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방어준비 

 

1939년 9월 1일에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미국영토의 1/5에 해당하는 170만 ㎢ 이상의 넓이를 가진 알래스카를 지키던 미육군 병력은 스카그웨이 주변의 칠쿳 병영(Chilkoot Barracks)에 주둔 중이던 2개 소총중대 400 명이 전부였다.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전쟁성(=육군성)은 알래스카 방어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방어력 강화를 위한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의 목표는 5가지였다.

 

1. 알래스카 수비대의 병력을 증가시킨다.

2. 앵커리지 부근에 대규모 주둔지를 만든다.

3. 알래스카 내에 다수의 비행장을 만든다.

4. 3에서 만든 비행장들을 보호한다.

5. 시트카, 코디액, 그리고 더치하버에 있는 해군기지를 방어한다.

 

이 계획의 실천은 1941년 중반까지 지지부진했는데 그 이유는 전쟁성의 방어력 증강 계획상 알래스카의 우선 순위가 낮았던데다가 알래스카 자체의 문제가 있었다.

 

알래스카는 캐나다 영토에 의하여 미본토와 단절되어 있었으며, 1942년 11월에 캐나다 서부를 통과하여 미본토와 알래스카를 잇는 알래스카 하이웨이가 완성되기 전까지 미본토에서 알래스카로 가려면 비행기나 배를 타야만 했다.

알래스카의 군대와 민간인들을 위한 식량을 포함한 보급품들은 대부분 선박으로 수송해야 했으며, 이런 사정은 알래스카 하이웨이가 개통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인들의 개념으로 알래스카는 섬이었다. 

 

미본토와의 격리에 더하여 알래스카의 내부 교통로도 빈약했다.

알래스카는 해안에 가까운 태평양 산맥과 동쪽의 로키 산맥에 의하여 서부, 중부, 동부로 나눌 수 있었는데 험준한 산맥을 넘어 이 지역들을 횡으로 연결하는 교통로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정기적으로 운행하는 철도는 스카그웨이와 캐나다 유콘 주의 화이트호스를 잇는 민간철도인 화이트 패스 앤드 유콘 철도와 슈어드에서 출발하여 앵커리지를 거쳐 페어뱅크스에 이르는 760km 길이의 알래스카 철도가 있었는데 알래스카 철도는 내무부가 관리했다.  

알래스카 철도는 1923년에 내무부가 사들인 이래 투자를 거의 하지 않아서 선로와 기관차의 상태가 모두 안 좋았으며 특히 지형이 험한 남부 구간이 심했다.

남부 구간에서 기차는 험준한 지형을 달려야 했으며 눈보라가 심하게 치면 운행이 힘들었다.

슈어드 북쪽 80km 지점에서 철도는 굴을 지난 다음 나무로 만든 다리를 건너야 했는데 이 지점은 폭격이나 파괴활동에 취약했다.

(1940년 당시의 알래스카. 출처 :  The Corps of Engineers - The War Aginst Japan. P.13)

 

알래스카의 도로는 발데즈와 페어뱅크스를 잇는 리차드슨 하이웨이와 페어뱅크스와 북극권을 잇는 스티즈 하이웨이가 있을 뿐 동서를 연결하는 도로는 없었으며, 하천 수로도 제한되어 정기선이 다니는 강은 유콘 강과 쿠스코크윔 강 뿐이었는데 1년에 4개월 내지 5개월 동안만 운항이 가능했다.

 

1930년대를 통하여 급성장한 항공교통이 알래스카의 빈약한 교통망을 보충했다.

거의 완전히 고립되어 있던 많은 마을들이 1940년까지 항공로로 연결되었고, 판아메리칸 항공사에서는 시애틀과 케치칸 및 쥬노를 연결하는 정기 노선을 개통했다.

그러나  항공교통으로는 물자 수송에 한계가 있었다.

 

전쟁 전에 알래스카 내부의 통신은 미육군공병대가 관리하는 무선 통신 체계인 알래스카 통신 체계(Alaska Communication System)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했다.

20세기 초기에 깔렸던 유선 통신망들은 알래스카 철도를 따라 설치된 전화선을 제외하고는 모두 버려졌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알래스카 통신 체계가 처리하는 통신은 거의 모두 민간통신이었으므로 한때 전쟁성은 알래스카 통신 체계를 내무부에 넘기려 했으나 전쟁이 임박하자 생각을 바꾸었다.

