 꺾는 과정에서 29명의 전사자와 47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공병대의 방어선에서 발견된 일본군 시체는 약 250구였다.

 

야카자키 대좌는 살아남은 부하들을 규합하여 잠시 후 다시 돌격했지만 이미 충격에서 깨어난 미군 보병이 대비하고 있다가 돌격해오는 일본군을 간단히 물리쳤다.

야마자키 대좌도 군도를 휘두르며 돌격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후로도 일본군은 산발적으로 여기저기서 돌격을 시도했으나 모두 막혔고 안개가 걷히자 치차고프 계곡으로 밀려났다.

분노한 미군은 달아나는 일본군의 등뒤에 81mm 및 60mm 박격포탄과 중기관총 및 경기관총의 총탄을 폭포처럼 쏟아부어 치차고프 계곡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살아남았던 일본군이 대부분 이때 사망하거나 자살함으로써 일본군의 마지막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반자이 돌격에서 사망한 일본군의 시체)

 

5월 29일의 광신적인 돌격을 마지막으로 일본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끝이 났으나 잔적 소탕은 이후로도 며칠간 이어졌다.

일본군은 거의 투항을 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거나 자살해 버렸으며 공병고지에서 끔찍한 꼴을 당한 미군도 구태여 포로로 잡으려는 생각이 없었으므로 투항권고도 하지 않고 바로 사살했다.

 

애투 섬 전투 기간 동안 일본해군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일본해군은 처음에 자신들이 보유한 주력함정들을 대거 동원하여 미함대와 일대 결전을 벌일 생각으로 도쿄만에 대규모 함대를 집결시켰으나 일단 함대가 집결하자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야마자키 대좌의 보고에 의하면 미국함대 또한 항공모함과 전함을 보유한 강력한 함대임이 분명했으므로 일본함대가 안개 속에서 레이더 기술이 훨씬 앞서있는 미해군의 강력한 함대와 맞붙었을 경우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대신 일본해군은 5월 21일에 어뢰를 장비한 19대의 1식 육상공격기를 투입했다.

그날 제11육군항공군은 안개가 짙었으므로 일본군의 공습을 예상하지 못하고 애투섬 상공을 비워 두었다.

1식 육공들은 애투 섬의 그늘에 숨어 레이더를 피하면서 접근하여 구축함 펠프스와 포함 찰스턴을 공격했다.

펠프스는 대공포로 2대의 1식 육공을 격추했으며 일본군이 투하한 어뢰는 모두 빗나갔다.

이때 초저공비행으로 찰스턴과 펠프스의 상공을 통과하던 1식 육공들이 20mm 기관포탄을 쏟아부어 찰스턴이 17발, 펠프스가 8발을 맞았다.

1식 육공 조종사들은 돌아가서 순양함 1척과 구축함 1척을 격침하고 다른 구축함 1척에 화재를 일으켰다고 보고했으나 당시 공격을 받은 미군 수상전투함은 구축함 펠프스와 포함 찰스턴 뿐이었다.

 

(미츠비시 G4M 1식 육상공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조종사들의 보고에 고무된 일본군은 다음날 애투 섬의 미군을 폭격하기 위하여 다시 17대의 1식 육공을 보냈다.

이번에는 미리 기다리고 있던 P-38 전투기 5대가 달려들어 1식 육공 5대를 격추하자 나머지 일본기들은 폭탄을 바다에 쏟아버리고 도망쳤다.

이 과정에서 미군의 P-38 전투기 2대가 격추되었다.

 

애투 섬 수비대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갈팡질팡하던 대본영은 5월 28일에 과달카날처럼 수상함대를 투입하여 애투 섬 수비대를 철수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연합함대의 주력이 미군함대를 견제하는 동안 가와세 시로 중장의 제5함대가 치차고프 항에 돌입하여 일본군 생존자들을 싣고 빠져나온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미군의 애투 섬 함락 방송이 나오자 대본영은 구출계획을 취소했다.

구출작전의 실패로 애투 섬 수비대가 전멸하자 일본제5함대 사령관 가와세 시로 중장은 크게 상심했고 대신 키스카 섬 수비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철수시키겠다고 결심했다.

 

애투 섬을 상실한 일본은 이제 애투 섬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한편 애투 섬 수비대의 전멸을 옥이 부서진다는 뜻인 '옥쇄(玉碎)' 라는 단어로 미화하면서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이후 이 옥쇄라는 단어는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전장에서 수많은 일본군들을 의미없는 개죽음으로 몰아가는 저주받은 단어로 자리잡게 된다.

 

애투 섬에 남아있던 미해군 함정들은 전투의 종막을 앞두고 애투 섬을 떠났다.

5월 24일에 구축함 펠프스는 마지막으로 5인치 포탄 426발을 발사한 후 오전 11시 55분에 구축함 미드와 함께 애닥 섬으로 떠났다.

포함 찰스턴은 5월 25일과 26일에 함포사격을 실시한 후에 애닥 섬으로 떠났다.

찰스턴은 5월 22일과 25일- 26일에 걸친 3일간 6인치 포탄 951발을 발사했다.

 

이로써 예상 외의 격전으로 점철되어 쌍방 간에 큰 인명피해를 남긴 18일 간의 애투 섬 전투가 끝났다.

미군이 확인한 일본군 시체는 2,351구였으며, 포로는 28명이었다.

증원부대까지 포함하여 총 15,000 여명이 상륙한 미군의 피해는 전사 549명, 부상 1,148명, 그리고 비전투 손실 약 2,100 명인데 비전투 손실은 대부분 동상이었다.

 

애투 섬에서 전사한 미군의 수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이 있다.

뉴욕 타임즈의 종군기자로 애투 섬 전투를 취재했던 로버트 셰로드는 자신이 애투 섬에서 직접 세어 본 미군의 무덤 숫자만 565기였으며 여기에 비록 소수지만 상륙 과정에서 익사하거나 작전 과정에서 실종된 인원, 그리고 중상을 입고 애투 섬에서 후송된 이후에 사망한 병사들도 분명히 있으므로 애투 섬에서 목숨을 잃은 병사들의 숫자는 약 600 명이라고 주장했다. 

549명은 미육군 전사국이 1962년에 공식전사를 편찬하면서 제시한 숫자로서 오늘날까지 인정되고 있는 최종 숫자이다.

