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키스카 탈환
일본군이 키스카를 탈출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던 미해군은 상륙을 앞두고 키스카 섬에 일련의 포격을 가했다.
1943년 7월 30일, 구축함 패러것과 헐이 일본군 주둔지에 200 발의 5인치 포탄을 쏟아 부었다.
8월 2일에는 구형전함 2척(아이다호, 테네시), 중순양함 2척(솔트레이크시티, 인디애나폴리스), 경순양함 3척(리치먼드, 디트로이트, 랠리), 구축함 9척으로 이루어진 함대가 키스카 섬에 14인치 고폭탄 120발, 8인치 고폭탄 250발, 6인치 고폭탄 605발 그리고 5인치 포탄 1,337발, 합계 185톤의 포탄을 발사했다.
이후로도 상륙일인 8월 15일까지 구축함 6척(애브너리드, 에일윈, 패러것, 헐, 모내헌, 펠프스)가 교대로 매일 키스카 섬을 포격하여 합계 994발의 5인치 포탄을 쏟아부었다.
12일에는 다시 중순양함 2척(솔트레이크시티, 인디애나폴리스), 경순양함 3척(리치먼드, 디트로이트, 랠리), 구축함 5척이 키스카 섬을 포격했다.
오전 7시12분부터 33분까지 21분간 지속된 포격에서 미함대는 8인치 포탄 85발, 6인치 포탄 450발, 그리고 5인치 포탄 1,072발 등 총 60톤의 포탄을 퍼부었다.
제11육군항공대도 공습을 실시했다.
8월 2일에 날씨가 맑아지자 제11육군항공대는 B-24 폭격기 8대, B-25 쌍발폭격기 9대, P-38전투기 8대를 투입하여 해군의 포격과 발맞추어 키스카 섬을 폭격했다.
8월 4일에는 134회 출격하여 152톤의 폭탄을 키스카 섬에 쏟아부었다.
8월 5일과 6일은 그때까지의 폭격을 평가하는 시간을 가지느라 폭격을 중단했으며, 이후 날씨가 나빠져서 4일간 폭격을 중단했다.
8월 10일부터 날씨가 좋아지자 제11육군항공대는 폭격을 재개하여 상륙일인 15일까지 모두 355톤의 폭탄을 키스카 섬에 투하했다.
쿠릴 열도 폭격도 실시되었다.
8월 11일에 B-24 폭격기 9대가 쿠릴 열도로 날아가서 가타오카 해군기지와 가시와바라 육군기지를 폭격했다.
저번과 달리 이번에는 치열한 대공포화와 함께 약 40대의 제로기, 2식 수상전투기 및 하야부사 전투기들이 요격하여 B-24 폭격기 9대 중 2대가 격추되고 3대가 피해를 입었다.
일본전투기들은 5대가 격추되었다.
그동안 미군이 키스카 섬에서 이상한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8월 6일에 열린 제11육군항공대의 폭격평가회에서 키스카 항을 찍은 사진 몇장이 주목을 끌었다.
8월 2일과 4일의 폭격과정 중에 촬영된 이 사진에서는 키스카 항 주위에 일본군 트럭들이 완전히 노출된 상태로 모여 있었다.
이전에 일본군 트럭은 섬의 곳곳에 주의깊게 분산되어 잘 은폐되어 있어서 공중촬영으로는 그 존재를 알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데 8월 2일에 찍은 사진에는 트럭들이 모두 키스카 항 주위에 완전히 노출된 상태로 모여 있었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틀 뒤의 찍은 사진에도 똑같은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는 점이었다.
수상한 점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미군의 통신부대는 7월 28일 이후로 키스카 섬의 통신소에서 발신하는 무선통신을 전혀 잡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해안에 바짝 다가가서 매일같이 포격을 가한 구축함들은 전혀 반격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적의 기지에서 아무런 움직임도 발견할 수 없었다.
제11육군항공대의 조종사들도 8월 들어서 키스카 섬의 일본군 대공포화가 거의 무시할만큼 약해졌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북태평양군 사령관 토머스 킨케이드 중장은 이러한 의문에 답을 찾기 위하여 본격적인 상륙 이전에 소규모의 정찰대를 상륙시키는 방안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그러나 육군항공대의 조종사들은 일본군의 대공포화가 약해졌지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했으며 심지어는 도망치는 일본군을 기총소사했다는 전투기 조종사의 보고까지 있었다.
홀랜드 스미스 해병소장은 육군조종사들의 보고를 믿을 수 없다면서 정찰대 파견을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결국 킨케이드 중장은 정찰대 파견을 포기했다.
