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애투 탈환전(1) - 애투 섬
알류샨 열도의 끝에 있는 애투 섬은 동서로 약 64km, 남북으로 최대 약 32km 정도의 크기이다.
바다에서 상륙하면 좁은 해안에 이어 바로 600m - 900m 높이의 산봉우리로 연결되며, 그 사이를 작은 개울들이 흐르고 있다.
바위투성이의 지형은 전반적으로 험하고 황량하며 계곡 바닥은 흑토 위에 이끼류가 자라는 툰드라로 깔려 있다.
거의 일년 내내 단단하게 얼어있는 알래스카나 캐나다의 툰드라와는 달리 이곳의 툰드라는 많은 기간 동안 사람이 겨우 걸어다닐 정도로 물렁거리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알래스카나 캐나다 내륙보다 추위는 덜하지만 대신 한치 앞도 보기 힘들 정도로 짙은 안개가 끼는 날이 많다.
애투 섬의 동쪽 끝은 3개의 반도가 뻗어나와서 4개의 만을 이루고 있다.
북쪽 반도는 홀츠 만과 사라나 만을 분리하고, 치리코프 곶까지 뻗은 중간 반도는 사라나 만과 매서커 만을 구분하며, 남쪽 반도는 매서커 만과 템낙 만을 분리한다.
(애투 섬의 동쪽 부분 출처 : http://www.loran-history.info/Attu/Attu_island_2096dpi.jpg 에서 일부 발췌)
북쪽의 홀츠 만에서부터 남쪽의 템낙 만에 이르기까지 해안에서는 양쪽에 수직의 벽을 가진 계곡들이 대략 서쪽으로 뻗다가 산악 지대에 부딪혀 사라진다.
해안에서 폭이 약 1.6km 정도인 메서커 계곡은 곧 두개로 갈라지는데 동부 메서커 계곡을 따라가면 동쪽의 사라나 만에서 이어지는 시덴스 계곡으로 넘어갈 수 있고, 더 올라가면 약 180m 높이의 고갯길에서 홀츠 계곡의 동쪽 분지와 연결된다.
미군은 원래 애투 섬보다 키스카 섬을 먼저 침공할 예정이었다.
키스카 섬은 애투 섬보다 가까울 뿐 아니라 더 좋은 항구와 비행장 부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키스카 섬의 방어가 애투 섬보다 훨씬 엄중하다는 사실이었는데 여기에 더하여 미군이 키스카 섬의 방어력은 실제보다 과대평가하고 반대로 애투 섬의 방어력은 과소평가하면서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의 운명이 엇갈리게 되었다.
미군이 키스카 섬 침공계획을 본격적으로 짜기 시작한 것은 1942년 12월부터였다.
서부방어사령관 드윗 중장은 키스카 상륙을 위하여 1개 보병사단을 주축으로 한 25,000 명의 병력을 요구했다.
그러나 키스카 수비대의 병력을 10,000 명으로 추산하고 있던 니미츠 제독은 키스카 침공에 최소한 보병사단 2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문제는 보병사단 2개를 동원하기가 만만찮다는 점이었다.
니미츠 제독이 병력을 어디서 빼올 것인지 궁리하는 동안에도 작전준비는 착착 이루어졌다.
1943년 1월에는 프랜시스 록웰 소장이 북태평양상륙군 사령관(Commander Amphibious Force North Pacific)으로 임명되어 킨케이드 제독 지휘 하에 상륙작전을 총괄하게 되었다.
키스카 상륙부대는 앨버트 브라운 소장의 제7사단으로 결정되었으며 여기에 제184보병연대와 1개 대공포 연대가 추가되었다.
이들 상륙부대는 2월 초부터 샌프란시스코 부근의 포트오드에 모여 홀랜드 스미스 해병소장의 지휘 하에 상륙훈련을 받았다.
그동안 제11육군항공대는 키스카를 폭격했으나 1월에는 날씨가 나빠서 폭탄을 10.5 톤 밖에 투하하지 못했다.
하지만 2월이 되자 앰치트카 상륙과 날씨의 호전에 힘입어 폭탄 투하량이 크게 늘어났다.