 

약 600 명이든 549 명이든 애투 섬에서 발생한 미군 전사자 숫자는 지휘관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과달카날에서 일본군의 사단급 병력과 5개월 동안 사생결단의 전투를 벌였던 해병제1사단의 전사자 숫자가 774명이라는 점을 감안해보면 불과 2,630 명의 일본군과 3주일이 채 안되는 기간 동안 싸운 애투 섬에서 발생한 549명의 전사자가 얼마나 많은 것인지 감이 올 것이다.

 

이제 애투 섬은 다시 미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애투 탈환전은 성공했지만 내용은 결코 만족스럽지 못했다.

아무리 좋게 평가해도 제7보병사단은 애투 탈환전에서 왕성한 공격정신과 뛰어난 전투기술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애투 섬에서 실망스런 전투력을 보여주었던 제7사단도 기초가 탄탄하여 일단 실전을 치르면 무섭게 변하는 미군사단의 전통에 따라 불과 9개월 후의 콰잘린 전투에서는 완전히 환골탈태하여 스스로 최고 수준의 상륙부대임을 증명했다.

 

해군은 애투 섬 전투에서 자신들이 생각해 오던 사실, 즉 함포는 참호를 파고 들어앉은 적을 파괴하지 못하며 다만 마비시킬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물론 이 마비도 상당한 효과가 있어서 적의 방어선을 공격하는 병사들은 함포사격이 가능할 때 훨씬 적은 피해를 내면서 빨리 전진했으므로 미해군은 상륙 작전에서 함포 사격의 역할은 적을 마비시키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임무에는 14인치 이상의 대구경 함포를 장착한 전함이 단연 효과적이었다.

또한 전함의 포격은 아군에게 엄청난 사기앙양효과를 가져다 주었으며 반대로 적에게는 심각한 심리적 타격을 주어 사기를 떨어뜨렸다.

전함의 포격을 받을 때 병사들이 어떤 심리적 타격을 받는지에 대해서는 과달카날 전투 기간 중에 해병제1사단이 당한  '포격(The Bombartment)' 을 통하여 미군들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신형전함들이 고속항모기동부대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지상포격에 투입될 수 없는 상황에서 대구경 함포를 장비한 구형전함의 가치는 엄청났다.

이렇게 애투 섬 전투는 상륙작전에서 구형전함의 유용성을 증명했다.

 

그러나 6개월 후의 타라와 전투에서 미군은 해안에서 강력한 저항을 받는 상륙작전에서 적을 단순히 마비시키기만 해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엄청나게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서 배우게 된다.

따라서 타라와 전투 이후 상륙작전시 미해군의 함포 사격은 적의 마비가 아니라 적의 파괴를 목표로 하게 되었다.

해안을 지키는 수비대를 단순히 마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파괴하기 위해서는 애투 섬에서처럼 10,000m 가 넘는 거리에서 쏘아대는 고폭탄은 비록 전함의 강력한 14인치 주포탄일지라도 포탄 낭비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애투 탈환전에서 9개월 후에 벌어진 콰잘린 전투에서 전함 펜실베니아는 애투 섬에서처럼 13,000m 가 아니라 해안에서 불과 800m 앞까지 바짝 다가가서 14인치 고폭탄이 아닌 철갑탄을 쏟아부어 콰잘린의 일본군 방어선을 문자 그대로 요절을 내었다. 

 

호위항공모함으로서는 최초로 애투 섬 전투에서 상륙작전시 항공 지원을 담당했던 나소는 합격점을 받았다.

안개가 끼고 바람이 불리하여 179회에 달하는 모든 출격에 캐터펄트를 사용해야 했지만 이 때문에 항공작전에 지장을 받은 일은 없었다. 

나소는 애투 섬 전투 기간 중에 5대의 함재기를 상실했는데 기상 상태를 고려하면 낮은 손실율이었으며 특히 이착함 과정에서 상실한 함재기는 1대도 없었다.

 

미해군은 애투 섬 탈환전 기간 중의 물자 양륙능력은 형편없었다고 평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개선하는데 실패했다.

결국 미해군은 타라와 전투 이후에야 효율적인 양륙체계를 마련하게 된다.

 

다만 미해군의 급양체계만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수송함들은 애투 섬 탈환전 기간 동안 반드시 전선에서 싸우는 병사들에게 전달하라는 단서를 달아서 1,200 명 분의 따뜻한 식사를 보온이 잘 되는 밀폐용기에 담아 하루 2번씩 육군에 제공했다. 

따라서 일선 병사들은 따뜻한 커피 또는 홍차와 함께 고추, 콩, 옥수수를 넣고 걸쭉하게 끓인 따끈하고 맛있는 쇠고기 스튜를 매일 2번씩 먹을 수 있었는데 방한복의 부족으로 추위에 떨면서 고생하던 일선 병사들에게 얼어봍은 몸을 녹여주는 이 따뜻한 식사는 인기만점이었다.

일선병사에게만 지급되던 이 따뜻한 식사의 인기가 너무 높아서 해안에 물자를 양륙하던 양륙부대로부터 자신들에게도 따뜻한 식사를 지급해 달라는 요청이 빗발쳤고 수송함 해리스가 처음에는 60인분의 따뜻한 식사를 양륙부대에게 하루 2번 제공하기 시작했는데 곧 300 인분으로 늘어났다.

그러자 보급품을 해안에 운반하던 상륙주정들의 승무원들도 따뜻한 식사를 요청해왔다.

이 많은 식사를 도저히 주방에서만 준비할 수가 없었으므로 수송함들은 아예 갑판에 솥을 걸어놓고 대량으로 쇠고기 스튜를 만들어서 밀폐용기에 담아 한끼 식사를 얻으려고 다가오는 주정 승무원들에게 넘겨 주었다.

 

수송함들은 이외에도 담배, 성냥 및 초코바 등을 매일 주정승무원들과 양륙부대에 보급했으며, 별도로 5,000 갑의 담배와 성냥, 그리고 수천개의 초코바를 일선에서 싸우는 육군병사에게 보급했다. 

Posted by 대사(PW)
,

18. 애투 탈환전(6) - 타개 

 

브라운 소장으로서는 억울하게도 그가 제7사단장 직에서 해임당한 16일 오후부터 미군은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시작했다.

