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AL 작전 

 

일본해군이 미드웨이 작전과 동시에 실시한 알류샨 침공 작전인 AL 작전은 오랫동안 미드웨이를 노린 MI 작전의 양동작전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사실 AL 작전은 MI 작전과는 별개의 작전이며 단지 미해군이 다른 곳에서 바쁜 틈에 쉽게 성공시키기 위하여 대본영 군령부가 MI 작전에 끼워넣은 것이다.

 

AL 작전의 목표는 알류샨 열도 서단의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장악하여 미군이 알류샨 열도를 통하여 일본을 침공하거나 이곳에 비행장을 만들어 일본을 폭격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그리고 만일 필요하면 애투와 키스카 섬을 활용하여 미국과 소련 사이의 보급로를 차단할 생각이었다.

 

일본군의 계획을 보면 그들이 알류샨 열도의 기후와 지형에 대하여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알류샨 열도의 기후는 비행과 항해에 끔찍한 수준이었다.

섬들은 기복이 심하여 비행장을 만들 평지가 드물었으며 스펀지처럼 물렁거리는 지반은 건물을 짓기에 부적당했다.

따라서 알류샨 열도를 거쳐 수십만 대군이 일본을 침공하거나 이곳에 거대한 비행장을 만들어 수백대의 장거리 폭격기로 일본을 폭격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AL 작전은 3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1단계는 더치하버를 공습하고 애투 섬과 키스카 섬에 상륙하여 장악하는 단계로서 6월 12일까지 끝내게 되어 있었다.

제2단계는 미군의 반격을 막기 위한 것으로 경항모 즈이호를 포함하여 미드웨이 점령대 소속의 함정들이 북방부대에 합류하게 되어 있었다.

제3단계는 제2단계가 6월 20일까지 끝나지 않을 때에 발동하게 되어 있었으며 전함 4척(공고, 하루나, 기리시마, 히에이)를 포함하여 MI 작전에 참가했던 함정들이 대거 북방부대에 합류하게 되어 있었다.

 

실제로는 제1기동부대가 미드웨이 해전에서 참패하고 알류샨 열도 방면에서 미군의 반격이 미미함에 따라 AL 작전은 제1단계로 끝났다.

 

일본군은 알류샨 열도의 미군 병력을 실제보다 훨씬 강력하게 추정했다.  

미육군 5,425명과 해군 및 해병대 639명이 지키던 더치하버는 완편된 1개 보병사단이 지키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10명의 비무장 기상관측요원이 있던 키스카 섬은 1개 중대의 해병대가 지키는 것으로 생각했다.

군인은 1명도 없이 존스 부부가 목사 겸 지역 사회의 교사 및 지도자 역할을 맡고 있던 애투 섬에는 최소한 2개 중대 이상의 병력이 주둔 중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날씨 때문에 알류샨 열도에 대한 항공정찰이 실패하자 일본군은 잠수함을 파견했다.

I-9 가 5월 25일과 26일에 웨스턴 섬을, I-25 가 5월 26일과 27일에 코디액을, 그리고 I-19가 5월 28일과 29일에 더치하버를 정찰했으나 수면에서 잠망경으로 바라보는 정찰방식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예를 들어 더치하버를 정찰한 I-19 는 움낙 섬도 정찰했지만 포트 글렌 비행장을 발견하지 못했다.

 

AL 작전을 담당한 북방부대는 기함 나치에 승좌한 제5함대 사령관 호소가야 보시로 중장이 지휘했다.

북방부대는 크게 3개로 나뉘어져 있었다.

개장항모 준요와 경항모 류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제2기동부대는 류조에 승좌한 제4항공전대 사령관 가쿠다 가쿠지 소장의 지휘 하에 6월 3일부터 더치하버를 공습하여 미군이 애투와 키스카 상륙작전을 방해하지 못하게 만드는 역할을 맡았다.

해군특별육전대 550명과 설영대 700 명으로 이루어진 키스카 점령대는 키스카 섬을 점령한 후 방어시설을 건설할 예정이었다.

육군 1,143명으로 이루어진 애닥-애투 점령대는 먼저 애닥 섬에 상륙하여 방어군을 섬멸하고 미군 기지를 파괴한 후에 철수하여 다시 애투 섬에 상륙해 점령할 예정이었다.

