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애투 탈환전(7) - 옥쇄
1943년 5월 28일 저녁이 되자 애투 섬을 지키던 일본군들은 절망적인 처지가 되었다.
총 2,630명에 달하던 병력 중 전투가능한 병력은 800 명 남짓으로 줄어들었으며 무엇보다 탄약을 비롯한 보급품이 바닥났다.
일본군 지휘관인 야마자키 야스오 대좌는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대신 남아있는 병력을 총동원하여 미군에 역습을 가하기로 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미군의 보급품이 쌓여있는 공병고지와 그 부근의 포병대를 장악한 후 탈취한 보급품을 가지고 일본군 증원부대가 올 때까지 버티자고 했다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믿었는지는 의심스럽다.
아무튼 5월 28일 오후가 되자 일본군들은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선 전투가 불가능한 부상자들에게 자결을 강요했으며 전투에 참가할 일본군들은 술을 포함하여 남아있던 약간의 식량을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29일 새벽이 되자 약 800 명의 일본군들이 안개가 자욱한 치차고프 계곡으로 내려왔다.
대부분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했는데 총탄은 거의 없었으며 일부는 단순히 대검을 막대기 끝에 묶은 창을 들고 있었다.
일본군은 미군의 아침 식사 시간에 맞추어 29일 오전 3시 25분에 미군 방어선에 들이닥쳤다.
애투 섬에서 6월이면 오후 11시에 어두워져서 오전 2시면 밝아진다.
당시 미군 초소에는 전날 정찰대의 보고에 따라 비상이 걸려 있었으나 대부분의 병사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따라서 일본군이 들이닥친 오전 3시 25분에는 방어선을 지키던 대부분의 병사들이 아침 식사를 위하여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방어선에 남아있다가 짙은 안개 속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은 소수의 미군 병사들은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식사 중이던 병사들이 총소리와 비명소리를 듣고 무슨 일인가 일어났다고 깨달은 순간 일본군들이 안개를 뚫고 괴성을 지르면서 기지에 난입했다.
대부분 비무장 상태였던 미군 병사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도망치는 방법 밖에 없었다.
병사들이 모두 도망쳐 버리자 일본군들은 주변 텐트에 닥치는대로 뛰어들어 텐트 내부에 숨어있던 병사들을 살해하고 물품을 약탈했는데 이 와중에 야전병원 텐트 2곳에도 일본군들이 뛰어들어 부상자들과 군의관 및 의무병들을 닥치는대로 살해했다.
야전병원의 텐트에는 분명히 적십자 표시가 되어 있었으나 일본군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야전병원과 대대본부 2개를 휩쓴 일본군은 잠시 숨을 고른 다음 원래 목표인 공병고지의 보급소를 목표로 진격했다.
보급소 부근에 텐트를 치고 자고 있던 제50전투공병대대의 3개 중대는 아랫쪽에서 들려오는 총소리와 비명 소리에 잠을 깨었다.
일본군에게 쫓겨 온 보병 몇몇이 1,000 명이 넘는 일본군들이 몰려온다고 고함을 질렀다.
(애투 섬 전투 상황도. 원본은 여기로)
그 순간에 제50전투공병대대장 버질 워멘도프 중령의 선견지명이 빛을 발했다.
워멘도프 중령은 제50전투공병대대에게 보병과 맞먹는 수준의 전투력을 갖출 것을 요구했다.
그는 애투 섬에 상륙하기 전 포트 오드에서의 훈련기간 중에 전투 훈련, 특히 진지방어훈련을 집중적으로 실시했으며 상륙 이후에도 항상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을 것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공병고지에 주둔 중이던 제50공병대대의 3개 중대는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텐트 주변에 미리 방어선을 설정해 두고 2정의 기관총을 설치한 것을 비롯하여 각 병사의 담당 위치를 미리 정해 두었고 각 담당 위치에는 적어도 1회의 전투를 치르기에 충분한 탄약과 수류탄 등도 미리 갖다 놓았다.
이런 식으로 대비하고 있던 제50전투공병대대원들은 비상사태가 발생하자 당황하지 않고 철모를 쓰고 총을 든 채 담당 위치로 달려갔다.
이윽고 짙은 안개 속에서 일본군이 소리를 지르면서 접근했으나 전투공병들은 사격군기를 유지하면서 적이 시야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시정이 10m 에 불과한 짙은 안개 속에서 일본군이 모습을 드러내자 맹렬한 일제사격이 터졌다.
