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출항
1942년 2월 25일 오전 7시 16분에 존 로버트슨 중위가 조종하는 제10초계비행단의 카탈리나 1대가 마카사르 해협 상공에서 동부자바공략부대를 발견했다. 카탈리나는 접촉보고 직후에 타이난 항공대의 제로기에게 격추당했으며 로버트슨 중위를 포함한 승무원 전원이 전사했다.
이날 수라바야에서 북쪽으로 130km 떨어진 바웨안 제도의 바탄섬에 일본군이 상륙하여 선단의 항진을 돕기 위하여 통신소를 개설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헬프리히 제독의 명령에 따라 미국잠수함 S-38이 바탄섬에 접근하여 4인치 갑판포의 포탄 모두를 쏟아부었으나 잘못된 보고였다. 전후 밝혀진 바에 의하면 당시 일본군은 바웨안 제도에 상륙하지 않았다.
로버트슨 중위가 보고한 위치를 가지고 계산해보면 일본선단은 26일 아침에 마두라섬의 북해안에 상륙할 수 있었다. 따라서 도먼 제독은 25일 저녁에 휘하 함대 -미국중순양함 휴스턴, 네덜란드경순양함 드루이터, 자바, 네덜란드구축함 코테네어, 윗더위드, 미국구축함 존D에드워즈, 알덴, 존D포드, 폴존스, 포프 -를 이끌고 출항했다. 도먼 제독은 26일 새벽까지 마두라섬 부근을 수색했으나 일본군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전투배치 상태로 밤을 새운 승조원들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수라바야로 돌아왔다. 26일 오전 11시에 일본기가 공습을 가했으나 휴스턴의 5인치 대공포가 보이시로부터 받은 대공탄약을 사용하여 일본기들을 고공으로 쫓아냄으로써 함대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 오후에 다시 공습이 있었으나 역시 휴스턴의 활약으로 피해를 면했다.
26일 오전 11시 55분에 순양함 2척, 구축함 4척의 호위를 받는 수송선 약 30척이 수라바야에서 북동쪽으로 약 320km 떨어진 해상에서 10노트의 속력으로 남서쪽으로 항진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헬프리히 제독은 오후 12시 50분에 도먼 제독에게 연합타격부대를 이끌고 해상으로 나가 일본선단을 공격한 후 탄종프리옥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오후 8시 55분에는 적을 파괴할 때까지 계속 공격하라는 추가명령을 내렸는데 이 추가명령은 역사가들로부터 쓸데없는 정도를 넘어 패배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연합타격부대는 일본선단을 파괴할 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목표는 적의 '파괴'가 아니라 '저지'가 되어야 했다. 만일 저지가 목표였다면 도먼 제독은 형편이 닿는대로 적의 수송선단이나 호위함대 중에 유리한 상대를 골라잡아 전투를 치를 수 있었다. 만일 호위함대에게 충분한 타격을 주면 수송선단은 돌아갈 수 밖에 없으며 이는 몇달후 산호해 해전에서 벌어진 상황이다. 그러나 적의 파괴가 목적이라면 도먼 제독은 수송선단 공격에 집중할 수 밖에 없고 적의 호위함대는 연합타격부대가 수송선단에 신경쓰는 사이 요격할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이는 안그래도 전력이 딸리는 연합타격부대에게 치명적인 핸디캡이 된다. 실제로 도먼 제독은 자바해 해전에서 수송선단 공격을 시도하느라 적 호위함대와의 교전에 집중하지 못했다.
태평양전쟁 당시 고속항공모함 기동전대장을 지냈던 역사학자 프레드릭 셔먼 제독은 이런 잘못된 명령을 내린 이유를 헬프리히 제독의 경험부족에서 찾았다. 헬프리히 제독은 영관 시절의 대부분을 해군대학 교수로 지냈고 장성 진급 후에도 대체로 육지에서 일했다. 실제로 헬프리히 제독에게는 함장 경력이 없으며 해상에서 지휘한 경력도 동인도전대사령관을 지냈던 1935년부터 39년까지의 4년뿐이다.
