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바둥해협 해전(1) - 계획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 대한 공격은 동시다발적이었다. 일본군은 다윈을 폭격하고 티모르를 공격하는 동시에 발리에도 상륙했다.
화창한 기후로 유명한 발리는 발리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자바 동해안과 마주보고 있었다. 발리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남동쪽 해안 가까이에 있는 덴파사르 비행장이었다. 켄다리2 비행장과 달리 덴파사르 비행장의 활주로는 비포장이었으며 관련 시설도 원시적이었다. 그러나 덴파사르 비행장은 자바에 가까워서 호주로부터 자바로 향하는 증원선단을 공격하기에 유리했으며 자바 남해안의 칠라칩을 폭격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기후가 온화했으므로 켄다리2 비행장과 달리 날씨가 나빠서 항공작전을 실시하지 못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발리 침공부대는 근거지부대지휘관 구보 규지 소장이 지휘했다. 상륙부대는 대만보병제1연대제3대대장 가네무라 마타베이 소좌가 지휘하는 대만보병제1연대제3대대(1개 중대 감편), 산포 1개 소대, 독립공병 1개 소대, 기타 지원병력으로 이루어진 가네무라 지대였다. 가네무라 지대를 실은 수송선 2척(사사고마루, 사가미마루)은 제8구축대(아사시오, 오시오, 아라시오, 미치시오)의 근접 호위를 받았다. 지원대인 구보 소장의 기함 경순양함 나가라와 제21구축대(하츠시모, 네노히, 와카바)는 북쪽 해상에서 엄호할 것이었다. 상륙지역은 덴파사르 비행장에 가까운 바둥해협의 사누르정박지였다. 다이난항공대 및 제3항공대의 제로기가 상륙지역 상공의 엄호를 맡았다. 발리 침공부대는 1942년 2월 17일 밤에 마카사르를 떠났다.
ABDACOM은 마카사르에 일본함정이 집결하고 있는 것은 알았지만 행선지는 알 수 없었다. 일본선단이 발리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웨이벌 장군이 확신한 것은 18일 오후가 되어서였는데 저지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가네무라 지대는 2월 19일 오전 2시경에 사누르 정박지 해안에 상륙했다. 600명 규모의 인도네시아 현지인부대는 일본군이 상륙하여 공격하자 그대로 항복했다. 폭파작업도 이루어지지 않아 일본군은 활주로를 비롯한 덴파사르 비행장의 시설과 보급품을 고스란히 손에 넣었다.
19일 날이 밝자 ABDAIR는 전투기의 호위없이 폭격기를 보내어 일본선단을 폭격했다. P-40들은 수라바야 상공의 공중전에 참가해야만 했다. 말랑에서 날아온 B-17폭격기 3대가 날이 밝자마자 일본선단 상공에 나타나 폭격을 가했다. 다이난 항공대의 제로기 2대가 요격했고 B-17은 무사히 돌아갔으나 명중탄은 없었다. 오전 6시에는 B-17폭격기 4대가 날아와서 폭격을 가했다. 다시 제로기가 요격했고 이번에도 살아 돌아갔으나 역시 명중탄은 없었다. 오전 6시 45분에는 LB-30폭격기(B-24의 파생형) 3대가 폭격했다. 역시 제로기의 요격을 받았고 무사히 돌아갔으나 명중탄은 없었다. 오전 8시에 B-17폭격기 2대가 다시 폭격했으나 역시 명중탄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제91폭격비행대대의 A-24 밴시 급강하폭격기(돈틀리스의 육군형) 2대가 폭격을 가하여 수송선 사가미마루의 기관실에 폭탄 1발을 명중시켰으나 격침하지 못했다.
폭격기 조종사들은 사누르 정박지에 순양함 2척, 구축함 5-6척, 수송선 4척이 있으며 순양함 2척에게 대형폭탄 3발과 소형폭탄 1발을 명중시키고 구축함들에게 8발의 지근탄을 가했으며 수송선들에게 대형폭탄 2발과 소형폭탄 1발을 명중시켰다고 보고했다. 조종사들이 전과를 과장되게 보고하는 것은 어느나라 군대에서나 흔한 일이지만 이때의 과장보고는 ABDAFLOAT가 반격 계획을 짜는데 직접적인 악영향을 주었다.
