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출항

1942년 2월 25일 오전 7시 16분에 존 로버트슨 중위가 조종하는 제10초계비행단의 카탈리나 1대가 마카사르 해협 상공에서 동부자바공략부대를 발견했다. 카탈리나는 접촉보고 직후에 타이난 항공대의 제로기에게 격추당했으며 로버트슨 중위를 포함한 승무원 전원이 전사했다.

이날 수라바야에서  북쪽으로 130km 떨어진 바웨안 제도의 바탄섬에 일본군이 상륙하여 선단의 항진을 돕기 위하여 통신소를 개설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헬프리히 제독의 명령에 따라 미국잠수함 S-38이 바탄섬에 접근하여 4인치 갑판포의 포탄 모두를 쏟아부었으나 잘못된 보고였다. 전후 밝혀진 바에 의하면 당시 일본군은 바웨안 제도에 상륙하지 않았다.

로버트슨 중위가 보고한 위치를 가지고 계산해보면 일본선단은 26일 아침에 마두라섬의 북해안에 상륙할 수 있었다. 따라서 도먼 제독은 25일 저녁에 휘하 함대 -미국중순양함 휴스턴, 네덜란드경순양함 드루이터, 자바, 네덜란드구축함 코테네어, 윗더위드, 미국구축함 존D에드워즈, 알덴, 존D포드, 폴존스, 포프 -를 이끌고 출항했다. 도먼 제독은 26일 새벽까지 마두라섬 부근을 수색했으나 일본군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전투배치 상태로 밤을 새운 승조원들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수라바야로 돌아왔다. 26일 오전 11시에 일본기가 공습을 가했으나 휴스턴의 5인치 대공포가 보이시로부터 받은 대공탄약을 사용하여 일본기들을 고공으로 쫓아냄으로써 함대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 오후에 다시 공습이 있었으나 역시 휴스턴의 활약으로 피해를 면했다. 

26일 오전 11시 55분에 순양함 2척, 구축함 4척의 호위를 받는 수송선 약 30척이 수라바야에서 북동쪽으로 약 320km 떨어진 해상에서 10노트의 속력으로 남서쪽으로 항진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헬프리히 제독은 오후 12시 50분에 도먼 제독에게 연합타격부대를 이끌고 해상으로 나가 일본선단을 공격한 후 탄종프리옥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오후 8시 55분에는 적을 파괴할 때까지 계속 공격하라는 추가명령을 내렸는데 이 추가명령은 역사가들로부터 쓸데없는 정도를 넘어 패배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연합타격부대는 일본선단을 파괴할 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목표는 적의 '파괴'가 아니라 '저지'가 되어야 했다. 만일 저지가 목표였다면 도먼 제독은 형편이 닿는대로 적의 수송선단이나 호위함대 중에 유리한 상대를 골라잡아 전투를 치를 수 있었다. 만일 호위함대에게 충분한 타격을 주면 수송선단은 돌아갈 수 밖에 없으며 이는 몇달후 산호해 해전에서 벌어진 상황이다. 그러나 적의 파괴가 목적이라면 도먼 제독은 수송선단 공격에 집중할 수 밖에 없고 적의 호위함대는 연합타격부대가 수송선단에 신경쓰는 사이 요격할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이는 안그래도 전력이 딸리는 연합타격부대에게 치명적인 핸디캡이 된다. 실제로 도먼 제독은 자바해 해전에서 수송선단 공격을 시도하느라 적 호위함대와의 교전에 집중하지 못했다. 

태평양전쟁 당시 고속항공모함 기동전대장을 지냈던 역사학자 프레드릭 셔먼 제독은 이런 잘못된 명령을 내린 이유를 헬프리히 제독의 경험부족에서 찾았다. 헬프리히 제독은 영관 시절의 대부분을 해군대학 교수로 지냈고 장성 진급 후에도 대체로 육지에서 일했다. 실제로 헬프리히 제독에게는 함장 경력이 없으며 해상에서 지휘한 경력도 동인도전대사령관을 지냈던 1935년부터 39년까지의 4년뿐이다.

26일 오후에 도먼 제독은 네덜란드령동인도제도전력회사 소유의 커다란 회의실에서 전술회의를 열었다. 수라바야 해군기지에서는 공습사이렌이 울릴 때마다 테이블 아래로 뛰어들어야 했으므로 차분하게 회의를 할 수 없었다. 참석자는 네덜란드해군 및 미해군에 더하여 수라바야에 방금 도착한 영국해군의 함장급 이상 지휘관 대부분이었다. 

영국함장들을 마지막으로 참석자가 모두 도착하자 도먼 제독은 유창한 영어로 상황을 설명하면서 회의를 시작했다. 일본군은 자바로 쇄도하고 있었고 연합타격부대는 이들을 저지해야만 했다. 연합타격부대가 가진 함정은 드루이터, 자바, 엑서터, 휴스턴, 퍼스, 윗더위드, 코테네어, 엘렉트라, 인카운터, 주피터, 존D에드워즈, 알덴, 존D포드, 그리고 폴존스였다. 도먼 제독은 이어서 일부 함정이 가진 문제점을 설명했다. 휴스턴은 후방 포탑이 없어서 함열의 끝에 배치해서는 안 되었다. 코테네어는 좌초할 때 손상을 입은 보일러의 수리가 완료되지 않아 26노트 이상은 낼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포프는 보일러에 청수를 공급하는 파이프에 균열이 생겨 작전에 참가할 수 없었다.

이어서 도먼 제독은 기쁜 소식을 알려 주겠다면서 미국의 수상기모함 랭글리가 P-40을 싣고 오는 중이라고 말했으나 참석자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미해군 함장 1명은 머리를 저으면서 "너무 적고 너무 늦었다." 라고 중얼거렸다.

다음으로 도먼 제독은 작전계획을 설명했다. 함대는 바로 북상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만일 그랬다가 일본선단을 놓치는 날이면 적의 상륙을 허용할 위험이 있었다. 따라서 함대는 마두라 북해안에서 렘방 사이를 서진할 것이었다. 항진 순서는 영국 및 네덜란드구축함, 순양함, 그리고 미국구축함의 순서였다. 먼저 영국 및 네덜란드구축함이 적과 교전한 후 철수하면 이어서 순양함이 포격전을 벌인 후 빠져나가고 마지막으로 미국구축함이 뇌격을 가한다는 계획이었다. 미국구축함을 뒤로 뺀 이유는 방어력과 함포의 위력이 약하다는 것이었다. 철수 지점은 탄종프리옥이었으며 재빨리 급유한 후 서부자바공략부대를 공격할 것이었다.

도먼 제독은 이어서 항구를 떠나는 순서 및 통신문제에 관하여 설명했다. 만일 격침된 함정이 나오더라도 승조원을 구조하지 말라는 명령도 있었다. 열세한 세력으로 2개의 일본선단을 요격해야하는 연합타격부대는 구축함 1척이라도 구조에 돌릴 여유가 없었다.

회의에서 제시했던 도먼제독의 작전은 2가지 면에서 역사가의 비판을 받았는데 휴스턴의 수상기를 사용하지 않기로 한 결정과 항진 및 전투시의 함정배치 문제였다.

도먼 제독은 휴스턴의 수상기를 모로크렘방간 수상기기지에 남겨놓고 출항했다. 야간전투를 예상할 경우 수상기를 육상에 내려두고 가는 경우는 흔했다. 수상기는 불이 붙기 쉬우며 야간해전에서 불붙은 함정은 제1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주간에는 정찰기가 있는 쪽이 훨씬 유리하다. 사실 도먼 제독은 주간정찰을 위하여 B-24의 초기형인 미군의 LB-30을 사용하려 했다. 자바의 미육군항공대는 LB-30폭격기 1대를 연합타격부대의 직접 통제 하에 해상정찰에 활용한다는 도먼 제독의 아이디어에 찬성했으나 자바항공사령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LB-30의 투입이 무산된 시점에서 도먼 제독은 휴스턴의 정찰기를 불러들여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본군이 제공권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구식 복엽기인 휴스턴의 SOC 시걸 수상정찰기는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며 실제로 드루이터의 포커 수상정찰기는 2월 18일에 일본기에게 격추당했다. 따라서 휴스턴의 수상정찰기 승무원 입장에서 도먼 제독은 생명의 은인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공중정찰의 부재가 자바해 해전의 중요한 패인 중 하나라는 점을 감안하면 LB-30의 투입이 좌절된 상황에서도 휴스턴의 수상정찰기를 사용하지 않기로 한 도먼 제독의 결정은 일의 경중을 파악하지 못한 잘못이다.

 

커티스SOC시걸 수장정찰기. https://en.wikipedia.org/wiki/Curtiss_SOC_Seagull

 

함정 배치의 쟁점은 두가지로 순양함의 배치 순서와 미국구축함을 뒤로 뺀 문제이다.

순양함은 드루이터, 엑서터, 휴스턴, 퍼스, 자바의 순서로 늘어섰는데 이럴 경우 전투의 초기 단계에서 휴스턴 뒤에 있는 퍼스와 자바의 전투참가가 어렵다. 일반적으로 주포의 사정거리가 짧은 경순양함이 앞장서고 사정거리가 긴 중순양함이 뒤따라가야 전투 초기부터 소외되는 함정없이 한꺼번에 전투에 참가하여 집중사격을 가할 수 있다. 순양함들을 이런 순서로 배열한 이유는 불분명한데 가장 가능성이 큰 설명은 통신문제이다. 도먼 제독은 통신이 불량한 상태에서 전투 발생시 가장 강력한 순양함 2척을 자신의 기함인 드루이터의 바로 뒤에 두어 통제를 용이하게 하려 했을 것이다. 이는 드루이터와 함께 주포의 사정거리가 가장 짧은 자바를 후미에 둔 이유도 설명할 수 있다. 그나마 의사소통이 잘되는 네덜란드순양함을 가장 뒤에 배치하면 혼란이 발생했을 때 중간에 끼어있는 동맹국 순양함들을 통제하는데 유리하다.

미국구축함들을 뒤로 뺀 이유는 도먼 제독이 언급했듯이 방어력과 4인치 주포의 위력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신 미국구축함들은 연합타격부대에서 가장 많은 어뢰를 가지고 있었으며 어뢰를 제대로 활용하려면 전방에 있어야 한다. 미국구축함은 최전방에서 항진하다가 적을 발견하면 가장 먼저 돌입하여 어뢰를 발사한 다음 철수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도먼 제독의 작전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보아 회의에 알맹이가 없다고 느꼈다. 공통 깃발 신호도 없었고 공통 신호책도 배포되지 않았으며 전투계획은 모호했다. 이는 사실이었지만 모두가 도먼 제독의 책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통신문제를 보면 원래 미군, 영국군, 그리고 네덜란드군은 다른 신호체계를 사용했으며 평소에 서로의 신호체계를 익히고 이해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의 침공 때문에 ABDACOM과 ABDAFLOAT가 급조되었으니 통신이 원활할 리가 없었다. 사실 통신문제는 ABDACOM의 설치부터 해체까지 지속적으로 괴롭히던 문제였으며 연합타격부대의 통신문제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도먼 제독에게는 통신문제를 처리할 시간이 없었다. 연합타격부대의 함정 중 퍼스, 엘렉트라, 인카운터, 주피터는 회의가 있던 2월 26일에 처음으로 도먼 제독 휘하에 들어왔다. 게다가 연합타격부대는 회의가 끝나고 몇 시간 후에 출항해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통신문제는 임기응변으로 해결해야만 했다. 미해군에서는 제29구축함전대의 통신장교인 오토 콜브 대위를 드루이터에 파견했다. 콜브 대위가 도먼 제독의 명령을 전화로 휴스턴에 전달하면 휴스턴에서 미국구축함에 중계했다.

부실한 전투계획도 마찬가지였다. 도먼 제독에게는 전투계획을 세울 시간 뿐 아니라 작성한 계획을 제대로 설명할 시간도 부족했다. 회의에 참가했을 때 도먼 제독은 마두라 부근을 수색하느라  전날 밤을 새고나서 눈도 붙이지 못한 상태였다. 정보도 부족했다. 자바의 연합군은 일본선단 2개가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선단의 구성, 특히 호위세력의 규모에 대해서는 거의 몰랐다. 적의 규모를 모르는 상태로 완성도 높은 전투계획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회의가 끝나자 참석자들은 각자의 배로 돌아가 출항준비를 서둘렀다.

연합타격부대는 26일 오후 6시에 수라바야를 출항했다. 함대는 마두라 동쪽의 사푸디 해협까지 동진한 다음 해협을 거쳐 마두라 북해안으로 나왔다. 이후 연합타격부대는 마두라 및 자바 북해안을 따라 서진하여 27일 오전 9시에 초계선의 서쪽 끝인 렘방 부근에 도착했다. 이때 갑자기 정체불명의  비행기 1대가 나타나 폭격을 가했으나 휴스턴이 5인치 대공포로 고공으로 몰아내었기 때문에 폭탄은 모두 빗나갔다. 이 비행기는 사실 미육군항공대의 B-17이었다.

일본선단을 만나지 못한 도먼 제독은 오전 9시 30분에 일단 수라바야로 돌아가기로 했다. 도먼 제독은 이틀 연속 야간수색에서 적을 찾는데 실패했다. 제공권을 상실한 상황에서 적 수상함대는 보지도 못하고 적의 공습에 녹아났던 방카해협의 전례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밤에 활동하는 수 밖에 없었으나 수상레이더가 없는 상황에서는 야간수색의 효율이 크게 떨어졌다. 

수라바야로 돌아오던 연합타격부대는 오후 12시 40분에 가노야항공대의 육상공격기 8대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나 피해는 없었다. 오후 1시 50분에 네덜란드정찰기가 바웨안 제도 동쪽 40km 해상에서 순양함 2척, 구축함 6척의 호위를 받는 수송선 25척이 남쪽으로 항진 중이라고 보고했다.
이 소식은 오후 2시 45분에 도먼 제독에게 도착했는데 이때 연합타격부대는 네덜란드 소해정 2척의 인도를 받아 수라바야 동쪽의 기뢰원을 통과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선두의 드루이터가 방향을 180도로 바꾸더니 속력을 올려 항진하기 시작했다. 어안이 벙벙하여 바라보던 다른 함정에게 "나를 따르라" 는 드루이터의 발광신호가 번쩍였다. 적을 발견한 것이었다. 이틀 연속 밤을 새워서 피곤에 찌들은 승조원의 혈관 속에 순식간에 아드레날린이 확 분비되면서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함정들은 줄줄이 반전하여 드루이터의 뒤를 따랐다. 이제 미국, 영국, 네덜란드, 호주의 함정들은 바다로, 그리고 그들의 운명 속으로 뛰어들었다. 오후 12시 35분부터 몰래 따라다니던 일본중순양함 나치의 정찰기가 연합타격부대의 갑작스런 반전을 발견하고 보고했다.

자바항공사령부는 연합타격부대에게 항공엄호를 제공하기 위하여 제17임시추격비행대대가 전개한 응고로 비행장에 살아남은 전투기 세력을 집결시켰다. 2월 25일 현재 제17추격비행대대에서 작전가능한 P-40의 숫자는 8대였는데 26일 오후 4시까지 네덜란드공군의 버팔로 6대가 도착했다. 27일 아침까지 2대의 P-40이 더 사용가능해졌고 버팔로 1대는 고장이 났다. 그리하여 27일 아침에 자바항공사령부가 동원할 수 있는 전투기는 P-40 전투기 10대, 버팔로 5대였다. 응고로 비행장에는 네덜란드공군의 허리케인 7대도 도착했으나 기총탄이 없어서 공중전에 투입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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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ABDACOM 해체

바둥해협 해전에서 피해를 입은  미국구축함 스튜어트는 1942년 2월 20일 정오에 수라바야에 입항했고 저녁에는 역시 피해를 입은 네덜란드 경순양함 트롬프가 입항했다. 5인치 포탄 11발을 맞은 트롬프의 피해는 심각하여 자바에서 수리할 수 없었으므로 호주로 가야만 했다. 이로써 ABDAFLOAT는 보이시, 마블헤드에 이어 다시 순양함 1척을 잃었다.  1942년 5월에 수리를 마친 트롬프는 맥아더 휘하에서 일본과의 싸움을 이어갔다.

 

네덜란드 경순양함 트롬프. https://en.wikipedia.org/wiki/HNLMS_Tromp_(1937)

 

스튜어트의 피해는 가벼운 편이었으므로 수라바야의 부유선거 2개 중에서 15,000톤짜리 선거에서 수리하기로 했다. 구축함이 들어서자 부유선거가 20일 오후 4시 5분부터 떠오르기 시작했는데 10분 만인 오후 4시 15분에 스튜어트는 선거 안에서 쓰러졌다. 사관실에서 함정 수리에 대해 논의하던 빈포드 중령과 장교들은 배가 갑자기 기울어지자 벽으로 넘어졌다가 혼비백산하여 밖으로 뛰쳐나왔으며 침대에서 자고 있던 수병들은 영문도 모르고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스튜어트는 왼쪽으로 37도 기울면서 부유선거에 세차게 부딪혔는데 용골을 받쳐야 할 용골반목(keel block)의 설치가 잘못되어 벌어진 일이었다. 정확한 원인은 불명이다. 일부는 적의 지시에 따른 사보타주를 의심했으나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용골반목을 설치한 인원들이 구축함을 다루어 본 경험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스튜어트가 들어간 부유선거는 민간용이었으며 대체로 상선을 취급했는데 상선의 용골은 구축함보다 평평하다. 물론 미해군은 스튜어트의 용골반목 설치방법을 포함한 상세한 매뉴얼을 전달했다. 아마 매뉴얼이 현장에 도달하지 않았거나 도달했더라도 현장에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잘못을 바로잡아야할 관리감독 체계도 작동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스튜어트의 피해는 해전에서 일본군의 포탄에 맞은 것보다 훨씬 심했다. 왼쪽 프로펠러 샤프트가 구부러지면서 기관실에 파고 들었고 쓰러지는 충격으로 보일러가 터졌으며 연료탱크도 벌어져서 중유가 줄줄 샜다.

