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제1항공함대 

 

미드웨이 해전 당시 일본항모기동부대의 함재기들은 함상전투기, 함상폭격기, 함상공격기의 3기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줄여서 함전이라고 부르는 함상 전투기는 제로기로서 기체 강도가 약하여 방어력이 취약하고 급강하시 고속을 낼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장대한 항속거리와 중고도 및 저고도에서 놀라운 운동성을 지닌 기체로서 미국의 헬캣이 나오기 전까지는 세계 정상급의 함재전투기였다.

 

(제로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줄여서 함폭이라고 부르는 함상폭격기는 미국의 급강하폭격기와 같은 종류였다.

당시 일본의 함폭은 고정된 랜딩기어를 가진 99식 함상폭격기였다.

99식 함폭은 최대 폭장량이 250kg 으로서 미국측의 맞수인 SBD 돈틀레스의 450kg 에 비하여 열세였지만 유능한 조종사가 탑승할 경우 충분히 위력적이었다.

 

(99식 함상폭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줄여서 함공이라고 부르는 함상공격기는 미해군의 뇌격기와 같은 역할을 하는 기종이었다.

당시 일본해군의 함상공격기는 97식 함상공격기로서 800kg 의 어뢰 1발 또는 폭탄을 장착할 수 있었다.

 

(97식 함상공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일본해군의 함재기들은 3대로 이루어진 소대가 기본단위였다.

소대 3개가 모여 9대가 중대를 이루었으며, 선임 소대장이 지휘했다.

함폭 1개 중대와 함공 1개 중대가 함전 1개 중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적 함정을 공격하는 것이 일반적인 공격형태였다.

단 함상공격기들은 1942년 3월부터 2개 소대, 합계 6대로 중대를 형성했다.

 

중대 2-3개가 모여 공격대를 형성해는데 공격대는 기종의 이름을 따서 함상전투기대, 함상폭격기대, 함상공격기대 등으로 불렀다.

공격대들을 모두 합쳐 항공대를 형성하는데 대부분 항공모함의 이름을 따서 아카기 항공대 등으로 불렀다.

 

(1942년 당시 일본 함재기들의 기본 대형. 출처 : Shattered Sword  P.81)

 

미드웨이 해전 당시 야마모토 제독이 제1항공함대를 주축으로 한 제1기동부대를 가장 전면에 내세운 데에는 공격을 중시하는 뿌리깊은 일본해군의 교리가 자리잡고 있다.

육군도 마찬가지지지만 일본해군은 미국이나 영국 등의 서구 열강들과 전쟁을 했을 경우 장기전으로 가게 되면 산업력의 격차 때문에 무조건 패배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들은 이러한 서구열강과 전쟁에 돌입했을 경우 무조건 단기결전으로 끝을 봐야한다고 생각했고, 특히 해군의 경우 군축조약에 의하여 주력함의 비율 자체가 제한됨으로써 이런 경향이 더욱 심했다.

일본해군의 경우 단기 결전을 지향하는 이런 교리가 작전에는 물론 무기개발과 교육체계에까지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일본의 군함들은 강력한 공격력이 제1의 조건이었으며, 구조적 강도나 안정성, 보수문제 등은 부차적 문제였다.

해군의 항공기도 마찬가지로 공격력과 뛰어난 운동성이 필수였으며, 이런 성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우수한 조종사를 중시했다.

그러면서도 정작 조종사의 손실을 줄이기 위한 방탄장비나 연료방루장치 등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전투에 따르는 필연적인 조종사의 손실을 메꿀 지속적이고 효율적인 조종사 양성계획 또한 등한시했다. 

어차피 전쟁 자체를 단기결전으로 끝낼 생각이었기 때문에 조종사 보호나 지속적인 조종사의 충원은 큰 의미가 없다고 본 것이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공격력은 강력하지만 상대적으로 방어력이 취약한 제1항공함대 중심의 제1기동부대를 선두에 내세운 것도 이러한 교리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즉 적보다 먼저 발견해서 먼저 때리는 것만 생각했지 먼저 발견당해서 먼저 얻어맞을 경우는 별로 염두에 두지 않은 결과였다.

일본해군이 항공모함을 보호하기 위하여 전방에 유력한 수상함대를 먼저 내보내기 시작한 것은 미드웨이 해전 이후였다.

