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코만도르스키 해전(2)
나치가 포탑의 전력 고갈 때문에 일시적으로 전투에서 이탈하자 이제 전투의 초점은 솔트레이크시티와 마야 사이의 포격전으로 옮겨졌다.
두 중순양함은 서로 상대방의 포탄을 피하기 위하여 지그재그 항행을 하면서 포격전을 벌였고 오전 9시 7분에 마야가 8발의 어뢰를 발사했으나 빗나갔다.
오후 9시 10분 마야의 8인치 포탄이 솔트레이크시티의 우현에 있던 정찰기에 명중하면서 2명이 사망하고 불이 났다.
승무원들이 불타는 정찰기를 바다에 던지고 불을 껐다.
잠시 후 포탑의 전력을 회복한 나치가 포격에 가담하자 솔트레이크시티는 다시 나치와 포탄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9시 20분에 나치와 솔트레이크시티는 약 22,000m 거리에서 동시에 서로를 맞추었다.
그 직후 미군 구축함의 5인치 포탄 1발이 럭키샷을 기록했다.
이 5인치 포탄은 나치의 1번 포탑 조준창으로 들어가서 포탑 내에서 폭발하면서 포탑 내의 인원을 몰살시켰고 나치는 1번 포탑에서 엄청난 연기를 뿜어내면서 해상에 정지했다.
(일본군의 8인치 연장포탑. 2번이 조준창이다. 출처 : Naval Weapons of WW2, P.185)
나치가 엄청난 연기를 뿜어내면서 해상에 멈추는 것을 본 맥모리스 제독은 이 기회를 타서 일본수송선들을 공격하기 위하여 9시 26분에 북쪽으로 변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9시 30분부터 나치는 1번 포탑을 제외한 나머지 포탑으로 사격을 개시하면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윽고 마야 및 2척의 구축함과 함께 미함대를 맹렬하게 뒤쫓기 시작했다.
호소가야 제독은 가장 큰 위협인 솔트레이크시티에 공격을 집중했다.
(코만도르스키 해전 상황도. 출처 : Aleutians, Gilberts and Marshalls, P27)
북상하면서 뒤쫓아오는 나치 및 마야와 교전하던 솔트레이크시티는 갑자기 우현 전방 17,000m 거리에서 경순양함 다마를 발견했다.
다마가 뇌격을 가하기 위하여 접근 중이라고 판단한 솔트레이크시티의 함장 로저스 대령은 목표를 다마로 바꾸어 맹렬한 일제포격을 가했다.
미함대와 일본수송선 사이를 가로막으라는 명령을 받고 있던 다마는 솔트레이크시티로부터 갑작스런 집중사격을 받고 깜짝 놀라서 180도로 되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다마는 잠시 후 다시 180도로 변침하여 전장에 돌아왔지만 솔트레이크시티의 기세에 눌려 나치와 마야의 뒤만 따라다니면서 전투가 끝날 때까지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기습적인 일제사격으로 우전방에서 얼쩡거리던 다마를 쫓아낸 솔트레이크시티는 다시 뒤쫓아오는 나치 및 마야와 교전했는데 속력에서 우세한 나치와 마야는 오전 10시 경에 18,000m 이내로 접근했다.
나치와 마야가 솔트레이크시트를 협차하는데 성공한 오전 10시 2분에 갑자기 솔트레이크시티의 키가 작동을 멈추었다.
원래부터 시원찮았던 솔트레이크시티의 조향 장치가 몇발의 명중탄으로 충격을 받자 말썽을 일으킨 것이었다.
승무원들이 미리 준비해두었던 예비 디젤엔진을 재빨리 연결했지만 그래도 솔트레이크시티의 키는 좌우로 10도 정도 밖에 움직이지 못했다.
이때 북쪽에 있던 일본군의 경순양함 아부쿠마는 오전 10시 7분에 미함대에 대하여 2발의 어뢰를 발사했으나 거리가 멀어 빗나갔다.
이윽고 나치와 마야는 거리를 좁히면서 솔트레이크시티에게 무시무시한 포탄의 비를 퍼부었다.
오전 10시경부터 약 10분 동안 솔트레이크시티의 사방 50m 이내에 약 200 발의 포탄이 떨어졌는데 기적적으로 명중탄은 오전 10시 10분에 고낙각으로 떨어진 8인치 철갑탄 1발 뿐이었다.
이 포탄은 솔트레이크시티의 주장갑판을 뚫고 들어와서는 폭발하지 않고 수선하의 함체를 뚫고 다시 빠져나갔다.