 

알류샨 열도를 공격하려는 일본군의 의도를 1942년 5월 초에 알아낸 미태평양함대 사령관 니미츠 대장은 미드웨이 해전 준비에 주력하는 가운데서도 알래스카의 방어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는 미드웨이 해전 준비에 지장을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전 태평양을 샅샅이 뒤져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3척, 구축함 9척, 잠수함 6척을 찾아내어 로버트 테오발드 소장 지휘 하에 알래스카로 파견했다.

임박한 일본군의 공세를 앞두고 1942년 5월 21일에 제8임무부대(Task Force 8)가 편성되었는데 사령관 테오발드 소장은 파커 대령의 알래스카 해군은 물론 버틀러 준장의 제11육군항공대와 버크너 소장의 알래스카 방어 사령부에 대한 명령권까지 부여받았다.

제8임무부대가 편성되기 2주 전부터 알래스카 해군과 알래스카 방어 사령부는 태평양 함대 사령부로부터 일본군의 침공에 대한 경고를 받고 알류샨 열도를 포함한 알래스카에서 민간인과 상선들을 최대한 빨리 철수시키고 반면에 증원군을 투입하느라 정신없이 일하고 있었다.

 

제8임무부대의 함정들은 태평양 여러 곳에 흩어져 있어서 집결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실제로 테오발드 소장이 직접 지휘하는 제8임무부대의 주력부대인 순양함 5척과 구축함 4척이 코디액 섬 남방 640km 해상에서 합류한 것은 더치하버 공습 직전인 6월 3일 오전 5시였다.

 

테오발드 소장은 5월 28일에 코디액 섬에 도착하여 버틀러 준장, 파커 대령, 그리고 카탈리나 기들을 지휘하던 게레즈 대령을 포함한 주요 지휘관 및 참모들과 4일 간에 걸친 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제8임무부대는 6개의 부대로 나뉘어졌다.

 

1. 주력 부대 : 순양함 5척과 구축함 4척으로 이루어져 테오발드 소장이 직접 지휘했다.

코디액 섬 남쪽 해상을 지키다가 기회를 보아 일본함대와 교전할 예정이었다.

 

2. 해상 수색 부대 : 알래스카 해군의 초계정으로 이루어져 일본군의 접근을 감시하기로 했다. 

 

3. 공중 수색 부대 : 콜드 베이, 샌드 포인트, 그리고 더치하버에 정박한 수상기 모함 3척이 운용하는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20대와 육군 항공대의 B-17 폭격기 1대로 이루어져 매일 해상을 수색하면서 일본군의 접근을 감시하기로 했다.

 

4. 공습부대 : 포트 글렌, 콜드베이, 그리고 코디액에서 출격하는 육군항공대의 전투기 및 폭격기로 이루어져 일본함대의 위치가 파악되면 공습을 가할 임무를 맡았다.

필요하면 앵커리지로부터 항공기들을 증원받을 예정이었다.

 

5. 구축함 습격대 : 9척의 구축함으로 이루어져 우날래스카 섬 북안의 마쿠신 만에 대기하고 있다가 일본함대가 더치하버나 콜드베이에 접근하면 공격을 가할 예정이었다.

 

6. 잠수함 부대 : 6척의 잠수함으로 이루어져 일본함대의 접근로를 감시하고 공격할 예정이었다.

 

(1940년 당시의 알래스카. 출처 :  The Corps of Engineers - The War Aginst Japan. P.13)

 

협의 과정에서 가장 큰 난관은 육군항공대의 배치 문제였다.

일본함대가 최소한 2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항모가 없는 제8임무부대로서는 우선 일본항모를 처리해야만 수상전투가 가능했는데 항모 타격 임무는 육군항공대의 폭격기들이 담당해야 했다.

테오발드 소장은 최대한 많은 폭격기들을 항모 공격에 동원하기 위하여 전진 비행장인 포트 글렌과 콜드 베이에 모든 항공기들을 집결시키고 싶어했다.

그러나 제11육군항공대 사령관 버틀러 준장은 대부분의 항공기를 앵커리지와 코디액 섬에 주둔시키고 있다가 마지막 순간에 전방 비행장으로 진출시키기를 원했고 알래스카 방어 사령관 버크너 소장도 버틀러 준장을 지지했다.