26일 오후에 도먼 제독은 네덜란드령동인도제도전력회사 소유의 커다란 회의실에서 전술회의를 열었다. 수라바야 해군기지에서는 공습사이렌이 울릴 때마다 테이블 아래로 뛰어들어야 했으므로 차분하게 회의를 할 수 없었다. 참석자는 네덜란드해군 및 미해군에 더하여 수라바야에 방금 도착한 영국해군의 함장급 이상 지휘관 대부분이었다.
영국함장들을 마지막으로 참석자가 모두 도착하자 도먼 제독은 유창한 영어로 상황을 설명하면서 회의를 시작했다. 일본군은 자바로 쇄도하고 있었고 연합타격부대는 이들을 저지해야만 했다. 연합타격부대가 가진 함정은 드루이터, 자바, 엑서터, 휴스턴, 퍼스, 윗더위드, 코테네어, 엘렉트라, 인카운터, 주피터, 존D에드워즈, 알덴, 존D포드, 그리고 폴존스였다. 도먼 제독은 이어서 일부 함정이 가진 문제점을 설명했다. 휴스턴은 후방 포탑이 없어서 함열의 끝에 배치해서는 안 되었다. 코테네어는 좌초할 때 손상을 입은 보일러의 수리가 완료되지 않아 26노트 이상은 낼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포프는 보일러에 청수를 공급하는 파이프에 균열이 생겨 작전에 참가할 수 없었다.
이어서 도먼 제독은 기쁜 소식을 알려 주겠다면서 미국의 수상기모함 랭글리가 P-40을 싣고 오는 중이라고 말했으나 참석자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미해군 함장 1명은 머리를 저으면서 "너무 적고 너무 늦었다." 라고 중얼거렸다.
다음으로 도먼 제독은 작전계획을 설명했다. 함대는 바로 북상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만일 그랬다가 일본선단을 놓치는 날이면 적의 상륙을 허용할 위험이 있었다. 따라서 함대는 마두라 북해안에서 렘방 사이를 서진할 것이었다. 항진 순서는 영국 및 네덜란드구축함, 순양함, 그리고 미국구축함의 순서였다. 먼저 영국 및 네덜란드구축함이 적과 교전한 후 철수하면 이어서 순양함이 포격전을 벌인 후 빠져나가고 마지막으로 미국구축함이 뇌격을 가한다는 계획이었다. 미국구축함을 뒤로 뺀 이유는 방어력과 함포의 위력이 약하다는 것이었다. 철수 지점은 탄종프리옥이었으며 재빨리 급유한 후 서부자바공략부대를 공격할 것이었다.
도먼 제독은 이어서 항구를 떠나는 순서 및 통신문제에 관하여 설명했다. 만일 격침된 함정이 나오더라도 승조원을 구조하지 말라는 명령도 있었다. 열세한 세력으로 2개의 일본선단을 요격해야하는 연합타격부대는 구축함 1척이라도 구조에 돌릴 여유가 없었다.
회의에서 제시했던 도먼제독의 작전은 2가지 면에서 역사가의 비판을 받았는데 휴스턴의 수상기를 사용하지 않기로 한 결정과 항진 및 전투시의 함정배치 문제였다.
도먼 제독은 휴스턴의 수상기를 모로크렘방간 수상기기지에 남겨놓고 출항했다. 야간전투를 예상할 경우 수상기를 육상에 내려두고 가는 경우는 흔했다. 수상기는 불이 붙기 쉬우며 야간해전에서 불붙은 함정은 제1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주간에는 정찰기가 있는 쪽이 훨씬 유리하다. 사실 도먼 제독은 주간정찰을 위하여 B-24의 초기형인 미군의 LB-30을 사용하려 했다. 자바의 미육군항공대는 LB-30폭격기 1대를 연합타격부대의 직접 통제 하에 해상정찰에 활용한다는 도먼 제독의 아이디어에 찬성했으나 자바항공사령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LB-30의 투입이 무산된 시점에서 도먼 제독은 휴스턴의 정찰기를 불러들여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본군이 제공권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구식 복엽기인 휴스턴의 SOC 시걸 수상정찰기는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며 실제로 드루이터의 포커 수상정찰기는 2월 18일에 일본기에게 격추당했다. 따라서 휴스턴의 수상정찰기 승무원 입장에서 도먼 제독은 생명의 은인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공중정찰의 부재가 자바해 해전의 중요한 패인 중 하나라는 점을 감안하면 LB-30의 투입이 좌절된 상황에서도 휴스턴의 수상정찰기를 사용하지 않기로 한 도먼 제독의 결정은 일의 경중을 파악하지 못한 잘못이다.
