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애투 탈환전(6) - 타개
브라운 소장으로서는 억울하게도 그가 제7사단장 직에서 해임당한 16일 오후부터 미군은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시작했다.
5일 간의 격렬한 함포 사격과 북부상륙부대(제1/17 및 제3/32대대)의 집요한 공격에 시달리던 X 고지의 일본군들은 15일 밤에 무어 능선으로 후퇴했다.
이에 따라 북부상륙부대는 16일 아침에 X 고지를 점령하고 스카웃 중대 및 정찰중대로 이루어진 임시 대대와 만났다.
북부상륙부대는 이어서 무어 능선을 공격했다.
나소는 안개에도 불구하고 6대의 함재기를 내보내어 제1/17대대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하여 무어 능선을 공습했는데 시계불량으로 2대가 추락했다.
오전 10시 48분에 나소는 다시 함재기를 내보내어 공습했는데 이때 함재기 중 1대가 그만 북부상륙부대를 오폭했다.
구축함 애브너 리드도 저녁 6시에 5인치 함포로 138발을 발사하며 북부상륙부대의 전투를 지원했다.
제11육군항공대에서도 항공기를 보내왔으나 안개 때문에 폭격이 힘들었다.
P-38 전투기 편대는 나뭇가지에 닿을 정도의 초저공으로 홀츠 만과 치차고프 항에 공습을 가하여 낙하산폭탄을 떨어뜨리고 기총소사를 가했다.
폭격기 3개 편대도 왔으나 목표를 확인할 수가 없어서 폭탄을 투하하지 못했다.
B-24 폭격기 1대는 북부부대의 선두에 보급품을 떨어뜨려 주었다.
북부상륙부대는 16일 저녁까지 무어 능선을 장악하는데 실패했으나 위협을 느낀 일본군들은 16일 밤에 황급히 치차고프 항으로 철수했다.
16일 저녁 7시 10분에 전함 펜실베니아, 호위항공모함 나소, 구축함 애브너 리드, 아멘, 프루잇, 에일윈 및 미드는 애투 섬 북방으로 물러났다.
저녁 9시 30분에는 하역을 끝낸 수송함 제일린, 해리스, 그리고 J. 프랭클린 벨이 애닥 섬으로 떠났다.
(애투 섬 전투 상황도. 원본은 여기로)
17일 오전에 북부상륙부대는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무어 능선을 점령했다.
미군은 그곳에서 일본군이 급히 후퇴하면서 미처 옮기지 못한 상당량의 식량, 탄약 및 군복 등 보급품을 찾았는데 특히 일본군의 방한복은 병사들에게 인기가 대단했다.
반면 일본군은 대량의 보급품을 상실하는 뼈아픈 타격을 입었다.
북부상륙부대가 무어 능선으로 진출함에 따라 매서커 만 주변을 지키던 일본군의 배후가 노출되었으므로 매서커 만의 일본군들도 17일 밤에 치차고프 항으로 후퇴했다.
그리하여 18일 아침에 제7정찰중대가 K/3/17 중대와 자민 고개의 서쪽 능선에서 만남으로써 북부상륙부대와 남부상륙부대가 연결되었다.
다음날인 19일에는 전임 사단장 브라운 소장이 요청했던 제1/4대대가 매서커 만에 상륙했다.
북부상륙부대와 남부상륙부대의 연결은 애투 섬 탈환전의 전환점으로 이후 미군에서는 아무도 승리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전환점이라는 말이 곧 전투가 끝났다는 말은 아니었다.
사실 일본군은 주력을 보존하고 있었으며 다만 치차고프 항 주변의 최종방어선으로 물러선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열흘 이상 치차고프 항 주변의 일본군 방어선을 둘러싸고 미군과 일본군 사이에 처절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야마자키 대좌는 박격포나 기관총을 중심으로 약간의 소총수들을 배치한 작은 팀을 여러 개 만들어서 방어선에 배치했다.
이러한 소규모 전투팀은 참호나 자연적인 동굴에 의지하여 진지를 구축했으며 이러한 진지들은 서로 도울 수 있도록 자리잡고 있었다.
안개 때문에 화력지원이 원활하지 못한 경우가 많아서 미군 병사들은 이러한 기관총좌와 박격포좌들을 근접전으로 제거해야만 했다.
