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매복 

 

둘리틀 공격대를 발진시킨 헐지 중장 휘하의 제16기동부대는 4월 25일에 진주만으로 돌아왔다.

모두들 이번에는 휴가를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제16기동부대에는 함의 정비와 보급품 적재를 위하여 5일만이 주어졌다.

4월 30일에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을 중심으로 한 제16기동부대는 산호해 해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남태평양으로 향했으나 5,600km 나 떨어진 산호해로 가는 도중에 산호해 해전이 끝나 버렸다.

 

이후 제16기동부대는 일본군의 활발한 움직임이 감지된 오션과 나우루 방면으로 이동했다.

오션 상륙을 준비하고 있던 일본군은 제16기동부대의 출현에 놀라 상륙작전을 포기했다.

 

5월 14일에 제16기동부대는 툴라기 기지의 일본군에게 일부러 모습을 노출시키라는 니미츠 제독의 명령을 받았다.

제16기동부대는 15일에 툴라기 기지 전방 900km 해상까지 나아가서 일부러 일본군의 정찰비행정에 발견된 다음 밤이 되자 뱃머리를 돌려 비밀리에 진주만으로 돌아왔다.

일본군은 이 정찰결과를 바탕으로 미해군이 일본군의 차기 작전 지역을 남태평양으로 착각하여 제16기동부대를 남태평양에 파견했다고 생각했으며 MI 작전 이전에 잘해야 진주만에 돌아갈 수 있지 미드웨이 부근까지 북상시킬만큼 눈치를 빨리 채지는 못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제16기동부대는 5월 26일에 진주만에 입항했다.

그날 오후에 헐지 제독이 방문했을 때 니미츠 제독은 충격을 받았다.

헐지 제독은 웃고 있었으나 초췌한 모습을 감출 길이 없었고 몸무게가 9kg 이나 빠져서 제복이 헐렁했다.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와 일광화상으로 피부병이 생겨 낮에는 선실에서 나올 수가 없었고 밤에는 터진 피부에서 진물이 줄줄 흘러내려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장 힘든 전쟁 초기의 6개월 동안 육지에서 지낸 며칠을 제외하고는 줄곧 해상에서 함대를 지휘하면서 긴장된 생활을 했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래도 헐지 제독은 다가오는 전투에서 자신이 지휘를 맡고 싶어했고 니미츠 제독도 그러기를 원했다.

그러나 제16기동부대 군의관의 긴급 보고를 받고 피부과 군의관을 대동한 채 득달같이 달려온 해군병원장은 헐지 제독의 모습을 보는 순간 단호하게 입원명령을 내렸다. 

헐지 제독은 할 수 없이 입원하면서 니미츠 제독에게 제16기동부대사령관으로 자신의 순양전대장인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소장을추천했다.

이때 입원한 헐지 제독은 2달 동안 푹 쉬면서 피부병을 치료한 후 미본토로 가서 지병이던 치질 수술까지 받고 완전히 회복한 다음 과달카날 전투가 한창이던 1942년 10월에 곰리 제독의 뒤를 이어 남태평양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화려하게 전선으로 돌아온다. 

 

(윌리엄 헐지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헐지 중장은 자신의 후임으로 추천한 스프루언스 소장과 친했고 가족들끼리도 알고 지냈는데 남들이 보기에 상당히 뜻밖의 일이었다.

스프루언스 소장은 해군사관학교 25기로 22기인 헐지 중장보다 3년이나 후배였을 뿐 아니라 거의 모든 면에서 헐지 중장과 정반대였기 때문이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항공병과의 선두 주자이자 스타인 헐지 중장과 달리 스프루언스 소장은 오로지 구축함과 순양함에서만 경력을 쌓아왔다.

스프루언스 소장은 조종사 면허(골드윙)는 커녕 항공모함 함장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요건인 항공관측사 자격(실버윙)도 따지 않아서 항공모함 함장 경력도 없었다.

하지만 스프루언스 제독은 개전 이래 계속 제16기동부대의 순양전대장으로 근무하면서 참모장 브라우닝 대령을 위시하여 항공작전에 정통한 헐지 제독의 참모들과 익숙한 사이였다.

게다가 이후에 증명되는 것이지만 스프루언스 제독은 모범생같은 단정한 겉모습과 달리 상당한 결단력과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성향도 정반대였다.

헐지 제독은 외향적이고 상냥하고 감정적이었으며 공식행사를 제외하고는 조종사 재킷을 걸치고 아무데나 돌아다녔다.

반면 스프루언스 제독은 내성적이고 냉정하고 침착했으며 언제나 규정에 맞는 단정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서로를 인정했다.

헐지 제독은 스프루언스 소장의 금욕적이고 지적인 분위기를 존중했으며 스프루언스 제독은 헐지 제독의 즐겁고 친근한 분위기를 좋아했다.

 

사실 스프루언스 제독은 뛰어난 능력으로 이미 미해군 수뇌부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자기 주변을 최고의 인재로 채우고 싶어했던 니미츠 제독은 스프루언스 제독을 개인적으로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뛰어난 근무기록을 보고 감명을 받아 역시 스프루언스 제독을 주시하고 있던 킹 제독이 워싱턴으로 빼돌리기 전에 선수를 쳤다.

니미츠 제독은 일찌감치 스프루언스 제독을 자신의 참모장으로 삼고 싶다고 킹 제독에게 말하여 동의를 받아둔 상태였다.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1942년 5월 27일 오후에 산호해 해전에서 만신창이로 얻어터진 항공모함 요크타운이 16km 에 걸쳐 중유를 흘리면서 진주만에 들어왔다.

요크타운은 곧 1번 드라이독으로 향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28일 새벽에 건선거에 들어갔다.

곧 물이 빠지기 시작했고 잠시 후 니미츠 제독이 도착했다.

원래 항공모함이 건선거에 들어온 후에는 위험한 항공유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하여 하루 동안을 놓아 두어야 했으나 시간이 급했던 니미츠 제독은 무시했다.

건선거의 물이 완전히 빠지기도 전에 카키색 군복 위에 엉덩이까지 올라가는 긴 장화를 신은 니미츠 제독이 함정조사관과 함께 건선거에 들어와 요크타운의 함체를 검사했다.

니미츠 제독은 위관장교 시절 엔지니어였으므로 이런 행동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피치 제독은 산호해 해전이 끝난 직후 요크타운의 수리에는 90일 이상 걸릴 것이라고 보고했다.

니미츠 제독은 플레처 제독에게 자세한 피해보고를 하라고 명령했으며 플레처 제독은 진주만에 도착하기 직전에 추가보고를 했다. 

나무로 만든 비행갑판의 구멍은 돌아오는 도중에 보수가 끝났으며 기관은 정상이고 수리하는데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승강기도 정상이라는 내용이었다.

플레처 제독은 요크타운의 문제는 결국 함체의 손상이며 긴급 수리라면 2주 내에 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니미츠 제독으로서는 목전에 다가온 미드웨이 해전에 요크타운을 투입하지 못한다면 2주나 90일이나 마찬가지였다.

니미츠 제독은 요크타운이 도착하기도 전에 공창관계자들에게 최대한 빨리 수리에 들어갈 수 있도록 방법을 연구하고 준비를 갖추어 두라고 명령했다. 

 

실제로 요크타운을 조사한 니미츠 제독은 다가오는 전투에 쓸 수 있을 정도로만 수리하려면 훨씬 짧은 시간 내에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함정조사관과 함께 요크타운의 조사를 마친 니미츠 제독은 뒤따르던 함정수리 관계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는 이 배를 3일 안에 복귀시켜야 한다."

("We must have this back in three days.")

 

순간 무거운 적막이 흐르고 그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으나 대답은 하나일 수 밖에 없었다.

함정수리 담당관인 핑스태드 소령이 일행을 대표하여 대답했다.

 

"예."

("Yes, sir.")

 

곧 1,400 여명의 인원이 몰려와서 12시간 교대로 24시간 내내 요크타운을 수리했다.

야간작업을 위하여 거대한 조명이 건선거 전체를 대낮같이 밝혔고 수리에 소요되는 막대한 전기를 확보하기 위하여 호놀룰루 시내에는 구역별로 제한송전이 실시되었다.

 

완벽한 수리가 아닌 땜질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수리용 청사진이나 계획서같이 시간을 잡아먹는 평상시의 절차는 무시되었다.

기술자들이 때워야 할 구멍에 맞추어 합판을 자른 다음 공작소에 보내면 공작소에서 같은 모양으로 철판을 잘라주었고 그 철판을 구멍에 덧대고 나사를 박든지 용접했다. 

함체 내부의 휘어진 격벽은 웬만하면 교체하지 않고 두드려 편 후에 목재로 보강했다.

수리에 투입된 인원들은 12시간씩 2교대로 일했으나 교대시 작업 능률에 큰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중요한 일부 인원은 한숨도 자지 않고 현장에서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면서 48시간 이상 연속해서 일했다.

 

(진주만의 1번 건선거에 들어와 있는 CV-5 요크타운. 1942년 5월 28일에 찍은 사진이다.)

 

요크타운의 수리가 진행되는 동안 니미츠 제독은 킹 제독의 요구에 따라 플레처 제독이 미드웨이 해전의 지휘를 맡는 것이 적당한지를 평가하는 부담스러운 임무를 처리해야 했다.

킹 제독은 플레처 제독이 산호해 해전에서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행동했다고 생각했다.

말주변이 없는 플레처 제독은 니미츠 제독에게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는데 애를 먹었고 결국 자신의 의견을 문서로 제출했다.

플레처 제독이 제출한 문서를 읽어본 니미츠 제독은 그가 미드웨이 작전을 지휘할만한 능력과 용기가 충분하다고 확신하고 킹 제독에게 보고하여 동의를 얻었다.

 

니미츠 제독은 킹 제독과 비교하여 사람을 판단하고 다루는 능력이 뛰어났는데 특히 사람을 직접 겪어보지 않고 그가 제출한 서류 또는 근무기록만 보고 그 사람의 능력과 성향을 판단하는 재능이 발군이었다.

스프루언스 제독도 개인적으로 모르면서도 근무기록만으로 뛰어난 능력을 알아차린 경우였으며 훗날 미처 제독도 뛰어난 근무기록을 근거로 스프루언스 제독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제58기동부대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당시 미해군의 근무기록이 공정하고 객관적이라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같은 근무기록을 보고도 니미츠 제독이 다른 사람들보다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어 기록된 문자 너머의 실체적 진실을 알아차리는 능력이 탁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5월 27일 저녁에 태평양함대 사령부에서는 플레처 제독과 스프루언스 제독이 참가한 가운데 미드웨이 해전에 대한 최종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니미츠 제독은 미국항공모함들의 목표는 오로지 일본항공모함임을 명확하게 했다.

 

엔터프라이즈와 호넷 중심의 제16기동부대는 5월 28일에 진주만을 출항하여 미드웨이 북쪽 520km 해역인 행운점(Point Luck)에서 대기하며 요크타운 중심의 제17기동부대는 요크타운의 수리가 완료되는 대로 출항하여 행운점에서 제16기동부대와 합류한다.

이때부터 플레처 제독이 제16 및 제17기동부대를 통합지휘한다.

제16 및 제17기동부대는 6월 3일 저녁에 남하하기 시작하여 4일 아침에는 미드웨이 북방 200km 해역에 도달한 후 북서쪽에서 접근할 일본항모들의 위치가 확인되는 대로 함재기를 내보내어 공격한다.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제16기동부대와 제17기동부대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떨어져 단 한번의 공습으로 동시에 피해를 입지 않도록 유의한다.

 

회의가 끝난 후 니미츠 제독은 플레처 제독과 스프루언스 제독을 따로 불러 밀봉된 명령서를 1통씩 주면서 출항한 후에 혼자만 보라고 명령했다.

그 명령서에는 적을 공격할 때 엄격하게 계산된 위험만을 감수해야 하며 아군 항모가 적 항모에게 입힐 수 있는 피해보다 더 큰 피해를 입어가면서까지 무리하게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적혀 있었다.

 

다음날인 5월 28일에 제16기동부대가 진주만을 빠져나갔다.

 

5월 29일에는 외부 함체 수리가 끝난 요크타운이 드라이독을 떠나 진주만으로 들어왔고 내부에서는 수리가 계속 진행되었다.

요크타운의 수리는 다음날인 30일 오전 11시에 니미츠 제독이 승함하여 수리에 진력한 기술자들을 치하하고 요크타운의 승무원들에게 사기를 북돋우는 연설을 하는 순간에도 계속되었다.

잠시 후 니미츠 제독이 하함하고 요크타운의 기관이 돌기 시작해서야 마지막까지 수리에 전념하던 기술자들이 황급히 배를 빠져나갔다.

 

제17기동부대가 진주만을 빠져나가 원형진을 형성하자 카네오헤 기지와 에와 기지에서 함재기들이 이륙하여 요크타운에 착함했다.

산호해 해전에서 피해를 입은 요크타운의 함재기들을 보충하기 위하여 새러토가의 비행대대들이 투입되었다.

큰 피해를 입지 않은 요크타운의 제5폭격비행대대(VB-5)가 정찰비행대대(VS-5)로 이름을 바꾸었고, 폭격비행대대로는 맥스 레슬리 소령의 제3폭격비행대대(VB-3)가 탑재되었다.

제5뇌격비행대대(VT-5) 대신 랜스 마시 소령의 제3뇌격비행대대(VT-3)가 탑재되었다.

요크타운의 전투비행대대는 원래 레인저 소속이었던 제42전투비행대대(VF-42) 였는데 제임스 태치 소령의 제3전투비행대대(VF-3)로 교체되었다.

제42전투비행대대에서 살아남은 와일드캣들과 조종사들은 제3전투비행대대에 흡수되었다.

 

1942년 6월 2일 오후 4시, 제16기동부대와 제17기동부대는 미드웨이 북방의 행운점에서 합류하여 매복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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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AF

 

니미츠 제독이 1942년 5월 2일에 미드웨이를 시찰한 것은 지도를 보고 떠오른 직관에 따른 것이었다.

하이포국은 일본군이 포트모르즈비 공략을 위한 MO 작전 이후에 대규모의 공세를 실시할 계획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었을 뿐 정확한 목적과 위치, 시기는 5월 9일까지 몰랐다.

 

그러나 니미츠 제독은 일본해군이 남태평양 이후에는 중부태평양으로 올 것이라고 믿었다.

사무실에 걸린 지도를 바라보던 니미츠 제독은 일본해군이 중부 태평양으로 온다면 미드웨이 뿐이라고 판단하고 5월 2일에 참모들과 함께 미드웨이를 시찰하고 본격적으로 방어력 강화를 서둘렀다.

실제로 하이포국이 일본의 다음 공격이 5월 말경에 중부 태평양의 AF 라는 지점에서 있을 것이라는 걸 확신한 것은 5월 9일이었다. 

 

그동안 남태평양의 산호해에서는 항공모함 렉싱턴과 요크타운을 중심으로 한 미해군의 제17기동부대가 항모 쇼가쿠와 즈이가쿠로 이루어진 일본제5항공전대와 격돌했다.

산호해 해전이라고 이름붙여진 5월 7일과 8일에 걸친 세계 최초의 함대항공전에서 제17기동부대는 일본해군의 경항모 쇼호를 격침하고, 정규항모 쇼가쿠를 대파했다.

반면에 일본해군의 제5항공전대는 미해군의 정규항모 렉싱턴을 격침하고 요크타운을 대파함으로써 전술적으로는 미해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노우에 중장의 판단착오로 포트모르즈비 상륙부대가 상륙을 포기하고 라바울로 되돌아감으로써 포트모르즈비 함락에 실패했다.

이는 태평양 전쟁 개전 이래 미군이 일본군의 전진을 처음으로 저지한 것으로서 산호해 해전은 미해군의 전략적 승리였다.

 

(산호해 해전에서 침몰 직전의 상태인 CV-2 렉싱턴)

 

산호해 해전의 소식이 진주만에 전해졌을 때 하이포국은 일본군의 다음 목표가 미드웨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었다.

하이포국은 일본군 암호에서 태평양에서 미군이 장악한 지점을 A 로 시작하는 2자의 약자로 표시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가령 하와이는 AH 였으며, 미드웨이와 하와이 사이에 있는 프렌치 프리게이트 숄은 AG 였다.

AF 란 지명도 이미 3월 말부터 등장했는데 AF 는 하와이 북쪽에 있었고 비행장이 있었다.

 

1942년 3월 초에 일본해군의 2식 대정이 진주만을 폭격했을 때 프렌치프리게이트 숄에서 잠수함으로부터 급유를 받았다.

당시 이들은 AF 에서 떠오른 정찰기를 조심하라는 경고를 받고 있었다.

그 사건 이후로 하이포국의 책임자 로슈포트 중령과 태평양함대의 정보참모 레이튼 중령, 그리고 레이튼 중령으로부터 매일 아침 5분에서 8분에 걸쳐 암호해독 결과를 보고받는 니미츠 제독은 AF 가 미드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이포국의 의견에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워싱턴의 OP-20-G 와 남서태평양해역군의 맥아더 장군은 벨코넨국의 보고를 바탕으로 일본군의 다음 목표가 남태평양의 뉴칼레도니아 또는 피지라고 주장했다.

육군항공대는 일본군의 다음 목표가 샌프란시스코라고 믿어서 니미츠 제독이 요청한 B-17 폭격기의 제공을 거부하는 바람에 니미츠 제독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하와이에 있던 19대의 B-17 폭격기 밖에 투입할 수 없었다.

개전과 거의 동시에 신예전함 프린스오브웨일즈와 순양전함 리펄스를 어이없이 상실하고 이어서 말레이와 싱가포르, 버마에서 참극을 겪은 다음 인도양까지 쫓아온 일본해군에게 혼쭐이 난 영국은 안타깝게도 공포에 사로잡혀 이성적인 판단 능력을 상실했다.

그들은 모든 증거와 반대되는데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다음 목표가 인도양이라고 믿었으므로 니미츠 제독이 항공모함 1척을 빌려달라고 요청하자 단호하게 거절했다.

 

로슈포트 중령은 처음에는 다른 기관들이 뭐라고 하든 무시했으나 OP-20-G의 책임자 레드맨 대령이 벨코넨국의 '멍청이' 들이 도출한 엉뚱한 결론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자 드디어 폭발했다.

로슈포트 중령은 하이포국 내에서 재치있기로 유명한 재스퍼 홈즈 소위에게

 

"AF가 미드웨이라는 것을 전 세계에 증명할"

("prove to the world that AF is Midway.")

 

방법을 찾으라고 명령했다.

홈즈 소위는 미드웨이에서 증류기가 고장났다는 가짜 통신을 보내도록 만드는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로슈포트 중령은 니미츠 제독의 허가를 받아 5월 19일에 도청이 불가능한 해저전선을 통하여 미드웨이에 명령을 내렸는데 그 내용은

 

"증류기가 고장났다."

 

는 무전을 평문으로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명령을 받은 미드웨이에서는 영문도 모르고 멀쩡한 증류기가 고장났다는 평문 통신을 무전으로 보냈고 로슈포트 중령은 이 사실을 워싱턴의 OP-20-G와 호주의 벨코넨국에 전달했다.

 

이틀 후인 5월 21일에 AF의 증류기가 고장나서 식수가 부족하다고 전하는 일본군의 암호를 하이포국이 해독해 내었는데 일본군은 실제로 미드웨이 상륙부대의 수송선에 대량의 식수와 증류기 2개를 추가로 실었다.

로슈포트 중령은 이 소식을 워싱턴과 벨코넨국에 통보하지도 않고 별도의 보고서도 작성하지 않은 채 완전히 무시했다.

결국 OP-20-G가 자체적으로 이 내용을 해독해 내었고 레드맨 대령은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내용의 보고서를 작성하여 자기 명의로 워싱턴의 해군본부는 물론 남서태평양지역군과 육군항공대 및 영국군 심지어 태평양함대에까지 배포해야만 했다.

 

니미츠 제독은 5월 25일에 미드웨이 작전을 의제로 주요 지휘관 회의를 주재했다.

이 회의에서 일본군의 상황과 의도에 대하여 로슈포트 중령이 직접 설명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는 회의장에 무려 30분이나 늦게 나타났다.

니미츠 제독은 자신의 맞수인 야마모토 제독과 마찬가지로 시간을 지키는 일에 매우 엄격하여 가령 오후 7시에 연회가 열린다면 니미츠 제독의 운전사는 가급적 제독이 6시 59분에서 7시 사이에 연회장에 입장할 수 있도록 도착 시간을 조절하는 법을 익혀야만 했다.

따라서 니미츠 제독의 부하로서 그가 주재하는 회의에 30분이나 늦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그런 짓을 하고도 그 자리에서 목이 달아나지 않은 사람은 아마 로슈포트 중령이 유일할 것이다.

 

로슈포트 중령은 30분 늦게 마치 유령처럼 파리한 얼굴로 손에 서류를 든 채 회의장에 나타났는데 회의 참석자들은 모두 그가 최소한 24시간 동안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분노 때문에 눈빛이 차가운 회색으로 변한 니미츠 제독이 얼어붙을 듯한 표정으로 노려보자 로슈포트 중령은 20일에 들어온 중요한 암호를 해독하느라 늦었다면서 들고 있던 서류를 건넸다.

참석자들이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노기등등한 얼굴로 서류를 훑어보던 니미츠 제독의 태도가 차차 누그러지더니 잠시 후 회의가 시작되었다. 

 

회의 참석자들은 도대체 그 서류에 무슨 내용이 들어 있길래 니미츠 제독의 회의에 30분이나 지각하고도 로슈포트 중령의 목이 당장 달아나지 않았는지 궁금해했다.

궁금증은 잠시 후 문건이 배포되자 풀렸다.

회의 참석자들은 배포된 문건을 읽어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거기에는 정보출처는 없었지만 미드웨이를 공격할 일본함대의 규모, 지휘관, 공격 시기까지 자세하게 쓰여 있었다.

