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애투 탈환전(3) - 접근  

 

애투 섬에 상륙할 제7보병사단의 병력들은 1943년 4월 21일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승선을 시작했다.

진짜 목적지를 숨기기 위하여 몇몇 기만조치가 취해졌다.

제7사단의 군의관들은 열대질병에 대하여 강의를 들었으며 작전에 참가하는 장교들이 북대서양의 항로나 아르헨티나의 상황에 대하여 연구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준비과정에서 미군은 한가지 실수를 했다.

애투 섬 전투가 별다른 어려움없이 3일이면 끝날 것이라고 낙관한 제7보병사단장 앨버트 브라운 소장이 방한의류 및 등산장비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등한히 한 것이었다.

애투 섬 공격부대는 1943년 5월 1일에 콜드베이에 입항했는데 이날 콜드베이에는 얼어붙는 듯한 추위가 찾아와서 방한의류가 없는 상륙부대의 고생을 예고하는 듯 했으나 이제 와서 대량의 방한의류를 확보할 시간은 없었다. 

 

콜드베이에서 북태평양군 사령관 토머스 킨케이드 제독을 비롯한 고위 지휘관들은 한데 모여 가장 최근에 들어온 정보를 토대로 작전계획을 점검하고 수정했다.

 

그동안 제11육군항공대는 키스카 섬을 공습하고 있었다.

1943년 4월 첫주에는 시속 180km 가 넘는 강풍이 일주일 내내 몰아치는 바람에 알류샨 열도에서 비행기들이 뜰 수가 없었다.

4월 8일에 폭풍우가 그치고 맑은 날이 이어지자 제11육군항공대는 일본군의 키스카 점령 이래 가장 치열한 공습을 가하기 시작했다.

애투 상륙 기도를 알아채지 못하도록 애투 섬은 거의 공습하지 않았다.

제11육군항공대는 4월에 226대의 비행기를 동원하여 키스카에 1,145회 출격했는데 애투 섬에는 30회만 출격했다.

키스카 섬에서 가까운 앰치트카의 비행기들은 여건이 허락하는 한 하루에 최대 8번까지 출격했다.

 

4월 8일부터 21일까지 2주일 동안 키스카 섬은 매일 최소한 60 소티 이상의 공습을 받았다.

제11육군항공대는 4월 15일에 112 소티를 출격하여 12시간 동안 92톤의 폭탄을 키스카에 떨어뜨렸다. 

키스카 섬의 일본항공력이 전멸했기 때문에 앰치트카에 진출한 P-38 및 P-40 전투기들도 모두 폭탄을 달고 키스카를 폭격했다.

 

앰치트카의 전투기들이 사용한 폭탄은 다양했다.

기본적으로 P-38 전투기는 227kg 짜리 폭탄 2발, P-40 전투기는 227kg 짜리폭탄 1발과 9kg 짜리 파편폭탄 또는 소이탄 6발을 달고 출격했으나 가끔씩 450kg 짜리나 136kg 짜리 폭탄도 사용했다.

안전을 위하여 저공 폭격에 집착하지는 않았으나 구름이 낮게 끼어있는 날은 기습적으로 저공 폭격을 실시하여 막사나 레이더 등을 정확하게 맞추었다. 

폭탄을 떨어뜨린 전투기들은 막사, 대공포, 그리고 건설 중이던 활주로 등을 기총소사했다.

4월 8일 - 21일 사이에 앰치트카에서는 키스카 섬을 목표로 전투기들이 685회 출격하여 216톤의 폭탄을 떨어뜨렸고, 쌍발 폭격기 및 중폭격기들이 288회 출격하여 506톤의 폭탄을 떨어뜨렸다. 

이 과정에서 제11육군항공대의 P-40 전투기 1대와 B-24 폭격기 1대가 일본군의 대공포에 맞아 격추되었고 이외에도 전투기 9대를 비전투 손실로 잃었다. 

 

4월 말이 되자 제11육군항공대는 점차 애투 섬에 대한 폭격을 늘리기 시작했다.

앰치트카의 P-38 전투기들이 애투 섬을 폭격하고 사진을 찍었으며 항속거리가 짧은 P-40 전투기는 계속 키스카 섬을 폭격했다.

애투 섬 상륙을 앞둔 10일 동안 제11육군항공대는 애투 섬에 95톤, 키스카 섬에 155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그동안 해군제4초계비행단의 벤츄라 정찰기와 카탈리나 정찰비행정들은 애투 섬 서쪽을 초계하면서 일본함정의 접근을 감시했고 맥모리스 소장과 기펜 소장의 순양함 부대가 애투 서쪽 해상을 순찰했다.

4월 10일에 일본구축함 2척이 애투 섬 보급을 시도하다가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으로부터 폭격을 받았다.

폭탄은 빗나갔으나 일본구축함들은 애투 섬 돌입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PV-1 벤츄라 정찰기. 자세한내용은 여기로)

 

4월 말이 되자 일본제5함대사령관 가와세 시로 중장은 미국의 목표가 애투 섬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안개가 짙어지는 5월 말에 애투 섬의 방어를 강화하려고 마음먹었으나 미군은 그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1943년 5월 4월 아침에 록웰 소장의 공격부대가 악천후 때문에 예정보다 24시간 늦게 콜드베이를 출항했는데 파도가 높아서 전함의 주포에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앙각을 최대한 높여야 했다.

29척으로 이루어진 공격부대는 알류샨 열도의 남쪽을 따라 항해하다가 세괌 섬과 아묵타 섬 사이의 아묵타 해협을 통하여 베링 해로 들어간 다음 키스카 섬을 북쪽으로 통과하여 애투 섬 북방 185km 지점에 도달했다.

상륙 예정일인 5월 7일에 정찰기들이 애투 섬을 정찰했는데 파도가 너무 심해서 상륙이 불가능했으므로 록웰 소장은 상륙을 9일로 이틀 늦추었다.

 

(알류샨 열도. 출처 :  http://www.ibiblio.org/hyperwar/AAF/IV/maps/AAF-IV-17.jpg 에서 일부 발췌)

 

해상에서 대기하는 동안 일본함대의 출현에 대비하여 구형전함 3척을 중심으로 한 지원전단이 서쪽으로 나아가 초계선을 펼쳤으나 일본함정과 접촉하지 못했다.

당시 애투 섬 서쪽 해상에서는 가벼운 호위를 받는 일본의 수송기모함 기미카와마루가 수상정찰기 몇 대를 애투로 날려보내기 위하여 접근했는데 초계선의 남쪽을 통과했기 때문에 미군 전함에 포착되는 불운은 피했다.

 

8일이 되자 파도가 너무 높아서 전함의 40mm 대공포좌까지 파도가 그대로 들이쳤다.

록웰 소장은 상륙일을 11일로 다시 이틀간 늦추고 해상급유를 실시했다.

9일부터는 안개가 끼기 시작하여 10일에 초계를 마친 전함들이 상륙함대와 합류할 때쯤에는 레이더를 사용하여 서로의 위치를 확인해야만 했다.

 

마침내 공격부대는 남하 준비를 시작했는데 안개는 점점 더 짙어졌다.

남하를 위하여 진형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구형의 SC 레이더를 장비한 구축함형 소해함 시카드는 레이더를 믿지 못하고 앞선 함정의 항적을 따라 갔는데 이윽고 갑판에서 해면이 안 보일 정도로 안개가 짙어지자 스톱워치를 사용하여 위치를 추정하면서 항해했다.

그러다가 결국 시카드는 구축함 맥도너휴를 들이받고 말았다.

다행히 부상자는 없었으나 2척 다 항구로 돌아가야만 했다.

시카드는 상륙주정의 길잡이 역할을 맡고 있었고 맥도너휴는 사격통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이 2척의 부재는 보기보다 큰 손실이었다.

 

예정보다 3시간 늦게 공격부대는 안개를 헤치고 애투 섬을 목표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상륙예정시간은 1943년 5월 11일 오전 10시 40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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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애투 탈환전(2) - 준비  

 

애투 섬을 지키던 일본군은 야마자키 야스오 대좌가 지휘하는 제303독립보병대대가 주력이었으며 1942년 가을과 겨울을 거치면서 점차 증강되어 미군의 애투 섬 상륙 당시에는 약 2,630 명규모였다. 

전투 병력의 핵심은 1개 보병대대, 75mm 대공포와 20mm 기관포를 보유한 3개 대공포대, 그리고 75mm 산포를 보유한 1개 산포중대였으며, 주요 화기는 75mm 산포 4문, 75mm 대공포 12문, 그리고 20mm 기관포 10문이었다.

그리고 공병 1개 대대가 있었는데 이들의 임무는 홀츠 만의 동쪽 계곡에 비행장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선박공병 1개 소대, 무선 1개반과 의무병들을 포함하여 육군은 약 2,500 명이었다.

해군은 에모도 소좌가 지휘하는 통신, 연락, 항공요원이 약 100명이었다.

이외에 민간인으로 야전 우편국을 운용하던 삿포로 체신분국의 사토 사무관 이하 26명과 해군보도반원 1명, 그리고 아사히 신문의 카메라맨이 있었다.

 

(애투 섬의 동쪽 부분 출처 : http://www.loran-history.info/Attu/Attu_island_2096dpi.jpg 에서 일부 발췌)

 

야마자키 대좌의 지휘소는 홀츠 만과 사라나 만 사이의 작은 만인 치차고프 항에 있었으며 일본군의 주력은 홀츠 만과 치차고프 항 부근에 집중되어 있었다.

각각 75mm 대공포 4문으로 이루어진 대공포대 3개 중 하나는 홀츠 만의 서쪽 계곡을 감제했고, 다른 하나는 동쪽 계곡을 감제했으며, 나머지 하나는 치차고프 방어선의 일부였다. 

홀츠 만과 매서커 계곡을 연결하는 고개는 75mm 산포중대가 감제하고 있었으며 그 중의 1개 소대는 매서커 계곡 자체도 감제하고 있었다.

메서커 계곡과 사라나 만을 굽어보는 길버트 능선에는 기관총좌와 박격포좌가 만들어져 있었고 매서커 계곡의 서쪽에 있는 헨더슨 능선에도 일본군의 방어진지가 구축되어 있었다.

 

미군은 홀츠 만과 치차고프 항 주위가 일본군 방어선의 중심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정찰기들이 템낙 만, 사라나 만, 그리고 매서커 계곡 입구에서 일본군의 활동을 감지했으나 능선에 잘 위장해 둔 진지들은 찾아낼 수 없었다.

북태평양군 사령관 토머스 킨케이드 제독은 처음에 애투 섬의 일본군 수비대를 3개 소총중대, 약 500 명으로 추산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군의 숫자에 대한 평가는 점점 높아져서 4월 초가 되자 1,600명 - 1,800명 선이 되었다.

 

이에 따라 포병 1개 대대의 지원을 받는 1개 연대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상륙부대의 규모도 커졌다.

애투 상륙부대는 1개 야포대대를 배속받은 제17연대전투단, 1개 야포포대를 배속받은 제2/32대대, 제7사단의 스카웃 중대와 정찰중대, 제78 해안포연대(대공), 그리고 제13 및 제50전투공병대대였다.

제32연대전투단의 나머지 병력들은 요청이 있으면 24시간 내로 투입될 수 있도록 수송함에 실린 채 애닥 섬에서 대기했다.

예비대를 포함하여 애투 상륙부대는 약 11,000 명이었다.

 

애투 섬 상륙작전을 총괄적으로 지휘하는 사람은 북태평양군 사령관 토머스 킨케이드 소장이었다.

킨케이드 소장은 애투 상륙부대와 예비대 이외에도 제11육군항공대, 보급 및 지원을 담당한 해군 함정들, 그리고 애투 섬 탈환 후에 애투 섬과 키스카 섬 사이에 있는 셰미야 섬에 상륙하여 비행장을 건설할 제4보병연대와 제18공병연대를 직접 통제했다.

 

(알류샨 열도. 출처는 여기로)

 

북태평양 상륙군 사령관 프랜시스 록웰 소장이 호위항공모함과 구형전함을 비롯한 전투함, 수송함, 소해함들과 상륙부대를 통제했으며 일단 상륙이 이루어지면 제7보병사단장 앨버트 브라운 소장이 상륙부대를 통제하도록 되어 있었다.

 

미해군은 애투 상륙작전에서 미래의 핵심전력인 구형전함과 호위항공모함을 최초로 투입했다.

진주만 기습 이후 전함들은 해전의 주역 자리를 항공모함에게 빼앗기면서 그 위상이 추락했다.

그나마 속력이 빠른 신형전함들은 항공모함의 호위함으로서 과달카날 전투 기간 중에도 여러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면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속력이 느린 구형전함들에게는 그런 기회조차도 주어지지 않았다.