전투는 치열했고 많은 경우 백병전까지 가서야 승부가 났다.
K/5/32 중대의 조 마르티네즈 일병은 대대의 공격이 돈좌되자 자신의 BAR 를 들고 단신으로 일본군의 동굴로 뛰어들어 동굴 내의 일본군을 모두 사살했다.
잠시 후 동굴에서 나온 마르티네즈 일병은 탄창을 갈아넣은 후 다른 동굴로 뛰어들어 성공적으로 소탕했으나 이 과정에서 큰 부상을 입어 곧 사망했다.
마르티네즈 일병은 상병 진급과 함께 명예훈장이 추서되었다.
제4연대의 바넷 상병은 5월 22일 전투에서 일본군 동굴 옆으로 접근해 수류탄을 던져 넣고 돌입하는 방식으로 하루 만에 일본군 47명을 사살하여 수훈장을 받았다.
애투 섬 전투에서는 바넷 상병과 제17연대장 짐머만 대령을 위시하여 13명이 수훈장을 받았다.
보병들이 일본군 진지를 공격하는 동안 제13전투공병대대장 제임스 그린 중령이 지휘하는 전투공병들은 보급이라는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매서커 만에는 제50전투공병대대의 4개 중대 모두와 제13전투공병대대의 3개 중대가 상륙했고, 북쪽의 홀츠 만에는 제13전투공병대대의 1개 중대가 상륙했다.
전투공병들은 해안의 보급품을 수송하기 위하여 매서커 만에서 툰드라가 얇은 곳을 찾아 불도저로 벗겨내고 길을 만들었다.
매서커 계곡을 반으로 가르는 산등성이(Hogback) 부근에서 단단한 땅을 찾지 못하자 산등성이 정상에 권양기를 설치하여 불도저를 커다란 나무판자에 싣고 툰드라 위로 끌어당겨 산등성이 정상까지 끌어오는데 성공했다.
산등성이의 정상은 툰드라가 얇았으므로 불도저가 약 30cm - 60cm 정도만 벗겨내면 길이 나왔다.
불도저는 산등성이의 정상을 따라서 길을 닦았다.
해안에서 보급품을 실은 트럭들은 산등성이 부근까지 가서 거기서 권양기에 이끌려 산등성이에 도달한 다음 정상의 길을 따라 사라나 고개까지 갔다.
사라나 고개 너머는 트럭 통행이 불가능했으므로 전투공병들이 손수레를 이용하거나 등에 지고 보급품을 날랐다.
보급로에는 소규모의 일본군들이 수시로 출몰했으므로 공병들은 그때마다 보급품을 내려놓고 전투를 벌여야 했다.
미군이 치차고프 항 주변의 일본군 최종 방어선에 도달하자 전투공병들은 5월 25일에 사라나 고개의 남동쪽이자 길버트 능선이 시작되는 고지에 보급기지를 만들었다.
일단 전선 가까이 보급기지가 들어서자 자연스럽게 그 주변에 포병대와 각 대대의 본부를 비롯하여 식당 및 야전병원 등이 들어서면서 전선 지휘소를 형성했다.
보급기지가 자리잡은 고지는 공병고지라고 불렸는데, 공병고지는 전투 기간 내내 일본군의 박격포 공격을 받았고 전투의 마지막 단계에서 일본군이 실시한 반자이 돌격의 목표가 되었다.
전투공병들은 공병고지 너머 전선까지 트럭들이 도달할 수 있도록 계속하여 도로를 건설했다.
급경사의 계곡에서 불도저들이 미끄러져 내려가 땅에 처박히는 사고를 여러 번 겪으면서 5월 29일에 드디어 공병고지와 치차고프 계곡을 연결하는 도로가 완성되었다.
그동안 제11육군항공대는 공습을 계속했다.
5월 17일과 18일에는 기상이 나빠서 모든 항공작전이 취소되었고, 19일부터 재개되었다.
19일에 6대의 B-24 폭격기가 치차고프 항을 폭격했고, B-25 쌍발폭격기 편대가 2번에 걸쳐 사라나 만의 일본군 진지에 1,200m - 1,350m 고도에서 폭격을 가하여 136kg 짜리 폭탄 87개를 투하했다.