나중에 엔터프라이즈 함상에서 태평양함대 작전계획 제29-42호에 포함된 이 부분을 읽어보고 놀란 엔터프라이즈의 항해장 루블 중령은 암호 해독으로는 절대로 이런 최고급 정보를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도쿄의 미국 첩보원은 정말 미국정부가 주는 돈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사실 이때문에 5월 20일에 하이포국이 입수한 정보에 관한 전설이 생겨났다.

즉 하이포국이 그날 MI 작전에 참가하는 함선과 지휘관, 행동계획 뿐만 아니라 항공기 출격시간까지 한마디로 MI 작전에 대한 내용이 전부 담겨있는 통신을 통째로 획득했다는 전설이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미드웨이 해전은 미해군이 일본해군의 작전계획서를 손에 들고 시작한 전투로 절대로 질래야 질 수가 없는 전투였다는 뜻이 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실 하이포국이 5월 20일에 획득한 통신은 따로따로 입수된 12개 통신으로서 모두가 중요하고 핵심적인 내용이기는 했지만 작전계획서같이 완결된 형태는 아니었다.

니미츠 제독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회의 참석자들을 경악하게 만든 그 문건은 사실 5월 20일 이전의 정보에다가 20일의 결정적인 단서들 그리고 20일 이후의 보충 통신들까지 포함하여 로슈포트 중령과 레이튼 중령이 절묘하게 끼워맞춘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25일에 배포된 문건이 후세에 알려진 것만큼 완벽한 것도 아니었다.

예를 들어 그 문건을 만든 사람들은 알류샨 공략부대와 제1기동부대, 미드웨이 공략부대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으나 야마모토 제독이 직접 지휘하던 주력부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실제로 미드웨이 해전에 주력부대가 출동했었다는 것을 미해군이 알아낸 것은 미드웨이 해전이 끝나고도 몇달이 지나서였다.

또한 제1기동부대에 제1항공전대와 제2항공전대의 항모 4척이 참가한다는 것은 정확하게 알아내었으나 제1항공전대와 제2항공전대가 한덩어리로 같이 행동한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만일 미해군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 비극적인 전력 분산은 아예 없었거나 훨씬 정도가 덜했을 것이고 미함대의 집중된 함재기 세력은 히류가 살아남아 요크타운에 반격을 가할 기회조차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정보만으로도 사실 엄청난 것이었으며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태평양함대의 정보참모 레이튼 중령은 제1기동부대의 출현시기를 집요하게 물어보는 니미츠 제독에게 일본해군의 제1기동부대가 6월 4일 오전 6시에 미드웨이의 325도 방향, 175마일 거리에서 발견될 것이라고 말해 줄 수 있었다.

실제로 제1기동부대는 6월 4일 오전 5시 55분에 미드웨이의 320도 방향, 180 마일 거리에서 발견되어 레이튼 중령의 예측에서 시간으로 5분, 방향에서 5도, 거리에서 5마일 밖에 차이나지 않았다.

 

이제 하이포국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바를 모두 한 셈이었고 나머지는 현장지휘관이 담당해야 할 몫이었다.

니미츠 제독을 위시한 태평양함대 수뇌부는 걸출한 제독인 윌리엄 헐지 중장이 있는 한 현장 지휘관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고 운명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새로운 영웅을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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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불길한 징조 

 

1942년 5월 1일부터 5일까지 일본연합함대의 기함인 전함 야마토 함상에서 MI 작전에 참가하는 주요 지휘관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MI 작전에 대한 전쟁연습(War Game)이 실시되었다.

전쟁연습은 적의 입장에서 생각해봄으로써 아군 계획의 헛점을 파악하고, 보완책을 마련하기 위한 계획 작성의 마지막 단계요, 백미라고 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규칙을 어떻게 정하든 일단 정해진 규칙 하에서는 자유로운 시도를 허용하고 거기에서 발견된 문제점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했다.

실제로 진주만 기습을 앞두고 벌어진 전쟁연습에서는 모두들 진지하게 연습에 임하여 수많은 문제점들을 도출하고 치열한 토론을 통하여 작전계획의 미비점을 보완하고 수정했다.  

 

(일본전함 야마토.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그러나 이번의 전쟁연습은 완전히 달랐다.

야마모토 제독은 MI 작전에 대한 전쟁연습을 단순한 통과의례로 만들 생각이었다.

전쟁연습에 필요한 각종 정보는 연습 직전에야 참가자들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에 준비할 시간 여유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전쟁연습에 돌입하자 상황은 야마모토 제독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미리 준비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군을 담당한 지휘관들은 대부분 야마모토 제독의 뜻대로 작전 계획에서 주어진 역할에 충실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해군인 홍군을 담당한 좌관급 장교들은 시간 여유가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미해군이 취할 수 있는 놀랄만한 대안들을 잇달아 들고나와 MI 작전 계획의 문제점을 여지없이 폭로했다.

 

5월 1일에 대형 지도판 위에서 벌어진 첫번째 도상 전투부터 파란이 일어났다.

미해군인 홍군을 담당한 장교들은 실제로 미해군이 한 것과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미드웨이 북쪽에서 매복했다가 예상보다 훨씬 멀리서 나구모 함대를 포착한 다음 측면에 통렬한 기습공격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나구모 함대의 항공모함 중 3척이 커다란 피해를 입어 미드웨이 상륙작전이 위기에 봉착했다.

그러자 연합함대 참모장 우가키 제독이 개입하여 그런 전술은 불가능하다면서 공격을 무효화시키고 피해를 입은 3척의 항모를 원상태로 되돌렸다.

홍군 장교들의 격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홍군 함대는 남쪽으로 물려져 야마모토 제독이 예상했던 시간에 예상한 위치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도상 전투를 진행할 수 밖에 없었다.

 

다음날의 도상 전투에서 또다시 파란이 일어났다.

홍군을 담당한 장교들은 미드웨이의 항공기들을 총동원하여 남하하는 나구모 함대를 사방에서 동시에 습격했다.

심판관인 오쿠미야 마사다케 중좌가 주사위를 던지자 무려 9발의 폭탄이 아카기와 카가에게 명중하는 것으로 나와 2척이 모두 침몰했다.

그러자 또다시 우가키 소장이 개입하여 9발의 명중탄을 3발로 줄여서 카가만 격침되는 것으로 결과를 바꾸었다.

게다가 이어진 뉴칼레도니아 공격에서는 침몰했던 카가가 되살아나서 작전에 참가하는 촌극까지 벌어졌다.

그러자 도상 전투를 지켜보던 주요 지휘관들은 MI 작전 계획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

 

야마모토 제독도 불안감을 느꼈던지 마지막 도상 전투 때 나구모 중장에게 만일 미드웨이를 공격하는 도중에 측면에서 미국 항공모함들이 나타나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제1기동부대의 항공참모인 겐다 미노루 중좌에게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겐다 중좌는

 

"그런 일이 생긴다면 매우 큰 문제가 되겠지만.."

 

이라면서 말꼬리를 흐리다가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더니 큰 소리로

 

"우리는 적을 휩쓸어 버릴 겁니다!"

 

라고 대답했다.

모두들 겐다 중좌의 무책임한 답변에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데 연합함대 참모인 미와 대좌가 나서서 제1기동부대의 방어력은 막강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일동에게 말했다.

 

야마모토 제독으로서도 분명히 겐다 중좌의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만 이를 계기로 MI 작전에 대한 비판의 물꼬가 트이는 것을 싫어했다.

그리하여 야마모토 제독은 나구모 중장에게 미드웨이 폭격이 진행되는 동안 나머지 항공기들은 대함무장을 갖추고 대기하라는 권고에 가까운 구두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지었다.

중요한 전술적 문제를 다루면서 겐다 중좌와 미와 대좌가 보여준 허세는 미드웨이 해전을 앞둔 일본해군의 자만심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로써 5월 5일에 전쟁연습이 끝났으나 주요 지휘관들이 모여서 5일씩이나 전쟁연습을 하고서 얻은 결과라고는 MI 작전에 대한 일방적인 자기합리화 뿐이었다.

지적인 자극이나 유익한 깨달음은 전혀 없었으며, 홍군을 담당했던 장교들을 위시한 좌관급 실무자들의 환멸만이 남았다.

 

미지의 전장에 가장 먼저 들어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나구모 중장은 전쟁연습에서 믿을만한 우발계획 하나 건지지 못했다.

이제 그는 작전 중에 나타날 모든 예외적 상황에서 미리 연구된 우발계획 하나 없이 임기응변으로만 처리해야 할 입장이 되었다.

 

전쟁연습이 끝난 이틀 후인 5월 7일과 8일에 걸쳐 남태평양의 뉴기니 근해에서 산호해 해전이 벌어졌다.

일본해군은 경항공모함 쇼호를 잃고 정규항공모함 쇼가쿠가 폭탄 3발을 맞아 108명이 사망하면서 대파되었고 즈이가쿠는 항공대가 큰 피해를 입었다.

미해군은 정규항공모함 렉싱턴이 격침되고 요크타운이 대파되었다.

일본해군은 산호해 해전에서 전술적으로 승리했으나 포트모레스비 공략에 실패함으로써 전략적으로는 패배했다.

게다가 일본군은 렉싱턴와 요크타운을 모두 격침했다고 믿었는데 요크타운은 살아 남았다.

 

(일본항공모함 쇼가쿠.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비록 전술적으로 승리했으나 산호해 해전은 일본해군에게 많은 점을 시사했다.

산호해 해전에서 처음으로 일본항모기동부대에 정면 도전한 미국의 항공모함 기동부대는 일본군이 지금까지 상대해 온 연합군과 완전히 달랐으며 인도양에서 만났던 영국해군과도 확연히 다른 상대였다.

미국 항공모함 2척은 일본해군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 매복해 있었고 그 결과 전방으로 지나치게 멀리 나가 적절한 지원을 받을 수 없었던 일본의 경항공모함 쇼호는 미국 함재기의 집중 공격으로 어뢰 5발과 폭탄 11발을 얻어맞고 맥없이 침몰했다.

미해군의 함재기 조종사들은 이제까지 일본군이 말레이, 보르네오, 그리고 자바 상공에서 만난 연합군 조종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량이 뛰어나고 공격적이었다.

 

미해군의 주력 함재전투기인 와일드캣은 제로기보다 성능이 뛰어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주력 뇌격기인 데버스테이터는 97식 함상공격기보다 확실히 성능이 떨어졌다.

그러나 급강하폭격기 돈틀레스는 대형폭탄인 450kg 짜리 폭탄을 멀리 싣고가서 정확하게 투하할 수 있는 뛰어난 능력을 과시했다.

돈틀레스 조종사들은 제로기의 요격과 빗발치는 대공포화를 뚫고 해상에서 재빠르게 기동하는 쇼가쿠에 3발의 450kg 짜리 폭탄을 명중시킬만한 기량과 용기 그리고 집중력을 보여 주었다.

 

일본해군에게 있어서 산호해 해전으로 인한 심각한 결과는 쇼가쿠의 손상과 즈이가쿠 항공대의 손실로 인하여 제1기동부대에 제5항공전대가 참가하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이로써 나구모 제독은 MI 작전계획이 가진 여러 취약점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반격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강대한 함대항공력이란 비장의 카드를 잃었다.

 

제1기동부대의 조종사들은 제5항공전대의 불참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카기와 카가로 이루어진 제1항공전대와 소류와 히류로 이루어진 제2항공전대의 조종사들은 자신보다 기량이 떨어지는 제5항공전대의 쇼가쿠와 즈이가쿠 소속 조종사들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을 듣자 역시 미해군은 별 것 아니라고 떠들었다.

 

사실 야마모토 제독과 우가키 참모장도 제1기동부대의 전력저하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만일 제1기동부대의 전력을 꼭 확충하려면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은 쇼가쿠의 항공대를 큰 피해를 입은 즈이가쿠의 항공대와 합친 다음 함체의 피해가 거의 없던 즈이가쿠에 실어 제1기동부대에 합류시킬 수 있었다.

 

(일본항공모함 즈이가쿠.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물론 일본의 함재 항공대는 미국과 달리 유연한 운용이라는 면에서 불리했다.

미해군의 함재 비행전대는 항모와는 별개로서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이 항모에서 저 항모로 옮겨다닐 수 있었다.

반면 일본의 함재 항공대는 항공모함과 완전한 일체를 이룬 항모의 한 부분이었다.

일본의 항공모함과 항공대의 관계는 마치 전함과 주포의 관계와 같이 여겨졌으며 주포가 망가지면 전함도 출전하지 못하듯이 항공대가 큰 피해를 입으면 그 피해를 복구할 때까지 항공모함도 출전하지 못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전함의 주포와 항공모함의 항공대는 엄연히 다른 것이기에 필요하면 과감하게 기존의 사고방식을 깨뜨릴 필요가 있었고, 당시 일본해군에게는 그러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다. 

 

산호해 해전에서 살아남은 쇼가쿠와 즈이가쿠의 항공대를 합치면 즈이가쿠는 제로기 25대, 99식 함상폭격기 17대, 97식 함상공격기 14대로 이루어진 항공대를 가지고 MI 작전에 참가할 수 있었으며, 56대라는 함재기 숫자는 당시 제1기동부대의 항공모함 1척이 보유한 평균적인 함재기 숫자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물론 쇼가쿠 출신의 조종사들이 즈이가쿠 출신의 조종사 및 즈이가쿠 함상 승조원들과의 융화나 화합에 약간 어려움을 겪을지도 모르나 공통의 목적에 헌신하는 충성스러운 일본군으로서 그런 문제는 미미할 것이었다.

실제로 제1기동부대에는 미드웨이에 배치될 제6항공대 소속의 제로기 21대가 항공모함 4척에 분산 배치되어 함께 작전했는데 제6항공대 소속의 제로기 조종사들은 모든 항공모함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아무 문제없이 기존의 함재 항공대 조종사들과 함께 작전에 참가했다.

 

결국 야마모토 제독은 미해군을 상대하는데 4척의 항모로 충분하며 꼭 즈이가쿠를 제1기동부대에 추가시키기 위하여 아둥바둥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미해군이 산호해 해전에서 중상을 입은 요크타운을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시키기 위하여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생각해보면 즈이가쿠의 합류를 쉽게 포기해 버린 야마모토 제독의 태도는 미군을 무시하는 오만함의 표출로 승리병의 한 증상이었다.

 

일본해군은 1940년 1월 1일부터 JN-25b 를 암호로 사용했는데 1942년 5월 1일을 기하여 지명 표기 방법을 바꾼 JN-25v 로 바꿀 예정이었다.

그러나 촉박하게 진행되던 MI 작전 준비를 방해하지 않기 위하여 암호 교체 시기를 5월 27일로 연기했다.

일본은 미군이 자신들의 암호를 해독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런 조치를 취했으나 사실 미해군은 1942년 3월 말부터 JN-25b 를 상당부분 해독하고 있었다.

미군이 MI 작전 계획에 대하여 알아낸 것은 주로 5월 9일 이후로서 결정적인 정보는 5월 20일에 입수했기 때문에 만일 5월 1일에 예정대로 암호를 바꾸었다면 미드웨이 해전의 결과도 달라졌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실제로 5월 27일에 암호가 바뀌자 미태평양함대의 암호해독기관인 하이포국에서는 미드웨이 해전 기간 동안 일본군의 통신을 전혀 해석할 수 없었다.

미군의 암호해독능력을 무시한 이러한 안일한 태도 역시 승리병의 한 증상이었다. 

 

출격을 앞둔 1942년 5월 25일에 하시라지마에 정박한 일본연합함대의 기함 야마토 함상에서 마지막으로 전쟁연습이 벌어졌는데 여기서 미해군인 홍군을 담당한 장교들은 다시 파란을 일으켰다.

홍군함대는 하와이 남쪽에서 서진하여 잠수함의 초계선을 피한 다음 미드웨이의 동쪽으로 북상함으로써 항공 초계선의 헛점을 파고 들었다.

이어서 홍군함대는 고속으로 북상하여 나구모 함대를 공격함으로써 항공모함 1척을 격침하고 2척에 큰 피해를 입혔다.

물론 홍군함대도 반격을 받아 항모 2척을 상실했지만 도상 전투를 지켜보던 지휘관들은 항공초계의 헛점을 파고드는 미함대의 움직임과 함께 제1기동부대가 위험에 빠졌는데도 야마모토의 주력부대를 비롯한 다른 함대들이 전혀 도와주지 못하는 상황을 보고 심각한 우려를 나타내었다. 

야마모토 제독도 걱정이 되었는지 나구모 중장에게 저런 상황에 대비한 계획이 있느냐고 물었고,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 중좌는 저런 상황에 대비한 우발계획을 세워 놓았다고 대답했다.

 

(1942년 5월 25일에 야마토 함상에서 실시된 MI 작전의 마지막 도상 전투 상황도. 미해군을 뜻하는 홍군함대는 미드웨이 남동쪽에서 항공초계망을 피하여 북상한 다음 나구모 제독의 제1기동부대를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출처: Shattered Sword, P.68)

 

마지막 전쟁연습이 끝난 직후 나구모 제독은 트럭에 파견했던 소류의 도착이 늦어지는 관계로 MI 작전 일정을 하루만 늦추어 달라고 요청했고 촉박한 일정에 쫓기던 대부분의 지휘관들이 나구모 중장의 요청을 지지했다

그러나 야마모토 제독은 단호하게 연기 요청을 거부하면서 만일 출발이 하루 늦어지면 도중에 빨리 달려가서라도 작전은 정확한 시간표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에피소드는 야마모토 제독이 MI 작전을 실시하면서 부하들에게 시간표를 철저하게 지키도록 얼마나 심하게 강요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빠듯한 시간표에 구속된 나구모 중장을 비롯한 일본함대의 지휘관들은 돌발상황이 발생했을 때 취할 수 있는 행동에 큰 제약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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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제1항공함대 

 

미드웨이 해전 당시 일본항모기동부대의 함재기들은 함상전투기, 함상폭격기, 함상공격기의 3기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줄여서 함전이라고 부르는 함상 전투기는 제로기로서 기체 강도가 약하여 방어력이 취약하고 급강하시 고속을 낼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장대한 항속거리와 중고도 및 저고도에서 놀라운 운동성을 지닌 기체로서 미국의 헬캣이 나오기 전까지는 세계 정상급의 함재전투기였다.

 

(제로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줄여서 함폭이라고 부르는 함상폭격기는 미국의 급강하폭격기와 같은 종류였다.

당시 일본의 함폭은 고정된 랜딩기어를 가진 99식 함상폭격기였다.

99식 함폭은 최대 폭장량이 250kg 으로서 미국측의 맞수인 SBD 돈틀레스의 450kg 에 비하여 열세였지만 유능한 조종사가 탑승할 경우 충분히 위력적이었다.

 

(99식 함상폭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줄여서 함공이라고 부르는 함상공격기는 미해군의 뇌격기와 같은 역할을 하는 기종이었다.

당시 일본해군의 함상공격기는 97식 함상공격기로서 800kg 의 어뢰 1발 또는 폭탄을 장착할 수 있었다.

 

(97식 함상공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일본해군의 함재기들은 3대로 이루어진 소대가 기본단위였다.

소대 3개가 모여 9대가 중대를 이루었으며, 선임 소대장이 지휘했다.

함폭 1개 중대와 함공 1개 중대가 함전 1개 중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적 함정을 공격하는 것이 일반적인 공격형태였다.

단 함상공격기들은 1942년 3월부터 2개 소대, 합계 6대로 중대를 형성했다.

 

중대 2-3개가 모여 공격대를 형성해는데 공격대는 기종의 이름을 따서 함상전투기대, 함상폭격기대, 함상공격기대 등으로 불렀다.

공격대들을 모두 합쳐 항공대를 형성하는데 대부분 항공모함의 이름을 따서 아카기 항공대 등으로 불렀다.

 

(1942년 당시 일본 함재기들의 기본 대형. 출처 : Shattered Sword  P.81)

 

미드웨이 해전 당시 야마모토 제독이 제1항공함대를 주축으로 한 제1기동부대를 가장 전면에 내세운 데에는 공격을 중시하는 뿌리깊은 일본해군의 교리가 자리잡고 있다.

육군도 마찬가지지지만 일본해군은 미국이나 영국 등의 서구 열강들과 전쟁을 했을 경우 장기전으로 가게 되면 산업력의 격차 때문에 무조건 패배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들은 이러한 서구열강과 전쟁에 돌입했을 경우 무조건 단기결전으로 끝을 봐야한다고 생각했고, 특히 해군의 경우 군축조약에 의하여 주력함의 비율 자체가 제한됨으로써 이런 경향이 더욱 심했다.

일본해군의 경우 단기 결전을 지향하는 이런 교리가 작전에는 물론 무기개발과 교육체계에까지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일본의 군함들은 강력한 공격력이 제1의 조건이었으며, 구조적 강도나 안정성, 보수문제 등은 부차적 문제였다.

해군의 항공기도 마찬가지로 공격력과 뛰어난 운동성이 필수였으며, 이런 성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우수한 조종사를 중시했다.

그러면서도 정작 조종사의 손실을 줄이기 위한 방탄장비나 연료방루장치 등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전투에 따르는 필연적인 조종사의 손실을 메꿀 지속적이고 효율적인 조종사 양성계획 또한 등한시했다. 

어차피 전쟁 자체를 단기결전으로 끝낼 생각이었기 때문에 조종사 보호나 지속적인 조종사의 충원은 큰 의미가 없다고 본 것이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공격력은 강력하지만 상대적으로 방어력이 취약한 제1항공함대 중심의 제1기동부대를 선두에 내세운 것도 이러한 교리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즉 적보다 먼저 발견해서 먼저 때리는 것만 생각했지 먼저 발견당해서 먼저 얻어맞을 경우는 별로 염두에 두지 않은 결과였다.

일본해군이 항공모함을 보호하기 위하여 전방에 유력한 수상함대를 먼저 내보내기 시작한 것은 미드웨이 해전 이후였다.