실제로 니미츠 제독은 미드웨이 해전을 비롯한 여러 전투에서 항공모함의 호위에 구형전함을 활용하라는 킹 제독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구형전함들은 항상 예비로 후방에서 대기하면서 제2선 전력 취급을 받아왔다.

애투 섬 상륙작전에 참가한  펜실베니아, 아이다호, 그리고 네바다 또한 샌프란시스코에 정박하면서 수병들이 하도 시내를 돌아다녀

 

"마켓 가 특공대"

("Market Street Commando")

 

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었다.

펜실베니아는 진주만 기습 이후 대대적인 개장을 받아 함교를 현대화했으며 8문의 5인치 양용포와 40문의 40mm 보포스 대공포를 새로 장착하여 면모를 일신했지만 퇴물 취급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애투 섬 상륙작전 이후 구형전함들의 위상은 완전히 달라진다.

애투 섬 상륙작전에서 미해군은 구형전함들의 활약에 만족했고 이후 구형전함들은 태평양해역군의 상륙작전에서 반드시 필요한 핵심 전력으로서 여기저기서 서로 모셔가려는 귀하신 몸이 되었다.

실제로 나중에 맥아더 장군 아래에서 제7함대 사령관이 되는 킨케이드 제독은 레이테 해전이 끝난 후 태평양함대로부터 빌려온 구형전함을 돌려주지 않고 니미츠 제독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끝까지 매달린 끝에 니미츠 제독으로부터 구형전함 4척을 얻어간 적도 있었다.

 

호위항공모함 또한 애투 섬 상륙작전을 계기로 상륙작전의 총아로 거듭났다.

원래 호위항공모함은 수송선단을 호위하거나 항공기 수송이 주요 임무로서 상륙작전같은 본격적인 전투임무를 상정하고 건조한 함종이 아니었다.

그러나 미해군은 코만도르스키 해전의 경험으로부터 애투 섬 상륙작전에서 제11육군항공대가 제대로 항공지원을 해준다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으므로 애투 섬 상륙작전에 항공모함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전력이 분산된 일본제1기동부대를 격파한 이래 태평양함대는 정규 항공모함들은 모두 뭉쳐 운용하는 것을 대원칙으로 삼고 있었으므로 애투 섬 상륙작전에서는 대신 호위항공모함 나소를 투입했다.

미해군이 구형 전함과 마찬가지로 상륙작전에서 호위항공모함의 효용성에 만족함에 따라 호위항공모함 또한 수송선단을 호위하거나 항공기를 수송하는 화려하지 않은 임무만 맡다가 갑자기 상륙작전의 핵심 전력으로서 전사의 전면에 당당하게 등장하게 되었다.

호위항공모함의 인기 또한 대단하여 타라와 전투가 끝난 후 해병대는 호위항공모함 여러 척을 자신들에게 넘겨달라고 요구하여 해군을 곤란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후 태평양 함대에서는 대규모 상륙작전 시 정규항모들과 고속전함들은 고속항모기동부대를 형성하여 수송함대보다 수백 km 이상 앞서 나가면서 적의 비행장을 제압하고 상륙을 방해하려는 적의 주력함대를 쳐부수는 역할을 맡았다.

반면 구형전함과 호위항모들은 상륙 지점까지 수송함대를 호위하며 일단 상륙이 이루어지면 지원포격과 근접항공지원 및 교두보 상공 초계를 담당했다.

이렇게 상륙작전 시 고속항모기동부대와 구형전함 및 호위항공모함의 임무분담이 확실하게 자리잡게 된 계기가 바로 애투 섬 상륙작전이었다. 

 

애투 섬에 상륙하는 뭍게(Landcrab)작전에 투입된 부대들은 다음과 같다.

 

공격부대(제51임무부대) : 프랜시스 록웰 소장

 

지원전단(제51.1임무전단) : 구형전함 3척(네바다, 펜실베니아, 아이다호), 호위항공모함 1척(나소), 수상기모함 1척(윌리엄슨), 구축함 8척

함재기: 와일드캣 29대(3대는 정찰용)

 

수송전단(제51.2임무전단) : 공격수송함 4척(해리스, 제일린, 헤이우드, J. 프랭클린 벨), 고속수송함 1척(케인), 증기선 1척(페리다), 구축함 4척, 기뢰부설함 2척

 

소해전단(제51.3임무전단) : 소해함 4척(페리, 엘리엇, 챈들러, 롱)

 

상륙부대 : 제17연대전투단, 제2/32대대, 제78해안포연대(대공), 제13 및 제50전투공병대대, 제7사단 스카웃 중대와 정찰중대

 

제16임무부대 : 토머스 킨케이드 소장

 

지상발진 항공기 부대(제16.1임무그룹)

 

공습부대(제16.1.1임무유닛) : B-24 폭격기 28대, B-25 쌍발 폭격기 30대, P-38 전투기 25대, P-40 전투기 73대(28대는 캐나다공군)

공중수색부대(제16.1.2임무유닛): 벤츄라 정찰기 24대,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30대, 수상기모함 5척(카스코, 길리스, 틸, 아보셋, 헐버트)

 

알래스카 지구 방어 및 지원전단(제16.2임무그룹) : 구축함 1척, 포함 1척, 코르벳(캐나다해군) 2척, 전차상륙함 4척, 전차상륙정 8척, 소해함 4척, 기뢰부설함 1척,  예인선 1척, 대잠망설치함 2척, 연안경비정, 초계정 및 항만소해정 약간척

 

어뢰정 전단(제16.3임무그룹) : 어뢰정 11척

 

잠수함 전단(제16.5임무그룹) : 함대형잠수함 2척(나왈, 노틸러스), S 보트 11척

 

남부방어전단(제16.6임무그룹) : 경순양함 4척(롤리, 디트로이트, 리치먼드, 산타페), 구축함 5척

 

북부방어전단(제16.7임무그룹) : 중순양함 3척(위치타, 샌프란시스코, 루이스빌), 구축함 4척

 

애투 증원 부대(제16.8임무그룹) : 제2/32대대를 제외한 제32연대전투단. 공격수송함 1척(그랜트), 증기선 7척

 

급유 및 지원전단(제16.9임무그룹) : 급유함 6척, 구축함 모함 2척

 

셰마 점령부대(제16.10임무그룹) : 제4보병연대, 제18공병연대, 공격수송함 1척, 화물수송함 1척, 증기선 1척, 소형연안수송선 2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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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애투 탈환전(1) - 애투 섬 

 

알류샨 열도의 끝에 있는 애투 섬은 동서로 약 64km, 남북으로 최대 약 32km 정도의 크기이다.

바다에서 상륙하면 좁은 해안에 이어 바로 600m - 900m 높이의 산봉우리로 연결되며, 그 사이를 작은 개울들이 흐르고 있다.

바위투성이의 지형은 전반적으로 험하고 황량하며 계곡 바닥은 흑토 위에 이끼류가 자라는 툰드라로 깔려 있다.

거의 일년 내내 단단하게 얼어있는 알래스카나 캐나다의 툰드라와는 달리 이곳의 툰드라는 많은 기간 동안 사람이 겨우 걸어다닐 정도로 물렁거리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알래스카나 캐나다 내륙보다 추위는 덜하지만 대신 한치 앞도 보기 힘들 정도로 짙은 안개가 끼는 날이 많다.

 

애투 섬의 동쪽 끝은 3개의 반도가 뻗어나와서 4개의 만을 이루고 있다.

북쪽 반도는 홀츠 만과 사라나 만을 분리하고, 치리코프 곶까지 뻗은 중간 반도는 사라나 만과 매서커 만을 구분하며, 남쪽 반도는 매서커 만과 템낙 만을 분리한다.

 

(애투 섬의 동쪽 부분 출처 : http://www.loran-history.info/Attu/Attu_island_2096dpi.jpg 에서 일부 발췌)

 

북쪽의 홀츠 만에서부터 남쪽의 템낙 만에 이르기까지 해안에서는 양쪽에 수직의 벽을 가진 계곡들이 대략 서쪽으로 뻗다가 산악 지대에 부딪혀 사라진다.

해안에서 폭이 약 1.6km 정도인 메서커 계곡은 곧 두개로 갈라지는데 동부 메서커 계곡을 따라가면 동쪽의 사라나 만에서 이어지는 시덴스 계곡으로 넘어갈 수 있고, 더 올라가면 약 180m 높이의 고갯길에서 홀츠 계곡의 동쪽 분지와 연결된다.

 

미군은 원래 애투 섬보다 키스카 섬을 먼저 침공할 예정이었다.

키스카 섬은 애투 섬보다 가까울 뿐 아니라 더 좋은 항구와 비행장 부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키스카 섬의 방어가 애투 섬보다 훨씬 엄중하다는 사실이었는데 여기에 더하여 미군이 키스카 섬의 방어력은 실제보다 과대평가하고 반대로 애투 섬의 방어력은 과소평가하면서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의 운명이 엇갈리게 되었다.

 

미군이 키스카 섬 침공계획을 본격적으로 짜기 시작한 것은 1942년 12월부터였다.

서부방어사령관 드윗 중장은 키스카 상륙을 위하여 1개 보병사단을 주축으로 한 25,000 명의 병력을 요구했다.

그러나 키스카 수비대의 병력을 10,000 명으로 추산하고 있던 니미츠 제독은 키스카 침공에 최소한 보병사단 2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문제는 보병사단 2개를 동원하기가 만만찮다는 점이었다.

 

니미츠 제독이 병력을 어디서 빼올 것인지 궁리하는 동안에도 작전준비는 착착 이루어졌다.

1943년 1월에는 프랜시스 록웰 소장이 북태평양상륙군 사령관(Commander Amphibious Force North Pacific)으로 임명되어 킨케이드 제독 지휘 하에 상륙작전을 총괄하게 되었다.

키스카 상륙부대는 앨버트 브라운 소장의 제7사단으로 결정되었으며 여기에 제184보병연대와 1개 대공포 연대가 추가되었다.

이들 상륙부대는 2월 초부터 샌프란시스코 부근의 포트오드에 모여 홀랜드 스미스 해병소장의 지휘 하에 상륙훈련을 받았다.

 

그동안 제11육군항공대는 키스카를 폭격했으나 1월에는 날씨가 나빠서 폭탄을 10.5 톤 밖에 투하하지 못했다.

하지만 2월이 되자 앰치트카 상륙과 날씨의 호전에 힘입어 폭탄 투하량이 크게 늘어났다.

2월에 제11육군항공대는 9일에 걸쳐 24번 공습을 가하여 약 150톤을 투하했고 3월에도 비슷한 양을 투하했다.

 

1943년 2월이 되어 상륙부대가 본격적인 상륙훈련에 돌입했을 때 키스카 상륙에 사용할 병력과 수송함을 시일 내로 구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니미츠 제독이 원한 2개 보병사단은 커녕 드윗 중장이 요구했던 25,000 명의 상륙부대를 실을 수송함도 시기에 맞추어 준비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2월 18일에 애투 섬을 포격했던 맥모리스 제독의 함대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았다고 보고하자 키스카 섬보다 방어가 약한 애투 섬에 먼저 상륙하자는 의견이 급속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1943년 3월 초에 북태평양군 사령관 킨케이드 소장이 서부방어사령관 드윗 중장에게 키스카 섬 대신 방어가 약한 애투 섬에 먼저 상륙하자고 제의했다.

킨케이드 제독은 사진 정찰 결과 애투 섬의 방어병력은 3개 소총중대, 약 500 명으로 추산되며 이정도 규모의 수비대는 1개 보병연대와 1개 포병대대만 상륙시키면 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알래스카 방어사령관 버크너 소장도 이 견해를 지지했다.

이정도의 병력을 수송하는 데에는 공격수송함(APA) 4척과 화물수송함(AKA) 2척이면 충분했다.

일단 애투 섬을 점령하고 거기에 비행장을 건설하면 동쪽의 키스카 섬은 그야말로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될 것이었다.

드윗 중장의 지지를 얻은 킨케이드 제독은 3월 3일에 애투 상륙안을 니미츠 제독에게 제출했다.

 

1943년 3월 10일에 킹 제독이 니미츠 제독에게 키스카 상륙을 연기하거나 취소하라고 권고하자 니미츠 제독은 기다렸다는 듯이 애투 상륙안을 들이밀었다.

이 제안이 마음에 들었던 킹 제독은 마셜 장군에게 동의를 얻어내었다.

3월 21일에 합동참모본부는 향후 태평양 전구에서 애투 섬 상륙을 최우선으로 하기로 결정했고 다음날

 

"가능한 한 빨리"

("as soon as practicable")

 

애투 섬에 상륙하라는 합동참모본부의 정식 명령이 니미츠 제독에게 떨어졌다.