강력한 반대에 직면한 테오발드 소장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휘두르는 대신 버틀러 준장을 간곡하게 설득하여 결국 총 163대의 육군항공대 항공기 중에서 57대를 포트 글렌과 콜드 베이에 전진배치시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두뇌는 명석하나 성격이 불같아서 육군으로부터 '역사상 가장 화를 잘 내는 제독' 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은 테오발드 소장으로서는 그야말로 최대한으로 인내한 셈이었다.

 

(제8임무부대 사령관 로버트 테오발드 소장)

 

하지만 제11육군항공대로서도 할 말은 있었다.

당시 포트 글렌과 콜드베이는 막 가동을 시작한 신생 기지로 격납고나 옹벽 등 지상의 항공기를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 전무했다.

전쟁 첫날 진주만과 필리핀의 클라크 기지에서 일본기의 공습에 의하여 다수의 항공기를 지상에서 상실한 뼈아픈 경험을 가진 육군항공대는 이후 항공기 보호 시설이 빈약한 기지에서 작전하는 것을 꺼렸다.

더구나 당분간 알래스카로의 항공기 증원은 없을 예정이었다.

 

워싱턴에서는 진주만을 기습당한데 이어 태평양 방면에서 연속적으로 일본군에게 끔찍한 패배를 거듭하면서 생긴 

 

'지금 당장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anything can happen now')

 

증후군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높으신 분들 중 많은 숫자가 일본이 미본토 서해안을 직접 공격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알래스카에서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는 항공기 수백대가 오지도 않을 일본함대를 기다리면서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한 미본토 서해안에 가득 쌓여 있었다.

심지어 일본해군과 건곤일척의 대해전을 앞두고 있던 니미츠 제독의 B-17 폭격기 증원 요청도 거절당하는 판이었으니 당시 미본토 서해안 침공에 대한 워싱턴의 공포와 편집증이 어느 정도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선 순위의 맨 뒤쪽에 있는 알래스카의 제11육군항공대가 추가로 비행기를 탐낸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소리였다.

 

항공기 보호 문제와 더불어 제11육군항공대는 콜드 베이 기지는 폭격기 12대와 전투기 24대, 포트 글렌은 기종을 불문하고 12대가 넘는 항공기의 작전을 지원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사실 콜드베이 기지는 차치하고라도 포트 글렌의 열악한 활주로 상태를 감안하면 육군항공대로서도 나름대로 테오발드 소장의 요구를 들어주려고 노력한 셈이었다.

 

태평양함대의 암호해독반에서는 1942년 5월 초에 일본군의 알류샨 열도 공격 의도를 알았지만 정확한 목표는 파악하지 못했으므로 테오발드 소장은 일본군의 목표가 더치하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5월 28일에 암호해독반이 일본군의 목표가 서부 알류샨의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이라는 사실을 파악하자 니미츠 제독은 테오발드 소장에게 이 내용을 통보했다.

그러나 테오발드 소장은 일본군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서부 알류샨의 두 섬을 노리고 있다는 새로운 정보가 진짜 목표로부터 그를 끌어내려는 일본군의 역정보가 아닐까 우려했다.

경찰병력이 얼마 없는 마을에 중무장한 은행강도단이 접근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와서 마을 중앙의 은행을 지키고 있는데 갑자기 은행강도단의 목표가 마을 외곽의 우체통이라는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다고 해서 경찰이 은행을 비워두고 아무 가치도 없는 우체통을 구하러 달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은행강도단은 진짜로 마을 중앙의 은행 대신 편지 몇 통만 들어있던 마을 외곽의 우체통을 털었다!'

 

이것이 일본의 애투 섬 및 키스카 섬 상륙을 바라보는 미해군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실제로 미드웨이 해전이 끝난 후에 일본군이  애투와 키스카에 상륙하기 위하여 상당한 전력을 할애했다는 것을 알게 된 해군장관 프랭크 녹스는

 

"일본은 현대전을 이해할 수 없거나 그것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

("Japan was either unable to understand modern war or not qualified to take part in it.")

 

고 말했으며, 해군전사를 집필한 새뮤얼 모리슨 제독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일본은 전쟁 중에 숱한 바보 짓을 했지만 적어도 우리가 아는 한 알류샨 열도를 거쳐 미국을 침공하겠다는 따위의 멍청한 짓은 한번도 심각하게 고려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우리가 그 짓을 거꾸로 시도할만큼 바보라고 생각했다!"