 

이러한 일본해군의 공격 중시 사상을 항공모함과 함재기로 이루어지는 함대항공력 분야에서 극한까지 끌어올린 것이 바로 전함의 시대를 끝장내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항공모함의 전성시대를 열어젖힌 제1항공함대였다.

그리고 이러한 제1항공함대의 창설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당시에 일개 중좌에 지나지 않던 겐다 미노루였다.

 

1940년 10월에 겐다 중좌는 런던 주재 일본대사관 파견 근무를 마치고 도쿄로 돌아왔다. 

그는 곧 제1항공전대의 항공참모로 발령을 받았으나 부임까지 며칠 남았으므로 도쿄에서 여유있게 시간을 보내던 중 극장을 찾았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화면에서 미국의 뉴스 영상이 나왔는데 그 영상 속에서는 미국 항공모함 렉싱턴과 새러토가, 그리고 요크타운과 엔터프라이즈가 나란히 항진하고 있었다.

이 장면을 바라보던 겐다 중좌의 머리에 언뜻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항공모함의 집단을 전시용으로만 사용할 것이 아니라 실전에 사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다.

 

(제1항공함대의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 중좌.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일본해군은 1928년에 항공전대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정규항공모함과 경항공모함을 1척씩 짝지어 운용하는 체제를 시험해 보았으나 딱히 항모의 집단 운용에 대한 정립된 개념은 없었다.

따라서 항공전대도 대부분 정규항모와 경항모를 1척씩 짝짓거나 또는 항모 1척과 호위 구축함들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당시 제1항공전대도 항공모함 아카기와 구축함 4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만 제2항공전대는 항공모함 소류와 히류로 이루어져 있었다.

 

겐다 중좌는 항공전대를 정규항모 2척이나 경항모 2척씩을 묶어 만들고, 이런 항공전대 2-3개를 합쳐 하나의 항공함대를 만들어 집단운용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면 상당한 수의 급강하폭격기와 뇌격기들이 대규모 전투기 편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적을 공격할 수 있을 것이었다.

 

겐다 중좌는 제1항공전대에 부임하자마자  자신의 구상을 상급자들에게 털어 놓았다.

제1항공전대 사령부는 겐다의 발상에 흥미를 가졌으나 수많은 함재기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무전을 사용하면 기도 비닉이 어렵고, 다수의 항공모함에서 이함하는 함재기들이 대열을 갖추려면 항속거리를 희생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더군다나 항공전대의 구조를 획일적으로 항모 2척 체제로 바꾼다는 것은 자신들의 권한을 넘어서는 일로 생각했다.

 

사장되는 듯하던 겐다 중좌의 아이디어는 1940년 말에 뜻밖의 돌파구를 찾았다.

연말에 여러차례 이루어지던 회식에서 겐다 중좌는 우연히 제3전대장 오자와 지사부로 소장을 만났다.

겐다 중좌는 그 자리에서 항공모함을 집중운용하자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오자와 소장에게 설명했다.

비록 전함 중심의 제3전대를 맡고 있지만 원래 항공주병론자인 오자와 소장은 겐다 중좌의 아이디어에 큰 흥미를 보였다.

결단력과 실천력이 뛰어난 오자와 소장은 1941년 새해가 되자 인사차 도쿄에 들른 김에 해군성에 찾아가 항공본부장 이노우에 시게요시 중장에게 겐다 중좌의 아이디어를 설명했다.

이노우에 중장은 이 아이디어에 찬성하고 오자와 소장에게 해군대신 오이카와 코시로 중장과의 면담을 주선해 주었다.

오자와 소장의 설명을 들은 해군대신 오이카와 중장이 겐다 중좌의 아이디어를 적극 받아들임으로서 1941년 1월부터 항공함대의 창설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41년 4월 10일에 제1항공전대(아카기, 카가), 제2항공전대(소류, 히류) 및 제4항공전대(류조)로 구성된 제1항공함대가 창설되었다.