전쟁성은 알래스카 통신 체계를 정비하고 확장하는 한편 알래스카 철도의 출발점인 슈어드와 미본토의 시애틀을 연결하는 유선 통신망을 비롯하여 버려졌던 알래스카의 유선 통신망들을 모두 복구했다.

유선 통신망은 도청이 어렵기 때문에 주로 비밀통신에 사용되었다.

 

알래스카를 포함한 미서해안 방어를 책임진 서부방어사령관 드윗 중장은 알래스카의 열악한 교통 상황을 잘 몰랐다.

그리하여 그는 앵커리지 부근에 강력한 기동예비대를 주둔시켜 놓고 일본군이 알래스카의 어느 지역으로든 공격해오면 즉시 출동하여 격멸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에 따라 1940년 6월 27일에 얼 랜드레스 중령이 지휘하는 최초의 육군 증원병력 753명이 앵커리지에 도착했다.  

이때 알래스카 현지를 시찰하고 있던 드윗 중장은 교통수단의 미비로 알래스카에서는 대규모 기동 예비대를 운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따라서 알래스카 수비대는 각 방어지구별로 분산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수비대는 별도의 지원없이도 자기 담당 구역을 지킬 수 있을만큼 충분히 강력하고 균형잡힌 전력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항공대의 지원을 받을 수 있어야 했다.

또한 해군 기지를 방어하기 위하여 수비대의 기지는 해군 기지와 인접하는 것이 유리했으므로 많은 병력이 해군 기지인 시트카, 코디액 및 더치 하버 인근에 주둔하기로 했다.

육군이 갑자기 해군 기지 주위에 예정에 없던 넓은 부지를 요구하자 자체의 기지 확장 계획을 가지고 있던 해군은 제대로 협조를 하지 않았다.

당시 알래스카의 기지 건설은 대부분 군과 계약을 맺은 민간업체들이 건설했는데 안 그래도 자재 및 중장비의 수송도 어렵고 건설인력을 구하기도 어려웠으며 기후도 공사에 불리했다. 

여기에 육군과 해군의 손발까지 맞지 않아 기지 건설은 답보상태를 면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1941년 여름이 되자 육군의 증원병력들이 알래스카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고 육군은 할 수 없이 코디액, 앵커리지, 그리고 슈어드 지역에 텐트를 치고 이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1941년 8월에 '방위계약조사를 위한 특별위원회'(Special Committee Investigating Defense Contracts, 일명 트루먼 위원회) 소속의 랄프 브류스터 상원의원을 단장으로 한 의회 조사단이 알래스카에 와서 현지조사를 했다.

여기서 기지 건설 공사의 지연으로 겨울에도 병사들이 텐트에서 지내야 한다는 것을 알게된 브류스터 상원의원은 격노했다.

 

그는 워싱턴으로 돌아오자 미국의 젊은이들을 징집하여 북극에 데려가서는 한겨울에 텐트에서 재우겠다는 육군이 과연 제 정신이냐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깜짝 놀란 마셜 참모총장이 드윗 중장에게 실태조사를 명령했고 서부방어사령부의 조사관들이 알래스카로 날아갔다.

조사 결과 월동준비는 양호했다.

겨울용 텐트는 바람과 추위를 충분히 막을 수 있는 대형 텐트로 각 텐트마다 난로가 배치될 예정이었다.

드윗 중장은 이런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고 전쟁성에서는 브류스터 의원의 알래스카 시찰에 동행했던 할리 킬고어 상원의원에게 텐트가 가장 많이 밀집한 코디액 섬의 겨울 평균 기온은 킬고어 의원의 지역구인 웨스트버지니아 주 힐링과 거의 비슷하다고 설명하여 겨우 의원들의 분노를 가라앉혔다.

 

기지 건설 공사의 지연 때문에 육군이 날벼락을 맞자 해군참모총장 스타크 대장은 해군에게 불똥이 튀지 않도록 알래스카 지구를 담당하던 제13해군관구에 즉시 육군과의 협의를 마무리지어서 하루빨리 기지를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알래스카의 기지 건설은 탄력을 받게 되었다.

 

알래스카의 육군 병력은 1939년 9월 초의 400 명에서 1940년 5월 말에는 3,100 명, 1941년 6월 말에는7,263명으로 늘어났다가 3개월 만인 41년 9월 말에 21,565명으로 증가했다.

당시 알래스카의 육군은 4개 보병연대, 3.5개 대공포 연대, 1개 155mm 롱톰 평사포 이동 해안포 연대, 그리고 1개 전차중대로 이루어져 있어서 비교적 장비도 충실하고 화력도 강한 편이었다.

