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하트 제독의 퇴장

영국구축함 익스프레스는 1942년 2월 6일에 보일러실에 화재가 나서 수리를 위하여 남아프리카로 떠났다. 이로써 동남아시아에서 연합군 함정 1척이 또 사라졌다.

일본기는 매일 오전 9시에서 10시 사이에 수라바야로 날아와 고공에서 폭격을 가했다. 네덜란드군의 경보는 항상 늦었기 때문에 제17추격비행대대(임시)의 P-40 워호크들은 번번이 늦게 출격하여 허탕을 쳤다.

2월 4일에 ABDA타격부대가 피해를 입으면서 마카사르로 접근하는 일본군을 수상함대로 공격하려는 시도는 일단 좌절되었다. 이제 남은 건 잠수함이었는데 마카사르에 가장 가까이 있던 것은 S-37이었다.

미해군의 S급 잠수함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건조되었으므로 나중에 건조된 함대형 잠수함에 비해 성능이 열악했다. S급 잠수함은 함대형 잠수함보다 어뢰발사관 숫자도 적고 사격통제 및 항법장치도 뒤떨어졌으며 항속거리도 짧았고 에어컨도 없었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장점도 있었다. 낡은 S급 잠수함에게는 신형인 마크14어뢰와 마크6자기기폭장치가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뢰성이 좋은 마크10 어뢰와 접촉식 신관을 장비하고 있었다.

2월 6일 저녁에 일본군의 마카사르공략부대가  켄다리의 스테어링만을 떠났다. 선단은 사세보연합특별육전대와 제5 및 제6설영반을 태운 수송선 6척(기나이마루, 난카이마루, 호코로쿠마루, 마츠에마루, 몬테비데오마루, 야마시모마루)과 급유선 샌클레먼트마루로 이루어져 있었다. 호위세력은 구보 규지 소장의 제1근거지부대로서 경순양함 나가라, 제8구축대(아사시오, 미치시오, 아라시오, 오시오), 제15구축대(하야시오, 구로시오, 오야시오, 나츠시오), 제21구축대(와카바, 하츠시모, 네노히), 제21소해대(제7, 제8호소해정), 제2구잠대(제13, 제14, 제15호구잠정)로 이루어져 있었다.

2월 7일 오전 1시 40분에 루시우스 채플 소령이 지휘하는 미국잠수함 스컬핀이 마카사르 침공선단을 발견하고 나가라에게 마크14어뢰 2발을 쏘았으나 1발은 조기 폭발해 버렸고 1발은 빗나갔다. 이제 침공선단과 마카사르 사이에는 제임스 뎀프시 대위의 S-37만이 있을 뿐이었다.

마카사르 근해를 초계하던 S-37은 2월 8일 해질녘에 접근하는 일본선단을 잠망경으로 발견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S-37은 부상하여 선단을 추적했으나 도저히 구축함의 호위망을 뚫을 수 없었다. 결국 뎀프시 대위는 수송선 공격을 포기하고 오후 8시 36분에 730m 앞을 일렬로 나란히 항진하는 일본구축함 4척에게 각 1발씩 어뢰를 쏘았다.

 

이 어뢰 중 1발이 제15구축대지휘관인 사토 도라지로 대좌의 기함 나츠시오에 명중했다. 굴뚝 사이를 직격한 어뢰가 기계실을 분쇄하자 굴뚝에서는 불꽃이 튀어나왔고 나츠시오는 함체 중앙이 6m나 뒤로 밀리면서 V자로 꺾였다. 
S-37은 즉시 잠항했다. 곧 일본구축함들이 몰려들어 폭뢰를 떨어뜨렸으나 S-37은 무사히 탈출했다.

사토 대좌는 사령기를 오야시오로 옮겼고 구로시오는 9일 새벽 2시부터 나츠시오를 예인했다. 그러나 오전 5시부터 풍랑이 거세지자 용골이 부러진 나츠시오는 견디지 못하고 2개로 쪼개져 2월 9일 오전 7시 10분에 마카사르에서 남쪽으로 35km 떨어진 해상에 침몰했다. 나츠시오의 사망자는 5명, 중상자는 6명이었으며 함장 나가이 스미타카 중좌를 포함한 생존자는 구로시오에게 구조되었다. 이로써 나츠시오는 미국잠수함에 의해 격침된 일본구축함 39척의 명단에 첫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마카사르는 2월 9일에 함락되었다. 약 8,000명의 일본군이 2개로 나뉘어 상륙하여 수비대를 압도했다. 일본군은 또다시 포로들을 3명씩 묶어서 다리 아래로 던져 학살했다. 

2월 10일 오전 2시 10분에 해군형 리버레이터인 LB-30폭격기 3대가 수상기모함 치토세를 폭격하여 폭탄 1발을 명중시켰으나 피해는 가벼웠다.

2월 11일에 일본구축함 야마카제가 마나도에서 동쪽으로 190km 떨어진 해상에서 부상한 상태의 미국잠수함 샤크를 발견하고 기습적으로 5인치 포탄 42발을 발사하여 격침했다.

