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AF

 

니미츠 제독이 1942년 5월 2일에 미드웨이를 시찰한 것은 지도를 보고 떠오른 직관에 따른 것이었다.

하이포국은 일본군이 포트모르즈비 공략을 위한 MO 작전 이후에 대규모의 공세를 실시할 계획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었을 뿐 정확한 목적과 위치, 시기는 5월 9일까지 몰랐다.

 

그러나 니미츠 제독은 일본해군이 남태평양 이후에는 중부태평양으로 올 것이라고 믿었다.

사무실에 걸린 지도를 바라보던 니미츠 제독은 일본해군이 중부 태평양으로 온다면 미드웨이 뿐이라고 판단하고 5월 2일에 참모들과 함께 미드웨이를 시찰하고 본격적으로 방어력 강화를 서둘렀다.

실제로 하이포국이 일본의 다음 공격이 5월 말경에 중부 태평양의 AF 라는 지점에서 있을 것이라는 걸 확신한 것은 5월 9일이었다. 

 

그동안 남태평양의 산호해에서는 항공모함 렉싱턴과 요크타운을 중심으로 한 미해군의 제17기동부대가 항모 쇼가쿠와 즈이가쿠로 이루어진 일본제5항공전대와 격돌했다.

산호해 해전이라고 이름붙여진 5월 7일과 8일에 걸친 세계 최초의 함대항공전에서 제17기동부대는 일본해군의 경항모 쇼호를 격침하고, 정규항모 쇼가쿠를 대파했다.

반면에 일본해군의 제5항공전대는 미해군의 정규항모 렉싱턴을 격침하고 요크타운을 대파함으로써 전술적으로는 미해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노우에 중장의 판단착오로 포트모르즈비 상륙부대가 상륙을 포기하고 라바울로 되돌아감으로써 포트모르즈비 함락에 실패했다.

이는 태평양 전쟁 개전 이래 미군이 일본군의 전진을 처음으로 저지한 것으로서 산호해 해전은 미해군의 전략적 승리였다.

 

(산호해 해전에서 침몰 직전의 상태인 CV-2 렉싱턴)

 

산호해 해전의 소식이 진주만에 전해졌을 때 하이포국은 일본군의 다음 목표가 미드웨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었다.

하이포국은 일본군 암호에서 태평양에서 미군이 장악한 지점을 A 로 시작하는 2자의 약자로 표시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가령 하와이는 AH 였으며, 미드웨이와 하와이 사이에 있는 프렌치 프리게이트 숄은 AG 였다.

AF 란 지명도 이미 3월 말부터 등장했는데 AF 는 하와이 북쪽에 있었고 비행장이 있었다.

 

1942년 3월 초에 일본해군의 2식 대정이 진주만을 폭격했을 때 프렌치프리게이트 숄에서 잠수함으로부터 급유를 받았다.

당시 이들은 AF 에서 떠오른 정찰기를 조심하라는 경고를 받고 있었다.

그 사건 이후로 하이포국의 책임자 로슈포트 중령과 태평양함대의 정보참모 레이튼 중령, 그리고 레이튼 중령으로부터 매일 아침 5분에서 8분에 걸쳐 암호해독 결과를 보고받는 니미츠 제독은 AF 가 미드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이포국의 의견에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워싱턴의 OP-20-G 와 남서태평양해역군의 맥아더 장군은 벨코넨국의 보고를 바탕으로 일본군의 다음 목표가 남태평양의 뉴칼레도니아 또는 피지라고 주장했다.

육군항공대는 일본군의 다음 목표가 샌프란시스코라고 믿어서 니미츠 제독이 요청한 B-17 폭격기의 제공을 거부하는 바람에 니미츠 제독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하와이에 있던 19대의 B-17 폭격기 밖에 투입할 수 없었다.