진주만 기습으로 알래스카의 육군 병력은 계속 증강되어 미드웨이 해전 직전인 1942년 5월 말에는 45,417명으로 늘어났고, 일본이 6월 초에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을 장악하자 증강 속도가 빨라져서 42년 8월말에는 71,500명까지 늘어난다.

 

육군 수비대는 알래스카 철도의 출발점인 슈어드, 알래스카의 요충지인 앵커리지, 그리고 해군 기지가 있는 시트카, 코디액, 그리고 더치 하버 등의 주요 거점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다.

1942년 5월말 현재 주요 주둔지를 보면 앵커리지에 2,500명, 시트카에 2,020명, 코디액에 5,835명, 더치하버에 5,425명, 그리고 움낙 섬의 포트 글렌에 4,000 명, 콜드 베이에 2,500명 등이었으며 이외에도 상당수의 공병들이 알래스카 곳곳에서 비행장과 기지들을 건설하고 있었고 수비병력 또한 여러 곳에 분산되어 주둔하고 있었다.

 

전쟁성은 알래스카의 지휘계통도 정비했다.

1940년 7월까지 알래스카 방어는 제9군단이 관할했으나 7월 9일에 전쟁성은 사이먼 버크너 대령을 알래스카 주둔 미군 사령관으로 임명했고, 보름 뒤에는 알래스카 방위군(Alaska Defense Force)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버크너 대령은 9월 1일에 준장으로 승진했으며, 전쟁성은 1942년 2월에 알래스카 방어 사령부(Alaska Defense Command)를 창설하고, 역시 새로 만들어져 미서해안을 방어하는 서부 방어 사령부(Western Defense Command) 예하에 두었다.

 

알래스카 방어사령부의 출범과 동시에 알래스카를 서부 방어 사령부의 관할에서 빼내어 독자적인 방어구역으로 삼자는 주장이 일어났다.

육군항공대 참모장 칼 스파츠 준장은 알래스카를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서부 방어 사령부 아래에 둔다는 것은 하와이를 서부 방어 사령부 예하에 두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스파츠 준장의 주장은 전쟁성과 참모본부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았으나 이때 그는 실수를 저질렀다.

즉 그는 알래스카, 하와이 그리고 미서해안의 모든 육군항공대는 지역 사령관의 통제를 받지 않는 단일 육군항공대 사령관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스파츠 준장의 이런 주장은 알래스카 방어 사령부를 독립시키기 싫어하던 서부 방어 사령관 드윗 중장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었다.

결국 알래스카 방어 사령부는 1943년 말까지 서부 방어 사령부 휘하에 머물렀다.

 

알래스카 방어의 또다른 축인 육군항공대 증강은 지지부진했다.

우선은 비행장 건설이 급선무였다.

미육군공병대와 민간항공국(Civil Aeronautics Authority=CAA)의 노력으로 1941년 가을까지 엘멘도프, 래드, 코디액, 야쿠탓 그리고 노움 비행장이 최소한 1개 비행대대를 지원할 수 있는 규모로 작전가능상태에 들어갔다.

육군항공대는 더치하버의 방어를 위하여 서쪽으로 100km 떨어진 움낙 섬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해군은 움낙 섬에 항구를 만들기가 어려워서 보급이 곤란해질 것이라는 이유로 알래스카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하게 될 움낙 섬의 비행장 건설에 난색을 표했다.

지리한 논의 끝에 움낙 섬의 오터포인트에 비행장을 건설하기로 결정이 난 것은 진주만 기습이 2주도 채 남지 않은 1941년 11월 26일이었다.

 

1941년 2월 말에 앵커리지 부근에 엘멘도프 비행장이 작전가능상태에 도달하자 구형의 P-36 전투기 20대를 보유한 제18추격비행대대(18th Pursuit Squadron)가 전개했다.

추격기(Pursuit)는 1940년 5월 15일을 기하여 전투기(Fighter)로 이름이 바뀌었다.

 

(커티스 P-36 호크 전투기. 승무원 : 1명, 길이 : 8.7m, 폭 : 11.4m, 출력 : 1,050마력, 최고 속력 : 500 km/hr, 순항속력 : 432 km/hr, 항속거리 : 1,385km, 상승고도 : 10,000 m, 무장 : 12.7mm 기총 1정, 7.62mm 기총 1정, 폭탄 45kg) 

 

3월에는 제36 및 제73폭격비행대대가 도착했다.