포탄이 빠져나간 자리로 침수가 시작되자 함장 로저스 대령은 솔트레이크시티가 위기에 빠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키가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데 이제 침수까지 시작되었으니 나치와 마야에게 따라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로저스 대령의 구조요청을 접한 맥모리스 소장은 수송선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포기해야만 했다.
맥모리스 제독의 명령에 따라 미함대는 침로를 240도로 바꾸어서 남서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으며 구축함 베일리와 코글란은 오전 10시 18분부터 솔트레이크시티를 감추기 위하여 연막을 쳤다.
일본함대는 계속 접근하면서 연막 사이로 흘낏흘낏 솔트레이크시티의 모습이 보일 때마다 포격을 가했으나 명중탄을 내지 못했다.
하지만 속력에서 우세한 일본함대와의 거리가 계속 줄어들자 맥모리스 소장은 오전 11시에 남쪽으로 변침했다.
이제 함대의 선두는 리치먼드였고 약 2,700m 뒤에 솔트레이크시티가 뒤따르고 있었으며 구축함 4척은 솔트레이크 주위에서 연막을 피워 솔트레이크시티의 모습을 가리고 있었다.
솔트레이크시티가 남쪽으로 변침하면서 잠깐 모습이 드러나자 다시 나치와 마야가 포격을 시작했고 11시 3분에 솔트레이크시티는 4번째이자 마지막 명중탄을 맞았다.
이 포탄 또한 폭발하지 않고 후방 자이로컴퍼스실과 후방 보일러실을 관통하여 함체 밖으로 빠져 나갔고 그 결과 후방 보일러실이 침수되었다.
후방 보일러실의 승무원들이 1.2m 깊이의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침수와 싸우는 동안에도 증기는 계속 공급되어 솔트레이크시티는 전속력으로 달아날 수 있었다.
문제는 침수된 물을 퍼내기 위하여 3번 기관의 냉각오일 순환용 모터를 배수펌프에 전용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이었다.
냉각오일의 순환이 멈추면 기관은 약 20분 밖에 가동하지 못한다.
일본함대는 다시 뇌격을 실시했다.
마야가 11시 5분에 4발, 나치가 7분에 8발, 아부쿠마가 15분에 2발의 어뢰를 발사했으나 거리가 멀고 각도가 나빠서 1발도 명중시키지 못했다.
오전 11시 25분, 침수 때문에 약 5도 좌현으로 기울어진 채로 전속력으로 달아나던 솔트레이크시티의 3번 기관이 멈추면서 속력이 20노트로 떨어졌다.
침수와 싸우느라 냉각오일을 순환시키던 3번 기관의 모터를 배수펌프에 전용한 결과였다.
솔트레이크시티의 속력이 떨어지자 일본함대는 급격히 거리를 좁혀와서 11시 35분 경에는 일본함대의 선두가 불과 2,700m 거리까지 접근했다.
솔트레이크시티는 급히 3번 기관의 냉각모터를 냉각 오일 순환에 복귀시켰고 11시 38분부터 솔트레이크시티는 다시 최고 속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솔트레이크시티는 11시 48분에 뒤쫓던 나치에게 포탄 1발을 명중시켰다.
일본구축함 와카바가 1시 49분에 6발, 하츠시모가 54분에 5발의 어뢰를 발사했으나 빗나갔다.
오전 11시 50분, 솔트레이크시티에 최악의 위기가 닥쳐왔다.
솔트레이크시티의 기울기를 바로잡기 위하여 좌현 밸러스트 탱크의 바닷물을 우현 밸러스트 탱크로 옮기려던 승무원이 실수로 좌현 밸러스트 탱크를 연료파이프와 연결해버린 것이었다.
대량의 바닷물이 연료에 섞여서 보일러에 공급되자 각 보일러들의 불이 금방 꺼졌고 11시 54분에 솔트레이크시티는 해상에 멈추었다.
이때 나치와 마야는 솔트레이크시티의 오른쪽 후방 17,000m 거리에 있었고 왼쪽 후방에서는 아부쿠마와 구축함2척이 접근하고 있었으며 구축함들은 곧 어뢰의 유효사정 이내로 들어올 것이었다.
해상에 멈추어버린 솔트레이크시티가 살아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이때 맥모리스 제독은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맥모리스 제독은 솔트레이크시티와 합류하기 위하여 기함 리치먼드를 되돌리면서 구축함 베일리, 코글란, 모내헌에게 일본함대를 뇌격하라고 명령했다.