2월에 제11육군항공대는 9일에 걸쳐 24번 공습을 가하여 약 150톤을 투하했고 3월에도 비슷한 양을 투하했다.
1943년 2월이 되어 상륙부대가 본격적인 상륙훈련에 돌입했을 때 키스카 상륙에 사용할 병력과 수송함을 시일 내로 구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니미츠 제독이 원한 2개 보병사단은 커녕 드윗 중장이 요구했던 25,000 명의 상륙부대를 실을 수송함도 시기에 맞추어 준비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2월 18일에 애투 섬을 포격했던 맥모리스 제독의 함대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았다고 보고하자 키스카 섬보다 방어가 약한 애투 섬에 먼저 상륙하자는 의견이 급속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1943년 3월 초에 북태평양군 사령관 킨케이드 소장이 서부방어사령관 드윗 중장에게 키스카 섬 대신 방어가 약한 애투 섬에 먼저 상륙하자고 제의했다.
킨케이드 제독은 사진 정찰 결과 애투 섬의 방어병력은 3개 소총중대, 약 500 명으로 추산되며 이정도 규모의 수비대는 1개 보병연대와 1개 포병대대만 상륙시키면 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알래스카 방어사령관 버크너 소장도 이 견해를 지지했다.
이정도의 병력을 수송하는 데에는 공격수송함(APA) 4척과 화물수송함(AKA) 2척이면 충분했다.
일단 애투 섬을 점령하고 거기에 비행장을 건설하면 동쪽의 키스카 섬은 그야말로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될 것이었다.
드윗 중장의 지지를 얻은 킨케이드 제독은 3월 3일에 애투 상륙안을 니미츠 제독에게 제출했다.
1943년 3월 10일에 킹 제독이 니미츠 제독에게 키스카 상륙을 연기하거나 취소하라고 권고하자 니미츠 제독은 기다렸다는 듯이 애투 상륙안을 들이밀었다.
이 제안이 마음에 들었던 킹 제독은 마셜 장군에게 동의를 얻어내었다.
3월 21일에 합동참모본부는 향후 태평양 전구에서 애투 섬 상륙을 최우선으로 하기로 결정했고 다음날
"가능한 한 빨리"
("as soon as practicable")
애투 섬에 상륙하라는 합동참모본부의 정식 명령이 니미츠 제독에게 떨어졌다.
1943년 3월 22일을 기하여 북태평양군의 상륙목표가 키스카 섬에서 애투 섬으로 바뀌었으나 이러한 목표의 변경이 상륙작전 준비에 큰 어려움이나 혼란을 초래하지는 않았다.
샌디에이고에 있는 록웰 제독의 사령부에서는 변경된 목표에 맞추어 애투 섬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면서 제7사단 사령부와 함께 전술 수준의 자세한 계획 수립에 들어갔다.
계획 수립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애투 섬의 지형을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애투 섬은 19세기 중엽부터 미국 영토였지만 미군은 애투 섬에 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었으며 당시 사용가능한 지도는 1934년에 그린 지도로서 이 지도는 해안에서 900m 떨어진 해상에서 관찰하고 그린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수십년간 미해군은 조난 사고 방지를 위하여 애투 섬에서 4km 이내로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미해군은 애투 섬 부근의 수로에 대해서도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일본군이 애투 섬을 점령한 후 제11육군항공대의 항공기들이 여러 장의 사진을 찍어왔지만 구름이 끼어 있는 날이 많아서 빠진 부분이 많았다.
애투 섬 상륙은 키스카 섬 상륙을 예상하고 있는 일본군에 대한 일종의 기습이기 때문에 사진을 찍기 위하여 애투 섬에 너무 빈번하게 항공기를 보낼 수도 없었다.
미군은 남쪽의 템낙 만과 북쪽의 홀츠 만을 포함하는 애투 섬 서쪽의 지형 모형을 만들었으나 중요한 이동로나 헨더슨 능선 및 홀츠 만 서쪽은 거의 표시할 수 없었다.
정확한 지형을 몰랐으므로 미군은 애투 섬 상륙작전시 주공과 조공의 상륙 위치 및 상륙 순서에 따라 A, B, C, D. E 라고 이름붙인 다섯 가지 안을 준비하여 현장 지휘관이 필요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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