(노스아메리칸 B-25 미첼 쌍발 중형폭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20일에는 날씨가 나빠 항공작전이 불가능했다.
21일에 18대의 P-38 전투기가 초저공 비행으로 치차고프 항 부근의 일본군 진지에 낙하산 폭탄을 투하했다.
6대의 B-24 폭격기가 애투 섬에 도달했으나 안개가 걷히질 않아 4시간 동안 배회하다가 키스카 섬으로 가서 그곳의 잠수함 기지를 폭격했다.
22일에 어뢰를 장착한 일본군의 1식 육상공격기 19대가 구축함 펠프스와 포함 찰스턴을 공격했는데 해군 함정들은 어뢰를 1발도 맞지 않고 대공포로 반격을 가하여 1대를 격추했다.
이날 제11육군항공대는 안개가 짙어서 일본군이 공격해 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애투 섬 상공을 비워 두었다.
다음날인 23일에 일본군이 또다시 17대의 1식 육상공격기를 보내어 매서커 만의 미군들을 폭격하려고 시도했다.
이번에는 제임스 와트 중령이 이끄는 이루어진 P-38 전투기 5대가 애투 섬 중앙에서 요격했다.
프레드릭 무어 중위가 3대를 격추하고, 와트 중령과 해리 히긴스 대위가 각 1대씩 총 5대를 격추하자 나머지 일본기들은 폭탄을 모두 버리고 달아났다.
미군 측에서는 편대장 와트 중령과 존 게디스 대위가 1식 육공의 방어화력에 맞아 격추되었는데 존 게디스 대위는 매서커 만에 비상착수하여 아이다호의 킹피셔 정찰기에 구조되었으나 와트 중령은 전사했다.
(록히드 P-38 라이트닝 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24일에는 알류샨 열도의 날씨를 살피는 B-24 폭격기가 돌아가는 길에 치차고프 항에 227kg 짜리 폭탄 6발을 떨어뜨렸다.
B-24 폭격기 5대는 1,700m - 1,800m 고도에서 45kg 짜리 폭탄을 떨어뜨리고 일본군 참호에 기총소사를 가했다.
이때 폭탄 1발이 미군 전선에 떨어졌으나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다.
B-25 쌍발폭격기 5대는 136kg 짜리 폭탄 40개를 일본군 진지와 대공포좌에 떨어뜨렸고, 전투기들은 24시간 내내 애투 섬 상공을 지켰다.
25일도 폭격 양상은 비슷했으며 B-24 폭격기 1개 편대와 쌍발 중형폭격기 2개 편대가 합계 18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26일 또한 B-24폭격기 8대와 쌍발중형폭격기 2개 편대가 폭격을 가하고 P-38 전투기 2개편대가 상공을 엄호했다.
(콘솔리데이티드 B-24 리버레이터 폭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그동안 보병들은 일본군을 계속 압박하여 5월 28일이 되자 일본군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지경으로 몰렸다.
5월 28일 오후에 일본군 방어선을 정찰하던 미군 정찰대가 기묘한 광경을 목격했다.
공터에 일본군 부상자들이 누워 있고 주변에 여러명의 일본군들이 모여 있었는데 대부분 술에 취해 비틀거렸고 일부는 괴성을 지르거나 펄쩍펄쩍 뛰기도 했다.
잠시후 군의관으로 보이는 자가 나타나더니 부상자들에게 아마도 몰핀으로 보이는 주사를 놓기 시작했고 몰핀을 맞은 부상자들은 한명씩 권총으로 자살하기 시작했다.
쌍안경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미군 정찰대가 너무 놀라서 포격을 요청하는 것도 잊고 바라보는 사이 부상자들의 자살이 끝나고 일본군들은 사라져 버렸다.
정찰대는 복귀하여 그들이 목격한 상황을 보고했고 즉시 전선의 초소들에 비상 경계령이 떨어졌으나 더 이상의 조치는 없었다.
사실 그날 정찰대가 본 것은 몇시간 후에 닥쳐올 무시무시한 사태를 알리는 전조였으며 결코 초소의 경계를 강화하는 정도로 끝낼 일이 아니었으나 당시는 누구도 그런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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