 

이러한 일본해군의 공격 중시 사상을 항공모함과 함재기로 이루어지는 함대항공력 분야에서 극한까지 끌어올린 것이 바로 전함의 시대를 끝장내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항공모함의 전성시대를 열어젖힌 제1항공함대였다.

그리고 이러한 제1항공함대의 창설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당시에 일개 중좌에 지나지 않던 겐다 미노루였다.

 

1940년 10월에 겐다 중좌는 런던 주재 일본대사관 파견 근무를 마치고 도쿄로 돌아왔다. 

그는 곧 제1항공전대의 항공참모로 발령을 받았으나 부임까지 며칠 남았으므로 도쿄에서 여유있게 시간을 보내던 중 극장을 찾았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화면에서 미국의 뉴스 영상이 나왔는데 그 영상 속에서는 미국 항공모함 렉싱턴과 새러토가, 그리고 요크타운과 엔터프라이즈가 나란히 항진하고 있었다.

이 장면을 바라보던 겐다 중좌의 머리에 언뜻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항공모함의 집단을 전시용으로만 사용할 것이 아니라 실전에 사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다.

 

(제1항공함대의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 중좌.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일본해군은 1928년에 항공전대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정규항공모함과 경항공모함을 1척씩 짝지어 운용하는 체제를 시험해 보았으나 딱히 항모의 집단 운용에 대한 정립된 개념은 없었다.

따라서 항공전대도 대부분 정규항모와 경항모를 1척씩 짝짓거나 또는 항모 1척과 호위 구축함들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당시 제1항공전대도 항공모함 아카기와 구축함 4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만 제2항공전대는 항공모함 소류와 히류로 이루어져 있었다.

 

겐다 중좌는 항공전대를 정규항모 2척이나 경항모 2척씩을 묶어 만들고, 이런 항공전대 2-3개를 합쳐 하나의 항공함대를 만들어 집단운용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면 상당한 수의 급강하폭격기와 뇌격기들이 대규모 전투기 편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적을 공격할 수 있을 것이었다.

 

겐다 중좌는 제1항공전대에 부임하자마자  자신의 구상을 상급자들에게 털어 놓았다.

제1항공전대 사령부는 겐다의 발상에 흥미를 가졌으나 수많은 함재기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무전을 사용하면 기도 비닉이 어렵고, 다수의 항공모함에서 이함하는 함재기들이 대열을 갖추려면 항속거리를 희생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더군다나 항공전대의 구조를 획일적으로 항모 2척 체제로 바꾼다는 것은 자신들의 권한을 넘어서는 일로 생각했다.

 

사장되는 듯하던 겐다 중좌의 아이디어는 1940년 말에 뜻밖의 돌파구를 찾았다.

연말에 여러차례 이루어지던 회식에서 겐다 중좌는 우연히 제3전대장 오자와 지사부로 소장을 만났다.

겐다 중좌는 그 자리에서 항공모함을 집중운용하자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오자와 소장에게 설명했다.

비록 전함 중심의 제3전대를 맡고 있지만 원래 항공주병론자인 오자와 소장은 겐다 중좌의 아이디어에 큰 흥미를 보였다.

결단력과 실천력이 뛰어난 오자와 소장은 1941년 새해가 되자 인사차 도쿄에 들른 김에 해군성에 찾아가 항공본부장 이노우에 시게요시 중장에게 겐다 중좌의 아이디어를 설명했다.

이노우에 중장은 이 아이디어에 찬성하고 오자와 소장에게 해군대신 오이카와 코시로 중장과의 면담을 주선해 주었다.

오자와 소장의 설명을 들은 해군대신 오이카와 중장이 겐다 중좌의 아이디어를 적극 받아들임으로서 1941년 1월부터 항공함대의 창설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41년 4월 10일에 제1항공전대(아카기, 카가), 제2항공전대(소류, 히류) 및 제4항공전대(류조)로 구성된 제1항공함대가 창설되었다.

 

(제3전대장 오자와 지사부로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제1항공함대의 창설은 세계해전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항공모함과 함재기로 이루어진 함대항공력은 집단적인 운용을 통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전장에서 전략적으로 의미있는 결과를 만들어 낼 능력을 가지게 되었고, 항공모함은 정찰과 견제라는 소극적 위치에서 벗어나 해전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항공모함은 이렇게 해전의 패러다임을 바꾸면서 전함의 시대를 끝장내었으며 이후 항공기의 발달에 힘입어 제1항공함대의 등장 이후 7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해전의 주역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영국과 미국은 전통적인 선진 공업국이자 해양강국으로서 항공모함의 도입과 운용 면에서도 일본에게 영향을 주었고 앞선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제1항공함대의 창설로 일본해군은 함대 항공력에 관한 한 세계 선두로 나섰다.

일본은 진주만 기습 이후 1942년 6월의 미드웨이 해전에서 제1항공함대가 몰락할 때까지 선구자로서의 잇점을 누렸다.

 

집중운용되는 함재기의 가공할 위력은 1941년 12월 7일의 진주만 기습으로 확연하게 드러났다.  

정규항모 6척(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 쇼가쿠, 즈이가쿠)을 보유한 나구모 제독의 기동부대는 진주만에 기습적인 항공공격을 가하여 단 2번의 공습으로 불과 2시간 만에 8척의 전함을 전열에서 탈락시키고, 강력한 미태평양함대를 반신불수로 만들었다.

당시 전 세계에서 이런 강력한 항공공격을 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함대는 오직 일본해군의 기동부대 뿐이었으며, 미드웨이 해전에서 몰락하기 전까지 제1항공함대는 단일 함대로서는 의심의 여지없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함대였다.

 

항공력을 주요 타격수단으로 사용하는 제1항공함대의 사령관으로 항공부문에 무지한 나구모 주이치 중장이 임명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였다.

나구모 중장의 직속상관인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은 나구모 중장을 싫어했다.

당시 나구모 중장은 전함을 중시하고 군축조약에 비판적인 함대파의 중요한 인물로서 군축조약에 찬성하는 야마모토 제독 및 이노우에 시게요시 제독 등과 대립하고 있었다.

야마모토 제독이 연합함대 사령관에 임명된 이유가 해군차관 시절 공공연하게 군축조약 찬성을 주장하고 다녀서 반대파의 극단주의자들에 의하여 암살될까봐 그를 아끼는 해군 수뇌부에서 안전한 해상으로 내보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당시 야마모토 제독은 유서를 써서 품에 지니고 다녔다고 하니까 근거없는 소문은 아니었다.

 

당연히 야마모토 제독이 나구모 제독을 좋아할 리가 없었고, 더군다나 나구모 제독은 항공전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그러나 1941년 3월의 시점에서 야마모토 제독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야마모토 제독은 제1항공함대의 사령관으로 유능한 항공주병론자인 오자와 소장을 임명하고 싶어했으나 신설된 항공함대의 사령관은 중장급의 자리였으며, 오자와 제독은 불과 5개월 전인 1940년 11월 1일에 제3전대 사령관으로 발령이 났었다.

자기 마음에 든다고 해서 발령난 지 5개월 만에 소장을 현재 직위에서 빼내어 중장으로 진급시켜 새 직위에 앉힌다는 것은 야마모토 제독의 권한 밖이었다.

연공서열을 중시하는 일본해군의 인사 관행에서 신설된 제1항공함대 사령관 자리는 해군대학장을 맡고 있던 나구모 중장에게 돌아가는 것이 순리였으며 야마모토 제독으로서는 그를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사실 나구모 제독의 입장에서도 제1항공함대 사령관 자리가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이 새로운 자리가 전망이 밝기는 했다.

하지만 나구모 제독은 수뢰전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해군 내에서 승진해 왔으며 전함을 중시하는 구시대적 사고방식을 가진 제독이었다.

그에게 첨단무기인 항공기는 낯설었고, 시시각각 변하는 항공전 교리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제1항공함대 사령관으로서 나구모 제독은 겉보기에는 화려하지만 몸에 잘 맞지 않는 값비싼 옷을 걸친 듯한 불편함을 늘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제1항공함대를 주축으로 편성된 기동부대는 그의 지휘 하에서 진주만 기습을 시작으로 6개월 동안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야마모토 제독은 진주만 기습에서 제3차 공격을 포기해 버린 나구모 중장의 소극적인 행동에 크게 실망하여 그를 해임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승리를 거두고 돌아와서 해임을 당한다는 것은 당시의 일본해군 내에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치욕이었다.

이런 식으로 해임을 당한 당사자는 도저히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으며 당시의 일본해군 분위기에서 그것은 할복하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진주만 기습의 성공으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야마모토 제독의 요청이라고 해도 그러한 무리한 해임 건의는 대본영 해군부나 내각의 해군성에서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그 이후로도 기동부대의 놀라운 전공이 계속 쌓여감에 따라 나구모 제독을 해임할 기회는 사라졌다.

 

그리고 야마모토 제독도 제1항공함대 사령관으로서 나구모 중장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구모 제독은 자신이 항공전에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주로 항공전에 관한 내용일 수 밖에 없는 야마모토 제독의 명령에 반박하거나 논쟁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유능한만큼 독선적이기도 했던 야마모토 제독은 부하들의 반대 의견을 듣는데 익숙하지 않았고 따라서 투덜거리다가도 일단 명령을 내리면 고분고분 따르는 나구모 제독이 다루기 편한 면도 있었다.

 

사령관이 항공전에 무지하다면 참모장의 역할이 중요해지는데 불행하게도 제1항공함대 참모장 구사카 류노스케 소장은 무능했다.

구사카 참모장은 항공주병론자로서 열정은 상당했으나 항공작전을 실제로 수립하거나 평가하는데 필요한 전문적 식견이 모자랐다.

 

(제1항공함대 참모장 구사카 류노스케 소장.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이런 상황에서 제1항공함대의 실질적 작전수립은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 중좌가 담당했다.

제1항공함대의 탄생에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했던 겐다 중좌는 자신의 영역인 항공작전의 수립에 대단한 열정과 전문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도 거기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아직 젊은 일개 중좌로서 경험이 부족하고 전장의 전체적인 국면을 바라보는 시야가 좁다는 한계 또한 절감하고 있었다.

따라서 겐다 중좌는 항공전에 대한 전문성과 경험, 그리고 폭넓은 시야를 겸비하여 자신이 놓치고 있는 점을 지적해 줄 수 있는 유능한 상관을 원했으나 불행하게도 제1항공함대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

 

제2항공전대장 야마구치 다몬 소장은 확실히 나구모 사령관이나 구사카 참모장보다는 항공전에 대하여 경험이 많고 유능했다.

실제로 그는 미드웨이 해전에서도 제1항공함대의 주력이 격파된 상황에서 히류 1척만을 이끌고 과감하게 반격을 가하여 요크타운을 격침했다.

그러나 그에 대하여 연구한 서구 역사가들은 대부분 야마구치 제독을 지나치게 공격일변도이며 명예를 중시하는 전형적인 사무라이로 평가한다.

겐다 중좌 또한 야마구치 제독이 득실을 계산하지 않고 무조건 공격만을 주장하는 무식한 지휘관이라고 생각했다.

 

(제2항공전대장 야마구치 다몬 소장.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야마구치 제독에 대한 겐다 중좌의 혐오감을 심화시키는 데에는 연합함대 참모장인 우가키 마토메 소장도 책임이 있었다.

제1항공함대 사령부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야마구치 제독은 우가키 참모장을 만날 때마다 제1항공함대의 나구모 사령관이나 구사카 참모장이 능력이 없으니까 항상 소극적이라고 불만을 털어 놓았다.

우가키 참모장은 그럴 때마다 맞장구를 치면서 야마구치 제독에게 제1항공함대 사령부의 소극적인 경향을 항상 지적하고 공격정신을 일깨워주라고 요청했다.

따라서 야마구치 제독은 제1항공함대의 회의에 참석하면 필요 이상으로 호전적인 주장을 펴면서 나구모 사령관과 구사카 참모장의 우유부단함을 비난했고 이런 행동은 겐다 항공참모에게 야마구치 제독이 무조건 공격만 주장하는 무식한 지휘관이라는 인상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부정적 인상 때문에 겐다 중좌는 제1항공함대에서 자신을 지도해 줄 수 있는 능력과 경륜을 가진 유일한 인물인 야마구치 제독으로부터 배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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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암호 해독 

 

1942년 3월 말에 눈에 띄지는 않지만 미드웨이 해전, 나아가 태평양전쟁 전체의 승패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중요한 사건이 태평양함대 사령부의 암호해독반인 하이포국(Station HYPO)에서 일어났다.

하이포국의 암호해독가들이 1940년 1월 1일에 적용된 이래 2년 이상 해독이 불가능했던 일본해군의 암호 JN-25b 의 해독에 성공한 것이었다. 

 

일찌기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미국은 일본의 외교암호를 해독할 수 있었다.

1920년대에는 미국무부의 허버트 야들리가 이끄는 '블랙 챔버'(the Black Chamber) 라고 불리던 비밀 기관에서 일본을 비롯한 몇몇 나라의 외교전문을 가로채서 해독했다.

1921년의 워싱턴 해군군축조약에서 미국대표였던 국무장관 찰스 휴이는 블랙챔버의 도움을 받아 일본의 격렬한 반발을 무릅쓰고 미국, 영국과 일본의 주력함 비율을 10 :10 : 6 으로 제한하는 안을 밀어 붙여 관철시킬 수 있었다.

일본정부가 자국의 대표단에게 회담이 결렬될 위기가 오면 10 :10 :7 의 비율을 끝까지 고집하지 말고 미국과 영국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훈령을 보낸 것을 중간에 블랙챔버가 가로채 해독한 것이었다.

 

런던 조약을 앞두고 1928년에 블랙챔버는 외교전문을 해독하여 알아낸 일본의 회담전략에 대하여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새로운 국무장관인 헨리 스팀슨에게 제출했다.

이제까지 블램챔버라는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던 스팀슨 장관은 몸서리를 쳤다.

그는

 

"신사는 다른 신사의 편지를 훔쳐보지 않는 법"

("gentlemen do not read other gentlemen's letter")

 

이라면서 블랙챔버를 폐쇄해 버렸다.

물론 미국무부는 몇년 지나지 않아 다시 일본의 외교암호를 해독하기 시작했지만 적어도 몇 년간 미국무부의 외교암호 해독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미해군은 1924년부터 국무부와는 별도로 일본해군의 암호를 해독하고 있었다.

워싱턴에 있는 해군성 건물 꼭대기 층에 사무실 하나를 차지한 이 비밀스런 조직은 오랫동안 OP-20-G 로 불렸다.

OP-20-G 를 창설하고, 진주만 기습 직후까지 20년 가까이 키운 인물은 진주만 기습 당시 중령이었던 로렌스 새포드였다.

그는 OP-20-G 를 창설하고 키웠을 뿐 아니라 1932년에는 필리핀의 코레히도르 섬에 캐스트국(Station CAST)을, 1936년에는 하와이에 하이포국(Station HYPO)을 개설했는데, 캐스트국은 나중에 필리핀이 일본군의 공격을 받자 호주의 멜버른 근처로 이동하여 벨코넨국(station Belconnen)이 된다.

하지만 새포드의 가장 큰 공적은 뭐니뭐니해도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암호를 해독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한 수많은 암호해독가들을 키워낸 것이었다.

 

새포드는 OP-20-G 를 창설하면서 해군 내에서 암호해독가들을 추천받았는데, 이때 함대급유함 쿠야마의 함장 체스터 저지 중령이 휘하의 소위 1명을 새포드에게 추천했다.

이 소위는 암호해독에 대한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지만 신문이나 잡지의 십자말풀이를 기막히게 잘했다.

키가 크고 말랐으며 말투가 상냥한 이 소위는 곧 새포드에게 인정을 받아 다음해인 1925년에는 OP-20-G 내에서 새포드의 바로 아래인 제2인자가 되었고, 이후 새포드의 동료로서 함께 OP-20-G 를 키워 나갔다.

미드웨이 해전을 이야기할 때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일등공신의 한 사람인 조셉 로슈포트 중령은 이렇게 암호해독가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조셉 로슈포트 중령)

 

1929년에 미해군은 로슈포트를 포함한 3명의 장교를 3년간 일본에 파견했다.

표면상으로는 주일 미대사관의 무관이었지만 실제로는 일본어와 문화를 공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당시 로슈포트와 함께 파견된 장교들 중에는 나중에 태평양함대의 정보참모로서 로슈포트의 단짝이 되는 에드윈 레이튼 중위도 끼어 있었다.

 

미해군은 현장을 모르는 책상물림들이 수뇌부에 앉는 것을 막기 위하여 장교들이 진급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정기간(보통 1년) 동안 해상근무를 해야만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새포드와 로슈포트도 몇 년마다 반드시 해상근무를 해야만 했고 그럴 때는 육상에 남은 사람이 OP-20-G 를 책임졌다.

 

1941년 6월에 전쟁의 위험이 높아지자 새포드는 이제 중령 승진을 앞둔 로슈포트를 전투정보실(Combat Intelligence Unit = CIU) 로 이름이 바뀐 하와이의 하이포국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곳에서 로슈포트는 중령으로 승진하여 일본해군의 암호 중에서 난이도가 높은 '제독암호'(Admiral's Code)를 해독하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당시 일본해군은 제독암호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로슈포트는 제독암호로 발신되는 통신 자체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고 따라서 해독작업도 전혀 진전이 없었다.

한편 일본해군이 실제로 사용하던 '작전암호'(Operational Code)의 해독작업은 필리핀의 캐스트국이 담당했다.

캐스트국에서는 작전암호의 해독에 결정적인 몇 가지 단서를 확보하기도 했으나 정작 해독에는 실패했다.

 

그동안 하이포국에서는 남아도는 시간을 활용하여 정량적 분석에 힘을 기울였다.

이들은 일본군의 호출부호를 확인하고 통신의 빈도, 길이, 발신 위치 등을 통하여 의미있는 정보를 뽑아내는 정교한 방식을 개발했다.

예를 들어 특정 일본함대의 통신량이 갑자기 늘어나면 그 함대가 중요한 작전을 앞두고 있다는 의미였다.

함대가 해상에 나와 있다면 일정량의 통신을 발신하는 것이 당연했다.

만일 해상에 나와 있던 일본기동부대의 통신량이 갑자기 줄어들거나 없어진다면 이것은 어쩌면 통신량의 급증보다도 더 중요한 의미일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정량적 분석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고, 반드시 통신내용을 해독할 필요가 있었지만 하이포국은 이런 정량적 정보를 매우 정성들여 축적하고 철저하게 분석해 두었기 때문에 나중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하이포국은 특정 함정의 통신사들이 키를 두드리는 습관마저도 일일이 분류해 두었는데 가령 항공모함 아카기의 통신사는 키를 두드리는 습관이 매우 나빠서 마치 발로 걷어차는 듯했다.

 

실제로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해군의 돈틀레스들이 일본항공모함들을 성공적으로 기습하고 난 후 하이포국은 일본함대가 송신하는 것을 포착했는데, 나구모 제독의 호출부호를 사용하여 송신하고 있는 사람이 아카기의 통신사가 아니라는 것을 파악했다.

하이포국에서는 통신사의 키 두드리는 방식을 유심히 관찰한 후 송신한 인물이 경순양함 나가라의 통신사임을 확인했다.

따라서 태평양함대 사령부는 일본함대의 통신내용을 전혀 알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제1기동부대의 기함 아카기가 돈틀레스의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어 나구모 제독이 경순양함 나가라로 사령기를 옮겼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1941년 12월 7일에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자 미리 경고를 발하지 못했던 OP-20-G 는 된서리를 맞았다.

OP-20-G 를 창설하고 20년 가까이 애지중지 길러왔던 새포드 중령은 비명 한 번 지를 틈도 없이 하루아침에 목이 날아가고, 후임으로 암호해독과는 거의 인연이 없던 존 레드먼 대령이 임명되었다.

 

로슈포트 중령은 그래도 계속 하이포국의 책임자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신임 태평양함대 사령관인 니미츠 제독 덕분이었다.

물론 니미츠 제독 역시 진주만 기습을 미리 경고하지 못한 하이포국과 로슈포트 중령을 믿지는 않았으나, 그는 태평양함대 사령관이 되기 직전까지 해군장교들의 인사를 담당하던 항해국장이었기 때문에 OP-20-G 의 새로운 책임자인 존 레드먼 대령을 잘 알고 있었다. 

니미츠 제독은 존 레드먼 대령이 뛰어난 장교이자 훌륭한 스포츠맨이며 전함과 순양함에서 통신관련 임무를 맡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레드먼 대령이 암호해독 분야에서는 거의 경험이 없으며 단지  OP-20-G 가 소속되어 있는 해군 통신 부문을 총괄하던 조셉 레드먼 소장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OP-20-G 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니미츠 제독은 로슈포트 중령을 당장 경질하려는 레드먼 대령의 시도를 저지하고, 로슈포트 중령의 능력을 확인할 때까지 일단 하이포국의 책임자 자리에 그대로 앉혀 두기로 결정했다.

물론 로슈포트 중령은 곧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로슈포트 중령은 진주만이 기습을 받은 직후 더 이상 제독암호에 매달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앞으로 일본해군의 작전암호를 해독하겠다고 태평양함대 사령부에 요청하여, 1941년 12월 17일에 허가를 받았다.

이때부터 하이포국은 일본해군의 작전암호 해독에 매달려 3개월 만인 1942년 3월 말에 드디어 해독에 성공했다.

만일 로슈포트 중령이 1941년 6월에 하이포국에 부임하자마자 바로 작전암호 해독을 담당했다면 어쩌면 진주만 기습을 미리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1924년에 창설되면서 OP-20-G 는 처음으로 접한 일본해군의 암호를 JN-1(Japanese Naval Code, Ver.1) 이라고 불렀다.

이후 일본해군이 암호를 개량할 때마다 버전도 점점 올라갔다.

