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키스카 탈출(1) - 일본잠수함들의 수난

 

미군이 애투 섬에 상륙하자 갈팡질팡하던 일본해군은 1943년 5월 19일에 애투 섬과 키스카 섬 수비대의 철수를 결정했다.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애투 섬 수비대는 일본제5함대의 경순양함들과 구축함들을 이용하여 해상철수를 하기로 하고 키스카 섬은 잠수함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그런데 애투 섬 수비대는 구원함대가 출항하기도 전에 전멸해 버렸으므로 이제 일본제5함대 사령관 가와세 시로 중장의 관심은 키스카 철수에 집중되었다.   

 

제5함대 휘하의 제1잠수전대에는 총 17척의 잠수함이 있었는데 이들 중 키스카 철수에 동원된 잠수함은 I-2, I-7, I-9, I-21, I-24, I-34, I-36, I-155, I-156, I-157, I-169, I-171, 그리고 I-175 의 13척이었다.

제1잠수전대 사령관 고타 다케로 소장이 지휘한 이 잠수함들은 보급품을 싣고 키스카 섬에 도착하여 병력들을 싣고 철수했다.

1943년 5월 26일에 최초로 병력 철수에 성공한 이래 6월 21일에 잠수함에 의한 철수작전을 중단할 때까지 제1잠수전대의 잠수함들은 20회 이상의 철수항해를 시도하여 13번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잠수함들은 키스카 섬에 125톤의 장비 및 탄약과 수백톤의 식량을 비롯한 보급품을 전달하고, 6,000 여명의 수비대 중 약 13%에 해당하는 820 여명을 철수시켰다.

 

키스카 철수를 처음으로 성공시킨 것은 I-7 호였다.

I-7 호는 애투섬 전투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1943년 5월 26일 밤에 키스카 섬에 도착하여 무기와 탄약 및 식량을 내려놓고 60명을 싣고 빠져나와 바라무시로에 무사히 돌아왔다.

이후 몇 번의 성공적인 철수가 이루어졌으며 그 와중에 심각한 피해라고는 6월 4일에 바라무시로를 출항했던 I-155 호가 다음날 심한 폭풍우 속에서 크게 망가져서 돌아온 것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의 의도를 눈치챈 미군이 키스카 섬 주변의 대잠경계를 강화하면서 철수에 동원된 일본잠수함들 사이에서 희생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1943년 6월 10일 아침에 월리스 코넬 대위가 지휘하는 구잠정 PC-487 호가 키스카 섬에서 북쪽으로 60km 떨어진 셰미야 섬 부근 해상에서 소나로 I-24 호를 탐지했다.

이어서 레이더가 700m 거리에서 잠망경을 발견했고, 최종적으로 PC-487 호의 승무원이 자욱한 안개 속에서 육안으로 I-24 호의 잠망경을 확인했다.

PC-487 호는 전속력으로 달려들었고, I-24 호가 황급히 잠항하자 5발의 폭뢰를 투하했다.

정확한 폭뢰 투하로 큰 피해를 입은 I-24 호가 부상하자 정장 코넬 대위는 충각공격을 명했다.

 

(PC-487. 배수량 : 280톤, 길이 : 52m, 폭 : 7m, 최고속력 : 20노트, 승무원 : 65명, 무장 : 3인치 양용포 1문, 40mm 대공포 1문, 20mm 기관포 3문, 로켓발사기 2문, 폭뢰투하기 4문, 폭뢰투하레일 2조, 출력 : 2,880 마력)

 

배수량 280톤짜리 구잠정 PC-487 호는 배수량이 2,554톤으로 자신의 9배가 넘는 I-24 호에게 19노트의 속력으로 달려들어 세차게 들이받았다.

고속으로 달려오던 탄력으로 뱃머리가 I-24 호의 갑판 위로 튀어 오르면서 PC-487 호는 I-24 호의 뱃전에 걸터 앉았다.

후진하여 빠져나온 PC-487 호는 I-24 호의 주위를 돌면서 3인치 양용포와 40mm 대공포 및  20mm 기관포로 포탄을 쏟아붓다가 다시 전속력으로 달려들었다.

이때 정장 코넬 대위는 잘못하면 자신의 배가 충각공격의 충격 때문에 두동강날 수도 있다고 각오했다고 한다.

두번째 공격에서 PC-487 호의 뱃머리는 다시 I-24 호의 갑판을 튀어올라 이번에는 I-24 호의 함교를 정통으로 들이받았다.

그러자 PC-487 호보다 9배 이상 더 큰 일본잠수함이 뒤로 넘어지면서 전복, 침몰했다.

I-24호의 승무원 104명은 전원 사망했다.

