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히요 뇌격

 

일본군이 애투 섬 전투를 계기로 미군함대와 결전을 벌이기 위하여 도쿄 만에 일본연합함대의 주력을 모으자 암호해독을 통하여 이 사실을 알아낸 미군 잠수함들이 몰려 들었다.

 

1943년 5월 20일에 유진 샌즈 소령이 지휘하는 미국잠수함 소피쉬가 최초로 연합함대의 주력을 포착했다.

도쿄 남쪽 해상에서 초계중이던 소피시는 11,000m 거리에서 18노트로 항진하는 적 함대의 함영을 레이더로 확인했다.

적 함대의 구성을 정규항모 1척, 전함 3척, 구축함 2척 및 기타 함정 2척으로 판단한 샌즈 소령은 공격 위치로 이동하려 하였으나 해상이 거칠어서 기동이 힘들었다.

그동안 일본함대는 사라지고 말았다.

 

이틀 후인 5월 22일 아침에 로이 벤슨 소령의 트리거가 도쿄 만에서 레이더로 접근 중이던 일본함대를 접촉했다.

레이더에 나타난 적의 세력을 정규항모 1척, 전함 3척, 다수의 순양함과 구축함으로 판단한 벤슨 소령은 즉시 잠항하고 잠망경을 올렸다.

잠시 후 잠망경에 일본 순양함이 나타났고 벤슨 소령은 전함이나 정규 항모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그때 갑자기 일본함대가 지그재그항해를 하면서 사정거리에서 벗어나 버렸다.

아쉽기 그지 없는 일이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SS-237 트리거. 수상 배수량 : 1,549톤, 수중 배수량 : 2,463톤, 길이 : 95m, 폭 : 8.3m 속력 : 수상 21노트, 수중 9노트, 항속거리 : 수상항해시 10노트로 20,000km, 수중항해시 2노트로 180km, 초계 기간 : 75일, 잠항심도 : 90m, 승무원 : 60명, 무장 : 21인치 어뢰발사관 함수 6문, 함미 4문, 어뢰 24발, 76mm 갑판포 1문, 40mm 보포스 대공포 1문, 20mm 오리콘 대공기관포 1문)

 

5월 말에 애투 섬이 함락되고 1주일이 지나자 일본 항공모함들이 도쿄 만을 떠나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태평양함대의 암호해독반에서 이 사실을 알아내고 통보했는데 당시 일본항모들의 침로 전방에는 트리거, 새먼, 그리고 스컬핀, 이 3척의 잠수함이 있었다.

 

1943년 6월 8일 밤에 트리거가 19,000m 거리에서 레이더로 일본항모들을 포착했다.

트리거는 부상하여 전속력으로 추격했으나 도중에 엔진 하나가 말썽을 일으켜서 최고 속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이때 트리거는 일본항모들의 10,000m 후방까지 따라잡은 상태였으며 함장 벤슨 소령은 함교에서 어두운 수평선을 배경으로 일본 항모의 실루엣을 뚜렷이 볼 수 있었으나 더 이상 접근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트리거는 2번째의 기회를 놓쳤다.

 

트리거의 남쪽에 있던 새먼은 일본항모의 침로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때 바로 부근에 구축함 1척이 호위하는 수송선 3척이 지나가자 함장 존 니콜라스 소령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따라가서 공격했다.

새먼은 수송함 2척에 어뢰를 1발씩 명중시켰으나 2척 다 살아 돌아갔다.

이 때문에 막상 일본항공모함들이 나타났을 때 새먼은 공격할 수 있는 위치를 벗어나 있었다.

태평양함대의 잠수함 사령관 찰스 록우드 제독은 새먼의 전투보고서에 배서하면서 니콜라스 함장이 절호의 매복 지점에서 일본항모들을 기다리지 않고 수송선을 공격하기 위하여 매복위치를 벗어난 것을 두고

 

"불행한"

("unfortunate")

 

판단이었다고 적었다.

 

가장 남쪽에는 루시우스 채플 소령의 스컬핀이 매복하고 있었다.

스컬핀은 6월 9일 자정 무렵에 레이더로 10,000m 거리에서 접근 중이던 함영을 발견했다.

레이더에 나타난 함영을 정규항모 2척과 호위함정들로 판단한 채플 소령은 잠항하여 기다렸다.

그러나 접근하던 일본함대는 갑자기 지그재그로 방향을 바꾸면서 멀어져 갔다.

채플 소령은 절망적인 심정으로 6,400m 거리에서 어뢰 4발을 발사했으나 1발은 조기 폭발해 버렸고, 나머지 3발은 빗나갔다.

 

태평양 함대의 암호해독반은 아직도 도쿄만에 1척 또는 그 이상의 일본항모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이미 2번의 기회를 놓친 트리거의 함장 벤슨 소령은 심기 일전하여 도쿄만으로 돌아갔다.