5일 간의 격렬한 함포 사격과 북부상륙부대(제1/17 및 제3/32대대)의 집요한 공격에 시달리던 X 고지의 일본군들은 15일 밤에 무어 능선으로 후퇴했다. 

이에 따라 북부상륙부대는 16일 아침에 X 고지를 점령하고 스카웃 중대 및 정찰중대로 이루어진 임시 대대와 만났다.

북부상륙부대는 이어서 무어 능선을 공격했다.

 

나소는 안개에도 불구하고 6대의 함재기를 내보내어 제1/17대대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하여 무어 능선을 공습했는데 시계불량으로 2대가 추락했다.

오전 10시 48분에 나소는 다시 함재기를 내보내어 공습했는데 이때 함재기 중 1대가 그만 북부상륙부대를 오폭했다.

구축함 애브너 리드도 저녁 6시에 5인치 함포로 138발을 발사하며 북부상륙부대의 전투를 지원했다.

 

제11육군항공대에서도 항공기를 보내왔으나 안개 때문에 폭격이 힘들었다.

P-38 전투기 편대는 나뭇가지에 닿을 정도의 초저공으로 홀츠 만과 치차고프 항에 공습을 가하여 낙하산폭탄을 떨어뜨리고 기총소사를 가했다.

폭격기 3개 편대도 왔으나 목표를 확인할 수가 없어서 폭탄을 투하하지 못했다.

B-24 폭격기 1대는 북부부대의 선두에 보급품을 떨어뜨려 주었다.

북부상륙부대는 16일 저녁까지 무어 능선을 장악하는데 실패했으나 위협을 느낀 일본군들은 16일 밤에 황급히 치차고프 항으로 철수했다.

 

16일 저녁 7시 10분에 전함 펜실베니아, 호위항공모함 나소, 구축함 애브너 리드, 아멘, 프루잇, 에일윈 및 미드는 애투 섬 북방으로 물러났다.

저녁 9시 30분에는 하역을 끝낸 수송함 제일린, 해리스, 그리고 J. 프랭클린 벨이 애닥 섬으로 떠났다.

 

(애투 섬 전투 상황도. 원본은 여기로)

 

17일 오전에 북부상륙부대는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무어 능선을 점령했다.

미군은 그곳에서 일본군이 급히 후퇴하면서 미처 옮기지 못한 상당량의 식량, 탄약 및 군복 등 보급품을 찾았는데 특히 일본군의 방한복은 병사들에게 인기가 대단했다.

반면 일본군은 대량의 보급품을 상실하는 뼈아픈 타격을 입었다.

 

북부상륙부대가 무어 능선으로 진출함에 따라 매서커 만 주변을 지키던 일본군의 배후가 노출되었으므로 매서커 만의 일본군들도 17일 밤에 치차고프 항으로 후퇴했다.

그리하여 18일 아침에 제7정찰중대가 K/3/17 중대와 자민 고개의 서쪽 능선에서 만남으로써 북부상륙부대와 남부상륙부대가 연결되었다.

다음날인 19일에는 전임 사단장 브라운 소장이 요청했던 제1/4대대가 매서커 만에 상륙했다.

 

북부상륙부대와 남부상륙부대의 연결은 애투 섬 탈환전의 전환점으로 이후 미군에서는 아무도 승리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전환점이라는 말이 곧 전투가 끝났다는 말은 아니었다.

사실 일본군은 주력을 보존하고 있었으며 다만 치차고프 항 주변의 최종방어선으로 물러선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열흘 이상 치차고프 항 주변의 일본군 방어선을 둘러싸고 미군과 일본군 사이에 처절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야마자키 대좌는 박격포나 기관총을 중심으로 약간의 소총수들을 배치한 작은 팀을 여러 개 만들어서 방어선에 배치했다. 

이러한 소규모 전투팀은 참호나 자연적인 동굴에 의지하여 진지를 구축했으며 이러한 진지들은 서로 도울 수 있도록 자리잡고 있었다.

 

안개 때문에 화력지원이 원활하지 못한 경우가 많아서 미군 병사들은 이러한 기관총좌와 박격포좌들을 근접전으로 제거해야만 했다.

전투는 치열했고 많은 경우 백병전까지 가서야 승부가 났다.

 

K/5/32 중대의 조 마르티네즈 일병은 대대의 공격이 돈좌되자 자신의 BAR 를 들고 단신으로 일본군의 동굴로 뛰어들어 동굴 내의 일본군을 모두 사살했다.

잠시 후 동굴에서 나온 마르티네즈 일병은 탄창을 갈아넣은 후 다른 동굴로 뛰어들어 성공적으로 소탕했으나 이 과정에서 큰 부상을 입어 곧 사망했다.

마르티네즈 일병은 상병 진급과 함께 명예훈장이 추서되었다.

 

제4연대의 바넷 상병은 5월 22일 전투에서 일본군 동굴 옆으로 접근해 수류탄을 던져 넣고 돌입하는 방식으로 하루 만에 일본군 47명을 사살하여 수훈장을 받았다.

애투 섬 전투에서는 바넷 상병과 제17연대장 짐머만 대령을 위시하여 13명이 수훈장을 받았다.

 

보병들이 일본군 진지를 공격하는 동안 제13전투공병대대장 제임스 그린 중령이 지휘하는 전투공병들은 보급이라는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매서커 만에는 제50전투공병대대의 4개 중대 모두와 제13전투공병대대의 3개 중대가 상륙했고, 북쪽의 홀츠 만에는 제13전투공병대대의 1개 중대가 상륙했다.

전투공병들은 해안의 보급품을 수송하기 위하여 매서커 만에서 툰드라가 얇은 곳을 찾아 불도저로 벗겨내고 길을 만들었다.

매서커 계곡을 반으로 가르는 산등성이(Hogback) 부근에서 단단한 땅을 찾지 못하자 산등성이 정상에 권양기를 설치하여 불도저를 커다란 나무판자에 싣고 툰드라 위로 끌어당겨 산등성이 정상까지 끌어오는데 성공했다.

산등성이의 정상은 툰드라가 얇았으므로 불도저가 약 30cm - 60cm 정도만 벗겨내면 길이 나왔다.