 

1943년 3월 22일을 기하여 북태평양군의 상륙목표가 키스카 섬에서 애투 섬으로 바뀌었으나 이러한 목표의 변경이 상륙작전 준비에 큰 어려움이나 혼란을 초래하지는 않았다.

샌디에이고에 있는 록웰 제독의 사령부에서는 변경된 목표에 맞추어 애투 섬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면서 제7사단 사령부와 함께 전술 수준의 자세한 계획 수립에 들어갔다.

 

계획 수립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애투 섬의 지형을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애투 섬은 19세기 중엽부터 미국 영토였지만 미군은 애투 섬에 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었으며 당시 사용가능한 지도는 1934년에 그린 지도로서 이 지도는 해안에서 900m 떨어진 해상에서 관찰하고 그린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수십년간 미해군은 조난 사고 방지를 위하여 애투 섬에서 4km 이내로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미해군은 애투 섬 부근의 수로에 대해서도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일본군이 애투 섬을 점령한 후 제11육군항공대의 항공기들이 여러 장의 사진을 찍어왔지만 구름이 끼어 있는 날이 많아서 빠진 부분이 많았다.

애투 섬 상륙은 키스카 섬 상륙을 예상하고 있는 일본군에 대한 일종의 기습이기 때문에 사진을 찍기 위하여 애투 섬에 너무 빈번하게 항공기를 보낼 수도 없었다.

미군은 남쪽의 템낙 만과 북쪽의 홀츠 만을 포함하는 애투 섬 서쪽의 지형 모형을 만들었으나 중요한 이동로나 헨더슨 능선 및 홀츠 만 서쪽은 거의 표시할 수 없었다.

 

정확한 지형을 몰랐으므로 미군은 애투 섬 상륙작전시 주공과 조공의 상륙 위치 및 상륙 순서에 따라 A, B, C, D. E 라고 이름붙인 다섯 가지 안을 준비하여 현장 지휘관이 필요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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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코만도르스키 해전(2)

 

나치가 포탑의 전력 고갈 때문에 일시적으로 전투에서 이탈하자 이제 전투의 초점은 솔트레이크시티와 마야 사이의 포격전으로 옮겨졌다.

두 중순양함은 서로 상대방의 포탄을 피하기 위하여 지그재그 항행을 하면서 포격전을 벌였고 오전 9시 7분에 마야가 8발의 어뢰를 발사했으나 빗나갔다.

오후 9시 10분 마야의 8인치 포탄이 솔트레이크시티의 우현에 있던 정찰기에 명중하면서 2명이 사망하고 불이 났다.

승무원들이 불타는 정찰기를 바다에 던지고 불을 껐다.

 

잠시 후 포탑의 전력을 회복한 나치가 포격에 가담하자 솔트레이크시티는 다시 나치와 포탄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9시 20분에 나치와 솔트레이크시티는 약 22,000m 거리에서 동시에 서로를 맞추었다.

 

그 직후 미군 구축함의 5인치 포탄 1발이 럭키샷을 기록했다.

이 5인치 포탄은 나치의 1번 포탑 조준창으로 들어가서 포탑 내에서 폭발하면서 포탑 내의 인원을 몰살시켰고 나치는 1번 포탑에서 엄청난 연기를 뿜어내면서 해상에 정지했다.

 

(일본군의 8인치 연장포탑. 2번이 조준창이다. 출처 : Naval Weapons of WW2, P.185)

 

나치가 엄청난 연기를 뿜어내면서 해상에 멈추는 것을 본 맥모리스 제독은 이 기회를 타서 일본수송선들을 공격하기 위하여 9시 26분에 북쪽으로 변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9시 30분부터 나치는 1번 포탑을 제외한 나머지 포탑으로 사격을 개시하면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윽고 마야 및 2척의 구축함과 함께 미함대를 맹렬하게 뒤쫓기 시작했다.

호소가야 제독은 가장 큰 위협인 솔트레이크시티에 공격을 집중했다.

 

(코만도르스키 해전 상황도. 출처 : Aleutians, Gilberts and Marshalls, P27)

 

북상하면서 뒤쫓아오는 나치 및 마야와 교전하던 솔트레이크시티는 갑자기 우현 전방 17,000m 거리에서 경순양함 다마를 발견했다.

다마가 뇌격을 가하기 위하여 접근 중이라고 판단한 솔트레이크시티의 함장 로저스 대령은 목표를 다마로 바꾸어 맹렬한 일제포격을 가했다.

미함대와 일본수송선 사이를 가로막으라는 명령을 받고 있던 다마는 솔트레이크시티로부터 갑작스런 집중사격을 받고 깜짝 놀라서 180도로 되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다마는 잠시 후 다시 180도로 변침하여 전장에 돌아왔지만 솔트레이크시티의 기세에 눌려 나치와 마야의 뒤만 따라다니면서 전투가 끝날 때까지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기습적인 일제사격으로 우전방에서 얼쩡거리던 다마를 쫓아낸 솔트레이크시티는 다시 뒤쫓아오는 나치 및 마야와 교전했는데 속력에서 우세한 나치와 마야는 오전 10시 경에 18,000m 이내로 접근했다.

나치와 마야가 솔트레이크시트를 협차하는데 성공한 오전 10시 2분에 갑자기 솔트레이크시티의 키가 작동을 멈추었다.

원래부터 시원찮았던 솔트레이크시티의 조향 장치가 몇발의 명중탄으로 충격을 받자 말썽을 일으킨 것이었다.

승무원들이 미리 준비해두었던 예비 디젤엔진을 재빨리 연결했지만 그래도 솔트레이크시티의 키는 좌우로 10도 정도 밖에 움직이지 못했다.

 

이때 북쪽에 있던 일본군의 경순양함 아부쿠마는 오전 10시 7분에 미함대에 대하여 2발의 어뢰를 발사했으나 거리가 멀어 빗나갔다.

 

이윽고 나치와 마야는 거리를 좁히면서 솔트레이크시티에게 무시무시한 포탄의 비를 퍼부었다.

오전 10시경부터 약 10분 동안 솔트레이크시티의 사방 50m 이내에 약 200 발의 포탄이 떨어졌는데 기적적으로 명중탄은 오전 10시 10분에 고낙각으로 떨어진 8인치 철갑탄 1발 뿐이었다.

이 포탄은 솔트레이크시티의 주장갑판을 뚫고 들어와서는 폭발하지 않고 수선하의 함체를 뚫고 다시 빠져나갔다.

 

포탄이 빠져나간 자리로 침수가 시작되자 함장 로저스 대령은 솔트레이크시티가 위기에 빠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키가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데 이제 침수까지 시작되었으니 나치와 마야에게 따라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로저스 대령의 구조요청을 접한 맥모리스 소장은 수송선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포기해야만 했다.

맥모리스 제독의 명령에 따라 미함대는 침로를 240도로 바꾸어서 남서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으며 구축함 베일리와 코글란은 오전 10시 18분부터 솔트레이크시티를 감추기 위하여 연막을 쳤다.

 

일본함대는 계속 접근하면서 연막 사이로 흘낏흘낏 솔트레이크시티의 모습이 보일 때마다 포격을 가했으나 명중탄을 내지 못했다.

하지만 속력에서 우세한 일본함대와의 거리가 계속 줄어들자 맥모리스 소장은 오전 11시에 남쪽으로 변침했다.

이제 함대의 선두는 리치먼드였고 약 2,700m 뒤에 솔트레이크시티가 뒤따르고 있었으며 구축함 4척은 솔트레이크 주위에서 연막을 피워 솔트레이크시티의 모습을 가리고 있었다.

 

솔트레이크시티가 남쪽으로 변침하면서 잠깐 모습이 드러나자 다시 나치와 마야가 포격을 시작했고 11시 3분에 솔트레이크시티는 4번째이자 마지막 명중탄을 맞았다.

이 포탄 또한 폭발하지 않고 후방 자이로컴퍼스실과 후방 보일러실을 관통하여 함체 밖으로 빠져 나갔고 그 결과 후방 보일러실이 침수되었다.

후방 보일러실의 승무원들이 1.2m 깊이의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침수와 싸우는 동안에도 증기는 계속 공급되어 솔트레이크시티는 전속력으로 달아날 수 있었다.

문제는 침수된 물을 퍼내기 위하여 3번 기관의 냉각오일 순환용 모터를 배수펌프에 전용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이었다.

냉각오일의 순환이 멈추면 기관은 약 20분 밖에 가동하지 못한다.

 

일본함대는 다시 뇌격을 실시했다.

마야가 11시 5분에 4발, 나치가 7분에 8발, 아부쿠마가 15분에 2발의 어뢰를 발사했으나 거리가 멀고 각도가 나빠서 1발도 명중시키지 못했다.  

 

오전 11시 25분, 침수 때문에 약 5도 좌현으로 기울어진 채로 전속력으로 달아나던 솔트레이크시티의 3번 기관이 멈추면서 속력이 20노트로 떨어졌다.

침수와 싸우느라 냉각오일을 순환시키던 3번 기관의 모터를 배수펌프에 전용한 결과였다.

솔트레이크시티의 속력이 떨어지자 일본함대는 급격히 거리를 좁혀와서 11시 35분 경에는 일본함대의 선두가 불과 2,700m 거리까지 접근했다.

솔트레이크시티는 급히 3번 기관의 냉각모터를 냉각 오일 순환에 복귀시켰고 11시 38분부터 솔트레이크시티는 다시 최고 속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솔트레이크시티는 11시 48분에 뒤쫓던 나치에게 포탄 1발을 명중시켰다. 

일본구축함 와카바가 1시 49분에 6발, 하츠시모가 54분에 5발의 어뢰를 발사했으나 빗나갔다.

 

오전 11시 50분, 솔트레이크시티에 최악의 위기가 닥쳐왔다.

솔트레이크시티의 기울기를 바로잡기 위하여 좌현 밸러스트 탱크의 바닷물을 우현 밸러스트 탱크로 옮기려던 승무원이 실수로 좌현 밸러스트 탱크를 연료파이프와 연결해버린 것이었다.

대량의 바닷물이 연료에 섞여서 보일러에 공급되자 각 보일러들의 불이 금방 꺼졌고 11시 54분에 솔트레이크시티는 해상에 멈추었다.

이때 나치와 마야는 솔트레이크시티의 오른쪽 후방 17,000m 거리에 있었고 왼쪽 후방에서는 아부쿠마와 구축함2척이 접근하고 있었으며 구축함들은 곧 어뢰의 유효사정 이내로 들어올 것이었다.

해상에 멈추어버린 솔트레이크시티가 살아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이때 맥모리스 제독은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맥모리스 제독은 솔트레이크시티와 합류하기 위하여 기함 리치먼드를 되돌리면서 구축함 베일리, 코글란, 모내헌에게 일본함대를 뇌격하라고 명령했다.

구축함 데일은 리치먼드와 함께 솔트레이크시티 주변에 머물면서 연막을 피워 솔트레이크시티가 해상에 멈추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연막 안으로 뛰어드는 일본함정들을 공격하며 여차하면 솔트레이크시티의 승무원들을 구조할 준비를 했다.

 

데일을 제외한 미함대의 구축함 3척은 베일리를 선두로 연막을 뚫고 뛰쳐나가 5인치 함포를 난사하면서 전속력으로 일본함대에게 돌진했다.

갑자기 연막에서 뛰쳐나와 함포를 난사하면서 전속력으로 돌진해오는 3척의 구축함을 발견한 나치와 마야는 깜짝 놀라서 모든 화력을 선두의 베일리에게 집중시켰다.

일본군의 포탄 1발이 베일리의 주방에 명중하여 5명의 전사자를 기록했으나 베일리와 2척의 구축함들은 포격을 가하면서 계속 돌진하다가 12시 3분에 베일리가 5발의 어뢰를 발사했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베일리가 어뢰를 발사하는 순간 나치가 서쪽으로 방향을 틀더니 이어서 일본함대가 줄줄이 서쪽으로 변침하기 시작했다.

일본함대가 전투를 포기한 것이었다.

후방에서의 어뢰공격이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익히 아는 맥모리스 소장은 베일리를 뒤따르던 코글란과 모내헌의 어뢰공격을 중단시켰다.

곧이어 12시 4분에 일본함대는 포격을 중단했다.

 

호소가야 중장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던 전투를 일방적으로 중단해 버린 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호소가야 중장은 솔트레이크시티가 해상에 멈춘 사실을 몰랐다. 

당시 해상은 미함대가 피운 연막이 자욱하여 시계가 제한되었다.

일본군에서 솔트레이크시티의 상태를 알고 있던 것은 나치에서 발진한 수상정찰기 뿐이었는데 하필이면 무전기가 고장나서 이 사실을 보고할 수 없었다.

 

둘째로는 공습에 대한 부담감이었다.

키스카 섬에서 지척인 앰치트카에 미군이 진출한 상황에서 호소가야 중장은 언제든지 미군 항공기가 공습을 가해올 수 있다고 믿었다.

