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불길한 징조 

 

1942년 5월 1일부터 5일까지 일본연합함대의 기함인 전함 야마토 함상에서 MI 작전에 참가하는 주요 지휘관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MI 작전에 대한 전쟁연습(War Game)이 실시되었다.

전쟁연습은 적의 입장에서 생각해봄으로써 아군 계획의 헛점을 파악하고, 보완책을 마련하기 위한 계획 작성의 마지막 단계요, 백미라고 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규칙을 어떻게 정하든 일단 정해진 규칙 하에서는 자유로운 시도를 허용하고 거기에서 발견된 문제점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했다.

실제로 진주만 기습을 앞두고 벌어진 전쟁연습에서는 모두들 진지하게 연습에 임하여 수많은 문제점들을 도출하고 치열한 토론을 통하여 작전계획의 미비점을 보완하고 수정했다.  

 

(일본전함 야마토.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그러나 이번의 전쟁연습은 완전히 달랐다.

야마모토 제독은 MI 작전에 대한 전쟁연습을 단순한 통과의례로 만들 생각이었다.

전쟁연습에 필요한 각종 정보는 연습 직전에야 참가자들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에 준비할 시간 여유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전쟁연습에 돌입하자 상황은 야마모토 제독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미리 준비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군을 담당한 지휘관들은 대부분 야마모토 제독의 뜻대로 작전 계획에서 주어진 역할에 충실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해군인 홍군을 담당한 좌관급 장교들은 시간 여유가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미해군이 취할 수 있는 놀랄만한 대안들을 잇달아 들고나와 MI 작전 계획의 문제점을 여지없이 폭로했다.

 

5월 1일에 대형 지도판 위에서 벌어진 첫번째 도상 전투부터 파란이 일어났다.

미해군인 홍군을 담당한 장교들은 실제로 미해군이 한 것과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미드웨이 북쪽에서 매복했다가 예상보다 훨씬 멀리서 나구모 함대를 포착한 다음 측면에 통렬한 기습공격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나구모 함대의 항공모함 중 3척이 커다란 피해를 입어 미드웨이 상륙작전이 위기에 봉착했다.

그러자 연합함대 참모장 우가키 제독이 개입하여 그런 전술은 불가능하다면서 공격을 무효화시키고 피해를 입은 3척의 항모를 원상태로 되돌렸다.

홍군 장교들의 격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홍군 함대는 남쪽으로 물려져 야마모토 제독이 예상했던 시간에 예상한 위치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도상 전투를 진행할 수 밖에 없었다.

 

다음날의 도상 전투에서 또다시 파란이 일어났다.

홍군을 담당한 장교들은 미드웨이의 항공기들을 총동원하여 남하하는 나구모 함대를 사방에서 동시에 습격했다.

심판관인 오쿠미야 마사다케 중좌가 주사위를 던지자 무려 9발의 폭탄이 아카기와 카가에게 명중하는 것으로 나와 2척이 모두 침몰했다.

그러자 또다시 우가키 소장이 개입하여 9발의 명중탄을 3발로 줄여서 카가만 격침되는 것으로 결과를 바꾸었다.

게다가 이어진 뉴칼레도니아 공격에서는 침몰했던 카가가 되살아나서 작전에 참가하는 촌극까지 벌어졌다.

그러자 도상 전투를 지켜보던 주요 지휘관들은 MI 작전 계획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

 

야마모토 제독도 불안감을 느꼈던지 마지막 도상 전투 때 나구모 중장에게 만일 미드웨이를 공격하는 도중에 측면에서 미국 항공모함들이 나타나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제1기동부대의 항공참모인 겐다 미노루 중좌에게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겐다 중좌는

 

"그런 일이 생긴다면 매우 큰 문제가 되겠지만.."

 

이라면서 말꼬리를 흐리다가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더니 큰 소리로

 

"우리는 적을 휩쓸어 버릴 겁니다!"

 

라고 대답했다.

모두들 겐다 중좌의 무책임한 답변에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데 연합함대 참모인 미와 대좌가 나서서 제1기동부대의 방어력은 막강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일동에게 말했다.

 

야마모토 제독으로서도 분명히 겐다 중좌의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만 이를 계기로 MI 작전에 대한 비판의 물꼬가 트이는 것을 싫어했다.

그리하여 야마모토 제독은 나구모 중장에게 미드웨이 폭격이 진행되는 동안 나머지 항공기들은 대함무장을 갖추고 대기하라는 권고에 가까운 구두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지었다.

중요한 전술적 문제를 다루면서 겐다 중좌와 미와 대좌가 보여준 허세는 미드웨이 해전을 앞둔 일본해군의 자만심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로써 5월 5일에 전쟁연습이 끝났으나 주요 지휘관들이 모여서 5일씩이나 전쟁연습을 하고서 얻은 결과라고는 MI 작전에 대한 일방적인 자기합리화 뿐이었다.

지적인 자극이나 유익한 깨달음은 전혀 없었으며, 홍군을 담당했던 장교들을 위시한 좌관급 실무자들의 환멸만이 남았다.