커티스SOC시걸 수장정찰기. https://en.wikipedia.org/wiki/Curtiss_SOC_Seagull
함정 배치의 쟁점은 두가지로 순양함의 배치 순서와 미국구축함을 뒤로 뺀 문제이다.
순양함은 드루이터, 엑서터, 휴스턴, 퍼스, 자바의 순서로 늘어섰는데 이럴 경우 전투의 초기 단계에서 휴스턴 뒤에 있는 퍼스와 자바의 전투참가가 어렵다. 일반적으로 주포의 사정거리가 짧은 경순양함이 앞장서고 사정거리가 긴 중순양함이 뒤따라가야 전투 초기부터 소외되는 함정없이 한꺼번에 전투에 참가하여 집중사격을 가할 수 있다. 순양함들을 이런 순서로 배열한 이유는 불분명한데 가장 가능성이 큰 설명은 통신문제이다. 도먼 제독은 통신이 불량한 상태에서 전투 발생시 가장 강력한 순양함 2척을 자신의 기함인 드루이터의 바로 뒤에 두어 통제를 용이하게 하려 했을 것이다. 이는 드루이터와 함께 주포의 사정거리가 가장 짧은 자바를 후미에 둔 이유도 설명할 수 있다. 그나마 의사소통이 잘되는 네덜란드순양함을 가장 뒤에 배치하면 혼란이 발생했을 때 중간에 끼어있는 동맹국 순양함들을 통제하는데 유리하다.
미국구축함들을 뒤로 뺀 이유는 도먼 제독이 언급했듯이 방어력과 4인치 주포의 위력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신 미국구축함들은 연합타격부대에서 가장 많은 어뢰를 가지고 있었으며 어뢰를 제대로 활용하려면 전방에 있어야 한다. 미국구축함은 최전방에서 항진하다가 적을 발견하면 가장 먼저 돌입하여 어뢰를 발사한 다음 철수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도먼 제독의 작전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보아 회의에 알맹이가 없다고 느꼈다. 공통 깃발 신호도 없었고 공통 신호책도 배포되지 않았으며 전투계획은 모호했다. 이는 사실이었지만 모두가 도먼 제독의 책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통신문제를 보면 원래 미군, 영국군, 그리고 네덜란드군은 다른 신호체계를 사용했으며 평소에 서로의 신호체계를 익히고 이해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의 침공 때문에 ABDACOM과 ABDAFLOAT가 급조되었으니 통신이 원활할 리가 없었다. 사실 통신문제는 ABDACOM의 설치부터 해체까지 지속적으로 괴롭히던 문제였으며 연합타격부대의 통신문제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도먼 제독에게는 통신문제를 처리할 시간이 없었다. 연합타격부대의 함정 중 퍼스, 엘렉트라, 인카운터, 주피터는 회의가 있던 2월 26일에 처음으로 도먼 제독 휘하에 들어왔다. 게다가 연합타격부대는 회의가 끝나고 몇 시간 후에 출항해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통신문제는 임기응변으로 해결해야만 했다. 미해군에서는 제29구축함전대의 통신장교인 오토 콜브 대위를 드루이터에 파견했다. 콜브 대위가 도먼 제독의 명령을 전화로 휴스턴에 전달하면 휴스턴에서 미국구축함에 중계했다.