코만도르스키 해전에서 솔트레이크시티는 푸른 물감을 포함한 철갑탄을 사용했는데 철갑탄을 다 쏘고나자 물감을 포함하지 않은 고폭탄을 발사했다.

호소가야 제독은 물감이 없는 고폭탄의 낙하를 보고 미군 항공기들이 구름 위에서 떨어뜨리는 폭탄이라고 착각했다.

 

세번째로는 함정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호소가야 중장이 이끌고 있던 제5함대는 북태평양군과 마찬가지로 일본해군 내에서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처지였다.

따라서 코만도르스키 해전에 참가한 함정들이 사실상 그가 가진 전부였으며 만일 여기서 함정들을 상실하거나 건선거에 들어가야 할만큼 큰 피해를 입으면 보충받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런데 나치는 이미 몇발의 명중탄을 얻어맞은 상태였고 재수없게도 구축함의 5인치 포탄으로 인하여 1번 포탑 내부가 아수라장이 되는 등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연막에서 뛰쳐나와 맹렬히 달려드는 미군 구축함들을 보자 그는 전의를 상실했다.

계속 전투를 진행하다가 재수없이 나치나 마야가 큰 피해라도 입어 속력이라도 뚝 떨어지는 날이면 미군항공기의 밥이 되기 딱 좋으며 만일 살아남아도 일본본토에 있는 건선거에 들어가버리면 보충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미군 구축함들이 필사적으로 반격을 가하는 동안 솔트레이크시티는 재빨리 기관이 멈춘 이유를 깨닫고 연료에서 바닷물을 제거한 다음 보일러를 재가동시키고 있었다.

11시 58분에 전방 기관이 재가동되면서 속력을 15노트까지 회복했고 12시 9분에는 후방 기관까지 가동되면서 속력이 23노트까지 올랐으며 잠시 후 30노트 이상의 최고 속도를 회복했다.

이로써 솔트레이크시티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살아났다.

 

12시 12분에 리치먼드가 포격을 중단하면서 코만도르스키 해전이 끝났다.

 

참가 함정의 규모와 소모된 탄약에 비하면 인명피해는 양측 모두 가벼운 편이었다.

미함대는 베일리에서 5명, 솔트레이크시티에서 2명, 합계 7명의 전사자와 7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일본함대는 14명의 전사자와 27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는데 부상자 1명을 제외한 피해는 모두 나치에서 발생했다.

 

미함대는 솔트레이크시티가 8인치 포탄 832발, 리치먼드가 6인치 포탄 271발을 발사했으며 순양함들의 부포와 구축함들이 발사한 5인치 및 3인치 포탄은 합계 2,314발이었다.

구축함 모내헌은 일본정찰기를 향하여 40mm 포탄 48발을 발사했으며 베일리가 어뢰 5발을 발사했다.

 

일본함대는 나치가 707발, 마야가 904발 등 1,611발의 8인치 포탄을 발사했고 아부쿠마가 95발의 140mm 포탄을 발사했으며 다마가 발사한 140mm 포탄의 수는 불명이다.

130mm 포탄의 발사 수는 나치가 276발, 마야가 9발, 하츠시모가 6발이며, 와카바도 발사했는데 정확한 포탄 숫자는 불명이다.

산소어뢰는 나치가 16발, 마야가 8발, 아부쿠마와 다마가 각각 4발씩, 와카바가 6발, 하츠시모가 5발로 합계 43발이다.

 

코만도르스키 해전이 끝났을 때 솔트레이크시티의 후방 기관실은 섭씨 -2도의 바닷물이 1.5m 깊이로 들어차 있었으므로 더치하버로 돌아오는 도중 솔트레이크시티의 승무원들은 섭씨 0도의 추운 날씨에 차가운 바닷물에 흠뻑 젖은 채 보수작업을 해야만 했다.

그러자 함장 로저스 대령은 추위를 견디면서 일해야만 하는 승무원들을 위하여 더치하버에 도착할 때까지 식사 때마다

 

"의학적 목적으로"

 

알코홀을 1잔씩 제공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하여 전 승무원들을 환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포탄에 주방을 직격당한 베일리의 승무원들은 더치하버에 도착할 때까지 차가운 햄과 크래커, 그리고 사과쥬스로 연명해야만 했다.

 

제11육군항공대는 코만도르스키 해전 당시 개입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맥모리스 제독으로부터 접촉보고가 들어왔을 당시 애닥 섬의 모든 폭격기들은 키스카 섬 폭격을 위하여 주로 사람 상대로 효과적인 소형 고폭탄들을 장비하고 있었으므로 철갑탄으로 교체가 필요했다.

또한 육군항공대는 중폭격기 뿐만 아니라 쌍발폭격기도 함께 내보내어 폭격효과를 높이고 싶어했고 킨케이드 제독도 동의했는데 그러려면 쌍발폭격기에 증가연료탱크를 장착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고폭탄들을 철갑탄으로 바꾸고 쌍발폭격기에 증가연료탱크를 부착하는데 4시간이 걸렸다. 

이 작업이 끝나자 2시간 동안 눈보라가 몰아쳐 시계가 0으로 떨어졌다.

6시간 만에 겨우 이륙한 폭격기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상황이 종료된 다음이었다. 

 

앰치트카 섬에서도 폭격 시도가 있었다.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2대가 오전 8시 44분에 아사카마루와 사키토마루를 발견했는데 곧 접촉을 잃어버렸다가 오후 2시 10분에 다시 발견했다.

발견장소는 앰치트카에서 720km  떨어진 곳이라 B-25 쌍발폭격기에 증가연료탱크를 장착하느라 출격이 늦어졌다.

가까스로 B-25 쌍발폭격기 3대가 출격했으나 일본수송선들을 찾지 못했다. 

이후 제11육군항공대 사령관 위리엄 버틀러 소장은 6대의 B-25  쌍발폭격기에 항상 증가연료탱크와 철갑탄을 장비해 두어 언제든지 적의 함선이 나타나면 출격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코만도르스키 해전에서 양 함대는 서로에게 치명타를 먹이는데 실패했으나 맥모리스 제독은 호소가야 제독의 애투 섬 증원시도를 좌절시켰다.

일본제5함대와 동행했던 아사카마루와 사키토마루는 물론 먼저 출발했던 저속의 산코마루도 애투 섬에 도달하지 못하고 바라무시로로 돌아갔으며 이후 일본해군은 애투와 키스카에 대한 보급을 주로 잠수함에 의지했다.

따라서 어느 기준으로 보아도 코만도르스키 해전은 미해군의 승리였다.

 

일본 언론은 코만도르스키 해전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했지만 이어진 조치를 보면 일본 자신도 패배를 인정하고 있었다.

일본해군은 코만도르스키 해전 직후인 1943년 3월 28일에 제5함대 사령관 호소가야 보시로 제독을 해임하여 예편시키고 후임에 가와세 시로 중장을 임명했다.

나치가 수리를 위하여 사세보로 가서 1달간 건선거에 들어앉아 있어야 했으므로 가와세 중장의 기함은 중순양함 마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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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코만도르스키 해전(1) 

 

1943년 3월 26일에 벌어진 코만도르스키 해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여러나라의 해군이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생각했던 미래의 해전모습과 비슷했다.

두함대는 대낮에 3시간 30분 동안 쉬지 않고 서로 13km - 19km 의 간격을 두고 포격전을 벌였으며 항공세력이나 잠수함은 개입하지 않았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교전에 참가한 함대의 규모가 작았으며 서로 치명타를 가하는데 실패했다는 것 정도였다.

 

리치먼드에 승좌한 찰스 맥모리스 소장의 미국함대는 중순양함 1척(솔트레이크시티), 경순양함 1척(리치먼드), 구축함 4척(베일리, 코글란, 데일, 모내헌)으로 이루어져 애투 섬 동쪽 해상을 초계하고 있었다.

 

미함대의 핵심 함정은 중순양함 솔트레이크시티였다.

솔트레이크시티는 1942년 10월 11일-12일에 걸쳐 벌어진 에스퍼란스 해전에서 8인치 포탄 2발을 얻어맞고 진주만의 건선거에서 5개월 동안 수리와 개장을 받았다.

그 기간 동안 솔트레이크시티의 승무원들 중 절반 가량이 훈련소를 갓 나온 신병들로 교체되었으므로 코만도르스키 해전 당시 솔트레이크시티의 승무원들 중 절반 가량은 실전경험이 없었다.

1943년 3월 초에 건선거를 나선 솔트레이크시티는 3월 11일에 북태평양군에 배속될 때까지 1주일 밖에 훈련할 시간이 없었다.

그 기간 동안 함장 버트램 로저스 대령은 함포사격훈련을 집중적으로 실시했다.

 

북태평양군에 편입된 직후 솔트레이크시티의 조타기능에 문제가 발견되었다.

유압계통에 문제가 생겨 만일 큰 충격이 가해지면 키에 동력을 전달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당시 솔트레이크시티는 수리를 위하여 건선거에 들어갈 처지가 아니었다.

솔트레이크시티의 승무원들은 할 수 없이 주정용 소형디젤엔진 하나를 얻어서 예비로 준비해 두었다.

이 조타기능의 문제가 코만도르스키 해전에서 골칫거리로 등장하게 된다.

 

(CA-25 솔트레이크시티.  배수량 : 11,000톤, 길이 : 178m, 폭 : 19.9m, 출력 : 107,000마력, 속력 : 32.7노트, 승무원 : 1,200명, 무장 : 8인치 포 10문, 5인치 양용포 4문, 수상기 4대, 캐터펄트 2대)

 

미함대와 대결한 일본제5함대는 나치에 승좌한 호소가야 보시로 제독의 지휘 하에 중순양함 2척(나치, 마야), 경순양함 2척(다마, 아부쿠마), 그리고 구축함 4척(와카바, 하츠시모, 이가즈치, 이나즈마)으로 이루어져 미함대보다 훨씬 강력했다.

일본제5함대는 애투 섬 증원병력을 싣고 있던 7,000 톤 급의 고속수송선 아사카마루와 사키토마루를 호위하고 있었다.

 

일출 1시간 전인 3월 26일 오전 7시 30분에 미함대는 애투 섬에서 동쪽으로 290km, 코만도르스키 제도에서 남쪽으로 160km 떨어진 해상에 있었다.

함대는 동쪽으로 달리다가 북쪽으로 변침했는데 선두인 코글란부터 리치먼드, 베일리, 데일은 차례대로 변침했지만 5번째인 솔트레이크시티가 늦게 변침하는 바람에 솔트레이크시티와 모내헌은 본대로부터 남동쪽으로 약 12km 정도 뒤처졌다.

이렇게 미함대는 2개의 함렬로 나뉜 채 15노트 속력으로 북쪽으로 항진했다.

이날의 구름 고도는 약 750m 이고 시정은 10km 이상에 달하여 알류샨 해역에서는 좋은 날씨였다.

 

(코만도르스키 해전 상황도. 출처 : Aleutians, Gilberts and Marshalls, P28)

 

1943년 3월 26일 오전 7시 52분, 미함대의 수병들이 막 아침식사를 끝냈을 무렵 함대의 레이더가 북쪽 13km - 19km 에 걸쳐 단종진으로 항해하는 적함대를 발견했다.

리치먼드의 레이더 담당 장교는 화면에 나타난 적함대의 구성을 경순양함1척, 수송선 2척, 구축함 2척으로 정확하게 추정했다.

맥모리스 제독은 즉시 전투배치명령을 내리고 두개의 함렬을 하나로 합쳤다.

이 과정에서 함정의 순서가 약간 바뀌어서 선두는 베일리가 되었고, 이어서 코글란, 리치먼드, 솔트레이크시티, 데일, 모내헌의 순서로 단종진을 형성했다.

 

오전 8시가 넘어가자 불길한 징조가 나타났다.

미함대의 레이더에 중순양함으로 의심되는 대형함정 2척을 포함한 5척의 함영이 더 나타나서 적함대의 숫자는 10척이 되었다.

그러나 맥모리스 제독은 물러나지 않고 정면대결을 펼치기로 결심했다.

 

호소가야 제독의 일본제5함대는 미함대가 자신들을 발견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미함대를 발견했다.

사키토마루의 견시가 오전 7시 52분에 남쪽에서 다가오는 미함대를 발견하고 보고했다.

당시 일본함대는 미리 출발했던 저속의 수송선 산코마루 및 호위를 맡은 구축함 1척과 만나기 위하여 북쪽으로 항진하던 중이었는데 기함 나치를 선두로 마야, 다마, 와카바, 하츠시모, 아부쿠마, 이가즈치, 아사카마루, 사키토마루, 그리고 이나즈미의 순으로 단종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일본함대의 진형은 사령관이 전투에 앞장선다는 일본해군의 전통에 충실한 진형이었지만 실전에서 몇 가지 불리한 점이 있었다.