불도저는 산등성이의 정상을 따라서 길을 닦았다.

해안에서 보급품을 실은 트럭들은 산등성이 부근까지 가서 거기서 권양기에 이끌려 산등성이에 도달한 다음 정상의 길을 따라 사라나 고개까지 갔다.

사라나 고개 너머는 트럭 통행이 불가능했으므로 전투공병들이 손수레를 이용하거나 등에 지고 보급품을 날랐다.

 

보급로에는 소규모의 일본군들이 수시로 출몰했으므로 공병들은 그때마다 보급품을 내려놓고 전투를 벌여야 했다.

미군이 치차고프 항 주변의 일본군 최종 방어선에 도달하자 전투공병들은 5월 25일에 사라나 고개의 남동쪽이자 길버트 능선이 시작되는 고지에 보급기지를 만들었다.

일단 전선 가까이 보급기지가 들어서자 자연스럽게 그 주변에 포병대와 각 대대의 본부를 비롯하여 식당 및 야전병원 등이 들어서면서 전선 지휘소를 형성했다.

보급기지가 자리잡은 고지는 공병고지라고 불렸는데, 공병고지는 전투 기간 내내 일본군의 박격포 공격을 받았고 전투의 마지막 단계에서 일본군이 실시한 반자이 돌격의 목표가 되었다.

 

전투공병들은 공병고지 너머 전선까지 트럭들이 도달할 수 있도록 계속하여 도로를 건설했다.

급경사의 계곡에서 불도저들이 미끄러져 내려가 땅에 처박히는 사고를 여러 번 겪으면서 5월 29일에 드디어 공병고지와 치차고프 계곡을 연결하는 도로가 완성되었다.

 

그동안 제11육군항공대는 공습을 계속했다.

5월 17일과 18일에는 기상이 나빠서 모든 항공작전이 취소되었고, 19일부터 재개되었다.

19일에 6대의 B-24 폭격기가 치차고프 항을 폭격했고, B-25 쌍발폭격기 편대가 2번에 걸쳐 사라나 만의 일본군 진지에 1,200m - 1,350m 고도에서 폭격을 가하여 136kg 짜리 폭탄 87개를 투하했다.

 

(노스아메리칸 B-25 미첼 쌍발 중형폭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20일에는 날씨가 나빠 항공작전이 불가능했다.

21일에 18대의 P-38  전투기가 초저공 비행으로 치차고프 항 부근의 일본군 진지에 낙하산 폭탄을 투하했다.

6대의 B-24 폭격기가 애투 섬에 도달했으나 안개가 걷히질 않아 4시간 동안 배회하다가 키스카 섬으로 가서 그곳의 잠수함 기지를 폭격했다. 

 

22일에 어뢰를 장착한 일본군의 1식 육상공격기 19대가 구축함 펠프스와 포함 찰스턴을 공격했는데 해군 함정들은 어뢰를 1발도 맞지 않고 대공포로 반격을 가하여 1대를 격추했다.

이날 제11육군항공대는 안개가 짙어서 일본군이 공격해 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애투 섬 상공을 비워 두었다.

 

다음날인 23일에 일본군이 또다시 17대의 1식 육상공격기를 보내어 매서커 만의 미군들을 폭격하려고 시도했다.

이번에는 제임스 와트 중령이 이끄는 이루어진 P-38 전투기 5대가 애투 섬 중앙에서 요격했다.

프레드릭 무어 중위가 3대를 격추하고, 와트 중령과 해리 히긴스 대위가 각 1대씩 총 5대를 격추하자 나머지 일본기들은 폭탄을 모두 버리고 달아났다.

미군 측에서는 편대장 와트 중령과 존 게디스 대위가 1식 육공의 방어화력에 맞아 격추되었는데 존 게디스 대위는 매서커 만에 비상착수하여 아이다호의 킹피셔 정찰기에 구조되었으나 와트 중령은 전사했다.

 

(록히드 P-38 라이트닝 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24일에는 알류샨 열도의 날씨를 살피는 B-24 폭격기가 돌아가는 길에 치차고프 항에 227kg 짜리 폭탄 6발을 떨어뜨렸다.

B-24 폭격기 5대는 1,700m - 1,800m 고도에서 45kg 짜리 폭탄을 떨어뜨리고 일본군 참호에 기총소사를 가했다.

이때 폭탄 1발이 미군 전선에 떨어졌으나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다.

B-25 쌍발폭격기 5대는 136kg 짜리 폭탄 40개를 일본군 진지와 대공포좌에 떨어뜨렸고, 전투기들은 24시간 내내 애투 섬 상공을 지켰다.

 

25일도 폭격 양상은 비슷했으며 B-24 폭격기 1개 편대와 쌍발 중형폭격기 2개 편대가 합계 18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26일 또한 B-24폭격기 8대와 쌍발중형폭격기 2개 편대가 폭격을 가하고 P-38 전투기 2개편대가 상공을 엄호했다.

 

(콘솔리데이티드 B-24 리버레이터 폭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그동안 보병들은 일본군을 계속 압박하여 5월 28일이 되자 일본군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지경으로 몰렸다.

5월 28일 오후에 일본군 방어선을 정찰하던 미군 정찰대가 기묘한 광경을 목격했다.

공터에 일본군 부상자들이 누워 있고 주변에 여러명의 일본군들이 모여 있었는데 대부분 술에 취해 비틀거렸고 일부는 괴성을 지르거나 펄쩍펄쩍 뛰기도 했다.

잠시후 군의관으로 보이는 자가 나타나더니 부상자들에게 아마도 몰핀으로 보이는 주사를 놓기 시작했고 몰핀을 맞은 부상자들은 한명씩 권총으로 자살하기 시작했다.

쌍안경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미군 정찰대가 너무 놀라서 포격을 요청하는 것도 잊고 바라보는 사이 부상자들의 자살이 끝나고 일본군들은 사라져 버렸다.

정찰대는 복귀하여 그들이 목격한 상황을 보고했고 즉시 전선의 초소들에 비상 경계령이 떨어졌으나 더 이상의 조치는 없었다.

