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발릭파판 해전(2) - 공격

1942년 1월 24일 새벽 2시 35분에 발릭파판으로 접근하던 미국구축함열의 선두에 선 기함 존 D. 포드의 견시가 2,700m 전방에서 일본구축함 4척이 탐조등을 켠 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침로를 가로지르는 것을 발견했다. 모두들 긴장하여 발사명령을 기다렸으나 탤벗 중령은 침로를 오른쪽으로 약간 틀어 325도 방향으로 북상함으로써 일본구축함열의 뒷쪽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가장 뒤에 있던 일본구축함이 미국구축함열을 발견하고 청색등으로 소속을 물었다. 모두들 이번에야말로 전투가 벌어질 것으로 각오했으나 탤벗 중령이 깔끔하게 신호를 무시하고 그대로 북상하자 일본구축함도 아무일 없는듯이 제 갈길을 갔다. 구축함의 숫자와 조우 장소로 미루어 볼 때 미군이 만난 일본구축함들은 제2구축대일 가능성이 크지만 일본측에는 이 조우와 관련한 기록이 없다.

새벽 2시 46분이 되자 왼쪽으로 표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맹렬하게 불타는 해안을 배경으로 일본수송선들이 뭍에서 8km 정도 떨어져 남서쪽에서 북동쪽 방향으로 2줄로 정박해 있었다. 호위함정은 초계정 3척(제36, 제37 및 제38호초계정,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모미급 구축함을 개조한 것), 구잠정 3척(제10, 제11 및 제12호구잠정), 그리고 소해정 4척(제15, 제16, 제17 및 제18호소해정)이 전부였다. 강력한 일본해군의 구축함들은 외곽 경계를 맡고 있었고 경순양함 나카는 선단의 북동쪽 해상을 초계하고 있었다.  제59구축함분대는 존 D. 포드, 포프, 패럿, 폴 존스의 순서로 단종진을 이룬 채 고속으로 정박지에 뛰어들었다.

(발릭파판 해전 초기 상황. http://www.microworks.net/pacific/battles/Balikpa2.jpg)

 

이제 제59구축함분대의 함장들은 명령에 따라 각자 표적을 골라잡아 어뢰를 발사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발사한 것은 3번째로 돌입한 패럿이었다. 패럿은 왼쪽에 보이는 일본수송선을 향하여 3발의 어뢰를 발사했다. 수송선은 불타는 해안을 배경으로 뚜렷한 실루엣을 보이고 있었으며 움직이지도 않았으므로 완벽한 표적이었다. 그러나 어뢰가 목표에 도달할 시간이 되었어도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다. 

2분 후 패럿은 우현 900m 거리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일본함정을 발견하고 어뢰 5발을 발사했으며 동시에 포드도 1발을 발사했다. 2시 57분에는 존스가 다시 1발을 발사했다. 미군 승조원들은 이 배를 구축함 또는 순양함이라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700톤급 소해정인 제15호소해정이었다. 제15호소해정을 노린 7발의 어뢰는 모두 빗나갔다. 

잠수함 탐색에 온 신경을 기울이면서 남동쪽으로 6노트의 속력으로 항진하던 제15소해정은 새벽 2시 50분에 전방의 연기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함영을 보았다. 함영이 고속으로 접근하자 굴뚝 4개가 보였으므로 처음에는 나카로 생각했으나 같은 모양의 함영이 줄줄이 나타나자 적이라고 판단했다. 3분 후 제15호소해정은 접근하는 어뢰의 항적을 발견하고 기겁하면서 회피했으며 그동안 미국구축함들은 북서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클렘슨급 구축함 존 D. 포드. https://en.wikipedia.org/wiki/USS_John_D._Ford_(DD-228)
 

(센다이급 경순양함 나카. https://en.wikipedia.org/wiki/Japanese_cruiser_Naka)

 

