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ABDA타격부대

발릭파판 해전의 승리로 수상함대가 일본군의 남진을 막는데 효과적이라는 하트 제독의 주장이 힘을 얻었다. 하트 제독은 내친 김에 미국과 네덜란드 함정으로 이루어진 ABDA타격부대(ABDA Strike Force)를 만들겠다고 제안하여 웨이벌 장군의 동의를 얻었다. 타격부대는 미국중순양함 휴스턴, 네덜란드 경순양함 드 루이터와 트롬프, 미국경순양함 마블헤드, 그리고 미국구축함 스튜어트, 에드워즈, 바커, 벌머, 폴 존스, 휘플, 필즈베리, 그리고 네덜란드 구축함 피에타인, 방커트, 반겐트로 이루어질 것이었다.

하트 제독은 2월 2일에 ABDA타격부대 구성을 위하여 헬프리히 제독, 글래스포드 제독, 그리고 영국해군의 콜린스 제독을 불러 렘방에서 회의를 열었다. 타격부대 사령관의 인선은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함정 대부분이 아시아함대 소속인만큼 미해군인 글래스포드 제독을 임명하는 것이 무난한 선택일 수 있었으나 하트 제독은 글래스포드 제독이 발릭파판 해전을 전후하여 보여준 전술적 능력에 실망했다. 게다가 ABDAFLOAT 사령관 자리를 하트 제독에게 뺏긴 후 계속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헬프리히 제독을 무시하기 어려웠다. 결국 네덜란드해군의 카럴 도먼 소장이 타격부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도먼 제독은 네덜란드 해군 내에서 유능하고 인품도 훌륭한 제독으로 존경받고 있었으며 하트 제독은 그가 ABDAFLOAT 의 모든 제독을 통틀어 전술적 능력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헬프리히 제독이 보르네오와 수마트라 사이의 카리마타 제도에 일본군이 있다는 보고를 듣고 도먼 제독이 이끄는 네덜란드 함대를 그곳으로 파견하는 바람에 2월 4일이 되어야 연합타격부대가 집결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미해군은 이 보고가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만일 헬프리히 제독이 문의했다면 알려줄 수 있었으나 헬프리히 제독은 묻지 않았다.

2월 3일에 수라바야가 폭격을 당하는 동안 ABDA연합타격부대는 수라바야 동쪽 해상에서 집결 중이었다. 당시 집결한 함정은 ABDACOM이 만들어진 이래 최대 규모로서 중순양함 휴스턴, 미국경순양함 마블헤드, 네덜란드 경순양함 2척(드 루이터, 트롬프), 미국구축함 7척( 스튜어트, 에드워즈, 바커, 벌머, 폴 존스, 휘플, 필즈베리), 그리고 급유함 페코스였다.

카럴 도먼 제독의 기함인 드 루이터는 수마트라급 경순양함의 후계함으로 6인치 주포를 폐쇄식 연장포탑에 달아 함체의 중심선을 따라 배치함으로써 당대의 흐름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네덜란드 정부는 건조비 절감을 위하여 수마트라급에 비하여 배수량을 800톤 가까이 깎고 주포도 전방에 2문, 후방에 4문, 합계 6문으로 줄였다. 네덜란드 해군이 화력이 약하다면서 반발하자 전방에 6인치 단장포 1문을 증설했으나 여전히 6인치 주포 7문으로 수마트라급의 10문보다 적었다.  게다가 어뢰도 없었기 때문에 드 루이터는 경순양함 중에서 약체였다. 차라리 배수량이 3,800톤 밖에 안되지만 6인치 주포 6문과 어뢰 6발을 가지고 있던 트롬프가 드 루이터보다 강력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었다.

네덜란드 경순양함 드 루이터. https://en.wikipedia.org/wiki/HNLMS_De_Ruyter_(1935)

 

2월 3일 오후 1시 50분에 말랑을 폭격하고 돌아가던 제1항공대 소속의 일본기가 마두라 해협에서 연합타격부대를 발견했다. 제11항공함대사령장관 츠카하라 니시조 중장은 다음날인 4일에 모든 육상공격기를 동원하여 적함대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2월 4일 0시가 막 지났을 때 연합타격부대는 마카사르 해협 남쪽에 집결 중인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하트 제독의 명령에 따라 집결지를 출발하여 15노트의 속력으로 동쪽으로 항진했다. 급유함 페코스는 폴존스, 휘플, 필즈베리의 보호를 받으면서 후방에 머물렀다.

연합타격부대는 오전 5시에 마두라 해협과 발리 해협이 만나는 카랑마스 등대 앞바다에서 네덜란드 구축함 3척(피에타인, 방커트, 반겐트)과 합류했다. 여기서 연합타격부대는 순항진으로 바꾸었다. 순양함들은 기함 드 루이터를 필두로 휴스턴, 마블헤드, 트롬프의 순서로 약 640m 간격으로 일렬로 늘어섰다. 구축함들은 순양함렬의 좌우에서 호위했는데 미국구축함들은 앞쪽에, 네덜란드 구축함들은 뒷쪽에 자리했다. 도먼 제독은 침로를 거의 동쪽인 87도로 잡았는데 가급적 켄다리와 수라바야를 잇는 일본기의 공격 항로에서 멀리 벗어나 일본기의 이목을 끌지 않으려는 생각이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2월 4일 오전 9시 35분에 37대의 일본쌍발폭격기가 켄다리를 이륙했다는 보고가 도먼 제독에게 들어왔다. 도먼 제독은 이 폭격기들이 수라바야로 향하기를 바랬으나 헛된 희망이었다. 그는 모르고 있었으나 전날밤에 켄다리를 이수한 일본군 도고항공대 소속 대형비행정 2대와 그날 새벽에 발릭파판 및 켄다리에서 정찰차 이륙한 육상공격기 2대가 잇달아 타격부대를 발견하고 보고했다.
오전 9시 49분에 케인지언 제도 남쪽 30km 해상에서 휴스턴이 1,700m 고도로 접근하는 수상한 비행기를 발견하고 경보를 발했다. 도고항공대의  비행정이었다.  잠시 후 가노야 항공대의 1식 육상공격기 27대와 다카오 항공대의 1식 육상공격기 9대가 모습을 드러내었고 뒷쪽에서는 제1항공대의 96식육상공격기 24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모두 켄다리2 비행장에 전개한 육상공격기들이었다.

곧 타격부대에 전투배치 명령이 떨어졌고 보일러가 미친듯이 증기를 뿜어 함정들을 최대 속력으로 증속시켰다. 당시 타격부대는 공습에 대항하는데 있어 3가지의 약점을 지니고 있었는데 2개는 시대적 한계로 인한 것이었다.

첫째는 공격해오는 적의 항공기를 저지하는데 대공포의 위력이 과대평가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과대평가는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의 격침으로 허구임이 드러났지만 전훈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둘째는 함대가 공습을 당할 경우 분산한다는 전술이었다. 이러한 분산을 통하여 회피기동할 공간을 확보하고 적 항공기 세력의 분산을 강요하여 공격력을 떨어뜨린다는 논리였으나 대부분의 경우 적 항공기가 가벼운 저항을 받으면서 중요한 함정을 공격할 수 있는 기회만 늘려 주었다. 실제로 이때도 일본기들은 구축함은 무시하고 순양함만 집중공격했다. 미해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공습을 받으면 흩어지지 않고 원형진을 유지하면서 대공화력을 집중시켜 대항하는 전술로 바꾸었다.

세번째 약점은 오전 9시 58분에 휴스턴의 5인치 대공포 4문이 접근하는 일본기에게 발사했을 때 드러났다. 4발 중 1발만이 폭발했으며 두번째 사격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포수들은 숨이 멎을 정도로 놀랐으나 사실 휴스턴의 함장 앨버트 룩스 대령과 포술장 아서 메이허 중령은 이미 알고 있었다. 메이허 중령은 몇달 전에 미본토 서해안의 해군기지에서 실시한 훈련에서 휴스턴이 가진 것과 같은 시기에 생산된 5인치 대공포탄의 75%가 불발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생산 당시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오랜 기간 보관하면서 부식된 것이었다. 메이허 중령의 보고를 받은 룩스 대령은 즉시 실탄훈련을 하겠다고 상부에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당시 해군부는 예산절감을 이유로 실탄훈련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었다. 룩스 대령은 새로 생산된 5인치 대공포탄의 공급을 강력하게 요청했으나 미처 받지 못한 상태에서 전쟁이 터졌다. 승조원의 사기 저하를 염려한 함장과 포술장은 이 우울한 소식을 자신들만의 비밀로 간직했다.

첫 공격은 마블헤드가 받았다. 오전 10시 10분에 다카오 항공대의 1식 육상공격기 9대와 가노야 항공대의 1식 육상공격기 9대가 마블헤드를 노리고 4,300m 상공에서 폭탄을 떨어뜨렸다. 함장 아서 로빈슨 대령은 고속으로 달리면서 급격한 변침을 거듭함으로써 적의 조준을 방해하는데 성공했다. 명중탄은 없었으며 가장 가까운 폭탄이 함수에서 왼쪽으로 90m 빗겨난 해상에 떨어진 것이었다. 이탈하던 다카오 항공대의 육상공격기 중 하나가 대공포에 맞아 점점 고도가 떨어지더니 마블헤드에 자폭하려고 달려들었다. 일본기가 접근하자 마블헤드의 12.7mm 기관총이 불을 뿜어 몇발을 기수 부근에 명중시켰다. 이때 조종사가 사살되었는지 일본기는 갑자기 통제를 잃고 뒤집어져  마블헤드의 함수에서 좌현으로 900m 떨어진 해상에 추락했다.

비슷한 시각 휴스턴도 가노야 항공대의 1식 육상공격기 9대로부터 폭격을 받았으나 명중탄은 없었다. 폭탄 2발이 함체 좌우로 불과 3m 떨어진 곳에 떨어져 물기둥이 함교 높이까지 솟아올랐으나 함체에는 피해가 없었다.

10시 27분에 가노야 항공대의 1식 육상공격기 9대가 다시 마블헤드를 공격했다. 로빈슨 함장의 급격한 변침에도 불구하고 마블헤드는 2발의 명중탄과 1발의 지근탄을 맞았다.
1발은 우현에서 3m 떨어진 함체 전방에 명중했다. 폭탄은 구명정을 부수고 갑판을 뚫은 다음 사관실에서 불과 5m 후방에서 폭발했다. 이 폭발로 사관실과 의무실이 부서졌으며 통풍관이 구부러지고 화재가 일어났다. 1발의 명중탄으로 함의 지휘부가 몰살당하는 걸 막기 위하여 로빈슨 함장의 명령에 따라 함교를 떠나 사관실에서 대기하던 부장 윌리엄 고긴스 중령은 파편에 목이 다치고 팔다리에 심한 화상을 입었으나 후송을 거부하고 현장에서 보수작업을 지휘했다.
다른 1발은 좌현에서 1m 떨어진 함미갑판에 명중했다. 이 폭발로 조타실 요원이 모두 죽거나 중상을 입었으며 마블헤드의 키가 왼쪽으로 잔뜩 꺾인 채로 고정되어 버렸다.
함수 바로 왼쪽에 떨어진 지근탄 또한 큰 피해를 입혔다. 폭발의 충격으로 함수 부근의 용골이 오른쪽으로 밀리면서 철판이 벌어져 침수가 일어났다.

마블헤드의 상태는 심각했다. 비록 25노트의 속력을 낼 수 있었으나 함체에는 불이 났고 오른쪽으로 10도 기울어진 채 중유를 줄줄 흘리면서 물을 잔뜩 머금은 함수를 중심으로 좁은 원을 그리며 뱅뱅 돌았다. 트롬프는 마블헤드가 곧 침몰할 것으로 보고 구조를 위하여 접근했다. 이날 마블헤드의 사망자는 15명, 중상자는 34명이었다.

