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수라바야 공습

셀레베스에서 군사적으로 가장 가치있는 표적은 섬의 남동쪽에 자리잡은 켄다리였다. 켄다리의 남쪽에 있는 넓고 잔잔한 스테어링만은 대규모 함대를 위한 이상적인 정박지였다.
또한 켄다리에서 남서쪽으로 19km 떨어진 아모이토에 있는 켄다리2 비행장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좋은 비행장 중의 하나였다. 활주로는 크고 포장되어 있었으며 격납고와 주기장 및 비행기의 분산을 위한 공간도 충분했다. 항공유 및 탄약을 보관할 수 있는 창고도 많았고 막사의 시설은 훌륭했다. 
문제는 운용할 비행기가 없다는 것이었다. 전쟁 초기에는 B-17 폭격기의 전방집결지로 사용되었으나 이후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방어가 빈약했다는 점이었다. 켄다리2 비행장을 지키던 부대는 400명으로 이루어진 현지인 부대로서 충성심이 의심스러웠으며 네덜란드인 장교는 2명 밖에 없었다.

켄다리를 침공한 일본군은 마나도와 마찬가지로 제5전대사령관 다카기 다카오 소장이 지휘하는 동방공략부대로서 참가 병력도 낙하산부대를 제외하고는 마나도 점령과 같았다. 구레제1특별육전대를 실은 수송선들은 제1근거지부대의 호위를 받았다. 구보 규지 소장이 지휘하는 제1근거지부대는 경순양함 나가라, 제15구축대(나츠시오, 구로시오, 오야시오 하야시오), 제16구축대(유키카제, 도키츠카제, 하츠카제, 아마츠카제)로 이루어져 있었다. 침공선단은 1월 24일 새벽 2시에 켄다리만에 도착했으며 4시 30분에 상륙했다. 네덜란드 수비대는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달아났으며 일본군은 12시간 만에 켄다리2 비행장을 점령했다. 공포에 질린 수비대가 파괴도 하지 않고 달아나는 바람에 일본군은 11만 리터가 넘는 항공유를 거저 얻었는데 이건 불과 이틀전에 미국의 수상기모함 차일드가 천신만고 끝에 도착하여 양륙한 것이었다. 일본군의 피해는 부상자 2명이었다.

이로써 일본군은 수라바야까지 닿는 거리에 있는 네덜란드령동인도제도에서 가장 좋은 비행장을 얻었다. 다음날인 25일에 제3항공대의 제로기 25대와 및 98식육상정찰기 5대가 도착했고 27일에는 제21항공전대사령부와 가노야 항공대의 96식 및 1식육상공격기 27대가 전개했다.

발릭파판 해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발릭파판을 점령했으며 발릭파판비행장에도 제로기가 진출했다.

1월 31일에는 일본군이 암본을 점령했다. 암본에 주둔 중이던 제10정찰비행단과 호주제2비행대대는 정비를 맡은 네덜란드 지상요원과 함께 탈출했다. 그러나 네덜란드군과 호주군으로 이루어진 암본 수비대에게는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해작업 중 네덜란드군이 설치한 기뢰에 접촉하여 제9호소해정이 침몰하고 제11 및 제12호소해정이 피해를 입자 화가 난 일본군은 라하 비행장에서 포로 300여명을 참수했다.

일본군이 발릭파판, 켄다리, 그리고 암본에 비행장을 확보하면서 자바에 비행기를 증원하는 일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당시 미국의 B-17, LB-30(B-24의 해군형), P-40 의 생산량은 부족하지 않았으나 태평양을 건너 이것들을 운반하는 일은 또다른 문제였다. 그나마 항속거리가 긴 B-17은 섬들을 징검다리 삼아 스스로 날아올 수 있었으나 항속거리가 짧은 P-40은 꼼짝없이 수송선에 실려 태평양을 건너야 했다. 1942년 1월 말까지 호주에 도착한 P-40 은 112대였으며 160대는 태평양을 건너오는 중이었다.
호주에 도착한 P-40은 루이스 브레러튼 장군이 지휘하는 극동육군항공대 휘하의 제17추격비행대대(찰스 스프라그 소령)에 배속되어 자바로 이동했는데 그 과정도 험난했다. 호주 남동부의 시드니에 도착한 P-40은 우선 호주 남서부의 퍼스로 날아간 다음 북서쪽의 다윈까지 날아갔다. 이후 티모르, 발리의 뎀페사르 비행장을 거쳐 수라바야에 도착했는데 몹시 힘든 여정이었다. 첫번째로 출발한 17대 중에 13대만이 수라바야에 도착했다. 두번째는 16대가 출발하여 8대만이 도착했다. 나머지는 추락하거나 실종되거나 낙오되었다. 그러자 ABDA사령부의 부사령관인 조지 브렛 장군의 요청에 따라 수상기모함 랭글리가 P-40을 자바로 운반했다.