1939년 6월에 일본해군은 한층 복잡하고 해독하기 힘든 암호를 도입했는데 이것이 JN-25 였다.

6개월 후인 1940년 1월 1일부터 일본해군은 JN-25 를 개량한 JN-25b 를 도입했는데, 미해군의 암호해독가들이 이 JN-25b 를 해독하는데 2년 이상이 걸렸다.

 

JN-25b 는 겉보기에는 단순한 형식을 띠고 있었다.

모든 암호는 약 40,000 - 45,000 개의 5자리의 숫자로 이루어져 있었고, 각 숫자가 하나의 단어를 의미했다.

그러나 숫자 중간중간에는 적의 암호해독가들을 혼동시키기 위하여 의미없는 가짜 숫자가 들어 있었다.

또한 송신하기 전에 원래 숫자에다가 별도의 난수표에 있는 숫자를 더하여 송신했다.

더한 숫자가 난수표 몇 페이지 몇째줄 몇번째 숫자인지는 통신 속에 숨어있는 지시숫자를 확인해야 했다.

따라서 암호를 받는 쪽에서는 먼저 지시숫자를 적은 암호첩을 보고 통신 속에서 지시 숫자를 찾은 다음 지시 숫자가 가리키는 난수표를 찾아서 해당 페이지, 해당 줄의 해당 위치에 있는 특정 숫자를 수신받은 숫자들에게서 빼고 나서 그렇게 나온 숫자를 가지고 암호집을 뒤져 대응하는 단어를 찾아야 했다.

한마디로 JN-25b 를 난수표나 암호집 없이 해독하기는 대단히 어려웠으며, 실제로 일본해군은 자신들의 암호를 해독하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일본해군의 통신량이 하루 500 통에서 1,000 통 정도로 대단히 많았기 때문에 미해군의 암호해독가들은 IBM 사가 만든 컴퓨터의 조상에 해당하는 기계의 도움을 받아 일본해군의 통신문 속에서 일정한 패턴을 발견해 분류하고 그것을 분석했다.

그 결과 그들은 가짜 숫자를 구분하는 아주 간단한 방법을 알아내었는데 그것은 원래 숫자 중 의미가 있는 숫자는 반드시 3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이었다.

또한 캐스트국에서는 JN-25b가 처음 도입된 40년 초반에 일본해군이 같은 내용을 이미 해독이 가능한 JN-25 와 새로운 JN-25b 를 모두 사용하여 통신한 사례를 몇 건 확보해 두었다.

이것은 하이포국에게 그야말로 로제타석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로슈포트 중령의 뛰어난 기억력과 추리력, 그리고 일본어와 일본문화 및 일본인의 사고방식에 대한 이해 능력이 합쳐지자 난공불락이던  JN-25b 도 서서히 읽어낼 수 있었다.

 

진주만 기습을 예고하지 못한 죄로 지위가 불안하던 로슈포트 중령은 1942년 1월 중순에 제한적인 정보를 토대로 승부수를 던졌다.

로슈포트 중령은 일본해군의 통신에서 건져낸 '공격부대' 및 'RR' 이라는 단 2개의 단어와 통신량 및 송신 위치만을 근거로 일본군이 곧 라바울을 공격할 것이라고 니미츠 제독에게 말했다.

실제로 일본이 1월 23일에 라바울을 침공하자 감명을 받은 니미츠 제독은 로슈포트 중령의 능력을 인정했고, 이후 로슈포트 중령은 레드먼 대령의 교체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후 2월과 3월을 거치면서 하이포국의 암호해독능력은 쑥쑥 늘어나서 3월 말이 되자 전술적인 의미가 있을 정도로 정확한 해독이 가능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이포국이 마치 일본군의 서류를 손에 들고 보듯이 척척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하이포국은 일본해군 통신량의 약 60% 정도를 가로채었고, 모든 인력이 12시간 교대로 24시간 내내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인력과 시간의 부족으로 그 중에서 약 40% 정도만 분석할 수 있었다.

하이포국은 통신의 길이, 빈도, 송신 위치 등을 따져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통신을 골라낸 다음 분석에 들어갔는데 보통 분석에 들어간 분량의 절반 정도만 해독이 가능했다.

따라서 일본해군의 전체 통신량 중에서 약 10% - 15% 정도만을 해독하는 셈으로, 예를 들어 1942년 5월 5일에 하이포국이 해독한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카가와 (?????) (?????) 더 적은 (?????) 그리고 (?????) 5월 4일에 (?????) 붕고수도를 떠날 것이며 (?????) (?????) 도착할 것이다."

("Kaga and (?????) (?????) less (?????) and (?????) will depart Bungo Channel (?????) May 4th and arrive (?????) (?????)")

 

이제 빈 칸을 채우는 것은 로슈포트 중령의 몫이었다.

이러한 해독과정에 큰 도움을 준 사람은 태평양함대의 정보참모로서 일본유학 시절 로슈포트 중령과 친하게 지냈던 에드윈 레이튼 중령이었다.

로슈포트 중령보다도 일본어와 일본문화, 일본식 사고방식에 훨씬 더 정통했던 레이튼 중령은 니미츠 제독으로부터 야마모토 제독처럼 생각해서 그가 할 행동을 예측하라는 명령을 받았을만큼 태평양함대 내에서 대표적인 일본통이었다. 

 

(태평양함대의 정보참모 에드윈 레이튼 중령.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니미츠 제독이 로슈포트 중령을 점차 믿을수록 하이포국과 워싱턴에 있는 OP-20-G 와의 대립 상황은 점차 심각해져 갔다.

레드먼 대령은 킹 제독의 허가를 받아 하이포국을 포함한 전 세계의 미해군 암호해독가들이 해독한 내용을 OP-20-G 에서 종합하여 다시 지역 사령관들에게 배포하는 체계를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이포국이 워싱턴을 거치지 않고 태평양함대 사령부에 직접 보고하자 킹 제독에게 이러한 상황을 바로잡아 달라고 요청했다.

레드먼 대령의 요청을 받은 킹 제독이 니미츠 제독에게 앞으로는 하이포국으로부터 직접 보고를 받지 말고 일단 워싱턴으로 보내어 검증을 받은 내용을 보고받으라고 권고하자 니미츠 제독은 즉각적이고 날카롭게 반발했다.

예상 외의 반응에 놀란 킹 제독은 니미츠 제독의 사람보는 안목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으므로 갑자기 로슈포트 중령의 능력이 궁금해졌다.

킹제독은 이례적으로 로슈포트 중령에게 직접 전문을 보내어 일본기동부대의 행동을 중심으로 태평양의 상황에 대한 평가를 요구했다.

 

로슈포트 중령은 즉시 부하들을 불러모아 상황을 분석하고 보고서를 작성한 다음 니미츠 제독의 허가를 받아 워싱턴에 전송했다.

킹 제독은 보고서 제출을 요구한 뒤 불과 6시간 후에 로슈포트 중령의 보고서를 받았는데, 분량은 반페이지도 안되었으며, 내용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1. 일본기동부대는 인도양에서 철수 중이며, 다음 작전은 태평양에서 실시할 것이다.

2. 일본은 호주를 점령할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

3. 다음 작전은 라바울을 출발한 부대가 산호해를 통하여 포트모르즈비를 공격하는 것으로 기동부대의 항공모함이 참가하지만 전부 참가하지는 않는다.

4. 포트모르즈비 작전 다음에는 더 큰 작전이 예정되어 있는데 정확한 목적이나 대상 지역은 모른다.

 

킹 제독은 단 4 문장으로 그 복잡하고 방대한 내용을 간명하게 정리하고 거기에 더하여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까지 명확하게 구분한 로슈포트 중령의 보고서에 큰 감명을 받았다.

당시 킹 제독의 책상에는 벨코넨국의 정보를 바탕으로 일본군의 다음 목표가 포트모르즈비가 아닌 알류샨 열도라는 간단한 내용을 쓸데없이 장황하게 늘어놓은 OP-20-G 의 두툼한 정보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

두 보고서를 비교해 본 킹 제독은 로슈포트 중령의 예측이 옳고 그름을 떠나 이런 식의 깔끔한 정보보고를 매일 받던 니미츠 제독이 OP-20-G 를 거치라는 킹 제독의 명령에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후 산호해 해전과 미드웨이 해전을 거치면서 로슈포트 중령의 예측이 정확하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적어도 태평양함대의 작전에 관한 한 OP-20-G 와 레드먼 대령은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났다.

 

니미츠 제독은 하이포국의 의견에 따라 산호해에 일본항모기동부대가 나타난다는 전제 하에 결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이 둘리틀 공습을 위하여 빠져나가는 바람에 렉싱턴과 요크타운 밖에 투입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일본군의 작전개시가 늦어질 때를 대비하여 엔터프라이즈와 호넷도 진주만으로 돌아오는 즉시 산호해로 파견했으나 아무리 빨라도 5월 14일 이전에는 도착할 수 없었다.

결국 태평양함대와 일본연합함대는 각각 항공모함 세력의 일부만을 투입한 산호해 해전에서 최초로 정면 대결을 벌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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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MI 작전 

 

1942년 4월 18일 오후 12시 30분, 일본의 수도 도쿄 상공에 마술처럼 홀연히 미군의 쌍발폭격기들이 나타나서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미국 항공모함 호넷에서 출격한 B-25 쌍발폭격기 16대로 이루어진 둘리틀 공격대였다. 

갑판에 B-25 를 실은 항공모함 호넷과 호위하던 엔터프라이즈 및 호위 함정들로 이루어진 미국의 항공모함 기동부대는 진주만 기습 당시 일본함대가 사용했던 북태평양 항로를 거꾸로 되짚어 와서 일본의 수도에 기습적인 폭격을 가한 것이었다.

 

(제임스 둘리틀 중령.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뒷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일본해군은 도쿄를 공습한 미항모기동부대를 포착하려 했다.

인도양에서 돌아오던 나구모의 항모 5척 중 MO 작전을 지원할 쇼가쿠와 즈이가쿠를 제외한 아카기, 소류, 히류가 즉시 대만 동쪽으로 진출하여 도쿄 남부 해상에 있을 것으로 예상한 미국의 항모기동부대를 수색했다.

그러나 미국의 항모기동부대는 일본해군의 예상보다 훨씬 북쪽에서, 예상보다 훨씬 먼 거리에서 둘리틀 공격대를 발진시키고는 회수하지도 않고 그대로 철수해 버렸으므로 일본항공모함들은 미항모기동부대를 찾을 수 없었다.

 

폭격으로 인한 물적 피해는 미미했다.

육군항공대의 둘리틀 중령이 지휘하던 16대의 B-25 폭격기 중 13대가 도쿄를 폭격하고, 3대가 한신공업지대를 폭격하여 사망 45명, 부상 153명, 가옥피해 680채의 피해를 입혔다.

요코스카에서 건조 중이던 경항공모함 류호가 폭탄 1발을 맞아 가벼운 피해를 입었고, 나고야의 미츠비시 항공기 조립공장도 폭탄 1발을 맞았다.

 

그러나, 둘리틀 폭격이 일본에게 던져준 정신적인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대낮에 미군 항공기가 일왕이 있는 일본의 수도 도쿄를 공습하여 일왕을 위험에 빠뜨린 것이었다.

정부와 군은 다같이 격노했고, 특히 해상으로부터의 공격에 대하여 본토 방어의 책임을 진 일본해군의 충격과 분노는 더욱 컸다.

벌건 대낮에 도쿄가 폭격을 당하자 군령부 총장 나가노 오사미 대장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라고 넋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으며, 야마모토 제독은 야마토 함상의 자기 선실에 틀어박혀 하루종일 두문불출했다.

(둘리틀 폭격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미국의 항공모함이 없었다면 이런 공격은 불가능했다.

이제 1942년 4월 18일 이후로 미국의 항공모함은 의심할 여지없는 일본의 가장 큰 적으로 떠올랐다.

동시에 미국 항공모함의 격멸을 목적으로 한 야마모토 제독의 미드웨이 침공작전은 최고의 가치와 우선순위를 인정받게 되어 아무도 감히 딴지를 걸 수 없는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도쿄 폭격 다음날인 4월 19일에 대본영 육군부의 작전부장 다나카 신이치 육군소장은 해군부의 도미오카 대좌에게 육군은 미드웨이 침공작전인 MI 작전을 무조건 지지한다고 말했다.

대본영 육군부는 20일에 MI 작전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며 필요한 육군병력을 요청하는 즉시 파견하겠다는 의사를 해군부에 정식으로 전달했다.

더 나아가 다나카 장군은 도미오카 대좌에게 연합함대가 주장하던 하와이 상륙작전에 대한 자세한 자료를 요청했다.

4월 25일 대본영 육군부는 해군부에 공문을 보내어 만일 해군이 요청한다면 항공모함의 기지 자체를 말살해 버리는 하와이 점령작전에 필요한 병력도 기꺼이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공식적으로 전해왔다.

실제로 이날 제2사단과 제7사단이 하와이 침공을 위한 상륙작전 훈련에 돌입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며칠 후에는 제53사단과 1개 독립공병연대, 그리고 1개 전차연대가 같은 명령을 받았다.

하와이 침공을 위한 상륙훈련은 9월 말까지 완료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제 미드웨이 침공을 위한 연합함대의 MI 작전은 갑자기 탄력을 받게 되었다.

 

MI 작전을 살펴볼 때 우선 알류샨 열도 점령을 위한 AL 작전은 미드웨이 점령을 위한 MI 작전과 별개의 작전이라는 것을 알아두어야 한다.

AL 작전은 애투, 애닥 및 키스카 섬을 점령하는 1단계(6월 8일까지), 예상되는 미군의 반격을 물리치는 2단계(6월 20일까지), 그리고 점령 지역을 확보하는 3단계(6월 20일 이후)로 나뉘어진다.

각 단계마다 참가하는 함정들이 다르고, 단계가 바뀔 때마다 일부 함정들은 MI 작전에서 AL 작전으로 돌려지기도 하고, 또 일부 함정들은 MI 작전을 위하여 빠져나가기도 한다. 

 

MI 작전에 투입되는 함대는 크게 항공모함 중심의 제1기동부대, 미드웨이 침공부대, 그리고 야마모토 제독이 직접 지휘하는 주력부대로 나뉘어진다.

이들 중 미드웨이 침공부대는 수상기 모함 전대, 수송대, 근접지원전대, 소해대, 그리고 미드웨이 침공부대의 본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MI 작전은 AL 작전에서 더치하버를 공습하는 날짜와 같은 6월 3일(미드웨이 날짜, 도쿄 날짜로는 6월 4일, 앞으로는 모두 미드웨이 날짜)에 시작한다.

6월 3일 아침에 나구모 중장이 지휘하는 제1기동부대는 미드웨이 북서쪽의 발진위치에 도달한다.

제1기동부대는 제1항공전대(아카기, 카가), 제2항공전대(히류, 소류), 제5항공전대(쇼가쿠, 즈이가쿠)의 항공모함 6척을 중심으로 제3전대 제2분대(하루나, 기리시마), 제8전대(도네, 치쿠마), 그리고 경순양함 나가라를 기함으로 하여 구축함 11척으로 편성된 제10수뢰전대, 그리고 급유함 5척과 호위를 위한 구축함 1척으로 편성된 보급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날의 공습에 동원될 함재기는 약 160대였으며 단 1번의 공습으로 미드웨이의 항공력을 전멸시키고 비행장을 무력화시킬 예정이었다.(실제로는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6월 4일에는 제1기동부대의 함재기들이 하루 종일 미드웨이의 방어시설을 폭격할 예정이었다.

미함대는 미드웨이 폭격이 시작된 이후에야 진주만을 출항할 것이므로 3일 이내에 도착하기는 어렵지만 만약에 대비하여 10대의 97식 함상공격기로 미드웨이 남방 640km 지점까지 경계망을 펼칠 예정이었다.

 

6월 5일에는 제1기동부대의 함재기들이 미드웨이를 폭격하는 동안 후지타 류타로 소장이 지휘하는 수상기 모함 전대가 미드웨이에서 북쪽으로 100km 떨어진 구레 환초에 상륙한 후 수상기 기지를 건설하여 미드웨이 근해에서 미국함대와 대결할 일본함대를 지원할 예정이었다. 

수상기 모함 전대는 미드웨이 침공부대 소속이었다.

 

6월 6일 아침에는 미드웨이에 대한 상륙작전이 실시될 예정이었다.

오타 미노루 대좌가 지휘하는 제2연합해군육전대 1,500 명은 샌드 섬에, 이치기 기요노 육군대좌가 지휘하는 이치기 지대 1,000 명은 이스턴 섬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참고로 연합육전대를 지휘한 오타 미노루 대좌는 소장으로 진급한 후에 1945년 6월에 제32군 휘하에서 오키나와의 오로쿠 반도를 방어하다가 미해병제6사단의 공격을 받아 전사했다.

이치기 기요노 육군대좌는 8월 21일에 과달카날의 일루 강 하구에서 벌어진 테나루 전투에서 전사했다.

 

미드웨이 상륙은 샌드 섬과 이스턴 섬의 남해안을 통하여 실시될 예정이었으며, 약 100 명 정도가 탈 수 있는 다이하츠라는 일본식 상륙주정을 사용할 예정이었다.

 

(다이하츠.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2,500 명의 전투병력 이외에 설영대 2개 대대, 기상관측 요원, 기타 미드웨이 기지를 수리하고 유지할 인원 등 2,500 명의 비전투 요원을 포함하여 상륙병력은 총 5,000 명이었다.

수송선들은 이외에도 대공포 96문, 기관총 40정, 소형잠수정 6척, 어뢰정 5척 등 미드웨이를 강력한 전초기지로 만드는데 필요한 장비들을 싣고 있었다.

또한 6월 중순까지 추가 잠수정과 육지에 설치할 어뢰 발사관, 200mm 해안포 12문 등이 배치될 예정이었다.

 

해군육전대는 요코스카와 구레에서 승선하여 사이판에서 이치기 지대와 합류한 다음 다나카 라이조 소장의 지휘 하에 수송대를 형성하여 미드웨이로 향할 예정이었다.

수송대는 수송선 1척, 제1차 세계대전형 구축함을 개조하여 해군육전대를 수송하던 경비함 3척, 그리고 급유함 1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호위는 경순양함 진츠와 구축함 10척으로 이루어진 제2수뢰전대가 담당했다.

 

수송대 전방에는 제7전대(구마노, 스즈야, 미쿠마, 모가미)와 제8구축대(아사시오, 아라시오), 그리고 급유함 1척으로 이루어진 구리타 다케오 중장의 근접지원대가 앞장서 나갔다.

제7전대의 중순양함 4척이 보유한 8인치 주포 40문으로 미드웨이 상륙작전시 함포 지원사격을 실시할 예정이었다.

 

수송대와 조금 떨어져서 소해함 4척, 구잠함 3척, 수송선 2척, 탄약수송선 1척으로 이루어진 소해대가 뒤따르고 있었다.

 

뒤쪽에서는 곤도 노부다케 중장이 지휘하는 침공부대 본대가 항진할 예정이었다.

침공부대 본대는 제3전대 제1분대(공고, 히에이)를 중심으로 제4전대 제1분대(아타고, 죠카이) 및 제5전대(묘코, 하구로)로 이루어져 있었다.

경순양함 유라를 중심으로 구축함 7척으로 이루어진 제4수뢰전대가 호위를 맡았고, 경항공모함 즈이호와 구축함 미카즈키로 이루어진 항공전대가 딸려 있었다. 

 

제1기동부대와 미드웨이 침공부대 후방에는 야마모토 제독 자신이 이끄는 주력부대가 자리잡고 있었다.

주력부대는 제1전대(야마토, 나가토, 무츠)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일본함대에서 가장 강력한 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호위는 경순양함 센다이와 구축함 8척으로 이루어진 제3수뢰전대가 담당했으며, 경항공모함 호쇼와 구축함 유우카제로 이루어진 항공전대가 딸려 있었다.

이외에 미드웨이에 배치할 소형잠수정들을 적재한 수상기 모함 지요다와 닛신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급유함 2척이 따라다니고 있었다.

 

이외에 잠수함 15척으로 이루어진 선견부대가 진주만과 미드웨이 사이에 전개하여 미함대의 출동상황을 감시하기로 되어 있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함대가 참패한 원인으로 함대 간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상호 지원이 불가능했다는 사실이 항상 지적되어 왔으며, 특히 강력한 화력을 가진 야마모토 제독의 주력부대가 후방에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 집중적인 비판의 대상이 된다.

분명히 옳은 지적이기는 하나 야마모토 제독이 왜 그렇게 주력부대를 멀리 후방에 위치시켰는지 알려면 미드웨이 해전 당시 일본해군의 마음가짐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미드웨이 해전 당시 일본해군에는 개전 이후 6개월 동안에 걸친 연속적인 승리에 취하여 미해군을, 특히 미해군의 사기와 의지를 너무 얕잡아보는 경향이 만연해 있었다.

서방측의 역사가들은 당시 일본해군의 이러한 경향을 가리켜 '승리병'(Victory Disease)이라는 다분히 냉소적인 용어로 부르는데 야마모토 제독도 승리병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MI 작전에서 야마모토 제독이 가장 우려한 사태는 미해군의 반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작전이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미해군이 겁을 집어먹고 싸우러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미함대가 6개월 간의 연속적인 참패에 완전히 기가 꺾여서 감히 일본함대와 정면으로 승부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야마모토 제독은 미함대를 안전한 진주만에서 꾀어내기 위하여 세심하게 작전을 짰다.

 

야마모토 제독의 계획에서 사실 전함 공고와 히에이를 보유한 곤도 중장의 침공부대 본대는 미끼였다.

공고와 히에이를 잡으려고 미함대가 출격하면 나구모의 제1기동부대와 잠수함들을 포함한 일본함대들이 달려들어 미해군의 주력을 약화시키고 이후에 야마모토 제독 자신이 주력부대를 이끌고 나타나서 마무리를 짓는다는 시나리오였다.