그러나 로빈슨 함장은 마블헤드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으며 미해군의 보수 능력은 정평이 나 있었다. 마블헤드의 보수반은 오전 11시까지 화재를 잡았다. 함수의 침수는 막을 수 없었으나 최소한 비슷한 속도로 물을 퍼낼 수는 있었다.
문제는 왼쪽으로 잔뜩 꺾인 채 고정되어 버린 키였다. 이 상태로는 오른쪽 기관을 정지시킨 상태에서 왼쪽 기관을 최대 출력으로 올려도 직진이 불가능했다. 어떻게든 키를 풀어야만 했는데 폭탄에 맞아 전원이 죽거나 중상을 입은 조타실은 함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부장 고긴스 중령이 목에 부상을 입어 피를 철철 흘리고 팔다리에는 심한 화상을 입어 껍질이 벗겨진 상태로 보수반을 이끌고 조타실까지 가서 상황을 확인했다. 고긴스 중령이 함교로 가서 조타실의 상황에 대해 보고하자 그의 몰골을 보고 깜짝 놀란 로빈슨 대령은 노고를 칭찬한 다음 즉시 사령탑에 마련된 임시 의무실로 가서 치료를 받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보수관이 부장 직위를 대행했다.
그동안 고긴스 중령이 조타실에 남겨두었던 보수반원들은 키를 고정하고 있던 유압파이프의 기름을 빼고 키의 톱니바퀴에 쇠사슬을 걸어 끌어당김으로서 왼쪽으로 완전히 꺾여있던 키를 왼쪽으로 9도 꺾인 상태까지 푸는데 성공했다. 이제 로빈슨 함장은 좌우 프로펠러의 회전 속력을 조절함으로써 함정의 방향을 바꿀 수 있게 되었고 마블헤드는 살아남았다.

 

 CL-12 마블헤드. https://en.wikipedia.org/wiki/USS_Marblehead_(CL-12)

 

마블헤드가 침몰을 면한 이유는 뛰어난 보수능력 덕분이지만 보수작업이 이루어지는 동안 일본군의 추가 공격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현장에 늦게 도착한 제1항공대는 마블헤드가 이미 끝장났다고 생각하여 다른 순양함들을 공격했다.

오전 11시 4분에 제1항공대의 96식 육상공격기 1개 중대가 마블헤드 상공에 나타났으나 마블헤드를 무시하고 17분에 휴스턴을 폭격했다. 휴스턴은 또다시 협차를 당했으나 명중탄은 없었다.

11시 26분에 나타난 제1항공대의 1개 중대도 마블헤드를 무시하고 드루이터를 폭격했다. 함장 유진 라콤블 대령은 기민한 조함으로 피했다.

11시 40분에 마지막으로 제1항공대의 96식 육상공격기들이 휴스턴 상공 4,300m 높이에서 좌측에서 우측으로 가로지르면서 폭탄을 떨어뜨려 1발을 명중시켰다. 폭탄은 메인마스트와 3번 포탑 사이에 떨어졌다. 3번 포탑이 후방을 향하고 있었으면 폭탄은 두꺼운 포탑 지붕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하필이면 포탑들이 좌현으로 회전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 사이의 공간으로 떨어졌다. 갑판에 직경 3.6m에 달하는 구멍이 뚫리면서 그 밑에 있던 후방 보수반원들이 몰살당했고, 파편이 포탑의 약한 옆면을 뚫고 들어가 포수들과 포탑 아래 조작실(handling room)의 인원들을 살상하고 장약에 불을 붙여 맹렬한 화재가 일어났다.

포술장 메이허 중령은 불붙은 3번 포탑으로 달려가 보수반원들을 이끌고 화재와 싸웠다. 3번 포탑 아래의 탄약고에서 근무하던 부사관은 폭탄이 명중하자 재빨리 부하들을 탄약고 밖으로 내보낸 다음 탄약고 문을 닫고 스프링클러를 작동시켜 유폭을 막았다. 그동안 보수반원들이 무섭게 타오르던 3번 포탑의 불길을 잡는데 성공함으로써 휴스턴은 살아남았다. 휴스턴의 전사자는 48명, 부상자는 20명이었다.

이제 작전 속행은 불가능했다. 도먼 제독은 오후 12시 25분에 타격부대에게 작전을 중단하고 수라바야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폭탄을 맞은 마블헤드와 휴스턴의 상황을 보고받은 도먼 제독은 오후 2시 15분에  수리를 위하여 일본군의 공습으로 피해를 입지 않은 칠라찹으로 목적지를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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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수라바야 공습

셀레베스에서 군사적으로 가장 가치있는 표적은 섬의 남동쪽에 자리잡은 켄다리였다. 켄다리의 남쪽에 있는 넓고 잔잔한 스테어링만은 대규모 함대를 위한 이상적인 정박지였다.
또한 켄다리에서 남서쪽으로 19km 떨어진 아모이토에 있는 켄다리2 비행장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좋은 비행장 중의 하나였다. 활주로는 크고 포장되어 있었으며 격납고와 주기장 및 비행기의 분산을 위한 공간도 충분했다. 항공유 및 탄약을 보관할 수 있는 창고도 많았고 막사의 시설은 훌륭했다. 
문제는 운용할 비행기가 없다는 것이었다. 전쟁 초기에는 B-17 폭격기의 전방집결지로 사용되었으나 이후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방어가 빈약했다는 점이었다. 켄다리2 비행장을 지키던 부대는 400명으로 이루어진 현지인 부대로서 충성심이 의심스러웠으며 네덜란드인 장교는 2명 밖에 없었다.

켄다리를 침공한 일본군은 마나도와 마찬가지로 제5전대사령관 다카기 다카오 소장이 지휘하는 동방공략부대로서 참가 병력도 낙하산부대를 제외하고는 마나도 점령과 같았다. 구레제1특별육전대를 실은 수송선들은 제1근거지부대의 호위를 받았다. 구보 규지 소장이 지휘하는 제1근거지부대는 경순양함 나가라, 제15구축대(나츠시오, 구로시오, 오야시오 하야시오), 제16구축대(유키카제, 도키츠카제, 하츠카제, 아마츠카제)로 이루어져 있었다. 침공선단은 1월 24일 새벽 2시에 켄다리만에 도착했으며 4시 30분에 상륙했다. 네덜란드 수비대는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달아났으며 일본군은 12시간 만에 켄다리2 비행장을 점령했다. 공포에 질린 수비대가 파괴도 하지 않고 달아나는 바람에 일본군은 11만 리터가 넘는 항공유를 거저 얻었는데 이건 불과 이틀전에 미국의 수상기모함 차일드가 천신만고 끝에 도착하여 양륙한 것이었다. 일본군의 피해는 부상자 2명이었다.

이로써 일본군은 수라바야까지 닿는 거리에 있는 네덜란드령동인도제도에서 가장 좋은 비행장을 얻었다. 다음날인 25일에 제3항공대의 제로기 25대와 및 98식육상정찰기 5대가 도착했고 27일에는 제21항공전대사령부와 가노야 항공대의 96식 및 1식육상공격기 27대가 전개했다.

발릭파판 해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발릭파판을 점령했으며 발릭파판비행장에도 제로기가 진출했다.

1월 31일에는 일본군이 암본을 점령했다. 암본에 주둔 중이던 제10정찰비행단과 호주제2비행대대는 정비를 맡은 네덜란드 지상요원과 함께 탈출했다. 그러나 네덜란드군과 호주군으로 이루어진 암본 수비대에게는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해작업 중 네덜란드군이 설치한 기뢰에 접촉하여 제9호소해정이 침몰하고 제11 및 제12호소해정이 피해를 입자 화가 난 일본군은 라하 비행장에서 포로 300여명을 참수했다.

일본군이 발릭파판, 켄다리, 그리고 암본에 비행장을 확보하면서 자바에 비행기를 증원하는 일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당시 미국의 B-17, LB-30(B-24의 해군형), P-40 의 생산량은 부족하지 않았으나 태평양을 건너 이것들을 운반하는 일은 또다른 문제였다. 그나마 항속거리가 긴 B-17은 섬들을 징검다리 삼아 스스로 날아올 수 있었으나 항속거리가 짧은 P-40은 꼼짝없이 수송선에 실려 태평양을 건너야 했다. 1942년 1월 말까지 호주에 도착한 P-40 은 112대였으며 160대는 태평양을 건너오는 중이었다.
호주에 도착한 P-40은 루이스 브레러튼 장군이 지휘하는 극동육군항공대 휘하의 제17추격비행대대(찰스 스프라그 소령)에 배속되어 자바로 이동했는데 그 과정도 험난했다. 호주 남동부의 시드니에 도착한 P-40은 우선 호주 남서부의 퍼스로 날아간 다음 북서쪽의 다윈까지 날아갔다. 이후 티모르, 발리의 뎀페사르 비행장을 거쳐 수라바야에 도착했는데 몹시 힘든 여정이었다. 첫번째로 출발한 17대 중에 13대만이 수라바야에 도착했다. 두번째는 16대가 출발하여 8대만이 도착했다. 나머지는 추락하거나 실종되거나 낙오되었다. 그러자 ABDA사령부의 부사령관인 조지 브렛 장군의 요청에 따라 수상기모함 랭글리가 P-40을 자바로 운반했다.

하트 제독은 발릭파판 해전의 승리를 반복하고자 1월 29일에 터빈 수리를 마친 마블헤드와 구축함 4척을 다시 마카사르 해협으로 파견했지만 이틀 후에 일본정찰기에게 들키자 철수시켰다.
ABDAFLOAT의 모항으로서 다윈은 불편했다. 일단 전장에서 너무 먼데다가 항내의 조류가 강해서  항구로서의 조건도 나빴다. 따라서 하트 제독은 구축모함 블랙호크, 잠수모함 홀랜드와 오터스, 급유함 트리니티를 구축함 알덴과 엣솔의 호위 아래 자바 남해안의 칠라찹으로 파견했다.

2월 2일에 발릭파판을 이륙한 타이난 항공대의 제로기 17대와 정찰기 1대가 수라바야 부근에 있는 마오스파티 비행장을 기습했다. 비행장의 피해는 대단치 않았으나 귀중한 레이더 요원을 가득 태운 B-18 폭격기 1대가 격추당하여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또한 미육군항공대 제7폭격비행전대의 신임 지휘관인 오스틴 스트로브 소령이 추락한 폭격기의 생존자를 구하려다가 중화상을 입고 이튿날 숨졌다.

다음날인 2월 3일에 츠카하라 니시조 중장의 제11항공함대는 동부 자바에 대하여 항공격멸전을 시작하여 수라바야에 대대적인 폭격을 가했다. 켄다리2 비행장에서 72대의 육상공격기(제1차 공격대 타카오 항공대 26대, 제2차 공격대 가노야 항공대 27대, 제3차 공격대 제1항공대 19대)가 차례로 이륙하여 수라바야, 마디운, 그리고 말랑의 비행장을 공격했다. 제로기 44대(17대는 타이난 항공대, 27대는 제3항공대 소속)가 폭격기를 보호했고, 97식사령부정찰기 3대(1대는 타이난 항공대, 2대는 제3항공대 소속)가 항로 안내와 피해평가를 맡았다.

(97식사령부정찰기. https://en.wikipedia.org/wiki/Mitsubishi_Ki-15)

 

수라바야 부근의 대공포는 네덜란드육군이 운용했다. 수라바야의 항구와 시가지에는 8문의 80mm 대공포가 배치되어 있었다. 페락 비행장에는 105mm 대공포 4문과 40mm 보포스 대공포 4문이 있었으며 모로크렘방간 수상기 기지에는 20mm 기관포 2문이 있었다. 대공포들은 신형이고 효과적이었으나 대규모 공습에 저항하기에는 숫자가 너무 부족했다. 페락 비행장과 모로크렘방간 수상기 기지에는 12.7mm 및 7.7mm 기관총도 있었으나 기총소사를 위하여 초저공으로 비행하는 적기에게만 유효했다.

네덜란드와 미군의 전투기는 용감하게 저항했다. 페락 비행장에서는 구식의 커티스 호크 전투기 7대와 역시 구식의 CW-21B 데몬 전투기 12대가 이륙하여 제로기에게 용감하게 맞섰다. 이들은 제로기 3대와 97식사령부정찰기 1대를 격추했으나 그 댓가로  호크 5대와 데몬 7대가 격추되었다. 은고로 비행장에 전개한 미육군항공대의 제17추격비행대대(임시)는 네덜란드군으로부터 경보를 늦게 받았다. 뒤늦게 이륙한 7대의 P-40이 폭격을 마치고 돌아가는 일본기를 추격하여 제로기 1대를 격추했으며 반격을 받아 P-40 전투기 1대가 격추되었다. 