수리에는 최소한 3주가 걸린다는 진단이 나왔는데 자바에는 부품이 없었다. 승조원들은 물이 새지 않도록 땜질만 해주면 1개의 프로펠러만으로 호주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틀 후인 22일 오후 1시 30분에 글래스포드 제독은 스튜어트를 포기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자바를 침공할 병력을 태운 일본선단이 접근하고 있는 상황에서 수리에 최소한 3주가 걸리는 함정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스튜어트의 승조원들은 소중한 자산이었으며 이들은 패럿, 필즈베리, 그리고 존D에드워즈로 분산배치되었다. 빈포드 중령은 어뢰가 남아있던 존D에드워즈에 사령기를 옮겨 달았다. 어뢰를 모두 소진하고 포탄도 많이 사용한 패럿과 필즈베리는 일단 칠라찹으로 갔다가 호주로 철수할 예정이었다.

부유선거에 방치된 스튜어트는 2월 24일에 일본기가 떨어뜨린 폭탄에 맞아 추가로 피해를 입었으며 수라바야 함락 당일인 3월 2일에 부유선거와 함께 처분되어 가라앉았다. 일본군은 1943년 2월에 스튜어트를 건져서 고친 후에 3인치 주포 2문을 달아 동년 9월 20일에 제102호초계정으로 취역시켰다. 제102호초계정은 주로 남서태평양에서 호위임무에 종사하다가 구레에서 종전을 맞았다. 전후에 제102호초계정은  미해군에 반환되었다가 1946년 5월 24일 샌프란시스코 앞바다에서 표적함으로 최후를 맞았다.

 

클렘슨급 구축함 DD-224 스튜어트. https://en.wikipedia.org/wiki/USS_Stewart_(DD-224)#World_War_II

 

1942년 2월 15일의 싱가포르 함락은 ABDACOM의 해체를 불러왔다. 동남아시아 방어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던 싱가포르를 잃은 영국은 더이상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겉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처칠 수상은 싱가포르 함락 직후 웨이벌 장군에게 전문을 보내어 자바의 포기는 고려할 수 없으며 현지의 모든 군대는 마지막까지 싸워야한다고 명령했고 2월 20일에는 연합참모본부가 웨이벌 장군에게 비슷환 내용의 전문을 보냈다. 하지만 웨이벌 장군은 빈말이라도 증원을 해주겠다는 약속 한마디도 없이 공허하게 최후까지 싸우라고만 명령하는 전문에 담긴 고뇌와 속뜻을 알고 있었다. 다음날인 2월 21일에 연합참모본부에 보낸 답신에서 웨이벌 장군은 ABDA 지역의 방어는 실패했으며 자바의 함락이 멀지 않았다는 현실을 냉정하게 지적했다. 그는 ABDACOM을 해체하고 네덜란드군을 포함하여 자바에 있는 모든 병력을 철수시키자고 제안했다.

웨이벌 장군의 제안은 군사적으로는 타당했으나 네덜란드인의 심정을 무시한 것이었다. 본토가 독일에게 점령당한 상황에서 현지의 네덜란드인들은 동인도제도를 조국으로 생각했다. 실제로 ABDARMY사령관 텔 푸어텐 중장은 동인도제도에서 태어나 모든 경력을 현지의 식민지군에서 쌓았고 ABDAFLOAT사령관 헬프리히 제독 또한 동인도제도 출신이었다. 이건 네덜란드군 전체가 공유하는 정서로 이들은 일본군과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죽거나 포로수용소에 갈 망정 동인도제도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

헬프리히 제독은 자바 방어가 불가능하다는 웨이벌 장군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 순다해협과 발리해협이 열려있는만큼 영국과 미국이 수송 과정에서의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수하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가지고 함정, 비행기, 야포, 그리고 병력을 최대한 빠른 속도로 자바로 보내준다면 충분히 일본군을 막아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웨이벌 장군은 동의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영국과 미국이 헬프리히 제독의 주장을 받아들여도 자바 함락을 저지할만큼 강력한 증원군을 시한 내로 파견할 수는 없었을 것으로 본다. 다만 싱가포르를 지키려고 마지막 순간까지 처절하게 노력했던 것에 비하면 영국과 미국이 자바를 너무 쉽게 포기한 것은 사실이다. 이는 싱가포르로 가는 선단호송을 위하여 함정과 항공기를 차출함으로써 동인도제도를 침공하는 일본선단을 공격할 기회를 포기해야 했던 네덜란드로서는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다. 분노에 찬 네덜란드인들은 자바 방어가 불가능하니 병력을 철수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웨이벌 장군의 해임을 요구했다.

영국을 대표하는 웨이벌 장군과 미국을 대표하는 ABDACOM부사령관 브렛 장군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총독인 알리디우스 차르다 반 스타켄보르 스타초워와 일련의 회담을 가졌다. 여기서 서로의 입장을 조율한 결론이 나왔다. 웨이벌 장군의 사임과 더불어 ABDACOM은 2월 25일에 해체하기로 했다. 그러나 사령부의 구조는 그대로 남았으며 사령관만 네덜란드군으로 교체되었다. 자바에 있던 연합군 병력은 모두 네덜란드군의 지휘 아래 마지막까지 싸우기로 했으나 미국이 제공하기로 한 P-40전투기 59대를 제외한 증원은 없을 것이었다. 웨이벌 장군은 25일 저녁에 LB-30을 타고 실론으로 떠났다. 

미국은 비행가능한 상태의 P-40전투기 32대를 수상기모함 랭글리에 실어 조종사와 함께 자바로 파견했으며 포장된 P-40전투기 27대를 조종사 및 50구경 총탄 750,000발과 함께 수송선 시위치에 실어 역시 자바로 보냈다.
글래스포드 제독은 헬프리히 제독에게 미함정들은 마지막까지 네덜란드해군과 행동을 같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구할 수 있는 것을 구하려면 이제 행동해야 할 때였으므로 동시에 철수준비도 시작했다. 부사령관 퍼넬 제독이 잠수함 기지 건설을 위하여 호주의 엑스마우스 만에 파견되었으며 윌크스 대령은 잠수모함을 자바로부터 철수시켰다.

공식적으로 ABDACOM은 해체되었지만 구조는 그대로 남았다. ABARMY는 이름도 바뀌지 않았으며 사령관 텔 푸어텐 중장은 ABDA지역총사령관이라는 이름으로 웨이벌 장군의 직위를 겸임했다.
ABDAIR는 자바항공사령부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네덜란드 공군의 루돌프 헨드릭 반 오옌 소장이 사령관을 맡았다. 오옌 장군은 휘하 세력을 동부전대와 서부전대로 나누었다.
헬프리히 제독의 ABDAFLOAT는 해상부대사령부로 이름이 바뀌었으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그냥 ABDAFLOAT로 부른다. 영국해군의 팔리서 제독은 계속하여 헬프리히 제독의 참모장을 맡았다. 글래스포드 제독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헬프리히 제독의 지휘 아래에서 자바의 미국함정들을 통솔했다.

1942년 2월 18일 오전 10시에 서부자바공략부대가 베트남의 캄란만을 떠났다. 56척의 수송선에는 제16군사령부, 제2사단, 그리고 보병제230연대가 실려 있었다. 호위를 맡은 제3호위대는 경순양함 나토리와 구축함 10척, 기타 함정 3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후 남견함대 사령장관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의 기함인 중순양함 초카이가 합세했다. 21일에는 경순양함 유라, 제11 및 제12구축대, 제1소해대, 수상기모함 가미카와마루와 급유함 쓰루미를 비롯한 함정들이 제3호위대에 가세했으며 구리타 다케오 소장의 제7전대(모가미, 구마노, 미쿠마, 스즈야)와 제19구축대도 24일부터 선단호위를 지원했다. 항공지원은 제1항공부대(수상기모함 가미카와마루 및 산요마루, 제35호초계정, 제91구잠대, 어선 2척)가 담당했으며 27일에는 제4항공전대(경항공모함 류조, 구축함 시키나미)도 가세했다.

다음날인 2월 19일 오전 8시에는 동부자바공략부대가 술루제도의 홀로섬을 출발했다. 41척의 수송선에는 제41사단이 실려 있었다. 호위를 맡은 제1호위대는 니시무라 쇼지 소장의 제4수뢰전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세력은 경순양함 나카,  제2구축대(무라사메, 사미다레, 하루사메, 유다치), 제9구축대(아사구모, 미네구모), 소해정 5척, 구잠정 5척, 기타 함정 3척이었다. 22일에 다카기 다케오 소장의 제5전대(나치, 하구로)와 이카즈치, 아케보노로 이루어진 동방지원대가 호위에 가세했다. 24일에는 다나카 라이조 소장의 제2수뢰전대(진쓰, 제16구축대- 아마츠카제, 유키카제, 도키츠카제, 하츠카제)와 제24구축대(야마카제, 가와카제) 및 제7구축대제1소대(우시오, 사자나미)가 제3함대 사령장관인 다카하시 이보우 중장으로부터 자바해로 진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1항공함대사령장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의 기동부대는 자바 남쪽해상에서 자바로 향하는 증원선단이나 자바를 탈출하는 연합군 함정을 격침하는 역할을 맡았다. 기동부대는 나구모 중장이 직접 지휘하는 제1항공전대(아카기, 카가), 야마구치 다몬 소장의 제2항공전대(히류, 소류), 미카와 군이치 중장의 제3전대(공고, 하루나, 히에이, 기리시마), 아베 히로아키 소장의 제8전대(도네, 치쿠마), 그리고 오모리 센타로 소장의 제1수뢰전대(아부쿠마, 제17구축대, 제18구축대제1소대, 제4구축대제2소대, 제27구축대제2소대, 제15구축대제1소대, 아키구모)로 이루어져 있었다.

여기에 맞서 헬프리히 제독이 동원할 수 있는 함대는 훨씬 빈약했다. 콜린스 제독의 영국함대는 탄종 프리옥을 중심으로 주로 선단호송에 종사하고 있었다. 영국함대는 중순양함 엑서터, 경순양함 호바트, 드래건, 다나에, 퍼스, 구축함 일렉트라, 인카운터, 주피터, 테네도스, 스카우트, 그리고 유일한 네덜란드 구축함 에버트센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에버트센은 실전경험이 없었다. 수라바야에는 도먼 제독의 함대가 있었으며 그 세력은 네덜란드 경순양함 드루이터와 자바, 구축함 코테네어, 윗더위드, 방커트 그리고 미국구축함 존D에드워즈였다. 칠라찹에는 미국함대가 있었으며 그 세력은 중순양함 휴스턴, 구축함 알덴, 존D포드, 폴존스, 포프, 휘플, 엣솔이었다.

미국구축함 존D포드와 포프는 크리스마스섬 부근에서 구축모함 블랙호크를 만나 블랙호크가 보유한 마지막 어뢰 17발을 받았다. 이후 블랙호크는 어뢰를 소진하고 방카 폭격에서 피해를 입어 속력이 떨어진 미국구축함 바커와 벌머의 호위를 받으면서 호주로 향했다.

전투가능한 연합군 함정들은 대부분 크고작은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중순양함 엑서터는 오버홀이 시급했으며 수상정찰기를 잃었고 1번 포탑의 양탄장치에 문제가 있었다. 휴스턴은 3번 포탑을 잃었다. 경순양함 퍼스는 방금 도착하여 현지 사정에 어두웠다. 구축함 엣솔은 얕은 바다에 떨어뜨린 폭뢰에 피해를 입어 속력이 떨어졌다. 휘플은 드루이터와 충돌하면서 함수에 피해를 입었는데 완벽하게 수리할 수가 없어서 역시 속력이 떨어졌다. 다른 미국구축함들도 대부분 축전지가 새고 기계류는 낡았으며 배바닥에는 따개비가 잔뜩 붙어 있었다. 코테네어는 좌초할 때 손상을 입은 보일러가 완전히 수리되지 않아서 조금씩 샜다. 오버홀을 방금 마친 윗더위드는 좌초되어 버려진 반겐트의 승조원이 운용했는데 비록 두척의 배가 자매함이기는 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기 때문에 승조원들이 배에 대해서 잘 몰랐다. 드래건, 다나에, 스카우트, 테네도스는 미국구축함만큼이나 낡았으며 타넷, 주피터, 인카운터는 기관에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연합군 함대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연료부족이었다. 동인도제도는 손꼽히는 산유국이었으나 이제 일본군이 대부분의 유전을 차지했다. 자바에도 유전이 있었으나 직원들이 도망쳐 버렸다. 수라바야와 탄종프리옥에 연료가 있었으나 어느 쪽도 전체 함대에 공급하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에 함대는 분산해야 했다.

1942년 2월 21일에 헬프리히 제독은 함대를 재편했다. 탄종프리옥에 있는 함정들은 서부타격부대가 되었으며 영국해군의 존 콜린스 준장이 사령관을 맡았다.수라바야와 칠라찹에 있던 함정들은 동부타격부대가 되었으며 도먼 제독이 지휘했다. 이어서 기뢰부설함이 순다해협과 수라바야로 들어오는 입구인 마두라섬 근해에 기뢰를 깔았다. 이때 헬프리히 제독은 일본선단의 접근 예상 경로에 기뢰를 집중적으로 부설하지 않고 마두라섬 근해 전체에 걸쳐 기뢰를 넓게 흩뿌림으로써 효과를 반감시켰다.

일본선단이 다가오자 헬프리히 제독은 잠수함 부대에 압박을 가했다. 헬프리히 제독은 휘하의 잠수함부대를 무자비하게 몰아붙이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일본순양함을 만나고도 공격하지 못한 네덜란드 잠수함장은 귀환하자마자 해임당했다.

헬프리히 제독은 네덜란드 잠수함 O-19, K-Ⅷ, K-Ⅹ, 영국잠수함 트루언트, 그리고 미국잠수함 S-37과 S-38에게 상륙예상지점인 마두라 근해로 달려오라고 명령했다. 상륙해안에서 적을 공격하는 방식은 항해 중인 적의 선단을 주로 노리는 미국잠수함의 운용방식과는 달랐으므로 미국잠수함부대사령관 윌크스 대령은 헬프리히 제독에게 항의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윌크스 대령이 미국잠수함들은 멀리 나가있어 시간 내로 마두라 근해에 도착할 수 없다고 말하자 헬프리히 제독은 수상항주하면 된다고 말했다. 깜짝 놀란 윌크스 대령이 적이 제공권을 장악한 해역에서 수상항주는 자살행위라고 항의하자 헬프리히 제독은 그렇게 몸을 사리니까 미국잠수함들의 전과가 형편없는 것이라고 쏘아붙였다. 윌크스 대령은 잠수함장들에게 헬프리히 제독의 명령을 전달하면서 시간을 맞추기 위하여 수상항주를 할 것인지 함의 안전을 위하여 수중항해를 할 것인지의 선택은 함장에게 맡겼다.

일본기의 활동을 제약하기 위하여 헬프리히 제독은 경순양함 자바를 사용하여 야간에 발리의 덴파사르 비행장을 포격할 계획을 세웠다. 구축함 방커트가 비행장 상공에 조명탄을 쏘아주고 폭격기 1대가 탄착관측을 맡을 것이었다. 이러한 포격은 일본군의 덴파사르 비행장 사용을 당분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2월 24일에 일본기가 수라바야를 공습하여 방커트에게 지근탄 1발을 가했으며 함미에 구멍이 뚫린 방커트는 부유선거에 들어가 수리해야만 했다. 이로써 포격이 무산되었을 뿐 아니라 또 1척의 구축함을 잃었는데 특히 방커트는 승조원의 숙련도가 뛰어나고 실전경험이 풍부했기 때문에 큰 손실이었다.

이제 접근하는 일본선단을 요격할 방법은 수상함대를 사용하는 길 뿐이었다. 살아남은 소수의 항공기는 발리의 덴파사르 비행장과 수마트라의 팔렘방 비행장을 공격하는데 투입되었으나 성과는 미미했다. 제10초계비행단에서 살아남은 3대의 카탈리나가 일본선단의 접근 상황을 감시하고 보고했다. 헬프리히 제독은 휘하 함정들을 모아 더 가까이 접근한 동부자바공략부대를 먼저 공격한 후 서쪽으로 이동하여 서부자바공략부대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성공할 확률이 높지는 않았으나 당시로서는 최선이었다. 서부타격부대의 주력인 영국중순양함 엑서터, 경순양함 호바트, 호주경순양함 퍼스, 구축함 엘렉트라, 인카운터, 주피터는 수라바야로 와서 동부타격부대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칠라찹에 있던 미국함정들도 수라바야로 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들의 합류와 더불어 동부타격부대는 연합타격부대로 이름이 바뀌었다.

엑서터의 함장 올리버 고든 대령은 구할 수 있는 것은 구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수라바야로 떠나기에 앞서 탄종프리옥에서 항해가 가능한 모든 상선을 모아 호송선단을 편성한 후 서쪽으로 80km 까지 호위했다. 엑서터가 돌아간 후 상선들은 호위없이 항해하여 실론에 무사히 도착함으로써 사지에서 벗어났다.