따라서 강력한 전력을 가진 주력부대는 미드웨이가 점령될 때까지 미군 정찰기의 행동반경 밖에 머물러야 했다.

야마토를 위시한 주력부대의 막강한 위용을 보고 나면 미함대가 겁을 집어먹고 안전한 진주만에 웅크리고 앉아 나오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이없을 정도로 오만하고 어리석은 사고방식으로 전쟁사학자들이 승리병이라는 냉소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결코 심한 것이 아니다.

 

야마모토 제독의 예상에 따르면 미해군은 미드웨이가 점령된 이후에야 도착할 것이었다.

따라서 일단 미드웨이가 점령되면 나구모 제독의 제1기동부대는 미드웨이 북쪽 800km 해상으로 물러가서 숨는다.

주력부대는 나구모 제독의 서쪽 480km 해상에서 대기한다. 

주력부대의 북쪽 480km 해상에는 AL 작전에 참가했던 다카수 시로 중장의 호위함대가 대기한다.

다카수 함대도 제2전대(휴가, 이세, 후소 , 야마시로)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함대였다.

나구모 제독의 제1기동부대 북쪽 480km 위치에는 역시 AL 작전에 참가했던 가쿠다 가쿠지 소장의 제4항공전대(류조, 준요)가 대기한다.

이 상태에서 공고와 히에이를 보유한 곤도 함대는 미드웨이 남쪽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미함대를 꾀어낸다.

 

항공모함과 구형 전함으로 이루어진 미함대는 미끼로 던진 곤도 함대를 잡으려고 안전한 진주만을 떠나 서쪽으로 항진한 다음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미드웨이로 접근한다.

도중에 일본잠수함들이 미함대를 포착하여 보고를 한 다음 공격을 가하여 전력을 약화시킨다.

미함대가 발견되면 나구모 제독의 제1기동부대와 가쿠다 제독의 제4항공전대는 남쪽으로 내려와 함재기로 미함대의 전력을 추가로 약화시킨다.

그동안 다카수 제독의 함대는 남하하여 야마모토 제독의 주력부대와 합류한다.

이후 전함 7척으로 강력해진 주력부대가 현장에 도착하여 미국함대를 전멸시킨다.

 

전투가 끝나면 나구모 제독의 제1기동부대는 6월 16일과 20일 사이에 트럭으로 물러가고, 전함들은 일부는 본토로 철수하고 일부는 북상하여 AL 작전에 참가한다.

이후 나구모 제독의 항공모함들은 뉴칼레도니아를 거쳐 피지, 사모아로 진출하는 FS 작전을 지원한다.

8월에는 존스턴 섬에 상륙하여 하와이를 더욱 고립시키고, 어쩌면 FS 작전으로 고립된 호주 본토에 상륙하여 호주의 항복을 받아낼 수도 있었다.

하와이 또한 함대를 잃어버리고 일본의 전진기지에 둘러싸인 채 약화되면 최종적으로 상륙해서 점령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일본해군으로서는 참으로 가슴 벅찬 시나리오였다.

 

야마모토 계획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단 한번의 작전으로 너무 넓은 영역에서 너무 많은 목표를 동시에 추구했다는 점이었다.

그 결과 함정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버려 200 척 가까운 대함대가 동원된 작전에서 일차적으로 가장 중요한 목표인 미드웨이의 무력화에 투입된 함정 수는 22척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이 22척도 제5항공전대(쇼가쿠, 즈이가쿠)를 포함한 숫자였다.

 

알류샨 열도는 쓸데없는 목표물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었다.

더치하버를 공습하고, 애투와 키스카를 점령하는데 50척 가까운 전투함을 투입한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만일 나구모 제독이 미국항모기동부대를 섬멸하면 알류샨 열도는 언제든지 점령할 수 있었다.

반면 나구모 제독이 실패하면 알류샨 열도는 아무 가치가 없었다.

 

실제로 일본의 항공모함 4척을 격멸하고 덤으로 미드웨이까지 지켜낸 미국 입장에서 애투와 키스카를 상실한 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미드웨이 해전이 끝난 후에 일본군이  애투와 키스카에 상륙하기 위하여 상당한 전력을 할애했다는 것을 알게 된 해군장관 프랭크 녹스는 다음과 같은 간결한 표현으로 야마모토 제독의 계획을 평했다.

 

"일본은 현대전을 이해할 수 없거나 그것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

("Japan was either unable to understand modern war or not qualified to take part in it.")

 

일본이 참패한 또다른 요인은 쇼가쿠와 즈이가쿠로 이루어진 제5항공전대가 MO 작전에 참가했다가 큰 피해를 입어 미드웨이 해전에 불참한 사실이었다.

만일 나구모 제독이 6척의 정규항공모함을 운용할 수 있었으면 계획 자체에 존재하던 모든 불리한 여건을 극복하고 미드웨이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MO 작전에 제5항공전대를 참가시키고, MI 작전과 동시에 AL 작전을 실시하도록 야마모토 제독에게 강요한 것이 대본영이라는 점에서 미드웨이 해전의 참패에는 대본영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야마모토 제독의 또다른 큰 실수는 상대인 미해군을 너무 몰랐다는 점이었다.

그의 생각과 달리 미해군은 전혀 주눅이 들어 있지 않았다.

미국 항공모함기동부대의 장병들은 결코 자신들이 일본의 항모기동부대보다 실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니미츠 제독도 자신의 부하들을 완전히 신뢰하고 있었다.

미해군은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일본함대와 결정적인 전투를 벌여서 진주만의 원수를 갚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야마토의 모습을 본다고 해서 미해군이 움츠러들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굳이 주력부대의 존재를 숨길 이유가 없었다.

 

만일 야마모토 제독의 주력부대가 전면에 나섰다면 미드웨이 해전 전체의 판도를 바꿀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주력부대가 제1기동부대와 함께 행동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최고 속력이 27노트인 야마토는 그럭저럭 같이 행동할 수 있어도 야마토보다 2노트 정도 느린 나가토와 무츠는 소류나 히류보다 10노트 가까이 느렸다.

따라서 제1기동부대와 같이 행동하는 것보다는 주력부대가 제1기동부대 전방에 나서서 행동했으면 실제 역사에서 제1기동부대로 집중된 미군의 항공력을 상당부분 흡수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또 한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구리타 중장이 지휘하던 제7전대의 운용이다.

침공부대 본대인 곤도 중장의 함대가 전함 2척과 중순양함 4척을 보유하고 있는데 굳이 다른 방향에서 중순양함 4척으로 이루어진 제7전대를 따로 미드웨이에 도착하도록 만들 이유는 없었다.

만일 제7전대가 나구모 중장의 제1기동부대와 함께 행동했더라면 4척의 중순양함이 보유한 수상정찰기들이 제1기동부대의 정찰능력을 크게 높여주어서 적시에 미군항모를 발견할 확률이 훨씬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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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국의 전략적 상황 

 

1942년의 첫 4개월 간 미국 태평양함대는 일본해군과의 대결에서 죽을 쑤고 있었다. 

일본해군이 1941년 12월 7일에 단행한 진주만 기습은 미해군의 자신감을 뒤흔들어 놓았다.

수십년간 미함대의 주축이었던 전함부대는 2회의 공습으로 절름발이가 되었다.

함대 주력이 분쇄된 태평양함대는 필리핀의 함락을 저지할 수 없었고,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지키기 위한 노력에 한줌의 소함대 외에는 지원할 여력이 없었다.

결국 일본군이 놀라운 속력으로 서부 태평양을 휩쓸며 급속하게 세력을 확장하는 동안 태평양함대는 지켜보는 수 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세계 최강이라고 믿어 왔던 미해군으로서는 자존심이 짓뭉개지는 참담한 상황이었다.

 

만일 체스터 니미츠라는 걸출한 사령관이 나타나서 태평양함대의 침통한 분위기를 추스르고 사기를 진작시키지 못했다면 이 잔인한 1942년의 상반기 동안에 태평양함대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그렇게 위축된 심리상태에서는 좋은 기회가 왔다한들 미드웨이 해전같이 모든 것을 걸고 한판 승부를 벌여 전략적 판세를 뒤집어 엎어버리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니미츠 제독도 태평양의 암담한 전황을 당장 극복할 방법은 없었고, 4월이 되자 상황은 더욱 암울해졌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가 일본군에게 무릎을 꿇으면서 호주가 일본의 침공 위협에 노출되었고, 소규모의 미국 아시아 함대는 소멸했다.

필리핀의 바탄반도에서 농성 중이던 미-필리핀 연합군의 주력은 4월 9일에 항복했다.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를 빼앗긴 영국은 버마에서도 일본군에게 쫓기면서 이제 인도가 공격당할까봐 전전긍긍하는 처지로 굴러 떨어졌다.

태평양의 정세는 말 그대로 파국적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런 참담한 패배를 겪으면서 니미츠 제독을 비롯한 미군 수뇌부는 4가지의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첫째로 전함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었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이기려면 미국은 항공모함으로 제해권을 장악하고, 잠수함으로 남방자원지역과 일본본토와의 교통로를 차단해야 했다.

진주만의 연기가 걷히기도 전에 아군의 항공모함 세력을 보호하고 증강하는 동시에 적의 항공모함을 때려잡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는 공감대가 태평양함대 내에 형성되었다.

 

둘째로 일본과의  전쟁은 미국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규모의 네덜란드 군은 소멸했다.

결정적인 문제로서 영국 세력 또한 태평양에서 사라졌다.

영국 육군은 인도 방어에 전념하고 있었으며, 강력했던 영국해군은 동부 인도양과 태평양 전 해역에서 영향력을 상실하여 영연방인 호주나 뉴질랜드의 방어에도 기여할 수 없었다.

태평양 지역에서 영국 세력의 이러한 갑작스럽고 완전한  몰락은 미국의 입장에서 전쟁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사태였으나 엄연한 현실이었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우수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없이 일본에 대항하기에는 인구나 산업규모가 턱없이 작았다.

 

셋째로 미국은 태평양에서 가장 중요한 두 지점 - 하와이와 파나마 운하 - 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파나마 운하는 일본군의 대규모 침공이 어렵다고 생각되었지만 진주만 공습을 경험한 하와이는 문제가 달랐다.

미국은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하와이를 고수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방어력을 증강했다.

1941년 10월에 30,000 명이었던 하와이 주둔군은 1942년 4월까지 70,000 명으로 늘어났고, 조만간 115,000 명까지 늘어날 예정이었다.

미국은 필요하면 하와이 주둔군을 20만이고 30만이고 그 이상으로도 늘릴 용의가 있었으며, 미드웨이와 존스톤 섬 등 하와이 외곽을 둘러싼 기지들도 강화했다.

 

또한 미국이 일본에게 승리하기 위해서는 호주와 뉴질랜드가 필요했으며 이들 동맹국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연락선을 확보하는 일이 중요했다.

호주는 1942년 2월말부터 일본군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는데 자국의 정예사단들은 중동에서 영국군과 함께 전투 중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존 커틴 호주 수상에게 미국이 호주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보장으로서 이미 파견되어 있는 육군항공대와 소규모의 해군에 더하여 빠른 시간 내로 미육군의 정규보병사단 1개, 가능하면 2개를 파견하겠다고 약속했다.

호주에 미군사단을 전개한다는 것은 연락선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즉 호주와 하와이 사이의 피지, 뉴칼레도니아, 사모아 등지에 파견되어 있는 명목뿐인 호주군과 뉴질랜드 수비대를 대체할 미군 병력들이 당장 파견되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여기서 마지막 깨달음이 따라왔다.

즉 태평양에서의 병력 수요가 충당될 때까지 미국은 영국과 약속한 "독일 먼저"("German First") 원칙을 '유연하게' 해석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개전 6개월 후인 1942년 중반에 나치 점령 하의 유럽에 상륙하겠다는 전쟁 전 미국의 계획은 태평양의 골치아픈 문제들이 없었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일시적이나마 독일 우선 원칙을 뒤로 밀쳐둔다는 것은 극적인 방향전환이었다.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이렇게 어렵고 중요한 시기인 1941년 12월 31일에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니미츠 제독은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뛰어난 지휘관이었으며, 사람들을 다루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태평양함대 사령관에 정식으로 취임하기 1주일 전인 1941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진주만에 도착하여 며칠간 태평양함대의 상황을 파악했다.

니미츠 제독은 태평양함대 장병들의 사기가 지독하게 떨어져 있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진주만 기습 이후 20일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으니 당연했다.

 

(태평양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 자세한 설명은 여기로)

 

니미츠 제독은 1941년 12월 31일에 잠수함 그래일링 호의 갑판에서 취임했다.

그리고, 그날 밤에 벌어진 취임 환영회 겸 송년회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던 폭탄 선언을 했다.

즉 그는 기존 태평양함대 참모들 및 지휘관들을 전원 유임시키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연회에 참석했던 장교들은 진주만 기습으로 자신들의 경력은 끝났다고 생각했으며 취임 환영회를 자신들을 궁벽진 곳으로 좌천시키기 전에 신임 사령관이 베풀어주는 송별회로 생각했다.

그런데 니미츠 제독의 깜짝 발표가 있자 침울하던 장교들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면서 가라앉아 있던 환영회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이 소문이 태평양함대 내로 퍼져나가자 바닥까지 떨어져 있던 진주만의 사기가 하루아침에 뛰어올랐다.

 

이후 니미츠 제독은 최대한 약속을 지켰고, 몇몇 장교들이 이동했지만 대부분 진급을 위하여 필수적인 해상근무를 나가는 등의 일상적인 이동이었다.

니미츠 제독은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기 직전까지 미해군의 인사를 담당하는 항해국장이었기 때문에 뛰어난 인재들이 태평양함대로 배속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진주만 기습은 이들에게 책임을 물을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이렇듯 니미츠 제독은 부하들의 존경과 신뢰를 얻고 그들의 능력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사령관 취임 직전까지 해군장교의 인사를 담당하는 항해국장을 지낸데다가 사람을 보는 눈이 정확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근본적으로 니미츠 제독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인간관이 부드러운 인상과 관대하고 겸손한 태도로 나타났기 때문에 그를 만나본 사람은 친근하고 편안하며 자신이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겉모습과 달리 강인한 내면을 가지고 있어서 스트레스가 심한 상황에서도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이익과 위험부담을 계산하여 행동할 수 있었다.

평소 행동은 신중하고 조심스러웠으나 필요하면 놀라울 정도로 대담하고 공격적으로 돌변했다.

 

니미츠 제독은 자신의 직속상관인 킹 제독과 마찬가지로 조직화의 명수로서 조직을 통하여 임무를 달성했으며, 조직에 임무를 할당하고, 필요하면 조직을 만들고, 인물을 배치하고, 권한과 한계를 규정하고 조율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서 니미츠 제독은 자신의 뛰어난 조직화 능력을 통하여 자신의 개성을 태평양함대라는 거대한 조직의 구석구석까지 불어넣었다.

따라서 그의 지휘 하에서 태평양함대는 신중하고 용의주도한 면과 대담하고 공격적인 면을 동시에 갖춘 효율적이고 강력한 전쟁기구로 변모했다.

 

(미함대총사령관 겸 해군참모총장 어네스트 킹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니미츠 제독은 에섹스 급 항공모함이 쏟아져 나오는 1943년 후반기가 되기 이전에도 적절한 기회가 온다면 자신이 가진 항공모함 전력만으로도 일본해군의 주력, 특히 일본의 항모기동부대를 충분히 격멸할 수 있다고 믿었다. 

1942년의 전반기에 일본 항모기동부대의 능력에 대하여 모두들 히스테리에 가까운 공포심을 품고 있을 때에도 니미츠 제독은 자신의 항모기동부대 승조원들과 함재기 조종사들이 일본 항모기동부대와 맞서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물질적인 열세로 인하여 니미츠 제독은 일본해군에게 결전을 강요할 수 없었고, 일본해군의 움직임에 대응하면서 기회를 노리는 수 밖에 없었다.

태평양전쟁 개전 당시 미해군이 보유한 항공모함 7척 중에서 일본의 정규항공모함들과 맞대결이 가능한 것은 시험적 성격이 강한 레인저를 빼고 6척이었다.

1942년 4월 1일 현재 6척 중 가장 작은 와스프는 아직 대서양에 있었고, 새러토가는 1942년 1월에 일본잠수함의 어뢰를 맞아 미본토에서 수리 중이었으며, 가장 늦게 취역한 호넷은 곧 태평양으로 투입될 예정이었다.

니미츠 제독은 사용가능한 렉싱턴, 요크타운, 엔터프라이즈를 사용하여 1942년 2월과 3월에 태평양의 일본군 외곽 기지들을 공격했다.

이러한 공격은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주지는 못했으나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항공모함 기동부대는 실전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사기와 공격정신을 강화시겼다.

 

1942년 4월에 태평양함대는 미함대 총사령관 겸 해군참모총장인 킹 대장의 명령에 의하여 특이한 작전을 수행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태평양 전쟁 초기부터 진주만의 원수를 갚고 미국민과 미군 장병들의 사기를 높이며 일본국민들에게 간담이 서늘한 경고를 주기 위하여 일본제국의 수도인 도쿄를 공습하는 방법을 연구하라고 킹 제독을 압박했다.

도쿄를 공습할 수 있는 거리에 미군 비행장이 없는 상황에서 대통령의 압박을 견디다 못한 킹 제독과 참모들은 항공모함에 항속거리가 긴 육군항공대의 B-25 쌍발폭격기를 싣고 도쿄 부근에 다가가서 이함시킨 다음 도쿄를 폭격하고 중국으로 향한다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리하여 태평양으로 파견되는 신예항공모함 호넷이 샌디에이고에서 B-25 쌍발폭격기 16대를 싣고 태평양함대에서 파견한 항모 엔터프라이즈의 호위를 받으면서 도쿄 부근으로 다가가서 이함시켰다.

제임스 둘리틀 육군중령이 지휘한 이 B-25 쌍발폭격기들은 도쿄를 공습하고 중국으로 도주했다.

 

'둘리틀 공습' 이라고 불린 이 도쿄 공습으로 일본이 입은 물질적 피해는 미미했다.

하지만 대낮에 미군 폭격기에 의하여 수도인 도쿄가 공습당했다는 사실이 일본국민과 군부에 준 충격은 어마어마하여 차기 작전 방향을 두고 대립하고 있던 일본군 수뇌부의 혼란상황을 종식시키고 야마모토 제독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리하여 둘리틀 공습은 맞수인 일본 연합함대의 야마모토 제독과 미국 태평양함대의 니미츠 제독이 서로 바라던 기회, 즉 상대방의 항모기동부대를 말살해 버릴 수 있는 결전장인 미드웨이 해전으로 두 사람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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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일본의 전략적 상황

 

1942년 3월 8일에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연합군을 총지휘하던 네덜란드 군의 텔 푸어텐 중장이 일본제16군 사령관 이마무라 히도시 중장에게 항복함으로써 일본군은 남방작전의 제1단계를 사실상 끝마쳤다.

비록 필리핀의 바탄반도에서는 미-필리핀 연합군이 농성하고 있었으나 미함대가 이들을 구원할 여건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체적인 전황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이제 일본의 판도는 자신들이 주장하는 2,600 년 역사상 최대의 크기로 팽창하여 북으로는 만주에서 남으로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와 뉴기니 북부, 서쪽으로는 버마, 동쪽으로는 괌과 웨이크같은 미국령을 포함하여 영국령인 길버트 제도에서 쿠릴열도를 잇는 선까지 확장되었다.

 

이 광대한 영역 내에는 일본이 남방작전에서 얻으려고 하던 지역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우선 일본의 숙명적인 아킬레스 건이었던 석유가 펑펑 쏟아지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가 있었으며 중요한 전략물자인 고무 뿐만 아니라 주석같은 귀중한 금속들이 풍부하게 산출되는 말레이 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나아가 일본본토와 이러한 남방자원지대를 연결하는 해상로를 보호할 중요한 기지인 필리핀도 있었다.

또한 버마에서 영국군이 축출되면서 1937년 이래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고 있던 중국의 생명줄인 버마통로도 차단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미태평양함대의 기지인 진주만을 기습하여 강력한 태평양함대를 절름발이로 만들었고, 그 결과 미국은 일본에 대한 반격은 커녕 웨이크 섬 뿐만 아니라 미군과 필리핀군 10만명과 함께 필리핀까지 일본의 손아귀에 넘겨준 채 하와이와 미본토 서해안, 그리고 호주와의 연락선을 유지하는데 급급한 처지로 전락했다.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를 지키던 영국군은 모두 항복했으며, 버마 주둔 영국군 또한 랭군을 빼앗기고 버마 북부로 내몰리고 있었다.

세계 최강이라던 영국해군 또한 신예전함 프린스오브웨일즈와 순양전함 리펄스를 일본군의 항공기에게 어이없이 잃은 후에 실론 방면으로 밀려났다.

동남아 지역에 주둔하던 미군, 영국군, 네덜란드군 및 호주군을 통합지휘하던 ABDA 사령부는 와해되었고, ABDA 사령부에 소속되었던 해군세력은 자바해 해전에서 치명상을 입고 이후 며칠 사이에 사실상 소멸했으며, 지상군 병력들 또한 3월 8일까지 대부분 포로로 잡혔다.

 

일본군은 불과 11개 사단과 약 2,000대의 항공기, 그리고 해군력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비교적 소규모의 군대를 투입하여 3개월 만에 이런 놀라운 군사적 위업을 달성했는데 3개월이라는 기간은 그들이 예측했던 6개월보다 무려 3개월이나 앞당겨진 것이었다.

희생 또한 적어서 진주만 기습 이후 1942년 5월 1일까지 상실한 해군함정이 척수로는 23척에 달한다지만 모두 구축함 이하의 소형 함정이라 톤수로는 26,441톤에 불과하였다.

최악의 경우 전체 보유 함정의 25% 인 30만톤까지 상실할 것을 각오했던 일본으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작은 손실이었다. 