(The Japanese did many foolish things during the war, but never, so far as we know, did they seriously contemplate anything so idiotic as invading the United States via the Aleutians - yet they thought we were foolish enough to try the reverse!)

 

테오발드 소장의 계획은 일본군이 더치하버를 노리고 있다고 보고 더치하버에 접근하는 일본함대, 특히 항공모함들을 무력화시키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일본 항모를 제거하지 못하면 항모가 없는 제8임무부대의 수상함들이 서쪽으로 진출해봐야 일본 항모의 먹이가 될 뿐이었다.

구축함의 야간공격을 시도하려고 해도 북위 55도 이상의 고위도에서는 6월에 밤이 거의 없었다.

 

테오발드 소장의 계획에 따라 알래스카 해군의 기함인 찰스턴은 어선을 개조한 초계정 14척과 해안경비대의 경비정 5척과 함께 얄류산 열도 서쪽으로 나아가 초계선을 펼칠 예정이었다.

해안경비대의 경비정 5척은 움낙 섬 서쪽으로 나아가 북태평양에서 배링 해로 넘어가는 해협 출구를 감시하고 어선을 개조한 초계정 14척은 찰스턴과 함께 움낙 섬의 남서쪽 해상에 전개하여 접근해오는 일본함대를 감시할 예정이었다.

 

(AL 작전 상황도. 출처 : History of U.S. Naval Operations in World War II, Vol. IV: Coral Sea, Midway and Submarine Actions, May--August, 1942 , P. 94 에서 일부 발췌)

 

일본함대가 발견되면 해군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과 LB-30 장거리 초계기가 접촉을 유지하고 이어서 육군항공대의 폭격기들이 일본항공모함을 목표로 공습을 실시할 것이었다.

일단 일본항모들이 무력화되면 코디액 섬 남쪽 해상에서 대기 중이던 테오발드 소장의 주력부대가 더치하버로 접근하는 일본함대의 측면을 후려치고 마쿠신 만에서 대기중이던 구축함 9척이 튀어나와 육군항공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일본군 상륙함대를 공격할 것이었다.

잠수함들은 일본함대의 예상 침로에 매복하고 있다가 기회가 오면 언제든지 공격을 가할 예정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공격을 물리치고 소수의 일본군이 상륙에 성공한다면 더치하버를 지키던 증강된 1개 연대 규모의 수비대가 마무리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테오발드 소장의 예상대로 되지 않았다.

먼저 알래스카 해군의 초계선 진출이 늦어져서 일본함대가 초계선을 통과한 이후인 6월 3일에야 초계선에 도착했다.

이들은 곧 철수 명령을 받고 돌아왔는데 어쩌면 초계선 진출이 늦어진 것이 쓸데없는 희생을 줄이는 결과를 가져왔을 수도 있다.

 

일본함대를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해군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으로 1942년 6월 2일 이른 오후에 키스카 섬 남쪽 640km 해상에서 제2기동부대를 발견했으나 제로기가 쫓아오자 도망치다가 접촉을 잃어버렸다.

 

테오발드 소장은 하와이 방면으로부터 북상 중인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 경순양함 호놀룰루 및 구축함 2척과 합류하기 위하여 6월 1일에 경순양함 내쉬빌을 타고 코디액 섬을 떠났다.

무선 침묵을 유지한 채로 코디액 남방 해상으로 나아간 테오발드 소장은 6월 3일 오전 5시에 북상 중이던 함정들을 만나 제8임무부대의 주력부대(제8.6임무그룹)을 형성했다.

이때 이미 류조의 함재기들은 더치하버를 향하여 날아가고 있었다.

 

여기서 AL 작전에 참가한 일본해군 북방부대의 전투서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주력부대(제5함대 사령관 호소가야 보시로 중장)

중순양함 1척(나치), 구축함 2척(이나주마, 이카주치), 급유함 2척(후지산마루, 닛산마루), 수송선 3척

 

2. 제2기동부대(제4항공함대 사령관 가쿠다 가쿠지 소장)

경항모 류조(제로기 12대, 97식 함공 18대), 개장항모 준요(제로기 18대, 99식 함폭 15대), 중순양함 2척(마야, 다카오), 구축함 3척(아케보노, 우시오, 사자나미), 급유함 1척(데이요마루)

 