하트 제독은 발릭파판 해전의 승리를 반복하고자 1월 29일에 터빈 수리를 마친 마블헤드와 구축함 4척을 다시 마카사르 해협으로 파견했지만 이틀 후에 일본정찰기에게 들키자 철수시켰다.
ABDAFLOAT의 모항으로서 다윈은 불편했다. 일단 전장에서 너무 먼데다가 항내의 조류가 강해서  항구로서의 조건도 나빴다. 따라서 하트 제독은 구축모함 블랙호크, 잠수모함 홀랜드와 오터스, 급유함 트리니티를 구축함 알덴과 엣솔의 호위 아래 자바 남해안의 칠라찹으로 파견했다.

2월 2일에 발릭파판을 이륙한 타이난 항공대의 제로기 17대와 정찰기 1대가 수라바야 부근에 있는 마오스파티 비행장을 기습했다. 비행장의 피해는 대단치 않았으나 귀중한 레이더 요원을 가득 태운 B-18 폭격기 1대가 격추당하여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또한 미육군항공대 제7폭격비행전대의 신임 지휘관인 오스틴 스트로브 소령이 추락한 폭격기의 생존자를 구하려다가 중화상을 입고 이튿날 숨졌다.

다음날인 2월 3일에 츠카하라 니시조 중장의 제11항공함대는 동부 자바에 대하여 항공격멸전을 시작하여 수라바야에 대대적인 폭격을 가했다. 켄다리2 비행장에서 72대의 육상공격기(제1차 공격대 타카오 항공대 26대, 제2차 공격대 가노야 항공대 27대, 제3차 공격대 제1항공대 19대)가 차례로 이륙하여 수라바야, 마디운, 그리고 말랑의 비행장을 공격했다. 제로기 44대(17대는 타이난 항공대, 27대는 제3항공대 소속)가 폭격기를 보호했고, 97식사령부정찰기 3대(1대는 타이난 항공대, 2대는 제3항공대 소속)가 항로 안내와 피해평가를 맡았다.

(97식사령부정찰기. https://en.wikipedia.org/wiki/Mitsubishi_Ki-15)

 

수라바야 부근의 대공포는 네덜란드육군이 운용했다. 수라바야의 항구와 시가지에는 8문의 80mm 대공포가 배치되어 있었다. 페락 비행장에는 105mm 대공포 4문과 40mm 보포스 대공포 4문이 있었으며 모로크렘방간 수상기 기지에는 20mm 기관포 2문이 있었다. 대공포들은 신형이고 효과적이었으나 대규모 공습에 저항하기에는 숫자가 너무 부족했다. 페락 비행장과 모로크렘방간 수상기 기지에는 12.7mm 및 7.7mm 기관총도 있었으나 기총소사를 위하여 초저공으로 비행하는 적기에게만 유효했다.

네덜란드와 미군의 전투기는 용감하게 저항했다. 페락 비행장에서는 구식의 커티스 호크 전투기 7대와 역시 구식의 CW-21B 데몬 전투기 12대가 이륙하여 제로기에게 용감하게 맞섰다. 이들은 제로기 3대와 97식사령부정찰기 1대를 격추했으나 그 댓가로  호크 5대와 데몬 7대가 격추되었다. 은고로 비행장에 전개한 미육군항공대의 제17추격비행대대(임시)는 네덜란드군으로부터 경보를 늦게 받았다. 뒤늦게 이륙한 7대의 P-40이 폭격을 마치고 돌아가는 일본기를 추격하여 제로기 1대를 격추했으며 반격을 받아 P-40 전투기 1대가 격추되었다. 

수라바야 해군기지와 페락 비행장은 96식 육상공격기의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며 제로기들은 바다에 떠있던 카탈리나에게 기총소사를 가했다. 마디운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말랑의 싱고사리 비행장에서는 제19폭격비행전단의 B-17들이 탈출하다가 활주로에서 제로기의 기총소사를 받았다. 5대는 지상에서 파괴되었고 1대는 겨우 이륙했으나 말랑에서 남쪽으로 16km 떨어진 지점에서 격추되었으며 또다른 1대는 큰 피해를 입고 보르네오 남쪽의 아렌즈섬에 불시착했다.

2월 3일 하루동안 ABDAIR 는 전투기 16대, 비행정 3대, 그리고 B-17 폭격기 2대를 공중전에서 잃었고, B-17 폭격기 5대를 지상에서, 비행정 13대를 계류 중에 잃었다. 일본군의 손실은 제로기 4대, 97식사령부정찰기 1대였다. 이로써 동부 자바의 제공권은 하루만에 일본군에게 넘어갔다. 살아남은 네덜란드 전투기 3대는 잘 위장되어 폭격을 피한 은고로 비행장에 착륙하여 제17추격비행대대에 합류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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