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애투 탈환전(3) - 접근
애투 섬에 상륙할 제7보병사단의 병력들은 1943년 4월 21일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승선을 시작했다.
진짜 목적지를 숨기기 위하여 몇몇 기만조치가 취해졌다.
제7사단의 군의관들은 열대질병에 대하여 강의를 들었으며 작전에 참가하는 장교들이 북대서양의 항로나 아르헨티나의 상황에 대하여 연구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준비과정에서 미군은 한가지 실수를 했다.
애투 섬 전투가 별다른 어려움없이 3일이면 끝날 것이라고 낙관한 제7보병사단장 앨버트 브라운 소장이 방한의류 및 등산장비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등한히 한 것이었다.
애투 섬 공격부대는 1943년 5월 1일에 콜드베이에 입항했는데 이날 콜드베이에는 얼어붙는 듯한 추위가 찾아와서 방한의류가 없는 상륙부대의 고생을 예고하는 듯 했으나 이제 와서 대량의 방한의류를 확보할 시간은 없었다.
콜드베이에서 북태평양군 사령관 토머스 킨케이드 제독을 비롯한 고위 지휘관들은 한데 모여 가장 최근에 들어온 정보를 토대로 작전계획을 점검하고 수정했다.
그동안 제11육군항공대는 키스카 섬을 공습하고 있었다.
1943년 4월 첫주에는 시속 180km 가 넘는 강풍이 일주일 내내 몰아치는 바람에 알류샨 열도에서 비행기들이 뜰 수가 없었다.
4월 8일에 폭풍우가 그치고 맑은 날이 이어지자 제11육군항공대는 일본군의 키스카 점령 이래 가장 치열한 공습을 가하기 시작했다.
애투 상륙 기도를 알아채지 못하도록 애투 섬은 거의 공습하지 않았다.
제11육군항공대는 4월에 226대의 비행기를 동원하여 키스카에 1,145회 출격했는데 애투 섬에는 30회만 출격했다.
키스카 섬에서 가까운 앰치트카의 비행기들은 여건이 허락하는 한 하루에 최대 8번까지 출격했다.
4월 8일부터 21일까지 2주일 동안 키스카 섬은 매일 최소한 60 소티 이상의 공습을 받았다.
제11육군항공대는 4월 15일에 112 소티를 출격하여 12시간 동안 92톤의 폭탄을 키스카에 떨어뜨렸다.
키스카 섬의 일본항공력이 전멸했기 때문에 앰치트카에 진출한 P-38 및 P-40 전투기들도 모두 폭탄을 달고 키스카를 폭격했다.
앰치트카의 전투기들이 사용한 폭탄은 다양했다.
기본적으로 P-38 전투기는 227kg 짜리 폭탄 2발, P-40 전투기는 227kg 짜리폭탄 1발과 9kg 짜리 파편폭탄 또는 소이탄 6발을 달고 출격했으나 가끔씩 450kg 짜리나 136kg 짜리 폭탄도 사용했다.
안전을 위하여 저공 폭격에 집착하지는 않았으나 구름이 낮게 끼어있는 날은 기습적으로 저공 폭격을 실시하여 막사나 레이더 등을 정확하게 맞추었다.
폭탄을 떨어뜨린 전투기들은 막사, 대공포, 그리고 건설 중이던 활주로 등을 기총소사했다.
4월 8일 - 21일 사이에 앰치트카에서는 키스카 섬을 목표로 전투기들이 685회 출격하여 216톤의 폭탄을 떨어뜨렸고, 쌍발 폭격기 및 중폭격기들이 288회 출격하여 506톤의 폭탄을 떨어뜨렸다.
이 과정에서 제11육군항공대의 P-40 전투기 1대와 B-24 폭격기 1대가 일본군의 대공포에 맞아 격추되었고 이외에도 전투기 9대를 비전투 손실로 잃었다.
4월 말이 되자 제11육군항공대는 점차 애투 섬에 대한 폭격을 늘리기 시작했다.