수라바야 해군기지와 페락 비행장은 96식 육상공격기의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며 제로기들은 바다에 떠있던 카탈리나에게 기총소사를 가했다. 마디운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말랑의 싱고사리 비행장에서는 제19폭격비행전단의 B-17들이 탈출하다가 활주로에서 제로기의 기총소사를 받았다. 5대는 지상에서 파괴되었고 1대는 겨우 이륙했으나 말랑에서 남쪽으로 16km 떨어진 지점에서 격추되었으며 또다른 1대는 큰 피해를 입고 보르네오 남쪽의 아렌즈섬에 불시착했다.

2월 3일 하루동안 ABDAIR 는 전투기 16대, 비행정 3대, 그리고 B-17 폭격기 2대를 공중전에서 잃었고, B-17 폭격기 5대를 지상에서, 비행정 13대를 계류 중에 잃었다. 일본군의 손실은 제로기 4대, 97식사령부정찰기 1대였다. 이로써 동부 자바의 제공권은 하루만에 일본군에게 넘어갔다. 살아남은 네덜란드 전투기 3대는 잘 위장되어 폭격을 피한 은고로 비행장에 착륙하여 제17추격비행대대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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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발릭파판 해전(2) - 공격

1942년 1월 24일 새벽 2시 35분에 발릭파판으로 접근하던 미국구축함열의 선두에 선 기함 존 D. 포드의 견시가 2,700m 전방에서 일본구축함 4척이 탐조등을 켠 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침로를 가로지르는 것을 발견했다. 모두들 긴장하여 발사명령을 기다렸으나 탤벗 중령은 침로를 오른쪽으로 약간 틀어 325도 방향으로 북상함으로써 일본구축함열의 뒷쪽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가장 뒤에 있던 일본구축함이 미국구축함열을 발견하고 청색등으로 소속을 물었다. 모두들 이번에야말로 전투가 벌어질 것으로 각오했으나 탤벗 중령이 깔끔하게 신호를 무시하고 그대로 북상하자 일본구축함도 아무일 없는듯이 제 갈길을 갔다. 구축함의 숫자와 조우 장소로 미루어 볼 때 미군이 만난 일본구축함들은 제2구축대일 가능성이 크지만 일본측에는 이 조우와 관련한 기록이 없다.

새벽 2시 46분이 되자 왼쪽으로 표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맹렬하게 불타는 해안을 배경으로 일본수송선들이 뭍에서 8km 정도 떨어져 남서쪽에서 북동쪽 방향으로 2줄로 정박해 있었다. 호위함정은 초계정 3척(제36, 제37 및 제38호초계정,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모미급 구축함을 개조한 것), 구잠정 3척(제10, 제11 및 제12호구잠정), 그리고 소해정 4척(제15, 제16, 제17 및 제18호소해정)이 전부였다. 강력한 일본해군의 구축함들은 외곽 경계를 맡고 있었고 경순양함 나카는 선단의 북동쪽 해상을 초계하고 있었다.  제59구축함분대는 존 D. 포드, 포프, 패럿, 폴 존스의 순서로 단종진을 이룬 채 고속으로 정박지에 뛰어들었다.

(발릭파판 해전 초기 상황. http://www.microworks.net/pacific/battles/Balikpa2.jpg)

 

이제 제59구축함분대의 함장들은 명령에 따라 각자 표적을 골라잡아 어뢰를 발사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발사한 것은 3번째로 돌입한 패럿이었다. 패럿은 왼쪽에 보이는 일본수송선을 향하여 3발의 어뢰를 발사했다. 수송선은 불타는 해안을 배경으로 뚜렷한 실루엣을 보이고 있었으며 움직이지도 않았으므로 완벽한 표적이었다. 그러나 어뢰가 목표에 도달할 시간이 되었어도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다. 

2분 후 패럿은 우현 900m 거리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일본함정을 발견하고 어뢰 5발을 발사했으며 동시에 포드도 1발을 발사했다. 2시 57분에는 존스가 다시 1발을 발사했다. 미군 승조원들은 이 배를 구축함 또는 순양함이라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700톤급 소해정인 제15호소해정이었다. 제15호소해정을 노린 7발의 어뢰는 모두 빗나갔다. 

잠수함 탐색에 온 신경을 기울이면서 남동쪽으로 6노트의 속력으로 항진하던 제15소해정은 새벽 2시 50분에 전방의 연기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함영을 보았다. 함영이 고속으로 접근하자 굴뚝 4개가 보였으므로 처음에는 나카로 생각했으나 같은 모양의 함영이 줄줄이 나타나자 적이라고 판단했다. 3분 후 제15호소해정은 접근하는 어뢰의 항적을 발견하고 기겁하면서 회피했으며 그동안 미국구축함들은 북서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클렘슨급 구축함 존 D. 포드. https://en.wikipedia.org/wiki/USS_John_D._Ford_(DD-228)
 

(센다이급 경순양함 나카. https://en.wikipedia.org/wiki/Japanese_cruiser_Naka)

 

이제 시간은 오전 3시가 되었고 미국구축함들은 일본수송선열의 북쪽 끝에 도달했다. 탤벗 중령은 우현으로 변침하라고 지시했다. 한바퀴 돌아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일본수송선들을 공격할 것이었다. 이때 패럿은 함수 우현쪽으로 보이는 적의 수송선을 향하여 3발의 어뢰를 발사했다. 2분 후 1발의 어뢰가 안쪽열의 가장 북쪽에 있던 3,519톤짜리 수송선 스마노우라마루의 우현에 명중했다. 기뢰와 폭뢰를 잔뜩 싣고 있던 스마노우라마루는 대폭발을 일으키면서 굉침당했다.  스마노우라마루의 북쪽에 있던 제16호소해정이 구조를 위하여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다가 연기 속에서 남쪽으로 쏜살같이 달리는 정체불명의 함영을 보았다. 제16호소해정은 불과 5분 후에 현장에 도착했으나 스마노우라마루는 이미 침몰한 후였으며 생존자는 9명 뿐이었다. 

이제 일본수송선과 호위함정은 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그들은 부산하게 신호를 주고 받았는데 일부는 미국구축함에게 신호를 보내기도 했다. 미국구축함을 처음 발견했던 제15호소해정은 스마노우라마루가 피격되자 3시 10분에 나카에 무전을 보내어 정박지에 적의 수상함대가 침투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제4수뢰전대 사령관 니시무라 쇼지 소장은 믿지 않았다. 그는 추적 중인 잠수함이 다시 공격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3시 28분에 적 잠수함에 대한 경계를 엄중하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발릭파판 해전상황도. History of U.S. Naval Operations in World War II, Vol. III: The Rising Sun in the Pacific, 1931--April 1942, P.287)

 

이제 오른쪽으로 한바퀴 돈 미국구축함들은 다시 남하하면서 바깥열의 수송선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포프는 오전 3시 6분에 오른쪽으로 보이는 적의 수송선(타츠가미마루)를 향하여 5발의 어뢰를 발사했다. 2분 후인 3시 8분에는 패럿이 1발을, 다시 2분 후인 3시 10분에는 존스가 1발을 같은 수송선에게 발사했다. 이 공격을 미국구축함 사이에 목표 할당이 제대로 되지 않아 불운한 하나의 표적에 여러 발의 어뢰를 낭비한 사례로 볼 수도 있으나 이때는 7발의 어뢰가 모두 필요했다. 7발 중 1발만이 명중했던 것이다. 탄약을 운반하던 일본해군의 7,064톤짜리 운송선인 타츠가미마루는 전날 오후에 네덜란드 공군의 공습에서 소형폭탄 1발을 얻어맞고도 무사히 살아남았으나 이번에는 그런 행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어뢰의 명중으로 발생한 화재때문에 적재한 탄약이 유폭되면서 타츠가미마루는 30분 만에 대폭발과 함께 굉침되었다.

오전 3시 14분에 선두의 존 D. 포드는 안쪽열의 수송함을 공격하기 오른쪽으로 선회했으며 나머지 구축함들도 뒤를 따랐다. 5분 후인 3시 19분에 포프는 왼쪽으로 1,800m 거리에서 적의 구축함으로 보이는 함영을 발견하고 어뢰 2발을 발사했으며 뒤따르던 패럿도 동시에 3발을 발사했다. 포프와 패럿이 공격한 함정은 제1차 세계대전형 구축함을 개조한 제37호초계정이었다. 몇 시간 전에 K-ⅩⅧ로 부터 어뢰 1발을 얻어맞고 대파되어 겨우 물에 떠있던 제37호초계정은 앞쪽에 2발, 뒤쪽에 1발 등 3발의 어뢰를 추가로 얻어맞고 맥없이 침몰했다. 사상자는 35명이었다.

오전 3시 22분에 선두의 포드와 후미의 존스는 5,175톤짜리 구레타케마루를 발견하고 동시에 어뢰를 1발씩 쏘았다. 이미 시동을 걸고 남쪽으로 도망치고 있던 구레타케마루는 2발의 어뢰를 모두 피했다. 그러자 탤벗 중령은 구축함열에서 왼쪽으로 선회하여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3분 후인 3시 25분에 포프가 2발의 어뢰를 발사하여 1발을 구레타케마루의 우현에 명중시켜 격침했다.

이제 구축함열은 일본수송선의 남쪽에서 원을 그리면서 왼쪽으로 돌아 다시 북상하기 시작했다. 이제 선두의 포드를 제외한 3척은 어뢰를 소진한 후였다. 탤벗 중령은 뒤따르던 3척의 구축함에게 함포로 적의 수송선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시야가 나빴으므로 패럿이 조명탄을 발사했으나 여전히 표적을 확인하기 힘들었다. 3척의 구축함은 열심히 함포사격을 가했으나 포격에 의한 일본군의 피해는 가벼웠다.

오전 3시 30분에 제36호초계정이 미국구축함들을 발견하고 적의 순양함 4척을 발견했다고 보고했으나 니시무라 소장은 믿지 않았다. 그는 38분에 제36호초계정에게 경순양함 나카와 제2구축대를 보고 착각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러자 자신감을 잃은 제36호초계정은 42분에 착각한 것 같다고 답했다.

북상하던 미국구축함들은 오전 3시 35분에 북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바깥열의 일본수송선 사이를 지나 안쪽열로 파고들었다. 4분 후인 오전 3시 39분에  포드가 갑자기 왼쪽으로 크게 꺾으면서 속력을 급격히 줄였는데 원인은 명확하지 않다. 나중에 포드의 포술장은 가라앉는 일본수송선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진술했는데 당시 포드의 침로상에는 침몰 중이던 일본수송선은 없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포드의 급격한 감속은 어뢰를 다 써버린 나머지 구축함들이 이탈하는 계기가 되었다. 함열의 3번째와 4번째에 있던 패럿과 폴 존스는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오른쪽으로 변침한 다음 원을 그리면서 남쪽으로 선회하여 전장을 이탈했다. 포드의 바로 뒤를 따르던 포프는 일단 왼쪽으로 변침했으나 곧 오른쪽으로 변침한 후 속력을 크게 줄인 포드를 앞질렀으며 이어서 역시 원을 그리면서 남쪽으로 선회하여 패럿과 폴 존스를 따라 전장을 이탈했다. 

포드의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잠시 후 포드는 다시 증속하면서 안쪽열에 다가가 오전 3시 46분에 마지막 남은 어뢰 2발을 양쪽에 보이는 수송선에게 1발씩 발사했다. 오른쪽으로 발사한 어뢰는 빗나갔으나 왼쪽으로 발사한 어뢰는 6,988톤 짜리 쓰루가마루에 명중했다. 이미 K-ⅩⅧ의 어뢰 1발을 맞아 빌빌거리면서 겨우 떠있던 쓰루가마루는 포드의 어뢰를 맞고 그대로 침몰했다. 구레다케마루와 쓰루가마루의 전사자는 합쳐서 약 30명이었다.