구축함 데일은 리치먼드와 함께 솔트레이크시티 주변에 머물면서 연막을 피워 솔트레이크시티가 해상에 멈추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연막 안으로 뛰어드는 일본함정들을 공격하며 여차하면 솔트레이크시티의 승무원들을 구조할 준비를 했다.
데일을 제외한 미함대의 구축함 3척은 베일리를 선두로 연막을 뚫고 뛰쳐나가 5인치 함포를 난사하면서 전속력으로 일본함대에게 돌진했다.
갑자기 연막에서 뛰쳐나와 함포를 난사하면서 전속력으로 돌진해오는 3척의 구축함을 발견한 나치와 마야는 깜짝 놀라서 모든 화력을 선두의 베일리에게 집중시켰다.
일본군의 포탄 1발이 베일리의 주방에 명중하여 5명의 전사자를 기록했으나 베일리와 2척의 구축함들은 포격을 가하면서 계속 돌진하다가 12시 3분에 베일리가 5발의 어뢰를 발사했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베일리가 어뢰를 발사하는 순간 나치가 서쪽으로 방향을 틀더니 이어서 일본함대가 줄줄이 서쪽으로 변침하기 시작했다.
일본함대가 전투를 포기한 것이었다.
후방에서의 어뢰공격이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익히 아는 맥모리스 소장은 베일리를 뒤따르던 코글란과 모내헌의 어뢰공격을 중단시켰다.
곧이어 12시 4분에 일본함대는 포격을 중단했다.
호소가야 중장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던 전투를 일방적으로 중단해 버린 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호소가야 중장은 솔트레이크시티가 해상에 멈춘 사실을 몰랐다.
당시 해상은 미함대가 피운 연막이 자욱하여 시계가 제한되었다.
일본군에서 솔트레이크시티의 상태를 알고 있던 것은 나치에서 발진한 수상정찰기 뿐이었는데 하필이면 무전기가 고장나서 이 사실을 보고할 수 없었다.
둘째로는 공습에 대한 부담감이었다.
키스카 섬에서 지척인 앰치트카에 미군이 진출한 상황에서 호소가야 중장은 언제든지 미군 항공기가 공습을 가해올 수 있다고 믿었다.
코만도르스키 해전에서 솔트레이크시티는 푸른 물감을 포함한 철갑탄을 사용했는데 철갑탄을 다 쏘고나자 물감을 포함하지 않은 고폭탄을 발사했다.
호소가야 제독은 물감이 없는 고폭탄의 낙하를 보고 미군 항공기들이 구름 위에서 떨어뜨리는 폭탄이라고 착각했다.
세번째로는 함정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호소가야 중장이 이끌고 있던 제5함대는 북태평양군과 마찬가지로 일본해군 내에서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처지였다.
따라서 코만도르스키 해전에 참가한 함정들이 사실상 그가 가진 전부였으며 만일 여기서 함정들을 상실하거나 건선거에 들어가야 할만큼 큰 피해를 입으면 보충받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런데 나치는 이미 몇발의 명중탄을 얻어맞은 상태였고 재수없게도 구축함의 5인치 포탄으로 인하여 1번 포탑 내부가 아수라장이 되는 등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연막에서 뛰쳐나와 맹렬히 달려드는 미군 구축함들을 보자 그는 전의를 상실했다.
계속 전투를 진행하다가 재수없이 나치나 마야가 큰 피해라도 입어 속력이라도 뚝 떨어지는 날이면 미군항공기의 밥이 되기 딱 좋으며 만일 살아남아도 일본본토에 있는 건선거에 들어가버리면 보충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미군 구축함들이 필사적으로 반격을 가하는 동안 솔트레이크시티는 재빨리 기관이 멈춘 이유를 깨닫고 연료에서 바닷물을 제거한 다음 보일러를 재가동시키고 있었다.
11시 58분에 전방 기관이 재가동되면서 속력을 15노트까지 회복했고 12시 9분에는 후방 기관까지 가동되면서 속력이 23노트까지 올랐으며 잠시 후 30노트 이상의 최고 속도를 회복했다.
이로써 솔트레이크시티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살아났다.
12시 12분에 리치먼드가 포격을 중단하면서 코만도르스키 해전이 끝났다.
참가 함정의 규모와 소모된 탄약에 비하면 인명피해는 양측 모두 가벼운 편이었다.
미함대는 베일리에서 5명, 솔트레이크시티에서 2명, 합계 7명의 전사자와 7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일본함대는 14명의 전사자와 27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는데 부상자 1명을 제외한 피해는 모두 나치에서 발생했다.
