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애투 탈환전(5) - 교착

 

홀츠 만에 상륙한 제1/17대대가 1943년 5월 12일 아침에 눈을 뜨자 안개가 걷혔다.

제1/17대대는 자신들이 목표인 X 고지에서 800m 정도 떨어져 있다는 걸 알았다.

병사들이 전진하자 밤새 X 고지를 차지한 일본군들이 총탄이 쏟아붓기 시작했다.

 

제1/17대대는 화력지원을 요청했는데 미처 해안에 방열하지 못한 105mm 곡사포 및 75mm 곡사포는 오후 4시가 되어서야 포격을 시작했다.

따라서 그 빈자리는 해군이 메꾸었다.

전함 펜실베니아가 제3해안상륙통제반의 요청에 따라 14인치 고폭탄과 5인치 포탄으로 X 고지를 타격했다.

정오 경에는 나소의 함재기들도 날아와서 X 고지에 45kg 짜리 파편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소사를 가했다.

 

잠시 후에는 제11육군항공대의 전투기들과 폭격기들이 폭격을 가했다.

육군 항공기들은 12일 하루 동안 대부분 홀츠 만 부근을 공격했다.

227kg 짜리 폭탄과 10kg짜리 낙하산폭탄을 장비한 6대의 P-38 전투기로 이루어진 편대가 4번 날아와 홀츠 만과 치차고프 항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기총소사를 가했다.

약 30m- 300m 의 저공에서 공습을 감행한 P-38 전투기들은 일본군의 대공포화로 1대를 상실하고, 4대가 피해를 입었다.

 

B-25 쌍발폭격기 6대로 이루어진 편대가 136kg 짜리 폭탄 36발을 홀츠 만의 동쪽 계곡에 건설 중이던 활주로와 주변의 대공포좌에 떨어뜨렸고, 8대의 B-25 폭격기들이 136kg 짜리 폭탄 48발을 X 고지에 투하했다.

B-24 폭격기 6대가 45kg 짜리 폭탄 240발을 애투 섬의 대공포좌에 투하했고, 다른 1대는 X 고지 부근에 고립되어 있던 알래스카 정찰대에 보급품을 투하했다.

 

항공연락장교가 홀츠 만에서 강력한 일본군의 대공포 진지 2곳을 지목했다.

오후 2시에 전함 아이다호가 일본군의 대공포 진지를 향하여 12,800m 거리에서 14인치 고폭탄 48발을 발사했다.

 

양륙 작업이 이루어지던 비치 레드는 하루 종일 일본군으로부터 간헐적인 포격을 받았다.

구축함 펠프스가 일본군 야포를 침묵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5인치 포탄으로 치차고프 항과 홀츠 만을 포격했으며, 전함 아이다호는 오후 3시 37분부터 제1/17대대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하여 14인치 고폭탄 200 발을 X 고지에 발사했다

미군은 이렇게 일본군 진지를 공격하면서 상당량의 포탄과 폭탄을 소모했으나 일본군의 야포 세력을 박멸하는데 실패했으며 일본군의 방어선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리지도 못했다.

 

일본군의 참호는 포탄이 닿기 힘든 곳에 만들어진 경우가 많았고, 참호의 벽에 한 사람이 웅크리고 들어갈 만한 대피용 구멍을 파놓았다.

포격과 폭격이 진행되는 동안 이 구멍에 숨어 있던 일본군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으므로 결국 제1/17대대는 접근전으로 일본군들을 참호에서 몰아내어야 했다.

백병전을 동반한 치열한 전투 끝에 제1/17대대는 12일 밤까지 X 고지의 일부를 점령했으나 아직도 부근에는 일본군들의 방어선이 건재했다.

결국 제1/17대대는 13일과 14일에 X 고지의 일본군들을 몰아내느라고 이틀 동안 겨우 270m 정도 전진했다.

 

(애투 섬 전투 상황도. 원본은 여기로)

 

남쪽의 매서커 만에서 만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전함 네바다의 함포 사격으로 일본군의 산포 1문을 파괴했으나 이어서 제2/17 및 제3/17대대가 공격을 시작하자 일본군은 완강하게 저항했다.

 

12일 아침이 되었을 때 동쪽의 비치 블루에 상륙했던 제2/17대대는 전날의 목표인 매서커  만과 사라나 만을 연결하는 고개에서 약 1,00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제2/17대대가 전진하기 시작하자 정면의 매서커 - 사라나 고개와 동쪽의 길버트 능선으로부터 총탄이 쏟아졌다.

이 와중에 제17연대장 에드워드 얼 대령이 일본군의 기관총 사격을 받아 전사했고, 제7사단의 참모장인 웨인 짐머만 대령이 연대장 직을 이어받았다,

상륙한 병력의 대부분이 제17연대 소속인 상황에서 상륙 다음날에 제17연대장을 잃은 것은 크나큰 타격이었다.

제2/17대대는 12일 밤까지 매서커 - 사라나 고개에 바짝 접근했으나 이후 이틀 간의 치열한 전투를 치른 후에 14일이 되어서야 겨우 고개의 일부를 장악할 수 있었다.

 

매서커 만의 서쪽을 담당한 제3/17대대 또한 비슷한 경험을 했다.

제3/17대대도 일본군의 총탄을 뚫고 12일 저녁까지 매서커 만과 홀츠 만을 연결하는 자민 고개에 바짝 접근했으나 이후 이틀 동안의 치열한 전투를 거쳐 14일에야 자민 고개의 끄트머리에 발을 들여놓았다.

5월 14일에 브라운 소장의 요청에 따라 악천후를 무릅쓰고 출격했던 나소의 함재기 중 3대가 돌풍에 휘말려 계곡에 추락했다.

