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코만도르스키 해전(1)
1943년 3월 26일에 벌어진 코만도르스키 해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여러나라의 해군이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생각했던 미래의 해전모습과 비슷했다.
두함대는 대낮에 3시간 30분 동안 쉬지 않고 서로 13km - 19km 의 간격을 두고 포격전을 벌였으며 항공세력이나 잠수함은 개입하지 않았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교전에 참가한 함대의 규모가 작았으며 서로 치명타를 가하는데 실패했다는 것 정도였다.
리치먼드에 승좌한 찰스 맥모리스 소장의 미국함대는 중순양함 1척(솔트레이크시티), 경순양함 1척(리치먼드), 구축함 4척(베일리, 코글란, 데일, 모내헌)으로 이루어져 애투 섬 동쪽 해상을 초계하고 있었다.
미함대의 핵심 함정은 중순양함 솔트레이크시티였다.
솔트레이크시티는 1942년 10월 11일-12일에 걸쳐 벌어진 에스퍼란스 해전에서 8인치 포탄 2발을 얻어맞고 진주만의 건선거에서 5개월 동안 수리와 개장을 받았다.
그 기간 동안 솔트레이크시티의 승무원들 중 절반 가량이 훈련소를 갓 나온 신병들로 교체되었으므로 코만도르스키 해전 당시 솔트레이크시티의 승무원들 중 절반 가량은 실전경험이 없었다.
1943년 3월 초에 건선거를 나선 솔트레이크시티는 3월 11일에 북태평양군에 배속될 때까지 1주일 밖에 훈련할 시간이 없었다.
그 기간 동안 함장 버트램 로저스 대령은 함포사격훈련을 집중적으로 실시했다.
북태평양군에 편입된 직후 솔트레이크시티의 조타기능에 문제가 발견되었다.
유압계통에 문제가 생겨 만일 큰 충격이 가해지면 키에 동력을 전달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당시 솔트레이크시티는 수리를 위하여 건선거에 들어갈 처지가 아니었다.
솔트레이크시티의 승무원들은 할 수 없이 주정용 소형디젤엔진 하나를 얻어서 예비로 준비해 두었다.
이 조타기능의 문제가 코만도르스키 해전에서 골칫거리로 등장하게 된다.
(CA-25 솔트레이크시티. 배수량 : 11,000톤, 길이 : 178m, 폭 : 19.9m, 출력 : 107,000마력, 속력 : 32.7노트, 승무원 : 1,200명, 무장 : 8인치 포 10문, 5인치 양용포 4문, 수상기 4대, 캐터펄트 2대)
미함대와 대결한 일본제5함대는 나치에 승좌한 호소가야 보시로 제독의 지휘 하에 중순양함 2척(나치, 마야), 경순양함 2척(다마, 아부쿠마), 그리고 구축함 4척(와카바, 하츠시모, 이가즈치, 이나즈마)으로 이루어져 미함대보다 훨씬 강력했다.
일본제5함대는 애투 섬 증원병력을 싣고 있던 7,000 톤 급의 고속수송선 아사카마루와 사키토마루를 호위하고 있었다.
일출 1시간 전인 3월 26일 오전 7시 30분에 미함대는 애투 섬에서 동쪽으로 290km, 코만도르스키 제도에서 남쪽으로 160km 떨어진 해상에 있었다.
함대는 동쪽으로 달리다가 북쪽으로 변침했는데 선두인 코글란부터 리치먼드, 베일리, 데일은 차례대로 변침했지만 5번째인 솔트레이크시티가 늦게 변침하는 바람에 솔트레이크시티와 모내헌은 본대로부터 남동쪽으로 약 12km 정도 뒤처졌다.
이렇게 미함대는 2개의 함렬로 나뉜 채 15노트 속력으로 북쪽으로 항진했다.
이날의 구름 고도는 약 750m 이고 시정은 10km 이상에 달하여 알류샨 해역에서는 좋은 날씨였다.
(코만도르스키 해전 상황도. 출처 : Aleutians, Gilberts and Marshalls, P28)
1943년 3월 26일 오전 7시 52분, 미함대의 수병들이 막 아침식사를 끝냈을 무렵 함대의 레이더가 북쪽 13km - 19km 에 걸쳐 단종진으로 항해하는 적함대를 발견했다.
리치먼드의 레이더 담당 장교는 화면에 나타난 적함대의 구성을 경순양함1척, 수송선 2척, 구축함 2척으로 정확하게 추정했다.
맥모리스 제독은 즉시 전투배치명령을 내리고 두개의 함렬을 하나로 합쳤다.
이 과정에서 함정의 순서가 약간 바뀌어서 선두는 베일리가 되었고, 이어서 코글란, 리치먼드, 솔트레이크시티, 데일, 모내헌의 순서로 단종진을 형성했다.
오전 8시가 넘어가자 불길한 징조가 나타났다.
미함대의 레이더에 중순양함으로 의심되는 대형함정 2척을 포함한 5척의 함영이 더 나타나서 적함대의 숫자는 10척이 되었다.
그러나 맥모리스 제독은 물러나지 않고 정면대결을 펼치기로 결심했다.
호소가야 제독의 일본제5함대는 미함대가 자신들을 발견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미함대를 발견했다.
사키토마루의 견시가 오전 7시 52분에 남쪽에서 다가오는 미함대를 발견하고 보고했다.
당시 일본함대는 미리 출발했던 저속의 수송선 산코마루 및 호위를 맡은 구축함 1척과 만나기 위하여 북쪽으로 항진하던 중이었는데 기함 나치를 선두로 마야, 다마, 와카바, 하츠시모, 아부쿠마, 이가즈치, 아사카마루, 사키토마루, 그리고 이나즈미의 순으로 단종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일본함대의 진형은 사령관이 전투에 앞장선다는 일본해군의 전통에 충실한 진형이었지만 실전에서 몇 가지 불리한 점이 있었다.