칠라찹에 있던 휴스턴은 구축함 알덴, 폴존스, 존D포드, 포프와 함께 2월 24일에 수라바야에 도착했다. 휴스턴이 입항하자마자 일본군이 수라바야에 공습을 가했다. 일본기는 방커트와 부유선거에 누워있던 스튜어트에 피해를 입히고 고무를 가득 실은 상선 코타라자에 폭탄을 명중시켜 맹렬한 화재를 일으켰다. 이제 수라바야는 일본기의 등쌀에 함정 수리는 커녕 낮에는 함정에 급유도 하기 힘들었다.

일본기가 공습을 가하는 도중에도 헬프리히 제독은 참모장인 영국의 팔리서 제독과 미해군을 대표하는 글래스포드 제독과 함께 연합타격부대의 지휘관을 결정하기 위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동부타격부대사령관인 도먼 제독이 연합타격부대의 사령관을 맡는 것이 무난했으나 문제는 바둥해협 해전의 패배 이후 동맹국 정부와 해군이 도먼 제독의 능력을 의심하며 싫어했다는 점이었다. 특히 바둥해협 해전에 같이 참가했던 미해군의 거부감이 심하여 글래스포드 제독은 도먼 제독 대신 서부타격부대사령관인 영국해군의 존 콜린스 준장이 연합타격부대사령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자바에서 발을 빼고 싶어하는 영국의 장성이 네덜란드 장성을 제치고 연합타격부대의 사령관을 맡는 것은 정치적으로 불가능했을 뿐 아니라 적을 눈앞에 두고 사령관을 교체하는 것은 위험했다. 결국 연합타격부대의 지휘권은 도먼 제독이 쥐게 되었다.

한편 핵심 함정들이 수라바야로 불려가면서 서부타격부대는 영국경순양함 호바트, 드래건, 다나에, 구축함 스카우트, 테네도스, 그리고 네덜란드 구축함 에버트센으로 쪼그라들었다. 드래건, 다나에, 스카우트, 테네도스는 미국구축함 못지 않은 구식함이었고 에버트센은 승조원의 경험이 일천했다. 이 함정들은 쓸모가 없어서 수라바야로 부르지 않은 것이었다. 유일하게 쓸만한 호바트는 원래 부름을 받았으나 급유를 받던 도중 유조선이 일본기가 떨어뜨린 폭탄을 맞는 바람에 급유가 늦어져 서부타격부대에 잔류하게 되었다. 서부타격부대사령관 존 콜린스 준장은 자신의 함대에 대하여 "타격을 가할 능력이 없으니 (타격부대는) 잘못된 이름" 이라고 자조했다.

2월 26일에 영국항공기가 남하 중인 서부자바공략부대를 발견하자 헬프리히 제독은 서부타격부대에게 북상하여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오자와 제독이 지휘하는 서부자바공략부대의 호위세력은 중순양함 5척, 경순양함 2척, 구축대 4개, 수상기모함 2척에 달했으니 경순양함 3척, 구축함 3척으로 이루어진 서부타격부대는 이빨자국도 내지 못하고 몰살당할 수준의 전력차였다.

호바트의 함장 해리 하우든 대령이 이끄는 서부타격부대는 탄종프리옥을 떠나 북상하여 밤새 수색했으나 일본선단을 만나지 못하고 27일 오후 2시 20분에 탄종프리옥으로 돌아와 급유를 받았다. 서부타격부대가 살아남은 이유는 일본군의 착각 덕분이었다.

2월 27일 오전 9시 35분에 구마노의 정찰기가 수색 중인 서부타격부대를 발견했는데 호바트를 알래스카급같은 대형순양함으로 착각하여 "대형순양함 1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2척" 으로 보고했다. 당시 구마노가 소속된 제7전대는 서부타격부대로부터 북동쪽으로 160km 떨어진 해상에 있었다. 제7전대사령관 구리타 다케오 소장은 중순양함 킬러인 대형순양함이 포함된 적함대를 대낮에 중순양함 4척으로 이루어진 제7전대만으로 맞서기에는 다소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65km 떨어져 있던 하라 겐자부로 소장의 제5수뢰전대를 불렀다. 하라 소장은 서부 자바 상륙을 하루 연기하고 제5구축대의 호위 아래 수송선단을 북쪽으로 대피시킨 다음 경순양함 나토리, 제11 및 제12구축대를 이끌고 제7전대와 합류하기 위하여 달려갔다. 그동안 일본항공기 8대가 서부타격부대를 공격했으나 호바트가 가벼운 피해를 입는 선에서 그쳤다.

광대한 해상에서 사전 계획없이 고속으로 기동하는 두 함대가 만나는데는 뜻밖에 시간이 많이 걸려 제7전대와 제5수뢰전대가 만난 것은 27일 오후 3시가 되어서였다. 구리타 소장은 제5수뢰전대가 합류하자 전속력으로 남하를 시작했으나 그때는 이미 서부타격부대가 탄종프리옥으로 철수한 다음이었다. 게다가 급하게 달려온 제5수뢰전대 소속 구축함들의 연료가 부족해지자 구리타 소장은 전투를 단념하고 다시 북상했다. 이로써 서부타격부대는 살아남았다.  

서부타격부대사령관 콜린스 준장은 부하들이 전멸을 면한 것은 순전히 행운 덕분이며 두번 다시 그런 행운을 바라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헬프리히 제독의 참모장인 팔리서 중장을 졸라서 주저하는 헬프리히 제독으로부터 만일 서부타격부대가 또다시 일본군과 접촉하는데 실패하면 자바를 떠나도 좋다는 양보를 얻어내었다. 일단 헬프리히 제독이 물러서자 콜린스 준장은 하우든 대령에게 다시 해상에 나가 수색하되 28일 오전 4시 30분까지 적과 접촉하지 못하면 순다 해협을 거쳐 실론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콜린스 준장의 명령은 가장 최근에 들어온 일본선단의 위치를 감안하여 서부타격부대가 일본군을 만날 수 없게끔 신중하게 계산한 것이었다. 그의 계산대로 서부타격부대는 일본군을 만나지 못하고 순다해협을 통하여 실론으로 철수함으로써 사지에서 벗어났다. 다만 네덜란드구축함 에버트센은 폭풍우 속에서 본대와 헤어져 탄종프리옥으로 돌아옴으로써 탈출할 기회를 놓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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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바둥해협 해전(3)- 제2파 및 제3파 공격

트롬프의 함장 미스터 대령이 지휘하는 제2파는 제58구축함분대장 토머스 빈포드 중령이 지휘하는 미국구축함 4척(스튜어트, 패럿, 존D에드워즈, 필즈베리)을 앞세우고 8km 후방에 경순양함 트롬프가 따라가는 진형을 취했다. 이는 제1파의 진형보다는 나았으나 트롬프가 너무 뒤쪽으로 처졌다는 것이 단점이었다. 제2파는 1942년 2월 20일 새벽 12시 45분에 타펠혹을 통과했고 오전 1시 10분에 20도로 변침한 다음 25노트의 속력으로 바둥해협으로 진입했다. 제2파가 도착했을 때 아사시오와 오시오, 그리고 사사고마루는 아직 사누르 정박지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바둥해협 해전 제2파의 전투상황도. <History of U.S. Naval Operations in World War II, Vol. III: The Rising Sun in the Pacific, 1931--April 1942> P.326

 

제2파의 미국구축함 4척은 스튜어트, 패럿, 존D에드워즈, 필즈베리의 순서대로 사누르 정박지로 뛰어들었다. 오전 1시 34분에 선두의 스튜어트가 왼쪽으로 약 2,000m 거리에서 2개의 함영을 발견했다. 그러자 일본구축함도 탐조등으로 스튜어트를 비추었다. 빈포드 중령은 연막을 펴면서 오른쪽으로 약간 틀어 침로를 30도로 맞추었다. 오전 1시 36분에 스튜어트와 패럿이 각각 6발, 그리고 필즈베리가 3발의 어뢰를 좌현 어뢰발사관으로부터 발사했으나 15발의 어뢰는 모두 빗나갔다.

제8구축대사령 아베 도시오 대좌는 이번에도 강력하게 반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오시오와 아사시오는 미국구축함을 향하여 달려들었다. 고속으로 접근하는 오시오를 탐조등으로 비춘 스튜어트의 승조원들은 위풍당당한 함체를 보고 자신들이 일본순양함과 대결중이라고 생각했다. 존D에드워즈가 오시오를 향하여 2발의 어뢰를 발사했으나 역시 빗나갔다. 

아사시오와 오시오는 오전 1시 45분에 미국구축함을 향하여 어뢰를 발사하고 선두의 스튜어트에게 포격을 가했다. 어뢰는 모두 빗나갔으나 스튜어트는 5인치 명중탄 2발과 지근탄 1발을 맞았다. 첫번째 명중탄은 그냥 함체를 통과했다. 그러나 오전 1시 46분에 부근 해상에 떨어진 지근탄의 파편이 3번 굴뚝에 상처를 입히면서 수병 1명을 죽였으며 부장에게 부상을 입혔다. 오전 1시 47분에 명중한 5인치 포탄은 후방조타기관실에 직경 1.2m 짜리 구멍을 내면서 침수를 일으켰으나 여전히 조타는 가능했다. 

오전 1시 48분에 스튜어트는 일본구축함의 포격을 피하여 65도로 침로를 바꾸었다. 스튜어트의 갑작스런 변침에 놀란 미국구축함들이 잇따라 급하게 변침하면서 진형이 무너졌다. 미국구축함들은 그 상태로 정박지를 벗어났다.

잠시 후 트롬프가 전장에 도착했다. 일본구축함들은 남하하면서 탐조등을 비추었고 트롬프도 오전 2시 5분에 역시 탐조등을 켰다. 그러자 일본구축함이 트롬프의 탐조등을 목표로 3,000m 거리에서 사격을 가했다.  일본군의 명중탄은 2시 7분에 처음 나왔는데 하필이면 어뢰의 사격통제장치와 주포의 사격지시기를 망가뜨리는 바람에 트롬프는 어뢰를 쓸 수 없었으며 150mm 주포는 포대마다 독자적으로 사격해야만 했다.

트롬프는 2시 9분부터 반격을 시작했다. 150mm 주포는 주로 오시오를 공격하고 40mm 보포스 대공포는 주로 아사시오를 공격했다. 오전 2시 11분에 트롬프의 150mm 주포탄 1발이 오시오의 함교에 명중하고 또다른 1발이 좌측 어뢰저장고를 맞추었으나 어뢰는 유폭하지 않았다. 오시오에서는 7명이 전사했다. 트롬프로부터 40mm 대공포로 공격을 받은 아사시오는 탐조등이 부서지고 4명의 전사자와 11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2시 16분에 오시오가 트롬프를 향하여 3발의 산소어뢰를 발사했으나 빗나갔다.7분간의 포격에서 트롬프는 150mm 주포탄 71발과 40mm 대공포탄 수백발을 발사했으며 일본구축함들로부터 5인치 포탄 11발을 맞았다. 

오시오의 어뢰발사를 마지막으로 일본구축함들은 더 이상의 교전을 포기하고 수송선을 지키러 후퇴했다. 트롬프도 추적하지 않고 북동쪽으로 항진하여 정박지를 벗어났다. 5인치 포탄 11발을 얻어맞은 트롬프의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침수가 일어나고 있었고 사격지시기도 망가졌으며 9발을 집중적으로 얻어맞은 함교 부근은 걸레짝이 되었다. 사망자는 10명, 부상자는 30명이었다.

이때 제8구축대제2소대(미치시오, 아라시오)가 전장에 도착했다. 미치시오와 아라시오가 전장에 도착헀을 때 제2파는 완전히 흩어진 상태였다. 패럿은 발리 해안을 따라 북상하고 있었고 중앙에는 스튜어트와 에드워즈가 북상 중이었다. 스튜어트와 에드워즈의 오른쪽 후방 4,600m 해상에서는 필즈베리가 북상하고 있었고 트롬프는 스튜어트의 후방 7,300m 거리에서 북상 중이었다.

미치시오와 아라시오는 스튜어트 및 에드워즈와 필즈베리 사이로 뛰어들었다.  미치시오는 오전 2시 19분에 중앙의 스튜어트를 향해 3,500m 거리에서 포격을 가했는데 그 직후 연합군의 십자화망에 걸려들었다. 동쪽에서 북상하던 필즈베리가 오전 2시 20분에 탐조등으로 미치시오를 비추었다. 그러자 스튜어트는 침로를 85도로 꺾으면서 4인치 주포로 사격을 가했고 동시에 우현에서 어뢰 6발을 발사했으나 빗나갔다. 존D에드워즈도 4인치 주포로 사격을 가하면서 우현에서 어뢰 6발을 발사했으나 빗나갔다. 필즈베리 또한 좌현에서 어뢰 3발을 발사했으나 역시 빗나갔다. 발리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던 패럿은 오전 2시 19분에 해안에 좌초하면서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다. 좌초하는 순간 갑판에 서있던 부사관 1명이 바다로 떨어졌다. 이 부사관은 발리에 상륙했다가 구조되어 수라바야에서 다시 패럿에 합류했다. 패럿은 오전 2시 26분에 가까스로 좌초상태에서 빠져 나왔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포탄에 놀란 미치시오와 아라시오는 뱃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아라시오는 무사히 도망쳤으나 미치시오는 그렇지 못했다. 존D에드워즈의 4인치 포탄 1발이 미치시오의 기관실을 분쇄했다. 이어서 필즈베리와 트롬프의 주포탄이 미치시오의 중앙 대공포좌와 함교에 잇달아 명중했다. 미치시오에서는 화재가 발생했으며 후갑판이 거의 수면에 닿을 정도로 낮아진 상태에서 동력을 잃고 표류하기 시작했다. 미치시오의 전사자는 13명, 부상자는 83명이었다.

미치시오는 연합군의 판단착오 덕분에 살아남았다. 자신들이 열세라고 착각하고 있던 연합군은 미치시오를 끝장내려고 무리하기보다 피해를 준 것으로 만족하고 그대로 북상하여 전장을 벗어났다. 겨우 살아남은 미치시오는 날이 밝자 아라시오에게 이끌려 마카사르로 가서 임시수리를 받은 다음 일본으로 향했다. 미치시오는 1942년 10월 말에 전열에 복귀했다. 바둥해협해전에서 일본구축함이 발사한 5인치 함포탄은 아사시오 310발, 오시오 217발, 아라시오 73발, 미치시오 62발이다.

3시간 후 7척의 네덜란드 어뢰정으로 이루어진 제3파가 바둥해협에 진입했다. 수라바야를 출항할 당시에는 9척이었으나 도중에 2척이 탈락했다. 어뢰정들은 북상하면서 열심히 적을 찾았으나 해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어뢰정 위에서는 시야가 좁아서 제대로 수색할 수 없었다. 결국 어뢰정들은 적의 모습을 찾지 못한 채 남쪽으로 철수했다.

20일 동틀녘에 트롬프는 미국구축함 4척과 만났다. 그때 마카사르에서 날아온 일본육상공격기 9대가 공격해 왔으나 무사히 피했다. 함정들은 전투기를 요청했으나 전날의 공중전 이후 수라바야의 전투기 세력은 무력화된 상태였다.

이로써 바둥해협 해전은 연합군의 패배로 끝났다. 연합군은 구축함 1척(피에타인)이 산소어뢰에 맞아 격침되고 경순양함 1척(트롬프)이 5인치 포탄 11발을 맞아 큰 피해를 입었으며, 구축함 1척(스튜어트)이 역시 5인치 포탄에 맞아 가벼운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은 격침된 함정은 없었으며 구축함 1척(미치시오)이 구축함과 트롬프의 포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구축함 2척(아사시오, 오시오)과 수송선 1척(사사고마루)이 역시 포격을 받아 가벼운 피해를 입었다. 연합군은 일본선단의 속력을 잘못 추정함으로써 상륙이 끝난 이후에야 전투에 돌입했을 뿐 아니라 우세한 전력을 동원하고서도 분산투입하는 바람에 패배했다.

바둥해협 해전은 자바해 해전의 으스스한 예고편이었다. 일본구축함 아사시오와 오시오는 압도적인 열세 상황에서 기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감투정신을 발휘하면서 주도권을 유지했다. 전투력 또한 대단하여 자신들은 가벼운 피해만을 입으면서 피에타인을 격침하고 트롬프를 대파시켰으며 사사고마루를 가벼운 피해로 지켜내었다. 자바해 해전의 승부를 가르게 되는 93식산소어뢰 또한 피에타인을 격침하면서 화려하게 데뷔했다.

자바섬 바로 동쪽에 있는 발리의 덴파사르 비행장을 점령하면서 일본기들은 자바 남쪽의 인도양을 통해 자바로 증원되는 병력과 보급품을 실은 선박을 마음껏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자바에서 유일하게 안전한 항구였던 칠라찹도 일본 육상공격기의 공격권 내로 들어왔다. 이제 자바는 고립되었다. 발리가 함락되자 웨이벌 장군은 ABDACOM의 수명이 길어야 2주일쯤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낙관적인 전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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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바둥해협 해전(2) - 피에타인 침몰

작전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도먼 제독의 제1파는 18일 저녁에 칠라찹을 나섰는데 오후 10시에 네덜란드구축함 코테네어가 항구 입구에서 좌초했다. 코테네어는 작전에서 빠져 수리차 수라바야로 가야만 했다.