개전과 거의 동시에 신예전함 프린스오브웨일즈와 순양전함 리펄스를 어이없이 상실하고 이어서 말레이와 싱가포르, 버마에서 참극을 겪은 다음 인도양까지 쫓아온 일본해군에게 혼쭐이 난 영국은 안타깝게도 공포에 사로잡혀 이성적인 판단 능력을 상실했다.

그들은 모든 증거와 반대되는데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다음 목표가 인도양이라고 믿었으므로 니미츠 제독이 항공모함 1척을 빌려달라고 요청하자 단호하게 거절했다.

 

로슈포트 중령은 처음에는 다른 기관들이 뭐라고 하든 무시했으나 OP-20-G의 책임자 레드맨 대령이 벨코넨국의 '멍청이' 들이 도출한 엉뚱한 결론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자 드디어 폭발했다.

로슈포트 중령은 하이포국 내에서 재치있기로 유명한 재스퍼 홈즈 소위에게

 

"AF가 미드웨이라는 것을 전 세계에 증명할"

("prove to the world that AF is Midway.")

 

방법을 찾으라고 명령했다.

홈즈 소위는 미드웨이에서 증류기가 고장났다는 가짜 통신을 보내도록 만드는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로슈포트 중령은 니미츠 제독의 허가를 받아 5월 19일에 도청이 불가능한 해저전선을 통하여 미드웨이에 명령을 내렸는데 그 내용은

 

"증류기가 고장났다."

 

는 무전을 평문으로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명령을 받은 미드웨이에서는 영문도 모르고 멀쩡한 증류기가 고장났다는 평문 통신을 무전으로 보냈고 로슈포트 중령은 이 사실을 워싱턴의 OP-20-G와 호주의 벨코넨국에 전달했다.

 

이틀 후인 5월 21일에 AF의 증류기가 고장나서 식수가 부족하다고 전하는 일본군의 암호를 하이포국이 해독해 내었는데 일본군은 실제로 미드웨이 상륙부대의 수송선에 대량의 식수와 증류기 2개를 추가로 실었다.

로슈포트 중령은 이 소식을 워싱턴과 벨코넨국에 통보하지도 않고 별도의 보고서도 작성하지 않은 채 완전히 무시했다.

결국 OP-20-G가 자체적으로 이 내용을 해독해 내었고 레드맨 대령은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내용의 보고서를 작성하여 자기 명의로 워싱턴의 해군본부는 물론 남서태평양지역군과 육군항공대 및 영국군 심지어 태평양함대에까지 배포해야만 했다.

 

니미츠 제독은 5월 25일에 미드웨이 작전을 의제로 주요 지휘관 회의를 주재했다.

이 회의에서 일본군의 상황과 의도에 대하여 로슈포트 중령이 직접 설명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는 회의장에 무려 30분이나 늦게 나타났다.

니미츠 제독은 자신의 맞수인 야마모토 제독과 마찬가지로 시간을 지키는 일에 매우 엄격하여 가령 오후 7시에 연회가 열린다면 니미츠 제독의 운전사는 가급적 제독이 6시 59분에서 7시 사이에 연회장에 입장할 수 있도록 도착 시간을 조절하는 법을 익혀야만 했다.

따라서 니미츠 제독의 부하로서 그가 주재하는 회의에 30분이나 늦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그런 짓을 하고도 그 자리에서 목이 달아나지 않은 사람은 아마 로슈포트 중령이 유일할 것이다.

 

로슈포트 중령은 30분 늦게 마치 유령처럼 파리한 얼굴로 손에 서류를 든 채 회의장에 나타났는데 회의 참석자들은 모두 그가 최소한 24시간 동안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분노 때문에 눈빛이 차가운 회색으로 변한 니미츠 제독이 얼어붙을 듯한 표정으로 노려보자 로슈포트 중령은 20일에 들어온 중요한 암호를 해독하느라 늦었다면서 들고 있던 서류를 건넸다.

참석자들이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노기등등한 얼굴로 서류를 훑어보던 니미츠 제독의 태도가 차차 누그러지더니 잠시 후 회의가 시작되었다. 