이제 시간은 오전 3시가 되었고 미국구축함들은 일본수송선열의 북쪽 끝에 도달했다. 탤벗 중령은 우현으로 변침하라고 지시했다. 한바퀴 돌아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일본수송선들을 공격할 것이었다. 이때 패럿은 함수 우현쪽으로 보이는 적의 수송선을 향하여 3발의 어뢰를 발사했다. 2분 후 1발의 어뢰가 안쪽열의 가장 북쪽에 있던 3,519톤짜리 수송선 스마노우라마루의 우현에 명중했다. 기뢰와 폭뢰를 잔뜩 싣고 있던 스마노우라마루는 대폭발을 일으키면서 굉침당했다.  스마노우라마루의 북쪽에 있던 제16호소해정이 구조를 위하여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다가 연기 속에서 남쪽으로 쏜살같이 달리는 정체불명의 함영을 보았다. 제16호소해정은 불과 5분 후에 현장에 도착했으나 스마노우라마루는 이미 침몰한 후였으며 생존자는 9명 뿐이었다. 

이제 일본수송선과 호위함정은 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그들은 부산하게 신호를 주고 받았는데 일부는 미국구축함에게 신호를 보내기도 했다. 미국구축함을 처음 발견했던 제15호소해정은 스마노우라마루가 피격되자 3시 10분에 나카에 무전을 보내어 정박지에 적의 수상함대가 침투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제4수뢰전대 사령관 니시무라 쇼지 소장은 믿지 않았다. 그는 추적 중인 잠수함이 다시 공격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3시 28분에 적 잠수함에 대한 경계를 엄중하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발릭파판 해전상황도. History of U.S. Naval Operations in World War II, Vol. III: The Rising Sun in the Pacific, 1931--April 1942, P.287)

 

이제 오른쪽으로 한바퀴 돈 미국구축함들은 다시 남하하면서 바깥열의 수송선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포프는 오전 3시 6분에 오른쪽으로 보이는 적의 수송선(타츠가미마루)를 향하여 5발의 어뢰를 발사했다. 2분 후인 3시 8분에는 패럿이 1발을, 다시 2분 후인 3시 10분에는 존스가 1발을 같은 수송선에게 발사했다. 이 공격을 미국구축함 사이에 목표 할당이 제대로 되지 않아 불운한 하나의 표적에 여러 발의 어뢰를 낭비한 사례로 볼 수도 있으나 이때는 7발의 어뢰가 모두 필요했다. 7발 중 1발만이 명중했던 것이다. 탄약을 운반하던 일본해군의 7,064톤짜리 운송선인 타츠가미마루는 전날 오후에 네덜란드 공군의 공습에서 소형폭탄 1발을 얻어맞고도 무사히 살아남았으나 이번에는 그런 행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어뢰의 명중으로 발생한 화재때문에 적재한 탄약이 유폭되면서 타츠가미마루는 30분 만에 대폭발과 함께 굉침되었다.

오전 3시 14분에 선두의 존 D. 포드는 안쪽열의 수송함을 공격하기 오른쪽으로 선회했으며 나머지 구축함들도 뒤를 따랐다. 5분 후인 3시 19분에 포프는 왼쪽으로 1,800m 거리에서 적의 구축함으로 보이는 함영을 발견하고 어뢰 2발을 발사했으며 뒤따르던 패럿도 동시에 3발을 발사했다. 포프와 패럿이 공격한 함정은 제1차 세계대전형 구축함을 개조한 제37호초계정이었다. 몇 시간 전에 K-ⅩⅧ로 부터 어뢰 1발을 얻어맞고 대파되어 겨우 물에 떠있던 제37호초계정은 앞쪽에 2발, 뒤쪽에 1발 등 3발의 어뢰를 추가로 얻어맞고 맥없이 침몰했다. 사상자는 35명이었다.

오전 3시 22분에 선두의 포드와 후미의 존스는 5,175톤짜리 구레타케마루를 발견하고 동시에 어뢰를 1발씩 쏘았다. 이미 시동을 걸고 남쪽으로 도망치고 있던 구레타케마루는 2발의 어뢰를 모두 피했다. 그러자 탤벗 중령은 구축함열에서 왼쪽으로 선회하여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3분 후인 3시 25분에 포프가 2발의 어뢰를 발사하여 1발을 구레타케마루의 우현에 명중시켜 격침했다.