 

(1937년 - 42년에 걸친 일본의 팽창 상황. 원본은 여기로)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적은 희생을 치르고 빠르게 얻은 커다란 성공이 일본에게 새로운 고민을 안겨 주었다.

 

일본의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제1단계 이후의 계획이 사실상 없었다는 것이었다. 

제1단계 이후의 계획에 대하여 정해진 것이라고는 진주만 기습 1달 전인 1941년 11월 5일에 정부-대본영 연락회의에서 내려진

 

'미국의 전쟁의지를 상실케하여 종전한다.'

 

는 뜬구름같은 결정 하나뿐이었다.

따라서 미국의 전쟁의지를 어떤 식으로 상실케 하여 전쟁을 마무리할 것이냐 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해석하기 나름이었는데 그 중에서는 미국에 빨리 강화 제안을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일본 외상 도고 시게노리는 개전 이후 3주 밖에 지나지 않은 42년 1월 정초에 외무성에 대한 훈시 속에서 직원들에게 앞으로 기회가 오면 즉시 미국과 강화 협상을 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라고 요구했다.

이외에도 일본정부와 의회 일각에서는 조기 강화를 위하여 미국에 강화 제안을 하자는 소수 의견이 있었으나 대본영이 반대했다.

안 그래도 미약했던 선제 강화 제안을 통한 조기 강화론은 1942년 초부터 놀라운 전승분위기가 이어지면서 2월 말이 되자 완전히 세력을 잃어버렸다.

 

이제 전쟁의 종결방식과 시기를 결정하는 일은 대본영의 손에 맡겨졌다.

그런데 대본영의 육군부(참모본부)와 해군부(군령부)는 선제 강화 제안에 반대하고 미국이 먼저 강화 제안을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은 같았으나 구체적인 실천방안은 전혀 달랐다.

그리고 해군 내부에서도 대본영 해군부와 실전부대인 연합함대 사령부의 생각이 달랐다.

 

우선 일본육군은 제1단계에서 획득한 지역 이외에 추가 점령은 절대 반대했다.

중국전선을 주요 전선으로 보고 남방전선은 중일전쟁의 연장선에서 파악하고 있던 일본육군은 남방작전에 전체 51개 사단 중에 11개 사단 밖에 내놓지 않았다.

중국에 21개 사단이 있었고, 만주에 13개, 조선에 2개, 그리고 일본본토에 4개 사단이 있었다.

육군은 남방작전의 성공으로 이제 일본의 목을 죄던 석유문제가 해결되었으니 남방지역에서는 철저하게 수세를 유지하면서 중국전선에 집중하여 중일전쟁을 마무리짓고 싶어했으며, 또한 기회가 오면 소련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고 싶어했다.

한마디로 일본육군은 해군이 주역이고 자신들은 조연일 수 밖에 없는 낯선 남방전선에 더 이상 병력을 투입하기 싫어했다.

 

일본해군은 육군의 이러한 생각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해군은 전략적 주도권을 쥐고 있을 때 이 기회를 최대한 살려야 하며 만일 여기서 멈춘다면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미국에게 반격의 기회를 줄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일본해군은 서태평양의 지배자로서 적어도 서태평양에서만큼은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따라서 해군은 이러한 주도권을 활용하여 연합군에게 한 번 더 타격을 가할 필요가 있으며 만일 이 타격이 충분히 강력하다면 미국을 강화협상 테이블로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육군은 이미 점령한 지역을 단단하게 요새화하여 이 방어선을 뚫으려는 미국에게 지속적인 피해를 강요함으로써 미국을 지쳐 나가떨어지게 만드는 것이 더 좋은 전략이라고 주장했다.

 

해군에서도 육군의 전략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진주만 기습에서 기동부대를 지휘했던 나구모 주이치 중장과 참모장 구사카 류노스케 소장이었다.

이들은 일본의 항모기동부대에게 휴식과 항공기 및 조종사를 보충할 여유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일본의 팽창이 진행되는 동안은 도저히 그럴 짬을 낼 수 없었다.

 

문제는 나구모 제독과 구사카 참모장이 진주만 기습을 가장 강경하게 반대했던 인물들이라는 점이었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진주만 기습의 주역이면서도 연합함대 내에서 두 사람의 발언권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일단 확보한 영역을 지키기만 한다는 것은 공격을 중시하는 일본해군의 전통에 정면으로 반하는 행동으로 야마모토처럼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제독이 제안했더라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킬만한 방침이었다.

따라서 나구모 제독이나 구사카 참모장같이 영향력이 없는 인물이 이런 방침을 내세우자마자 바로 무시되고 말았다.

 

(기동부대 사령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반면 대본영 해군부(군령부)는 호주를 침공하고 싶어했다. 

미국이 반드시 호주를 발판으로 반격을 개시하리라고 생각한 해군부는 호주를 침공하여 항복을 받아내거나 최소한 호주 북부의 항구들만 점령해 버려도 일본에 반격하려는 미국의 모든 계산을 헝클어 버릴 수 있다고 믿었다.

일본항모기동부대의 다윈 공습에는 분명히 이런 생각도 근저에 깔려 있었다.

그러나 일본육군은 호주 침공에 필요한 병력이 최소한 10개 내지12개 사단에 이르고, 일본 해군력의 대부분과 150만톤에 해당하는 수송선이 필요하다는 계산을 들고 나와 호주침공작전을 간단히 취소시켰다.

 

그러자 해군부는 대신 호주와 미국의 연락선을 차단하는 FS 작전을 들고 나왔다.

즉 우선 뉴기니 남부의 포트모레스비와 중부 솔로몬 군도의 툴라기를 점령하고 이후 뉴헤브리디즈 군도, 뉴칼레도니아(누메아), 피지를 거쳐 사모아까지 진출함으로써 호주와 미국의 연락선을 차단하고 미국이 호주를 강력한 반격기지로 사용하지 못하게 막는다는 구상이었다.

해군부는 포트모레스비와 툴라기를 점령하는 작전은 모레스비에서 따온 MO 작전이라고 이름짓고, 피지와 사모아 방면으로 진출하는 작전은 피지와 사모아에서 따온 FS 작전이라고 이름붙였다.

해군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해야만 했던 육군은 자신들의 병력이 많이 필요하지 않은 FS 작전에 호의를 보였고, 그 결과 1942년 1월 10일에 나가노 오사미 군령부 총장(해군부)과 스기야마 하지메 참모총장(육군부) 사이에 FS 작전을 실시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군령부 총장 나가노 오사미 대장.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한편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제독은 대본영 해군부와 생각이 달랐다.

야마모토 제독도 미국을 강화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려면 결정적인 승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는 호주 대신 하와이를 침공하고 싶어했다.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연합함대 참모장 우가키 마토메 제독은 진주만 기습 직후인 1941년 12월 9일에 야마모토 제독에게 불려가 하와이 침공 작전을 연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우가키 제독은 우선 하와이 외곽의 미드웨이, 존스턴, 칸톤, 그리고 팔미라 섬을 점령한 후에 오아후 섬에 상륙한다는 하와이 침공작전을 만들었다.

 

곧 연합함대의 참모들은 대본영 해군부를 상대로 하와이 침공작전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1941년 12월 16일에 대본영 해군부 작전부 작전계획반의 도미오카 대좌가 차후의 작전을 논의하기 위하여 히로시마 만에 있는 하시라지마 정박지의 연합함대 사령부에 왔다.

연합함대의 참모 구로시마 가메토 대좌는 도미오카 대좌에게 연합함대가 하와이와 사모아 사이의 팔미라 섬을 점령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팔미라 섬 점령계획이 자신이 선호하던 피지-사모아 방면 진출을 연합함대도 지지하는 증거라고 착각한 도미오카 대좌는 도쿄로 돌아가서 상관인 작전부장 후쿠도메 시게루 소장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후쿠도메 소장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육군부 작전부장인 다나카 신이치 육군소장은 연합함대의 속셈은 사모아 진출이 아니라 하와이 침공이라면서 육군은 하와이 침공에 필요한 대규모 병력을 제공하는데 절대 반대라는 점을 명확하게 했다. 

다나카 소장이 자신의 판단을 부정하자 화가 난 도미오카 대좌는 연합함대 사령부에 연락하여 계획을 설명할 사람을 대본영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1941년 12월 27일에 연합함대의 참모인 미와 요시다케 대좌가 대본영에 와서 연합함대의 계획을 설명했는데 도미오카 대좌는 이때서야 연합함대의 속셈을 알았다.

 

도미오카 대좌는 연합함대의 하와이 침공 계획을 저지하기 위하여 즉시 행동을 개시했다.

우선 부하인 가미 시게노리 대좌에게 보급 면에서 하와이 침공작전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증명하는 보고서를 만들도록 명령한 후 군령부 총장 나가노 오사미 대장에게 연합함대 사령부의 계획을 알리고 빨리 육군부와 FS 작전에 대해 합의할 것을 요청했다.

나가노 대장은 육군부와의 협의를 서둘러서 1942년 1월 10일에 참모총장 스기야마 하지메 육군대장과 MO 작전 및 FS 작전을 실시하기로 전격적으로 합의했다.

 

다음날인 1월 11일에 가미 대좌는 보급 면에서 하와이 침공이 불가하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상륙에 따르는 모든 문제점들을 제쳐 놓고 일단 하와이를 점령하더라도 보급문제 때문에 유지할 수 없었다.

즉 하와이는 식량의 자급자족도 안되는 곳으로 점령한 후 주민과 대규모 주둔군을 위한 보급수요가 최소한 1달에 수송선 60척에 달하며 미군잠수함의 방해가 확실시되기 때문에 실제 수송선의 소요량은 한달에 60척을 훌쩍 넘는다면서 이는 일본이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대본영 해군부의 분위기를 전혀 모르던 연합함대 사령부에서는 빨리 하와이 침공작전을 승인하라고 재촉하기 위하여 참모 사사키 아키라 중좌를 대본영에 파견했다.

사사키 중좌는 1월 13일에 대본영에 도착하자마자 가미 대좌의 보고서를 받았고, 육군부로부터는 하와이 침공에 필요한 병력을 절대로 내놓지 않을 것이라는 퉁명하고 일방적인 통보를 들었다.

게다가 3일 전인 1월 10일에 이미 나가노 군령부 총장과 스기야마 참모총장이 하와이 침공 대신 MO 작전과 FS 작전을 실시하기로 합의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너무나 뜻밖의 사태에 완전히 얼이 빠진 사사키 중좌는 찍소리도 못하고 새파랗게 질려서 연합함대 사령부로 돌아갔다. 

 

사사키 중좌의 보고를 들은 야마모토 제독은 크게 노했으나 당장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MO 작전과 FS 작전이 너무 박력이 없다고 생각한 연합함대 사령부는 차라리 인도양으로 진출하여 실론 섬에 상륙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연합함대는 실론을 장악하면 영국의 가장 중요한 식민지인 인도의 반란을 촉발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독일과 연결할 수도 있다면서 1942년 2월 20일부터 23일에 걸쳐 야마토 함상에서 실시되는 전쟁연습(War Game)에 대본영 해군부와 육군부를 초청했다.

전쟁연습 결과는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연합함대 참모장인 우가키 소장마저도 자신의 일기에 인도양 전쟁연습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적었으니 대본영의 반응이야 볼 것도 없었다.

실제로 2월 28일에 열린 정부-대본영 연락회의에서 실론 침공은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육군은 실론 침공에 최소한 5개 사단 이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만한 수의 사단을 차출할 용의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버마 전선에서의 보급수요가 예상보다 크게 늘어 영국군을 추격하는 일본군에 대한 보급이 아슬아슬한 상황에 달하고 있었다.

이런 보급상황에서 실론 침공은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또한 독일은 일본과 만나기 위하여 중동에 진출할 계획이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했다.

따라서 독일과 일본이 연결한다는 정치적 선전목적도 물거품이 되었다.

 

1942년 3월 13일에 대본영 해군부와 육군부는 MO 작전과 FS 작전을 실시한다고 정식으로 합의하고 일왕에게 재가를 받았다.

이로써 차기 작전에 대한 논란은 끝난 것으로 보였으며, 상식적으로 볼 때 끝나는 것이 순리였다.

 

그러나 야마모토 제독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중부 태평양 방면에서 공세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육군의 반감을 피하기 위하여 하와이 상륙 대신 병력이 적게 소요되는 미드웨이 침공을 들고 나왔다.

야마모토 제독이 이러한 결정을 내린 데에는 1942년 2월 초부터 실시한 미군 항모기동부대의 작전이 큰 영향을 끼쳤다.

 

즉 미해군은 1942년 2월 1일에 엔터프라이즈와 요크타운을 내보내어 길버트 제도와 마셜제도를 폭격한데 이어 2월 20일에는 렉싱턴을 동원하여 라바울을 폭격하려고 시도했다.

렉싱턴의 라바울 공습은 일본군 정찰기에 미리 들키는 바람에 실패했지만 이때 렉싱턴의 와일드캣들은 요격을 위하여 날아온 제4공격대 소속의 1식 육상공격기 17대 중 15대를 격추했다.

미군의 피해는 와일드캣 2대뿐으로 함정의 피해는 전혀 없었다.

 

2월 24일에는 엔터프라이즈가 웨이크 섬을 폭격하더니 3월 4일에는 마르쿠스 섬을 폭격했다.

3월 10일에는 렉싱턴과 요크타운이 104대의 함재기를 내보내어 뉴기니 북부의 라에와 살라모아에 상륙하는 일본군을 공격했다.

기습을 받은 일본군은 전체 수송선의 2/3를 상실했다.

상륙작전 자체가 대참사로 끝나지 않고 성공한 이유는 대부분의 수송선들이 목적지 바로 부근에서 공격을 받아서 해안에 좌초함으로써 수송 중이던 병력과 장비 및 보급품들이 대부분 무사히 상륙했기 때문이었다. 

 

(미국항모기동부대의 초기 공격도. 출처 : 태평양전쟁, 맥아더, 그러나 니미츠, P73)

 

이러한 공격들은 전술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었으나 야마모토 제독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불쾌한 일이었다.

게다가 3월 4일에 공격을 받은 마르쿠스 섬은 일본본토에서 불과 1,800km 떨어져 있었다.

 

여기서 야마모토 제독은 일본의 가장 큰 위협은 바로 미국의 항공모함 그 자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묘하게도 야마모토 제독의 맞수인 태평양함대 사령관 니미츠 제독도 같은 결론에 도달해 있었다.

이제 미국 태평양함대와 일본연합함대는 서로 상대방의 항공모함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기회를 노렸다.

당시에는 일본연합함대가 주도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싸움터는 연합함대가 고르게 되었고, 야마모토 제독은 미드웨이를 택했다.

 

이러한 상황판단 하에서 야마모토 제독은 3월 중순부터 미드웨이 공략을 거세게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해군의 실전부대인 연합함대의 사령관이 대본영 해군부가 이미 육군과의 협의를 끝내고 정식으로 발효한 작전계획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사태가 벌어진 데에는 일본군 통수 체계의 허점이 자리잡고 있었다.

일본제국의 헌법에 따르면 군 통수권은 정부가 간섭할 수 없는 일왕의 고유한 대권으로서 이러한 통수권 행사를 보조하기 위하여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대본영이 따로 존재했다.

대본영의 역할은 일본군 최고사령관인 일왕을 위하여 작전을 짜고 군사 분야에 대하여 전문적 조언을 하는 역할로서 엄밀하게 말하면 실전부대에 직접 작전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은 없었다. 

하지만 일왕은 전통적으로 그러한 통수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지 않았으므로 실제로는 대본영이 작전을 짜고 실전부대에 명령을 내리는 군령권까지 행사했다.

하지만 이 경우 대본영의 군령권 행사는 어디까지나 편의적 해석으로 이론적으로는 실전부대에서 이러한 대본영의 군령권 행사를 거부하고 일왕에게 직접 자신들의 의견을 말할 권리가 있었다.

육군의 사단장 이상, 해군의 함대 사령관 이상이면 이런 권리가 있었으나, 해군의 경우 연합함대 사령관이 각 함대 사령관을 대표하여 이러한 권리를 행사하게 되어 있었다.

 

대본영 해군부인 군령부의 경우 군령부 총장이 해군의 최고위직이자 대부분 연합함대 사령관의 선배였으므로 연공서열이 뚜렷한 일본군에서 보통 별 문제없이 돌아갔지만 만일 실전부대인 연합함대 사령관이 대본영의 작전계획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끝까지 버틸 경우 엄밀하게 따져서 대본영 해군부가 이를 강제할 수 있는 공식적인 권한은 없었다. 

이런 상황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 바로 진주만 기습과 미드웨이 침공의 결정 과정이었다.

 

야마모토 제독은 1942년 4월 2일에 와타나베 야스지 대좌를 대본영에 파견하여 3일간 해군부와 미드웨이 침공을 둘러싸고 치열한 토론을 벌이게 했다. 

와타나베 대좌는 야마모토 제독의 논리를 그대로 전개하면서 미드웨이를 방어하러 나오는 미국 항모기동부대를 격멸하는 것이 호주와 미국 사이의 연락선을 차단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대본영 해군부에서는 도미오카 대좌와 그의 부하들인 야마모토 유지 중좌 및 미요 다츠키치 중좌가 반격에 나섰는데 특히 항공장교인 미요 중좌가 맹활약을 펼쳤다.

미요 중좌는 3가지 요지로 논리정연하게 미드웨이 침공작전을 비판하면서 와타나베 대좌를 몰아붙였다.

 

첫째로 미드웨이 침공은 지상발진 항공기의 지원을 받을 수 없다.

제1단계 작전에서 일본군이 거둔 놀라운 성공은 대부분 지상발진 항공기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졌다.

 

둘째로 미드웨이를 함락한다고 해도 가까운 하와이에 기지를 두고 활동하는 잠수함을 막을 방법이 없다.

따라서 미드웨이에 대한 보급은 미군 잠수함에 의하여 큰 타격을 입을 것이며 이미 한계에 달한 일본의 수송선 사정을 감안할 때 이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부담이다.

게다가 미드웨이는 작아서 소수의 항공기밖에 주둔할 수 없으며 이런 소규모의 항공대로는 수백대에 달하는 미군 항공기가 지키는 하와이를 압박할 수 없다. 

 

셋째로 따라서 미국의 항모기동부대가 미드웨이를 지키러 오지 않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미드웨이에 대한 보급의 곤란성과 소규모의 항공대 밖에 주둔할 수 없는 사정은 미군 또한 잘 알고 있을 것이며 따라서 무리하게 맞대결하는 대신 일단 미드웨이를 내주고 일본함대가 물러가면 잠수함을 동원하여 보급을 차단하고 지속적인 공습으로 약화시킨 다음 탈환하려 할 수 있다.

 

거기에 비하면 FS 작전의 이점은 명확하다.

미국으로서는 전쟁에 이기기 위하여 호주가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호주와의 연락로를 차단하는 FS 작전은 미국에게 미드웨이 침공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위협이며 따라서 반드시 항모기동부대를 보내어 저지하려 할 것이다.

그러면 연합함대의 항모기동부대는 이미 점령한 지상 비행장에서 발진하는 항공기의 지원을 받는 훨씬 유리한 조건에서 미국항모기동부대를 격멸할 수 있다.

 

미요 중좌의 논리정연한 비판에 와타나베 대좌는 할 말을 잃었으며 원통함에 눈물만 뚝뚝 흘렸다.

2일 밤에 와타나베 대좌의 보고를 받은 야마토 함상의 야마모토 제독은 만일 미군이 지키러 오지 않는다면 미드웨이라는 중요한 전초진지를 쉽게 장악하는 셈이라고 말했으나 보급문제와 미드웨이에 주둔 가능한 항공대 규모에 대해서는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논리에서 밀린 와타나베 대좌는 3일과 4일 이틀동안 비판에는 귀를 틀어막은 채 오로지 앵무새처럼 기존의 주장만 되풀이했다.

야마모토 제독은 4일 밤에 와타나베 대좌의 보고를 들은 다음 자신의 승부사적 기질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지시를 내렸다.

와타나베 대좌는 5일 아침에 도미오카 대좌를 만나자마자 만일 미드웨이 침공작전이 채택되지 않는다면 사임하겠다는 야마모토 제독의 말을 전했다.

 

지난 3일간 와타나베 대좌를 상대하느라 완전히 녹초가 되어 버린 도미오카 대좌는 이 말을 듣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상관인 제1부장 후쿠도메 소장에게 사안을 넘기고 뻗어 버렸다.

야마모토 제독의 굳은 결심에 직면한 후쿠도메 소장은 나가노 군령부 총장에게 연합함대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고 보고했다.

나가노 총장은 야마모토 제독을 깊이 아끼고 신뢰하는 입장으로 진주만 기습 때에도 사임하겠다는 압력에 눌려 작전을 허가했었다.

그런 그가 이제 진주만 기습과 연이은 승전으로 일본에서 국민적인 영웅이 된 야마모토 제독의 사임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1942년 4월 5일 오후에 나가노 군령부 총장은 연합함대의 작전안을 받아들인다는 결정을 내렸다.

 

야마모토 제독은 이로서 대본영 해군부에 승리했으나 거기에는 댓가가 따랐다.

우선 연합함대는 MO 작전에 항공모함 2척을 지원하기로 약속해야만 했다.

이 약속에 따라 MO 작전의 지원을 위하여 투입되었던 항공모함 쇼가쿠와 즈이가쿠가 산호해 해전에서 피해를 입어 미드웨이 해전에 불참하는 바람에 일본해군이 참패하는데 중요한 빌미를 제공했다.

 

야마모토 제독은 또한 미드웨이 공략작전과 동시에 알류샨 열도도 공격하기로 대본영 해군부와 합의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달리 알류샨 열도 작전은 미드웨이 침공작전과 전혀 별개의 작전이며 이는 대본영의 해군부 일각과 특히 육군부에서 선호하던 작전이었다.