항구를 빠져나온 도먼 제독의 함대는 19일 하루동안 22노트의 속력으로 동진했으며 오후 6시 31분에 전투대형으로 바꾸었다. 선두에 드루이터가 서고 약 900m 후방에 자바가 뒤따랐다. 그뒤로 약 5,000m 후방에 피에타인, 다시 약 4,600m 후방에 존D포드와 포프가 뒤따랐다. 당시 피에타인과 미국구축함 사이에 간격이 이렇게 많이 벌어진 이유는 불명확하다. 미해군과 네덜란드해군 사이의 공통신호체계가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익숙한 함정끼리 함께 행동하라고 네덜란드구축함과 미국구축함의 간격을 띄웠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코테네어가 탈락한 이상 피에타인은 무조건 미국구축함과 함께 행동해야만 했다. 미국구축함과 피에타인 사이의 간격은 비극의 중요한 원인이 된다. 

도먼 제독의 함대는 19일 오후 9시 25분에 발리 남단의 타펠곶을 지나자 침로를 25도로 잡고 속력을 27노트로 올려 바둥 해협으로 진입했다. 바다는 잔잔했으나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으며 달빛도 없어서 칠흑같이 어두웠다.

오후 10시 20분에 자바의 견시가 발리 해안쪽에서 희미한 함영 3개를 발견했다. 확신이 없었던 자바의 함장이 드루이터의 도먼 제독에게 보고하자 도먼 제독은 즉시 공격명령을 내렸다. 10시 25분에 자바는 탐조등을 켜는 것과 동시에 적에게 조명탄을 발사했다. 이어서 150mm 함포가 2,000m 의 근거리에 있는 표적을 향해 불을 뿜었다.

자바가 발견한 함영은 제8구축대제1소대(아사시오, 오시오)와 9,258톤짜리 수송선 사사고마루로서 발리에 병력을 상륙시킨 다음 주정을 회수하기 위하여 남아있다가 이제 회수를 마치고 마카사르로 돌아가기 위하여 막 출발하려던 참이었다. 자바의 공격은 완전한 기습이었으나 오랜 훈련을 통해 단련된 일본군은 침착하고 재빠르게 반응했다. 오시오에 승좌하고 있던 제8구축대사령 아베 도시오 대좌는 반격명령을 내린 다음 구보 제독에게 적 순양함과 교전이 벌어졌다고 보고했다.

아사시오는 즉시 탐조등을 켜서 자바를 포착하고 포격을 시작했다. 자바도 아사시오의 탐조등을 향해 40mm 보포스 대공포로 사격을 가했으나 서로 명중탄을 내지 못했다. 이제 아사시오와 오시오는 속력을 올리면서 동쪽으로 변침하여 네덜란드순양함에 도전했다.

도먼 제독은 침로를 약간 북동쪽으로 꺾어 일본구축함들이 자신의 진로를 T자형으로 누르지 못하게 하면서 포격전을 벌였다. 자바는 주로 아사시오와 교전했고 드루이터는 오시오와 교전했다. 아사시오는 자바의 좌현 후방함체에 1발의 명중탄을 기록했으나 피해는 가벼웠다. 자바는 사사고마루에 1발의 150mm 포탄을 명중시켰으나 역시 피해는 가벼웠다. 오시오와 드루이터는 서로 명중탄을 내지 못했다.

수분간  짧게 지속된 포격전은 네덜란드순양함들이 고속으로 북상하여 전장을 빠져나가면서 종결되었다. 네덜란드 순양함들은 적의 호위함정을 수송선으로부터 끌어낸다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아직 충분히 속력이 붙지 않은 아사시오와 오시오는 추격을 포기했다.

 

바둥해협 해전. 제1단계. <History of U.S. Naval Operations in World War II, Vol. III: The Rising Sun in the Pacific, 1931--April 1942> P.323

 

순양함열의 5,000m 후방에서 따라오던 네덜란드구축함 피에타인은 위험한 상태에 있었다. 앞서가던 순양함은 전장을 이탈했고 뒤따르는 미국구축함은 4,600m 나 떨어져 있었다. 결국 피에타인은 혼자서 일본구축함 2척과 싸워야했다.

아사시오와 오시오가 순양함들과 싸우는 사이 전장에 접근한 피에타인은 좌현 쪽으로 수송선 사사고마루를 발견하고 어뢰 3발을 발사했으나 빗나갔다. 잠시 후인 오후 10시 30분에 아사시오와 오시오를 발견하자 피에타인은 어뢰 2발을 발사하고 포격을 가했으나 역시 빗나갔다. 함장 촘프 소령은 연막을 피우면서 우현으로 선회하라고 명령했다.

잠시 후 미국구축함들도 전장에 도착했다. 앞장 선 존D포드는 오후 10시 37분에 사사고마루를 발견하고 좌현의 어뢰 3발을 발사했고 잠시 후 뒤따르던 포프도 2발을 발사했으나 모두 빗나갔다. 존D포드와 포프는 사사고마루에 포격을 가하여 몇 발을 명중시켰다. 그러면서 미국구축함들은 일본구축함 2척과 싸우던 피에타인에게 접근했으나 도움을 주기에는 너무 늦었다.

미국구축함이 사사고마루를 공격하면서 북상하는 동안 피에타인은 좌현 900m 까지 접근한 아사시오와 포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피에타인이 왼쪽으로 변침하는 순간 아사시오의 5인치 포탄 2발이 명중했다. 1발은 탐조등에 맞으면서 화재를 일으켰다. 다른 1발은 후방 보일러실의 증기파이프를 박살내면서 동력을 끊어 속력을 급속히 떨어뜨렸다. 보수반의 노력으로 동력은 복구되었으나 원래 속력이 나오지 않았고 일본군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사시오는 근거리에서 산소어뢰를 발사했고 그중 1발이 오후 10시 40분에 피에타인의 좌현에 명중했다. 피에타인은 침몰했으며 함장 촘프 소령을 위시한 승조원 64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로써 93식 산소어뢰는 데뷔전을 성공적으로 치렀다.

 

네덜란드구축함 피에타인. https://en.wikipedia.org/wiki/HNLMS_Piet_Hein_(1927)

 

피에타인이 전열에서 탈락하자 이제 미국구축함 2척은 일본구축함 2척과 대결하게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구축함 2척끼리의 대결이었지만 바둥해협 해전 당시 미국구축함과 일본구축함의 전력 차이는 상당했다.
우선 제1차 세계대전 직후 건조된 낡은 클렘슨급인 미국구축함의 만재배수량은 1,310톤인데 비하여 1939년부터 취역한 신조함인 아사시오급 일본구축함의 만재배수량은 2,410톤으로 1.8배가 넘었다. 실제로 탐조등에 떠오른 일본구축함의 우람한 모습을 본 미국구축함의 승조원들은 자신이 일본순양함과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장 또한 차이가 많이 났다. 주포의 경우 클렘슨급은 15kg짜리 포탄을 쏘는 4인치 함포 4문인데 반하여 아사시오급은 23kg짜리 포탄을 쏘는 5인치 함포 6문으로 일제발사시 투사량이 2.3배에 달했다. 어뢰 또한 클렘슨급이 211kg 짜리 탄두를 가진 21인치(533mm) 어뢰 12발을 가진 반면 아사시오급은 490kg짜리 탄두를 가진 직경 610mm의 93식산소어뢰를 예비어뢰 포함 16발이나 보유했다. 따라서 탄두 무게만으로도 3배 이상 우월했으며 어뢰의 성능까지 고려한다면 격차는 더 벌어졌다.

 

클렘슨급 구축함 존D포드. https://en.wikipedia.org/wiki/USS_John_D._Ford_(DD-228)

 

아사시오급 구축함 아사시오. https://en.wikipedia.org/wiki/Japanese_destroyer_Asashio_(1936)

 

일본구축함은 미국구축함이 탈출해야 할 북쪽 항로를 막고 있었다. 선두의 존D포드에 승좌하고 있던 제59구축함분대장 에드워드 파크 중령의 명령에 따라 존D포드는 연막을 뿌리면서 좌현으로 선회했고 포프도 뒤를 따랐다. 반시계 방향으로 선회하다가 일본구축함들이 꽁무니에 따라붙으면서 북쪽 통로가 열리면 그대로 탈출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베 대좌는 넘어가지 않았다. 일본구축함들은 뒤따라 선회하지 않고 남동쪽으로 변침함으로써 여전히 북쪽 통로를 틀어막고 있었다.

선회를 마친 미국구축함들이 남동쪽으로 향하자 일본구축함들은 거리를 좁히면서 포격을 가했고 미국구축함들도 반격했다. 일본구축함의 포격은 위협적이어서 여러번 협차가 나왔으나 다행히 명중탄은 없었다. 압도적인 화력의 열세를 절감한 파커 중령은 남쪽으로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오후 10시 5분에 선두의 존D포드가 갑자기 좌현으로 꺾은 다음 속력을 늦추면서 다시 연막을 뿌렸다. 그 순간 포프가 우현 뒷쪽에 나타난 오시오에게 5발의 어뢰를 발사하고는 존D포드를 추월하여 남쪽으로 탈출했다. 어뢰는 모두 빗나갔다. 존D포드의 갑작스런 변침, 감속, 연막 살포에 이어 포프가 어뢰로 반격하자 일본구축함은 멈칫하면서 거리를 벌렸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존D포드는 다시 증속하여 쏜살같이 남쪽으로 달아나 칠라찹으로 향했다. 이로써 오후 11시 10분에 제1파 공격이 끝났다.

미국구축함들이 탈출한 직후 캄캄한 밤에 연막 속에서 수색하던 아사시오와 오시오는 서로를 적으로 알고 포탄을 교환했다. 양함은 공히 새로 나타난 적의 함정을 포격으로 격침했다고 보고했으나 사실 서로를 노린 포탄은 모두 빗나갔다.

존D포드와 포프는 피에타인의 조난자들에게 뜻밖의 선물을 주었다. 포격전 와중에 일본군의 포탄 파편이 존D포드의 구명정이 매달려 있던 뒷쪽 밧줄을 끊었다. 승조원이 달려가 덜렁거리는 구명정의 앞쪽 밧줄도 끊자 구명정은 배밖으로 떨어졌는데 뒤집히지 않고 바로 착수했다. 나중에 피에타인의 생존자 13명이 이 구명정을 발견하고 기어 올랐다. 그들은 엔진의 시동을 걸려고 했으나 연료가 없었다. 화재를 피하려고 휘발유를 빼 둔 것이었다. 날이 밝자 생존자들은 주변에 떠다니는 드럼통을 발견하고 건져서 뚜껑을 열었는데 거짓말처럼 휘발유가 들어 있었다. 이 휘발유는 포프의 구명정을 위한 것으로 역시 포격전 와중에 화재 발생을 막으려고 버린 것이었다. 엔진에 휘발유를 채운 생존자들은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피에타인의 조난자 20명을 더 구한 다음 자바로 돌아갔다.

제1파의 공격은 병력분산의 폐해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우세한 병력을 제파공격으로 분산한 것도 모자라 도먼 제독은 제1파의 전력마저 분산시켰다. 따라서 실제로 제1파의 공격은 3개의 독립적인 전투로 이루어졌다. 첫번째는 2척의 경순양함과 2척의 일본구축함 사이의 대결로 유일하게 우세했으나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두번째는 피에타인이 강력한 일본구축함 2척과 맞서게 되었으며 압도적인 열세에 몰린 피에타인은 격침되었다. 세번째는 구식인 미국구축함 2척이 강력한 일본구축함 2척과 역시 열세의 싸움을 강요당했으며 미국구축함 2척이 피해없이 달아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북쪽에서 경계 중이던 나가라 함상의 구보 제독은 적 순양함과 교전 중이라는 아베 대좌의 보고를 듣자 제21구축대(와카바, 하츠시모, 네노히)를 이끌고 남하를 시작했으나 거리가 너무 멀었다. 그는 전장에 더 가까이 있던 제8구축대제2소대(미치시오, 아라시오)에게 즉시 남하하라고 명령했다. 이 명령에 따라 사가미마루를 호위하여 마카사르로 철수 중이던 미치시오와 아라시오는 반전하여 남하하고 사가미마루는 혼자 마카사르로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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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바둥해협 해전(1) - 계획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 대한 공격은 동시다발적이었다. 일본군은 다윈을 폭격하고 티모르를 공격하는 동시에 발리에도 상륙했다. 

화창한 기후로 유명한 발리는 발리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자바 동해안과 마주보고 있었다. 발리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남동쪽 해안 가까이에 있는 덴파사르 비행장이었다. 켄다리2 비행장과 달리 덴파사르 비행장의 활주로는 비포장이었으며 관련 시설도 원시적이었다. 그러나 덴파사르 비행장은 자바에 가까워서 호주로부터 자바로 향하는 증원선단을 공격하기에 유리했으며 자바 남해안의 칠라칩을 폭격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기후가 온화했으므로 켄다리2 비행장과 달리 날씨가 나빠서 항공작전을 실시하지 못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발리 침공부대는 근거지부대지휘관 구보 규지 소장이 지휘했다. 상륙부대는 대만보병제1연대제3대대장 가네무라 마타베이 소좌가 지휘하는 대만보병제1연대제3대대(1개 중대 감편), 산포 1개 소대, 독립공병 1개 소대, 기타 지원병력으로 이루어진 가네무라 지대였다. 가네무라 지대를 실은 수송선 2척(사사고마루, 사가미마루)은 제8구축대(아사시오, 오시오, 아라시오, 미치시오)의 근접 호위를 받았다. 지원대인 구보 소장의 기함 경순양함 나가라와 제21구축대(하츠시모, 네노히, 와카바)는 북쪽 해상에서 엄호할 것이었다. 상륙지역은 덴파사르 비행장에 가까운 바둥해협의 사누르정박지였다. 다이난항공대 및 제3항공대의 제로기가 상륙지역 상공의 엄호를 맡았다. 발리 침공부대는 1942년 2월 17일 밤에 마카사르를 떠났다.

ABDACOM은 마카사르에 일본함정이 집결하고 있는 것은 알았지만 행선지는 알 수 없었다. 일본선단이 발리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웨이벌 장군이 확신한 것은 18일 오후가 되어서였는데 저지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가네무라 지대는 2월 19일 오전 2시경에 사누르 정박지 해안에 상륙했다. 600명 규모의 인도네시아 현지인부대는 일본군이 상륙하여 공격하자 그대로 항복했다. 폭파작업도 이루어지지 않아 일본군은 활주로를 비롯한 덴파사르 비행장의 시설과 보급품을 고스란히 손에 넣었다.

19일 날이 밝자 ABDAIR는 전투기의 호위없이 폭격기를 보내어 일본선단을 폭격했다. P-40들은 수라바야 상공의 공중전에 참가해야만 했다. 말랑에서 날아온 B-17폭격기 3대가 날이 밝자마자 일본선단 상공에 나타나 폭격을 가했다. 다이난 항공대의 제로기 2대가 요격했고 B-17은 무사히 돌아갔으나 명중탄은 없었다. 오전 6시에는 B-17폭격기 4대가 날아와서 폭격을 가했다. 다시 제로기가 요격했고 이번에도 살아 돌아갔으나 역시 명중탄은 없었다. 오전 6시 45분에는 LB-30폭격기(B-24의 파생형) 3대가 폭격했다. 역시 제로기의 요격을 받았고 무사히 돌아갔으나 명중탄은 없었다. 오전 8시에 B-17폭격기 2대가 다시 폭격했으나 역시 명중탄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제91폭격비행대대의 A-24 밴시 급강하폭격기(돈틀리스의 육군형) 2대가 폭격을 가하여 수송선 사가미마루의 기관실에 폭탄 1발을 명중시켰으나 격침하지 못했다.

폭격기 조종사들은 사누르 정박지에 순양함 2척, 구축함 5-6척, 수송선 4척이 있으며 순양함 2척에게 대형폭탄 3발과 소형폭탄 1발을 명중시키고 구축함들에게 8발의 지근탄을 가했으며 수송선들에게 대형폭탄 2발과 소형폭탄 1발을 명중시켰다고 보고했다. 조종사들이 전과를 과장되게 보고하는 것은 어느나라 군대에서나 흔한 일이지만 이때의 과장보고는 ABDAFLOAT가 반격 계획을 짜는데 직접적인 악영향을 주었다.

사누르 정박지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연합군 함정은 프레드 와더 소령이 지휘하는 미국잠수함 시울프였다. 18일 오전 2시에 일본선단을 발견한 시울프는 대담하게 수상항해로 일본구축함의 경계망을 통과하는데 성공했으나 일본수송선의 위치를 찾는 동안 날이 밝자 잠항했다. 잠시 후 시울프는 모래톱에 자초되었다. 후진했으나 빠져나오지 못하자 부상할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해면에는 스콜이 뿌리고 있어서 탐지를 면했다. 30분간 스콜의 비호 아래 수상항진하던 시울프는 스콜을 벗어나자 다시 잠항했다. 마침내 일본수송선 2척을 발견한 시울프는 후방어뢰발사관에서 1척에 1발씩 2발을 발사했으나 모두 빗나갔다. 오시오가 달려와 43발의 폭뢰를 퍼부었으나 시울프는 무사히 탈출했다.

영국잠수함 트루언트도 공격명령을 받았다. 북쪽으로부터 접근하던 트루언트는 엄호부대를 발견하고 구보 제독의 기함 나가라에게 어뢰 6발을 쏘았으나 모두 빗나갔다. 곧 일본구축함이 달려와 폭뢰를 퍼부었으나 트루언트는 무사히 수라바야로 돌아왔다.