이제 구축함열은 일본수송선의 남쪽에서 원을 그리면서 왼쪽으로 돌아 다시 북상하기 시작했다. 이제 선두의 포드를 제외한 3척은 어뢰를 소진한 후였다. 탤벗 중령은 뒤따르던 3척의 구축함에게 함포로 적의 수송선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시야가 나빴으므로 패럿이 조명탄을 발사했으나 여전히 표적을 확인하기 힘들었다. 3척의 구축함은 열심히 함포사격을 가했으나 포격에 의한 일본군의 피해는 가벼웠다.

오전 3시 30분에 제36호초계정이 미국구축함들을 발견하고 적의 순양함 4척을 발견했다고 보고했으나 니시무라 소장은 믿지 않았다. 그는 38분에 제36호초계정에게 경순양함 나카와 제2구축대를 보고 착각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러자 자신감을 잃은 제36호초계정은 42분에 착각한 것 같다고 답했다.

북상하던 미국구축함들은 오전 3시 35분에 북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바깥열의 일본수송선 사이를 지나 안쪽열로 파고들었다. 4분 후인 오전 3시 39분에  포드가 갑자기 왼쪽으로 크게 꺾으면서 속력을 급격히 줄였는데 원인은 명확하지 않다. 나중에 포드의 포술장은 가라앉는 일본수송선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진술했는데 당시 포드의 침로상에는 침몰 중이던 일본수송선은 없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포드의 급격한 감속은 어뢰를 다 써버린 나머지 구축함들이 이탈하는 계기가 되었다. 함열의 3번째와 4번째에 있던 패럿과 폴 존스는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오른쪽으로 변침한 다음 원을 그리면서 남쪽으로 선회하여 전장을 이탈했다. 포드의 바로 뒤를 따르던 포프는 일단 왼쪽으로 변침했으나 곧 오른쪽으로 변침한 후 속력을 크게 줄인 포드를 앞질렀으며 이어서 역시 원을 그리면서 남쪽으로 선회하여 패럿과 폴 존스를 따라 전장을 이탈했다. 

포드의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잠시 후 포드는 다시 증속하면서 안쪽열에 다가가 오전 3시 46분에 마지막 남은 어뢰 2발을 양쪽에 보이는 수송선에게 1발씩 발사했다. 오른쪽으로 발사한 어뢰는 빗나갔으나 왼쪽으로 발사한 어뢰는 6,988톤 짜리 쓰루가마루에 명중했다. 이미 K-ⅩⅧ의 어뢰 1발을 맞아 빌빌거리면서 겨우 떠있던 쓰루가마루는 포드의 어뢰를 맞고 그대로 침몰했다. 구레다케마루와 쓰루가마루의 전사자는 합쳐서 약 30명이었다.

포드의 오른쪽에 있던 아사히마루는 무장하고 있었다. 아사히마루의 포수는 유능했으며 포드가 시야에 들어오자 계속 포격을 가하여 탄착점을 점차 접근시켰다. 마침내 협차에 성공한 아사히마루는 포드가 마지막 어뢰를 발사한 지 1분 후인 3시 47분에 포탄 1발을 포드의 후방 갑판실에 명중시켰다. 이 포탄이 주변에 있던 조명탄에 불을 붙여 포드의 후방 함체에서는 폭죽놀이하듯 눈부신 불꽃이 솟아올랐다. 용감한 포드의 수병들이 달려들어 30초 내로 불타는 조명탄을 전부 바다에 던짐으로써 피해 확산을 막았다. 이 과정에서 4명의 수병이 다쳤으나 경상이었으며 함체의 피해도 가벼웠다.

포드는 아사히마루에 포격을 가하여 선미 쪽에 여러 발의 명중탄을 내면서 50명의 사상자를 발생시켰으며 아사히마루 뒤에 있던 타마가와마루에게도 10발의 포탄을 명중시켜 6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이제 해안선이 눈앞이었으므로 포드는 왼쪽으로 선회헀다.