 

미지의 전장에 가장 먼저 들어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나구모 중장은 전쟁연습에서 믿을만한 우발계획 하나 건지지 못했다.

이제 그는 작전 중에 나타날 모든 예외적 상황에서 미리 연구된 우발계획 하나 없이 임기응변으로만 처리해야 할 입장이 되었다.

 

전쟁연습이 끝난 이틀 후인 5월 7일과 8일에 걸쳐 남태평양의 뉴기니 근해에서 산호해 해전이 벌어졌다.

일본해군은 경항공모함 쇼호를 잃고 정규항공모함 쇼가쿠가 폭탄 3발을 맞아 108명이 사망하면서 대파되었고 즈이가쿠는 항공대가 큰 피해를 입었다.

미해군은 정규항공모함 렉싱턴이 격침되고 요크타운이 대파되었다.

일본해군은 산호해 해전에서 전술적으로 승리했으나 포트모레스비 공략에 실패함으로써 전략적으로는 패배했다.

게다가 일본군은 렉싱턴와 요크타운을 모두 격침했다고 믿었는데 요크타운은 살아 남았다.

 

(일본항공모함 쇼가쿠.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비록 전술적으로 승리했으나 산호해 해전은 일본해군에게 많은 점을 시사했다.

산호해 해전에서 처음으로 일본항모기동부대에 정면 도전한 미국의 항공모함 기동부대는 일본군이 지금까지 상대해 온 연합군과 완전히 달랐으며 인도양에서 만났던 영국해군과도 확연히 다른 상대였다.

미국 항공모함 2척은 일본해군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 매복해 있었고 그 결과 전방으로 지나치게 멀리 나가 적절한 지원을 받을 수 없었던 일본의 경항공모함 쇼호는 미국 함재기의 집중 공격으로 어뢰 5발과 폭탄 11발을 얻어맞고 맥없이 침몰했다.

미해군의 함재기 조종사들은 이제까지 일본군이 말레이, 보르네오, 그리고 자바 상공에서 만난 연합군 조종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량이 뛰어나고 공격적이었다.

 

미해군의 주력 함재전투기인 와일드캣은 제로기보다 성능이 뛰어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주력 뇌격기인 데버스테이터는 97식 함상공격기보다 확실히 성능이 떨어졌다.

그러나 급강하폭격기 돈틀레스는 대형폭탄인 450kg 짜리 폭탄을 멀리 싣고가서 정확하게 투하할 수 있는 뛰어난 능력을 과시했다.

돈틀레스 조종사들은 제로기의 요격과 빗발치는 대공포화를 뚫고 해상에서 재빠르게 기동하는 쇼가쿠에 3발의 450kg 짜리 폭탄을 명중시킬만한 기량과 용기 그리고 집중력을 보여 주었다.

 

일본해군에게 있어서 산호해 해전으로 인한 심각한 결과는 쇼가쿠의 손상과 즈이가쿠 항공대의 손실로 인하여 제1기동부대에 제5항공전대가 참가하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이로써 나구모 제독은 MI 작전계획이 가진 여러 취약점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반격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강대한 함대항공력이란 비장의 카드를 잃었다.

 

제1기동부대의 조종사들은 제5항공전대의 불참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카기와 카가로 이루어진 제1항공전대와 소류와 히류로 이루어진 제2항공전대의 조종사들은 자신보다 기량이 떨어지는 제5항공전대의 쇼가쿠와 즈이가쿠 소속 조종사들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을 듣자 역시 미해군은 별 것 아니라고 떠들었다.

 

사실 야마모토 제독과 우가키 참모장도 제1기동부대의 전력저하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만일 제1기동부대의 전력을 꼭 확충하려면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은 쇼가쿠의 항공대를 큰 피해를 입은 즈이가쿠의 항공대와 합친 다음 함체의 피해가 거의 없던 즈이가쿠에 실어 제1기동부대에 합류시킬 수 있었다.

 

(일본항공모함 즈이가쿠.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물론 일본의 함재 항공대는 미국과 달리 유연한 운용이라는 면에서 불리했다.

미해군의 함재 비행전대는 항모와는 별개로서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이 항모에서 저 항모로 옮겨다닐 수 있었다.

반면 일본의 함재 항공대는 항공모함과 완전한 일체를 이룬 항모의 한 부분이었다.

일본의 항공모함과 항공대의 관계는 마치 전함과 주포의 관계와 같이 여겨졌으며 주포가 망가지면 전함도 출전하지 못하듯이 항공대가 큰 피해를 입으면 그 피해를 복구할 때까지 항공모함도 출전하지 못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전함의 주포와 항공모함의 항공대는 엄연히 다른 것이기에 필요하면 과감하게 기존의 사고방식을 깨뜨릴 필요가 있었고, 당시 일본해군에게는 그러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다. 