 

전투초계의 마지막 날인 1943년 6월 10일 오후에 트리거는 세번째이자 마지막 기회를 잡았다.

트리거는 잠망경으로 고가 미네이치 일본연합함대 사령관의 기함인 개장항공모함 히요를 발견했는데 히요는 2척의 구축함을 앞세우고 21노트의 속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트리거는 잠항 상태로 일본구축함에게 들키지 않고 히요에게서 1,100m 거리까지 접근한 다음 함수에서 6발의 어뢰를 발사했다.

 

(일본의 개장항공모함 히요.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발사된 6발의 어뢰 중 2발은 함수 쪽으로 빗나갔다.

3번째 어뢰는 히요에서 300m  떨어진 곳에서 조기 폭발해버렸다.

4번째 어뢰는 함수의 닻줄 보관고에 명중하여 거의 피해를 주지 못했다.

5번째 어뢰는 함수와 함교 사이에 명중했으나 불발탄이었다.

 

유일하게 실질적인 피해를 입힌 것은 마지막 6번째 어뢰로서 함교 바로 아래의 1번 보일러실에 명중했다.

탄두가 폭발하면서 1번 보일러실이 분쇄되었고 격벽이 무너지면서 2번 보일러실도 순식간에 물에 잠겼으며 3번 보일러실도 침수가 시작되었다.

히요는 동력을 잃고 해상에 멈추었으나 침몰은 면했고 경순양함 이스즈에게 이끌려 요코스카항으로 향했다.

 

트리거의 함장 로이 벤슨 소령은 6월 22일에 진주만으로 돌아와 의기양양하게 일본항공모함에 어뢰 4발을 명중시켜 격침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태평양함대의 잠수함 사령관 록우드 제독은 암호해독반의 보고를 통하여 히요가 격침되지 않았으며 실제로 피해를 준 어뢰는 단 1발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벤슨 소령의 보고를 듣고 트리거의 전투일지를 주의깊게 검토한 록우드 제독은 히요가 살아남은 원인이 신뢰성이 떨어지는 Mk6 자기감응신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Mk6 자기감응신관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해 있던 록우드 소장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틀 후인 6월 24일에 니미츠 제독을 찾아갔다.

 

록우드 제독은 니미츠 제독에게 만일 그 빌어먹을 Mk6 자기감응신관만 아니었다면 히요는 지금쯤 요코스카의 건선거가 아니라 도쿄만 바닥에 있을 것이라면서 지금 당장 Mk6 자기감응신관의 사용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록우드 제독은 니미츠 제독에게 벤슨 함장이 명중시켰다고 주장한 4발의 어뢰 중 3발이 제 역할을 못한 이유가 모두 Mk6 자기감응신관 때문이라는 확증을 제시하지는 못헸지만 록우드 제독의 능력과 통찰력을 신뢰하고 있던 니미츠 제독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날 오후에 태평양함대 사령관 명의로 태평양함대의 모든 잠수함에서 Mk6 자기감응신관의 사용을 금지하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미해군 병기국과 맥아더 장군 휘하의 제7함대 잠수함 사령관 랄프 크리스티 소장은 발끈했다.

Mk6 자기감응신관의 개발 책임자였던 크리스티 소장은 즉시 미해군 병기국과 함께 니미츠 제독에게 Mk6 자기감응신관의 사용을 금지한 이유를 따져 묻는 편지를 발송했다.

니미츠 제독은 답장에서 Mk6 자기감응신관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이유를

 

"어쩌면 적의 대응책 때문이거나 어떤 조건 하에서 신관이 효과적이지 못하고 요구되는 적절한 발사 조건이라는 것이 비현실적이기 때문"

("because of probable enemy counter-measures, because of the ineffectiveness of exploder under certain conditions, and because of the impracticability of selecting the proper conditions under which to fire.")

 

일 것이라고 밝혔다.

직접적인 표현을 삼가하고 있지만 Mk6 자기감응신관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과 불신을 보여주는 동시에 Mk6 자기감응신관 사용금지 명령을 철회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답장이었다.

 

크리스티 소장은 포기하지 않고 미해군 병기국과 함께 호주의 프레멘틀에서 Mk6 자기감응신관에 대한 토론회를 연 다음 록우드 제독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 결과를 알렸다.