포드의 오른쪽에 있던 아사히마루는 무장하고 있었다. 아사히마루의 포수는 유능했으며 포드가 시야에 들어오자 계속 포격을 가하여 탄착점을 점차 접근시켰다. 마침내 협차에 성공한 아사히마루는 포드가 마지막 어뢰를 발사한 지 1분 후인 3시 47분에 포탄 1발을 포드의 후방 갑판실에 명중시켰다. 이 포탄이 주변에 있던 조명탄에 불을 붙여 포드의 후방 함체에서는 폭죽놀이하듯 눈부신 불꽃이 솟아올랐다. 용감한 포드의 수병들이 달려들어 30초 내로 불타는 조명탄을 전부 바다에 던짐으로써 피해 확산을 막았다. 이 과정에서 4명의 수병이 다쳤으나 경상이었으며 함체의 피해도 가벼웠다.

포드는 아사히마루에 포격을 가하여 선미 쪽에 여러 발의 명중탄을 내면서 50명의 사상자를 발생시켰으며 아사히마루 뒤에 있던 타마가와마루에게도 10발의 포탄을 명중시켜 6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이제 해안선이 눈앞이었으므로 포드는 왼쪽으로 선회헀다.

포드는 원을 그리면서 다시 일본수송선열에 접근했으나 이제 물러날 때였다. 어뢰는 떨어졌으며 동료 구축함들은 이미 이탈했다. 포드의 함장 제이컵 쿠퍼 소령이 철수를 건의하자 탤벗 중령은 4인치 주포로 좀 더 피해를 주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고 받아들였다. 오전 4시에 쿠퍼 소령은 침로를 남쪽으로 꺾고 기관실에 최대한 속력을 내라고 명령했다. 당시 포드는 32노트의 속력으로 철수했는데 이는 시험항해 이후 포드가 내었던 최고 속력이다.
일본군의 추격은 없었다. 니시무라 소장은 여전히 적의 수상함대가 정박지를 공격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포드는 먼저 이탈했던 구축함 3척과 오전 6시 42분에 만났으며 8시에는 후방에서 대기 중이던 마블헤드와 만났다.

탤벗 중령에게는 힘든 작전이었다. 심한 치질로 인한 빈혈 때문에 쇠약해져 있던 그는 지속적인 스트레스와 수면부족에 시달린 끝에 작전을 성공리에 마치자 긴장이 풀리면서 체력에 한계가 왔다. 탤벗 중령은 함교에서 갑판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다리가 풀리면서 쓰러져 의무실로 실려갔다.

수라바야에 도착한 제5기동부대는 네덜란드해군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개전 이래 미해군의 지지부진한 전과를 보면서 의혹과 경멸의 눈길을 보내던 네덜란드해군은 이제 친근하고 협조적으로 변했다.

발릭파판 해전을 계기로 일선에서는 미해군과 네덜란드해군의 사이가 돈독해졌으나 고위 지휘관들끼리는 그렇지 못했다. 헬프리히 중장은 하트 대장에 대한 비난을 멈추지 않았으며 원래 소원했던 하트 대장과 글래스포드 소장의 관계는 더 악화되었다. 하트 제독과 글래스포드 제독은 진주만 기습 이전부터 중국의 일본군을 어떤 태도로 대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맞서 사이가 나빴는데 발릭파판 해전을 전후하여 결정적으로 틀어졌다.

하트 제독은 케마 공략이 중단된 뒤에 글래스포드 제독이 제5기동부대를 굳이 남쪽의 티모르 근해까지 철수시키자 깜짝 놀랐고 결국 다시 북상하던 중에 보이스가 암초에 부딪히자 크게 불만을 품었다. 만일 제5기동부대를 좀 더 북쪽에 대기시켰다면 보이스가 탈락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반면 글래스포드 제독은 하트 제독이 지휘 체계를 무시하고 자신을 건너뛰어 탤벗 중령에게 직접 공격명령을 내리자 격분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그는 일기에 자신이나 하트 제독 둘 중 한명은 떠나야 할 것이라고 적었다.

발릭파판 해전은 승전임에는 틀림없으나 전과가 빈약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미국구축함 4척은 적의 강력한 수상함대가 자리를 비운 틈에 기습에 성공하여 불타는 화염을 배경으로 나란히 늘어서서 움직이지 않는 적의 수송선에 대하여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근거리에서 어뢰공격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송선 12척 중 4척을 격침하는데 그쳤다.

원인을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탤벗 중령은 공격시 너무 고속으로 기동하여 어뢰의 정확도가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또한 제15호소해정이나 타츠가미마루의 예에서 보듯이 표적 할당에 실패하여 일부 표적에 너무 많은 어뢰가 낭비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하트 제독은 전술상의 그런 사소한 실수는 근본 원인이 아니라고 보았다. 하트 제독이 지목한 가장 큰 원인은 어뢰의 결함이었으며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학자들도 동의한다.

발릭파판 해전은 태평양전쟁 개전 이래 연합군이 최초로 경험한 해상전투였으며 미해군으로서는 1898년 이래 최초로 경험한 해상전투였다. 이 해전의 승리는 개전 이래 잇따른 패배로 의기소침해 있던 연합군의 사기를 크게 끌어올렸으며 수상함대로 일본군의 남진을 저지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하트 제독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하지만 좀 더 넓게 보았을 때 이 승리는 일본군의 진격을 단지 하루 정도 지연시키는 효과밖에 없었다는 일본 측의 냉정한 평가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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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발릭파판 해전(1) - 접근

1942년 1월 11일에 일본해군의 공수부대인 요코스카제1특별육전대가 북부 셀레베스의 마나도를 점령했으며 이어서 사세보연합특별육전대가 마나도와 케마에 상륙했다. 그러자 ABDAFLOAT 사령관 하트 제독은 일본군의 다음 목표가 셀레베스 남동부에 있는 중요한 항구인 켄다리란 걸 알고 켄다리 공격을 늦추기 위하여 케마에 집결한 일본선단을 공격하기로 했다.

하트 제독의 명령을 받은 아시아함대의 수상함정들 - 경순양함2척(보이시, 마블헤드)과 구축함 6척(존 D. 포드, 포프, 패럿, 폴존스, 필즈베리, 벌머) - 이 티모르섬 쿠팡 앞바다에 모였다. 하트 제독은 이 부대를 제5기동부대로 명명하고 윌리엄 글래스포드 소장을 사령관으로 삼았다.

글래스포드 소장의 계획은 단순했다. 케마 정박지에는 야간에 구축함 5척과 마블헤드가 돌입할 것이었다. 구축함은 일렬로 돌입하면서 한쪽 어뢰를 발사하고 돌아나오면서 반대쪽 어뢰를 발사한 다음 철수할 것이었다. 글래스포드 소장이 승좌한 마블헤드는 이어서 돌입하여 어뢰공격을 가한 다음 추격하려는 일본함정을 6인치 주포 12문으로 견제하면서 철수할 것이었다. 신형 6인치 속사포 15문을 가진 보이시는 필즈베리의 엄호를 받으면서 후방에서 대기하다가 공격부대의 철수를 엄호하기로 했으며 만일 공격부대가 일본수상함대와 본격적인 전투에 휘말리면 달려가서 가세할 것이었다.

급유를 마친 제5기동부대는 1월 16일에 쿠팡 앞바다를 떠나 케마를 향하여 마카사르 해협을 북상했다. 그러나 다음날인 17일에  케마 지역을 정찰한 미국잠수함 파이크와 퍼밋이 일본선단이 떠났다고 보고했다. 작전은 취소되었으며 제5기동부대는 티모르 북쪽 해상으로 돌아와서 급유를 받았다. 돌아오는 도중 마블헤드의 터빈 하나가 고장나는 바람에 35노트인 최고속력이 28노트로 줄어들었으며 글래스포드 소장은 사령기를 보이시로 옮겨 달았다. 티모르 북쪽 해상의 정박지에는 구축함 존D 애드워즈와 휘플이 먼저 도착해 있었으며 이어서 중순양함 휴스턴이 구축함 알덴 및 엣솔과 함께 도착함으로써 잠시동안이나마 제5기동부대는 막강해졌다. 

그러나 함정들은 곧 흩어져야 했다. 우선 휴스턴, 존 D. 에드워즈, 휘플이 수라바야로 향하는 선단호송을 위해 떠났으며 이어서 알덴과 엣솔이 급유를 마친 급유함 트리니티를 다윈으로 호송했다. 엣솔은 다윈으로 향하던 중 1월 23일에 클라렌스 해협에서 일본잠수함 I-123에게 폭뢰공격을 가했다가 얕은 해저에서 반사된 충격파에 의하여 후방 함체와 추진기에 피해를 입었다. 이로써 속력이 떨어진 엣솔은 이후 호송임무에만 투입되었다.

1월 20일에 네덜란드군 정보기관으로부터 타라칸의 일본선단이 곧 남하할 것이라는 경고가 들어왔다. 하트 제독은 미국잠수함 S-36, 포퍼스, 피커렐과 스터전에게 마카사르 해협으로 나아가 일본선단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가장 가까이 있던 S-36은 북상하다가

1월 20일에 마카사르시에서 남서쪽으로 50km 떨어진 타카바캉 산호초에 좌초하여 함을 포기해야 했다. 미국잠수함 스피어피시, 소리, S-40은 발릭파판으로 직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헬프리히 제독도 네덜란드잠수함 K-ⅩⅣ 와 K-ⅩⅧ 에게 발릭파판으로 가라고 명령했다.

쿠팡 앞바다에서 대기 중이던 제5기동부대도 발릭파판으로 나아가 일본선단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경순양함 2척(보이시, 마블헤드)과 구축함 6척(존D.포드, 포프, 패럿, 폴존스, 필즈베리, 벌머)으로 이루어진 제5기동부대의 공격계획은 이전과 같았다. 즉 구축함 5척과 마블헤드가 야간에 정박지에 돌입하여 어뢰공격을 가하고 보이시는 벌머와 함께 후방에서 철수를 엄호하는 것이었다.

제5기동부대의 계획은 플로렌스 해로 진입하기도 전에 어긋나기 시작했다. 동료 함정과 함께 쿠팡 앞바다를 떠나 북상하던 보이시는 1월 21일에 숨바와섬과 코모도섬 사이의 사페 해협 초입에 있는 켈라파섬 부근에서 해도에도 없는 산호에 부딪혔다. 당시 영어로 기입된 해도는 만들어진지 100년이 넘었는데 이 지역의 산호는 1년에 15cm씩 자랐다. 네덜란드해군은 정확한 해도를 가지고 있었으나 미해군은 네덜란드어를 몰랐다. 대신 미함정이 요청하면 도선사를 파견해 주기로 했는데 이때 네덜란드해군은 도선사가 없다면서 파견을 거부했다. 하트 제독은 일부러 파견해 주지 않았다고 의심했는데 헬프리히 제독의 평소 행동을 보아 가능성은 있지만 증거는 없다.

보이시의 상태는 심각했다. 좌현 수선하 함체에 37m 에 달하는 긴 상처가 생겼고 벌어진 틈으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와 기계를 침수시켰으며 축전기 하나에는 산호가 들어찼다. 결국 보이시는 칠라찹에서 응급처치를 받은 뒤 인도 봄베이의 건선거에 들어가야 했으며 최종적으로 미본토 서해안의 메어아일랜드 해군조선소에서 수리를 마치고 6월 22일에야 일선에 복귀했다.

 

브루클린급 경순양함 CL-47 보이시. https://en.wikipedia.org/wiki/USS_Boise_(CL-47)

 

이로써 보이시는 동남아시아의 연합군 함정을 덮친 잔인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보이시의 탈락으로 ABDAFLOAT는 전력이 크게 감소했다. 10,000톤의 배수량을 가지고 6인치 속사포 15문을 장비한 보이시는 중순양함인 휴스턴, 엑서터와 함께 ABDAFLOAT에서 가장 강력한 함정 중 하나였으며 동남아시아의 연합군 함정 중 유일하게 수상탐색레이더를 장비한 함정이었다. 글래스포드 제독은 사령기를 마블헤드로 옮겨달았으며 다음날인 22일에 보이시는 남은 중유를 마블헤드에 급유한 다음 필즈베리의 호위를 받으면서 칠라찹으로 향했다. 