ABDAFLOAT의 함정들은 흩어져 있었다. 미국 중순양함 휴스턴은 티모르로 가는 선단을 호위하다가 다윈으로 회항하는 중이었다. 영국 중순양함 엑서터, 호주 경순양함 호바트, 호주 구축함 에버트센, 영국 구축함 테네도스와 스카우트는 순다해협에서 선단을 호송하고 있었다. 네덜란드구축함 반겐트는 방카 작전에서 상실되었고 승조원은 방커트에게 구조되어 수라바야로 돌아오고 있었다. 네덜란드구축함 윗더위드는 승조원이 모두 다른 배로 차출된 상태로 오버홀을 받고 있었다. 상실된 반겐트의 함장 피터 쇼텔 소령을 포함한 승조원은 전원 윗더위드에 배치되었으나 22일이 되어야 해상에 나올 수 있었다. 2월 18일에 페락항에서 일본기가 떨어뜨린 지근탄으로 피해를 입은 방커트는 수라바야의 건선거에 들어 있었다. 방카해협 폭격에서 피해를 입은 미국구축함 바커와 벌머는 칠리찹에 있었으며 곧 호주로 떠날 것이었다. 방카 해협에서 돌아온 호주경순양함 트롬프와 미국구축함 4척(스튜어트, 패럿, 존D웨드워즈, 필즈베리)은 수마트라 남부에 있는 보급항 반다르람풍에서 마지막 급유를 받고 있었다. 반다르람풍은 일본군이 남부 수마트라에 상륙함에 따라 곧 폐쇄될 것이었다.

마카사르에 일본함정이 집결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헬프리히 제독은 2월 17일에 도먼 제독을 만났다. 여기서 19일 밤에 일본선단을 공격하기로 했는데 이 공격은 실패할 운명이었다. 우선 일본선단의 속력이 빨랐다. 침공선단은 예상보다 훨씬 빨리 발리에 도착하여 상륙함으로써 ABDAFLOAT의 반격을 뒷북으로 만들어 버렸다. 둘째로는 반격에 투입할 함정이 칠라찹, 수라바야, 그리고 반다르람풍에 흩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공격은 3번에 걸친 제파공격으로 실시하기로 했다.

제1파 공격은 도먼 제독이 칠라찹에 있는 네덜란드 경순양함 드루이터, 자바, 네덜란드 구축함 코테네어, 피에타인, 그리고 미국구축함 존D포드와 포프를 가지고 실시할 것이었다. 함대는 발리와 동쪽에 있는 페니다섬 사이에 있는 폭 24km의 바둥해협을 통하여 남쪽으로부터 사누르 정박지로 진입하여 일본선단을 공격한 다음 발리섬 북쪽으로 빠져 수라바야로 철수할 것이었다.

제2파 공격은 반다르람풍에서 급유를 받고 수라바야로 급히 돌아온 함정들이 실시할 것이었다. 참가함정은 네덜란드 경순양함 트롬프와 미국구축함 스튜어트, 패럿, 존D웨드워즈, 필즈베리였으며 지휘관은 트롬프의 함장 야코프 미스터 중령이었다. 이 함대는 발리 해협을 통하여 남하한 다음 제1파와 마찬가지로 남쪽으로부터 사누르 정박지에 돌입하여 공격한 다음 발리섬의 북쪽을 돌아 수라바야로 귀환할 예정이었다.

제3파 공격은 수라바야 해군관구 사령관 피터르 쿤라드 제독이 제안한 것으로 네덜란드 어뢰정 9척 (제4, 제5, 제6, 제7, 제9, 제10, 제11, 제12, 제13호)이 참가할 것이었다. 어뢰정들은 수라바야를 떠나 발리해협을 남하한 다음 자바 동남해안의 팡팡만에서 네덜란드 기뢰부설함 크라카타우로부터 급유를 받을 것이었다. 이후 어뢰정들은 제2파와 마찬가지로 바둥 해협을 거쳐 남쪽에서부터 사누르 정박지에 진입하여 제1파와 제2파에 의하여 피해를 입은 일본함정들을 어뢰로 공격한 후 역시 발리섬의 북해안을 돌아 수라바야로 돌아올 것이었다.

병력집중의 원칙을 어긴 이러한 작전계획은 당대에는 물론 이후에도 역사가들의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ABDAFLOAT는 압도적인 전력을 동원했으면서도 서로 분리되어 다른 시간에 공격하는 바람에 우위를 희석시켰다.

물론 이유야 있었다. 우선 칠라찹과 수라바야의 함정이 집결하려면 시간이 걸렸는데 헬프리히 제독은 어쩌면 몇시간 차이로 결정적인 기회를 놓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둘째로 어두운 밤에 적의 코앞에서 함정이 집결하다가 아군끼리 오인사격이 발생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19일 오전에 폭격기 조종사의 보고를 전해들은 헬프리히 제독은 따로 공격해도 각각의 제파가 적에 대해 압도적 우위를 가지고 있다고 보고 작전 계획을 변경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바둥해협 해전의 패배 이후 전력을 분산시켰다는 비판에 직면한 헬프리히 제독은 훗날 제파공격은 도먼 제독의 아이디어였으며 자신은 다만 찬성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남서태평양미해군부대 사령관 글래스포드 제독은 헬프리히 제독이 도먼 제독에게 제파공격을 강요했을 것이라고 의심했지만 증거는 없다.

제1파를 지휘한 도먼 제독의 전술에도 문제가 있었다. 도먼 제독은 경순양함 2척이 먼저 진입하고 구축함 4척이 나중에 진입하는 전술을 채택했다. 경순양함 2척이 적의 호위함정들을 공격하여 외곽으로 끌어내면 구축함이 돌입하여 수송선에 어뢰공격을 가한다는 생각이었다. 즉 포격 먼저 어뢰 나중의 순서였다. 그러나 일본호위함정이 경순양함에 이끌려 호위해야 할 일본수송선을 남겨두고 정박지를 떠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이후의 해전사는 야간해전에서 포격을 가하기 전에 적이 모르는 상태에서 먼저 어뢰를 발사하는 편이 훨씬 유리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즉 어뢰가 먼저고 포격이 나중이었다. 일본해군은 이 원칙을 철저히 지켰으며 6개월 후의 사보섬 해전에서 압승을 거둠으로써 어뢰를 먼저 발사하는 것이 옳음을 증명했다. 미해군은 이미 발릭파판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이 순서가 옳음을 증명한 상태였다. 

 

도먼 제독이 포격 먼저라는 순서를 택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레이더가 없는 데다가 함대에 미국구축함이 끼어 있어 함정 사이의 통신이 원활하지 못한 상황에서 도먼 제독은 선두에서 돌입함으로써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상황을 빨리 파악하고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이는 사보섬 해전에서의 일본해군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사보섬해전에서 선두로 돌입했던 미카와 군이치 제독의 기함인 중순양함 초카이는 어뢰를 가지고 있어서 어뢰 먼저 포격 나중의 순서를 지킬 수 있었다.

어뢰 먼저 포격 나중의 순서로 공격하여 승리한 발릭파판 해전에 참가했던 제59구축함분대장 에드워드 파커 중령은 글래스포드 제독을 찾아와 도먼 제독의 공격순서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았다. 글래스포드 제독은 파커 중령의 불만에 동조하면서도 현장 지휘관이 도먼 제독인 이상 자신은 거기에 대해 할말이 없다면서 선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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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다윈 폭격

ABDACOM의 보급항은 호주 북서부에 자리잡은 다윈이었다. 다윈은 호주 본토에서는 가장 북쪽에 있는 항구로서 동남아시아에 가장 가까웠지만 그래도 전선에서 너무 멀어서 보급항으로 부적합했다. 또한 다윈은 단순히 항구로서도 한계가 많았는데 정박지는 널찍했으나 조수간만의 차가 6m에 달하여 조류가 강했다. 다른 문제는 수심이었다. 원래 항구는 어느 정도 깊은 것이 좋으나 다윈의 경우는 30m 가 넘었는데 이는 지나치게 깊은 것으로 배가 가라앉으면 건질 수 없었다. 진주만의 수심은 약 15m 였는데 야마토급이나 아이오와급의 흘수가 11m 정도였으니 당시 항구의 수심은 그정도면 충분했다.

다윈의 항구시설도 빈약했다. 하역장소라고는 L-자형 부두 하나가 전부였는데 바깥쪽 선석의 길이는 170m, 안쪽 선석의 길이는 120m 로 중간 크기의 화물선 2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작은 규모였다. 하역 장비도 원시적이어서 이동식 수동기중기 2개(10톤 짜리와 5톤 짜리), 그리고 이동식 동력기중기 2개(3톤 짜리와 1.5톤짜리)가 있을 뿐이었다. 하역용 거룻배는 개인 소유가 4척(10톤에서 30톤 사이), 그리고 해군 소유의 70톤짜리 2척이 있었다. 

교통도 불편했다. 육로로는 접근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외부로 나가려면 1주일에 한번 꼴로 들르는 배를 타야만 했으며 행선지에 따라서는 그곳에 가는 배가 올 때까지 최대 1달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었다. 한마디로 호주 대륙에 있었지만 외딴 섬이나 마찬가지였다. 조그만 시가지는 거의 모두가 목조건물로서 미국의 서부개척시대를 연상케 했다.  주민 수는 약 4,000명이었으나 진주만 기습 이후 어린이와 부녀자 약 1,500명을 소개하여 공습을 당한 1942년 2월 19일에는 공무원, 민간항공사 직원, 부두노동자, 건설인부, 그리고 주로 중국인과 백인으로 이루어진 소수의 사업가 등 2,500명 정도가 남아 있었다.

연합군은 다윈을 보급기지로 개발하기 위하여 창고 몇동과 8,000톤짜리 석유탱크 9개, 12,000톤짜리 석유탱크 2개를 건설했다. 시가지 북서쪽의 비행장은 확장하여 공습 당시 미국제33추격비행대대(임시)가 주둔했으나 조만간 자바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북동쪽에 새로 만든 비행장에는 허드슨 폭격기를 보유한 호주제13비행대대가 주둔했으며 시가지에 가까운 민간비행장에는 호주제12비행대대의 위라웨이 전투기 5대가 주둔했다. 항구에는 작은 부유선거도 하나 갖다 놓았다. 공격을 받을 당시 다윈을 지키던 호주육군병력은 1개 여단과 지원부대였으며 해군은 1,105명, 공군은 약 2,000명이었다.

일본군은 연합군의 보급기지인 다윈의 기능을 정지시키려고 시도했다. 일본잠수함들이 기뢰를 부설했으나 결과가 신통치않자 항공모함을 동원한 공습을 계획했다. 2월 10일에 일본의 4발 대형비행정이 다윈 부근까지 날아와 항구를 정찰하고 사라졌다. 일본군은 다윈을 공습함으로써 티모르 등 요지 공략시 배후의 위협을 없애려 했다. 

1942년 2월 15일 오후 2시에 나구모 주이치 중장의 기동부대가 다윈 공격을 위하여 팔라우의 정박지를 떠났다.  진주만 기습 이래 단일 목표를 노린 함대로서는 가장 강력한 기동부대는 제1항공전대(아카기, 카가), 제2항공전대(소류, 히류), 제8전대(도네, 치쿠마), 제1수뢰전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1수뢰전대는 경순양함 아부쿠마, 제17구축대(이소카제, 우라카제, 타니카제, 하마카제), 제18구축대제1소대(카스미, 시라누이), 그리고 제27구축대제2소대(아리아케, 유구레)로 이루어져 있었다. 카가는 2월 9일에 팔라우 정박지에서 자리를 옮기다가 암초를 들이받아 속력이 18노트로 줄었으나 작전에 참가했다.

기동부대는 2월 19일 아침에 티모르 동쪽, 다윈에서 북서쪽으로 약 320km 떨어진 발진해역에 도착했다. 발진은 오전 6시 52분에 시작하여 7시 30분에 마쳤다. 다윈공격대는 제로기 36대(각 항모에서 9대씩), 99식함상폭격기 71대( 히류 17대, 나머지 3척 18대씩), 그리고 800kg 짜리 폭탄을 장착한 97식함상공격기 81대(카가 27대, 나머지 3척 18대씩)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지휘는 진주만 기습과 마찬가지로 후치다 미츠오 중좌가 맡았다.  비슷한 시각에 켄다리2 비행장에서는 가노야 및 제1항공대의 육상공격기 54대가 이륙했다. 

다윈으로 접근하는 도중 히류의 제로기 9대는 본대와 분리되어 앞서 나갔다. 히류의 제로기들은 도중에 미군의 카탈리나 1대를 만나 격추하고 북서쪽으로부터 다윈에 진입했다.
반면 후치다가 이끄는 본대는 다윈에 접근하자 호주군의 의표를 찌르기 위하여 빙 돌아서 남동쪽으로부터 다윈에 진입했다.

1942년 2월 19일 목요일 아침의 다윈은 평온해 보였다. 폭뢰 200톤을 실은 화물선 넵튜나(5,952톤)는 부두의 바깥쪽에, 부두 확장용 목재를 실은 호주화물선 바로사(4,265톤)는 부두의 안쪽에 접안하고 있었다.
정박지에는 티모르로 가다가 회항한 미국수송선 메그스(7,358톤), 마우나로아(5,436톤), 포트마(5,551톤), 그리고 영국수송선 툴라기(2,281톤)가 있었는데 싣고 있던 병력은 모두 상륙시킨 상태였다. 
필리핀으로 항공유를 운반하려던 유조선 애드미럴 할스테드(3,289톤)와 다윈에 공급할 연료를 싣고 있던 영국유조선 브리티시 모터리스트(6,891톤)도 정박 중이었고 싱가포르로 가려던 호주병원선 마눈다(9,155톤)와 탄약을 실은 호주수송선 질랜디어(6,683톤)도 있었다.
미국구축함 피어리(1,190톤)는 연료보급을 위해 머무르고 있었다. 수상기모함 윌리엄 프레스톤(1,308톤)은 항구의 동쪽에 정박한 채 카탈리나를 지원하고 있었으며 함장 에서리지 그랜트 소령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상륙한 상태였다.
10톤급의 거룻배까지 포함하여 그날 다윈항에 있던 배는 총 57척이었다.

 

일본군의 다윈공습상황도. <Rising Sun, Falling Skies> Jeffrey R. Cox, Osprey, 2014. P.217

 

2월 19일 아침에 민간 비행장의 위라웨이 전투기들은 지상에서 정비를 받고 있었다. 북동쪽의 비행장에는 티모르에서 철수한 호주제2비행대대의 허드슨 폭격기 6대가 착륙했다. 제10정찰비행단의 카탈리나 5대는 티모르해로 정찰나갔는데 이중 토머스 무어러 중위가 조종하는 기체는 히류의 제로기를 만나 격추되었다.

오전 9시 15분에 플로이드 펠 소령이 이끄는 제33추격비행대대(임시)의 P-40 워호크 10대가 자바로 가기 위하여 중계지인 티모르의 쿠팡을 향해 이륙했다. 하지만 약 20분 후에 티모르 상공의 날씨가 나쁘다는 기상 정보를 받은 펠 소령은 다윈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오전 9시 37분에 다윈에서 북쪽으로 80km 떨어진 배서스트섬의 해안감시대원인 존 맥그래스 신부가 다윈으로 향하는 일본기들을 발견하고  "대규모 편대가 남쪽으로 향함. 고공" 이라고 보고했다. 쿠팡으로 가다가 돌아오는 펠 소령의 P-40들과는 방위가 달랐음에도 다윈에서는 P-40이라고 속단했다. 그리하여 레이더가 없는 다윈이 공습을 미리 알아차리고 대비할 유일한 기회는 사라졌다. 잠시 후 실제로 펠 소령의 P-40들이 돌아와 5대는 착륙하고 나머지 5대는 상공에서 초계했다. 그때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진주만에서처럼 일본군은 또다시 기습에 성공했다.  제10초계비행단의 정비병인 톰 앤더슨은 남동쪽에서 접근하는 일본기를 처음 본 순간 마침내 아군의 대규모 증원이 도착했다고 생각했다.

오전 9시 45분에 히류의 제로기 9대가 다윈 상공에 나타나 초계중이던 P-40전투기 5대를 공격했으며 잠시 후 본대의 제로기들이 가세했다. 압도적인 열세에 몰린 P-40 전투기 5대 중 4대가 순식간에 격추되었다. 이미 착륙한 P-40전투기 5대 중 3대가 다시 이륙하는데 성공했으나 역시 격추되었으며 나머지 2대는 이륙하는 도중 지상에서 파괴되었다. 이 과정에서 격추된 제로기는 1대였다. 이날 미육군 및 항공대의 전사자는 9명이다.

오전 9시 57분에 후치다의 본대가 도착했다. 공습경보는 58분에 울렸으며 동시에 3.7인치 대공포 16문이 사격을 시작했다. 정박 중이던 피어리와 프레스톤도 급히 기동을 시작하면서 사격했다. 곧이어 99식함상폭격기들이 떨어뜨린 폭탄이 함선에 명중하기 시작했다. 프레스톤의 후갑판에 폭탄이 떨어져 불이 났으며 프레스톤 옆에 계류되어 있던 카탈리나 3대는 기총소사를 받아 파괴되었다. 프레스톤의 전사자는 14명, 카탈리나를 운용하던 제10정찰비행단의 전사자는 16명이었다.