미함대는 솔트레이크시티가 8인치 포탄 832발, 리치먼드가 6인치 포탄 271발을 발사했으며 순양함들의 부포와 구축함들이 발사한 5인치 및 3인치 포탄은 합계 2,314발이었다.
구축함 모내헌은 일본정찰기를 향하여 40mm 포탄 48발을 발사했으며 베일리가 어뢰 5발을 발사했다.
일본함대는 나치가 707발, 마야가 904발 등 1,611발의 8인치 포탄을 발사했고 아부쿠마가 95발의 140mm 포탄을 발사했으며 다마가 발사한 140mm 포탄의 수는 불명이다.
130mm 포탄의 발사 수는 나치가 276발, 마야가 9발, 하츠시모가 6발이며, 와카바도 발사했는데 정확한 포탄 숫자는 불명이다.
산소어뢰는 나치가 16발, 마야가 8발, 아부쿠마와 다마가 각각 4발씩, 와카바가 6발, 하츠시모가 5발로 합계 43발이다.
코만도르스키 해전이 끝났을 때 솔트레이크시티의 후방 기관실은 섭씨 -2도의 바닷물이 1.5m 깊이로 들어차 있었으므로 더치하버로 돌아오는 도중 솔트레이크시티의 승무원들은 섭씨 0도의 추운 날씨에 차가운 바닷물에 흠뻑 젖은 채 보수작업을 해야만 했다.
그러자 함장 로저스 대령은 추위를 견디면서 일해야만 하는 승무원들을 위하여 더치하버에 도착할 때까지 식사 때마다
"의학적 목적으로"
알코홀을 1잔씩 제공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하여 전 승무원들을 환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포탄에 주방을 직격당한 베일리의 승무원들은 더치하버에 도착할 때까지 차가운 햄과 크래커, 그리고 사과쥬스로 연명해야만 했다.
제11육군항공대는 코만도르스키 해전 당시 개입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맥모리스 제독으로부터 접촉보고가 들어왔을 당시 애닥 섬의 모든 폭격기들은 키스카 섬 폭격을 위하여 주로 사람 상대로 효과적인 소형 고폭탄들을 장비하고 있었으므로 철갑탄으로 교체가 필요했다.
또한 육군항공대는 중폭격기 뿐만 아니라 쌍발폭격기도 함께 내보내어 폭격효과를 높이고 싶어했고 킨케이드 제독도 동의했는데 그러려면 쌍발폭격기에 증가연료탱크를 장착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고폭탄들을 철갑탄으로 바꾸고 쌍발폭격기에 증가연료탱크를 부착하는데 4시간이 걸렸다.
이 작업이 끝나자 2시간 동안 눈보라가 몰아쳐 시계가 0으로 떨어졌다.
6시간 만에 겨우 이륙한 폭격기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상황이 종료된 다음이었다.
앰치트카 섬에서도 폭격 시도가 있었다.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2대가 오전 8시 44분에 아사카마루와 사키토마루를 발견했는데 곧 접촉을 잃어버렸다가 오후 2시 10분에 다시 발견했다.
발견장소는 앰치트카에서 720km 떨어진 곳이라 B-25 쌍발폭격기에 증가연료탱크를 장착하느라 출격이 늦어졌다.
가까스로 B-25 쌍발폭격기 3대가 출격했으나 일본수송선들을 찾지 못했다.
이후 제11육군항공대 사령관 위리엄 버틀러 소장은 6대의 B-25 쌍발폭격기에 항상 증가연료탱크와 철갑탄을 장비해 두어 언제든지 적의 함선이 나타나면 출격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코만도르스키 해전에서 양 함대는 서로에게 치명타를 먹이는데 실패했으나 맥모리스 제독은 호소가야 제독의 애투 섬 증원시도를 좌절시켰다.
일본제5함대와 동행했던 아사카마루와 사키토마루는 물론 먼저 출발했던 저속의 산코마루도 애투 섬에 도달하지 못하고 바라무시로로 돌아갔으며 이후 일본해군은 애투와 키스카에 대한 보급을 주로 잠수함에 의지했다.
따라서 어느 기준으로 보아도 코만도르스키 해전은 미해군의 승리였다.
일본 언론은 코만도르스키 해전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했지만 이어진 조치를 보면 일본 자신도 패배를 인정하고 있었다.
일본해군은 코만도르스키 해전 직후인 1943년 3월 28일에 제5함대 사령관 호소가야 보시로 제독을 해임하여 예편시키고 후임에 가와세 시로 중장을 임명했다.
나치가 수리를 위하여 사세보로 가서 1달간 건선거에 들어앉아 있어야 했으므로 가와세 중장의 기함은 중순양함 마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