우선 함포의 사정거리가 긴 중순양함들이 앞장섬으로서 특히 포격전의 초기에 뒤따르던 경순양함과 구축함들의 화력을 적절하게 활용하기 어려웠고 또한 구축함들이 뒤쪽에 처져 있어서 전투 초반에 과감하게 앞으로 뛰쳐나가면서 무서운 산소어뢰를 발사하는 전법을 구사하기가 불편했다.

 

포격전을 중시하는 미해군의 경우 단종진을 구성할 때에는 주포의 사정거리가 짧은 구축함들을 선두에 내세우고 그 뒤로 경순양함, 중순양함의 순서로 뒤따라감으로서 포격전이 벌어졌을 때 초기에 함대의 모든 화력을 동시에 투사할 수 있도록 배치했다.

그런 면에서 볼때 미함대의 배치도 포격전에 이상적인 상태는 아니었지만 일본함대보다는 훨씬 나았다.

 

일본함대는 미함대를 발견하자 즉시 우현으로 크게 변침하여 남동쪽으로 침로를 바꾸었고 수송선 2척은 그대로 북상했다.

 

맥모리스 제독은 자신의 목표가 일본수송선들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처음에는 그대로 북상하여 수송선들을 공격한 후 고속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호소가야 제독이 수송선들을 북쪽으로 빼돌리고 남하했으므로 이런 계획은 실현가능성이 없어졌다.

맥모리스 제독은 물러서지 않고 일전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미함대는 수상정찰기를 발진시키려 했으나 급유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일본함대의 나치는 1대의 수상정찰기를 발진시켰으나 이 정찰기는 미함대의 강력한 대공사격에 겁을 집어먹고 구름 속으로 숨어버린 데다가 통신 상태도 불량하여 일본함대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선제공격은 일본함대가 실시했다.

오전 8시 40분, 선두의 나치가 18,000m 거리에서 리치먼드를 겨냥하여 8인치 주포로 사격을 시작했다.

나치는 2번째 일제사격에서 리치먼드에 대한 협차에 성공했다.

 

(CL-9 리치먼드.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그러나 그때 리치먼드 뒤에서 나타난 솔트레이크시티를 발견한 호소가야 제독은 자신이 8인이 포를 가진 적의 중순양함 대신 6인치 포를 가진 적의 경순양함을 먼저 공격하는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일본함대는 목표를 솔트레이크시티로 바꾸었고 나치는 8시 46분에 어뢰 8발을 발사했으나 거리가 너무 멀어서 모두 빗나갔다.

 

호소가야 제독은 동시에 휘하의 수뢰전대에게 공격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따라 8시 47분에 아부쿠마가, 48분에 다마가 우현으로 90도 꺾어서 미함대에 접근했는데 이때 일본구축함들은 공격적으로 뇌격을 가하지 않았다.

구축함 4척 중 와카바와 하츠시모는 아부쿠마를 따라 함렬을 뛰쳐나왔으나 이가즈치와 이나즈미는 다마의 뒤를 따르지 않고 그냥 마야와 나치의 뒤를 따라다녔다.

와카바와 하츠시모 또한 함렬에서 뛰쳐나온 이후 아부쿠마의 뒤를 따라다닐 뿐 적극적으로 미함대에 접근하여 뇌격을 가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구축함들이 미함대에게 접근하여 뇌격을 가하지 않은 이유는 불분명하다.

확실한 것은 이것으로 일본함대는 전투 초기에 근거리에 접근한 구축함이 무서운 산소어뢰를 뿌린다는 유력한 카드 하나를 사장시켰다는 점이다.

 

우세한 일본함대와의 거리가 좁혀지자 부담을 느낀 맥모리스 제독은 오전 8시 45분에 좌측으로 크게 변침하여 일본함대와의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

그러자 일본함대도 오른쪽으로 변침하여 미함대를 추격했다.

 

그동안 솔트레이크시티는 일본중순양함들과 포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나치와 마야가 포격의 목표를 리치먼드에서 솔트레이크시티로 바꾸는 동안 포격의 주도권은 솔트레이크시티가 쥐게 되었다.

솔트레이크시티는 일본함대보다 2분 늦은 8시 42분에 18,000m 거리에서 나치를 목표로 포격을 시작했다.

2번째 일제사격에서 나치에 대한 근거리 협차에 성공한 솔트레이크시티는 3번째 일제사격에서 2발, 4번째 일제사격에서 1발의 명중탄을 기록했다.

 

8시 50분에 나치를 강타한 2발의 명중탄 중 1발은 함교의 통신을 끊어버렸고 다른 1발은 함교 부근의 우현에 떨어져 몇 명의 사망자와 10명 이상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2분 후 3번째 명중탄이 어뢰발사관에 명중하여 추가 피해를 입혔으며 지근탄이 바로 옆에 떨어져 함교를 바닷물로 흠뻑 적셨다.

교전 거리가 약 15,000m 에 달하고 솔트레이크시티의 승무원들 중 절반 가량이 첫 출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썩 괜찮은 명중율이었다.

 

이때 갑자기 나치가 포격을 중지했으므로 솔트레이크시티는 나치가 치명타를 입었다고 생각하고 목표를 마야로 바꾸었다.

그런데 사실 나치가 포격을 중단한 이유는 조작실수로서 누군가 축전지에 충분한 전기가 충전되기 전에 발전기의 터빈을 돌리던 증기를 너무 일찍 메인터빈으로 전환시켜 버린 것이었다.

축전지에 충전되었던 전기가 바닥나자 나치의 주포들이 최대 앙각에서 멈추어버렸다.

나치가 원인을 찾아내어 다시 포격을 시작할 때까지 거의 30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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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애투 섬 포격 

 

1943년 2월 중순 경에 잠수함 S-28이 애투섬으로 향하는 일본선단을 확인하고 보고했다.

북태평양군 사령관 토머스 킨케이드 소장은 전투함대를 지휘하던 찰스 맥모리스 소장에게 함대를 이끌고 가서 애투섬을 포격하고 일본선단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경순양함 리치먼드에 승좌한 맥모리스 제독은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 및 구축함 4척을 이끌고 2월 18일에 정오 경에 북쪽으로부터 애투섬에 접근했다.

알류샨 열도에서는 드물게 애투 섬의 날씨는 맑았다. 

 

(애투 섬)

 

미함대는 단종진을 형성하고 오른쪽으로 홀츠 만을 보면서 서서히 남동쪽으로 항진했는데 홀츠 만과 치차고프 항에는 일본 선박이 없었다.

오후 2시 50분에 치차고프 항의 동쪽에서 180도 변침한 미함대는 이번에는 치차고프 항을 왼쪽으로 보면서 북상했다.

일본군의 주둔지인 치차고프항 주위는 위장을 잘 해서 함상에서는 하얀 눈 밖에 보이지 않았다.

탄착관측기들은 버려진 참호와 포좌를 발견했을 뿐이었으나 앞선 항공정찰의 결과로는 여기에 일본군의 기지가 있는 것이 확실했다.

맥모리스 소장은 포격을 명령했고 이어서 일제사격이 가해졌으나 일본군의 반격은 전혀 없었다.

홀츠만 북쪽에 도달한 미함대는 다시 180도 전환하여 이번에는 해안에 바짝 접근하여 우현으로 일제사격을 가했는데 역시 일본군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남하하면서 홀츠만 및 치차고프항 주위를 포격한 미함대는 오후 4시 37분에 포격을 마치고 북서쪽으로 물러갔다.

이날의 포격으로 애투 섬에서는 23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건물 1동이 부서졌다.

 

애투섬 포격을 마친 맥모리스 소장은 함대를 둘로 나누어 애투섬으로 접근 중이라고 알려진 일본선박들을 수색했다.

인디애나폴리스의 함장 비틀라실 대령은 구축함 코글란 및 길레스피와 함께 애투섬 남서쪽 190km 해상에 초계선을 폈다.

그날 밤에 인디애나폴리스는  탄약을 가득 싣고 애투섬으로 접근하던 3,100톤 짜리 아카가네마루를 수평선에서 발견하고 전속력으로 다가갔다.

아카가네마루에서 인디애나폴리스를 발견하고는 일본어로 전문을 보내왔다.

인디애나폴리스는 6,100m 거리에서 8인치 주포로 일제사격을 가하여 3번째 일제사격에 명중탄을 기록했다.

아카가네마루는 싣고 있던 탄약이 유폭하면서 어마어마한 폭발을 일으켰다.

비틀라실 대령은 빨리 끝장내기 위하여 구축함 2척에게 뇌격을 명령했다.

 

코글란이 먼저 다가가서 3발의 어뢰를 발사했다.

첫번째 어뢰는 정상적으로 아카가네마루의 아랫 쪽을 통과했으나 어뢰의 자기감응신관이 작동하지 않았다. 

두번째 어뢰는 미처 도달하기도 전에 폭발해 버렸고 세번째 어뢰는 선미 쪽으로 빗나갔다.

이어서 길레스피가 다가가서 3발의 어뢰를 발사했다.

첫번째 어뢰는 불발이었고 두번째 어뢰는 마치 돌고래처럼 방향을 잃고 사방으로 헤매고 다니다가 빗나갔고 세번째 어뢰는 다가가기도 전에 폭발해버렸다.

코글란과 길레스피의 승무원들은 이따위 어뢰를 가지고 작전하는 잠수함 승무원들의 좌절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코글란과 길레스피는 근거리에서 5인치 함포로 집중사격을 퍼부어 19일 오전 1시 24분에 아카가네마루를 격침했다.

 

아카가네마루의 뒤를 따르던 2척의 수송선은 운좋게 미함대에게 들키지 않고 일본으로 도망침으로서 싣고 있던 병력과 장비 및 보급품을 전달하지는 못했지만 목숨은 건졌다.

 

애투섬의 포격에 관하여 보고를 들은 킨케이드 제독은 애투섬의 방어가 허약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공중정찰과 맥모리스 소장의 보고에 따르면 애투섬에는 비행장과 해안포가 없었으며 대공포는 빈약했다.

당시 북태평양해역군은 먼저 키스카섬에 상륙하기 위하여 준비를 진행시키고 있었으나 최대 1만명으로 예상하고 있던 키스카섬 수비대를 제압할만한 병력과 장비 및 보급품, 그리고 수송함들을 1943년 7월이 되기 전에 확보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거기다가 9월이 되면 상륙작전이 힘들어지기 때문에 7월과 8월에 키스카 섬과 애투 섬에 연속적으로 상륙하기에는 시간이 빠듯했다.

 

그런데 키스카섬에 비하면 애투섬은 방어가 허술하여 이미 준비되어 있는 병력 중 일부만을 사용하여 충분히 탈환할 수 있고 필요한 수송함의 숫자도 훨씬 적었다.

게다가 애투섬을 장악하고 그곳에 비행장을 건설하면 키스카섬을 완전히 고립시켜 일본군의 증원을 차단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킨케이드 제독은 서부방어사령관 드윗 장군과 의논한 후 키스카섬보다 애투섬에 먼저 상륙하겠다는 내용의 제안을 1943년 3월 3일에 니미츠 제독에게 제출했다. 

니미츠 제독은 이 제안을 킹 제독에게 전달했고 1943년 3월 22일에 합동참모본부는 니미츠 제독에게 애투섬에 먼저 상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상륙예정일은 안개가 많이 끼는 6월이 되기 전인 1943년 5월 7일로 결정했다.

 

(알류샨 열도. 출처는 여기로)

 

한편 앰치트카에 진출한 제11육군항공대는 키스카섬에 맹렬한 공습을 가했다.

앰치트카의 P-40들이 3월 3일부터 키스카섬에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3월 12일부터는 폭장량이 많은 P-38 전투기 10대가 공습에 가세했다.

더하여 애닥섬의 폭격기들도 매일 키스카섬을 폭격했으므로 키스카섬은 날씨가 좋을 때에는 하루에 예닐곱번이나 공습을 받았고 날씨가 나쁜 날에도 공습을 받았다.

일본군의 반격은 미약했다.

1943년 3월 16일에 2식수상전투기 2대가 10대의 P-38 전투기와 교전하다가 격추된 것을 마지막으로 키스카섬의 항공력은 전멸했다.

 

애투섬과 키스카섬의 일본군들은 제5함대사령관 호소가야 제독에게 매일처럼 더 많은 병력과 무기 및 보급품을 요청했다.

보급함대가 3월 9일에 바라무시로를 출항했으나 미군의 봉쇄를 뚫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호소가야 제독은 1943년 3월 22일에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4척 및 수송선 2척을 이끌고 다시 바라무시로를 출항하여 애투섬으로 향했다.

