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키스카 섬 포격 

 

북태평양군 사령관 테오발드 소장은 지지부진한 폭격 대신 함대를 끌고가서 키스카 섬을 포격하기로 결심했다.

1942년 7월 18일, 중순양함 2척(인디애나폴리스, 루이스빌), 경순양함 3척 (호놀룰루, 내쉬빌, 세인트루이스), 구축함 5척(케이스, 레이드, 그리들리, 멕콜, 모내헌), 구축함형 소해함 4척(램버트, 엘리엇, 롱, 챈들러)이 키스카 섬 포격을 위하여 코디액 섬을 떠났다.

7월 21일에 급유함 과달루페로부터 급유를 받은 미함대는 키스카 섬에 접근했으나 안개가 너무 짙어서 포격이 불가능했다.

기함 인디애나폴리스 함상의 테오발드 소장은 22일 하루동안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렸으나 안개가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할 수 없이 포격을 연기하고 돌아왔다.

 

테오발드 제독은 7월 27일에도 같은 함정들을 거느리고 출격했는데 가는 도중 안개 속에서 변침하다가 두 번의 충돌사고가 일어나서 구축함 모내헌과 구축함형 소해함 램버트, 롱, 챈들러를 돌려 보내야 했다.

소해함 4척 중 3척이 없어진 상황에서 소해작업도 하지 않고 키스카 섬에 접근하기를 꺼린 테오발드 소장은 코디액 섬으로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만일 테오발드 소장이 이때 키스카 섬 포격을 감행했다면 좋은 전과를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키스카 항 내에는 구축함 3척, 소형 기뢰부설함 2척, 유조선 1척, 10,000톤급 수송선 1척, 소형 수송선 2척 등 키스카에서는 보기 드물게 많은 배들이 몰려 있었다.

 

8월 3일, 미함대는 3번째로 키스카 섬을 포격하기 위하여 코디액 섬을 출항했다.

이번에는 윌리엄 스미스 소장이 함대를 지휘했고 테오발드 소장은 코디액 섬에 머물렀다.

함대의 구성은 지난번에 충돌 사고를 일으킨 4척을 제외하고 그대로였다.

 

8월 7일 오후 4시가 되자 키스카 섬 상공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으로부터 키스카 섬의 상공이 잠깐 개었다는 기상보고가 들어왔으나 미함대 부근의 해상은 여전히 짙은 안개로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미함대는 이틀 전에 천체관측으로 측정한 위치를 기반으로 조류의 영향이 최소화되기를 빌면서 2시간 동안 추정항법으로 항해했다.

오후 6시 30분에 최종 접근 항로로 접어들자 스미스 소장은 함대 속력을 20노트로 줄이고 각 순양함에서는 2대씩 수상정찰기들을 발진시켰다.

그러나 육안으로 키스카 섬을 확인하기 전에 다시 안개가 짙어지자 스미스 소장은 일단 함대를 뒤로 뺐다.

잠시 후 다시 실시한 2번째 접근 시도에서 오후 7시 34분에 선두에 섰던 구축함 케이스의 견시가  키스카 섬 북쪽의 키스카 화산을 쌍안경으로 확인했고 이어서 전 함대의 장병들이 환성을 질렀다.

 

(키스카 섬 포격 상황도. 출처 : Aleutians, Gilberts and Marshalls, P.11)

 

키스카 섬은 애벌레처럼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비스듬히 누웠으며 폭은 약 5km - 6km 정도이고, 길이는 약 35km 정도이다.

동해안의 중앙쯤에 키스카 항이 움푹 들어가 있으며 키스카 항의 남쪽 면이 리틀키스카 섬과 함께 키스카 항의 남쪽 방벽을 이룬다.

일본군의 기지는 대부분 키스카 항의 북쪽 및 서쪽 해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미함대의 계획은 일본군 해안포의 위협을 의식하여 표적을 육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고 키스카 항의 남쪽에서 간접사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포격 거리는 5인치 포를 가진 구축함들은 약 13,000m, 6인치 포를 가진 경순양함들은 약 15,000m, 그리고 8인치 포를 가진 중순양함들은 약18,000m 였다.

이러한 간접사격에는 수상정찰기의 탄착관측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나 제로기의 수상기형인 2식 수상전투기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미해군의 수상정찰기들을 모두 쫓아버렸으므로 미함대는 탄착보정을 받지 못한 채로 간접사격을 실시해야만 했다.

 

북상하던 미함대는 오후 8시 정각부터 우측으로 90도 변침하면서 키스카 섬의 일본군 기지를 향하여 20분 간 일제사격을 실시했다.

일분군의 해안포도 지지 않고 2식 수상전투기의 탄착수정을 받으면서 반격을 가해왔으나 명중탄을 기록하지는 못했다.

폭탄을 장착한 2식 수상전투기 1대와 97식 비행정 1대가 낮게 깔린 구름을 뚫고 내려와 선두의 구축함 케이스를 노리고 폭탄을 투하했으나 빗나갔다.

20분 간의 포격을 끝낸 미함대는 오후 8시 21분에 남쪽으로 변침하여 철수했다.

 

키스카 남쪽 해상에서 순양함들은 수상정찰기들을 회수했다.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의 수상정찰기 중 1대가 격추되었고, 나머지 수상정찰기들도 2식 수상전투기와 일본군의 대공포에 의하여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는데 3대는 기체에 100 개 이상의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중의 1대는 167개의 구멍이 뚫려 있었으며 조종사는 발뒤꿈치에 총탄을 맞았다.

경순양함 세인트루이스의 수상정찰기 1대는 모함을 찾지 못하고 안개 속에서 섬들을 더듬어 움낙 섬의 포트 글렌까지 무사히 돌아갔다. 

 

미함대의 포격은 키스카 섬의 일본군에게 어느 정도의 피해를 주었으나 썩 만족한 수준은 아니었다.

키스카 항에 계류 중이던 97식 비행정 3대가 파괴되었으며 선박과 해안 사이로 화물을 운반하던 바지선도 산산조각이 났다.

또한 7월 30일에 미잠수함 그러니언의 어뢰를 맞고 대파되었던 가노마루도 포탄에 맞아 불이 났다.

그날 밤에 미해군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들이 키스카 섬에 찾아와 불타는 가노마루에게 추가로 어뢰공격을 가하여 끝내 격침했다.

키스카 항 북쪽에 있던 일본군 막사도 포탄에 맞아 화재가 발생했다.

그러나 키스카 항 내에 있던 일본군의 구축함 2척, 구잠함 3척 및 잠수정들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으며 사망자도 몇 명 되지 않았다.

 

일본군은 이 포격 이후 남아있던 97식 비행정 2대를 키스카 섬으로부터 철수시키고, 대신 0식 수상정찰기 10대를 배치했다.

 

(아이치 E13A 0식 수상정찰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한편 스미스 소장은 함정들에 대한 위험 부담에 비하여 포격의 효과가 적다고 결론내렸으며 따라서 1943년 1월 4일에 테오발드 소장이 교체될 때까지 키스카 섬에 대한 함포사격은 두 번 다시 실시되지 않았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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