부실한 전투계획도 마찬가지였다. 도먼 제독에게는 전투계획을 세울 시간 뿐 아니라 작성한 계획을 제대로 설명할 시간도 부족했다. 회의에 참가했을 때 도먼 제독은 마두라 부근을 수색하느라 전날 밤을 새고나서 눈도 붙이지 못한 상태였다. 정보도 부족했다. 자바의 연합군은 일본선단 2개가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선단의 구성, 특히 호위세력의 규모에 대해서는 거의 몰랐다. 적의 규모를 모르는 상태로 완성도 높은 전투계획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회의가 끝나자 참석자들은 각자의 배로 돌아가 출항준비를 서둘렀다.
연합타격부대는 26일 오후 6시에 수라바야를 출항했다. 함대는 마두라 동쪽의 사푸디 해협까지 동진한 다음 해협을 거쳐 마두라 북해안으로 나왔다. 이후 연합타격부대는 마두라 및 자바 북해안을 따라 서진하여 27일 오전 9시에 초계선의 서쪽 끝인 렘방 부근에 도착했다. 이때 갑자기 정체불명의 비행기 1대가 나타나 폭격을 가했으나 휴스턴이 5인치 대공포로 고공으로 몰아내었기 때문에 폭탄은 모두 빗나갔다. 이 비행기는 사실 미육군항공대의 B-17이었다.
일본선단을 만나지 못한 도먼 제독은 오전 9시 30분에 일단 수라바야로 돌아가기로 했다. 도먼 제독은 이틀 연속 야간수색에서 적을 찾는데 실패했다. 제공권을 상실한 상황에서 적 수상함대는 보지도 못하고 적의 공습에 녹아났던 방카해협의 전례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밤에 활동하는 수 밖에 없었으나 수상레이더가 없는 상황에서는 야간수색의 효율이 크게 떨어졌다.
수라바야로 돌아오던 연합타격부대는 오후 12시 40분에 가노야항공대의 육상공격기 8대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나 피해는 없었다. 오후 1시 50분에 네덜란드정찰기가 바웨안 제도 동쪽 40km 해상에서 순양함 2척, 구축함 6척의 호위를 받는 수송선 25척이 남쪽으로 항진 중이라고 보고했다.
이 소식은 오후 2시 45분에 도먼 제독에게 도착했는데 이때 연합타격부대는 네덜란드 소해정 2척의 인도를 받아 수라바야 동쪽의 기뢰원을 통과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선두의 드루이터가 방향을 180도로 바꾸더니 속력을 올려 항진하기 시작했다. 어안이 벙벙하여 바라보던 다른 함정에게 "나를 따르라" 는 드루이터의 발광신호가 번쩍였다. 적을 발견한 것이었다. 이틀 연속 밤을 새워서 피곤에 찌들은 승조원의 혈관 속에 순식간에 아드레날린이 확 분비되면서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함정들은 줄줄이 반전하여 드루이터의 뒤를 따랐다. 이제 미국, 영국, 네덜란드, 호주의 함정들은 바다로, 그리고 그들의 운명 속으로 뛰어들었다. 오후 12시 35분부터 몰래 따라다니던 일본중순양함 나치의 정찰기가 연합타격부대의 갑작스런 반전을 발견하고 보고했다.
자바항공사령부는 연합타격부대에게 항공엄호를 제공하기 위하여 제17임시추격비행대대가 전개한 응고로 비행장에 살아남은 전투기 세력을 집결시켰다. 2월 25일 현재 제17추격비행대대에서 작전가능한 P-40의 숫자는 8대였는데 26일 오후 4시까지 네덜란드공군의 버팔로 6대가 도착했다. 27일 아침까지 2대의 P-40이 더 사용가능해졌고 버팔로 1대는 고장이 났다. 그리하여 27일 아침에 자바항공사령부가 동원할 수 있는 전투기는 P-40 전투기 10대, 버팔로 5대였다. 응고로 비행장에는 네덜란드공군의 허리케인 7대도 도착했으나 기총탄이 없어서 공중전에 투입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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