 

(제3전대장 오자와 지사부로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제1항공함대의 창설은 세계해전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항공모함과 함재기로 이루어진 함대항공력은 집단적인 운용을 통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전장에서 전략적으로 의미있는 결과를 만들어 낼 능력을 가지게 되었고, 항공모함은 정찰과 견제라는 소극적 위치에서 벗어나 해전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항공모함은 이렇게 해전의 패러다임을 바꾸면서 전함의 시대를 끝장내었으며 이후 항공기의 발달에 힘입어 제1항공함대의 등장 이후 7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해전의 주역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영국과 미국은 전통적인 선진 공업국이자 해양강국으로서 항공모함의 도입과 운용 면에서도 일본에게 영향을 주었고 앞선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제1항공함대의 창설로 일본해군은 함대 항공력에 관한 한 세계 선두로 나섰다.

일본은 진주만 기습 이후 1942년 6월의 미드웨이 해전에서 제1항공함대가 몰락할 때까지 선구자로서의 잇점을 누렸다.

 

집중운용되는 함재기의 가공할 위력은 1941년 12월 7일의 진주만 기습으로 확연하게 드러났다.  

정규항모 6척(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 쇼가쿠, 즈이가쿠)을 보유한 나구모 제독의 기동부대는 진주만에 기습적인 항공공격을 가하여 단 2번의 공습으로 불과 2시간 만에 8척의 전함을 전열에서 탈락시키고, 강력한 미태평양함대를 반신불수로 만들었다.

당시 전 세계에서 이런 강력한 항공공격을 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함대는 오직 일본해군의 기동부대 뿐이었으며, 미드웨이 해전에서 몰락하기 전까지 제1항공함대는 단일 함대로서는 의심의 여지없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함대였다.

 

항공력을 주요 타격수단으로 사용하는 제1항공함대의 사령관으로 항공부문에 무지한 나구모 주이치 중장이 임명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였다.

나구모 중장의 직속상관인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은 나구모 중장을 싫어했다.

당시 나구모 중장은 전함을 중시하고 군축조약에 비판적인 함대파의 중요한 인물로서 군축조약에 찬성하는 야마모토 제독 및 이노우에 시게요시 제독 등과 대립하고 있었다.

야마모토 제독이 연합함대 사령관에 임명된 이유가 해군차관 시절 공공연하게 군축조약 찬성을 주장하고 다녀서 반대파의 극단주의자들에 의하여 암살될까봐 그를 아끼는 해군 수뇌부에서 안전한 해상으로 내보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당시 야마모토 제독은 유서를 써서 품에 지니고 다녔다고 하니까 근거없는 소문은 아니었다.

 

당연히 야마모토 제독이 나구모 제독을 좋아할 리가 없었고, 더군다나 나구모 제독은 항공전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그러나 1941년 3월의 시점에서 야마모토 제독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야마모토 제독은 제1항공함대의 사령관으로 유능한 항공주병론자인 오자와 소장을 임명하고 싶어했으나 신설된 항공함대의 사령관은 중장급의 자리였으며, 오자와 제독은 불과 5개월 전인 1940년 11월 1일에 제3전대 사령관으로 발령이 났었다.

자기 마음에 든다고 해서 발령난 지 5개월 만에 소장을 현재 직위에서 빼내어 중장으로 진급시켜 새 직위에 앉힌다는 것은 야마모토 제독의 권한 밖이었다.

연공서열을 중시하는 일본해군의 인사 관행에서 신설된 제1항공함대 사령관 자리는 해군대학장을 맡고 있던 나구모 중장에게 돌아가는 것이 순리였으며 야마모토 제독으로서는 그를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사실 나구모 제독의 입장에서도 제1항공함대 사령관 자리가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이 새로운 자리가 전망이 밝기는 했다.

하지만 나구모 제독은 수뢰전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해군 내에서 승진해 왔으며 전함을 중시하는 구시대적 사고방식을 가진 제독이었다.

그에게 첨단무기인 항공기는 낯설었고, 시시각각 변하는 항공전 교리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제1항공함대 사령관으로서 나구모 제독은 겉보기에는 화려하지만 몸에 잘 맞지 않는 값비싼 옷을 걸친 듯한 불편함을 늘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제1항공함대를 주축으로 편성된 기동부대는 그의 지휘 하에서 진주만 기습을 시작으로 6개월 동안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야마모토 제독은 진주만 기습에서 제3차 공격을 포기해 버린 나구모 중장의 소극적인 행동에 크게 실망하여 그를 해임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승리를 거두고 돌아와서 해임을 당한다는 것은 당시의 일본해군 내에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치욕이었다.