전투공병들은 일본군의 기세에 위축되지 않고 일제사격을 가하여 일본군의 선두를 쓰러뜨리고 수류탄을 던진 다음 달려드는 일본군과 백병전으로 맞붙었다.
그동안 방어선에 배치되어 있던 2정의 기관총이 후속하던 일본군을 쓸어버리자 일본군의 기세가 꺾였다.
일본군이 멈칫거리자 전투공병들은 반격하여 야전병원 지역을 회복했으나 안개가 짙어서 추격이 불가능했다.
제50전투공병대대는 일본군의 예봉을 꺾는 과정에서 29명의 전사자와 47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공병대의 방어선에서 발견된 일본군 시체는 약 250구였다.
야카자키 대좌는 살아남은 부하들을 규합하여 잠시 후 다시 돌격했지만 이미 충격에서 깨어난 미군 보병이 대비하고 있다가 돌격해오는 일본군을 간단히 물리쳤다.
야마자키 대좌도 군도를 휘두르며 돌격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후로도 일본군은 산발적으로 여기저기서 돌격을 시도했으나 모두 막혔고 안개가 걷히자 치차고프 계곡으로 밀려났다.
분노한 미군은 달아나는 일본군의 등뒤에 81mm 및 60mm 박격포탄과 중기관총 및 경기관총의 총탄을 폭포처럼 쏟아부어 치차고프 계곡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살아남았던 일본군이 대부분 이때 사망하거나 자살함으로써 일본군의 마지막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반자이 돌격에서 사망한 일본군의 시체)
5월 29일의 광신적인 돌격을 마지막으로 일본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끝이 났으나 잔적 소탕은 이후로도 며칠간 이어졌다.
일본군은 거의 투항을 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거나 자살해 버렸으며 공병고지에서 끔찍한 꼴을 당한 미군도 구태여 포로로 잡으려는 생각이 없었으므로 투항권고도 하지 않고 바로 사살했다.
애투 섬 전투 기간 동안 일본해군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일본해군은 처음에 자신들이 보유한 주력함정들을 대거 동원하여 미함대와 일대 결전을 벌일 생각으로 도쿄만에 대규모 함대를 집결시켰으나 일단 함대가 집결하자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야마자키 대좌의 보고에 의하면 미국함대 또한 항공모함과 전함을 보유한 강력한 함대임이 분명했으므로 일본함대가 안개 속에서 레이더 기술이 훨씬 앞서있는 미해군의 강력한 함대와 맞붙었을 경우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대신 일본해군은 5월 21일에 어뢰를 장비한 19대의 1식 육상공격기를 투입했다.
그날 제11육군항공군은 안개가 짙었으므로 일본군의 공습을 예상하지 못하고 애투섬 상공을 비워 두었다.
1식 육공들은 애투 섬의 그늘에 숨어 레이더를 피하면서 접근하여 구축함 펠프스와 포함 찰스턴을 공격했다.
펠프스는 대공포로 2대의 1식 육공을 격추했으며 일본군이 투하한 어뢰는 모두 빗나갔다.
이때 초저공비행으로 찰스턴과 펠프스의 상공을 통과하던 1식 육공들이 20mm 기관포탄을 쏟아부어 찰스턴이 17발, 펠프스가 8발을 맞았다.
1식 육공 조종사들은 돌아가서 순양함 1척과 구축함 1척을 격침하고 다른 구축함 1척에 화재를 일으켰다고 보고했으나 당시 공격을 받은 미군 수상전투함은 구축함 펠프스와 포함 찰스턴 뿐이었다.
(미츠비시 G4M 1식 육상공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조종사들의 보고에 고무된 일본군은 다음날 애투 섬의 미군을 폭격하기 위하여 다시 17대의 1식 육공을 보냈다.
이번에는 미리 기다리고 있던 P-38 전투기 5대가 달려들어 1식 육공 5대를 격추하자 나머지 일본기들은 폭탄을 바다에 쏟아버리고 도망쳤다.
이 과정에서 미군의 P-38 전투기 2대가 격추되었다.