이때 또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마블헤드는 18일에 터빈이 고장나서 최고속력이 28노트로 줄어들었는데 터빈의 상태가 더 나빠져 최고속력이 15노트로 줄어든 것이었다. 이제 공격작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글래스포드 소장은 마블헤드에 승좌한 상태로 벌머와 함께 수라바야로 향했다. 제59구축함분대장 폴 탤벗 중령이 지휘하는 구축함 4척(존 D. 포드, 포프, 패럿, 폴존스)은 셀레베스 남서쪽의 포스틸리온 제도(오늘날 사발라나 제도)에서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동안 일본측에서는 발릭파판을 공격할 사카구치 지대를 실은 수송선 16척이 제1 호위대의 보호를 받으면서 21일 오후 5시에 타라칸을 출항했다. 제1호위대는 경순양함 나카, 구축함 9척, 소해정 4척, 구잠정 3척, 초계정 3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22일 하루동안 하트 제독에게는 일본선단의 남하를 알리는 보고가 잇달아 들어왔다.  미국잠수함 파이크는 수송선 26척과 구축함 14척으로 이루어진 선단이 발릭파판으로 접근 중이라고 보고했다. 미국잠수함 스터전은 22일 오전에 접촉보고를 발한 후 23일 0시 5분에 일본선단에 접근하여 어뢰 4발을 발사했다. 스터전의 승조원들은 잠시 후 폭발음을 들었으며 0시 40분에 일본구축함이 달려와 폭뢰 6발을 떨어뜨렸으나 무사히 빠져나왔다. 함장 윌리엄 라이트 소령은 적의 항공모함 1척을 격침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날 일본군이 잃은 배는 없었다. 스터전이 공격한 함정은 일본구축함 우미카제였으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전사총서에 따르면 스터전의 어뢰 중 3발은 우미카제의 함저를 스쳐 지나갔고 1발은 함수 쪽으로 빗나갔으며 탄두가 폭발했다는 기록은 없다.

네덜란드 공군도 공격에 나섰다. 마침 23일에는 타라칸 상공의 날씨가 나빠서 제로기가 뜨지 못하는 바람에 일본선단의 상공은 비어 있었다. 사마린다를 출격한 네덜란드군의 B-10 쌍발폭격기 3대가 23일 오전 10시 50분에 일본선단을 공습했으나 명중탄을 내지 못했다. 오후 12시 20분에는 제10초계비행단의 카탈리나 1대가 일본선단의 남쪽에 나타나 45분 동안 정찰하다가 사라졌다. 이 카탈리나는 수송선 9척, 순양함 4척, 구축함 14척으로 이루어진 선단이 발릭파판으로 접근 중이라고 보고했다. 오후 4시 20분에는 네덜란드군의 B-10 쌍발폭격기 9대가 일본선단을 폭격하여 탄약을 운반하던 일본해군의 운송선 타츠가미마루에 소형폭탄 1발을 명중시켰다. 사마린다를 출격한 네덜란드공군의 B-10 쌍발폭격기 9대는 오후 7시 30분에 다시 일본선단을 공습하여 제11항공함대의 운송선인 6,764톤짜리 나나마루의 후방 선체에 폭탄을 명중시켰다. 나나마루에서는 대화재가 일어났으며 결국 일본군은 나나마루를 포기해야 했다. 

마틴 B-10 쌍발폭격기. https://en.wikipedia.org/wiki/Martin_B-10

 

이러한 저항도 일본선단의 항진을 막지는 못했다. 별동대가 먼저 진입하여 23일 오후 10시 30분에 상륙부대를 발진시켰으며 일본선단의 주력은 23일 오후 9시부터 정박지에 진입하기 시작하여 오후 11시 30분까지 투묘를 마쳤다.

한편 하트 제독은 제5기동부대를 사용하여 발릭파판의 일본군을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23일 오후 12시 5분에 발리섬의 남동쪽 해상을 항진하던 마블헤드 함상의 글래스포드 제독과 포스틸리온 제도에서 대기하던 제59구축함분대장 탤벗 중령에게 발릭파판의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하트 제독의 명령이 동시에 떨어졌다. 작전은 케마의 경우와 같았다. 구축함 4척으로 이루어진 탤벗 중령의 제59구축함분대는 야간에 일렬로 정박지에 돌입하여 어뢰공격을 가하고 빠져나올 것이었다. 차이점이라면 속력이 떨어진 마블헤드는 정박지에 돌입하지 않고 벌머와 함께 발릭파판 남쪽 해상에서 대기하면서 제59구축함분대의 퇴각을 엄호한다는 점이었다.

 

 발릭파판해전 접근 및 철수상황. History of U.S. Naval Operations in World War II, Vol. III: The Rising Sun in the Pacific, 1931--April 1942 P.286

하트 제독의 명령서를 읽던 탤벗 중령은 적의 호위함정이 순양함 2척, 구축함 8척이라는 정보보고를 보자 "맙소사" 라는 말이 저절로 새어나왔으나 곧 마음을 다잡았다. 탤벗 중령은 심한 치질로 의자에도 제대로 앉지 못하고 빈혈로 고생하고 있었으나 1898년의 미서전쟁 이후 최초로 미해군의 해상전투를 지휘하게 되자 투지를 불태웠다.

탤벗 중령의 구축함들은 낮에는 북동쪽으로 항진했다. 일본정찰기에게 들켰을 경우 셀레베스의 마나도만으로 향한다고 믿게 하려는 의도였으나 일본기는 나타나지 않았다. 23일 오후 7시 30분에 함열이 셀레베스 서해안의 만다곶에 접근하자 탤벗 중령은 침로를 310도로 바꾸어 27노트의 고속으로 발릭파판을 향했다.

존 D. 포드에 승좌한 탤벗 중령은 변침 직후 발광신호로 나머지 구축함에 명령을 내렸다.

"주무기는 어뢰다. 주표적은 수송선이다. 순양함은 임무 수행에 필요한 경우에만 공격하라. 들키기 전에 최대한 접근하여 어뢰를 발사하도록 노력하라... 어뢰는 일제발사로 쏘되 1척당 1발의 어뢰가 명중하도록 각도를 조절하라. 목적지로 가는 도중에는 교전을 회피하라... 표적을 확인한 후에는 독자적으로 판단하여 공격하라. 어뢰를 모두 발사한 후에는 포격을 가하라. 주도권을 쥐고 단호하게 공격하라." 

잠시 후 함열은 폭풍우 속으로 뛰어들었다. 산더미같은 파도에 시달리던 함열이 폭풍우를 벗어난 것은 24일 0시가 막 지났을 때였다. 함열이 발릭파판에 접근하자 불타는 유전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가 해상을 뒤덮고 있었으며 멀리서 일렁이는 불빛이 발릭파판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었다.  일렁이는 불빛은 불타는 나나마루의 불꽃이 낮게 깔린 구름에 반사된 것이었다. 나나마루는 뜻하지 않게 미국구축함들에게 등대 노릇을 했다.

발릭파판을 공격한 사카구치 지대의 사카구치 시즈오 소장은 석유시설을 피해없이 점령하고 싶었다. 그는 타라칸에서 포로로 잡힌 네덜란드 장교 2명에게 친서를 들려 작은 배에 태운 다음 20일 오후에 발릭파판 부근에 상륙시켰다. 발릭파판의 네덜란드군 사령관에게 보내는 친서에서 사카구치 소장은 석유관련 시설을 파괴하지 말라면서 만일 파괴하면 처형하겠다고 경고했으나 역효과만 났다. 네덜란드군은 비록 병력이 모자라고 무기도 빈약했으나 용기는 부족하지 않았다. 협박을 받은 네덜란드군 사령관은 강경한 내용의 답신을 보낸 다음 유전, 석유탱크, 정유공장 등 석유관련 시설을 모조리 파괴했으며 실제로 일본군은 발릭파판 점령 직후 78명의 네덜란드군을 처형했다. 이때 네덜란드군이 파괴한 석유시설에서 나온 연기는 바다로 30km 이상 퍼져나가 미국구축함들이 들키지 않고 접근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미국구축함들이 발릭파판으로 접근하는 동안 네덜란드잠수함 K-ⅩⅧ이 먼저 공격했다. 함장 카렐 반 웰 그뢴벨트 중령은 바다가 거칠어져 잠망경으로 수색이 어려워지자 대담하게 부상하여 발릭파판 정박지에 잠입했다. 폭풍우와 해상에 깔린 연기가 일본견시의 날카로운 눈으로부터 K-ⅩⅧ를 지켜주었다. 그뢴벨트 중령은 제4수뢰전대의 기함인 경순양함 나카를 발견하고 접근하여 24일 0시 40분에 어뢰 4발을 발사했다. 좌현 함수쪽에서 다가오는 어뢰의 항적을 발견한 나카가 재빨리 피하면서 어뢰는 모두 빗나갔으나 1발은 병력수송함 쓰루가마루에 명중하여 총원이 퇴거했다. 그제서야 잠수함의 존재를 알아차린 제4수뢰전대는 정박지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으나 K-ⅩⅧ을 찾지 못했다. K-ⅩⅧ은 이어서 일본수송선 주카마루를 격침하고 다시 제37호초계정에 어뢰 1발을 명중시켜 대파했다. 이후 미국구축함이 정박지에  침투하자 K-ⅩⅧ은 오인사격을 피하기 위하여 활동을 멈추고 잠항한 채로 잠망경으로 미국구축함의 공격상황을 지켜보았다. K-ⅩⅧ은 24일 아침에 제12호구잠정으로부터 폭뢰공격을 받아 피해를 입었으나 무사히 탈출하여 수라바야로 돌아갔다.

잠수함이 정박지에 침투하자 제4수뢰전대사령관 니시무라 쇼지 소장은 정박지 경계 구역을 조정하여 제4수뢰전대의 담당구역을 바깥쪽으로 확대했다. 따라서 미국구축함이 정박지에 들이닥쳤을 때 경순양함 나카와 구축함 9척(유다치, 사미다레, 하루사메, 미네구모, 나츠구모, 야마카제, 스즈카제, 가와카제, 우미카제)으로 이루어진 강력한 제4수뢰전대는 외곽 경계를 맡느라고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이렇게 K-ⅩⅧ은 발릭파판 해전의 승리에 큰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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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대잠작전

ABDA사령부의 보급항은 호주 북서부의 다윈항이었다. 보급품과 병력은 일단 다윈항에 도착한 후 다시 ABDA 지역으로 향했으므로 일본이 다윈항을 무력화하려고 시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42년 1월 11일에 미육군 수송선 리버티글로가 롬복 해협 남서쪽 16km 해역에서 일본잠수함 I-166 으로부터 뇌격을 받았다.  미국구축함 폴존스와 네덜란드구축함 반겐트가 예인했으나 결국 항구까지 가지 못하고 발리 해안에 좌초시켰다.

이어서 일본잠수함들이 기뢰를 깔기 시작했다. I-121과 I-122가 반디에멘만과 티모르해 사이를 잇는 클라렌스 해협에, 우에노 도시타케 소좌가 지휘하는 I-123이  분다스 해협에 기뢰를 깔았다.

기시가미 고이치 소좌가 지휘하는 I-124는 다윈항 바로 바깥에 기뢰를 깔았다. 1월 19일에 기시가미 소좌는 다윈항에 접근하는 소규모 선단을 발견하고 도쿄에 보고했는데 이것이 그의 운명을 결정했다. 연합군 암호해독가들이 통신내용을 해독하여 다윈항 앞바다에 일본잠수함이 있다는 경고를 발했다.