3. 애닥-애투 점령대

경순양함 1척(아부쿠마), 구축함 5척(와카바, 네노히, 하츠하루, 하츠시모, 쇼카제), 수상기 모함 1척(기미가와마루), 소해함 1척(마가네마루), 수송선 1척(기누가사마루)

상륙부대 : 육군 1,143명(호즈미 마츠토시 소좌)

 

4.  키스카 점령대

경순양함 2척(기소, 다마), 보조순양함 2척(아사카마루, 아와타마루), 구축함 3척(히비키, 아카츠키, 호카제), 소해함 3척(하쿠호마루, 가이호마루, 신코츠마루), 수송선 2척(하쿠산마루, 구마가와마루)

상륙부대 : 해군특별육전대 550명(무카이 히푸미 소좌, 하쿠산마루), 설영대 700명(구마가와마루)

 

이외에 전함 4척(휴가, 이세, 후소 , 야마시로), 경순양함 2척(기타가미, 오이), 구축함 12척, 급유함 2척으로이루어진 강력한 다카스 시로 중장의 함대가 북방부대를 지원하게 되어 있었다.

다카스 함대는 야마모토 제독의 MI 작전 주력부대와 행동을 같이하다가 6월 3일에 북방부대를 지원하기 위하여 북쪽으로 향했으나 실제로 전투에 개입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다카스 함대를 제외하면 일본해군의 북방부대는 합계 개장항모 1척, 경항모 1척, 수상기모함 1척, 중순양함 3척, 경순양함 3척, 보조순양함 2척, 구축함 13척, 소해함 4척, 급유함 3척, 수송선 6척의 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함재기는 63대였다.

 

여기에 맞서는 미군 제8임무부대의 전투서열은 다음과 같다.

 

1. 주력부대(제8.6임무그룹, 로버트 테오발드 소장)

중순양함 2척(인디애나폴리스, 루이스빌), 경순양함 3척(내시빌, 센트루이스, 호놀룰루), 구축함 4척(그리들리, 맥콜, 길머, 험프리)

 

2. 공중 수색 부대(제8.1임무그룹, 레슬리 게레즈 대령)

수상기 모함 3척(윌리엄슨, 길리스, 카스코), 카탈리나정찰비행정 20대

 

3. 해상 수색 부대(제8.2임무그룹, 랄프 파커 대령)

포함 1척(찰스턴), 해안경비대 소속 경비정 5척(하이다, 오논다가, 사이언, 오로라, 본햄), 어선을 개조한 초계정 14척, 급유함 1척(오리올)

 

4.공습 부대(제8.3임무그룹, 윌리엄 버틀러 준장)

콜드베이 기지(P-40 전투기 25대, B-26 쌍발폭격기 12대, B-17 중폭격기 5대, LB-30 장거리 초계기 1대), 포트 글렌(P-40 전투기 8대, B-26 쌍발폭격기 8대), 코디액 기지(P-39 전투기 15대, P-40 전투기 17대, B-17 중폭격기 5대, LB-30 장거리 초계기 2대), 엘멘도프 기지(P-36 전투기 4대, P-38 전투기 25대, P-39 전투기 15대, B-18 쌍발폭격기 5대, B-26 쌍발폭격기 12대, B-17 중폭격기 7대, LB-30 장거리 초계기 2대)

 

5.구축함 습격대(아이엇 크레이그 중령)

구축함 9척(케이스, 레이드, 브룩스, 샌즈, 케인, 덴트, 탤벗, 킹, 워터스)

 

6. 잠수함 부대(버튼 레이크 중령)

잠수함 6척(S-18, S-23, S-27, S-28, S-34, S-35)

 

7. 급유대(휴스턴 메이플즈 대령)

 

급유함 2척(새빈, 브라조스), 증기선 1척(코멧)

 

합계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3척, 구축함 13척, 잠수함 6척, 수상기모함 3척, 포함 1척, 해안경비정 5척, 어선을 개조한 초계정 14척, 급유함 2척, 증기선 1척이었다.

항공기는 해군이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20대와 LB-30 장거리 초계기 5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제11육군항공대는 전투기 109대, 쌍발폭격기 37대, B-17 중폭격기 17대, 합계 163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B-17 중폭격기 중에서 해상수색 레이더를 장착한 3대는 공중수색부대에 포함되어 일본함대를 수색하는 임무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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