사실 그날 정찰대가 본 것은 몇시간 후에 닥쳐올 무시무시한 사태를 알리는 전조였으며 결코 초소의 경계를 강화하는 정도로 끝낼 일이 아니었으나 당시는 누구도 그런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Posted by 대사(PW)
,

17. 애투 탈환전(5) - 교착

 

홀츠 만에 상륙한 제1/17대대가 1943년 5월 12일 아침에 눈을 뜨자 안개가 걷혔다.

제1/17대대는 자신들이 목표인 X 고지에서 800m 정도 떨어져 있다는 걸 알았다.

병사들이 전진하자 밤새 X 고지를 차지한 일본군들이 총탄이 쏟아붓기 시작했다.

 

제1/17대대는 화력지원을 요청했는데 미처 해안에 방열하지 못한 105mm 곡사포 및 75mm 곡사포는 오후 4시가 되어서야 포격을 시작했다.

따라서 그 빈자리는 해군이 메꾸었다.

전함 펜실베니아가 제3해안상륙통제반의 요청에 따라 14인치 고폭탄과 5인치 포탄으로 X 고지를 타격했다.

정오 경에는 나소의 함재기들도 날아와서 X 고지에 45kg 짜리 파편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소사를 가했다.

 

잠시 후에는 제11육군항공대의 전투기들과 폭격기들이 폭격을 가했다.

육군 항공기들은 12일 하루 동안 대부분 홀츠 만 부근을 공격했다.

227kg 짜리 폭탄과 10kg짜리 낙하산폭탄을 장비한 6대의 P-38 전투기로 이루어진 편대가 4번 날아와 홀츠 만과 치차고프 항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기총소사를 가했다.

약 30m- 300m 의 저공에서 공습을 감행한 P-38 전투기들은 일본군의 대공포화로 1대를 상실하고, 4대가 피해를 입었다.

 

B-25 쌍발폭격기 6대로 이루어진 편대가 136kg 짜리 폭탄 36발을 홀츠 만의 동쪽 계곡에 건설 중이던 활주로와 주변의 대공포좌에 떨어뜨렸고, 8대의 B-25 폭격기들이 136kg 짜리 폭탄 48발을 X 고지에 투하했다.

B-24 폭격기 6대가 45kg 짜리 폭탄 240발을 애투 섬의 대공포좌에 투하했고, 다른 1대는 X 고지 부근에 고립되어 있던 알래스카 정찰대에 보급품을 투하했다.

 

항공연락장교가 홀츠 만에서 강력한 일본군의 대공포 진지 2곳을 지목했다.

오후 2시에 전함 아이다호가 일본군의 대공포 진지를 향하여 12,800m 거리에서 14인치 고폭탄 48발을 발사했다.

 

양륙 작업이 이루어지던 비치 레드는 하루 종일 일본군으로부터 간헐적인 포격을 받았다.

구축함 펠프스가 일본군 야포를 침묵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5인치 포탄으로 치차고프 항과 홀츠 만을 포격했으며, 전함 아이다호는 오후 3시 37분부터 제1/17대대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하여 14인치 고폭탄 200 발을 X 고지에 발사했다

미군은 이렇게 일본군 진지를 공격하면서 상당량의 포탄과 폭탄을 소모했으나 일본군의 야포 세력을 박멸하는데 실패했으며 일본군의 방어선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리지도 못했다.

 

일본군의 참호는 포탄이 닿기 힘든 곳에 만들어진 경우가 많았고, 참호의 벽에 한 사람이 웅크리고 들어갈 만한 대피용 구멍을 파놓았다.

포격과 폭격이 진행되는 동안 이 구멍에 숨어 있던 일본군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으므로 결국 제1/17대대는 접근전으로 일본군들을 참호에서 몰아내어야 했다.

백병전을 동반한 치열한 전투 끝에 제1/17대대는 12일 밤까지 X 고지의 일부를 점령했으나 아직도 부근에는 일본군들의 방어선이 건재했다.

결국 제1/17대대는 13일과 14일에 X 고지의 일본군들을 몰아내느라고 이틀 동안 겨우 270m 정도 전진했다.

 

(애투 섬 전투 상황도. 원본은 여기로)

 

남쪽의 매서커 만에서 만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전함 네바다의 함포 사격으로 일본군의 산포 1문을 파괴했으나 이어서 제2/17 및 제3/17대대가 공격을 시작하자 일본군은 완강하게 저항했다.

 

12일 아침이 되었을 때 동쪽의 비치 블루에 상륙했던 제2/17대대는 전날의 목표인 매서커  만과 사라나 만을 연결하는 고개에서 약 1,00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제2/17대대가 전진하기 시작하자 정면의 매서커 - 사라나 고개와 동쪽의 길버트 능선으로부터 총탄이 쏟아졌다.

이 와중에 제17연대장 에드워드 얼 대령이 일본군의 기관총 사격을 받아 전사했고, 제7사단의 참모장인 웨인 짐머만 대령이 연대장 직을 이어받았다,

상륙한 병력의 대부분이 제17연대 소속인 상황에서 상륙 다음날에 제17연대장을 잃은 것은 크나큰 타격이었다.

제2/17대대는 12일 밤까지 매서커 - 사라나 고개에 바짝 접근했으나 이후 이틀 간의 치열한 전투를 치른 후에 14일이 되어서야 겨우 고개의 일부를 장악할 수 있었다.

 

매서커 만의 서쪽을 담당한 제3/17대대 또한 비슷한 경험을 했다.

제3/17대대도 일본군의 총탄을 뚫고 12일 저녁까지 매서커 만과 홀츠 만을 연결하는 자민 고개에 바짝 접근했으나 이후 이틀 동안의 치열한 전투를 거쳐 14일에야 자민 고개의 끄트머리에 발을 들여놓았다.

5월 14일에 브라운 소장의 요청에 따라 악천후를 무릅쓰고 출격했던 나소의 함재기 중 3대가 돌풍에 휘말려 계곡에 추락했다.

 

그동안 해안에서는 물자 양륙과 증원병력의 상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북쪽에서는 12일부터 공격수송함 J. 프랭클린 벨이 비치 레드에 보급품을 내려놓기 시작했고, 13일에는 예비대인 제3/32대대를 싣고 애닥 섬에서 대기 중이던 증기선 치리코프가 비치 레드에 도착하여 병력을 상륙시켰다.