일본함대의 출항을 눈치챈 미군이 요격을 위하여 함대를 파견함으로써 코만도르스키 해전이 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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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앰치트카 섬 상륙 

 

북태평양군 사령관 테오발드 소장은 애닥섬 상륙이 실시되기도 전인 1942년 8월에 애닥섬 다음에는 키스카섬으로부터 남동쪽으로 불과 140km 떨어진 앰치트카섬에 상륙할 계획을 합동참모본부에 제시하여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알류샨 열도. 출처는 여기로)

 

한편 서부방어사령관 드윗 중장은 8월에 앰치트카에 투입했던 정찰대의 보고를 근거로 앰치트카에는 비행장을 만들기 어려우며 따라서 앰치트카 대신 1942년 11월 1일로 예정된 타나가섬 상륙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육군참모총장 마셜 대장은 타나가 상륙보다는 앰치트카 상륙이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하여 10월 말에 드윗 중장에게 앰치트카 상륙을 긍정적으로 검토하도록 강력하게 권고했다.

어쩔 도리가 없어진 드윗 중장은 타나가 상륙을 무기한 연기함으로써 사실상 취소하고 정찰대를 다시 앰치트카로 보내어 그 결과에 따라 다시 결정하기로 했다.

앰치트카 정찰대의 재파견은 사실상 요식행위로서 타나가섬 상륙을 고집하던 드윗 중장이 물러날 명분을 얻고자 한 제안이었다.

 

그런데 테오발드 소장은 앰치트카 재정찰을 위하여 해군에서 카탈리나 비행정을 내주기를 딱 잘라 거부했다.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앰치트카 주변 해상에서 일본군에게 공격당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지만 누가 보아도 드윗 중장에 대한 불쾌감의 표출이었다.

그리하여 정찰대는 움낙섬의 포트글렌에서 1달이상을 허송세월하게 되었는데 이 사건은 일본군이 애투 및 키스카에 상륙한 이래 6개월 동안 쌓여온 테오발드 소장에 대한 육군 측의 불만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어 결국 테오발드 소장의 교체를 가져왔다.

사실 테오발드 소장과 육군의 알력은 테오발드 소장의 교체로 일단락되었지만 원인을 테오발드 소장에게만 돌리기는 어렵고 오히려 북태평양군의 복잡한 지휘체계로 인한 필연적인 결과에 가까웠다.

 

1942년 3월의 합동참모본부 결정에 따르면 알래스카 연안을 포함한 북태평양 해역은 니미츠 제독 관할이었다.

따라서 1942년 5월 말에 테오발드 소장이 니미츠 제독에 의하여 북태평양군사령관으로 임명되자 알래스카의 해군 뿐만 아니라 육군과 육군항공대 병력도 테오발드 소장의 지휘를 받아야 했다.

 

한편 알래스카방어사령부를 독립시키려던 시도가 실패하면서 알래스카의 육군은 서부방어사령관 드윗 중장의 지휘를 계속 받고 있었다.

드윗 중장은 계급도 테오발드 소장보다 높은 데다가 니미츠 제독의 지휘를 받지도 않았다.

게다가 미드웨이 해전 이후 미본토 서해안에 대한 침공 위협이 사실상 사라지면서 드윗 중장의 관심은 온통 애투섬과 키스카섬에 집중되었다.

 

알류샨 열도에서 대부분 기간동안 주력을 담당한 제11육군항공대는 유럽을 중시하던 육군항공대 사령관 아놀드 장군이

 

"알래스카 방어는 해군 책임"

 

이라고 공언한 이래 끈  떨어진 연 꼴이 되어 있었다.

따라서 제11육군항공대가 워싱턴의 육군항공대 수뇌부와 연락하려면 알래스카 방어사령부와 서부방어사령부를 통하는 길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은 알류샨 열도 작전에 대한 서부방어사령관 드윗 중장의 발언권을 더욱 높여주었다.

 

게다가 과달카날 섬에서 처절한 소모전이 계속되면서 태평양함대는 테오발드 제독 지휘 하의 해군 세력을 지속적으로 빼낼 수 밖에 없었고 이런 상황은 알류샨 열도 작전에 대한 테오발드 소장의 발언권을 더욱 약화시켰다.

그리하여 공식적으로 알류샨 열도 작전은 테오발드 소장의 관할이었으나 실제로는 테오발드 소장과 드윗 중장 사이에 이견이 생기면 각자 합동참모본부에 자신의 안을 제시하여 합동참모본부의 결정에 따르는 일종의 경쟁관계로 변질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작전을 매끄럽게 이끌어가려면 수뇌부 사이의 인간적 관계가 중요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테오발드 제독은 두뇌는 명석하나 화를 너무 잘 내어서 해군 내에서도 악명이 자자했고 북태평양군 사령관으로서 육군 지휘관들을 대하면서 이러한 자신의 성격을 제대로 억누르지 못했다.

결국 1942년 12월이 되자 테오발드 소장과 드윗 중장을 비롯한 육군 및 육군항공대 지휘관들과의 관계는 수습이 불가능할만큼 악화되었다.

 

만일 니미츠 제독이 애투섬과 키스카섬의 일본군들을 그냥 눌러두는 것으로 만족할 생각이었으면 이런 문제는 대충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니미츠 제독은 중부태평양 진격을 시작하기 전에 애투섬과 키스카섬을 탈환하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당시 미군은 키스카 섬의 일본군을 최대 1만명으로 추산하고 상륙군으로 최소한 1개 보병사단을 중심으로 한 25,000 명을 상륙시킬 계획이었는데 기후여건상 1943년 9월이 되기 전에 두 섬에 상륙을 완료해야 했다.

복잡하고 챙길 것이 많은 상륙작전의 특성상 25,000 명을 상륙시키는 대규모 상륙작전을 위해서는 상당한 준비기간이 필요했으므로 2번의 상륙작전을 하기에는 시간이 빠듯했다.

이런 상황에서 육군과의 사이가 극도로 나쁜 테오발드 소장에게 상륙작전을 총괄해야 할 북태평양군사령관직을 계속 맡길 수는 없었다.

결국 니미츠 제독은 1942년 12월 초에 테오발드 소장을 보스턴의 제1해군관구사령관으로 보내고 그 후임에 미해군 제일의 마당발로 유명한 토머스 킨케이드 소장을 임명했다.

 

(토머스 킨케이드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니미츠 제독은 남태평양에 있던 킨케이드 제독을 불러 1942년 12월 9일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니미츠-킹 회담에 데리고 갔다.

이 회담에서 킹 제독은 1943년 1월 4일자로 북태평양군 사령관 테오발드 소장을 보스턴의 제1해군구 사령관으로 보내고 대신 킨케이드 소장을 그 자리에 앉히겠다는 니미츠 제독의 제안을 승인했다.

이때 북태평양군의 전투함대를 지휘하던 윌리엄 스미스 소장도 찰스 맥모리스 소장으로 교체되었다. 

 

킨케이드 소장은 샌프란시스코까지 간 김에 그곳에 사령부를 두고 있던 서부방어사령관 드윗 중장을 12월 13일에 방문하여 앰치트카 상륙에 대하여 논의했다.

훌륭한 지휘관인 동시에 외교수완도 탁월했던 킨케이드 제독은 드윗 중장과의 만남에서 그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테오발드 소장과 불화를 겪으면서 해군과 제독에 대하여 나쁜 인상을 가지고 있던 드윗 중장은 킨케이드 제독과 토론을 마치고 나서 자신의 지론이었던 타나가 상륙을 포기했을 뿐 아니라 킨케이드 제독의 역량과 태도를 칭찬하면서 앰치트카 상륙을 적극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포트글렌에서 대기하고 있던 정찰대가 12월 17일-19일에 걸쳐 앰치트카를 정찰하여 섬에 아직 일본군이 없으며 2-3주면 전투기용 활주로를 만들 수 있는 평지가 있음을 확인했다.

 

앰치트가 상륙이 1943년 1월 9일로 결정되자 제11육군항공대는 애투와 키스카에 대한 공습을 강화했다.

1943년 1월 5일에 안개가 걷히자 애닥섬에서 출격한 폭격기들이 애투섬의 홀츠만에서 6,577톤짜리 몬트리올마루를 격침했고, 같은 날 쌍발폭격기들은 증원병력과 보급품들을 싣고 키스카로 접근하던 6,101톤짜리 고토히로마루를 격침했다.

이후로는 안개가 끼어 폭격이 불가능했다.

 

로이드 존스 준장이 지휘하는 2,000 명 규모의 앰치트카 상륙부대는 맥모리스 소장이 지휘하는 중순양함 1척(인디애나폴리스), 경순양함 2척(랠리, 디트로이트) 및 구축함 4척으로 이루어진 함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앰치트카에 접근했으나 날씨가 나빠서 해상에서 대기해야 했다.

1943년 1월 11일 밤에 윌리엄 포그 소령이 지휘하는 구축함 워든이 앰치트카섬의 콘스탄틴항에 진입하여 선발대를 상륙시켰고 다음날인 12일 저녁까지 본대를 실은 수송함 4척이 상륙을 완료했다.

적의 저항은 없었으나 앰치트카의 험난한 자연이 희생을 강요했다.

 

선발대를 상륙시키고 나오던 워든은 사나운 조류에 휩쓸리면서 암초에 부딪혀 기관실 바로 아래에 구멍이 났다.

구축함 듀이가 달려와 워든을 암초에서 끌어내었으나 갑자기 예인 케이블이 끊어지면서 워든은 사나운 조류에 휩쓸려 다시 암초에 부딪히면서 더 큰 구멍이 났다.

워든이 바위 투성이의 해안에 좌초하면서 함체 후방이 물에 잠기자 함장 포그 소령은 함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긴박한 탈출 과정에서 섭씨 2도 밖에 안되는 차가운 바닷물에 빠진 승무원들 중 14명이 사망했다. 

 

(좌초된 구축함 워든의 모습)

 

상륙부대는 일단 무사히 상륙했으나 그날밤에 심한 폭풍우가 몰아쳐서 수송함 아서미들턴과 수많은 상륙주정이 침수되었다.

1월 13일이 되자 폭풍우가 멎는가 싶더니 눈보라가 휘몰아치기 시작해 12일간 계속되었다.

24일에 겨우 눈보라가 멎자 일본군의 수상기가 날아와서 미군을 발견하고는 폭격을 가했으나 피해는 미미했다.

공병들이 곧 활주로 공사를 시작하여 2월 16일에 8대의 P-40 전투기들이 최초로 키스카섬 상공에 초계비행을 실시했다.

 

미군의 앰치트카 상륙은 일본군으로 하여금 양자택일을 강요했다.

이제 일본은 애투섬과 키스카섬에서 철수하든지 아니면 수비를 강화하고 비행장을 건설하여 미군의 보급선을 공격하는 맞불작전으로 나가야만 했다.

일본제5함대 사령관 호소가야 중장은 일본군에게 시간이 얼마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일 철수하려면 1달내로 하는 것이 안전했으며 일단 미군기가 앰치트카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면 수상함의 통행은 큰 지장을 받을 것이었다.

 

1943년 2월 5일, 일본해군은 미군의 공격으로부터 쿠릴 열도를 보호하기 위하여 애투와 키스카를 끝까지 지키기로 결정했다.

애투와 키스카의 방어를 위해서는 비행장이 반드시 필요했으므로 이후 일본군은 비행장 건설에 매진했으나 지형적인 불리함과 건설용 중장비의 부족, 그리고 미군의 집요한 공습 때문에 비행장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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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동계작전

 

북태평양을 담당한 제8임무부대의 함정세력은 1942년 10월부터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남쪽의 과달카날에서 일본해군과 무시무시한 소모전을 치르고 있던 니미츠 제독은 상대적으로 조용한 북태평양으로부터 점점 더 많은 함정들을 뽑아갔다.

1942년 10월 말까지 중순양함 1척(루이스빌)과 경순양함 2척(호놀룰루, 세인트루이스)이 과달카날로 불려갔고, 굴뚝 4개를 가진 구형 구축함 6척이 고속수송함으로 개조되기 위하여 미본토 서해안으로 떠났다. 

11월에도 함정 빼가기는 계속되어 결국 12월 1일이 되자 테오발드 소장 휘하에 남은 함정이라고는 경순양함 2척(디트로이트, 랠프), 구축함 4척, 그리고 어뢰정과 소형초계정 몇척이 전부였다.

 

북태평양의 미국잠수함 세력도 구형의 S보트 6척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수했으나 그 와중에서도 S-31은 10월 26일에 파라무시로 근해에서 일본수송선 케이잔마루를 격침했다.

 

북태평양의 해군세력이 줄어들자 제11육군항공대의 역할이 커졌다.

제11육군항공대도 중폭격기 상당수가 철수했으나 그 빈자리를 향상된 기량으로 메꾸었는데 특히 정박한 함선을 공격하는 기술은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

 

애닥섬의 11월은 엄청난 폭풍우로 시작되었다.