항구 안에서 가장 큰 전투함이었던 구축함 피어리는 일본군의 집중공격을 받았다. 피어리는 필사적으로 회피운동을 했으나 세계 최고 수준인 일본군 함폭조종사의 폭탄을 피하기에 항구는 너무 좁았고 배들은 너무 많았다. 처음의 몇발은 잘 피했으나 곧이어 5발의 폭탄을 연속적으로 얻어맞았다. 첫번째 폭탄은 함미에 떨어져 조타기계실을 침수시키고 프로펠러 1개를 날려버렸다. 두번째 폭탄은 소이탄이었는데 굴뚝 사이에 떨어져 주변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3번째 폭탄은 기관실에 명중했는데 불발탄이었다. 네번째 폭탄은 전방 탄약고에 명중했다. 대폭발이 일어나 함의 핵심부분이 파괴되었으며 함장 존 버밍햄 중령을 포함하여 많은 승조원이 사망했다. 마지막은 역시 소이탄이었는데 후방기관실에서 폭발했다. 피어리는 오후 1시에 함미부터 침몰했다. 마눈다에서 파견한 보트와 호주해군의 조사선 서던 크로스가 생존자를 구조했으나 함정 주변을 불타는 기름이 둘러싸고 있어서 사상자가 늘었다. 피어리의 승조원 132명 중에서 88명이 전사했다. 생존자 44명 중 장교는 포술장 커틀렛 중위가 유일했는데 공격을 받을 당시 육상의 병원에 입원중이어서 생명을 건졌다.

 

DD-226 피어리의 침몰 광경. https://en.wikipedia.org/wiki/Bombing_of_Darwin

 

폭뢰 200톤을 싣고 부두에 접안 중이던 넵튜나에도 폭탄이 명중하여 어마어마한 폭발을 일으켰다. 커다란 불꽃과 함께 검은 구름이 하늘로 솟구쳤으며 폭발의 충격파가 시가지를 뒤흔들었다. 프레스톤의 함장 그랜트 소령은 육상에서 열린 회의를 마친 후 보트를 타고 프레스톤으로 돌아가다가 넵튜나의 폭발로 인한 너울에 휘말렸다. 보트는 그대로 뒤집혔고 가까스로 익사를 면한 그랜트 소령은 가까운 부표로 헤엄쳐 가서 구조될 때까지 매달려 있어야만 했다. 너덜너덜해진 넵튜나는 곧 침몰했으며 36명의 승조원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부두 주변에 있던 민간인 23명도 폭발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다. 이 폭발로 부두의 연료파이프가 끊겨 불타는 기름이 바다로 쏟아졌다.

 

넵튜나가 폭발하는 순간. 앞에 보이는 배는 호주해군의 소해함 델로레인. https://en.wikipedia.org/wiki/Bombing_of_Darwin

 

넵튜나 바로 옆에 있던 화물선 바로사도 폭탄을 맞은데다가 넵튜나의 폭발로 큰 손상을 입었다. 침몰을 막기 위하여 예인선 와토가 바로사를 끌어 해안에 좌초시켰다. 바로사가 싣고 있던 목재는 모두 소실되었으나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티모르로 가던 도중 회항한 수송선들도 피해를 입었다. 미국수송선 메그스는 여러 발의 명중탄을 맞아 후방이 불길에 휩싸인 채 침몰했으며 66명의 승조원 중 1명이 사망했다. 마우나로아는 2발의 폭탄이 열린 선창을 통해 들어와 선저를 직격하는 바람에 용골이 부러지면서 순식간에 침몰했으나 다행히 승조원은 모두 구조되었다. 포트마는 지근탄에 의하여 선체에 구멍이 숭숭 뚫리자 침몰을 피하기 위하여 해안에 좌초했으며 1명이 사망했다. 툴라기도 좌초했으며 사망자는 없었다. 

유조선 브리티시모터리스트도 폭탄에 맞아 선미부터 침몰했으며 2명이 사망했다. 질랜디어도 폭탄 1발을 맞고 침몰했으며 사망자는 2명이었다. 호주해군의 보조초계정 마비(14톤)도 지근탄에 의하여 침몰했으나 승조원 4명은 모두 구조되었다.

병원선 마눈다는 명중탄 1발과 지근탄 1발을 맞아 12명이 사망하고 중상자 7명을 포함하여 47명이 부상을 입었다. 애드미럴할스테드도 지근탄으로 피해를 입었다.

99식함상폭격기가 주로 함선을 공격하는 동안 97식함상공격기는 4,200m 높이에서 부두, 기중기, 창고, 석유탱크, 비행장 심지어 시가지도 공격했다.  제공권을 장악한 제로기도 초저공으로 내려와 기총소사를 가했는데 너무 낮게 날아서 사람들은 웃고 있는 조종사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시가지는 불길에 휩싸였으며 민간인 16명이 사망했다. 다행히 석유탱크는 무사했다.

공습은 시작한 지 15분도 지나지 않은 오전 10시 10분에 끝났다. 공격대는 신속하게 북상하여 모함으로 복귀했으며 착함은 오후 12시 42분에 끝났다. 

아카기항공대는 모함으로 돌아가던 중 오전 10시 35분에 식량을 싣고 필리핀으로 향하던 수송선 돈이시드로와 플로렌스D를 발견했다. 제2항공전대사령관 야마구치 다몬 소장은 착함한 함재기 중 히류와 소류에서 각 9대씩 18대의 함폭을 뽑아 오후 1시 36분에 발진시켰다. 함폭 18대는 오후 3시 26분에 2척의 수송선을 발견하고 폭격을 가한 후 오후 5시 30분에 귀함했다. 소류의 함폭으로부터 250kg 짜리 폭탄 3발을 얻어맞아 선체에 구멍이 뚫린 돈이시드로는 좌초했고 히류의 함폭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플로렌스D는 침몰했다. 돈이시드로에서는 11명, 플로렌스D에서는 4명이 사망했는데 플로렌스D의 사망자 중 1명은 아침에 제로기에 의해 격추되었다가 구조된 무어러 중위의 카탈리나 승무원이었다. 

다윈의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켄다리2 비행장을 이륙한 가노야 및 제1항공대의 육상공격기 54대가 정오에 도착했다. 요격하는 연합군기는 없었으며 일본기는 2개의 비행장을 폭격했다. 활주로에는 구멍이 숭숭 뚫렸으며 지상에 주기중이던 비행기 몇대가 파괴되었다.

이로써 다윈 폭격이 끝났다. 일본군의 손실은 히류의 제로기와 카가의 함폭 각 1대였다. 공격대를 수용한 기동부대는 신속하게 북상하여 21일 오전 10시 15분에 켄다리의 스테어링만에 무사히 도착했다.

2월 19일의 폭격으로 다윈에서는 선박 9척(피어리, 넵튜나, 메그스, 마우나로아, 브리티시모터리스트, 질랜디어, 켈랏, 카랄리, 마비)이 침몰했고 3척(바로사, 포트마, 툴라기)이 좌초되었으며 이외에도 프레스톤, 마눈다, 애드미럴할스테드를 비롯한 10척이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다. P-40전투기 11대가 공중전에서 격추되었으며 P-40전투기 2대, 허드슨 6대, 그리고 LB-30(B-24의 파생형) 1대가 지상에서 파괴되었다. 사망자는 236명으로 피어리와 넵튜나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다윈은 당분간 보급항으로서의 기능이 정지할만큼 큰 피해를 입었으며 호주육군은 일본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수비대를 증강시켰다. 다윈수비대는 참호를 파고 철조망을 치는 등 지상전투 준비를 서두르는 동시에 다윈을 포기해야할 때를 대비하여 폭격에서 살아남은 석유탱크를 비롯한 중요한 시설에 폭파준비를 했다. 공포에 질린 주민들은 다윈을 떠났다.

침공 우려는 과도한 것이었다. 일본은 호주를 점령할 생각이 없었으며 그럴 능력도 없었다. 하지만 다윈 폭격과 뒤이은 주민의 탈출 소식은 호주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호주인들이 다윈 폭격에서 받은 충격은 미국인들이 진주만 기습에서 받은 충격보다 결코 덜하지 않았다.

다윈 폭격으로 남쪽으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한 후 일본제38사단의 3개 대대를 기간으로 한 이토지대가 20일 새벽에 티모르에 상륙했으며 이어서 요코스카제3특별육전대의 공수부대원  450명이 강하했다. 일본군은 치열한 전투 끝에 23일 오전에 티모르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일본군이 자바로 접근함에 따라 남서태평양미해군부대 사령관 글래스포드 제독은 칠라찹에 있는 지원함들이 위험하다고 느꼈다. 2월 19일과 20일에 걸쳐 잠수모함 홀랜디어와 보급을 받던 잠수함 2척, 구축모함 블랙호크와 상처를 입은 구축함 벌머와 바커가 칠라찹을 떠나 호주 서해안의 블랙마우스만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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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자바 제공권 상실

휴스턴은 하트 제독의 명령에 따라 티모르로 가는 증원선단을 호위하기 위하여 1942년 2월 8일에 칠라찹을 떠나 11일 오후 11시에 다윈에 도착했다. 소순다열도의 가장 서쪽에 있는 티모르는 다카하시 제독이 이끄는 동방부대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네덜란드령 서티모르(동티모르는 포르투갈령)에 있는 쿠팡은 중요한 거점이었다. 호주에서 자바로 증원되는 P-40은 다윈에서 쿠팡 비행장, 그리고 발리의 덴파사르 비행장을 거쳐 수라바야에 도착했다. 만일 쿠팡이 점령당하면 P-40은 수송선에 실려 자바로 가야만 했다. 따라서 쿠팡 방어를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수송선 마우나로아, 포트마, 육군수송선 메그스, 그리고 영국수송선 툴라기가 미국 제147 및 제148야포연대와 호주 제2/4전투공병대대를 쿠팡으로 실어나를 것이었다. 중순양함 휴스턴, 미국구축함 피어리, 호주 슬루프함 스완과 와레고가 호위를 맡았다.

호송선단은 15일 오전 2시에 다윈을 떠났다. 일본군을 속일 생각으로 선단은 처음에 남서쪽으로 항진했으나 일본은 알고 있었다. 도쿄 로즈는 수송선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면서 쿠팡에 증원하러 가는 걸 다 알고 있다고 방송했다. 15일 정오경에 도고항공대의 97식대형비행정이 나타났다. 일본군이 켄다리를 점령하자 이제 소순다열도의 남쪽 해상도 적의 항공위협에서 안전하지 못했다. 아직 다윈에서 항공기의 항속거리 이내였으므로 휴스턴의 함장 앨버트 룩스 대령은 전투기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가와니시 H6K97식대형비행정. https://en.wikipedia.org/wiki/Kawanishi_H6K

 

대공포 사정거리 밖에서 선단을 따라오던 97식대정은 오후 2시에 공습을 시도했다. 일본기가 느린 수송선 대신 재빠른 휴스턴을 노린 것이 다행이었다. 게다가 휴스턴은 이제 보이시가 남겨놓고 간 제대로 작동하는 5인치 대공포탄을 가지고 있었다. 휴스턴의 대공포가 일본기를 고공으로 몰아내었고 첫번째 폭격은 실패로 끝났다.

이때 다윈에서 P-40전투기 1대가 도착했다. 당시 다윈에서 가용한 전투기 2대 중 1대인 이 전투기는 제21추격비행대대의 로버트 뷰엘 중위가 몰고 있었다. 뷰엘 중위는 97식대정을 찾지 못했고 휴스턴은 전투기와 통신할 방법이 없었다. P-40의 주의를 끌려고 5인치 대공포탄을 97식대정 방향으로 발사했으나 알아채지 못했다. 웃긴 건 일본기도 역시 미군전투기의 등장을 몰랐다는 점이었다. 97식대정은 다시 한번 휴스턴에 공격을 시도했고 이번에도 실패로 끝났다. 그 순간 뷰엘 중위는 일본기를 발견했고 일본기도 P-40을 발견하고 전속력으로 도망쳤다. P-40은 추격 끝에 12.7mm 기총탄을 퍼부어 97식대정의 연료탱크에 불을 붙였다. 일본기는 해상에 불시착해야 했으며 승무원들은 인근의 멜빌섬에 표착했다가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P-40도 97식대정의 방어기총에 맞아 추락했고 뷰엘 중위는 전사했다.

2월 15일은 무사히 넘어갔으나 다음날인 16일 오전 9시 15분에 다시 97식대정 1대가 나타나 대공포의 사정거리 밖에서 쫓아왔다. 다윈와의 거리는 이제 480km나 떨어져서 전투기가 달려오기에는 너무 멀었다. 오전 11시가 되자 켄다리2비행장을 이륙한 제1항공대의 1식육상공격기 36대와 97식대형비행정 9대가 선단 상공에 도착했다.

이후 1시간 동안 선단은 일본기의 공습을 견뎌야 했다. 1식육상공격기는 9대씩 4번, 97식대형비행정은 5대와 4대로 나뉘어서 1번씩 폭격을 가했다. 일본기들이 수송선을 노리지 않고 휴스턴을 노린 것이 다행이었다. 휴스턴은 이제 제대로 작동하는 5인치 대공포탄을 가지고 있었으며 플로렌스해에서 일본기를 상대해 본 룩스 함장은 일본기의 폭탄투하 패턴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이날 휴스턴의 5인치 대공포는 903발을 발사하여 일본기를 고공에 묶어놓았고 룩스 함장은 일본기의 움직임을 보고 폭탄투하 시점을 예상하여 기민하게 조함했다. 휴스턴을 노린 1식육공 36대와 97식대정 4대의 폭탄은 모두 빗나갔다. 그러자 마지막 남은 5대의 97식대정이 수송선 마우나로아를 노리고 접근했다. 휴스턴의 5인치 대공포가 일본기의 진로에 치열한 탄막을 쳐서 조준을 방해했다. 결국 마우나로아는 지근탄에 의하여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을 입었지만 명중탄은 없었다. 휴스턴은 거의 혼자 힘으로 45대의 일본기로부터 선단을 지켜 내었다.

그러나 더 이상의 전진은 무리였다. ABDA사령부는 오후 3시 15분에 선단에게 전문을 보내어 다윈으로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선단은 항로를 돌려 2월 18일 이른 아침에 다윈에 도착했다.

다윈에 도착한 휴스턴의 승조원들은 ABDAFLOAT사령관이 하트 제독에서 헬프리히 제독으로 바뀌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휴스턴을 자바 북쪽으로 보내지 않겠다는 하트 제독의 약속은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실제로 헬프리히 제독은 휴스턴과 구축함 피어리에게 즉시 칠라찹으로 달려오라고 명령했다.

휴스턴과 피어리는 연료만 가득 채운 후 18일 오후 10시에 서둘러 다윈을 나섰다. 그런데 항구 바로 바깥에서 피어리가 잠수함으로 의심되는 물체를 소나로 접촉했다. 휴스턴은 계속 항진하고 피어리는 폭뢰를 몇 발 떨어뜨리는 등 잠수함을 물속에 눌러두기 위하여 뒤에 남았다. 이 과정에서 연료를 많이 소모한 피어리는 연료 보급을 받기 위하여 다윈항으로 돌아갔다. 원래 구축함은 연료를 조금 싣고 많이 소모하는 함종으로 일단 해상에 나오면 보통 5일, 빨리 쓰면 3일 이내로 연료를 다 써버린다. 피어리는 연료만 채우고 바로 출발하여 휴스턴을 따라 칠라찹으로 갈 생각이었지만 운명의 여신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일본군은 켄다리 점령 이래 수라바야를 계속 공습했다. 2월 18일에는 제23항공전대의 1식육상공격기 23대가 켄다리2 비행장을 이륙하여 날아오다가 그랜트 마호니 대위가 이끄는 제17추격비행대대(임시)의 P-40전투기 12대와 마주쳤다. 보르네오를 이륙한 다이난항공대의 제로기들이 도착하기 전에 P-40들은 3대의 육공을 격추하고 7대에 피해를 입혔다. 제로기 15대가 도착하여 P-40전투기 1대를 격추하자 미군전투기들은 물러났다. 살아남은 육공은 수라바야를 폭격했다. 일본군의 폭탄 1발은 페락항에서 방커트를 맞추었고 다른 1발은 공습을 피하여 항내에서 얕게 잠항하고 있던 네덜란드잠수함 K-Ⅶ 을 맞추었다.  K-Ⅶ은 그대로 좌초했고 함장 멀더 소령을 포함하여 함내에 남아있던 승조원 13명은 모두 사망했다. 제로기들은 말랑 비행장에 기총소사를 가했으며 그 과정에서 드루이터의 수상기를 격추했다.

19일 오전에는 수라바야 상공의 날씨가 좋지 않았다. 그러자 일본군은 육공은 빼고 다이난항공대의 제로기 23대만 내보내어 전투기끼리의 공중전을 시도했다. 일본기의 접근을 알아차린 ABDAIR는 가용한 모든 전투기를 동원하여 맞섰다. 제로기가 수라바야 상공에 도달했을 때 네덜란드 공군의 P-36 모호크 및 브류스터 버팔로 약 30대와 제17추격비행대대(임시)의 P-40 워호크 16대가 3,000m 높이에서 3개의 집단으로 나뉘어 반시계 방향으로 선회하면서 일본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커티스 P-36 모호크전투기. https://en.wikipedia.org/wiki/Curtiss_P-36_Hawk

 

이어서 태평양전쟁 개전 이래 최대 규모의 공중전이 벌어졌다. 비록 2:1의 수적 우세를 지니고는 있었으나 네덜란드 공군의 P-36과 버팔로는 제로기보다 성능이 많이 떨어졌다. 연합군에서는 가장 좋은 P-40도 제로기에게는 열세였다. P-40을 타고 공중전에 참가했던 부치 헤이그 중위는 제로기의 기동성이 P-40보다 10배는 좋다고 말했다.
반면 숫적으로는 열세였으나 성능이 뛰어난 비행기를 타고 실력 또한 훨씬 뛰어난 일본군 조종사들은 연합군을 가볍게 제압했다. 10분 만에 끝난 공중전에서 일본군은 제로기 1대를 잃으면서  P-40 전투기 3대를 포함하여 15대의 연합군기를 격추했다. 이날의 공중전을 계기로 수라바야 상공의 제공권은 일본군에게 확실하게 넘어갔다.