앰치트카의 P-38 전투기들이 애투 섬을 폭격하고 사진을 찍었으며 항속거리가 짧은 P-40 전투기는 계속 키스카 섬을 폭격했다.
애투 섬 상륙을 앞둔 10일 동안 제11육군항공대는 애투 섬에 95톤, 키스카 섬에 155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그동안 해군제4초계비행단의 벤츄라 정찰기와 카탈리나 정찰비행정들은 애투 섬 서쪽을 초계하면서 일본함정의 접근을 감시했고 맥모리스 소장과 기펜 소장의 순양함 부대가 애투 서쪽 해상을 순찰했다.
4월 10일에 일본구축함 2척이 애투 섬 보급을 시도하다가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으로부터 폭격을 받았다.
폭탄은 빗나갔으나 일본구축함들은 애투 섬 돌입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PV-1 벤츄라 정찰기. 자세한내용은 여기로)
4월 말이 되자 일본제5함대사령관 가와세 시로 중장은 미국의 목표가 애투 섬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안개가 짙어지는 5월 말에 애투 섬의 방어를 강화하려고 마음먹었으나 미군은 그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1943년 5월 4월 아침에 록웰 소장의 공격부대가 악천후 때문에 예정보다 24시간 늦게 콜드베이를 출항했는데 파도가 높아서 전함의 주포에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앙각을 최대한 높여야 했다.
29척으로 이루어진 공격부대는 알류샨 열도의 남쪽을 따라 항해하다가 세괌 섬과 아묵타 섬 사이의 아묵타 해협을 통하여 베링 해로 들어간 다음 키스카 섬을 북쪽으로 통과하여 애투 섬 북방 185km 지점에 도달했다.
상륙 예정일인 5월 7일에 정찰기들이 애투 섬을 정찰했는데 파도가 너무 심해서 상륙이 불가능했으므로 록웰 소장은 상륙을 9일로 이틀 늦추었다.
(알류샨 열도. 출처 : http://www.ibiblio.org/hyperwar/AAF/IV/maps/AAF-IV-17.jpg 에서 일부 발췌)
해상에서 대기하는 동안 일본함대의 출현에 대비하여 구형전함 3척을 중심으로 한 지원전단이 서쪽으로 나아가 초계선을 펼쳤으나 일본함정과 접촉하지 못했다.
당시 애투 섬 서쪽 해상에서는 가벼운 호위를 받는 일본의 수송기모함 기미카와마루가 수상정찰기 몇 대를 애투로 날려보내기 위하여 접근했는데 초계선의 남쪽을 통과했기 때문에 미군 전함에 포착되는 불운은 피했다.
8일이 되자 파도가 너무 높아서 전함의 40mm 대공포좌까지 파도가 그대로 들이쳤다.
록웰 소장은 상륙일을 11일로 다시 이틀간 늦추고 해상급유를 실시했다.
9일부터는 안개가 끼기 시작하여 10일에 초계를 마친 전함들이 상륙함대와 합류할 때쯤에는 레이더를 사용하여 서로의 위치를 확인해야만 했다.
마침내 공격부대는 남하 준비를 시작했는데 안개는 점점 더 짙어졌다.
남하를 위하여 진형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구형의 SC 레이더를 장비한 구축함형 소해함 시카드는 레이더를 믿지 못하고 앞선 함정의 항적을 따라 갔는데 이윽고 갑판에서 해면이 안 보일 정도로 안개가 짙어지자 스톱워치를 사용하여 위치를 추정하면서 항해했다.
그러다가 결국 시카드는 구축함 맥도너휴를 들이받고 말았다.
다행히 부상자는 없었으나 2척 다 항구로 돌아가야만 했다.
시카드는 상륙주정의 길잡이 역할을 맡고 있었고 맥도너휴는 사격통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이 2척의 부재는 보기보다 큰 손실이었다.
예정보다 3시간 늦게 공격부대는 안개를 헤치고 애투 섬을 목표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상륙예정시간은 1943년 5월 11일 오전 10시 40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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