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애투 섬 포격
1943년 2월 중순 경에 잠수함 S-28이 애투섬으로 향하는 일본선단을 확인하고 보고했다.
북태평양군 사령관 토머스 킨케이드 소장은 전투함대를 지휘하던 찰스 맥모리스 소장에게 함대를 이끌고 가서 애투섬을 포격하고 일본선단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경순양함 리치먼드에 승좌한 맥모리스 제독은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 및 구축함 4척을 이끌고 2월 18일에 정오 경에 북쪽으로부터 애투섬에 접근했다.
알류샨 열도에서는 드물게 애투 섬의 날씨는 맑았다.
(애투 섬)
미함대는 단종진을 형성하고 오른쪽으로 홀츠 만을 보면서 서서히 남동쪽으로 항진했는데 홀츠 만과 치차고프 항에는 일본 선박이 없었다.
오후 2시 50분에 치차고프 항의 동쪽에서 180도 변침한 미함대는 이번에는 치차고프 항을 왼쪽으로 보면서 북상했다.
일본군의 주둔지인 치차고프항 주위는 위장을 잘 해서 함상에서는 하얀 눈 밖에 보이지 않았다.
탄착관측기들은 버려진 참호와 포좌를 발견했을 뿐이었으나 앞선 항공정찰의 결과로는 여기에 일본군의 기지가 있는 것이 확실했다.
맥모리스 소장은 포격을 명령했고 이어서 일제사격이 가해졌으나 일본군의 반격은 전혀 없었다.
홀츠만 북쪽에 도달한 미함대는 다시 180도 전환하여 이번에는 해안에 바짝 접근하여 우현으로 일제사격을 가했는데 역시 일본군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남하하면서 홀츠만 및 치차고프항 주위를 포격한 미함대는 오후 4시 37분에 포격을 마치고 북서쪽으로 물러갔다.
이날의 포격으로 애투 섬에서는 23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건물 1동이 부서졌다.
애투섬 포격을 마친 맥모리스 소장은 함대를 둘로 나누어 애투섬으로 접근 중이라고 알려진 일본선박들을 수색했다.
인디애나폴리스의 함장 비틀라실 대령은 구축함 코글란 및 길레스피와 함께 애투섬 남서쪽 190km 해상에 초계선을 폈다.
그날 밤에 인디애나폴리스는 탄약을 가득 싣고 애투섬으로 접근하던 3,100톤 짜리 아카가네마루를 수평선에서 발견하고 전속력으로 다가갔다.
아카가네마루에서 인디애나폴리스를 발견하고는 일본어로 전문을 보내왔다.
인디애나폴리스는 6,100m 거리에서 8인치 주포로 일제사격을 가하여 3번째 일제사격에 명중탄을 기록했다.
아카가네마루는 싣고 있던 탄약이 유폭하면서 어마어마한 폭발을 일으켰다.
비틀라실 대령은 빨리 끝장내기 위하여 구축함 2척에게 뇌격을 명령했다.
코글란이 먼저 다가가서 3발의 어뢰를 발사했다.
첫번째 어뢰는 정상적으로 아카가네마루의 아랫 쪽을 통과했으나 어뢰의 자기감응신관이 작동하지 않았다.
두번째 어뢰는 미처 도달하기도 전에 폭발해 버렸고 세번째 어뢰는 선미 쪽으로 빗나갔다.
이어서 길레스피가 다가가서 3발의 어뢰를 발사했다.
첫번째 어뢰는 불발이었고 두번째 어뢰는 마치 돌고래처럼 방향을 잃고 사방으로 헤매고 다니다가 빗나갔고 세번째 어뢰는 다가가기도 전에 폭발해버렸다.
코글란과 길레스피의 승무원들은 이따위 어뢰를 가지고 작전하는 잠수함 승무원들의 좌절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코글란과 길레스피는 근거리에서 5인치 함포로 집중사격을 퍼부어 19일 오전 1시 24분에 아카가네마루를 격침했다.
아카가네마루의 뒤를 따르던 2척의 수송선은 운좋게 미함대에게 들키지 않고 일본으로 도망침으로서 싣고 있던 병력과 장비 및 보급품을 전달하지는 못했지만 목숨은 건졌다.
애투섬의 포격에 관하여 보고를 들은 킨케이드 제독은 애투섬의 방어가 허약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공중정찰과 맥모리스 소장의 보고에 따르면 애투섬에는 비행장과 해안포가 없었으며 대공포는 빈약했다.
당시 북태평양해역군은 먼저 키스카섬에 상륙하기 위하여 준비를 진행시키고 있었으나 최대 1만명으로 예상하고 있던 키스카섬 수비대를 제압할만한 병력과 장비 및 보급품, 그리고 수송함들을 1943년 7월이 되기 전에 확보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거기다가 9월이 되면 상륙작전이 힘들어지기 때문에 7월과 8월에 키스카 섬과 애투 섬에 연속적으로 상륙하기에는 시간이 빠듯했다.
그런데 키스카섬에 비하면 애투섬은 방어가 허술하여 이미 준비되어 있는 병력 중 일부만을 사용하여 충분히 탈환할 수 있고 필요한 수송함의 숫자도 훨씬 적었다.
게다가 애투섬을 장악하고 그곳에 비행장을 건설하면 키스카섬을 완전히 고립시켜 일본군의 증원을 차단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킨케이드 제독은 서부방어사령관 드윗 장군과 의논한 후 키스카섬보다 애투섬에 먼저 상륙하겠다는 내용의 제안을 1943년 3월 3일에 니미츠 제독에게 제출했다.
니미츠 제독은 이 제안을 킹 제독에게 전달했고 1943년 3월 22일에 합동참모본부는 니미츠 제독에게 애투섬에 먼저 상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상륙예정일은 안개가 많이 끼는 6월이 되기 전인 1943년 5월 7일로 결정했다.
(알류샨 열도. 출처는 여기로)
한편 앰치트카에 진출한 제11육군항공대는 키스카섬에 맹렬한 공습을 가했다.
앰치트카의 P-40들이 3월 3일부터 키스카섬에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3월 12일부터는 폭장량이 많은 P-38 전투기 10대가 공습에 가세했다.
더하여 애닥섬의 폭격기들도 매일 키스카섬을 폭격했으므로 키스카섬은 날씨가 좋을 때에는 하루에 예닐곱번이나 공습을 받았고 날씨가 나쁜 날에도 공습을 받았다.
일본군의 반격은 미약했다.
1943년 3월 16일에 2식수상전투기 2대가 10대의 P-38 전투기와 교전하다가 격추된 것을 마지막으로 키스카섬의 항공력은 전멸했다.
애투섬과 키스카섬의 일본군들은 제5함대사령관 호소가야 제독에게 매일처럼 더 많은 병력과 무기 및 보급품을 요청했다.
보급함대가 3월 9일에 바라무시로를 출항했으나 미군의 봉쇄를 뚫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호소가야 제독은 1943년 3월 22일에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4척 및 수송선 2척을 이끌고 다시 바라무시로를 출항하여 애투섬으로 향했다.
일본함대의 출항을 눈치챈 미군이 요격을 위하여 함대를 파견함으로써 코만도르스키 해전이 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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