 

산호해 해전에서 살아남은 쇼가쿠와 즈이가쿠의 항공대를 합치면 즈이가쿠는 제로기 25대, 99식 함상폭격기 17대, 97식 함상공격기 14대로 이루어진 항공대를 가지고 MI 작전에 참가할 수 있었으며, 56대라는 함재기 숫자는 당시 제1기동부대의 항공모함 1척이 보유한 평균적인 함재기 숫자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물론 쇼가쿠 출신의 조종사들이 즈이가쿠 출신의 조종사 및 즈이가쿠 함상 승조원들과의 융화나 화합에 약간 어려움을 겪을지도 모르나 공통의 목적에 헌신하는 충성스러운 일본군으로서 그런 문제는 미미할 것이었다.

실제로 제1기동부대에는 미드웨이에 배치될 제6항공대 소속의 제로기 21대가 항공모함 4척에 분산 배치되어 함께 작전했는데 제6항공대 소속의 제로기 조종사들은 모든 항공모함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아무 문제없이 기존의 함재 항공대 조종사들과 함께 작전에 참가했다.

 

결국 야마모토 제독은 미해군을 상대하는데 4척의 항모로 충분하며 꼭 즈이가쿠를 제1기동부대에 추가시키기 위하여 아둥바둥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미해군이 산호해 해전에서 중상을 입은 요크타운을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시키기 위하여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생각해보면 즈이가쿠의 합류를 쉽게 포기해 버린 야마모토 제독의 태도는 미군을 무시하는 오만함의 표출로 승리병의 한 증상이었다.

 

일본해군은 1940년 1월 1일부터 JN-25b 를 암호로 사용했는데 1942년 5월 1일을 기하여 지명 표기 방법을 바꾼 JN-25v 로 바꿀 예정이었다.

그러나 촉박하게 진행되던 MI 작전 준비를 방해하지 않기 위하여 암호 교체 시기를 5월 27일로 연기했다.

일본은 미군이 자신들의 암호를 해독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런 조치를 취했으나 사실 미해군은 1942년 3월 말부터 JN-25b 를 상당부분 해독하고 있었다.

미군이 MI 작전 계획에 대하여 알아낸 것은 주로 5월 9일 이후로서 결정적인 정보는 5월 20일에 입수했기 때문에 만일 5월 1일에 예정대로 암호를 바꾸었다면 미드웨이 해전의 결과도 달라졌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실제로 5월 27일에 암호가 바뀌자 미태평양함대의 암호해독기관인 하이포국에서는 미드웨이 해전 기간 동안 일본군의 통신을 전혀 해석할 수 없었다.

미군의 암호해독능력을 무시한 이러한 안일한 태도 역시 승리병의 한 증상이었다. 

 

출격을 앞둔 1942년 5월 25일에 하시라지마에 정박한 일본연합함대의 기함 야마토 함상에서 마지막으로 전쟁연습이 벌어졌는데 여기서 미해군인 홍군을 담당한 장교들은 다시 파란을 일으켰다.

홍군함대는 하와이 남쪽에서 서진하여 잠수함의 초계선을 피한 다음 미드웨이의 동쪽으로 북상함으로써 항공 초계선의 헛점을 파고 들었다.

이어서 홍군함대는 고속으로 북상하여 나구모 함대를 공격함으로써 항공모함 1척을 격침하고 2척에 큰 피해를 입혔다.

물론 홍군함대도 반격을 받아 항모 2척을 상실했지만 도상 전투를 지켜보던 지휘관들은 항공초계의 헛점을 파고드는 미함대의 움직임과 함께 제1기동부대가 위험에 빠졌는데도 야마모토의 주력부대를 비롯한 다른 함대들이 전혀 도와주지 못하는 상황을 보고 심각한 우려를 나타내었다. 

야마모토 제독도 걱정이 되었는지 나구모 중장에게 저런 상황에 대비한 계획이 있느냐고 물었고,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 중좌는 저런 상황에 대비한 우발계획을 세워 놓았다고 대답했다.

 

(1942년 5월 25일에 야마토 함상에서 실시된 MI 작전의 마지막 도상 전투 상황도. 미해군을 뜻하는 홍군함대는 미드웨이 남동쪽에서 항공초계망을 피하여 북상한 다음 나구모 제독의 제1기동부대를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출처: Shattered Sword, P.68)

 

마지막 전쟁연습이 끝난 직후 나구모 제독은 트럭에 파견했던 소류의 도착이 늦어지는 관계로 MI 작전 일정을 하루만 늦추어 달라고 요청했고 촉박한 일정에 쫓기던 대부분의 지휘관들이 나구모 중장의 요청을 지지했다

그러나 야마모토 제독은 단호하게 연기 요청을 거부하면서 만일 출발이 하루 늦어지면 도중에 빨리 달려가서라도 작전은 정확한 시간표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에피소드는 야마모토 제독이 MI 작전을 실시하면서 부하들에게 시간표를 철저하게 지키도록 얼마나 심하게 강요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빠듯한 시간표에 구속된 나구모 중장을 비롯한 일본함대의 지휘관들은 돌발상황이 발생했을 때 취할 수 있는 행동에 큰 제약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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