중형폭격비행대대는 원래 13대로 이루어진 편대 4개로 이루어져 52대의 쌍발폭격기를 보유하게 되어 있었으나 2개 폭격비행대대가 보유한 폭격기는 모두 합쳐 B-18 쌍발폭격기 12대 뿐이었다.

 

(더글러스 B-18 볼로 쌍발폭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알래스카의 여러 곳에 비행장이 추가로 완성되었어도 추가 비행기들은 오지 않았다.

미국의 항공기업체들은 놀라운 속력으로 생산을 늘리고 있었으나 수요가 공급을 앞질렀다.

게다가 태평양만 해도 필리핀과 하와이, 파나마 운하 등의 요충지에서 빨리 비행기를 보내라고 성화였으므로 이런 와중에 우선 순위가 낮은 알래스카에 돌아갈 항공기가 부족했다.

결국 진주만 기습 때까지 알래스카의 육군항공대는 P-36 전투기 20대와 B-18 쌍발폭격기 12대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전쟁에 돌입하자 알래스카 방어 문제가 급한 문제로 떠올랐다.

1941년 12월 10일에 전쟁성은 P-40 전투기 25대와 B-26 쌍발폭격기 13대를 알래스카에 파견하기로 결정했으나 동계 비행 훈련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조종사들을 한겨울에 알래스카로 파견하는 일은 위험천만한 모험이었다.

그리하여 전투기들과 폭격기들은 새크라멘토 항공 보급창에 도착하여 겨울 비행용 장비를 부착하고 조종사들은 겨울에 알래스카 지역을 비행할 수 있도록 집중적인 훈련에 돌입했다.

동계 장비를 갖추고 1달 이상의 훈련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1942년 1월 말에 페어뱅크스까지 날아가는 도중 전투기 6대가 추락했고, 쌍발폭격기들은 모두 도착은 했으나 그중의 5대는 완전히 망가졌다.

 

전쟁이 벌어지자 더치하버 서쪽의 움낙 섬과 동쪽의 콜드베이에 건설 중이던 비행장을 하루빨리 완성하는 일이 미육군공병대와 민간항공국의 주요 관심사로 떠올랐다.

움낙 섬의 오터포인트에 비행장을 건설하기 위하여 제807항공공병연대가 투입되었으나 움낙 섬에는 적당한 항구가 없어서 일단 우날래스카 섬의 체르노프스키 곶에 상륙하여 바지선으로 갈아탄 다음 거친 파도를 뚫고 18km 떨어진 움낙 섬으로 건너가야 했다.

미육군 공병대는 시간이 촉박하여 오터포인트의 지반을 완전히 배수하고 단단히 다진 다음 영구적인 활주로를 만들지 못하고 불안정한 지반 위에 약 80,000 장의 마스덴 매트를 깔아서 길이 1,500m, 폭 30m의 활주로를 만들었다.

1942년 3월 31일에 최초의 항공기가 상륙했으나 오터포인트의 포트 글렌 비행장이 본격적으로 작전가능태세에 들어간 것은 5월 20일부터였다.

 

포트 글렌 비행장의 활주로는 조종사들 사이에 악명이 높았다.

불안정한 지반 위에 마스덴 매트를 깔아서 만든 활주로는 마치 스프링이 내장된 침대 매트리스 같아서 한번은 활주하던 전투기가 10m 높이까지 튕겨오르기도 했고, B-26 쌍발폭격기가 착륙하면 마치 바다처럼 활주로 전체가 출렁거렸다.

활주로 상태가 훨씬 양호한 콜드 베이 비행장은 포트 글렌 비행장과 거의 동시에 작전가능 상태에 들어갔다.

 

알래스카 방어의 문제 중 하나는 조기경보  기지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알래스카 방어 사령부는 20 개소의 조기경보 레이더 기지를 원했으나 1942년 6월 초에 일본군이 공격해 왔을 때 가동 중이던 레이더는 단 2대(앵커리지와 코디액)에 불과했고, 레이더 2대가 설치를 위하여 수송 중이었다.

 

1941년 10월 17일에 알래스카 방어 사령부 항공대로 출발하여 42년 2월 5일에 이름이 바뀐 윌리엄 버틀러 준장의 제11육군항공대는 42년 6월 초가 되자 상당히 세력이 증가했다.

일본군이 더치하버를 폭격했을 때 제11육군항공대는 P-36 전투기 4대, P-38 전투기 25대, P-39 전투기 30대, P-40 전투기 49대, B-17폭격기 18대, B-18 폭격기 5대, 그리고 B-26폭격기 32대를 보유하여 전투기 108대, 폭격기 55대 등 총 163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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