무엇보다 어설프게 정찰대를 상륙시켰다가 일본군에게 생포되기라도 하면 8월 15일로 예정된 상륙작전에 큰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키스카 섬 상륙부대는 애투 섬의 경우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찰스 콜렛 소장이 지휘하는 지상부대의 규모는 제7보병사단을 중심으로 5,300 명의 캐나다 제13보병여단을 포함하여 34,426명에 달했다.
지상부대는 툰드라 지형에 익숙해지기 위하여 승함하기 직전까지 애닥 섬에서 전투훈련을 강도높게 실시하고 있었다.
록웰 소장이 95척에 달하는 키스카 침공함대를 지휘했다.
수송함대는 공격수송함(APA) 4척, 병력수송함(AP) 10척, 화물수송함(AKA 및 AK) 4척, 고속수송함(APD) 1척, 전차상륙함(LST) 14척, 보병상륙정(LCI) 9척, 전차상륙정(LCT) 19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구형전함 3척, 중순양함 1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19척이 수송함대의 호위 및 화력지원을 담당했고, 이외에 경량기뢰부설함 2척, 고속소해함 3척, 예인선 3척, 수로측량함 1척이 포함되어 있었다.
부대를 직접 지휘하는 주요 지휘관들 이외에도 제4군 사령관이자 서부방어사령관인 존 드윗 중장, 존 맥클로이 전쟁성 차관, 그리고 홀랜드 스미스 해병소장 등이 옵저버로 참관할 예정이었다.
(애닥 섬에 집결해 있는 키스카 침공함대)
키스카 침공함대는 금요일인 1943년 8월 13일에 애닥 섬을 출항하여 15일 새벽에 키스카 섬에 도달했다.
소해함이 수로를 청소하자 구형전함, 순양함 및 구축함들이 일본군 기지를 포격했다.
일본군을 기만하기 위하여 다음날 키스카 섬의 북쪽 서해안에 상륙예정인 캐나다 제13 보병여단을 실은 수송함 5척이 커트루드 협만 바깥쪽에 정박했고 이어서 오전 7시 30분부터 거트루드 협만 내로 위장한 어뢰정 5척이 진입했다.
이 어뢰정들은 판자로 씌워 위장했는데 이 판자에는 실제 크기로 정교하게 병사들을 그려넣어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병력이 가득 타고 있는 상륙주정처럼 보였다.
주력인 제7보병사단은 키스카 섬 중부의 서해안에 상륙했다.
최초 상륙은 오전 8시 21분이었으며 오전 8시 40분까지 3,000 여명의 병력이 상륙하여 깊이 4,000m 의 교두보를 확보했고, 10시까지는 7,200 여명이 장비 및 보급품들과 함께 상륙해 있었다.
다음날에는 키스카 섬 북부의 서해안에 캐나다 제13보병여단을 중심으로 한 7,000 여명의 병력이 상륙했다.
(키스카 탈환전. 원본은 여기로)
미군과 캐나다군은 8월 17일에 키스카 항에 있는 일본군 기지 부근에서 합류했다.
상륙부대는 이어서 일본군 기지 내로 쳐들어 갔는데 자욱한 안개 속에서 아군끼리 수많은 오인 사격이 발생하여 21명의 사망자와 31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날 밤에 해상에서도 커다란 피해가 있었다.
8월 18일 오전 1시 34분에 구축함 애브너리드가 일본군이 설치한 기뢰에 접촉했다.
기뢰의 폭발로 5번 포탑 후방의 함체가 떨어져 나가 물 속에 가라앉았다.
더욱 나쁜 것은 연막탄 보관탱크가 터지면서 연막이 새어나와 수많은 승무원들이 질식사한 것이었다.
살아남은 승무원들의 응급처치로 겨우 침몰을 모면한 애브너리드는 동료 구축함 뱅크로프트에게 이끌려 애닥 섬으로 향했다.
애닥 섬에서 긴급수리를 받은 애브너리드는 본격적인 수리를 위하여 미본토 서해안 브레머튼의 퓨젯사운드 조선소까지 가야만 했다.
애브너리드에서는 70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으며 47명이 부상을 입었다.
(함체 후방이 떨어져 나간 상태로 퓨젯사운드 조선소에 도착한 DD-526 애브너리드)
키스카 섬에서는 텅 빈 일본군 기지를 장악한 미군과 캐나다군의 정찰대가 며칠 동안 키스카 섬을 샅샅이 훑었으나 일본군은 단 1명도 없었다.
1943년 8월 22일 오전 11시 50분, 북태평양군 사령관 토머스 킨케이드 중장은 키스카 섬의 탈환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리하여 35,000 명에 달하는 미국-캐나다 연합군은 일본군이 버려둔 개 4마리를 생포하는 전과를 올리면서 키스카 섬을 탈환했다.