많은 비와 함께 시속 150km에 달하는 폭풍우가 몰아쳐서 애닥섬의 활주로는 30cm 깊이로 물에 잠겼고 모든 항공기의 이착륙이 불가능했다.

11월 7일에 폭풍우가 그치자 일본의 2식수상전투기 몇 대가 애닥섬의 활주로에 기습을 가하여 약간의 피해를 입히고 도망갔다.

 

이 2식수상전투기들은 전날 애투섬에서 키스카섬으로 날아온 것들이었다.

일본은 11월에 접어들면서 미군의 공습이 심해지자 수상기모함을 무리하게 키스카항에 보내는 대신 애투섬에 2식수상전투기들을 내려놓은 다음 키스카섬까지 날아가도록 했다.

그리하여 수상기모함 기미가와마루가 11월 6일에 애투섬에 6대의 2식수상전투기를 내려놓았고, 이들은 그날로 키스카섬까지 날아가서 다음날 애닥섬 공격에 참가했다.

키스카섬의 2식수상전투기들은 11월 8일에 폭풍우가 몰아쳤을 때 큰 피해를 입었다.

 

11월 9일에 B-17폭격기 1대, B-26쌍발폭격기 2대가 P-38전투기 4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키스카섬을 폭격했다.

B-17 폭격기가 해안의 시설물을 폭격하는 사이 B-26 쌍발폭격기 2대는 거트루드만에서 일본수송선을 폭격했으나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P-38 전투기 4대는 전날의 폭풍우로 큰 피해를 입고 홀츠만의 해안에 밀려나와 있던 2식수상전투기들에게 기총소사를 퍼부어 파괴했다.

이로써 키스카섬에 남아있던 2식수상전투기 8대는 전멸했다.

이후 키스카섬의 일본군들은 1달 이상 전투기없이 지내다가 12월 24일에 기미가와마루가 다시 애투 섬에 7대의 2식수상전투기를 내려놓았고 이들 중 6대가 다음날 키스카섬에 도착했다.

 

11월 10일부터 다시 폭풍우가 몰아쳐서 애닥섬의 미군기들은 지상에 머물러야 했다.

애닥의 미군기들은 11월 25일에 날이 개자 다시 키스카로 날아가 홀츠만에서 4,016톤짜리 체리본마루를 공격했고 다음날에는 2,427톤짜리 가초산마루를 공격했다.

두척 모두 큰 피해를 입고 침수가 심해져서 해안에 좌초되었다.

 

12월에는 애닥섬의 기상 때문에 폭격이 거의 불가능했다.

1942년의 마지막날인 12월 31일에 애닥섬의 미군기들은 키스카섬을 공격하여 3,100톤짜리 수송선 1척을 격침하고 다른 1척에 큰 피해를 입혔다.

 

(알류샨 열도. 출처는 여기로)

 

그동안 육군공병대와 해군건설대대는 건설작업에 매진했다.

미군은 애닥섬을 알래스카 최대의 군사기지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 계획에 따라 애닥섬에 15,000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소를 비롯하여 창고와 통신소등이 들어섰다.

비행장에는 격납고와 2층짜리 관제탑이 들어섰고 쿨룩만에는 부두와 건선거가 만들어졌다.

 

(미군의 전진기지로 변모한 애닥 섬의 모습. 앞에 보이는 것은 활주로다.)

 

육군공병대는 애닥섬의 동쪽에 위치한 애트카섬에 상륙하여 12월 27일까지 900m 길이의 비상활주로를 완성했다.

애닥섬과 애트카섬 사이에 있는 그레이트시트킨섬의 샌드만에는 보급기지가 만들어졌다.

이곳에는 급유용부두와 연료 및 탄약 저장고가 들어섰다.

 

카탈리나정찰비행정을 운용하는 해군의 제4초계비행단에게 알류샨열도의 겨울은 힘든 계절이었다.

정찰비행은 도저히 비행이 불가능한 날씨가 아니라면 웬만큼 바람이 불거나 구름이 끼어도  빼먹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카탈리나의 엔진을 토치로 가열하고 날개에 낀 얼음을 긁어내고 곱은 손으로 어뢰나 폭탄을 장착하고 가끔씩 하강 기류를 정면으로 받으면서 무거운 정찰비행정을 이륙시켜야 했다.

해상에서 운용하는 카탈리나는 창에 부딪히는 물보라가 얼어붙어 와이퍼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나마 레이더 덕분에 악천후 속에서도 정찰비행이 가능했다.

기압을 측정하여 높이로 나타내는 고도계는 기압이 다른 기상전선을 통과할 때는 오차가 크게 나타났으며 까딱 실수로 조난이라도 당하여 해상에서 탈출할 경우 즉시 구조되지 않는 이상 체온저하로 금방 사망했다.

 

군수지원이 부족했던 초기에는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의 지상요원들이 마치 거지들처럼 여기저기서 얻어먹으면서 임무를 수행했다.

그들은 육군이나 해군의 함정에게서 음식과 옷, 공구, 심지어는 옹벽을 만드는데 쓸 널빤지나 철판까지 구걸해가면서 카탈리나 비행정들을 돌보았다.

 

(PBY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어뢰정들 또한 애닥섬의 겨울날씨에 고생했다.

 

 

 

 

 

 

미해군은 알류샨열도에 안개가 자주 끼기 때문에 어뢰정들이 활약하기 좋다고 생각해서 미드웨이에 배치되어 있던 클린턴 맥켈러 중위의 제1어뢰정편대(PT-22, 24, 27, 28)를 파견했다.

어뢰정들은 8월 20일에 미드웨이를 떠나서 알래스카 연안을 따라 자력으로 4,000km 를 항해하여 9월 1일에 더치하버에 도착했다.

이들은 얼마후 일본군의 상륙에 대비하여 애닥섬으로 보내졌다.

애닥섬에 대한 일본군의 상륙은 없었으므로 어뢰정들은 해상을 초계하거나 육군을위하여 보급품을 실어주기도 하고 기뢰를 부설하기도 했다.

겨울에 바다에 나서면 매서운 바람이 들어와 실내에 5cm 두께로 얼음이 얼 정도였는데 어뢰정 내에는 주방의 휘발유 스토브 이외에는 별도의 난방장치가 없었다. 

이런 날에는 갑판에 얼어붙은 얼음의 무게로 인하여 위험해질 정도로 흘수가 깊어지고는 했다.

 

어느 겨울날 해상에서 폭풍우를 만난 어뢰정 4척은 후미진 만내로 대피했으나 그곳에서 조난당했다.

정박하기 위하여 투묘한 닻은 폭풍우에 힘없이 끌려 다녔고 어뢰정끼리 묶어둔 로프는 끊어졌다.

결국 어뢰정 4척 중 1척은 침몰하고 나머지 3척은 해안에 좌초되었다.

다음날 애닥섬의 경비정들이 다가와서 죄초된 어뢰정들을 해안에서 끌어내려고 하자 로프가 끊어지거나 걸쇠가 망가져 버렸다.

그러나 다행히 그날 오후까지 3척의 어뢰정들은 무사히 바다로 다시 나왔다.

사망자가 없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1942년 12월 27일에는 조셉 레버튼 소령이 지휘하는 구축함형 소해함 와스무스가 악천후의 희생자가 되었다.

와스무스가 심한 폭풍우를 만나 만내에서 6노트로 느린 속력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 폭뢰 2발이 떨어져서 물속에서 폭발했다.

같이 있던 유조선 라마포가 와스무스를 예인하려 했으나 용골에 치명타를 입은 와스무스는 결국 침몰했다.

다행히 와스무스의 승무원들은 모두 라마포에 의하여 구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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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애닥 섬 상륙 

 

미본토 서해안과 알래스카를 담당하던 서부방어사령관 존 드윗 중장은 일본군이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장악한 지 1주일도 지나지 않은 6월 14일에 전쟁성에 전문을 보내어 일본군이 방어를 굳히기 전에 이 두 섬에 상륙하여 탈환하자고 주장했다. 

미함대총사령관이자 해군참모총장인 킹 해군대장이 전쟁성에 키스카 및 애투 상륙작전에 대한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히자 드윗 중장은 한발 물러났다.

그는 1942년 7월 16일에 합동참모본부에 전문을 보내어 키스카 섬에서 동쪽으로 320km 떨어진 타나가 섬에 상륙하여 비행장을 만들자고 제의했다.

 

당시 북태평양군 사령관 테오발드 해군소장도 움낙섬 서쪽에 전진 비행장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는데 그는 타나가섬에서 동쪽으로 80km 떨어진 애닥섬에 상륙하기를 원했다. 

애닥섬의 쿨룩만은 4계절 내내 사용할 수 있는 양항이었으나 타나가 섬에는 그러한 양항이 없어서 겨울철에는 보급에 지장이 예상되었다.

제11육군항공대는 타나가섬을 선호하여 타나가섬에는 2-3주면 활주로를 만들 수 있는 평지가 있지만 애닥섬에 활주로를 만들려면 4달은 걸린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타나가섬을 주장하는 육군과 애닥섬을 주장하는 해군이 대립하다가 결국 8월 21일에 육군참모총장 마셜 대장이 양보함으로써 다음날인 8월 22일에 애닥섬에 상륙하라는 합동참모본부의 명령이 나왔다.

상륙날짜는 8월 30일이었다.

 

(알류샨 열도. 출처는 여기로)

 

애닥섬이든 타나가섬이든 둘중 한곳에 곧 상륙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알래스카의 육군과 해군은 미리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8월 25일부터 움낙 섬의 포트 글렌에서 P-38 전투기들이 애닥섬 상공을 초계하기 시작했고 상륙 이틀전인 28일에는 37명으로 이루어진 정찰대가 애닥섬에 상륙하여 일본군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콜드베이를 출발한 선두 제파는 8월 30일에 쿨룩만에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상륙했다.

다음날 저녁까지 제807공병항공대대를 포함하여 4,500 여명의 병력 및 장비, 보급품들이 요트, 개조한 어선 및 예인선에 끌려온 바지선 등으로 이루어진 약 250척의 잡동사니 함대에 실려와서 무사히 상륙을 마쳤다.

비행장 부지를 찾아 애닥 섬을 수색하던 육군공병대는 스위퍼 샛강이 바다로 흘러가는 부분에서 기가 막힌 활주로 부지를 찾아내었다.

공병대는 스위퍼 샛강의 흐름을 돌리고 배수로를 만드는 동시에 샛강 바닥을 돋우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간척지를 다지고 그 위에 마스덴 매트를 깔자 열흘 만에 활주로가 완성되었다.

1942년 9월 10일에 벌써 B-18 쌍발폭격기가 최초로 착륙했고 이후 13일까지 B-24 중폭격기 16대와 P-38 및 P-39 전투기 41대가 추가로 도착했다.

 

(애닥섬의 작은 만에서 미군 공병대의 불도저들이 활주로 건설에 사용할 모래들을 준설하고 있다.)

 

한편 일본군은 8월에 애투섬 수비대를 모두 키스카섬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애투섬 수비대의 이동은 수송선과 구축함을 사용하여 8월 27일부터 9월 16일까지 3차에 걸쳐 무사히 실시되었다.

 

이 기간에 키스카섬 주변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하여 초계중이던 일본잠수함 RO-61 이 8월 29일에 애트카섬의 나잔만에서 미군의 애닥섬 상륙을 지원하기 위하여 정박중이던 수상기모함 카스코를 발견했다.

RO-61의 함장 도쿠토미 대위는 어뢰를 발사하여 1발을 명중시켰다.

5명의 사망자와 20명의 부상자를 기록한 카스코는 해안에 안전하게 좌초하여 긴급 수리를 마친 후 코디액섬에 들렀다가 수리를 위하여 워싱턴주에 있는 퓨젯사운드 조선소의 건선거에 들어갔다.

 

(RO-61 이 발사한 어뢰에 맞은 카스코의 함저 부분을 퓨젯사운드 조선소의 기술자들이 살펴보고 있다.)

 

다음날인 8월 30일에 해상을 수색하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이 RO-61을 발견하고 폭뢰를 투하하여 손상을 입혔다.

RO-61은 급히 잠항했으나 손상된 함체에서 기름이 흘러 나왔다.

카탈리나의 보고를 받고 현장에 도착한 구축함 레이드의 함장 해리 맥킬헤니 소령은 해상의 기름자국을 따라 추적하여 결국 소나로 RO-61을 탐지하는데 성공했다.

레이드는 2차례의 폭뢰공격을 퍼부어 RO-61 에 큰 피해를 입혔고 RO-61 이 부상하자 포격을 가하여 격침했다.

RO-61 의 승무원 5명이 포로로 잡히자 맥킬헤니 소령은 이 포로들을 애트카 섬에 좌초한 채 수리 중이던 카스코로 보냈다.