애투 섬 수비대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갈팡질팡하던 대본영은 5월 28일에 과달카날처럼 수상함대를 투입하여 애투 섬 수비대를 철수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연합함대의 주력이 미군함대를 견제하는 동안 가와세 시로 중장의 제5함대가 치차고프 항에 돌입하여 일본군 생존자들을 싣고 빠져나온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미군의 애투 섬 함락 방송이 나오자 대본영은 구출계획을 취소했다.
구출작전의 실패로 애투 섬 수비대가 전멸하자 일본제5함대 사령관 가와세 시로 중장은 크게 상심했고 대신 키스카 섬 수비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철수시키겠다고 결심했다.
애투 섬을 상실한 일본은 이제 애투 섬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한편 애투 섬 수비대의 전멸을 옥이 부서진다는 뜻인 '옥쇄(玉碎)' 라는 단어로 미화하면서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이후 이 옥쇄라는 단어는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전장에서 수많은 일본군들을 의미없는 개죽음으로 몰아가는 저주받은 단어로 자리잡게 된다.
애투 섬에 남아있던 미해군 함정들은 전투의 종막을 앞두고 애투 섬을 떠났다.
5월 24일에 구축함 펠프스는 마지막으로 5인치 포탄 426발을 발사한 후 오전 11시 55분에 구축함 미드와 함께 애닥 섬으로 떠났다.
포함 찰스턴은 5월 25일과 26일에 함포사격을 실시한 후에 애닥 섬으로 떠났다.
찰스턴은 5월 22일과 25일- 26일에 걸친 3일간 6인치 포탄 951발을 발사했다.
이로써 예상 외의 격전으로 점철되어 쌍방 간에 큰 인명피해를 남긴 18일 간의 애투 섬 전투가 끝났다.
미군이 확인한 일본군 시체는 2,351구였으며, 포로는 28명이었다.
증원부대까지 포함하여 총 15,000 여명이 상륙한 미군의 피해는 전사 549명, 부상 1,148명, 그리고 비전투 손실 약 2,100 명인데 비전투 손실은 대부분 동상이었다.
애투 섬에서 전사한 미군의 수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이 있다.
뉴욕 타임즈의 종군기자로 애투 섬 전투를 취재했던 로버트 셰로드는 자신이 애투 섬에서 직접 세어 본 미군의 무덤 숫자만 565기였으며 여기에 비록 소수지만 상륙 과정에서 익사하거나 작전 과정에서 실종된 인원, 그리고 중상을 입고 애투 섬에서 후송된 이후에 사망한 병사들도 분명히 있으므로 애투 섬에서 목숨을 잃은 병사들의 숫자는 약 600 명이라고 주장했다.
549명은 미육군 전사국이 1962년에 공식전사를 편찬하면서 제시한 숫자로서 오늘날까지 인정되고 있는 최종 숫자이다.
약 600 명이든 549 명이든 애투 섬에서 발생한 미군 전사자 숫자는 지휘관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과달카날에서 일본군의 사단급 병력과 5개월 동안 사생결단의 전투를 벌였던 해병제1사단의 전사자 숫자가 774명이라는 점을 감안해보면 불과 2,630 명의 일본군과 3주일이 채 안되는 기간 동안 싸운 애투 섬에서 발생한 549명의 전사자가 얼마나 많은 것인지 감이 올 것이다.
이제 애투 섬은 다시 미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애투 탈환전은 성공했지만 내용은 결코 만족스럽지 못했다.
아무리 좋게 평가해도 제7보병사단은 애투 탈환전에서 왕성한 공격정신과 뛰어난 전투기술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애투 섬에서 실망스런 전투력을 보여주었던 제7사단도 기초가 탄탄하여 일단 실전을 치르면 무섭게 변하는 미군사단의 전통에 따라 불과 9개월 후의 콰잘린 전투에서는 완전히 환골탈태하여 스스로 최고 수준의 상륙부대임을 증명했다.
해군은 애투 섬 전투에서 자신들이 생각해 오던 사실, 즉 함포는 참호를 파고 들어앉은 적을 파괴하지 못하며 다만 마비시킬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물론 이 마비도 상당한 효과가 있어서 적의 방어선을 공격하는 병사들은 함포사격이 가능할 때 훨씬 적은 피해를 내면서 빨리 전진했으므로 미해군은 상륙 작전에서 함포 사격의 역할은 적을 마비시키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임무에는 14인치 이상의 대구경 함포를 장착한 전함이 단연 효과적이었다.