남쪽의 메서커 만에서는 12일에 수로측량선 하이드로그래퍼가 수심을 측정하여 안전한 수로를 확보하자 수송함들이 해안에 접근하여 보급품들을 하역하고 제2/32대대를 상륙시켰다.

13일에는 애닥 섬에서 도착한 공격수송함 그랜트가 예비대인 제1/32대대를 상륙시켰다.

 

애투 탈환전 기간에 일본잠수함 4척(I-7, I-31, I-34, I-35) 이 애투 섬 부근에 몰려들어 미함대를 위협했다.

5월 12일 오후 6시 25분에 I-31 은 전함 펜실베니아를 노리고 4발의 어뢰를 발사했으나 빗나갔다.

구축함 에드워드와 패러것이 달려들어 폭뢰를 떨어뜨렸으나 격침하는데 실패했다.

I-31 은 6월 13일에 키스카 근해에서 구축함 프레지어에게 격침된다.

 

펜실베니아는 5월 15일 오전 11시 40분에도 어뢰공격을 받았다.

I-35 가 어뢰를 발사했으나 아슬아슬하게 함미를 스쳐 지나갔다.

또다시 구축함들이 공격했으나 역시 격침하는데 실패했다.

같은 날 공격수송함 J 프랭클린 벨도 I-34 에게 어뢰공격을 받았으나 다행히 빗나갔다.

 

14일까지 공격이 지지부진하자 15일에 전함 펜실베니아 함상에서 미군 고위 지휘관들의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제7사단장 브라운 소장은 작전이 지지부진한 이유를 지형, 기후 및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 탓으로 돌리면서 이미 투입된 제32연대에 더하여 셰미야 섬에 상륙할 예정이던 제4보병연대와 제18공병연대의 투입을 요청했다.

북태평양 상륙군 사령관 록웰 해군소장은 처음에 브라운 소장의 증원 요청을 거부했으나 몇 시간 동안의 토론을 거쳐 브라운 소장의 건의를 수용하여 북태평양군 사령관 킨케이드 소장에게 보고했다.

 

한편 애닥 섬에 있던 킨케이드 소장과 서부방어사령관 드윗 중장은 브라운 소장의 지휘 능력에 크게 실망하고 있었다.

제7사단장 브라운 소장이 펜실베니아 함상에서의 회의를 마치고 메서커 만에 설치된 사단 사령부로 돌아와 보니

 

"제대로 성공하지도 못하면서 자꾸 증원 타령만 한다."

 

는 드윗 중장의 준엄한 질책이 담긴 전문이 도착해 있었다.

드윗 중장의 이 전문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었다.

실제로 15일 오후에 드윗 중장은 앨버트 브라운 소장을 제7보병사단장 직위에서 해임하겠다는 킨케이드 제독의 제안에 동의하고, 후임으로 애닥 섬 사령관이던 유진 랜드럼 소장을 추천했다.

랜드럼 소장은 16일 오후에 애투 섬에 도착하여 16일 오후 5시부에 제7보병사단의 지휘권을 정식으로 인수했다.

 

새로 제7보병사단을 지휘하게 된 랜드럼 소장은 해군의 화력지원을 대부분 잃게 되었다.

전임 사단장 브라운 소장의 계획에 따르면 전투는 3일 만에 끝날 예정이었고, 이에 따라 해군은 첫 3일간 대량의 포탄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 결과 14일이 되자 펜실베니아의 14인치 고폭탄이 모두 떨어졌다.

제1/17대대와 동행하던 해안사격통제반은 대신 14인치 철갑탄을 발사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일본함대와의 교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던 록웰 소장은 지원 포격에 철갑탄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한 상태였다.

펜실베니아는 대신 5인치 부포로 화력지원을 계속했고, 구축함 펠프스가 해안에 바짝 접근하여 화력지원을 했는데 오후 8시 43분에 해안까지의 거리를 측정해 본 결과 펠프스는 해안에서 불과 450m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다음날인 15일이 되자 전함 네바다와 아이다호의 14인치 고폭탄도 바닥났다.

게다가 일본잠수함의 위협이 계속되자 록웰 소장은 5월 17일에 대부분의 해군 함정들을 철수시켰다.

랜드럼 소장에게 남겨진 해군 함정이라고는 화력지원용으로 구축함 3척(펠프스, 에일윈, 미드)과 포함 찰스턴,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을 운용하는 수상기모함 카스코, 그리고 수송함과 그 호위 함정들 뿐이었다.

 

일본제5함대 사령관 가와세 시로 중장은 미군이 애투 섬에 상륙하자 미군함대를 공격하기 위하여 중순양함을 이끌고 해상에 나와 수상기모함 기미카와마루와 만났다.

기미카와마루는 애투 섬에 수상비행기들을 날려보내려 했으나 안개가 짙어서 포기했다.

그동안 애투 섬 수비대는 미군함대가 항공모함과 전함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타전해 왔다.

가와세 중장은 중순양함 중심의 제5함대로 항공모함과 전함을 보유한 미국함대와 맞붙는다는 것은 자살 행위임을 깨닫고 애투 섬 서방 640km 해상에서 더 이상 접근하지 않았다.

대신 5월 13일에 어뢰를 장비한 1식 육상공격기 20대가 바라무시로에서 출격했으나 안개가 짙어서 공격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Posted by 대사(PW)
,

16. 애투 탈환전(4) - 상륙 

 

애투 섬을 침공하려면 위험한 조류, 해도에 기입되지 않은 암초, 그리고 거의 매일끼는 안개를 극복해야 했다.

알류샨 열도 부근을 항해하는 선원들의 오랜 원칙은 바다사자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더 이상 섬에 접근하지 않는 것이었다.

애투 상륙작전이 남태평양의 상륙작전보다 유리한 점이라고는 해안에 작은 모래사장들이 많아서 상륙지점을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정도였다.

 

미군의 주요 상륙 지점은 북쪽의 홀츠 만과 남쪽의 매서커 만이었다.

주력의 상륙에 앞서 홀츠 만 서쪽에 최초의 상륙이 실시되었다.

5일 전에 애투 섬에 도착하여 북쪽 해안을 정찰하던 잠수함 나왈과 노틸러스는 5월 11일 새벽에 제7스카웃 중대 약 200 명을 상륙시켰다.