PC-487 호는 충각공격의 후유증으로 몇 군데서 물이 새기 시작하여 속력을 늦추고 해상에서 수리를 마친 다음 자랑스럽게 애투 섬으로 개선했다.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굴뚝에 일본잠수함을 격침했다는 표시를 그리고 있는 PC-487 호의 승무원들)

 

I-24 호가 격침된 지 불과 3일 후인 6월 13일에는 I-9 호가 미국 구축함 프레지어에게 격침되었다.

I-9 호는 6월 2일에 키스카 섬에 도착하여 17톤의 탄약과 2톤의 식량을 하역하고 79명을 싣고 6월 8일에 무사히 바라무시로에 도착했다.

6월 10일에 I-9 호는 두번째 철수임무를 위하여 바라무시로를 출항했다.

6월 13일 오후 5시 58분에 키스카 동쪽 25km 해상에서 엘리엇 브라운 소령이 지휘하는 미국 구축함 프레지어가 6,300m 거리에서 레이더로 부상한 상태의 I-9 호를 탐지하고 접근하기 시작했다.

프레지어가 접근하는 동안 I-9 호는 잠항했다.

 

서서히 접근하던 프레지어는 소나로 I-9 호를 탐지했고 저녁 8시 9분에 프레지어의 승무원이 불과 90m 거리에서 I-9 호의 잠망경을 발견했다.

프레지어는 일제사격을 퍼부으면서 고속으로 달려들었는데 최초의 일제사격 중 1발이 잠망경에 명중했다.

이어서 프레지어는 황급히 잠항하여 도망치려는 I-9 호의 머리 위에 3번에 걸쳐 폭뢰공격을 퍼부어서 격침했다.

I-9 호의 함장 후지이 대좌를 비롯한 승무원 101명 전원이 사망했다.

 

불과 사흘 사이에 2척의 잠수함을 상실한 잠수전단 사령관 코타 소장은 일단 구출작전을 중단했으나 상부의 압력으로 재개할 수 밖에 없었다.

 

6월 16일에는 I-157 호가 키스카 섬으로 향하던 도중 앰치트카 섬 부근에서 좌초하여 승무원들이 어뢰, 연료 및 윤활유는 물론 축전지 일부까지 버려서 함체를 가볍게 만든 다음에야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I-157 호는 잠항도 못하고 수상항주로 바라무시로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6월 22일에는 I-7 호가 최후를 맞았다.

I-7 호는 최초로 키스카 섬에서 병력을 철수시키는데 성공했었다.

1943년 5월 26일에 키스카 섬에 도착하여 식량과 13mm 및 7.7mm 총탄을 포함한 보급품 6톤을 하역하고, 대부분 환자나 부상자들인 60명의 병력과 전사한 병사의 유골 28점, 그리고 탄피 4톤을 싣고 무사히 바라무시로로 귀한했었다.

6월 8일에는 두번째로 키스카 섬에 도착하여 19톤의 탄약과 15톤의 식량을 하역한 후 101명을 싣고 6월 13일에 무사히 바라무시로로 귀환했다.

 

I-7 호는 1943년 6월 15일 오후 4시에 3번째 철수임무를 위하여 바라무시로를 출발했는데 함내에는 키스카에 양륙할 보급품과 함께 해상철수를 위하여 제5함대와 키스카 수비대 사이의 조율을 담당할 제5함대의 도노다 참모가 탑승하고 있었다.

이것이 I-7 호의 마지막 항해가 되었다.

6월 20일 오후 7시에 I-7 은 키스카 섬의 베가 만에서 남쪽으로 1.6km 떨어진 해상에 부상했다.

주변은 안개가 자욱했으므로 함장 다마키 대좌는 안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I-7 호로부터 약 13,000m 떨어진 해상에서는 피터 혼 소령이 지휘하는 구축함 모내헌이 초계중이었다.

모내헌이 SG 레이더로 I-7 호를 포착하자 함장 혼 소령은 즉시 전속력으로 접근하라고 명령했고 거리가 1,800m 까지 줄어들자 레이더 사격을 명령했다.

 

오후 7시 30분경에 갑자기 주변 해면에 포탄이 낙하하자 I-7 호의 함장 다마키 대좌는 즉시 잠항을 명했다.

그 순간 모내헌의 5인치 포탄 1발이 함교에 명중하면서 함장 다마키 대좌, 부장 나가이 소좌, 항해장 하나부사 대위를 포함한 6명이 사망하고 통신장교가 부상을 입었다.

지휘권을 인수한 어뢰장교 세키구치 로쿠로 대위는 반격을 명령했다.

I-7 은 140mm 갑판포 약 10발과 13mm 기관총 약 250발을 발사하며 반격을 가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개방되어 있던 후방 밸러스트 탱크를 잠그는 것을 난리통에 잊어먹은 탓으로 오후 7시 45분에 I-7호가 옆으로 심하게 기울어지면서 해안에 좌초하자 세키구치 대위는 퇴함명령을 내렸는데 이때 도노다 참모도 무사히 퇴함했다.