경고를 받은 다윈항의 해군사령관 어니스트 토머스 대령은 호주 코르벳함 델로레인, 리스고우, 그리고 카툼바를 파견했다. I-124는 오후 1시 35분에 델로레인을 발견하고 어뢰를 쏘았으나 오른쪽으로 급선회하여 피했다. 델로레인은 오후 1시 43분에 소나로 I-124의 위치를 확인하고 폭뢰공격을 가했으며 5분 후에 다시 공격했다. 수심이 얕은 바다에서 폭뢰공격을 당한 I-124는 피해를 입고 바닥에 가만히 앉아 델로레인이 떠나기를 기다렸으나 델로레인은 계속 폭뢰공격을 퍼부었다. 결국 오후 3시에 델로레인의 폭뢰가 떨어졌으나 이미 리스고우가 현장에 도착한 이후였으며 잠시 후 카툼바가 도착했다. 이어서 미국구축함 엣솔과 알덴, 그리고 제10초계비행단의 카탈리나 2대와 랭글리의 킹피셔 수상기 1대도 사냥에 끼어들었다. 이들은 21일 오후에 해상이 거칠어져 철수할 때까지 부근 해저를 폭뢰로 도배했으며 I-124는 다시는 떠오르지 못했다. I-124는 호주해군에 의하여 격침된 최초의 일본군함이자 호주해역에서 격침된 최초의 일본함정이었다.

 

호주 코르벳함 델로레인. https://en.wikipedia.org/wiki/HMAS_Deloraine

 

영국함정도 사냥에 합세했다. 영국구축함 주피터는 1월 17일에 크라카타우 화산의 잔해인 아낙 크라카타우에서 북서쪽으로 40km 떨어진 해역에서 일본잠수함 I-60을 소나로 접촉한 후 폭뢰공격을 가했다. 피해를 입은 I-60이 주피터의 바로 뒤에 떠올랐는데 거리가 가까워서 주피터의 주포가 겨냥할 수 없었다. 주피터가 필사적으로 거리를 벌리는 동안 I-60의 승조원이 12cm 갑판포로 주피터의 4.7인치 A연장포탑에 1발을 명중시켜  전사자 3명과 부상자 9명을 기록했다. 주피터는 20mm 기관포로 반격하면서 어뢰 2발을 쏘았으나 빗나갔다. 잠시 후 거리를 충분히 벌린 주피터의 4.7인치 주포가 불을 뿜자 I-60은 여러 발의 명중탄을 맞아 화재가 발생하면서 가라앉기 시작했다. 주피터는 달려들어 얕은 심도로 맞춘 폭뢰 1발로 숨통을 끊은 다음 수리를 위하여 수라바야로 돌아갔다.  

그러나 대잠작전으로는 남하하는 일본군을 막기는 커녕 진격을 늦출 수도 없었다. 하트 제독은 가용한 모든 함정을 선단호송에 투입하려는 웨이벌 장군의 방침을 거부했다. 그는 선단호송을 위하여 아시아함대의 수상함정을 자바 서부나 싱가포르 방면으로 보내지 않고 자바 동부에 유지하면서 남하하는 일본선단을 요격하려 했다. 1월 20일에 일본군 침공선단이 마카사르 해협을 따라 남하할 것이라는 소식이 들어오자 하트 제독은 공격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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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타라칸 함락
 
1941년 12월 26일에 수라바야의 네덜란드 해군사령부는 필리핀 남단의 홀로에 순양함 2척, 구축함 2척 그리고 3척의 수송선이 모여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전날 홀로를 점령한 마츠모토 지대를 싣고 온 수송선 3척과 호위를 맡은 제5급습대(경순 1척, 구축함 4척, 초계정 2척)였다.

네덜란드 해군사령부는 암본에 전개한 네덜란드군에게 공격명령을 내렸는데 당시 암본의 네덜란드군이 보유한 비행기는 버팔로 전투기 2대가 모두였다. 따라서 암본의 네덜란드 사령관은 호주군과 미군에게 홀로에 있는 일본선단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면서 공격을 요청했다. 호주군이 보유한 허드슨 폭격기 3대는 항속거리가 모자랐다. 그러나 암본에 막 도착한 미국의 제10초계비행단이 보유한 카탈리나 비행정은 충분한 항속거리를 갖고 있었으므로 비행단장 프랭크 와그너 대령은 홀로의 일본선단을 폭격하기로 결심했다. 

27일 새벽에 버든 헤이스팅스 중위의 제1소대와 존 하일랜드 중위의 제2소대 소속 6대의 카탈리나 비행정이 출격했다. 카탈리나 비행정은 27일 아침에 홀로섬 북해안에서 일본선단을 발견하고 폭격을 가했으나 모두 빗나갔다. 진짜 문제는 미군은 모르고 있었지만 홀로에는 이미 타이난 항공대의 제로기가 진출해 있었다는 것이었다. 제로기 8대가 달려들어 카탈리나 4대를 격추하고 2대에 피해를 입혔다.  큰 피해를 입은 제10초계비행단은 일시적으로 정상적인 임무수행이 불가능해졌다.

(콘솔리데이티드 PBY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Consolidated_PBY_Catalina)

같은 날 오전 늦게는 타라칸에서 날아온 네덜란드 해군의 도르니에 Do-24K 비행정 1대가 홀로의 일본선단을 폭격했다. 명중탄은 없었으나 비행정은 제로의 추격을 피해 무사히 도망쳤다.

도르니에 Do-24K 비행정. https://en.wikipedia.org/wiki/Dornier_Do_24


미군은 다바오에 집결 중인 일본군에 대한 견제도 실시했다.
1942년 1월 3일에 자바의 말랑 비행장을 이륙한 B-17 폭격기 9대가 중간기착지인 보르네오의 사마린다에 착륙했다. 4일 아침에 600파운드(272kg)짜리 폭탄 4발을 장착한 B-17 폭격기 8대가 세실 컴즈 소령의 지휘 아래 사마린다를 이륙하여 오후 12시 10분에 다바오 남쪽의 말라라그만에 정박 중이던 제5전대(중순양함 묘고, 나치, 하구로)를 폭격하여 기함인 묘고에 1발을 명중시켰다. 전대사령관 다카기 다케오 소장은 사령기를 나치로 옮겨 달았으며 묘고는 일본으로 돌아가 40일간 건선거에 들어앉아 있어야 했다. B-17은 사마린다를 거쳐 5일까지 말랑으로 모두 무사히 귀환했다.
1월 10일에는 미국잠수함 피커렐이 다바오만 입구에서 2,929톤짜리 특설포함 칸코마루를 격침했다. 같은날 미국잠수함 스팅레이는 해남도 남쪽 해상에서 5,167톤짜리 수송선 하얼빈마루를 격침했고, 네덜란드 잠수함 O-19는 태국만에서 3,817톤짜리 병력수송선 아키타마루를 격침하고 화물선 타이류마루에 피해를 입혔다.

네덜란드가 일본에 선전포고한 지 한달도 더 지난 1942년 1월 11일에 일본은 네덜란드에 선전포고했다. 첫 목표는 보르네오 북동쪽의 유전지대인 타라칸으로 제56혼성여단과 구레제2특별육전대로 이루어진 사카구치 지대가 맡았다. 

타라칸은 침공을 앞두고 일련의 공습을 받았다. 말레이 전투의 일환인 미리, 쿠칭 작전 도중 타라칸에서 날아온 네덜란드 항공기에게 피해를 입은 제25군은 타라칸을 견제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이에 따라 미호로 항공대가 1941년 12월 26일에 육상공격기 7대, 28일에는 육상공격기 7대와 전투기 4대를 보내어 타라칸을 폭격했다. 같은 날 제1공습부대의 제3항공대에서도 제로기 7대, 육상정찰기 1대를 내보내어 공습했다.
타라칸 공습의 주역인 제2공습부대는 12월 30일부터 공습을 시작하여 31일, 1월 3일, 4일, 5일에 주로 전투기와 육상정찰기를 내보내어 공습을 실시했다. 7일에는 가오슝 항공대의 육상공격기 12대가 호로에 진출했다.

사카구치 지대를 실은 14척의 수송선은 제4수뢰전대(경순양함 나카, 구축함 12척, 구잠정 3척, 소해정 6척)의 호위를 받으면서 1월 7일 오전 8시에 다바오를 떠났다. 수상기모함 산요마루와 사누키마루 중심의 제1항공부대가 수상정찰기를 내보내어 선단의 앞길을 살폈으며 제1및 제2공습부대의 전투기들이 선단 상공을 지켰다.

네덜란드 해군은 일본선단에 타격을 가하기 위하여 벡 소령이 지휘하는 잠수함 K-X을 파견했다. 취역한지 19년된 K-X은 상태가 좋지 않았으며 1월 8일에 타라칸에 도착했을 때 엔진이 고장났다. 수리를 위하여 타라칸항에 머무르던 K-X은 10일 오전에 일본기의 공습을 받았으나 잠항하여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때 일본선단이 타라칸에 접근 중이라는 보고를 받은 헬프리히 제독은 K-X에게 요격 명령을 내렸다.

10일 오후 4시 30분, K-X이 타라칸항 입구의 기뢰지대를 통과할 때 일본수상정찰기 1대가 나타나서 공격을 가했다. 기뢰지대라 잠항이 불가능했으므로 K-X은 대공기총으로 반격했으나 금방 고장났다. 다행히 K-X은 재빠른 회피기동으로 일본기가 떨어뜨린 폭탄 2발을 20m 차이로 피했다. 일본기는 이어서 기총소사를 가했으나 피해는 없었으며 K-X은 기뢰지대를 빠져나와 잠항했다.

그동안 사마린다에서 이륙한 네덜란드공군의 글렌 마틴 폭격기 3대가 타라칸에 접근 중인 일본선단을 폭격하여 수송선에 폭탄 1발을 명중시켰으나 선단의 전진을 막지는 못했다. 

저녁이 되자 K-X은 부상하여 일본선단을 찾아 북상했다. 그러나 완전히 수리하지 못한 엔진이 다시 말썽을 일으키자 공격을 포기하고 수라바야로 돌아갔다.

일본선단은 10일 오후 7시에 타라칸 앞바다에 도착했다. 최초의 병력은 오후 9시 30분에 수송선을 떠나11일 0시에 타라칸섬에 상륙했다. 사카구치 지대는 치열한 전투 끝에 14일 오전까지 타라칸을 완전히 점령했다.

타라칸을 지키던 네덜란드군은 1개 대대에 지나지 않았으나 마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타라칸섬 남해안으로 흘러들어가는 카론간강 하구에 숨어있던 120mm 해안포 2문은 12일 정오 경에 일본소해정이 접근하자 포격을 가했다. 해안포의 존재를 모르고 있던 일본군은 기습을 당했으며 네덜란드 해안포대는 10분에 걸친 짧고 격렬한 포격으로 제13호 및 제14호소해정에 여러 발의 명중탄을 기록했다. 제14호소해정은 포탄에 맞아서 발생한 화재가 선체 후방의 기뢰를 유폭시키면서 순식간에 굉침당했고 허겁지겁 도망치던 제13호소해정도 여러 발의 명중탄을 얻어맞고 격침되었다. 이 교전으로 제11소해대 사령 야마구마 카즈요시인 중좌를 포함하여 156명이 전사했다. 소해정 2척의 승조원 209명중 생존자는 53명에 지나지 않았다.

미군도 공격을 시도했다. 1월 13일에 세실 컴즈 소령이 이끄는 B-17 폭격기 7대가  말랑 비행장을 떠나타라칸으로 향했다. 그러나 4대는 폭풍우로 인하여 도중에 돌아가고 3대만이 타라칸에 도착하여 8,800m 고도에서 일본선단에 폭격을 가했으나 명중탄을 내지 못했다.

타라칸항에 있던 네덜란드 기뢰부설함 프린스 반 오라네는 12일 저녁에 타라칸  북해안과 분유섬 사이의 수도를 따라 탈출을 시도했으나 오후 9시 57분에 부근 해상을 감시 중이던 구축함 야마카제에게 들켰다. 야마카제는 곧 추격을 시작했으며 도중에 제38호초계정이 가세했다.  야마카제의 함장 하마나카 슈이치 중좌는 자신이 쫓고 있는 함정이 아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후 포격명령을 내렸다. 오후 11시 22분부터 야마카제와 제38호초계정은 탐조등을 비추면서 1,800m 거리에서 포격을 퍼부어 10분 만에 프린스 반 오라네를 격침했다. 일본군에게 구조된 생존자는 5명이었다.

