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비행장 건설과 S 보트들
미군 공병대는 1943년 5월 29일부터 애투 섬에 비행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건설 중이던 홀츠 만의 활주로를 조사한 공병대는 이곳이 비행장 건설에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내리고 새로운 활주로 부지로 매서커 만 동쪽의 알렉사이 곶을 골랐다.
(애투 섬의 동쪽 부분 출처 : http://www.loran-history.info/Attu/Attu_island_2096dpi.jpg 에서 일부 발췌)
제50 및 제13전투공병대대 이외에도 제807항공대대 A 중대와 제349일반지원연대의 파견대가 비행장 건설에 투입되었다.
공병대는 호수의 물을 빼고 불도저로 지표면의 툰드라를 걷어낸 다음 모래와 자갈을 채우고 다졌다.
그리하여 공사 시작 후 11일만인 1943년 6월 8일에 최초의 항공기가 활주로에 착륙했다.
(알류샨 열도. 출처는 여기로)
1943년 5월 28일에 18명의 선발대가 상륙하여 일본군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고 이틀 후인 30일에 제4보병연대와 제18전투공병연대가 상륙했다.
공병대는 6월 3일부터 활주로 건설을 시작하여 21일에는 쌍발중형폭격기들이 셰미야 섬에서 작전을 시작했다.
애투 섬과 셰미야 섬에 건설된 비행장들의 임무는
1. 알류샨 열도를 지키고
2. 일본령인 쿠릴 열도를 공격하며
3. 키스카 섬을 고립시키는
것이었는데 3번 임무가 특히 중요했다.
키스카 섬 공격 준비는 애투 섬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도 착착 진행되고 있었으나 애투 섬 탈환전의 불만족스러운 경과와 커다란 인명피해에 놀란 미군 지휘관들은 최소한 2배 이상의 수비대가 지키고 있는 키스카 섬을 침공하는데 보다 신중해졌다.
그리하여 침공군은 규모가 커졌고 훈련도 훨씬 강해졌다.
북태평양상륙군은 키스카 섬의 위도와 비슷한 북위 50도 선에서 실질적인 상륙훈련을 실시했다.
애투 섬 탈환전이 진행되는 동안 더치하버에 기지를 둔 미군의 구형 잠수함인 S 보트들은 20번이나 전투초계를 나섰으나 성능 부족으로 대부분 일본선박을 격침하는데 실패했다.
1943년 5월에 일본선박을 격침하는데 성공한 것은 어빈 하트맨 소령의 S-41 호가 유일했다.
S-41 호는 1943년 5월 27일에 바라무시로 근해에서 일본의 범선 1척에 어뢰 2발을 발사하여 1발을 명중시켜 격침했으나 정식 기록에는 올라가지 않았다.
5월 31일에는 1,000 톤급의 소형 화물선 세이키마루에 2발의 어뢰를 발사하여 1발을 명중킴으로써 격침했다.
1943년 여름에도 S 보트들은 전투초계를 계속했다.
윌리엄 스티븐슨 소령의 S-30 호는 6월 11일에 바라무시로 근해에서 5,228톤짜리 수송선 진부마루를 격침했고, 7월 2일에는 헨리 먼로 소령의 S-35 호가 캄차카 근해에서 5,430톤짜리 게잡이 어선 반슈마루를 격침했다.
가을에 접어들자 9월 19일에 빈센트 시슬러 소령의 S-28 호가 오호츠크 해에서 상선을 개조한 1,400톤짜리 포함 가츠라마루2호를 격침했다.
1943년 10월 8일에 프랜시스 브라운 소령이 지휘하던 S-44 호가 격침되었다.
S-44 호는 존 무어 소령의 지휘 아래에서 1942년 5월 12일에 구난선 쇼에이마루, 6월 21일에 상선을 개조한 포함 게이조마루를 격침한데 이어서 8월 10일에는 사보 섬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개선하던 일본중순양함 카고를 캐비엥 근해에서 격침한 쟁쟁한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카고는 당시까지 미국잠수함이 격침한 가장 큰 일본군함이었다.
(미국의 S 급 구형 잠수함 S-44. 수상배수량 : 864톤, 수중 배수량 : 1,144톤, 길이 : 69m, 폭 : 6.3m, 속력 : 수상 14.5노트, 수중 : 11노트, 항속거리 : 10노트로 9000km, 승무원 : 42명, 무장 : 21인치 어뢰발사관 4문, 어뢰 12발, 4인치 갑판포 1문)
S-44 호는 1943년 9월 26일에 애투 섬 기지를 떠나 바라무시로 방면으로 전투초계에 나섰다.
10월 7일 밤에 오호츠크 해에서 S-44 호는 레이더로 일본선박을 접촉했는데 브라운 소령은 소형 화물선으로 생각하고 부상한 채로 접근하여 갑판포를 발사했다.
그 순간 적으로부터 포격이 날아왔다.
상대는 소형 상선이 아니라 구축함이었다.
브라운 소령은 급히 잠항을 명령했으나 포탄1발이 함체를 뚫고 들어와 통제실과 후방 축전지를 파괴했다.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브라운 소령은 즉시 퇴함을 명령했고 수병 1명이 어뢰실 해치를 열고 갑판에 올라가 베갯잎으로 만든 백기를 흔들었으나 일본구축함은 사격을 계속하여 S-44 호를 순식간에 격침했다.
S-44 호의 승무원들 중 8명이 가라앉는 잠수함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했으나 일본구축함은 어네스트 두바와 윌리엄 윗모어만을 구조하고 나머지는 내버려두고 떠나 버렸다.
생포된 두 사람은 바라무시로에서 심문을 받고 오푸나의 포로수용소에 갇혔다가 아시오의 구리광산에 끌려가서 종전 때까지 강제노동을 해야만 했다.
이때 전사한 S-44 호의 함장 브라운 소령은 이전에 지휘하던 S-39 호가 오스트레일리아 근해에서 좌초하여 잃은 적이 있었다.
따라서 브라운 소령은 미해군에서 유일하게 2척의 함정을 상실한 잠수함장이 되었다.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한 미해군의 암호해독반으로부터 S-44 호의 격침을 보고받은 태평양함대 잠수함부대장 록우드 제독은 남아있던 S 보트들을 모두 일선에서 철수시켰다.
심각한 축전지 폭발을 일으켰던 S-45 호는 미본토에서 수리 겸 오버홀을 받고 남서태평양 해역군으로 보내졌으며 S-42 호와 S-47 호는 알래스카에서 바로 남서태평양해역군으로 보내졌고 S-46 호는 진주만으로 보내졌다.
이들 S 보트들은 더 이상 전투초계에 나서지 않고 잠수함 승무원의 훈련에 동원되거나 함대의 대잠훈련시 가상 적으로서 국가에 봉사하게 되었다.
1942년부터 43년에 걸쳐 더치하버를 기지로 활동한 S 보트들은 총 70회의 전투출격을 통하여 5척의 일본선박을 격침했다.
파나마, 마닐라, 그리고 호주에서 출격한 횟수까지 모두 더하면 S 보트들은 태평양전쟁에서 총 190회의 전투출격을 통하여 14척의 일본선박을 격침했다.
이런 보잘것 없는 전과를 위하여 2년간 잠수함 승무원을 비롯하여 잠수모함 승무원 및 잠수함 기지 요원, 그리고 기술요원 등 적어도 1,000 명이 넘는 숙달된 인력들이 투입되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런 숙달된 인력들을 좀 더 빨리 낡은 S 보트에서 빼내어 만성적으로 인력난을 겪고 있던 함대형 잠수함부대에 충원했으면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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