제11육군항공대는 키스카 상륙 이후 항복을 권유하는 전단 10만 장을 뿌렸으나 불행하게도 이 개들은 글을 읽지 못했다.
이로써 일본군은 1942년 6월에 애투 섬과 키스카 섬에 상륙한 이래 1년 2개월 만에 알류샨 열도에서 완전히 쫓겨났다.
애투 섬 수비대는 전멸했으며 키스카 섬 수비대는 귀중한 무기와 장비 및 보급품들을 모두 놓아두고 몸만 빠져나왔다.
일본해군은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둘러싼 전투에서 구축함 3척, 잠수함 6척, 수송선 9척을 상실했다.
그러나 일본은 알류샨 열도에서 결코 손해본 장사를 한 것이 아니었다.
1942년 6월 초에 아무런 어려움 없이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장악한 이래 일본군은 1만명 미만의 병력과 약간의 함정 및 항공기를 투입하여 미국 함대와 제11육군항공대 그리고 많은 병력들을 전략적으로 별로 가치가 없는 북태평양에 1년 이상 붙잡아 두는데 성공했는데 키스카 섬 탈환 당시에는 그렇게 붙잡혀 있던 미군 병력이 10만명을 넘었다.
만일 남태평양군 사령관 헐지 제독이 애투 섬과 키스카 섬 탈환에 동원된 병력과 함정들의 일부만이라도 지원받았다면 뉴조지아 섬 점령을 빨리 마무리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이 함정들과 병력들의 일부라도 당시 미군 보급선의 끝에 매달린 채 일본군과 악전고투를 거듭하고 있던 맥아더 장군의 남서태평양지역군에 돌려졌다면 후온 반도 전투를 좀 더 수월하게 치를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은 다시 미국의 품으로 돌아왔고 미국 국민들은 이제 본토의 일부를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다는 불쾌한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합동참모본부에서는 힘들게 탈환한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의 본전을 뽑기 위하여 1943년 9월 7일에 바라무시로 공략을 토의했으나 직접 부대를 이끌었던 지휘관들의 의견을 들어본 뒤 18일에 포기했다.
무엇보다 1943년 11월에 길버트 제도 공략이 예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바라무시로 공략에 필요한 병력을 빼낼 곳이 없었다.
또한 바라무시로 공략은 향후 홋카이도 침공을 전제로 할 때에만 의미가 있었는데 홋카이도 침공은 영국이 절대 반대하고 있었다.
만일 소련이 대일전에 참가한다면 바라무시로 공략은 충분히 의미가 있었으나 1943년 9월의 시점에서 소련은 일본과 전쟁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일본은 다시는 알류샨 열도를 넘볼 생각도 없었고 그럴 여력도 없었다.
실제로 대본영은 키스카 탈출이 성공한 직후인 1943년 8월 4일에 북방방면군을 폐지했으며 제5함대와 제12항공함대를 북동방면 함대로 통폐합하고 사령관에 도즈카 중장을 임명했다.
가와세 중장이 지휘하는 북동방면 함대의 수상함 세력은 중순양함 1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6척, 수송선 7척과 약간의 소형 함정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는 쿠릴 열도의 방어에 필요한 최소한의 수준이었다.
1943년 11월의 충격 작전을 앞두고 알류샨 열도의 미군은 전반적으로 축소되었으며 지휘관들도 이동했다.
9월 11일에 데븐포트 존슨 소장이 버틀러 소장의 뒤를 이어 제11육군항공대 사령관이 되었다.
제11육군항공대는 세력이 삭감되었고 임무도 가끔씩 쿠릴 열도에 견제 공격을 하는 정도로 축소되었다.
북태평양군 사령관 토머스 킨케이드 중장은 1943년 10월 11일에 맥아더 해군이라고 불리던 남태평양지역군의 제7함대 사령관으로 옮겼고 플레처 중장이 뒤를 이었다.
이 방면에서 특기할만한 해군의 활동이라면 1944년 2월 2일에 와일더 베이커 소장이 지휘하는 경순양함 2척(리치먼드, 랠리)과 구축함 7척이 쿠릴 열도를 포격한 사건 정도였다.
이후 종전시까지 알류샨 열도에서는 전쟁사가의 관심을 끌만한 사건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이 지역에서의 군사적인 활동은 주로 미군의 간헐적인 쿠릴 열도 공습과 드물게 감행되는 일본군의 애투, 키스카 및 애닥 섬에 대한 소규모 보복공습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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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웹사이트
http://blog.naver.com/mirejet (도위창 님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naljava69 (쿵디담 님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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