 

9월 14일에 애닥섬을 출격한 미군기가 최초로 키스카섬을 폭격했다.

거리가 가까워졌으므로 이제 12대의 B-24 중폭격기들은 28대의 P-38 및 P-39 전투기의 호위를 받으면서 저공폭격을 가할 수 있었다.

키스카항의 함정들을 노린 6대의 B-24 폭격기는 450kg 짜리 고폭탄을 장비했고 막사와 잠수함 기지를 비롯한 지상목표를 노린 6대의 B-24 폭격기는 소형폭탄과 소이탄들을 장비했다.

 

공습은 성공적이었다.

저공으로 진입한 P-39 전투기들이 37mm 기관포로 사격을 가하여 키스카 항에 정박 중이던 잠수함 3척에게 피해를 입히고 0식수상정찰기 1대를 파괴했다.

450kg 짜리 고폭탄을 장착한 B-24 폭격기 6대는 키스카 항 내에 정박 중이던 소해정 2척과 수송선 1척을 격침했다.

다른 6대의 B-24 폭격기들은 일본군 막사와 잠수함 기지를 폭격하여 피해를 입히고 화재를 일으켰다.

 

일본군의 2식수상전투기들이 반격을 위하여 떠오르자 P-38 전투기들이 요격하여 3대를 격추했다.

이 와중에 1대의 2식수상전투기를 동시에 쫓던 P-38 전투기 2대가 공중충돌하여 추락했다.

이렇게 상실한 P-38  전투기 2대가 미군공격대의 유일한 피해였다.

공습이 끝나자 키스카의 2식수상전투기는 1대만 남았다.

이후 열흘간 애닥섬의 미군기들은 악천후 때문에 지상에 머물러야만 했다.

 

9월 24일에 일본의 수상기 모함 기미카와마루가 키스카 섬에 도착하여 2식수상전투기 6대와 0식수상정찰기 2대를 내려놓았다.

 

다음날인 25일에 날씨가 개자 애닥섬의 미군기들이 다시 키스카섬을 공습했다.

B-24 폭격기 9대 및 B-17 폭격기 1대가 폭격을 담당했으며 사진촬영을 위하여 B-17 폭격기 1대가 동행했다.

P-39 전투기 11대와 P-40 전투기 17대가 호위를 담당했는데 P-40 전투기 중 11대는 캐나다 공군 소속이었다.

폭격기들이 키스카 항에서 수송선 1척을 격침하고 다른 선박 몇척에 피해를 입히는 동안 전투기들은 리틀키스카섬을 기총소사하여 탄약고를 폭파시키고 화재를 일으켰다.

전투기들은 또한 해상에 계류중이던 0식 수상정찰기 5대를 파괴하고 요격에 나선 2식 수상전투기 2대를 격추했다.

 

이후 애닥섬의 미군기들은 3주 동안 거의 매일 키스카섬을 공습하여 주로 지상시설에 큰 피해를 주었다.

9월 한달동안 애닥섬의 미군기들은 키스카섬에 116톤의 폭탄을 투하했는데 이것은 키스카섬에 일본군이 상륙한 이후 지난 3개월간 투하한 폭탄의 합계보다 2배가 더 많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합계 15,000 톤의 수송선 2척과 소해정 2척을 격침하고 잠수함 3척에 피해를 입혔으며 0식수상정찰기 6대를 해상에서 파괴했다.

또한 일본군의 막사와 창고 및 잠수함기지 등에 큰 피해를 입혔고 그 과정에서 요격에 나선 일본의 2식수상전투기 5대를 격추했다.

 

10월에 들어와서도 폭격은 거의 매일 계속되었다.

10월 14일에는 애닥섬에서 쌍발폭격기가 최초로 공습에 나섰다.

이날 중폭격기들이 일본군의 탄약고를 폭격하여 커다란 화재를 일으키는 동안 B-26 쌍발폭격기 3대가 키스카항에 정박중인 일본선박을 겨냥하여 어뢰 3발을 발사했으나 모두 빗나갔다.

 

이틀 후인 10월 16일에 쌍발폭격기들은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1대가 보급선단을 호위하여 키스카섬에 온 일본구축함 오보로와 하츠하루를 키스카섬 북쪽 50km 해상에서 발견했다.

즉시 애닥 섬에서 B-26 쌍발폭격기 6대가 출격하여 오보로와 하츠하루에게 136kg 짜리 폭탄 24발을 퍼부었다.

오보로는 탄약고가 명중되어 순식간에 침몰했다.

219명의 승무원들 중 202명이 사망했으며 함장 야마나 소좌를 비롯한 생존자 17명은 하츠하루에게 구조되었다.

하츠하루도 후갑판에 명중탄을 맞아 프로펠러가 손상되는 등 대파되었으나 다행히 침몰은 면했다.

오보로의 생존자 17명을 구조하여 철수한 하츠하루는 이후 일본 본토의 건선거에 들어앉아 수리를 받아야 했으며 1년이 지난 1943년 10월에야 전열에 복귀할 수 있었다. 

 

애닥섬의 미군기들은 10월 한달동안 약 200톤의 폭탄을 키스카에 투하했다.

 

일본군은 안개 때문에 미군의 애닥섬 상륙을 9월 말이 되어서야 알아차렸다.

10월 초에 일본군의 수상기들이 애닥섬의 활주로를 기습했으나 거의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미군이 애닥섬에 상륙하자 일본은 미군이 애투와 키스카에 상륙할 의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수비대가 키스카 섬으로 옮겨간 뒤 비어있던 애투 섬에는 10월 말에 1,000 명 규모의 수비대가 상륙했다.

12월 2일에는 1,115명의 병력을 태운 수송선 2척이 순양함 2척과 구축함 2척의 호위를 받으면 키스카 섬에 도착하여 이제 키스카섬의 병력은 약 4,000 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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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키스카 섬 포격 

 

북태평양군 사령관 테오발드 소장은 지지부진한 폭격 대신 함대를 끌고가서 키스카 섬을 포격하기로 결심했다.

1942년 7월 18일, 중순양함 2척(인디애나폴리스, 루이스빌), 경순양함 3척 (호놀룰루, 내쉬빌, 세인트루이스), 구축함 5척(케이스, 레이드, 그리들리, 멕콜, 모내헌), 구축함형 소해함 4척(램버트, 엘리엇, 롱, 챈들러)이 키스카 섬 포격을 위하여 코디액 섬을 떠났다.

7월 21일에 급유함 과달루페로부터 급유를 받은 미함대는 키스카 섬에 접근했으나 안개가 너무 짙어서 포격이 불가능했다.

기함 인디애나폴리스 함상의 테오발드 소장은 22일 하루동안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렸으나 안개가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할 수 없이 포격을 연기하고 돌아왔다.

 

테오발드 제독은 7월 27일에도 같은 함정들을 거느리고 출격했는데 가는 도중 안개 속에서 변침하다가 두 번의 충돌사고가 일어나서 구축함 모내헌과 구축함형 소해함 램버트, 롱, 챈들러를 돌려 보내야 했다.

소해함 4척 중 3척이 없어진 상황에서 소해작업도 하지 않고 키스카 섬에 접근하기를 꺼린 테오발드 소장은 코디액 섬으로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만일 테오발드 소장이 이때 키스카 섬 포격을 감행했다면 좋은 전과를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키스카 항 내에는 구축함 3척, 소형 기뢰부설함 2척, 유조선 1척, 10,000톤급 수송선 1척, 소형 수송선 2척 등 키스카에서는 보기 드물게 많은 배들이 몰려 있었다.

 

8월 3일, 미함대는 3번째로 키스카 섬을 포격하기 위하여 코디액 섬을 출항했다.

이번에는 윌리엄 스미스 소장이 함대를 지휘했고 테오발드 소장은 코디액 섬에 머물렀다.

함대의 구성은 지난번에 충돌 사고를 일으킨 4척을 제외하고 그대로였다.

 

8월 7일 오후 4시가 되자 키스카 섬 상공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으로부터 키스카 섬의 상공이 잠깐 개었다는 기상보고가 들어왔으나 미함대 부근의 해상은 여전히 짙은 안개로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미함대는 이틀 전에 천체관측으로 측정한 위치를 기반으로 조류의 영향이 최소화되기를 빌면서 2시간 동안 추정항법으로 항해했다.

오후 6시 30분에 최종 접근 항로로 접어들자 스미스 소장은 함대 속력을 20노트로 줄이고 각 순양함에서는 2대씩 수상정찰기들을 발진시켰다.

그러나 육안으로 키스카 섬을 확인하기 전에 다시 안개가 짙어지자 스미스 소장은 일단 함대를 뒤로 뺐다.

잠시 후 다시 실시한 2번째 접근 시도에서 오후 7시 34분에 선두에 섰던 구축함 케이스의 견시가  키스카 섬 북쪽의 키스카 화산을 쌍안경으로 확인했고 이어서 전 함대의 장병들이 환성을 질렀다.

 

(키스카 섬 포격 상황도. 출처 : Aleutians, Gilberts and Marshalls, P.11)

 

키스카 섬은 애벌레처럼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비스듬히 누웠으며 폭은 약 5km - 6km 정도이고, 길이는 약 35km 정도이다.

동해안의 중앙쯤에 키스카 항이 움푹 들어가 있으며 키스카 항의 남쪽 면이 리틀키스카 섬과 함께 키스카 항의 남쪽 방벽을 이룬다.

일본군의 기지는 대부분 키스카 항의 북쪽 및 서쪽 해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미함대의 계획은 일본군 해안포의 위협을 의식하여 표적을 육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고 키스카 항의 남쪽에서 간접사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포격 거리는 5인치 포를 가진 구축함들은 약 13,000m, 6인치 포를 가진 경순양함들은 약 15,000m, 그리고 8인치 포를 가진 중순양함들은 약18,000m 였다.

이러한 간접사격에는 수상정찰기의 탄착관측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나 제로기의 수상기형인 2식 수상전투기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미해군의 수상정찰기들을 모두 쫓아버렸으므로 미함대는 탄착보정을 받지 못한 채로 간접사격을 실시해야만 했다.

 

북상하던 미함대는 오후 8시 정각부터 우측으로 90도 변침하면서 키스카 섬의 일본군 기지를 향하여 20분 간 일제사격을 실시했다.

일분군의 해안포도 지지 않고 2식 수상전투기의 탄착수정을 받으면서 반격을 가해왔으나 명중탄을 기록하지는 못했다.

폭탄을 장착한 2식 수상전투기 1대와 97식 비행정 1대가 낮게 깔린 구름을 뚫고 내려와 선두의 구축함 케이스를 노리고 폭탄을 투하했으나 빗나갔다.

20분 간의 포격을 끝낸 미함대는 오후 8시 21분에 남쪽으로 변침하여 철수했다.

 

키스카 남쪽 해상에서 순양함들은 수상정찰기들을 회수했다.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의 수상정찰기 중 1대가 격추되었고, 나머지 수상정찰기들도 2식 수상전투기와 일본군의 대공포에 의하여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는데 3대는 기체에 100 개 이상의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중의 1대는 167개의 구멍이 뚫려 있었으며 조종사는 발뒤꿈치에 총탄을 맞았다.

경순양함 세인트루이스의 수상정찰기 1대는 모함을 찾지 못하고 안개 속에서 섬들을 더듬어 움낙 섬의 포트 글렌까지 무사히 돌아갔다. 

 

미함대의 포격은 키스카 섬의 일본군에게 어느 정도의 피해를 주었으나 썩 만족한 수준은 아니었다.

키스카 항에 계류 중이던 97식 비행정 3대가 파괴되었으며 선박과 해안 사이로 화물을 운반하던 바지선도 산산조각이 났다.

또한 7월 30일에 미잠수함 그러니언의 어뢰를 맞고 대파되었던 가노마루도 포탄에 맞아 불이 났다.

그날 밤에 미해군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들이 키스카 섬에 찾아와 불타는 가노마루에게 추가로 어뢰공격을 가하여 끝내 격침했다.

키스카 항 북쪽에 있던 일본군 막사도 포탄에 맞아 화재가 발생했다.

그러나 키스카 항 내에 있던 일본군의 구축함 2척, 구잠함 3척 및 잠수정들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으며 사망자도 몇 명 되지 않았다.

 

일본군은 이 포격 이후 남아있던 97식 비행정 2대를 키스카 섬으로부터 철수시키고, 대신 0식 수상정찰기 10대를 배치했다.

 

(아이치 E13A 0식 수상정찰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한편 스미스 소장은 함정들에 대한 위험 부담에 비하여 포격의 효과가 적다고 결론내렸으며 따라서 1943년 1월 4일에 테오발드 소장이 교체될 때까지 키스카 섬에 대한 함포사격은 두 번 다시 실시되지 않았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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