해군부는 알류샨 열도를 점령함으로써 미국이 북태평양을 거쳐 일본을 공격하는 걸 막으려고 했으며, 또한 미본토 공격시 디딤판으로 사용하고 싶어했다.

소련을 침공하여 노몬한 전투의 복수를 하고 싶어하던 육군부는 소련에 대한 미국의 렌드리스 통로 중에서 가장 비중이 큰 미서해안-블라디보스톡 통로를 차단할 수 있는 알류샨 열도 침공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대본영 해군부는 미드웨이 침공에 동의하는 댓가로 알류샨 열도 작전을 끼워 넣었다.

이 알류샨 열도 작전으로 연합함대 전력의 상당 부분이 북쪽으로 빠져나감과 동시에 미드웨이 해전의 무대가 엄청나게 넓어졌으며 그 결과 일본해군의 함대들이 넓게 분산되어 결과적으로 미드웨이 참패의 큰 원인이 되었다.

 

한편 미드웨이 침공을 가장 격렬하게 반대하던 대본영 해군부의 도미오카 대좌는 이제 대본영 육군부에 미드웨이 침공작전을 설명하고 동의를 얻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도미오카 대좌의 설명을 들은 참모본부(육군부)의 작전부장인 다나카 신이치 장군은 미드웨이 침공을 하와이 침공의 사전 포석으로 의심하여 절대로 동의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4월 16일에 군령부 총장 나가노 제독이 일왕에게 육군의 협조를 전제로 한 미드웨이 작전에 대하여 보고했을 때 스기야마 하지메 참모총장은 감히 반대하지 못했다.

일왕의 재가가 떨어짐으로서 이제 MI 작전이라고 명명된 미드웨이 침공작전은 공식적으로 실시가 확정되었다.

 

연합함대는 일단 결정이 나자 최대한 빨리 미드웨이 침공작전을 실시하려 했으나 열의가 없던 육군과 대본영 해군부는 제대로 협조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틀 후에 야마모토 제독에게는 천군만마와도 같은 구원군이 태평양으로부터 도쿄 상공에 도착하여 미드웨이 해전으로 향하는 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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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방어준비 

 

1941년 12월 7일 새벽에 미드웨이에서는 제21해군초계비행대대(VP-21) 소속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5대가 통상적인 초계활동을 위하여 이수했다.

이어서 웨이크 섬을 떠나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로 가던 도중 미드웨이에 들렀던 네덜란드군 소속의 카탈리나 2대가 남쪽으로 출발했다.

샌드 섬의 램프에서는 그날 도착 예정인 제231해병정찰폭격비행대대(VMF-231)를 마중나갈 카탈리나 2대가 예열을 하고 있었다.

 

(PBY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진주만 시간으로 오전 9시인 오전 6시 30분에 오아후로부터 해군 통신망을 통하여 진주만에 매우 심각한 사태가 발생했음을 의미하는 Z- 신호가 수신되었다. 

몇 분 후 히캄 비행장에서 육군 통신망을 통하여 진주만 기습 소식과 함께 제14해군구 사령관 블로크 소장이 이 정보를 공식적으로 확인했으며 전쟁 계획을 즉시 발동하라고 명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미드웨이 해군항공기지(NAS Midway) 사령관 시마드 해군중령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향하여 남쪽으로 비행하던 네덜란드군 소속 카탈리나 2대를 제21해군초계비행대대의 지휘 하에 편입시킨 다음 즉시 회항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6방어대대장 섀넌 해병중령은 여러가지 경로로 하와이의 정확한 상황을 파악해 보려 했으나 진주만의 통신망이 긴급통신 위주로 처리하는 바람에 좀처럼 통신망에 끼어들기가 어려웠다.

마침내 오전 9시에 섀넌 중령은 훈련이 아니라는 걸 확신하고 제6방어대대에 전원 전투 배치 명령을 내렸고, 9시 18분에 기지 사령관 시마드 해군중령이 미드웨이 해군항공기지 전체에 전원 전투배치 명령을 내렸다.

이날 미드웨이에 도착하기로 했던 제231정찰폭격비행대대를 실은 항공모함 렉싱턴은 일본항공모함을 찾기 위하여 침로를 바꾸었다.

오전까지만 해도 강도높은 실전 훈련일 것이라고 믿고 있던 제6방어대대의 병사들은 7일 오후에 들어서면서 실제로 전쟁이 발발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12월 7일 일몰 직후인 오후 6시 42분에 한 해병대원이 샌드 섬 남서쪽의 수평선 너머에서 뭔가 번쩍거리는 불빛을 발견했는데 아마도 일본함정의 불빛신호인 것 같았다.

이어서 오후 9시 30분에 샌드 섬의 레이더가 남서쪽으로부터 다가오는 정체불명의 수상함정을 포착했다.

 

진주만 공습 부대와는 별도로 1941년 11월 28일에 다테야마 기지를 출발한 일본해군의 미드웨이 공격부대는 제7구축대 사령관 고니시 대좌의 지휘 하에 구축함 우시오와 사자나미, 그리고 급유함 시리야로 구성되어 있었다. 

 

우시오와 사자나미는 12월 7일 오후 9시 30분에 미드웨이 남서쪽 25km 해상에서 마지막 급유를 마친 다음 급유함 시리야를 떨쳐버리고 전속력으로 북상했다.

잠시 후 샌드 섬의 탐조등 포대인 G 포대에서 수평선 상에 움직이는 함영을 발견하고 탐조등을 비출 수 있도록 허가를 요청했으나, 기지 사령관 시마드 중령은 좀 더 상황이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잠시 후 오후 9시 35분부터 일본구축함들이 일제사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첫번째 일제 사격이 샌드 섬의 발전기를 보호하던 콘크리트 건물에 명중했다.

포탄이 콘크리트를 뚫지는 못했으나 착탄의 충격으로 건물 내의 기지 통신소에 있던 조지 캐넌 중위와 3명의 부하들이 큰 상처를 입었으며 통신기가 고장났다.

캐넌 중위는 골반 뼈가 으스러지는 중상을 입었고, 통신병 해럴드 헤이즐우드 상병은 다리가 부러졌다.

다른 2명은 발목을 다치거나 뇌진탕을 입었다.

 

중상을 입었으나 정신을 잃지 않은 캐넌 중위는 후송을 거부하고 다리가 부러진 통신병 헤이즐우드 상병을 닥달해서 고장난 통신장치를 고치라고 명령했다.

부하들이 후송되고, 헤이즐우드 상병이 9시 53분에 결국 통신망을 복구하는 걸 확인한 캐넌 중위는 그때서야 정신을 잃고 급히 후송되었으나 너무 많은 피를 흘려서 대대구호소에 도착하자마자 몇 분 내로 사망했다.

치명적인 중상을 입고도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자리를 지킨 캐넌 중위에게는 명예훈장이 추서되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해병대 최초의 명예훈장 서훈자가 되었다. 

다리가 부러진 상태에서도 끝내 통신망을 복구해 낸 헤이즐우드 상병은 해군십자장을 받았다.

 

(조지 캐넌 중위)

 

그 동안 북상하면서 일제사격을 가했던 일본구축함들은 반전하여 남하하면서 오후 9시 48분에 다시 포격을 가했다.

기지 사령관 시마드 중령은 탐조등을 비추라고 명령했으나 첫 일제 사격 때 통신망이 끊어져 버려서 통신망이 복구된 9시 53분에야 탐조등 포대인 G 포대에 명령이 전달되었다.

탐조등이 즉시 해상을 비추어서 약 2,300m 거리에서 사자나미를 포착했다.

그 순간 G 포대의 탐조등에서 불과 몇 m 떨어진 곳에 일본군의 포탄이 떨어져 탐조등 2개 중 1개가 박살나고 1개는 폭발의 충격으로 전원 플러그가 빠져 버렸다.

G 포대원 1명이 폭발의 충격으로 비틀거리면서 어둠 속에서 미친듯이 전원 플러그를 찾아 꽂음으로서 잠시 후 탐조등 1개가 다시 불을 밝혀 사자나미를 포착했다.

 

즉시 미드웨이의 5인치 해안포와 3인치 대공포들이 사자나미를 향하여 포격을 개시했으나, 5인치 해안포 2문으로 이루어진 A 포대는 미처 초탄을 발사하기도 전에 일본군의 포탄이 포대 주변에 떨어지는 바람에 외부와의 통신이 두절되고 5인치 포들이 피해를 입었다.

포대 주변에 쌓여있던 5인치 포탄이 유폭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5인치 해안포 2문을 가진 C 포대와 3인치 대공포 각 4문으로 이루어진 E 포대 및 F 포대는 사계가 방해를 받아 포격을 할 수 없었다.

결국 B 포대의 5인치 해안포 2문이 합계 9발, D 포대의 3인치 대공포 4문이 합계 13발을 발사하는데 그쳤다.

B 포대의 5인치 해안포는 명중탄을 내지 못했고, D 포대의 3인치 대공포는 사자나미의 상부구조물에 3발을 명중시켰으나 사자나미의 피해는 미미했다.

 

오후 10시가 되자 일본구축함들이 물러가면서 25분 간의 포격전이 끝났다.

미드웨이에서는 4명이 전사하고 10명이 부상을 입었다.

발전기 건물과 A 포대가 피해를 입었으며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수상기 격납고로서 명중탄을 맞아 지붕이 홀랑 타버리고 내부에 쌓아두었던 많은 수상기용 예비부품들이 전부 소실되었다.

또 판 아메리칸 항공사 소유의 전파방향탐지기가 부서졌으며, 제21초계비행대대의 카탈리나 1대도 망가졌다.

 

12월 7일의 포격전으로 미드웨이의 취약성이 드러나자 제14해군구에서는 제21초계비행대대를 일시적으로 미드웨이에서 철수시켰다.

그러나 미해군이 미드웨이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 이후 본격적인 증강을 실시했다.

 

1941년 12월 17일에 제231해병정찰폭격비행대대 소속의 SB2U 빈디케이터 급강하폭격기 17대가 미드웨이에 도착했다.

원래 10일 전인 12월 7일에 미드웨이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진주만 기습으로 늦어진 것이었다.

이날 17대의 빈디케이터들은 하와이에 있는 해병대의 에와 기지 대신 활주로가 긴 육군항공대의 히캄 기지를 출발했다.

제231해병정찰폭격비행대대는 히캄 기지를 오전 6시 30분에 이륙하여 도중에 미드웨이에서 날아온 카탈리나의 안내를 받아 하와이에서 미드웨이까지 1,830km 의 거리를 9시간 20분 만에 무착륙 비행으로 주파하여 오후 3시 50분에 미드웨이에 착륙했다.

당시 이 기록은 단발 비행기의 집단 비행으로서는 무착륙비행 세계신기록이었다.

10일 후에 18대로 이루어지는 비행대대의 정수를 맞추기 위하여 빈디케이터를 몰고 히캄 비행장에서 미드웨이까지 날아온 리처드 블레인 소위는 카탈리나와 동행한 데다가 역풍을 맞아 무려 12시간의 무착륙 비행 끝에 미드웨이에 도착했다.

 

(SB2U 빈디케이터 급강하폭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12월 24일에는 수상기 모함 라이트가 제4방어대대의 A 포대원 및 C 포대원들과 미해군의 전노급 전함에 실려있던 구형 7인치 해안포 4문과 3인치 해안포 4문을 싣고 미드웨이에 도착했다.

새넌 중령은 새로 도착한 제4방어대대 소속의 포대원들을 A 포대 및 C 포대에 배치하고 기존의 포대원들을 새로 도착한 7인치 해안포와 3인치 해안포에 배치했다.

기존의 A 포대원들은 이스턴 섬의 남동해안에 나란히 자리잡은 3인치 및 7인치 해안포에 배치되었고, 기존의 C 포대원들은 샌드 섬에 배치된 7인치 해안포 및 3인치 해안포에 배치되었다.

 

(1942년 6월 현재 미드웨이 섬의 방어태세)

 

다음날인 25일에는 웨이크 섬 구원에 나섰다가 실패한 버니 맥콜 소령의 제221해병전투비행대대(VMF-221) 소속 브류스터 F2A-3 버팔로 전투기 14대가 항공모함 새러토가를 떠나 이스턴 섬에 착륙했다.

 

(F2A 버팔로 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이어서 12월 26일에는 수상기 모함 탠지어가 역시 웨이크 섬에 증원하려던 제3방어대대의 B 포대원, 12정의 12.7mm 대공기관총을 보유한 대공기관총 1개 포대, 제221전투비행대대의 지상요원 111명, 추가적인 레이더 및 보급품들과 함께 도착했다.

제3방어대대의 B 포대원들은 숫자가 모자란 A 포대원들을 대신하여 샌드 섬 남쪽에 자리잡은 7인치 해안포 2문을 담당했다.

 

1942년 1월 1일이 되었을 때 미드웨이 해군항공기지는 강력하게 증강된 1개 해병방어대대와 전투비행대대 1개 및 정찰폭격비행대대 1개를 보유하고 있었다.

1월 9일에 미드웨이의 항공작전을 총괄하기 위하여 윌리엄 월리스 해병중령이 부임했다.

월리스 중령은 웨이크 섬에서 마지막 보고서를 가지고 아슬아슬하게 탈출한 월터 베일리 소령의 조력을 받았다.

 

1월 25일 오후 5시 48분에 미드웨이 남방해상에서 갑자기 일본잠수함 I-173 호가 부상하여 샌드 섬에 포격을 가해왔다.

D 포대의 3인치 대공포가 즉각 반격하자 일본잠수함은 3분 만인 오후 5시 51분에 급히 잠항했다.

3분간의 짧은 포격전 동안 일본잠수함이 발사한 포탄 10여발이 샌드 섬과 초호에 떨어졌으나 피해는 없었고, D 포대도 24발을 발사했으나 명중탄을 내지 못했다.

 

이후 채 36시간이 지나지 않은 1월 27일 아침에 미드웨이에서 북서쪽으로 390km 떨어진 해상에서 미국잠수함 거전이 전방에서 16노트의 속력으로 수상항진 중인 I-173 호를 발견하고 어뢰 3발을 발사하여 격침했다. 

 

1942년 2월 8일 오후 6시 5분에 샌드 섬에서 남쪽으로 불과 900m 정도 떨어진 해상에 다시 일본잠수함이 부상하여 포격을 실시했다.

이번에는 A 포대의 5인치 포가 즉시 2발을 반격했고, 일본잠수함은 3발을 발사한 후에 급히 잠항하여 도망쳤다.

일본잠수함이 발사한 포탄 3발 중 1발이 탄약고에 명중했으나 다행히 강화 콘크리트를 뚫지 못하여 내부에 들어있던 소화기 탄약들은 유폭하지 않았다.

 

이틀 후인 2월 10일 오후 5시 58분에 아마 같은 잠수함으로 추정되는 일본잠수함이 같은 자리에 떠올라 포격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상공에서 대잠초계비행 중이던 버팔로 전투기 2대가 잠수함을 포착했다.

존 커리 중위와 그의 요기 필립 화이트 소위는 급히 해상으로 내려오면서 폭탄을 투하했으나 명중시키는데 실패했다.

일본잠수함은 급히 잠항하여 도망쳤으며 이후 미드웨이 해전 때까지 더 이상 일본잠수함들이 출현하지 않았다.

 

1942년 3월 1일자로 미드웨이에 주둔하던 제221해병전투비행대대와 제241해병정찰폭격비행대대를 중심으로 제22해병비행전대(MAG-22)가 창설되었고, 전대장은 월리스 중령이 맡았다.

제241해병정찰폭격비행대대는 제231해병정찰폭격비행대대가 이름만 바꾼 것이었다.

 

3월 10일 오전 10시 30분에 미드웨이 섬의 레이더가 서쪽으로 70km 떨어진 상공을 통과하는 정체불명의 항공기를 발견했다.

미드웨이의 버팔로 전투기 12대가 전부 추격에 나섰다.

4대로 이루어진 편대를 이끌던 제임스 네푸스 대위가 3,000m 고도에서 일본의 2식 대형비행정을 발견하고 공격을 가하여 격추했다.

이 2식 대정은 웟제 환초를 떠나 진주만을 기습공격하려던 2식 대정 편대의 편대장인 하시츠메 토시오 대위가 조종하던 기체였다.

 

(2식 대형비행정.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이후 5월 초까지 미드웨이의 병사들은 고도의 경계태세를 유지했으나 정작 큰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다.

물론 그동안에도 일본과 미군의 수뇌부는 미드웨이 부근에서 벌어질 일대 결전을 향하여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었으나 미드웨이에서 그런 자세한 사정을 알 까닭이 없었다.

미드웨이의 병사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지키고 있는 섬이 자신들의 조국과 일본이 태평양의 패권을 놓고 모든 전력을 결집하여 일대 결전을 벌이는 결투장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미드웨이는 너무 작았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만한 가치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전투의 한가운데 서고 싶지 않은 병사들의 희망은 1942년 5월 2일에 태평양함대 사령관 니미츠 제독이 일련의 유력한 참모들과 함께 갑자기 미드웨이로 시찰을 오면서 무참히 깨졌다. 

카탈리나에서 내린 니미츠 제독은 손바닥만한 미드웨이를 하루종일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미드웨이의 모든 곳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하루 종일 걸린 고된 시찰이 끝나고 니미츠 제독은 제6방어대대장 섀넌 중령에게 미드웨이를 지키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 보라고 했다.

섀넌 중령이 필요한 것들을 말하자 니미츠 제독은

 

"만일 자네가 필요하다고 말한 이 모든 것들을 내가 준다면 대규모 상륙공격에 대항하여 미드웨이를 지킬 수 있나?"

("If I get you all these things you say you need, then can you hold Midway against a major amphibious assault?")

 

하고 물었다.

섀넌 중령은

 

"예."

("Yes,sir")

 

대답했다.

니미츠 제독은 만족한 표정으로 섀넌 중령에게 요구사항을 문서로 정리하여 정식으로 태평양함대 사령부에 제출하라고 말한 다음 자신의 힘이 닿는데까지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참모들을 우루루 이끌고 다니는 해군대장이 마치 중대장처럼 미드웨이의 방어시설을 하루종일 걸려서 구석구석 꼼꼼하게 시찰하는 모습을 지켜본 미드웨이의 병사들은 태평양함대 사령부가 미드웨이를 결전장으로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미드웨이를 시찰 중인 태평양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대장. 병사들을 위한 지하 대피호를 둘러보고 나오는 길이다.)

 

섀넌 중령은 기지 사령관 시마드 해군중령과 의논하여 요구사항을 적은 문서를 5월 7일에 정식으로 제출했다.

니미츠 제독은 약속을 지켰으며, 실제로 미드웨이에는 요구했던 것 이상의 지원이 주어졌다.

 

며칠 후 니미츠 제독은 시마드 중령과 섀넌 중령에게 편지를 보내어 미드웨이의 준비태세를 최고의 수준으로 유지한 데 대하여 크게 칭찬한 후 일본군의 공격이 5월 28일쯤에 예상된다고 적었다.

니미츠 제독은 격려하는 차원에서 두 사람을 대령으로 진급시키고 은으로 만든 대령 계급장을 보내 주었다.

미드웨이 해전이 승리로 끝난 후 다른 곳으로 전출하면서 인사차 들른 시마드 대령에게 니미츠 제독은 당시 대령 계급장은 두 사람의 장례식에 사용할 조화를 보낸 셈이었다고 말했다.

 

니미츠 제독이 약속한 지원이 5월 25일부터 미드웨이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경순양함 세인트루이스가 도착하여 37mm 대공포 1개 포대(8문)와 제2습격대대의 C 중대와 D 중대를 상륙시켰다.

이로써 제6방어대대는 기존의 제22 및 제23임시소총중대에 더하여 정예병력으로 이름이 높은 습격대대의 2개 중대를 추가로 확보하여 기동예비대의 전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37mm 대공포들은 즉각 샌드 섬과 이스턴 섬에 4문씩 배치되었다.

 

또한 이날 일본군의 공격이 5월 28일에서 6월 3일경으로 연기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다음날인 5월 26일에는 수상기모함 키티호크가 도착하여, 진주만에 배치되어 있던 20mm 대공기관포 1개 포대(18문), 제3방어대대의 3인치 대공포 3개 포대(총 12문), 5대로 이루어진 경전차 1개 소대, 돈틀레스 16대, 와일드캣 7대를 양륙했다.

 

(SBD 돈틀레스 급강하폭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27일에는 해군의 카탈리나 16대와 아벤저 뇌격기 6대, 육군항공대의 B-17 폭격기 17대와 어뢰를 장비한 B-26 쌍발폭격기 4대, 그리고 추가로 돈틀레스 3대, 버팔로 9대 등이 도착했다.

 

(TBF 아벤저 뇌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5월 31일이 되자 미드웨이에는 107대의 해병대, 해군 및 육군항공대 항공기들이 득실거렸고 하루에 사용하는 항공유만 250,000 리터에 달했다.

해병대는 버팔로 전투기 21대, 와일드캣 7대, 돈틀레스 19대, 빈디케이터 17대 등 총 64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육군항공대는 B-17 폭격기 17대, B-26 쌍발폭격기 4대로 21대, 그리고 해군은 아벤저 뇌격기 6대에 카탈리나 16대로 22대였다.

이후 미드웨이 해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해군의 카탈리나 16대와 해병대의 빈디케이터 4대가 추가로 도착하여 6월 4일 아침에 미드웨이가 보유한 항공기 수는 총 127대에 달했다.

 

(F4F 와일드캣 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미드웨이 수비대는 일본군의 폭격으로 항공유 저장소가 폭파될 경우에 대비하여 유조차를 격납고 내의 옹벽 뒤에 안전하게 숨겨 놓았으며 항공유를 가득 채운 드럼통들을 격납고와 활주로 주변을 중심으로 이스턴 섬 전체에 수없이 많이 묻어 두었다.

또한 일본군의 폭격을 유도하기 위하여 격납고 부근에 정성들여 가짜 비행기들을 만들어 두었다.