또한 전함의 포격은 아군에게 엄청난 사기앙양효과를 가져다 주었으며 반대로 적에게는 심각한 심리적 타격을 주어 사기를 떨어뜨렸다.
전함의 포격을 받을 때 병사들이 어떤 심리적 타격을 받는지에 대해서는 과달카날 전투 기간 중에 해병제1사단이 당한 '포격(The Bombartment)' 을 통하여 미군들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신형전함들이 고속항모기동부대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지상포격에 투입될 수 없는 상황에서 대구경 함포를 장비한 구형전함의 가치는 엄청났다.
이렇게 애투 섬 전투는 상륙작전에서 구형전함의 유용성을 증명했다.
그러나 6개월 후의 타라와 전투에서 미군은 해안에서 강력한 저항을 받는 상륙작전에서 적을 단순히 마비시키기만 해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엄청나게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서 배우게 된다.
따라서 타라와 전투 이후 상륙작전시 미해군의 함포 사격은 적의 마비가 아니라 적의 파괴를 목표로 하게 되었다.
해안을 지키는 수비대를 단순히 마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파괴하기 위해서는 애투 섬에서처럼 10,000m 가 넘는 거리에서 쏘아대는 고폭탄은 비록 전함의 강력한 14인치 주포탄일지라도 포탄 낭비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애투 탈환전에서 9개월 후에 벌어진 콰잘린 전투에서 전함 펜실베니아는 애투 섬에서처럼 13,000m 가 아니라 해안에서 불과 800m 앞까지 바짝 다가가서 14인치 고폭탄이 아닌 철갑탄을 쏟아부어 콰잘린의 일본군 방어선을 문자 그대로 요절을 내었다.
호위항공모함으로서는 최초로 애투 섬 전투에서 상륙작전시 항공 지원을 담당했던 나소는 합격점을 받았다.
안개가 끼고 바람이 불리하여 179회에 달하는 모든 출격에 캐터펄트를 사용해야 했지만 이 때문에 항공작전에 지장을 받은 일은 없었다.
나소는 애투 섬 전투 기간 중에 5대의 함재기를 상실했는데 기상 상태를 고려하면 낮은 손실율이었으며 특히 이착함 과정에서 상실한 함재기는 1대도 없었다.
미해군은 애투 섬 탈환전 기간 중의 물자 양륙능력은 형편없었다고 평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개선하는데 실패했다.
결국 미해군은 타라와 전투 이후에야 효율적인 양륙체계를 마련하게 된다.
다만 미해군의 급양체계만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수송함들은 애투 섬 탈환전 기간 동안 반드시 전선에서 싸우는 병사들에게 전달하라는 단서를 달아서 1,200 명 분의 따뜻한 식사를 보온이 잘 되는 밀폐용기에 담아 하루 2번씩 육군에 제공했다.
따라서 일선 병사들은 따뜻한 커피 또는 홍차와 함께 고추, 콩, 옥수수를 넣고 걸쭉하게 끓인 따끈하고 맛있는 쇠고기 스튜를 매일 2번씩 먹을 수 있었는데 방한복의 부족으로 추위에 떨면서 고생하던 일선 병사들에게 얼어봍은 몸을 녹여주는 이 따뜻한 식사는 인기만점이었다.
일선병사에게만 지급되던 이 따뜻한 식사의 인기가 너무 높아서 해안에 물자를 양륙하던 양륙부대로부터 자신들에게도 따뜻한 식사를 지급해 달라는 요청이 빗발쳤고 수송함 해리스가 처음에는 60인분의 따뜻한 식사를 양륙부대에게 하루 2번 제공하기 시작했는데 곧 300 인분으로 늘어났다.
그러자 보급품을 해안에 운반하던 상륙주정들의 승무원들도 따뜻한 식사를 요청해왔다.
이 많은 식사를 도저히 주방에서만 준비할 수가 없었으므로 수송함들은 아예 갑판에 솥을 걸어놓고 대량으로 쇠고기 스튜를 만들어서 밀폐용기에 담아 한끼 식사를 얻으려고 다가오는 주정 승무원들에게 넘겨 주었다.
수송함들은 이외에도 담배, 성냥 및 초코바 등을 매일 주정승무원들과 양륙부대에 보급했으며, 별도로 5,000 갑의 담배와 성냥, 그리고 수천개의 초코바를 일선에서 싸우는 육군병사에게 보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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