타라칸은 유전지대이기도 했으나 전술적으로는 비행장이 있어서 중요했다. 일본군은 타라칸 비행장을 12일 오후 3시에 점령했으며 곧 활주로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13일 오후 3시 20분에 네덜란드군의 마틴글렌 폭격기 3대가 기습적으로 비행장을 폭격함으로써 활주로 정비작업 중이던 해군육전대 병력 15명을 죽이고 27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나 비행장 사용을 막지 못했다. 일본군은 활주로 정비에 박차를 가하여 14일 오후부터 제22항공전대 타이난 항공대의 제로기 9대와 육상정찰기 2대가 타라칸 비행장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사카구치 지대의 타라칸 상륙과 동시에 일본해군의 공수부대인 요코스카제1특별육전대가 북부 셀레베스의 마나도를 점령했으며 이어서 사세보연합특별육전대가 마나도와 케마에 상륙했다. 이로써 일본군은 보르네오와 셀레베스 사이에 있는 마카사르 해협의 북쪽 입구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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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네덜란드 해군

진주만 기습 당시 동인도제도를 지키던 네덜란드 해군은 경순양함 3척(자바, 드루이터, 트롬프), 구축함 7척(반네스, 에버트센, 코테네어, 윗더위드, 반겐트, 피에타인, 방커트), 잠수함 16척, 그리고 소수의 기뢰부설함 및 소해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순양함의 수준은 떨어지는 편이었다.
트롬프는 2,500톤짜리 지휘구축함의 설계에서 경순양함으로 확대된 경우로 표준배수량 3,800톤이 채 되지 않아 너무 작았다. 따라서 무장도 약한 편이었으며 특히 방어력이 약했다.
자바의 설계는 1916년에 건조를 시작할 당시만 해도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예산 및 정치적 의지의 부족으로 건조가 늦어져 마침내 1925년에 취역했을 때는 이미 구식이 되어 있었다. 자바는 150mm 주포 10문을 포방패가 달린 10개의 단장 포가에 달아 배치했는데 4문은 함체의 앞뒤에, 6문은 중앙에 배치했다. 그런데 중앙에 배치한 6문은 함체의 중심선이 아니라 좌우로 3개씩 나누어 배치했기 때문에 현측 일제사격 시에는 최대 7문만 사격이 가능했다. 자바가 취역할 당시 순양함의 주포는 노출된 단장 포가가 아니라 연장 또는 3연장의 폐쇄식 포탑에 달아 함체의 중심선을 따라 배치하는 것이 대세로 자리잡은 상태였다. 

(네덜란드 경순양함 자바. https://en.wikipedia.org/wiki/HNLMS_Java_(1921)

 

잠수함의 수준은 높았다. 네덜란드는 20세기 초반부터 동시기 열강의 잠수함에 뒤지지 않는 우수한 잠수함을 건조해 왔으며 잠항 중에 디젤엔진을 구동시켜 충전을 가능케 하는 슈노켈도 네덜란드가 발명한 것이다. 그들은 해양환경이 다른 본토와 동인도제도용 잠수함을 따로 개발하여 소형인 본토용은 O급으로 뒤에 아라비아 숫자를 붙이고 좀 더 큰 동인도제도용은 K급으로 뒤에 로마숫자를 붙였다. 이런 식의 이중개발은 아무래도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에 기술이 발달하면서 본토와 동인도제도의 서로 다른 해양환경에서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잠수함 개발이 가능해지자 1939년에 취역한 O-19급부터 하나로 통합되었다. 태평양전쟁 당시 동인도제도에 전개한 네덜란드 잠수함 부대는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성능이 뛰어난 잠수함을 보유했으며 승조원들도 잘 훈련되어 있었다.

장거리 비행정 중심의 해군항공대 또한 일류였다. 승무원들은 잘 훈련되어 있었으며 수색이나 정찰 뿐 아니라 공격 임무도 훌륭하게 수행했다. 또한 수상함정이나 잠수함과 긴밀하게 연락하면서 해군의 작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네덜란드 해군이 사용하던 항구는 3개로서 모두 동인도 제도의 정치, 상업, 산업적 중심지인 자바에 있었다.
자바 북동쪽에 있는 수라바야는 네덜란드 해군의 모항으로 비행장, 수상기 기지, 잠수함 기지, 부유선거 2개, 해병대 막사 등 지원 시설이 대부분 모여 있었다. 수라바야는 진주만, 싱가포르는 물론 카비테보다도 시설이 열악했으나 동인도제도에서는 가장 훌륭한 군항이었다.
자바 북서쪽에 있는 탄종 프리옥은 수도인 바타비아(오늘날 자카르타)의 외항이었다. 바타비아 시가지에서 13km 떨어진 탄종 프리옥은 동인도제도 최대의 상업항이었으나 해군 시설은 수상기 기지 하나밖에 없었다. 바타비아의 북쪽과 남쪽에는 비행장이 하나씩 있었다.
자바 남해안에 자리잡은 칠라찹은 입지 조건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남해안에서 유일한 항구였기 때문에 네덜란드 정부가 신경을 써서 개발했으며 전쟁이 발발하자 8,000톤짜리 부유선거와 수리함 바렌츠를 파견하여 제한적인 수리 능력을 갖추었다. 칠라찹의 가장 큰 단점은 인접한 비행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1940년 5월에 네덜란드 본토가 함락되자 동인도제도의 군사력 증강은 중단되었다. 함정의 증원은 고사하고 예비부품의 공급이 끊기는 바람에 일부 함정을 부품공급처로 사용해야만 했다.  항공기의 증원도 불가능해져 미국으로부터 사야 했는데 미국 또한 스스로 무장하는데 바빴다. 따라서 미군이 퇴역시키려고 하는 마틴 B-10 폭격기나 브류스터 버팔로 전투기같은 구형기를 구입할 수 밖에 없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인력 충원이 막힌 것이었다. 승조원이 부족하여 몇몇 함정은 필수 인원만으로 운용되었다.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가 격침되자 헬프리히 제독은 살아남은 승조원들을 동인도제도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영국 승조원들을 순양함 수마트라, 잠수함 2척, 그리고 어뢰정 몇척에 배치하기를 원했으나 양측의 입장이 달라 무산되었다. 자바해 해전에 참가한 네덜란드 함정 중 승조원 정수를 채운 함정은 칠라찹에서 좌초하여 폐기된 구축함 반겐트의 승조원을 보충받은 구축함 윗더위드 뿐이었다. 승조원의 훈련도는 구축함 에버트센을 제외하고는 양호한 편이었다. 에버트센은 개전 1주일 전인 1941년 12월 1일에 취역하여 훈련할 시간이 부족했다.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하고 코타바루에 상륙하면서도 네덜란드에 대해서는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으나 네덜란드군은 일본의 의도에 대해 환상을 품지 않고 즉시 적대행위를 시작했다. 헬프리히 제독은 1941년 12월 8일에 휘하의 네덜란드 함정들에게

"일본과의 전쟁이 발발했다."

는 통신을 보냈다.

첫번째 전과는 12월 12일에 있었다. 안톤 부세메이커 중령이 지휘하는 네덜란드 잠수함 O-16은 12일 밤에 파타니 앞바다의 일본군 정박지에 침투했다. 수심이 9m 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O-16은 부상한 상태에서 정박한 일본군의 병력수송함 4척에게 두번에 걸쳐 6발의 어뢰를 발사했다. 그 결과 8,666톤 짜리 토산마루, 9,306톤짜리 킨카마루, 8,812톤짜리 아소산마루 등 3척의 병력수송선이 침몰하고 9,788톤 짜리 병력수송선 아야토산마루가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수심이 얕았으므로 일본군은 나중에 침몰한 선박을 모두 건져 수리한 후 다시 사용했다. 따라서 일본측은 이 3척을 격침당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O-16은 큰 전과를 세우고 개선하다가 일본군이 설치한 기뢰에 걸려 침몰하는 바람에 42명의 승조원 중 1명만이 살아남았다. 또다른 네덜란드 잠수함 K-ⅩⅦ도 기뢰에 접촉하여 36명인 승조원 전원과 함께 침몰했다.
17일 오후에는 타라칸을 이수한 네덜란드해군항공대 소속 도르니에 Do-24 비행정 3대가 영령 보르네오의 미리를 침공한 일본선단을 공습했는데 이중 1대가 구축함 시노노메에게 200kg 짜리 폭탄 2발을 명중시켜 격침했다.

 

(일본구축함 시노노메.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Japanese_destroyer_Shinonome_(1927

일본군은 미리에 이어 쿠칭에 상륙했다. 네덜란드해군항공대의 X-35 비행정이 일본선단을 발견하고 잠수함 K-ⅩⅣ에게 연락했다. 카렐 그뢴벨트 소령이 지휘하는  K-ⅩⅣ는 23일 오후 8시 40분부터 산투봉 강어귀에 정박한 일본선단을 공격하여 카토리마루(9,848톤)와 히에마루(4,943톤)를 격침하고 호카이마루(8,416톤)와 니치란마루(6,503톤)에 피해를 입혔다.  이 공격은 가장 성공적인 해군항공대와 해군의 합동작전 사례이다.

(네덜란드 잠수함 K-ⅩⅣ. 배수량 865톤(수상) 1,045톤(수중), 길이 74m, 폭 6.5m, 흘수 3.9m, 속력 17노트(수상) 9노트(수중), 항속거리 12노트로 19,000km(수상) 8.5노트로 48km(수중), 잠항심도 80m, 승조원 38명, 무장 21인치 어뢰발사관 전방 4문, 후방 2문, 외부발사관 2문, 어뢰 14발. https://en.wikipedia.org/wiki/HNLMS_K_XIV)

24일 오후 4시에는 루이스 자만 소령이 지휘하는 네덜란드 잠수함 K-ⅩⅥ 이 쿠칭에서 북쪽으로 65km 떨어진 해상에서 병력을 상륙시키고 돌아가던 일본선단을 공격했다. K-ⅩⅥ 은 일본구축함 사기리에 어뢰 2발을 명중시켜 격침했으며 사기리의 승조원 241명 중 121명이 목숨을 잃었다. 승리를 거두고 수라바야로 돌아가던 K-ⅩⅥ 은 다음날인 25일에 일본잠수함 I-66 의 어뢰 공격을 받아 격침되었으며 승조원 36명은 모두 사망했다.

26일에는 보르네오 사마린다 비행장에서 이륙한 네덜란드 공군의 구형 글렌 마틴 B-10폭격기들이 사라왁 앞바다에서 제6호 소해정과 2,827톤 짜리 석탄운반선 제2운요마루를 격침했다.

네덜란드 해군이 맹활약하면서 헬프리히 제독은 미국언론으로부터 '하루한척 헬프리히'(Ship-A-Day Helfrich)라는 별명을 얻는 등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따라서 ABDA사령부가 창설된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자신이 ABDAFLOAT 사령관이 될 것이라고 믿었으나 하트 제독에게 사령관 자리를 빼앗겼다. 그는 크게 분노하여 하트 제독이 물러날 때까지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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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BDA사령부

남방작전에서 일본군의 최종 목표는 석유가 풍부하게 산출되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오늘날의 인도네시아)였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는 자바, 수마트라, 보르네오, 셀레베스(오늘날의 술라웨시)라는 4개의 큰섬을 포함하여 13,000개가 넘는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담당한 이마무라 히토시 중장의 제16군이 최종 목표인 자바에 상륙한 날짜는 1942년 3월 1일이었으나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 대한 공격은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 대한 일본군의 침공. https://en.wikipedia.org/wiki/American-British-Dutch-Australian_Command#Formation)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수마트라를 점령한 것은 공수부대인 정진제2연대와 제38사단의 주력이었다. 정진제2연대가 중요한 유전지대로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서 가장 큰 정유소가 있던 팔렘방을 점령했고 이어서 보병제229연대를 기간으로 한 제38사단 주력이 상륙하여 남부 수마트라를 확보했다.