서부 자바에서는 일본육군항공대의 제3비행집단이 항공격멸전을 실시했다. 오전에는 비행제90전대의 99식쌍발경폭격기 5대가 비행제59및 제60전대 소속 1식전투기 19대의 호위 아래 바타비아 부근의 셈플락 비행장을 공격했고 오후에는 비행제90전대의 99식쌍발경폭격기 9대가 비행제59 및 제60전대 소속 1식전투기 28대의 호위 아래 반둥 부근의 안디르 비행장을 공격했다. 제3비행집단은 이날 1식전투기 1대를 잃으면서 네덜란드 공군의 버팔로 9대를 지상에서 파괴하고 5대를 공중전에서 격추했다. 그리하여 서부 자바의 제공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으로 넘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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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수마트라 함락

하트 제독이 자바를 떠난 1942년 2월 15일에 싱가포르가 함락되었다. 극동에서 영국의 지배를 상징하던 대요새 싱가포르가 함락되자 영국 뿐만 아니라 연합국 전체가 큰 충격을 받았으며 ABDACOM 휘하 장병들의 사기도 크게 떨어졌다.

말레이 작전의 성공으로 싱가포르 함락이 가까워지자 일본군은 수마트라 침공을 서둘렀다. 장축의 길이가 1,600km가 넘고 폭이 최대 370km에 달하는 수마트라는 면적이 47만㎢를 넘어 세계에서 6번째로 큰 섬이었다. 수마트라는 말라카 해협을 사이에 두고 말레이 반도와 평행하게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비스듬히 누워있는데 가장 가까운 곳은 말레이 반도에서 50k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수마트라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남쪽에 있는 팔렘방이었다. 팔렘방은 유전지대로서 부근의 플라주에는 로얄더치셸의 정유공장이, 승게이 제롱에는 스탠더드오일의 정유공장이 있었다. 또한 도시 부근에는 비행장이 2개 있었는데 도시의 북쪽에 있는 비행장은 팔렘방1 또는 P1, 남서쪽에 있는 것은 팔렘방2 또는 P2라고 불렀다. 팔렘방시는 내륙에 있었으나 원양항해용 선박이 다닐 수 있는 80km 길이의 무시강을 통하여 방카 해협과 연결되어 있었다.

팔렘방 공략을 담당한 육군선견대선단이 제1호위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캄란만을 출항한 것은 2월 9일 오후 7시였다.  수송선은 8척이었으며 제1호위대는 경순양함 센다이, 제11구축대(하츠유키, 시라유키, 후부키), 구축함 아사기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10일 오후 6시에는 주대가 캄란만을 떠났다. 주대는 제1남견함대사령장관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의 기함인 중순양함 초카이, 제7전대(구마노, 스즈야, 미쿠마, 모가미), 경순양함 유라, 제19구축대제1소대(아야나미, 이소나미), 제12구축대(시라쿠모), 그리고 제3항공부대(경항공모함 류조, 구축함 시키나미)로 이루어져 있었다. 류조는 96식함상전투기 12대와 97식함상공격기 15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미츠비시 A5M 96식함상전투기. https://en.wikipedia.org/wiki/Mitsubishi_A5M

 

11일 오후 6시에는 수송선 14척에 탑승한 육군주력이 제2호위대와 함께 캄란만을 떠났다. 제2호위대는 경순양함 가시이, 해방함 시무슈, 제20구축대(유기리, 아마기리), 제9호구잠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연합군 정보기관이 일본선단의 캄란만 출항을 알아채고 경고했다. 아시아함대 잠수함부대장인 윌크스 대령은 잠수함 시레이븐의 함장 시어도어 에일워드 소령에게 요격명령을 내렸다. 시레이븐은 2월 11일 일몰시에 주대에 접근하여 순양함 2척에게 2발씩 총 4발의 마크14어뢰를 쏘았으나 모두 빗나갔다.
13일 오전 8시부터 하시모토 신타로 소장의 제3수뢰전대(센다이, 유라, 제11구축대, 아사기리)는 싱가포르를 탈출하려던 영국선박들을 공격하여 3척을 격침했다.
13일 오후 7시 40분에 영국공군의 블레넘 폭격기 5대가 후부키와 아사기리를 폭격했으나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육군선견대를 실은 8척의 수송선은 15일 오전 1시까지 무시강 하구 대안에 있는 방카섬의 문톡에 진입했으며 오전 2시 20분부터 병력이 상륙했다. 팔렘방까지 무시강을 거슬러 올라갈 무시강 소강부대는 오전 4시 45분에 하구에 도착하여 오전 7시부터 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수마트라로 접근하자 웨이벌 장군은 텔 푸어텐 장군에게 팔렘방의 방어를 강화하라고 명령했다. 텔 푸어텐 장군은 1개 대대를 팔렘방에, 1개 대대를 해협을 사이에 두고 무시강 하구를 바라보는 방카섬과 동쪽의 벨라퉁섬에 파견했다.

웨이벌 장군은 ABDA타격부대에게 서부 자바로 와서 팔렘방을 향하는 일본선단을 타격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타격부대는 하트 제독의 명령에 따라 숨바와섬 남쪽에서 마카사르의 일본군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먼 제독은 미국함정들은 남겨두고 네덜란드 함정인 경순양함 2척(드루이터, 트롬프)과 구축함 3척(반겐트, 방커트, 피에타인)을 이끌고 가기로 결정했다. 숨바와섬 남쪽에서 자바 서부까지 1,300km 가 넘는 거리를 달려가야 했던 도먼 제독은 마음이 급했다. 결국  2월 12일 밤에 급유를 위하여 자바 남동해안의 프리기만에 들른 도먼 제독의 기함 드루이터는 안개끼고 거친 해상을 고속으로 항진하다가 미국구축함 휘플의 우현 전방 함체를 들이받았다. 드루이터의 상처는 가벼웠으나 휘플은 함수가 왼쪽으로 45도 꺾였다. 휘플은 당분간 칠라찹의 부유선거에 들어가야 했으며 수리를 마친 후에도 전투임무에서 배제되었다.

2월 14일 아침이 되자 수마트라 남부의 연료보급항인 반다르람풍에는 강력한 연합군 함대가 모였다. 비록 휴스턴은 티모르로 가는 선단을 호위하기 위하여 다윈으로 갔지만 미국구축함 6척(벌머, 바커, 스튜어트,  패럿, 에드워즈, 필즈베리)은 헬프리히 제독의 명령을 받고 달려왔다. 호주경순양함 호바트, 네덜란드경순양함 자바, 네덜란드 구축함 코테네어도 순다해협으로 가는 선단을 호위한 후 합세했다.

영국중순양함 엑서터도 바타비아로 향하는 선단을 호위한 후 가세했다. 올리버 고든 대령이 지휘하는 엑서터는 8인치 주포 6문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뢰 6발도 장비하고 있었다. 따라서 휴스턴의 사용가능한 8인치 주포수가 6문으로 줄어든 당시 상황에서는 엑서터가 ABDAFLOAT 에서 가장 강력한 함정이었다.

 

요크급 중순양함 엑서터. https://en.wikipedia.org/wiki/HMS_Exeter_(68)

 

그리하여 도먼 제독은 휘하에 중순양함 엑서터, 경순양함 4척(드루이터, 자바, 트롬프, 호바트), 그리고 구축함 10척(반겐트, 방커트, 피에타인. 코테네어, 벌머, 바커, 스튜어트,  패럿, 에드워즈, 필즈베리)을 거느리게 되었다. 미국, 영국, 네덜란드, 호주의 함정이 모두 포함되어 ABDA타격부대라는 이름에 걸맞는 함대였다.

14일에 일본군이 공수부대를 동원하여 팔렘방을 공격했다. 일본폭격기가 P1 비행장을 폭격한 후 일본군 공수부대 260명이 P1 비행장에, 100명이 주변의 정유공장에 강하했다. P1 비행장을 기지로 삼아 활동하던 영국기들은 공격받을 당시 비행장을 떠나 일본선단을 공격하고 있었다. 제211폭격비행대대의 블레넘 폭격기들은 989톤짜리 수송선 이나바산마루를 격침하고 P2 비행장으로 복귀했다. 14일 오후에 제84 및 제211폭격비행대대 소속의 블레넘 11대가 허리케인 15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류조를 공격했으나 96식 함상전투기에 막혀 블레넘 2대가 격추되고 6대가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의 피해는 없었다.

14일 오후 4시에 연합타격부대는 반다르람풍을 떠나 일본선단을 요격하기 위하여 북상했다. 가장 가까운 길은 방카 해협을 통하는 길이었으나 이미 일본이 기뢰를 매설했을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타격부대는 방카섬과 벨리퉁섬 사이의 가스파해협을 통하여 북상했다. 문제는 가스파해협의 해도가 부실하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안전한 수로 중앙을 따라 단종진을 형성해야 했으나 해도를 과신한 도먼 제독은 일본잠수함을 막기 위하여 중앙에 순양함을 두줄로 세우고 네덜란드구축함 3척을 앞쪽에, 미국구축함 6척을 뒤쪽에 부채꼴로 펼쳤다. 노련한 네덜란드구축함 방커트는 전방에서 항로를 인도했다.

15일 오전 5시 20분에 네덜란드구축함 중 가장 오른쪽에서 항진하던 반겐트가 바미조 산호초에 좌초하면서 전방 보일러실에 불이 났다. 방커트가 반겐트의 승조원을 수용한 후 함체를 파괴했다.

15일 오전 6시에 드루이터는 수상기를 사출했다. 오전 8시 37분에 이 수상기는 방카섬 북쪽 70km 해상에서 순양함 7척과 구축함 3척이 북서쪽으로 고속항진중이라고 보고했다. 오전 9시 23분에 연합타격부대는 초카이의 수상기를 발견하고 자신들이 일본군에게 발견되었음을 알았으나 사실 초카이의 수상기는 오전 8시 8분에 이미 타격부대를 발견했다.

드루이터의 수상기가 발견한 일본함대는 주대로서 초카이, 제7전대제2소대, 제4항공전대, 제19구축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오자와 제독은 오전 8시 30분에 접촉보고를 받았는데 초카이의 수상기는 엑서터를 전함으로 착각하여 전함 1척, 순양함 3척, 구축함 6척으로 보고했다. 적의 함대에 전함이 포함되어 있다는 보고를 받은 오자와 제독은 항공공격으로 적을 약화시킨 다음에 해상전투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그는 접촉보고를 받자마자 제3항공부대에게 주대에서 떨어져 나가 항공공격을 가하라고 명령하고 주대는 타격부대와의 거리를 유지했다. 오전 9시 5분에는 제22항공전대의 육상공격기에게 공격명령이 떨어졌고, 오전 10시 5분에는 주대에서 북동쪽에서 80km 떨어진 해상을 항진하던 주력 선단과 제2호위대가 북쪽으로 대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오전 10시 20분에 250kg 짜리 폭탄 1발과 60kg짜리 폭탄 4발을 장비한 류조의 97식함상공격기 4대가 날아와 엑서터를 공격했다. 플로렌스해 전투를 경험한 타격부대의 대응은 확실히 좋아졌다. 함정들은 교묘하게 기동하여 조준을 방해했으며 대구경 대공포들은 일본기를 고공으로 몰아내어 정확한 폭격을 막았다. 엑서터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어서 원산항공대의 96식육상공격기 23대가 폭격을 가했다. 명중탄은 없었으나 지근탄으로 인하여 구축함 바커와 벌머의 함체 철판이 벌어져 침수가 일어났다.

오전 11시 30분에는 250kg 짜리 폭탄 1발과 60kg짜리 폭탄 4발을 장비한 류조의 97식함상공격기 7대가 다시 엑서터를 공격했다. 이번에도 명중탄은 없었으나 캐터펄트에 있던 왈루스 수상기가 지근탄에 피해를 입어 비행이 불가능해졌다.

아직도 일본함대와의 거리는 130km 에 가까웠다. 도먼 제독은 일본함대가 전투를 회피하면서 공습으로 타격부대를 약화시키려는 속셈임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타격부대가 일본선단에 피해를 입힐 기회는 없었다. 오후 12시 42분에 도먼 제독은 작전을 중단하고 탄종프리옥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퇴각하는 타격부대를 일본기가 계속 괴롭혔다.

쿠안탄을 이륙한 미호로 항공대의 96식육상공격기 27대가 오후들어 처음으로 공격했으나 타격부대는 적절한 회피와 대공포화로 피해를 면했다.
류조를 이함한 97식함공격기 6대가 오후 3시 29분에, 7대가 오후 4시 30분에 다시 엑서터를 공격했으나 역시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오후 7시에는 97식함상공격기 6대가 드루이터를 공격했으나 역시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가노야 항공대의 1식육상공격기 17대가 폭격했으나 역시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타격부대에게 2월 15일은 무척 힘든 하루였다. 아군의 항공엄호가 없는 상황에서 승조원들은 일본함대는 보지도 못한 채 하루종일 고속으로 미친듯이 변침을 반복하면서 일본기에게 쫓겨다녔다. 그나마 플로렌스해 전투의 경험 덕분에 적이 투입한 항공전력의 규모에 비해 피해가 적었다는 점이 위안이었다. 그러나 일본선단을 막을 희망이 사라지면서 수마트라 함락은 확정되었다.

15일 오후 2시 50분에 육군 주력을 실은 일본선단은 다시 남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팔렘방은 15일 저녁에 함락되었으며 18일에는 제3비행집단의 주력이 팔렘방 비행장에 진출했다. 이제 일본은 자바에서 지척인 곳에 비행장을 확보했으며 다음날인 19일부터 자바서부에 대한 항공격멸전을 시작했다.

일본기에 시달리면서 남하한 타격부대는 2월 16일 아침에 탄종프리옥에 도착했으나 항구가 너무 붐벼서 모두 입항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순양함 4척(드루이터, 트롬프, 엑세터, 호바트)과 상처를 입은 구축함 바커와 벌머만 오전 9시 52분에 입항했다. 순양함 자바, 네덜란드구축함 코테네어와 피에타인, 미국구축함 존D.에드워즈, 패럿, 필즈베리, 그리고 스튜어트는 수마트라 남쪽에 있는 반다르람풍으로 가서 마지막으로 연료보급을 받았다. 일본군이 수마트라에 상륙하면서 반다르람풍은 수마트라로부터의 탈출거점이 되어 있었으며 조만간 폐쇄될 예정이었다.

수마트라가 일본군 손에 넘어가면서 벨리퉁섬에 파견된 병력을 철수시켜야 했는데 헬프리히 제독은 내키지 않는 이 임무에 최소한의 전력만을 투입했다. 수송선 슬롯반더빌이 구축함 반네스의 호위 아래 벨리퉁섬으로 파견되었다. 이 미니선단은 벨리퉁섬에 무사히 도착하여 병력과 주민 다수를 싣고 17일 아침에 출항했다. 그러나 17일 오후에 모가미의 수상기가 이들을 발견했다.

17일 오후 2시 45분에 원산항공대의 96식육상공격기 15대가 날아와 슬롯반더빌을 폭격했다. 슬롯반더빌은 명중탄 여러 발을 얻어맞고 5분 만에 침몰했다. 3시 27분에는 류조를 이함한 97식함상공격기 10대가 반네스를 공격했다. 반네스는 미친듯이 구조요청을 발신하면서 도망다녔으나 오후 5시에 폭탄 3발을 연속으로 얻어맞고 2개로 쪼개져 순식간에 침몰했다. 반네스의 승조원 154명 중 68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고 86명이 구조되었는데 이중 52명은 음식이나 식수도 없이 92시간을 바다에서 떠돌다가 도르니에 Do-24비행정에 구조되었다. 반네스는 항해 중에 일본항공모함에 의하여 격침된 최초의 연합군 함정이다.
슬롯반더빌의 탑승자는 1,000명이 넘을 것으로 짐작할 뿐 정확한 숫자는 모른다. 살아남은 인원은 272명으로 대부분 네덜란드해군항공대가 구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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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하트 제독의 퇴장

영국구축함 익스프레스는 1942년 2월 6일에 보일러실에 화재가 나서 수리를 위하여 남아프리카로 떠났다. 이로써 동남아시아에서 연합군 함정 1척이 또 사라졌다.

일본기는 매일 오전 9시에서 10시 사이에 수라바야로 날아와 고공에서 폭격을 가했다. 네덜란드군의 경보는 항상 늦었기 때문에 제17추격비행대대(임시)의 P-40 워호크들은 번번이 늦게 출격하여 허탕을 쳤다.

2월 4일에 ABDA타격부대가 피해를 입으면서 마카사르로 접근하는 일본군을 수상함대로 공격하려는 시도는 일단 좌절되었다. 이제 남은 건 잠수함이었는데 마카사르에 가장 가까이 있던 것은 S-37이었다.

미해군의 S급 잠수함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건조되었으므로 나중에 건조된 함대형 잠수함에 비해 성능이 열악했다. S급 잠수함은 함대형 잠수함보다 어뢰발사관 숫자도 적고 사격통제 및 항법장치도 뒤떨어졌으며 항속거리도 짧았고 에어컨도 없었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장점도 있었다. 낡은 S급 잠수함에게는 신형인 마크14어뢰와 마크6자기기폭장치가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뢰성이 좋은 마크10 어뢰와 접촉식 신관을 장비하고 있었다.