 

그동안 해안에서는 물자 양륙과 증원병력의 상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북쪽에서는 12일부터 공격수송함 J. 프랭클린 벨이 비치 레드에 보급품을 내려놓기 시작했고, 13일에는 예비대인 제3/32대대를 싣고 애닥 섬에서 대기 중이던 증기선 치리코프가 비치 레드에 도착하여 병력을 상륙시켰다.

남쪽의 메서커 만에서는 12일에 수로측량선 하이드로그래퍼가 수심을 측정하여 안전한 수로를 확보하자 수송함들이 해안에 접근하여 보급품들을 하역하고 제2/32대대를 상륙시켰다.

13일에는 애닥 섬에서 도착한 공격수송함 그랜트가 예비대인 제1/32대대를 상륙시켰다.

 

애투 탈환전 기간에 일본잠수함 4척(I-7, I-31, I-34, I-35) 이 애투 섬 부근에 몰려들어 미함대를 위협했다.

5월 12일 오후 6시 25분에 I-31 은 전함 펜실베니아를 노리고 4발의 어뢰를 발사했으나 빗나갔다.

구축함 에드워드와 패러것이 달려들어 폭뢰를 떨어뜨렸으나 격침하는데 실패했다.

I-31 은 6월 13일에 키스카 근해에서 구축함 프레지어에게 격침된다.

 

펜실베니아는 5월 15일 오전 11시 40분에도 어뢰공격을 받았다.

I-35 가 어뢰를 발사했으나 아슬아슬하게 함미를 스쳐 지나갔다.

또다시 구축함들이 공격했으나 역시 격침하는데 실패했다.

같은 날 공격수송함 J 프랭클린 벨도 I-34 에게 어뢰공격을 받았으나 다행히 빗나갔다.

 

14일까지 공격이 지지부진하자 15일에 전함 펜실베니아 함상에서 미군 고위 지휘관들의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제7사단장 브라운 소장은 작전이 지지부진한 이유를 지형, 기후 및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 탓으로 돌리면서 이미 투입된 제32연대에 더하여 셰미야 섬에 상륙할 예정이던 제4보병연대와 제18공병연대의 투입을 요청했다.

북태평양 상륙군 사령관 록웰 해군소장은 처음에 브라운 소장의 증원 요청을 거부했으나 몇 시간 동안의 토론을 거쳐 브라운 소장의 건의를 수용하여 북태평양군 사령관 킨케이드 소장에게 보고했다.

 

한편 애닥 섬에 있던 킨케이드 소장과 서부방어사령관 드윗 중장은 브라운 소장의 지휘 능력에 크게 실망하고 있었다.

제7사단장 브라운 소장이 펜실베니아 함상에서의 회의를 마치고 메서커 만에 설치된 사단 사령부로 돌아와 보니

 

"제대로 성공하지도 못하면서 자꾸 증원 타령만 한다."

 

는 드윗 중장의 준엄한 질책이 담긴 전문이 도착해 있었다.

드윗 중장의 이 전문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었다.

실제로 15일 오후에 드윗 중장은 앨버트 브라운 소장을 제7보병사단장 직위에서 해임하겠다는 킨케이드 제독의 제안에 동의하고, 후임으로 애닥 섬 사령관이던 유진 랜드럼 소장을 추천했다.

랜드럼 소장은 16일 오후에 애투 섬에 도착하여 16일 오후 5시부에 제7보병사단의 지휘권을 정식으로 인수했다.

 

새로 제7보병사단을 지휘하게 된 랜드럼 소장은 해군의 화력지원을 대부분 잃게 되었다.

전임 사단장 브라운 소장의 계획에 따르면 전투는 3일 만에 끝날 예정이었고, 이에 따라 해군은 첫 3일간 대량의 포탄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 결과 14일이 되자 펜실베니아의 14인치 고폭탄이 모두 떨어졌다.

제1/17대대와 동행하던 해안사격통제반은 대신 14인치 철갑탄을 발사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일본함대와의 교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던 록웰 소장은 지원 포격에 철갑탄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한 상태였다.

펜실베니아는 대신 5인치 부포로 화력지원을 계속했고, 구축함 펠프스가 해안에 바짝 접근하여 화력지원을 했는데 오후 8시 43분에 해안까지의 거리를 측정해 본 결과 펠프스는 해안에서 불과 450m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다음날인 15일이 되자 전함 네바다와 아이다호의 14인치 고폭탄도 바닥났다.

게다가 일본잠수함의 위협이 계속되자 록웰 소장은 5월 17일에 대부분의 해군 함정들을 철수시켰다.

랜드럼 소장에게 남겨진 해군 함정이라고는 화력지원용으로 구축함 3척(펠프스, 에일윈, 미드)과 포함 찰스턴,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을 운용하는 수상기모함 카스코, 그리고 수송함과 그 호위 함정들 뿐이었다.

 

일본제5함대 사령관 가와세 시로 중장은 미군이 애투 섬에 상륙하자 미군함대를 공격하기 위하여 중순양함을 이끌고 해상에 나와 수상기모함 기미카와마루와 만났다.

기미카와마루는 애투 섬에 수상비행기들을 날려보내려 했으나 안개가 짙어서 포기했다.

그동안 애투 섬 수비대는 미군함대가 항공모함과 전함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타전해 왔다.

가와세 중장은 중순양함 중심의 제5함대로 항공모함과 전함을 보유한 미국함대와 맞붙는다는 것은 자살 행위임을 깨닫고 애투 섬 서방 640km 해상에서 더 이상 접근하지 않았다.

대신 5월 13일에 어뢰를 장비한 1식 육상공격기 20대가 바라무시로에서 출격했으나 안개가 짙어서 공격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Posted by 대사(P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