이들은 고무보트를 타고 노를 저어 5월 11일 오전 3시 9분부터 5시 10분에 걸쳐 홀츠 만의 상륙지점인 비치 레드에서 서쪽으로 약 6km 정도 떨어진 비치 스칼렛에 상륙했다.

스카웃 중대의 뒤를 이어 고속수송함 케인에 타고있던 제7정찰중대 약 200 명이 상륙했다.

원래 제7정찰중대는 스카웃 중대가 상륙한 직후 상륙할 예정이었으나 안개가 너무 짙어서 도저히 해안에 접근할수가 없었다.

결국 케인은 펜실베니아의 레이더로부터 항로를 지시받아 11일 정오가 되어서야 겨우 제7정찰중대를 상륙시킬 수 있었다.

 

제7정찰중대가 상륙했을 때 스카웃 중대는 계곡을 따라 남하하고 있었다.

계곡의 남쪽 끝에 도달한 스카웃 중대는 홀츠 만을 향하여 동쪽으로 난 경사로를 힘겹게 올라갔다.

스카웃 중대가 약 650m 고도에 도달하자 마치 고개처럼 보이는 지형이 나왔는데 그 이후로는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정찰 중대와 스카웃 중대로 이루어진 임시 대대를 지휘하던 윌리엄 윌로비 대위는 오후 늦게 낯선 지형으로 들어서는 모험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임시 대대는 참호를 파고 들어 앉았다.

윌로비 대위는 명령이 내리면 홀츠 만 쪽으로 진출하여 홀츠 만에 상륙하는 제1/17대대에 대항하는 일본군의 배후를 칠 임무를 맡고 있었다.

 

(애투 섬 전투 상황도. 원본은 여기로)

 

홀츠 만 바로 서쪽의 비치 레드에는 제17연대 제1대대가 상륙했다.

오전 9시에 해상에는 안개가 자욱하여 함교에서 함수가 안보일 정도였는데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공격수송함 J. 프랭클린 벨에 탑승하고 있던 제32연대장 프랭크 컬린 대령은 상륙주정 2척에 타고 비치 레드로 향하는 정찰대에 합류했다.

정식명칭이 제1알래스카 전투정보소대로서 흔히 알래스카 정찰대라고 불리던 이 소규모 부대에는 카누를 다룰 줄 알고 애투 섬 지리에 익숙한 알류트족 병사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주정들은 플라스틱 보트들을 매달고 있었다.

구축함 펠프스의 호위를 받으면서 항진한 상륙주정이 해안에서 800m 떨어진 해상에 도달하자 알류트족 병사들이 보트로 옮겨타고 노를 저어 아무것도 안보이는 짙은 안개 속을 오로지 나침반과 감각에만 의존하여 뚫고 나가 무사히 상륙했다.

해안에는 아무런 저항이 없었으므로 상륙주정에서 대기하던 정찰대도 곧 상륙했다.

 

비치 레드를 확보했다는 보고를 받은 제1/17대대장 앨버트 하틀 중령은 제7사단장 앨버트 브라운 소장에게 대대 주력의 상륙허가를 요청했는데 공격수송함 제일린을 타고 남쪽의 매서커 만에 떠있던 브라운 소장은 안개가 걷혀 주력이 매서커 만에 상륙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대답했다.

오후가 되어 안개가 걷히면서 매서커 만에서 상륙이 시작되자 브라운 소장은 홀츠 만의 하틀 중령에게도 상륙을 허가했다.

오후 4시 15분부터 B/1/17 중대를 선두로 비치 레드에 상륙하기 시작하여 저녁까지 제1/17대대 1,100 명이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상륙을 마쳤다.

 

(홀츠 만에 상륙하고 있는 미군의 모습)

 

제1/17대대는 오후 6시 경에 최초로 일본군과 접촉했다.

정찰대가 골초프곶에서 남서쪽으로 약 1.6km 떨어진 곳에서 일본군 관측소를 발견하여 제거했다.

관측소에 있던 일본군 4명 중 2명은 사살되었고 2명은 달아났다.

잠시 후 정찰대는 일본군이 쏘아대는 75mm 대공포의 사격을 받고 전진이 느려졌다.

 

제1/17대대의 주력은 정찰대를 뒤따라 천천히 남하했다.

그날의 목표는 비치 레드에서 남쪽으로 3.2km 떨어진 240m 높이의 X고지였는데, 오후 10시 30분이 되자 짙은 안개와 밤의 어둠때문에 지형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제1/17대대는 자신들의 정확한 위치를 모른 채로 참호를 팠다.

제1/17대대의 정찰대는 주력과 떨어져 전방에 고립된 채로 밤을 지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X고지에 있다고 착각했다.

 

미군의 주력은 남쪽 매서커 만에 상륙했다.

원래 계획으로는 상륙을 앞두고 구형전함들이 상륙예정해안에 포격을 실시할 예정이었으나 안개로 인하여 상륙준비포격은 취소되었다.

상륙함대는 오전 8시 15분에 매서커 만에 들어와서 곧 상륙주정을 내리고 병사들을 옮겨실었다.

그러나 안개가 걷히지 않아 록웰 소장은 상륙을 오후로 연기했다.

다행히 기온이 섭씨 9도 정도로 많이 춥지는 않고 파도도 잔잔해서 상륙주정에서 대기하는 병사들이 많이 힘들지는 않았다.

 

오후들어 안개가 걷힐 것이라는 예보가 들어오자 록웰 소장은 오후 1시 55분에 상륙명령을 내렸다.

구축함 프루잇의 선도를 따라 오후 3시 30분부터 상륙이 시작되었고 오후 4시 20분에 제2/17 대대가 비치 블루에, 제3/17대대가 비치 옐로우에 상륙했다.

제2/17 및 제3/17대대는 오후 8시까지 2,000명이 저항을 받지 않고 상륙하여 매서커 해안에 폭 1.6km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매서커 만에 상륙한 미군의 모습)

 

매서커 만에 상륙한 미군은 오후 6시 경에 최초로 일본군과 교전했다.

비치 블루에 상륙한 제2/17대대는 메서커 계곡을 둘로 나누는 산등성이(Hogback)의 오른쪽으로 돌아 해안에서 2,300m 쯤 들어갔을 때 동쪽의 길버트 능선으로부터 소총 및 기관총 사격을 받고 일단 멈추었다.