 

회의 참석자들은 도대체 그 서류에 무슨 내용이 들어 있길래 니미츠 제독의 회의에 30분이나 지각하고도 로슈포트 중령의 목이 당장 달아나지 않았는지 궁금해했다.

궁금증은 잠시 후 문건이 배포되자 풀렸다.

회의 참석자들은 배포된 문건을 읽어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거기에는 정보출처는 없었지만 미드웨이를 공격할 일본함대의 규모, 지휘관, 공격 시기까지 자세하게 쓰여 있었다.

나중에 엔터프라이즈 함상에서 태평양함대 작전계획 제29-42호에 포함된 이 부분을 읽어보고 놀란 엔터프라이즈의 항해장 루블 중령은 암호 해독으로는 절대로 이런 최고급 정보를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도쿄의 미국 첩보원은 정말 미국정부가 주는 돈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사실 이때문에 5월 20일에 하이포국이 입수한 정보에 관한 전설이 생겨났다.

즉 하이포국이 그날 MI 작전에 참가하는 함선과 지휘관, 행동계획 뿐만 아니라 항공기 출격시간까지 한마디로 MI 작전에 대한 내용이 전부 담겨있는 통신을 통째로 획득했다는 전설이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미드웨이 해전은 미해군이 일본해군의 작전계획서를 손에 들고 시작한 전투로 절대로 질래야 질 수가 없는 전투였다는 뜻이 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실 하이포국이 5월 20일에 획득한 통신은 따로따로 입수된 12개 통신으로서 모두가 중요하고 핵심적인 내용이기는 했지만 작전계획서같이 완결된 형태는 아니었다.

니미츠 제독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회의 참석자들을 경악하게 만든 그 문건은 사실 5월 20일 이전의 정보에다가 20일의 결정적인 단서들 그리고 20일 이후의 보충 통신들까지 포함하여 로슈포트 중령과 레이튼 중령이 절묘하게 끼워맞춘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25일에 배포된 문건이 후세에 알려진 것만큼 완벽한 것도 아니었다.

예를 들어 그 문건을 만든 사람들은 알류샨 공략부대와 제1기동부대, 미드웨이 공략부대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으나 야마모토 제독이 직접 지휘하던 주력부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실제로 미드웨이 해전에 주력부대가 출동했었다는 것을 미해군이 알아낸 것은 미드웨이 해전이 끝나고도 몇달이 지나서였다.

또한 제1기동부대에 제1항공전대와 제2항공전대의 항모 4척이 참가한다는 것은 정확하게 알아내었으나 제1항공전대와 제2항공전대가 한덩어리로 같이 행동한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만일 미해군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 비극적인 전력 분산은 아예 없었거나 훨씬 정도가 덜했을 것이고 미함대의 집중된 함재기 세력은 히류가 살아남아 요크타운에 반격을 가할 기회조차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정보만으로도 사실 엄청난 것이었으며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태평양함대의 정보참모 레이튼 중령은 제1기동부대의 출현시기를 집요하게 물어보는 니미츠 제독에게 일본해군의 제1기동부대가 6월 4일 오전 6시에 미드웨이의 325도 방향, 175마일 거리에서 발견될 것이라고 말해 줄 수 있었다.

실제로 제1기동부대는 6월 4일 오전 5시 55분에 미드웨이의 320도 방향, 180 마일 거리에서 발견되어 레이튼 중령의 예측에서 시간으로 5분, 방향에서 5도, 거리에서 5마일 밖에 차이나지 않았다.

 

이제 하이포국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바를 모두 한 셈이었고 나머지는 현장지휘관이 담당해야 할 몫이었다.

니미츠 제독을 위시한 태평양함대 수뇌부는 걸출한 제독인 윌리엄 헐지 중장이 있는 한 현장 지휘관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고 운명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새로운 영웅을 탄생시켰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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