사누르 정박지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연합군 함정은 프레드 와더 소령이 지휘하는 미국잠수함 시울프였다. 18일 오전 2시에 일본선단을 발견한 시울프는 대담하게 수상항해로 일본구축함의 경계망을 통과하는데 성공했으나 일본수송선의 위치를 찾는 동안 날이 밝자 잠항했다. 잠시 후 시울프는 모래톱에 자초되었다. 후진했으나 빠져나오지 못하자 부상할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해면에는 스콜이 뿌리고 있어서 탐지를 면했다. 30분간 스콜의 비호 아래 수상항진하던 시울프는 스콜을 벗어나자 다시 잠항했다. 마침내 일본수송선 2척을 발견한 시울프는 후방어뢰발사관에서 1척에 1발씩 2발을 발사했으나 모두 빗나갔다. 오시오가 달려와 43발의 폭뢰를 퍼부었으나 시울프는 무사히 탈출했다.
영국잠수함 트루언트도 공격명령을 받았다. 북쪽으로부터 접근하던 트루언트는 엄호부대를 발견하고 구보 제독의 기함 나가라에게 어뢰 6발을 쏘았으나 모두 빗나갔다. 곧 일본구축함이 달려와 폭뢰를 퍼부었으나 트루언트는 무사히 수라바야로 돌아왔다.
ABDAFLOAT의 함정들은 흩어져 있었다. 미국 중순양함 휴스턴은 티모르로 가는 선단을 호위하다가 다윈으로 회항하는 중이었다. 영국 중순양함 엑서터, 호주 경순양함 호바트, 호주 구축함 에버트센, 영국 구축함 테네도스와 스카우트는 순다해협에서 선단을 호송하고 있었다. 네덜란드구축함 반겐트는 방카 작전에서 상실되었고 승조원은 방커트에게 구조되어 수라바야로 돌아오고 있었다. 네덜란드구축함 윗더위드는 승조원이 모두 다른 배로 차출된 상태로 오버홀을 받고 있었다. 상실된 반겐트의 함장 피터 쇼텔 소령을 포함한 승조원은 전원 윗더위드에 배치되었으나 22일이 되어야 해상에 나올 수 있었다. 2월 18일에 페락항에서 일본기가 떨어뜨린 지근탄으로 피해를 입은 방커트는 수라바야의 건선거에 들어 있었다. 방카해협 폭격에서 피해를 입은 미국구축함 바커와 벌머는 칠리찹에 있었으며 곧 호주로 떠날 것이었다. 방카 해협에서 돌아온 호주경순양함 트롬프와 미국구축함 4척(스튜어트, 패럿, 존D웨드워즈, 필즈베리)은 수마트라 남부에 있는 보급항 반다르람풍에서 마지막 급유를 받고 있었다. 반다르람풍은 일본군이 남부 수마트라에 상륙함에 따라 곧 폐쇄될 것이었다.
마카사르에 일본함정이 집결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헬프리히 제독은 2월 17일에 도먼 제독을 만났다. 여기서 19일 밤에 일본선단을 공격하기로 했는데 이 공격은 실패할 운명이었다. 우선 일본선단의 속력이 빨랐다. 침공선단은 예상보다 훨씬 빨리 발리에 도착하여 상륙함으로써 ABDAFLOAT의 반격을 뒷북으로 만들어 버렸다. 둘째로는 반격에 투입할 함정이 칠라찹, 수라바야, 그리고 반다르람풍에 흩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공격은 3번에 걸친 제파공격으로 실시하기로 했다.
제1파 공격은 도먼 제독이 칠라찹에 있는 네덜란드 경순양함 드루이터, 자바, 네덜란드 구축함 코테네어, 피에타인, 그리고 미국구축함 존D포드와 포프를 가지고 실시할 것이었다. 함대는 발리와 동쪽에 있는 페니다섬 사이에 있는 폭 24km의 바둥해협을 통하여 남쪽으로부터 사누르 정박지로 진입하여 일본선단을 공격한 다음 발리섬 북쪽으로 빠져 수라바야로 철수할 것이었다.
제2파 공격은 반다르람풍에서 급유를 받고 수라바야로 급히 돌아온 함정들이 실시할 것이었다. 참가함정은 네덜란드 경순양함 트롬프와 미국구축함 스튜어트, 패럿, 존D웨드워즈, 필즈베리였으며 지휘관은 트롬프의 함장 야코프 미스터 중령이었다. 이 함대는 발리 해협을 통하여 남하한 다음 제1파와 마찬가지로 남쪽으로부터 사누르 정박지에 돌입하여 공격한 다음 발리섬의 북쪽을 돌아 수라바야로 귀환할 예정이었다.