약 45분 후 제2/17대대는 진격을 재개했으나 다시 기관총 사격과 함께 75mm 포탄까지 날아오기 시작하자 결국 진격을 멈추었다.

제2/17대대는 11일 오후 9시에 해안으로부터 2,700m 들어간 지점에서 참호를 파고 방어태세로 들어갔다. 

 

비치 레드에 상륙한 제3/17대대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산등성이의 왼쪽을 돌아 전진하던 제3/17대대는 오후 8시 30분에 서쪽의 헨더슨 능선과 정면에서 쏘아대는 사격을 받고 전진을 멈추었다.

해안에 상륙해 있던 155mm 롱톰 평사포들이 제3/17대대의 요청에 따라 포격을 퍼붓자 일본군은 사격을 멈추었으나 미군의 포격이 멈추고 제3/17대대가 전진을 재개하자 다시 사격을 시작했다.

결국 제3/17대대는 제2/17대대보다 약간 더 내륙으로 들어간 지점에 참호를 팠다. 

일본군은 매서커 만 계곡을 둘러싼 길버트 능선 및 헨더슨 능선과 메커서 계곡과 홀츠 만을 연결하는 자민 고개에 방어선을 펴고 있었다.

 

5월 11일 저녁 9시 30분이 되자 비치 스칼렛에 400명, 비치 레드에 1,100 명 그리고 매서커 만에 2,000 명 등 총 3,500 명의 미군이 애투 섬에 상륙해 있었다.

 

안개 때문에 폭격과 포격은 최소한으로 실시되었다.

11일 오전 2시에 나소의 함재기들이 치차고프 항을 폭격하고 기총소사를 가한 후 항복을 권유하는 전단을 뿌렸고 오전 10시부터는 구형전함 펜실베니아와 아이다호가 레이더 조준으로 치차고프 항에 1시간 동안 포격을 가했다.

 

매서커 만에 상륙한 주력의 양익을 확보하기 위하여 분견대들이 매서커 계곡 양쪽에 파견되었다.

제7정찰중대의 1개 소대는 메서커 만에서 남서쪽으로 6km 떨어진 알렉사이 곶에 상륙하여 북쪽으로 나아가 관측소를 설치했다.

이 정찰소대는 이후 2일간 본대와 연결되지 않은 채로 매서커 만과 니콜라스 호수 사이의 지역을 감시했다.

 

F/2/17 중대의 1개 소대는 길버트 능선을 소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소대장 찰스 폴슨 중위는 경기관총 1개반과 60mm 박격포 1개 분대를 배속받은 후 상륙 당일에 매서커 만 동쪽의 급경사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12일 아침에 길버트 능선의 정상에 도달한 폴슨 소대는 능선을 따라 북서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고 일본군은 길버트 방어선을 측면에서 위협하는 폴슨 소대에게 계속 병력을 보내어 공격을 가해왔다.

이틀간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치르면서 길버트 능선을 따라 전진한 폴슨 소대는 14일에 해안에서 약 2,700m 떨어진 지점에서 본대와 합류했다.

 

매서커 만의 서쪽으로도 분견대가 파견되었다.

F/2/32 중대는 메서커 만 좌익의 안전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받고 11일에 비치 옐로우에 상륙하여 즉시 서쪽으로 진격했다.

그날 밤에 템낙 만에 도달한 F 중대는 일본군 관측소를 발견하고 일본군이 미처 눈치채기 전에 기습하여 제거했다.

12일부터 F 중대는 헨더슨 능선의 일본군들을 배후에서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14일까지 능선 정상에 오르는 길을 찾았으나 실패했다.

결국 14일에 F 중대는 매서커 만으로 돌아왔다.

 

애투 섬의 일본군은 미군의 상륙에 놀라지 않았다.

일본잠수함 1척이 상륙 2일 전에 미군함대의 일부를 발견하고 보고했으며 연합함대 사령관 고가 제독은 이 정보를 즉시 애투 섬과 키스카 섬에 전달했다.

상륙 전날에는 애투 섬의 일본군 통신부대가 애투 섬 북방 해상에서 항진 중이던 미군 함정 간의 통신을 엿들었다.

상륙 당일인 11일 오전 2시에는 미군 함재기가 치차고프 항 상공에 나타나 폭격과 기총소사를 가하고 항복을 권유하는 전단을 뿌렸으며 오전 10시에는 미군 전함들이 치차고프 항에 포격을 가해왔다.

오후 3시에는 홀츠 만에서 상륙주정이 목격되었고 5시에는 남쪽 매서커 만에 미군이 상륙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야마자키 대좌는 자신이 가진 2,630명의 병력과 75mm 산포 4문, 75mm 대공포 12문, 20mm대공기관포 10문으로 모든 지점을 방어할 수는 없었다.

그는 대부분의 전력을 매서커 만과 홀츠 만을 연결하는 자민 고개 부근에 집중시켰다.

 

한편 일본해군 수뇌부는 애투 섬 침공을 계기로 미해군과 결전을 시도했다.

제5함대 사령관 가와세 시로 중장은 애투 섬으로 수상기를 전달하러 가던 기미키와마루와 만나 미함대를 공격하기 위하여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3척을 이끌고 바라무시로를 출항했다.

 

야마모토 제독의 전사 이후에 연합함대 사령관이 된 고가 미네이치 제독은 중순양함 묘코와 하구로를 제5함대에 증원한 후 5월 16일에 전함 3척(무사시, 공고, 하루나), 개장 항공모함 1척(히요), 중순양함 2척(도네, 치쿠마) 그리고 구축함 5척으로 이루어진 강력한 함대를 이끌고 트럭을 출발하여 5월 21일에 도쿄 만에 도착했다.

도쿄 만에는 이미 정규항공모함 2척(쇼가쿠, 즈이가쿠), 경항공모함 1척(즈이호), 중순양함 3척(스즈야, 구마노, 모가미), 경순양함 2척(아가노, 오요도), 구축함 11척이 급유함들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으나 일본해군의 대응은 애투 섬을 구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대신 일본해군의 강력한 함정들이 대거 빠져나감으로써 솔로몬 해역에서 터너 제독이 6월 말에 실시한 렌도바 상륙은 약한 저항만을 받았다.

Posted by 대사(P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