2월 6일 저녁에 일본군의 마카사르공략부대가  켄다리의 스테어링만을 떠났다. 선단은 사세보연합특별육전대와 제5 및 제6설영반을 태운 수송선 6척(기나이마루, 난카이마루, 호코로쿠마루, 마츠에마루, 몬테비데오마루, 야마시모마루)과 급유선 샌클레먼트마루로 이루어져 있었다. 호위세력은 구보 규지 소장의 제1근거지부대로서 경순양함 나가라, 제8구축대(아사시오, 미치시오, 아라시오, 오시오), 제15구축대(하야시오, 구로시오, 오야시오, 나츠시오), 제21구축대(와카바, 하츠시모, 네노히), 제21소해대(제7, 제8호소해정), 제2구잠대(제13, 제14, 제15호구잠정)로 이루어져 있었다.

2월 7일 오전 1시 40분에 루시우스 채플 소령이 지휘하는 미국잠수함 스컬핀이 마카사르 침공선단을 발견하고 나가라에게 마크14어뢰 2발을 쏘았으나 1발은 조기 폭발해 버렸고 1발은 빗나갔다. 이제 침공선단과 마카사르 사이에는 제임스 뎀프시 대위의 S-37만이 있을 뿐이었다.

마카사르 근해를 초계하던 S-37은 2월 8일 해질녘에 접근하는 일본선단을 잠망경으로 발견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S-37은 부상하여 선단을 추적했으나 도저히 구축함의 호위망을 뚫을 수 없었다. 결국 뎀프시 대위는 수송선 공격을 포기하고 오후 8시 36분에 730m 앞을 일렬로 나란히 항진하는 일본구축함 4척에게 각 1발씩 어뢰를 쏘았다.

 

이 어뢰 중 1발이 제15구축대지휘관인 사토 도라지로 대좌의 기함 나츠시오에 명중했다. 굴뚝 사이를 직격한 어뢰가 기계실을 분쇄하자 굴뚝에서는 불꽃이 튀어나왔고 나츠시오는 함체 중앙이 6m나 뒤로 밀리면서 V자로 꺾였다. 
S-37은 즉시 잠항했다. 곧 일본구축함들이 몰려들어 폭뢰를 떨어뜨렸으나 S-37은 무사히 탈출했다.

사토 대좌는 사령기를 오야시오로 옮겼고 구로시오는 9일 새벽 2시부터 나츠시오를 예인했다. 그러나 오전 5시부터 풍랑이 거세지자 용골이 부러진 나츠시오는 견디지 못하고 2개로 쪼개져 2월 9일 오전 7시 10분에 마카사르에서 남쪽으로 35km 떨어진 해상에 침몰했다. 나츠시오의 사망자는 5명, 중상자는 6명이었으며 함장 나가이 스미타카 중좌를 포함한 생존자는 구로시오에게 구조되었다. 이로써 나츠시오는 미국잠수함에 의해 격침된 일본구축함 39척의 명단에 첫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마카사르는 2월 9일에 함락되었다. 약 8,000명의 일본군이 2개로 나뉘어 상륙하여 수비대를 압도했다. 일본군은 또다시 포로들을 3명씩 묶어서 다리 아래로 던져 학살했다. 

2월 10일 오전 2시 10분에 해군형 리버레이터인 LB-30폭격기 3대가 수상기모함 치토세를 폭격하여 폭탄 1발을 명중시켰으나 피해는 가벼웠다.

2월 11일에 일본구축함 야마카제가 마나도에서 동쪽으로 190km 떨어진 해상에서 부상한 상태의 미국잠수함 샤크를 발견하고 기습적으로 5인치 포탄 42발을 발사하여 격침했다.

2월 4일에 ABDA타격부대가 공습을 받은 이래 ABDAFLOAT 지휘관들 사이의 관계는 파탄으로 치달았고 그 결과 하트 제독은 고립되었다. 도먼 제독은 2월 5일 밤에 휴스턴과 마블헤드에 구축함 스튜어트와 존 D. 에드워즈를 호위로 붙여 칠라찹에 입항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신은 순다해협을 거쳐 바타비아의 외항인 탄종 프리옥으로 가서 헬프리히 제독을 만났다.

하트 제독은 연합타격부대가 마카사르 작전을 중지하고 칠라찹으로 철수했다는 사실을 반나절이 지나고서야 알았다. 피해를 입은 휴스턴과 마블헤드만 회항시키고 나머지 함대는 마카사르에 접근하는 일본선단을 공격할 것으로 생각했던 하트 제독은 분노했다. 그는 즉시 도먼 제독에게 전문을 보내어 연합타격부대를 이끌고 다시 북상하여 마카사르의 일본군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도먼 제독이 지정한 연합타격부대의 급유장소가 자바섬에서 남쪽으로 480km 나 떨어진 해역임을 알게된 하트 제독은 도먼 제독이 일부러 시간을 끈다고 생각하여 폭발했다.

하트 제독은 도먼 제독을 칠라찹으로 불렀고 거기서 두 사람은 격돌했다. 경력의 대부분을 해군항공대에서 보낸 도먼 제독은 전투기의 엄호를 받지 못하는 수상함대가 적의 제공권 하에서 활동하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말했다. 하트 제독도 적의 제공권 아래에 수상함대를 밀어넣는 것이 위험한 일이라는 건 인정했지만 상황이 급박하니 위험을 무릅써야한다고 말했다. 그는 적이 제공권을 쥔 해역에는 들어가지 않겠다는 소리는 곧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냐면서 도먼 제독을 몰아붙였다. 언쟁 끝에 하트 제독은 강압적으로 마카사르의 일본군을 공격하라고 명령했고 도먼 제독은 불만을 잔뜩 품은 채 명령을 받아들였다. 이 소식을 들은 헬프리히 제독은 노골적으로 도먼 제독을 옹호하면서 하트 제독을 비난했다.

이제 하트 제독은 고립무원이었다. 헬프리히 제독의 부추김을 받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당국은 런던과 워싱턴에 지속적으로 하트 제독에 대한 험담을 늘어 놓고 있었다. 영국 또한 ABDAFLOAT의 모든 함정을 선단 호송에 투입하려는 웨이벌 장군의 의도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하트 제독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부하인 글래스포드 제독과는 원래 사이가 나빴던 데다가 발릭파판 해전을 전후하여 완전히 틀어졌다.

하트 제독은 워싱턴으로부터도 지원을 받지 못했다. 처음부터 동남아시아에서 발을 빼고 싶어했던 미해군 수뇌부는 하트 제독이 ABDAFLOAT사령관이 되자 권위를 세워주기는 커녕 나중에 빼내기 쉽도록 일부러 약화시켰다. 1월 25일에 하트 제독은 아시아함대의 지휘권을 글래스포드 제독에게 물려주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강력하게 항의하여 겨우 철회시켰다. 하지만 2월 초에 미해군 수뇌부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의 방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확실해진 이상 네덜란드 해역을 지킬 책임은 네덜란드인에게 넘기고 발을 뺄 때가 되었다고 결정했다. 미함대총사령관 어니스트 킹 제독은 2월 5일에 하트 제독에게 전문을 보내어 건강을 이유로 ABDAFLOAT사령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고려하라고 강력하게 권고했다.

하트 제독은 이후로도 1주일을 더 버텼으나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결국 그는 2월 12일에 웨이벌 장군에게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을 요청했다. 웨이벌 장군은 14일에 사임을 받아들이고 헬프리히 제독을 ABDAFLOAT사령관에 임명했다. 하트 제독은 2월 15일에 자바를 떠났으며 다음날 헬프리히 제독이 정식으로 ABDAFOAT사령관이 되었다.

하트 제독은 무능해서 교체된 것이 아니었다. 비록 하트 제독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으나 적어도 능력은 인정받고 있었으며 대령 이하의 부하들은 대부분 그를 믿고 따랐다. 하트 제독이 떠나고 대신 헬프리히 제독이 ABDAFLOAT사령관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미국함정의 함장과 승조원들은 대부분 격렬하게 반발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미래를 걱정했다. 그들은 헬프리히 제독이 자신의 전공을 쌓기 위하여 부하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고 생각했으며 이는 하트 제독의 평가와 일치했다. 하트 제독이 마지막까지 ABDAFLOAT사령관직을 고수하려 했던 가장 큰 이유도 부하들이 헬프리히 제독의 지휘를 받지 않도록 하려던 것이었다.

 

하트 제독의 퇴장과 함께 1902년부터 40년간 존속했던 아시아함대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동남아시아의 미국 함정들은 이제 아시아함대가 아니라 남서태평양 미해군부대(US Naval Forces, Southwest Pacific)라는 볼품없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사령관 글래스포드 제독은 중장으로 승진했으나 대장이 총사령관을 맡던 아시아함대보다 확실히 급이 떨어졌다.  동남아시아에서 패배한 후 살아남은 남서태평양 미해군부대 소속 함정들은 대부분 호주로 철수하여 맥아더의 지휘 아래 싸움을 이어 갔으며 1943년 3월 15일에 창설된 제7함대에 흡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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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마블헤드 탈락

1942년 2월 5일에 미국구축함 폴 존스는 칠라찹으로 향하는 수송선 티도레를 호위하고 있었다. 이 미니 선단이 오전 11시에 숨바와섬 남쪽을 항해하고 있을 때 북동쪽으로부터 일본제1항공대의 육상공격기 23대가 나타났다. 켄다리2 비행장을 상실한 결과 이제 소순다열도의 남쪽 해상도 일본기의 공습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했다. 일본기가 나타나자 티도레는 침몰을 면하기 위하여 해안에 돌진하여 좌초했다.
티도레를 보호해야 할 의무에서 벗어난 폴 존스의 함장 존 후리헌 소령은 일본기가 폭격을 가할 때마다 고속으로 변침하면서 도망다녔다. 2시간에 걸친 숨바꼭질 끝에 폴 존스는 일본기가 7번에 걸쳐 투하한 폭탄을 모두 피했으며 대공포로 반격을 가하여 8대에 피해를 입혔으나 1대도 격추시키지는 못했다.
일본기가 사라지자 폴 존스는 오후 3시 55분에 티도레에게 다가가 승조원을 구한 다음 배를 파괴하고 칠라찹으로 향했다.
제1항공대의 육상공격기들은 폴 존스를 오마하급 경순양함으로 착각하여 집중공격을 가했다. 이날 가노야 항공대의 육상공격기 23대와 다카오 항공대의 육상공격기 8대는 발리섬의 덴파사르 비행장을 공격했고 제1항공대의 육상공격기 23대는 폴 존스가 감당해 준 덕분에 칠라찹으로 후퇴하고 있던 연합타격부대는 전날에 이은 추가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클렘슨급 구축함 폴 존스(DD-230). https://en.wikipedia.org/wiki/USS_Paul_Jones_(DD-230)

 

휴스턴은 2월 5일 정오에 칠라찹에 입항했다. 부상자는 욕야카르타 부근의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수리를 위한 필수 인원을 제외한 모든 승조원은 6일 오전에 칠라찹의 공동묘지에서 거행된 전사자 48명의 장례식에 참가했다. 장례식은 예포 21발을 비롯하여 최대한 예우를 갖추어 진행되었다. 이후 휴스턴의 승조원들은 갑판에 뚫린 큰 구멍과 망가진 메인마스트, 그리고 내부가 전소되어 쓸모없어진 3번 포탑을 수리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수리를 위하여 미국으로 떠나버린 보이시가 휴스턴을 위하여 칠라찹에 제대로 작동하는 5인치 대공포탄을 내려놓고 갔다는 점이었다.

휴스턴에 이어 마블헤드가 입항했다. 마블헤드의 항해는 그 자체로 생존과의 싸움이었다. 보수반원들이 왼쪽으로 완전히 꺾인 키를 왼쪽으로 9도 꺾인 지점까지 푸는데 성공했으나 키를 움직일 수는 없었다. 따라서 마블헤드는 왼쪽 프로펠러의 속력을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오른쪽 프로펠러의 속력을 조절함으로써 방향 조절을 할 수 있었으나 이런 방식은 어렵고 느리고 고된 일이었다. 마블헤드의 항적도는 이런 식으로 방향을 조절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마블헤드의 항적도. History of U.S. Naval Operations in World War II, Vol. III: The Rising Sun in the Pacific, 1931--April 1942 P.302

 

더 큰 문제는 지근탄 때문에 함수에 벌어진 틈으로 바닷물이 계속 들어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블헤드의 펌프가 물이 들어오는 속력을 따라잡지 못했으므로 부상자나 최소한의 필수 인원을 제외한 모든 승조원이 조를 짜서 양동이로 물을 퍼내야했다. 일단 양동이를 나르는 줄에 들어간 승조원은 식사나 수면은 커녕 화장실 갈 틈도 없이 계속 양동이를 날라야했는데 이짓을 교대로 48시간 동안 해야만 했다. 마블헤드는 승조원의 근성 덕분에 침몰을 면했다. 칠라찹에 입항할 당시 격실 30개가 침수당한 마블헤드의 함수는 함미보다 2.4m 나 깊이 잠겨 있었다.  마블헤드는 도착하자마자 중상자 34명을 상륙시켜 욕야카르타의 페트로넬라 병원으로 이송했으며 군의관 코리돈 와셀 소령이 파견되어 부상자를 돌보았다.

칠라찹의 부유선거는 마블헤드를 수용하기에는 너무 작았다. 그러자 네덜란드해군의 기술자가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대담하고 독창성이 넘치는 이 기술자는 마블헤드가 전방 함체만 부유선거에 들이민 상태에서 선거를 띄워 함수를 들어올렸다. 평소같으면 당장 군사재판감인 위험천만한 짓이었으나 당시에는 마블헤드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일단 마블헤드의 함수가 물 밖으로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부유선거의 인원들이 우루루 달라붙어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벌어진 철판 사이의 틈을 때웠다. 불행하게도 후방 함체에는 이런 꼼수를 부릴 수 없었기 때문에 키는 수리할 수 없었다. 또한 임시로 땜빵한 함수도 완전하게 수밀이 되지 않아 여전히 바닷물이 새어 들어왔다. 하지만 양이 적어서 펌프로 충분히 퍼낼 수 있었으므로 이제 승조원들이 양동이로 물을 퍼낼 필요가 없었다.

응급수리를 마친 마블헤드는 잠수모함 오터스의 호위 아래 2월 13일에 칠라찹을 떠나 실론의 트링코말리로 향했다. 상처입은 순양함을 호위하는 일은 잠수모함에게는 다소 엉뚱한 임무였으나 하트 제독에게는 마블헤드의 호위를 위하여 전투함정을 빼낼 여력이 없었다. 마블헤드는 실론을 거쳐 남아프리카의 시몬스타운에서 대서양을 건널 수 있을 정도로 수리를 받은 다음 브라질을 거쳐 5월 4일에 뉴욕에 도착했다. 브루클린 조선소에서 수리를 마친 마블헤드는 10월 15일에 일선에 복귀했다.

오마하급 경순양함 CL-12 마블헤드. https://en.wikipedia.org/wiki/USS_Marblehead_(CL-12)

 

마블헤드의 철수가 기정사실화되면서 휴스턴의 거취를 결정할 필요가 있었다. 휴스턴의 3번 포탑은 내부가 전소되어 쓸모가 없었다. 수리를 위해서는 미국으로 가야했으나 보이시에 이어 마블헤드마저 탈락한 당시 상황에서 휴스턴은 아시아함대 유일의 순양함이었으며 3번 포탑을 뺀 6문의 8인치 주포만으로도 아시아함대 최강의 함정이었다.

 

노샘프턴급 중순양함 CA-30 휴스턴. https://en.wikipedia.org/wiki/USS_Houston_(CA-30)

 

하트 제독은 칠라찹으로 와서 휴스턴을 시찰한 후 부두에서 함장 룩스 대령과 단둘이 오랜 시간 이야기했다. 여기서 3월에 브루클린급 경순양함인 피닉스가 아시아함대에 증원될 때까지 휴스턴이 잔류하기로 결정되었다. 하트 제독은 휴스턴에게 선단호송만 맡길 것이며 자바와 소순다열도의 북쪽 해상으로는 파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로부터 한달 후에 벌어진 순다해협 해전에서 휴스턴이 침몰하자 당시의 잔류 결정에 대해 비난이 일었다. 그러자 하트 제독은 룩스 함장에게 잔류를 강요하지 않았으며 함장을 비롯한 모든 승조원이 잔류를 강력하게 원했다고 주장했다. 룩스 대령은 전사했고 공식 기록이나 대화 내용을 들은 목격자가 없어 교차 검증이 불가능하지만 승조원들이 기억하는 당시 휴스턴 함내의 분위기로 보아 하트 제독의 주장은 사실일 것이다.

기중기를 사용하여 좌현으로 돌려져 있던 휴스턴의 3번 포탑을 함체 후방을 보도록 돌리고 폭탄의 파편에 맞아 구멍이 숭숭 뚫린 옆면을 판자로 가린 후 도색을 하자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포탑처럼 보였다. 갑판에 뚫린 구멍은 철판을 덧대어 용접하고 내부에는 철도레일을 대어 보강했다. 이로써 휴스턴은 다시 전투에 나설 준비가 되었다.

ABDAFLOAT는 한꺼번에 여러 척을 잃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소모되고 있었다. 보이시와 마블헤드처럼 아예 탈락하기도 했고 휴스턴이나 엣솔처럼 피해를 입고 전력이 약화된 상태로 잔류하기도 했다. 보충은 없었다. 이는 ABDAFLOAT 에 공통된 상황으로 전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의 해군인 아시아함대의 처지도 본국이 점령되어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였던 네덜란드해군과 다를 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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