제3파 공격은 수라바야 해군관구 사령관 피터르 쿤라드 제독이 제안한 것으로 네덜란드 어뢰정 9척 (제4, 제5, 제6, 제7, 제9, 제10, 제11, 제12, 제13호)이 참가할 것이었다. 어뢰정들은 수라바야를 떠나 발리해협을 남하한 다음 자바 동남해안의 팡팡만에서 네덜란드 기뢰부설함 크라카타우로부터 급유를 받을 것이었다. 이후 어뢰정들은 제2파와 마찬가지로 바둥 해협을 거쳐 남쪽에서부터 사누르 정박지에 진입하여 제1파와 제2파에 의하여 피해를 입은 일본함정들을 어뢰로 공격한 후 역시 발리섬의 북해안을 돌아 수라바야로 돌아올 것이었다.
병력집중의 원칙을 어긴 이러한 작전계획은 당대에는 물론 이후에도 역사가들의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ABDAFLOAT는 압도적인 전력을 동원했으면서도 서로 분리되어 다른 시간에 공격하는 바람에 우위를 희석시켰다.
물론 이유야 있었다. 우선 칠라찹과 수라바야의 함정이 집결하려면 시간이 걸렸는데 헬프리히 제독은 어쩌면 몇시간 차이로 결정적인 기회를 놓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둘째로 어두운 밤에 적의 코앞에서 함정이 집결하다가 아군끼리 오인사격이 발생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19일 오전에 폭격기 조종사의 보고를 전해들은 헬프리히 제독은 따로 공격해도 각각의 제파가 적에 대해 압도적 우위를 가지고 있다고 보고 작전 계획을 변경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바둥해협 해전의 패배 이후 전력을 분산시켰다는 비판에 직면한 헬프리히 제독은 훗날 제파공격은 도먼 제독의 아이디어였으며 자신은 다만 찬성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남서태평양미해군부대 사령관 글래스포드 제독은 헬프리히 제독이 도먼 제독에게 제파공격을 강요했을 것이라고 의심했지만 증거는 없다.
제1파를 지휘한 도먼 제독의 전술에도 문제가 있었다. 도먼 제독은 경순양함 2척이 먼저 진입하고 구축함 4척이 나중에 진입하는 전술을 채택했다. 경순양함 2척이 적의 호위함정들을 공격하여 외곽으로 끌어내면 구축함이 돌입하여 수송선에 어뢰공격을 가한다는 생각이었다. 즉 포격 먼저 어뢰 나중의 순서였다. 그러나 일본호위함정이 경순양함에 이끌려 호위해야 할 일본수송선을 남겨두고 정박지를 떠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이후의 해전사는 야간해전에서 포격을 가하기 전에 적이 모르는 상태에서 먼저 어뢰를 발사하는 편이 훨씬 유리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즉 어뢰가 먼저고 포격이 나중이었다. 일본해군은 이 원칙을 철저히 지켰으며 6개월 후의 사보섬 해전에서 압승을 거둠으로써 어뢰를 먼저 발사하는 것이 옳음을 증명했다. 미해군은 이미 발릭파판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이 순서가 옳음을 증명한 상태였다.
도먼 제독이 포격 먼저라는 순서를 택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레이더가 없는 데다가 함대에 미국구축함이 끼어 있어 함정 사이의 통신이 원활하지 못한 상황에서 도먼 제독은 선두에서 돌입함으로써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상황을 빨리 파악하고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이는 사보섬 해전에서의 일본해군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사보섬해전에서 선두로 돌입했던 미카와 군이치 제독의 기함인 중순양함 초카이는 어뢰를 가지고 있어서 어뢰 먼저 포격 나중의 순서를 지킬 수 있었다.
어뢰 먼저 포격 나중의 순서로 공격하여 승리한 발릭파판 해전에 참가했던 제59구축함분대장 에드워드 파커 중령은 글래스포드 제독을 찾아와 도먼 제독의 공격순서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았다. 글래스포드 제독은 파커 중령의 불만에 동조하면서도 현장 지휘관이 도먼 제독인 이상 자신은 거기에 대해 할말이 없다면서 선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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