 

21일 새벽 2시에 세키구치 대위는 키스카 섬 수비대와 접촉하여 도노다 참모를 넘겨주었다.

키스카 섬 수비대가 I-7 호의 보급품을 회수하기 위하여 바지선 2척을 보낼 예정이라는 걸 알게 된 세키구치 대위는 자신들을 바지선에 실어 I-7 호에 실어달라고 부탁했다.

I-7 호로 돌아온 승무원들은 21일 하루종일 모내헌의 포탄에 의하여 구멍이 난 함교를 용접으로 떼우는 등 I-7 호의 수리에 매달렸다.

 

그 결과 저녁 6시 45분에 밀물이 들어오자 다시 잠수함을 띄울 수 있었으나 잠항은 불가능했다. 

I-7 호는 거트루더 협만으로 들어가 바지선들이 미처 다 옮기지 못한 보급품들과 전사자들의 시체를 내려놓았다.

이때 키스카 섬에 주둔 중이던 제51해군통신대의 파견대는 바라무시로와 통신할 수 있도록 I-7 호에 일본해군의 암호인 JN-25b 암호책을 두 권 주었다.

I-7 은 22일 0시에 키스카를 떠났다.

 

22일 오전 0시 35분, 키스카 섬 주변을 떠나지 않고 있던 미국 구축함 모내헌은 13,000m 거리에서 레이더로 다시 I-7 호를 발견하고 접근하여 오전 1시 30분부터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당시 해상에는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으나 모내헌은 레이더 조준으로 정확한 사격을 가하여 I-7 의 함교와 후방 밸러스트 탱크에 명중탄을 기록했다.

이때 세키구치 대위가 부상을 입고 기관장 한다 마사오 대위가 사망했으므로 포술장 신도 유시오 중위가 지휘권을 이어받았다.

모내헌은 10분 만에 포격을 중단했다.

 

오전 2시 10분에 모내헌은 조명탄을 발사하여 I-7 의 위치를 확인하더니 다시 포격을 시작했다.

2시 18분에 모내헌의 포탄 1발이 I-7 호의 조타 엔진 중 하나를 파괴하자 I-7 호는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키스카 섬으로 되돌아섰다.

I-7 호는 140mm 갑판포 70발과 기관총탄 2,000 발을 발사하며 저항했으나 모내헌의 함수에 약간의 생채기를 내는데 그쳤다.

 

(I-7 호와의 교전에서 가벼운 상처를 입은 모내헌의 함수)

 

잠시 후 모내헌의 포탄 1발이 I-7 호의 갑판에 쌓아두었던 140mm 포탄에 명중하여 화재를 일으켰고, 다른 1발은 좌현 후방 밸러스트 탱크에 명중하여 I-7 호는 왼쪽으로 30도 정도 기울어졌다.

오전 2시 30분, 신도 중위는 전속력으로 키스카 섬으로 도망치라고 명령했다.

모내헌은 좌초를 염려하여 추적하지 않았다.

 

오전 3시 15분, 침몰 직전의 I-7호는 베가만에 겨우 좌초했는데, 함미 쪽이 순식간에 물에 잠기면서 함수 약 15m 만이 물 밖으로 나왔다.

승무원들 중 약 2/3 가 함수 쪽으로 탈출하는데 실패하여 사망했고 귀중한 암호책이 들어있던 가방도 함미 구역에 남겨졌다.

오전 6시 30분에 일본군 주정이 다가와 생존자 43명을 구조했는데 10명은 부상을 입은 상태였으며, 부상자 중 1명은 끝내 사망했다.

I-7 에서는 통틀어 87명이 사망했다.

일본군은 폭약으로 물 밖에 나와 있던 I-7 호의 함수 부분을 폭파시켰다.

 

다음날인 6월 23일에 일본잠수부들이 해중에 잠긴 I-7 호의 함체에 접근하여 귀중한 암호책을 찾으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미군이 키스카 섬을 탈환한 후 1943년 9월 7일에 구조함 플로리칸이 미드웨이로부터 키스카 섬에 도착하여 I-7 호를 철저히 조사했다.

미해군 잠수부들은 1달 간의 노력 끝에 I-7 호의 내부로 들어가 귀중한 암호책을 비롯한 기밀 서류들을 입수하는데 성공했다.

 

I-7 호의 상실을 마지막으로 일본해군은 잠수함을 사용한 키스카 철수를 포기했다.

이제 제5함대사령관 가와세 시로 중장은 과달카날에서처럼 수상함대를 투입한 해상철수에 모든 희망을 걸 수 밖에 없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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