2월 4일에 ABDA타격부대가 공습을 받은 이래 ABDAFLOAT 지휘관들 사이의 관계는 파탄으로 치달았고 그 결과 하트 제독은 고립되었다. 도먼 제독은 2월 5일 밤에 휴스턴과 마블헤드에 구축함 스튜어트와 존 D. 에드워즈를 호위로 붙여 칠라찹에 입항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신은 순다해협을 거쳐 바타비아의 외항인 탄종 프리옥으로 가서 헬프리히 제독을 만났다.

하트 제독은 연합타격부대가 마카사르 작전을 중지하고 칠라찹으로 철수했다는 사실을 반나절이 지나고서야 알았다. 피해를 입은 휴스턴과 마블헤드만 회항시키고 나머지 함대는 마카사르에 접근하는 일본선단을 공격할 것으로 생각했던 하트 제독은 분노했다. 그는 즉시 도먼 제독에게 전문을 보내어 연합타격부대를 이끌고 다시 북상하여 마카사르의 일본군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도먼 제독이 지정한 연합타격부대의 급유장소가 자바섬에서 남쪽으로 480km 나 떨어진 해역임을 알게된 하트 제독은 도먼 제독이 일부러 시간을 끈다고 생각하여 폭발했다.

하트 제독은 도먼 제독을 칠라찹으로 불렀고 거기서 두 사람은 격돌했다. 경력의 대부분을 해군항공대에서 보낸 도먼 제독은 전투기의 엄호를 받지 못하는 수상함대가 적의 제공권 하에서 활동하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말했다. 하트 제독도 적의 제공권 아래에 수상함대를 밀어넣는 것이 위험한 일이라는 건 인정했지만 상황이 급박하니 위험을 무릅써야한다고 말했다. 그는 적이 제공권을 쥔 해역에는 들어가지 않겠다는 소리는 곧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냐면서 도먼 제독을 몰아붙였다. 언쟁 끝에 하트 제독은 강압적으로 마카사르의 일본군을 공격하라고 명령했고 도먼 제독은 불만을 잔뜩 품은 채 명령을 받아들였다. 이 소식을 들은 헬프리히 제독은 노골적으로 도먼 제독을 옹호하면서 하트 제독을 비난했다.

이제 하트 제독은 고립무원이었다. 헬프리히 제독의 부추김을 받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당국은 런던과 워싱턴에 지속적으로 하트 제독에 대한 험담을 늘어 놓고 있었다. 영국 또한 ABDAFLOAT의 모든 함정을 선단 호송에 투입하려는 웨이벌 장군의 의도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하트 제독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부하인 글래스포드 제독과는 원래 사이가 나빴던 데다가 발릭파판 해전을 전후하여 완전히 틀어졌다.

하트 제독은 워싱턴으로부터도 지원을 받지 못했다. 처음부터 동남아시아에서 발을 빼고 싶어했던 미해군 수뇌부는 하트 제독이 ABDAFLOAT사령관이 되자 권위를 세워주기는 커녕 나중에 빼내기 쉽도록 일부러 약화시켰다. 1월 25일에 하트 제독은 아시아함대의 지휘권을 글래스포드 제독에게 물려주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강력하게 항의하여 겨우 철회시켰다. 하지만 2월 초에 미해군 수뇌부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의 방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확실해진 이상 네덜란드 해역을 지킬 책임은 네덜란드인에게 넘기고 발을 뺄 때가 되었다고 결정했다. 미함대총사령관 어니스트 킹 제독은 2월 5일에 하트 제독에게 전문을 보내어 건강을 이유로 ABDAFLOAT사령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고려하라고 강력하게 권고했다.

하트 제독은 이후로도 1주일을 더 버텼으나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결국 그는 2월 12일에 웨이벌 장군에게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을 요청했다. 웨이벌 장군은 14일에 사임을 받아들이고 헬프리히 제독을 ABDAFLOAT사령관에 임명했다. 하트 제독은 2월 15일에 자바를 떠났으며 다음날 헬프리히 제독이 정식으로 ABDAFOAT사령관이 되었다.

하트 제독은 무능해서 교체된 것이 아니었다. 비록 하트 제독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으나 적어도 능력은 인정받고 있었으며 대령 이하의 부하들은 대부분 그를 믿고 따랐다. 하트 제독이 떠나고 대신 헬프리히 제독이 ABDAFLOAT사령관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미국함정의 함장과 승조원들은 대부분 격렬하게 반발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미래를 걱정했다. 그들은 헬프리히 제독이 자신의 전공을 쌓기 위하여 부하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고 생각했으며 이는 하트 제독의 평가와 일치했다. 하트 제독이 마지막까지 ABDAFLOAT사령관직을 고수하려 했던 가장 큰 이유도 부하들이 헬프리히 제독의 지휘를 받지 않도록 하려던 것이었다.

 

하트 제독의 퇴장과 함께 1902년부터 40년간 존속했던 아시아함대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동남아시아의 미국 함정들은 이제 아시아함대가 아니라 남서태평양 미해군부대(US Naval Forces, Southwest Pacific)라는 볼품없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사령관 글래스포드 제독은 중장으로 승진했으나 대장이 총사령관을 맡던 아시아함대보다 확실히 급이 떨어졌다.  동남아시아에서 패배한 후 살아남은 남서태평양 미해군부대 소속 함정들은 대부분 호주로 철수하여 맥아더의 지휘 아래 싸움을 이어 갔으며 1943년 3월 15일에 창설된 제7함대에 흡수되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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