보르네오 북서쪽의 영령 보르네오는 1941년 12월 말에  말레이를 담당한 제25군 소속의 가와구치 지대가 상륙하여 점령했다.
동부 보르네오는 다바오와 홀로 제도를 점령한 사카구치 시즈오 소장의 사카구치 지대(제56혼성여단)가 담당했다. 사카구치 지대는 1942년 1월 12일에 보르네오 북동쪽의 타라칸에 상륙하여 점령한데 이어 보르네오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면서 동부의 발릭파판과 남부의 반저르마신을 점령했다.

보르네오 동쪽에 있는 셀레베스는 해군이 담당하여 제5전대사령관 다카기 다케오 제독이 지휘하는 동방공략부대가 점령했다. 셀레베스 북쪽의 마나도 점령에는 해군의 공수부대인 요코스카제1특별육전대가 참가하여 해안에 상륙한 사세보연합특별육전대와 함께 마나도를 점령했다. 셀레베스 남서부의 켄다리와 남부의 마카사르는 사세보연합특별육전대가 상륙하여 점령했다.

일본군은 또한 자바 동쪽의 발리섬에 대만보병제1연대제3대대장 가네무라 마타베이 소좌가 지휘하는 가네무라 지대를 투입하여 점령했고 더 동쪽에 있는 암본과 티모르섬에는 제38보병단장 이토 다케오 소장이 지휘하는 보병제228연대 기간의 동방지대를 투입하여 점령했다. 티모르섬 남동쪽의 쿠팡 점령에는 해군의 또다른 공수부대인 요코스카제3특별육전대도 참가했다.

일본의 남하에 대응하여 연합군은 ABDA사령부(ABDACOM)를 창설했다.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참전하자 1941년 12월 22일부터 1942년 1월 14일에 걸쳐 워싱턴에서 루스벨트 대통령과 처칠 수상을 필두로 한 미국과 영국의 군사전문가들이 일련의 회담을 가졌는데 이를 아카디아 회담(Arcadia Conference)이라고 부른다.

아카디아 회담은 미국의 참전 이후 최초로 이루어진 주요 회담인 동시에 서방연합국의 군사행동에 관한 가장 중요한 회담이었다. 여기에서 결정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국제연합이 만들어졌다. 1942년 1월 1일에 미국, 영국, 소련, 중국의 주요 4대국을 포함한 26개국이 모여 국제연합을 창설함으로써 서방연합국과 소련과의 동맹이 공식화되었다. 또한 국제연합에 소속된 국가는 추축국과 개별적으로 평화회담을 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로써 인도를 위협함으로써 영국을 굴복시켜 전쟁에서 쫓아내고 홀로 남은 미국의 전쟁지속의지를 상실케하여 종전하려던 일본의 속셈은 원천봉쇄되었다.

2. 연합참모본부가 만들어졌다. 미국과 영국의 참모총장들로 이루어진 연합참모본부의 창설로 미군과 영국군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례가 없을 정도로 긴밀한 합동작전을 펼 수 있게 되었다.

3. 독일우선원칙을 재확인했다.

동남아시아에서 싸우고 있는 미국, 영국, 네덜란드, 호주의 병력을 통합지휘하는 ABDA사령부의 창설 또한 아카디아 회담의 결과 중 하나였다.  창설 과정은 급속히 진행되었다. 1941년 12월 25일에 마셜 육군참모총장이 영국측에 창설을 제안했고 27일에 영국 측이 동의했다. 1942년 1월 1일에는 관계 4개국 정부의 동의를 얻어 정식으로 창설 명령이  나갔으며 인도 총사령관을 맡고 있던 ABDA최고사령관 아치볼드 웨이벌 대장이 자바에 상륙하여 렘방에 사령부를 차린 것이 1월 10일, 최고사령관에 취임한 것은 15일이었다.

(아치볼드 웨이벌 장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https://en.wikipedia.org/wiki/Archibald_Wavell,_1st_Earl_Wavell)

ABDA사령부는 휘하에 육해공군의 작전을 담당하는 3개의 작전사령부를 거느리고 있었다. 창설 당시 ABDA사령부 및 작전사령부의 주요 인물(9대 고위직)은 다음과 같다.

ABDA사령부(ABDACOM)
최고 사령관 - 아치볼드 웨이벌 대장(영국육군)
부사령관 - 조지 브렛 중장(미육군항공대)
참모장 - 헨리 파우널 중장(영국공군)

육군작전사령부(ABDARM)
사령관 - 하인 텔 푸어텐 중장(네덜란드령동인도제도육군)
부사령관 겸 참모장 - 이안 플레이페어 소장(영국육군)

해군작전사령부(ABDAFLOAT)
사령관 - 토머스 하트 대장(미해군)
참모장 - 아서 팔리서 소장(영국해군)

공군작전사령부(ABDAIR)
사령관 - 리처드 피어스 중장(영국공군)
부사령관 - 루이스 브레러튼 소장(미육군항공대)

작전사령부는 예하에 지역 및 국가별로 지역 사령부를 두고 있었다.

1942년 1월 15일 현재 ABDAFLOAT의 세력은 다음과 같다.

(토머스 하트 제독. https://en.wikipedia.org/wiki/Thomas_C._Hart)

 

미해군(하트 대장)
중순양함 1척(휴스턴), 경순양함 2척(보이스, 마블헤드), 구축함 12척(휘플, 알덴, 존 D. 에드워즈, 엣솔, 벌머, 바커, 패럿, 스튜어트, 포프, 피어리, 필즈베리, 존 D. 포드), 잠수함 25척

영국해군(제프리 레이턴 대장)
중순양함 1척(엑서터), 경순양함 2척(호바트, 퍼스), 구축함 3척(엘렉트라, 인카운터, 주피터)

네덜란드 해군(콘라드 헬프리히 중장)
경순양함 3척(자바, 드루이터, 트롬프), 구축함 7척(반네스, 에버트센, 코테네어, 윗더위드, 반겐트, 피에타인, 방커트), 잠수함 16척

(콘라드 헬프리히 제독. https://en.wikipedia.org/wiki/Conrad_Helfrich)

 

설립 취지와는 달리 ABDA사령부는 제대로 된 합동작전을 실시할 수 없었다. 참가국들은 일본에 대항한다는 명분에서만 일치할 뿐 세부로 들어가면 국가별로 생각이 달랐다. 영국은 싱가포르 방어를 우선으로 생각했으나 미국 사령관들은 필리핀 지원에 관심이 많았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는 자국 방어가 우선이었으며 이는 호주도 마찬가지였다.

자국 방어를 우선으로 하는 호주 정부의 입장은 워싱턴의 미군 수뇌부, 특히 해군으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었다. 미함대총사령관 킹 제독은 ABDAFLOAT의 모항 역할을 하고 있던 자바의 수라바야 대신 호주의 다윈을 보급항으로 선택했다. 이로써 아시아함대의 지원함 세력이 다윈으로 철수함으로써 수라바야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ABDAFLOAT에 대한 보급이 지장을 받았지만 대신 자바해해전의 참패와 이어진 일본해군의 소탕전으로 ABDAFLOAT가 소멸할 때에도 지원함들은 대부분 살아남았다. 아시아함대의 주력이었던 잠수함 세력도 수라바야가 아닌 호주로 철수함으로써 살아남았다. 말레이반도-자바-소순다열도로 이루어진 말레이 방벽(Malay Barrier)의 방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꿰뚫어보면서도 정치적인 이유로 완전히 발을 뺄 수는 없었던 킹 제독은 이런 식으로 미해군의 손해를 아시아함대의 수상전투함에 국한시켰다.

 사정이 이러니 ABDACOM 최고사령관인 웨이벌 대장의 권한도 제한적이었다. 그에게는 처음부터 ABDA 사령부 관할 내에 있는 다른 나라의 육군 병력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물론 그런 권한이 있었다고 해도 움직일 병력도 없었다. 일본군과 교전중이던 필리핀의 미군이나 곧 침공을 받을 네덜란드 육군을 말레이로 이동시켜 퍼시발의 영국군을 증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제해권을 뺏긴 상태에서는 그런 대규모 이동 자체가 불가능했다.
공군같은 경우는 육군보다는 이동이 쉬웠으나 모든 구역의 항공기가 부족한 상황에서 한 구역의 항공기를 빼내어 다른 구역으로 옮기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나마 해군력이 전력의 특성상 통합운용하기 용이했으나 역시 실패했는데 이또한 나라마다 생각이 달라서였다. 영국은 가용한 모든 함정을 총동원하여 싱가포르로 가는 선단 호송에 투입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ABDAFLOAT 사령관 하트 대장은 생각이 달랐다. 그는 말레이 방벽을 지키려면 강력한 수상함대를 동원하여 침공군을 실은 일본선단을 요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와 호주는 자국해안 방어를 최우선으로 생각했는데 네덜란드 해군사령관 헬프리히 중장은 자국 해안을 지키려면 남하하는 침공선단을 요격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하트 대장과 생각이 같았다.

하지만 하트 제독은 요격을 위하여 네덜란드 해군을 동원할 수 없었는데 이는 ABDAFLOAT사령관이 되지 못하여 화가 난 네덜란드 해군사령관 헬프리히 제독이 협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헬프리히 제독은 자바의 스마랑 출신이었으나 경력을 대부분 네덜란드 본토에서 쌓았다. 또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육군은 본토 육군과 별개의 조직이었으나 해군은 본토 해군과 같은 조직이었다. 따라서 헬프리히 중장은 식민지 육군의 장군인 텔 푸어텐 중장보다 왕립 해군의 제독인 자신의 지위가 더 높다고 생각했으며 실제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서는 계급이 같다면 해군장교를 육군장교보다 높게 인정해주는 경향이 있었다. 게다가 헬프리히 제독은 단순한 해군사령관이 아니라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정부의 해상을 겸하고 있었는데 정부 각료인 해상의 입장에서 보면 ABDARM사령관인 텔 푸어텐 장군은 자신보다 격이 낮았다. 따라서 헬프리히 제독은 자신보다 격이 낮은 텔 푸어텐 장군과 동격인 하트 제독에게 자신이 명령을 받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헬프리히 제독의 설득에 넘어간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정부는 빌헬미나 여왕의 네덜란드 망명정부, 영국정부, 그리고 미국정부에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ABDA사령부의 9대 고위직에 네덜란드 군인이 1명 뿐이니 ABDAFLOAT 에 1명을 더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군에서 유일하게 9대 고위직에 속한 텔 푸어텐 중장의 직위는 4대 핵심직위(최고 사령관 및 3명의 작전사령관) 중 하나였으며 핵심 직위는 미국도 네덜란드와 마찬가지로 한자리 밖에 차지하지 못했다. 게다가 애당초 9대 고위직 중 하나인 ABDAFLOAT 참모장 직위에 헬프리히 제독의 참모장인 요한 반 스타베렌 대령이 내정되었을 때 자신의 참모장으로 꼭 필요하다며 임명을 거부한 것은 헬프리히 제독 자신이었다.

ABDAFLOAT사령관이 되고자 했던 헬프리히 제독의 야심은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 적어도 1942년 1월의 시점에서는 불가능했을 뿐 아니라 정당하지도 않았다. 일단 미해군의 아시아함대는 ABDAFLOAT 내에서 네덜란드 해군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시아함대 총사령관 하트 제독은 미해군에 3개 밖에 없는 함대의 총사령관 중 1명으로 태평양 및 대서양함대 총사령관과 동격이었다. 따라서 미해군 입장에서는 니미츠 제독과 같은 급의 최고위 사령관이자 미해군대장인 하트 제독을 네덜란드 해군중장인 헬프리히 제독의 부하로 만들 수는 없었다. 헬프리히 제독이 ABDAFLOAT사령관이 되려면 하트 제독은 계급이 낮은 부하에게 지휘권을 넘겨주고 떠나야만 했는데 그런 조치는 미국이 ABDA사령부를 중시하지 않는다는 표시로 받아들여질 것이었다.

하지만 헬프리히 제독의 불만은 현지에서 공감을 얻었으며 하트 제독은 2월 12일에 ABDAFLOAT 사령관직을 헬프리히 중장에게 넘길 때까지 지속적으로 공격을 받았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네덜란드 해군의 전과가 아시아함대를 압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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