이런 식으로 해임을 당한 당사자는 도저히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으며 당시의 일본해군 분위기에서 그것은 할복하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진주만 기습의 성공으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야마모토 제독의 요청이라고 해도 그러한 무리한 해임 건의는 대본영 해군부나 내각의 해군성에서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그 이후로도 기동부대의 놀라운 전공이 계속 쌓여감에 따라 나구모 제독을 해임할 기회는 사라졌다.

 

그리고 야마모토 제독도 제1항공함대 사령관으로서 나구모 중장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구모 제독은 자신이 항공전에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주로 항공전에 관한 내용일 수 밖에 없는 야마모토 제독의 명령에 반박하거나 논쟁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유능한만큼 독선적이기도 했던 야마모토 제독은 부하들의 반대 의견을 듣는데 익숙하지 않았고 따라서 투덜거리다가도 일단 명령을 내리면 고분고분 따르는 나구모 제독이 다루기 편한 면도 있었다.

 

사령관이 항공전에 무지하다면 참모장의 역할이 중요해지는데 불행하게도 제1항공함대 참모장 구사카 류노스케 소장은 무능했다.

구사카 참모장은 항공주병론자로서 열정은 상당했으나 항공작전을 실제로 수립하거나 평가하는데 필요한 전문적 식견이 모자랐다.

 

(제1항공함대 참모장 구사카 류노스케 소장.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이런 상황에서 제1항공함대의 실질적 작전수립은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 중좌가 담당했다.

제1항공함대의 탄생에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했던 겐다 중좌는 자신의 영역인 항공작전의 수립에 대단한 열정과 전문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도 거기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아직 젊은 일개 중좌로서 경험이 부족하고 전장의 전체적인 국면을 바라보는 시야가 좁다는 한계 또한 절감하고 있었다.

따라서 겐다 중좌는 항공전에 대한 전문성과 경험, 그리고 폭넓은 시야를 겸비하여 자신이 놓치고 있는 점을 지적해 줄 수 있는 유능한 상관을 원했으나 불행하게도 제1항공함대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

 

제2항공전대장 야마구치 다몬 소장은 확실히 나구모 사령관이나 구사카 참모장보다는 항공전에 대하여 경험이 많고 유능했다.

실제로 그는 미드웨이 해전에서도 제1항공함대의 주력이 격파된 상황에서 히류 1척만을 이끌고 과감하게 반격을 가하여 요크타운을 격침했다.

그러나 그에 대하여 연구한 서구 역사가들은 대부분 야마구치 제독을 지나치게 공격일변도이며 명예를 중시하는 전형적인 사무라이로 평가한다.

겐다 중좌 또한 야마구치 제독이 득실을 계산하지 않고 무조건 공격만을 주장하는 무식한 지휘관이라고 생각했다.

 

(제2항공전대장 야마구치 다몬 소장.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야마구치 제독에 대한 겐다 중좌의 혐오감을 심화시키는 데에는 연합함대 참모장인 우가키 마토메 소장도 책임이 있었다.

제1항공함대 사령부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야마구치 제독은 우가키 참모장을 만날 때마다 제1항공함대의 나구모 사령관이나 구사카 참모장이 능력이 없으니까 항상 소극적이라고 불만을 털어 놓았다.

우가키 참모장은 그럴 때마다 맞장구를 치면서 야마구치 제독에게 제1항공함대 사령부의 소극적인 경향을 항상 지적하고 공격정신을 일깨워주라고 요청했다.

따라서 야마구치 제독은 제1항공함대의 회의에 참석하면 필요 이상으로 호전적인 주장을 펴면서 나구모 사령관과 구사카 참모장의 우유부단함을 비난했고 이런 행동은 겐다 항공참모에게 야마구치 제독이 무조건 공격만 주장하는 무식한 지휘관이라는 인상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부정적 인상 때문에 겐다 중좌는 제1항공함대에서 자신을 지도해 줄 수 있는 능력과 경륜을 가진 유일한 인물인 야마구치 제독으로부터 배울 수 없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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