우선 함포의 사정거리가 긴 중순양함들이 앞장섬으로서 특히 포격전의 초기에 뒤따르던 경순양함과 구축함들의 화력을 적절하게 활용하기 어려웠고 또한 구축함들이 뒤쪽에 처져 있어서 전투 초반에 과감하게 앞으로 뛰쳐나가면서 무서운 산소어뢰를 발사하는 전법을 구사하기가 불편했다.
포격전을 중시하는 미해군의 경우 단종진을 구성할 때에는 주포의 사정거리가 짧은 구축함들을 선두에 내세우고 그 뒤로 경순양함, 중순양함의 순서로 뒤따라감으로서 포격전이 벌어졌을 때 초기에 함대의 모든 화력을 동시에 투사할 수 있도록 배치했다.
그런 면에서 볼때 미함대의 배치도 포격전에 이상적인 상태는 아니었지만 일본함대보다는 훨씬 나았다.
일본함대는 미함대를 발견하자 즉시 우현으로 크게 변침하여 남동쪽으로 침로를 바꾸었고 수송선 2척은 그대로 북상했다.
맥모리스 제독은 자신의 목표가 일본수송선들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처음에는 그대로 북상하여 수송선들을 공격한 후 고속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호소가야 제독이 수송선들을 북쪽으로 빼돌리고 남하했으므로 이런 계획은 실현가능성이 없어졌다.
맥모리스 제독은 물러서지 않고 일전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미함대는 수상정찰기를 발진시키려 했으나 급유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일본함대의 나치는 1대의 수상정찰기를 발진시켰으나 이 정찰기는 미함대의 강력한 대공사격에 겁을 집어먹고 구름 속으로 숨어버린 데다가 통신 상태도 불량하여 일본함대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선제공격은 일본함대가 실시했다.
오전 8시 40분, 선두의 나치가 18,000m 거리에서 리치먼드를 겨냥하여 8인치 주포로 사격을 시작했다.
나치는 2번째 일제사격에서 리치먼드에 대한 협차에 성공했다.
(CL-9 리치먼드.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그러나 그때 리치먼드 뒤에서 나타난 솔트레이크시티를 발견한 호소가야 제독은 자신이 8인이 포를 가진 적의 중순양함 대신 6인치 포를 가진 적의 경순양함을 먼저 공격하는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일본함대는 목표를 솔트레이크시티로 바꾸었고 나치는 8시 46분에 어뢰 8발을 발사했으나 거리가 너무 멀어서 모두 빗나갔다.
호소가야 제독은 동시에 휘하의 수뢰전대에게 공격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따라 8시 47분에 아부쿠마가, 48분에 다마가 우현으로 90도 꺾어서 미함대에 접근했는데 이때 일본구축함들은 공격적으로 뇌격을 가하지 않았다.
구축함 4척 중 와카바와 하츠시모는 아부쿠마를 따라 함렬을 뛰쳐나왔으나 이가즈치와 이나즈미는 다마의 뒤를 따르지 않고 그냥 마야와 나치의 뒤를 따라다녔다.
와카바와 하츠시모 또한 함렬에서 뛰쳐나온 이후 아부쿠마의 뒤를 따라다닐 뿐 적극적으로 미함대에 접근하여 뇌격을 가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구축함들이 미함대에게 접근하여 뇌격을 가하지 않은 이유는 불분명하다.
확실한 것은 이것으로 일본함대는 전투 초기에 근거리에 접근한 구축함이 무서운 산소어뢰를 뿌린다는 유력한 카드 하나를 사장시켰다는 점이다.
우세한 일본함대와의 거리가 좁혀지자 부담을 느낀 맥모리스 제독은 오전 8시 45분에 좌측으로 크게 변침하여 일본함대와의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
그러자 일본함대도 오른쪽으로 변침하여 미함대를 추격했다.
그동안 솔트레이크시티는 일본중순양함들과 포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나치와 마야가 포격의 목표를 리치먼드에서 솔트레이크시티로 바꾸는 동안 포격의 주도권은 솔트레이크시티가 쥐게 되었다.
솔트레이크시티는 일본함대보다 2분 늦은 8시 42분에 18,000m 거리에서 나치를 목표로 포격을 시작했다.
2번째 일제사격에서 나치에 대한 근거리 협차에 성공한 솔트레이크시티는 3번째 일제사격에서 2발, 4번째 일제사격에서 1발의 명중탄을 기록했다.
8시 50분에 나치를 강타한 2발의 명중탄 중 1발은 함교의 통신을 끊어버렸고 다른 1발은 함교 부근의 우현에 떨어져 몇 명의 사망자와 10명 이상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2분 후 3번째 명중탄이 어뢰발사관에 명중하여 추가 피해를 입혔으며 지근탄이 바로 옆에 떨어져 함교를 바닷물로 흠뻑 적셨다.
교전 거리가 약 15,000m 에 달하고 솔트레이크시티의 승무원들 중 절반 가량이 첫 출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썩 괜찮은 명중율이었다.
이때 갑자기 나치가 포격을 중지했으므로 솔트레이크시티는 나치가 치명타를 입었다고 생각하고 목표를 마야로 바꾸었다.
그런데 사실 나치가 포격을 중단한 이유는 조작실수로서 누군가 축전지에 충분한 전기가 충전되기 전에 발전기의 터빈을 돌리던 증기를 너무 일찍 메인터빈으로 전환시켜 버린 것이었다.
축전지에 충전되었던 전기가 바닥나자 나치의 주포들이 최대 앙각에서 멈추어버렸다.
나치가 원인을 찾아내어 다시 포격을 시작할 때까지 거의 30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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