 

섀넌  대령은 일본군 상륙부대를 물리치기 위한 준비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샌드 섬은 전 해안선이 이중 철조망으로 둘러 싸였으며, 샌드 섬과 이스턴 섬의 주요 건물들은 모두 각각의 철조망으로 보호를 받고 있었다.

해안의 산호초에는 강철로 만든 상륙 장애물들을 배치했고, 장애물 사이의 통로에는 배관파이프 내에 폭약을 가득 채워 만든 대주정용 기뢰를 설치해 두었다.

해안선에는 촘촘하게 지뢰를 깔았고, 나무곽에 다이너마이트를 넣고 주변에 잘게 자른 철사를 가득 채운 사제 지뢰도 잔뜩 묻어 두었다.

대전차 지뢰도 묻었으며 혹시 일본군에게 전차가 없을 경우 전기로 격발시킬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다.

3인치 대공포부터 12.7mm 대공기관총까지 모든 대공화기는 필요하면 지상사격도 가할 수 있도록 별도로 훈련했다.

각 포대와 참호마다 전투식량과 탄약을 비축했으며, 일본군의 전차에 대비한 화염병을 모든 거점마다 비치하고 있었다.

 

미드웨이의 방어력은 강대했다.

해상의 적을 겨냥하여 해군의 7인치 해안포 4문과 3인치 해안포 4문이 있었고, 해병대의 5인치 해안포 6문도 배치되어 있었다.

대공화기로는 3인치 대공포 24문, 37mm 대공포 8문, 20mm 대공기관포 18문, 12.7mm 대공기관총 48정이 있었으며, 이들 대공무기는 필요하면 언제든지 지상전투에도 투입될 수 있었다.

이외에 개인화기를 제외한 지상부대의 공용화기로서 구형의 37mm 야포 4문, 81mm 박격포 4문, 60mm 박격포 4문, 14mm 대전차총 4정, 7.62mm 중기관총(액냉식) 48정, 7.62mm 경기관총(공냉식) 4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모든 포대는 모래 주머니와 흙을 쌓아 올려서 상당한 수준의 방어력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6월 4일에 108대의 일본기에게 공습을 당했어도 미드웨이의 포대들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기동예비대도 기존의 2개 임시소총중대와 정예병들인 제2습격대대의 2개 중대에 더하여 경전차 5대까지 가세하여 강력했다.

경전차들은 기습효과를 최대한 노려서 샌드 섬 북쪽의 구석진 곳에 정성들여 숨겨 놓았다. 

 

미드웨이 해전 당시 미드웨이 방어병력이 총 몇 명이었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역사가들마다 약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새뮤얼 모리슨 제독은 당시 미드웨이 방어병력을 총 3,027명으로 기술하고 있고, 니미츠 전기를 지은 포터 교수도 대체로 이 의견을 따르고 있지만 섀터드 소드의 저자인 조나단 파샬과 앤터니 털리는 최대 4,500 명까지 가능하다고 본다.

어쨌든 손바닥만한 미드웨이를 지키는 데에는 충분한 병력이며, 당시 미드웨이의 방어력이 전투병력 2,500 명과 비전투병력 2,500 명으로 이루어진 일본의 미드웨이 상륙부대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전력이라는 점에는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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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6월 4일부터 6일까지 3일간 중부 태평양의 미드웨이 근해에서 태평양을 주름잡던 양대 해군강국인 대일본제국의  연합함대와 미합중국의 태평양함대 사이에 건곤일척의 일대 승부가 벌어졌다.

미드웨이 해전(Battle of Midway)으로 이름붙여진 이 대규모 해전에서 미국 태평양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자신의 맞수인 일본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을 결정적으로 거꾸러뜨림으로써 그때까지 일본이 절대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던 태평양의 전략적 판세를 단번에 뒤집어 엎었다.

진주만 기습 이후 6개월간 서부 태평양과 동부 인도양 일대에 걸쳐 일본에게 절대적인 제해권을 가져다 주었던 연합함대 타격력의 실체이자 꽃인 제1항공함대는 미드웨이에서 너무나 갑작스럽게, 너무나 허망하게 몰락했다.

 

이 미드웨이 해전을 계기로 일본이 쥐고 있던 태평양전쟁의 전략적 주도권은 미국에게 넘어갔다.

일본연합함대는 미드웨이 해전 이후에도 당장 동원가능한 전력 면에서 여전히 태평양함대에 대하여 우세를 유지했으나 제1항공함대의 몰락으로 더 이상 결정적인 공세를 취할 능력을 상실했고, 이미 확보한 광대한 영역을 지키기에도 급급한 처지로 전락했다.

반면 태평양전쟁 개전 이래 일본군의 공세에 대하여 항상 수세적으로 반응해야만 했던 미군은 이제야말로 전략적 주도권을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를 선택하여 자유롭게 반격할 수 있게 되었다.

 

진주만 기습 이후 일제히 건조에 들어간 에섹스 급 항공모함들이 대거 쏟아져 나오는1943년 후반기까지 버티기만 하면 되는 태평양함대의 입장에서 미드웨이 해전의 승리는 사실상 일본과의 전쟁에서 이겼다는 것을 의미했고, 일본에게는 정확하게 그 반대를 의미했다.

미드웨이 해전은 이렇게 태평양전쟁의 승패를 일찌감치 확정지었다.

 

1. 미드웨이 

 

미드웨이는 진주만에서 서북서 방향으로 1,800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약 100km 북쪽의 구레 환초를 제외하고 하와이 제도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미드웨이의 위치)

 

일반에게는 보통 미드웨이 섬(Midway Island)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미드웨이는 환초의 이름이며 초호의 직경은 약 10km 이고 해수면 위로 드러난 섬은 남쪽의 일부 뿐이다.

(환초, 초호 및 섬과 같은 용어에 대한 설명은 여기로)

 

환초의 남쪽을 이루는 두 개의 작은 섬은 샌드 섬과 이스턴 섬이며, 약간 더 큰 샌드 섬의 길이는 약 3km 정도이고, 최고 높이는 해발 12m 정도이다.

작은 이스턴 섬은 약 1.6 x 1.6km 크기이며 가장 높은 곳도 해발 4m 가 안 된다.

 

원래 미드웨이에 식물이라고는 억센 관목 뿐이었으나 이스턴 섬에는 비료로 제격인 새똥 구아노가 대량으로 쌓여 있었다.

미드웨이를 개발한 태평양 상업 통신선 회사는 미국 농무부의 지원을 받아 토양의 유실을 막을 수 있는 잔디류들을 심고, 이어서 미드웨이에서 잘 자랄 수 있는 나무들을 찾아내어 심었다.

그리하여 1935년이 되자 샌드 섬에는 12m 높이의 하와이산 경질목과 호주산 유칼립투스 나무들이 자랐고, 그 그늘에는 풀밭과 잔디밭이 생겼다.

 

미드웨이의 뚜렷한 특징 중 하나는 새였다.

이곳에는 신천옹을 비롯하여 날지 못하는 뜸부기, 부비새, 군함새, 갈매기와 제비갈매기 등 수많은 새들이 살고 있었다.

줄기차게 뿌려대는 새똥 때문에 건물에 새로 페인트 칠을 해도 마르기도 전에 더러워졌고, 1940년대까지도 산란기가 되면 미드웨이의 특정 지역은 새알을 밟지 않고는 걸어다닐 수가 없을 정도였다.

따라서 마음만 먹으면 새알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산란기에는 신선한 달걀의 보급이 당분간 끊어져도 섬에 주둔한 병력들 사이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고 한다.

 

샌드 섬과 이스턴 섬은 해면 바로 아래까지 자란 산호초로 둘러싸여 있고, 두 섬 사이에는 1938년에 미해군이 준설한 브룩스 수로가 있어서 초호 중앙의 깊은 수역으로 통한다.

샌드 섬의 서쪽으로는 웰레스 항구라고 부르는 깊은 자연 수로가 있어서 배가 진입할 수 있으나 초호 가장자리의 나머지 부분은 얕아서 배가 다닐  수 없다.

(1942년 6월 현재 미드웨이 환초의 상황)

 

미드웨이가 처음으로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1859년으로 하와이에서 운항하던 바크선의 선장인 미국인 브룩이 발견했다.

브룩 선장은 이 무인도에 자신의 이름을 따서 미들브룩 섬(Middlebrook Island) 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조국인 미국의 영토로 선포했다.

 

(바크선)

 

1867년 8월 28일에 미국 해군장관 기드온 웰레스가 파견한 미해군의 슬루프함 락카와나가 미들브룩 섬을 찾아 주변을 탐사하고 정식으로 미국령임을 선포했다.

이때 샌드 섬 서쪽에서 깊은 수로를 발견한 락카와나의 함장 윌리엄 레이놀즈 중령은 여기에 자신들을 파견한 해군장관의 이름을 따서 웰레스 항구(Welles Harbor)라는 이름을 붙였다.

 

1869년에 태평양 우편 증기선 회사(The 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가 이 섬에 석탄저장고를 설치하고 싶어했다.

태평양 우편 회사는 미의회를 움직여 수심이 깊은 초호의 중앙과 외해를 갈라놓고 있는 샌드 섬과 이스턴 섬 사이에 걸친 2m 폭의 모래톱을 준설할 예산 50,000 달러를 책정받았다.

이때 태평양 우편 회사는 기존의 미들브룩 섬이란 이름 대신에 이 섬을 '미드웨이'(Midway) 라고 불렀고, 이후 미드웨이로 불리게 되었다.

 

1870년 3월 21일에 미해군의 슬루프함 사지노가 인부와 보급품들을 싣고 준설용 바지를 끌면서 미드웨이에 도착했다.

인부들은 곧 준설을 시작했으나 7개월 후인 10월 21일이 되자 맑은 날에 작은 보트가 겨우 통과할만큼 준설이 이루어진 상황에서 그만 돈이 다 떨어졌다.

사지노는 할 수 없이 인부들을 태우고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

 

(사지노)

 

항해 도중에 북쪽으로 100km 떨어진 구레 환초에 조난자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사지노는 구레 환초에 접근하다가 10월 29일에 그만 좌초하고 말았는데, 실제로는 당시 구레환초에 조난자는 없었다고 한다.

사지노에 승선했던 사람들은 최대한 많은 장비와 식량을 챙겨 구레 환초에 상륙했다.

 

1870년 11월 18일에 사지노의 부함장 존 탈보트 대위가 4명의 수병과 함께 작은 보트를 타고 구레 환초를 떠나 오아후 섬으로 구원을 요청하러 떠났다.

탈보트 대위 일행의 보트는 31일 동안 2,400km 를 항해한 끝에 카울라이 부근에서 전복되어 수병 윌리엄 할포드를 제외한 4명은 익사했다.

할포드는 오아후에 도착하여 미국 영사관에 도움을 청했고, 미국 영사의 요청을 받은 하와이 국왕 카메하메하 5세는 증기선 킬라우에아를 파견했다.

킬라우에아는 1871년 1월 4일에 구레 환초에 도착하여 사지노의 조난자 전원을 무사히 구조했다.

 

(사지노의 조난)

 

이후 30년간 미드웨이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 기간 동안 미드웨이를 찾은 것은 판매를 위한 새의 깃털을 모으러 상륙하는 일본인들 뿐이었다.

 

1903년에 태평양 상업 통신선 회사(Pacific Commercial Cable Company)가 마닐라-괌-호놀룰루를 잇는 통신선을 구축하기로 결정했다.

이 회사가 미드웨이에 괌과 호놀룰루를 연결하는 유선통신소를 설치하기로 결정하면서 미드웨이는 다시 역사에 등장했다.

미국 대통령 테어도어 루스벨트는 미드웨이를 해군성이 관리한다는 내용의 법안에 서명했고, 1903년 6월 3일에 슬루프함 이로쿼이가 미드웨이에 도착했다.

이로쿼이가 도착했을 때 미드웨이에서는 지난 30여년간 늘 해왔듯이 몇 명의 일본인들이 상륙하여 열심히 새의 깃털을 모으고 있었다.

험악한 인상을 가진 이로쿼이의 함장 휴 로드먼 소령이 상륙하여 일본인들에게 당장 꺼지라고 고함을 버럭 지르자 일본인들은 혼비백산하여 배를 타고 달아났다.

그리하여 1870년대 초반부터 30여년간 자유롭게 미드웨이를 드나들면서 새의 깃털을 모아왔던 일본인들은 미드웨이에서 영영 쫓겨났다.

 

(이로쿼이)

 

곧 미드웨이에는 해저 통신선이 깔렸고, 통신소가 만들어졌다.

해군은 미드웨이 부근의 정박지에 부표를 설치하고 샌드 섬에 등대를 만들었으며, 21명으로 이루어진 해병분견대가 1908년까지 미드웨이에 주둔했다.

 

이때 연결된 호놀룰루와 미드웨이 사이의 해저 통신선은 태평양전쟁 초기인 1942년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태평양함대는 큰 작전을 준비하면서 통신량이 급증하면 늘어난 통신량은 모두 해저 통신선으로 처리하고, 무선 통신량은 평소 수준을 유지했다.

따라서 일본군은 태평양함대가 큰 작전을 준비하고 있어도 통신량의 변화를 통하여 낌새를 알아채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1942년 5월에 태평양함대의 암호해독반이 알아낸 일본군의 공격목표 AF 가 미드웨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미드웨이 수비대에게 증류기가 고장났다는 가짜 전문을 무선통신으로 발송하라는 내용의 비밀 명령도 도청이 불가능한 이 해저 통신선으로 전달되었다.

 

(미드웨이의 유선통신소. 샌드 섬에 정말 모래 밖에 없던 20세기 초반에 미드웨이에 근무하던 해병대원이 찍은 사진이다.)

 

1920년 10월 10일에 미해군의 비행정 1대가 미드웨이의 초호에서 이수에 성공함으로써 비행정 기지로서 미드웨이의 가능성을 증명했다.

그러나 워싱턴 해군군축조약의 후속 조약으로 미국과 일본이 맺은 조약에 의하여 하와이 서쪽에서 모든 미군 기지의 건설이 중지되었으므로 미드웨이도 이후 15년간 거의 변화가 없었다.

 

1935년에 일본의 거부로 인하여 제2차 런던조약의 발효가 실패하면서 15년간의 군축조약시대가 막을 내리게 되자 미드웨이도 다시 개발되기 시작했다.

1934년 2월에 수상기모함 AV-1 라이트가 미드웨이의 상황을 조사한 다음 미해군은 미드웨이를 1개 초계비행대대를 운용할 수 있는 수상기 기지로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수상기모함 AV-1 라이트)

 

이 소식을 들은 판 아메리칸 항공사는 호놀룰루와 마닐라를 연결하는 자사의 클리퍼 장거리 수상비행정을 위한 중간 기착지로서 미드웨이를 개발하겠다는 제안을 했고, 미해군은 예산을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판 아메리칸 항공사는 샌드 섬에 수상기용 램프와 관련 시설 및 숙소 등을 건설하고, 초호 쪽에 작은 호텔도 하나 지었다.

공사는 1935년 4월 15일에 시작되었으며, 동년 6월 6일에 최초의 클리퍼 기가 미드웨이에 도착했다.

 

1935년에는 또한 미드웨이에서 상륙작전 훈련이 진행되었고, 훈련에 참가했던 제6해병연대 제1대대가 잠시 동안 샌드 섬에 주둔하기도 했다.

 

(1935년에 촬영한 샌드 섬의 사진. 오른쪽 해안에 제6해병연대 제1대대의 주둔지가 보인다.)

 

미해군은 1938년 말부터 수심이 깊은 초호의 중앙부와 외해를 연결하는 수로를 본격적으로 준설하기 시작하여, 1940년에 소해함 스완이 브룩스 수로로 이름붙인 이 수로를 최초로 통과하여 초호 내로 진입했다.

 

(소해함 AM-34 스완)

 

1938년 12월 27일에 <미합중국의 해안선, 영역과 자산 보호를 위한 추가 해군 기지의 필요성에 대한 보고서>("Report on Need of Additional Naval Base to Defend the Coast of the United States, Its Territories and Possissions") 가 발표되었다.

조사를 담당한 위원회를 이끈 헵번 제독의 이름을 따서 햅번 위원회 보고서, 또는 간단히 헵번 보고서 라고 부르는 이 보고서는 제2차 세계대전에 대비한 미국의 해군기지 개발에 큰 영향을 끼친 중요한 보고서였다.

이 헵번 보고서는 미드웨이를 태평양의 방어에 있어서 하와이 다음으로 중요한 전진기지로 지목하고, 13,040,000 달러를 들여 미드웨이를 강력한 항공기지 및 잠수함 기지로 개발하라고 권고했다.

이 권고에 따르면 미드웨이에는 수상기로 이루어진 2개 초계비행대대, 육상기인 2개 전투비행대대, 그리고 잠수함 2개 분대를 수용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추도록 되어 있었다.

헵번 보고서의 권고에 따라 1939년 초부터 미해군의 주도 하에 미드웨이의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미해군과 계약을 맺은 민간인 노동자들과 건설장비 및 자재들이 미드웨이로 쏟아져 들어왔고, 여러가지 시설들이 건설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이스턴 섬에 건설된 비행장이었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폭 90m 짜리 활주로가 삼각형으로 건설되었는데 각 활주로의 길이는 1,000m, 1,400m, 그리고 1,600m였다.

주기장과 엔진 예열 장소가 딸린 격납고가 2동 건설되었고, 이외에도 보급품 창고와 항공기 정비창이 들어섰다.

비행장은 진주만 기습 직전에 완성되었다.

 

샌드 섬에는 수상기 운용을 위한 대형 콘크리트 램프와 격납고, 그리고 보급창과 정비창들이 들어섰다.

9,500 리터짜리 강철탱크 22개로 이루어진 항공유 저장소도 만들어졌으며, 해군병원도 들어섰다.

해병대와 해군 장병들을 위한 숙소와 각종 편의시설들도 들어섰으며 샌드 섬의 발전기는 강화콘크리트로 보호되었다.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한 후 1939년 12월 20일에 미드웨이를 포함한 하와이 주변의 방어를 담당하는 제14해군구가 설치되어 클로드 블록 소장이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40년 9월 29일에 제3방어대대의 일부가 미드웨이에 상륙함으로써 이제 미드웨이에 해병대가 상주하게 되었다.

해럴드 로버츠 소령이 이끄는 177 명의 미드웨이 분견대는 2문의 5인치 해안포로 이루어진 1개 포대를 포함하고 있었다.

참고로 분견대장인 로버츠 소령은 대령으로 승진한 후 1945년에 제22해병연대장으로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했다가 일본군의 저격을 받아 전사했다.

 

1941년 2월 14일에 제3방어대대의 주력이 미드웨이에 상륙함에 따라 미드웨이는 593명의 해병대원과 5인치 해안포 3개 포대(A, B, C 포대, 총 6문) 및 3인치 대공포 3개 포대(D, E, F 포대, 총 12문)를 갖추게 되었다.

 

1941년 8월 18일에 미드웨이 섬은 미드웨이 해군항공기지(NAS Midway = Naval Air Station Midway)로 승격되어 초대 기지 사령관으로 시릴 시마드 해군중령이 취임했고, 곧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12대로 이루어진 제21해군초계비행대대(VP-21)가 전개했다.

9월 11일에는 784명으로 이루어진 제6방어대대가 상륙하여 제3방어대대와 교대했다.

해럴드 섀넌 해병중령이 지휘하는 제6방어대대는 미드웨이에 자신들의 5인치 해안포와 3인치 대공포를 가져오는 대신 제3방어대대의 해안포와 대공포를 인수했다.

대신 제3방어대대는 하와이로 돌아가 제6방어대대의 해안포와 대공포를 인수했다.

 

1941년 11월 말에 파탄 직전에 이른 미일 교섭의 돌파구를 찾기 위하여 구루스 사부로 특명전권대사가 판 아메리카 항공사의 클리퍼 수상기를 타고 도쿄에서 미국으로 가는 중에 미드웨이에 들렀다.

제6방어대대장 섀넌 중령은 기지 사령관 시마드 해군중령에게 무력시위를 하자고 제안하여 허가를 받았다.

 

구루스 특사가 수상기에서 내려 샌드 섬에 상륙하자 눈에 보이는 끝까지 해병대원들이 모두 착검한 채로 약 2m 간격으로 행군하고 있었으며, 미드웨이 항공력의 전부인 카탈리나 12대가 격납고 앞에 빽빽하게 모여 있었다.

기지 사령관 시마드 중령은 샌드 섬 북부의 호텔로 가는 승용차 안에서 원래 구루스 특사를 맞이하기 위하여 훈련을 빼려 했지만 훈련 일정이 워낙 빡빡하여 할 수 없이 일부 병력만 훈련을 실시하는 중이라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사실은 행정병에 취사병까지 모두 동원되어 총을 들고 행군하는 중이었다.

 

구루스 특사가 호텔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자 잠시 후 호텔 바로 옆에 배치되어 있던 F 포대의 3인치 대공포들이 포격연습을 시작했고 이어서 다른 포대들이 합세했다.

마침 그날 저녁부터 날씨가 나빠져서 3일 후에야 수상기가 뜰 수 있었는데 시마드 중령은 그동안 안전을 이유로 구루스 일행을 호텔에서 한발짝도 나오지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3일 후에 미국을 향하여 미드웨이를 출발할 때 구루스 일행은 꼬박 3일간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새 없이 쏘아대는 포성 때문에 귀가 멍멍한 상태였다.

 

1941년 11월 19일에 제231해병정찰폭격비행대대(VMSB-231)의 지상정비요원들이 미드웨이에 도착했으나 정작 항공기의 도착은 늦어졌다.

마침내 12월 5일에 항공모함 렉싱턴이 제231해병정찰폭격비행대대를 싣고 미드웨이를 향하여 출항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제231해병정찰폭격비행대대는 1941년 12월 7일에 미드웨이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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