포드는 원을 그리면서 다시 일본수송선열에 접근했으나 이제 물러날 때였다. 어뢰는 떨어졌으며 동료 구축함들은 이미 이탈했다. 포드의 함장 제이컵 쿠퍼 소령이 철수를 건의하자 탤벗 중령은 4인치 주포로 좀 더 피해를 주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고 받아들였다. 오전 4시에 쿠퍼 소령은 침로를 남쪽으로 꺾고 기관실에 최대한 속력을 내라고 명령했다. 당시 포드는 32노트의 속력으로 철수했는데 이는 시험항해 이후 포드가 내었던 최고 속력이다.
일본군의 추격은 없었다. 니시무라 소장은 여전히 적의 수상함대가 정박지를 공격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포드는 먼저 이탈했던 구축함 3척과 오전 6시 42분에 만났으며 8시에는 후방에서 대기 중이던 마블헤드와 만났다.

탤벗 중령에게는 힘든 작전이었다. 심한 치질로 인한 빈혈 때문에 쇠약해져 있던 그는 지속적인 스트레스와 수면부족에 시달린 끝에 작전을 성공리에 마치자 긴장이 풀리면서 체력에 한계가 왔다. 탤벗 중령은 함교에서 갑판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다리가 풀리면서 쓰러져 의무실로 실려갔다.

수라바야에 도착한 제5기동부대는 네덜란드해군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개전 이래 미해군의 지지부진한 전과를 보면서 의혹과 경멸의 눈길을 보내던 네덜란드해군은 이제 친근하고 협조적으로 변했다.

발릭파판 해전을 계기로 일선에서는 미해군과 네덜란드해군의 사이가 돈독해졌으나 고위 지휘관들끼리는 그렇지 못했다. 헬프리히 중장은 하트 대장에 대한 비난을 멈추지 않았으며 원래 소원했던 하트 대장과 글래스포드 소장의 관계는 더 악화되었다. 하트 제독과 글래스포드 제독은 진주만 기습 이전부터 중국의 일본군을 어떤 태도로 대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맞서 사이가 나빴는데 발릭파판 해전을 전후하여 결정적으로 틀어졌다.

하트 제독은 케마 공략이 중단된 뒤에 글래스포드 제독이 제5기동부대를 굳이 남쪽의 티모르 근해까지 철수시키자 깜짝 놀랐고 결국 다시 북상하던 중에 보이스가 암초에 부딪히자 크게 불만을 품었다. 만일 제5기동부대를 좀 더 북쪽에 대기시켰다면 보이스가 탈락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반면 글래스포드 제독은 하트 제독이 지휘 체계를 무시하고 자신을 건너뛰어 탤벗 중령에게 직접 공격명령을 내리자 격분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그는 일기에 자신이나 하트 제독 둘 중 한명은 떠나야 할 것이라고 적었다.

발릭파판 해전은 승전임에는 틀림없으나 전과가 빈약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미국구축함 4척은 적의 강력한 수상함대가 자리를 비운 틈에 기습에 성공하여 불타는 화염을 배경으로 나란히 늘어서서 움직이지 않는 적의 수송선에 대하여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근거리에서 어뢰공격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송선 12척 중 4척을 격침하는데 그쳤다.

원인을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탤벗 중령은 공격시 너무 고속으로 기동하여 어뢰의 정확도가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또한 제15호소해정이나 타츠가미마루의 예에서 보듯이 표적 할당에 실패하여 일부 표적에 너무 많은 어뢰가 낭비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하트 제독은 전술상의 그런 사소한 실수는 근본 원인이 아니라고 보았다. 하트 제독이 지목한 가장 큰 원인은 어뢰의 결함이었으며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학자들도 동의한다.

발릭파판 해전은 태평양전쟁 개전 이래 연합군이 최초로 경험한 해상전투였으며 미해군으로서는 1898년 이래 최초로 경험한 해상전투였다. 이 해전의 승리는 개전 이래 잇따른 패배로 의기소침해 있던 연합군의 사기를 크게 끌어올렸으며 수상함대로 일본군의 남진을 저지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하트 제독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하지만 좀 더 넓게 보았을 때 이 승리는 일본군의 진격을 단지 하루 정도 지연시키는 효과밖에 없었다는 일본 측의 냉정한 평가도 사실이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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