이 편지에서 크리스티 소장은

 

1. Mk6 자기감응신관이 최소한 가끔씩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2. 자기감응신관은 흘수가 얕은 대잠함정에 대한 사실상 유일한 해결책이며

3. 만일 이대로 자기감응신관의 사용을 중지해 버리면 앞으로 자기감응신관의 문제를 확인하고 해결할 기회를 영원히 없애버리게 된다

 

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만일 Mk6 자기감응신관에 실제로 문제가 있다면 태평양함대와 제7함대, 그리고 해군 병기국이 공동으로 연구를 진행하여 사실을 밝히자면서 그렇게하여 결론이 날 때까지만이라도 자기감응신관 사용금지 명령을 철회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편지의 내용은 불과 1년 전에 록우드 제독이 제7함대 잠수함 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어뢰 문제를 제기했을 때 병기국이 보였던 고압적이고 무성의한 태도와는 완전히 딴판으로 Mk6 자기감응신관이 최대 수요처인 태평양함대에서 전면적으로 거부당한데 대한 크리스티 소장과 병기국의 당혹감과 절박함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미 1년 이상 어뢰 문제로 크리스티 소장 및 병기국과 충돌하면서 불신이 극에 달해 있던 록우드 제독은 1년 전과 비교하면 상상할 수조차 없이 너그럽고 진전된 내용을 담고 있는 이러한 제안에 콧방귀도 끼지 않았다.

 

록우드 제독에게 완전히 무시당한 크리스티 제독은 분해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는 일기장에 록우드 제독을 가리켜 Mk6 자기감응신관을 반대하는 자로서 곧 어뢰에 반대하는 자인데 그래놓고는 격침 톤수는 열심히 자랑하고 다니는 걸 보면 그 격침 톤수를 바로 어뢰가 만들었다는 사실도 모르는 얼간이라고 악담을 퍼부었다.

그러나 Mk6 자기감응신관의 문제는 미해군 병기국과 크리스티 소장을 제외한 미해군 모두가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오히려 크리스티 소장이 병기국과 작당하여 감히 니미츠 제독에게 그런 건방진 편지를 보내고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 이례적인 일이었다.

 

여기에는 당시 크리스티 소장의 직속상관인 제7함대 사령관 카펜더 중장이 남서태평양지역군 총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의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있었던 탓이 컸다.

맥아더 장군의 신임을 얻지 못하면 실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던 남서태평양지역군에서 총사령관의 신임을 얻지 못한 카펜더 제독은 비록 직속 부하라고는 하나 병기국이라는 해군본부의 막강한 부서와 한몸이나 다름없는 크리스티 소장의 전횡을 제지하지 못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미해군의 방침에 따라 태평양함대와 제7함대 사이에서 정기적으로 순환배치되고 있던 잠수함의 함장들은 고래 싸움에 등터지는 새우 꼴이 되지 않기 위하여 눈치껏 처신하는 수 밖에 없었다.

잠수함장들은 모두 태평양함대 잠수함 사령관  록우드 제독의 방침에 찬성이었으므로 제7함대로 배치되는 잠수함들은 진주만을 떠나 호주 프레멘틀 앞바다에 이르기까지는 어뢰의 Mk6 자기감응신관을 모두 죽여놓고 있다가 입항 직전에 마지못해 활성화시켰다.

반면 제7함대에서 태평양함대로 배속되는 잠수함들은 프레멘틀의 부두를 떠나자마자 즉시 어뢰의 Mk6 자기감응신관을 죽여 버렸다.

 

물론 미국 어뢰의 문제점이 단지 Mk6 자기감응신관만은 아니었으며 따라서 자기감응신관의 사용을 금지한 이후에도 어뢰의 신뢰성이 극적으로 높아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병기국과 크리스티 소장의 결사적인 반대를 물리치고 가장 큰 문제인 Mk6 자기감응신관 문제를 일단 해결하자 문제 해결에 가속도가 붙었다.

결국 록우드 제독은 1발에 10,000 달러나 하는 어뢰 3발을 실험용으로 소모한 끝에 불발탄 문제까지 해결함으로써 1943년 9월부터 태평양함대의 잠수함들은 제대로 작동하는 어뢰를 가지고 전투초계를 실시할 수 있었다.

 

크리스티 소장이 지휘하던 제7함대 잠수함 부대의 잠수함장들은 여전히 Mk6 자기감응신관의 사용을 강요당했으나 이들의 고생도 11월에 끝났다.

북태평양군 사령관이었던 유능하고 야심만만한 토머스 킨케이드 중장이 1943년 11월에 카펜더 중장의 후임으로 제7함대 사령관으로 옮겨 오면서 크리스티 소장의 전횡에 종지부를 찍고 제7함대 사령관 명의로 Mk6 자기감응신관의 사용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개전한지 실로 2년 만에 미국의 잠수함들은 제대로 작동하는 어뢰를 가지고 전투초계에 나설 수 있었다.

(미해군 어뢰 문제 해결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은 여기로)

 

크리스티 소장은 1년 후인 1944년 11월에 잠수함대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어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12월 30일에 파이프 소장이 제7함대 잠수함 부대 사령관이 되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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