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MI 작전 

 

1942년 4월 18일 오후 12시 30분, 일본의 수도 도쿄 상공에 마술처럼 홀연히 미군의 쌍발폭격기들이 나타나서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미국 항공모함 호넷에서 출격한 B-25 쌍발폭격기 16대로 이루어진 둘리틀 공격대였다. 

갑판에 B-25 를 실은 항공모함 호넷과 호위하던 엔터프라이즈 및 호위 함정들로 이루어진 미국의 항공모함 기동부대는 진주만 기습 당시 일본함대가 사용했던 북태평양 항로를 거꾸로 되짚어 와서 일본의 수도에 기습적인 폭격을 가한 것이었다.

 

(제임스 둘리틀 중령.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뒷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일본해군은 도쿄를 공습한 미항모기동부대를 포착하려 했다.

인도양에서 돌아오던 나구모의 항모 5척 중 MO 작전을 지원할 쇼가쿠와 즈이가쿠를 제외한 아카기, 소류, 히류가 즉시 대만 동쪽으로 진출하여 도쿄 남부 해상에 있을 것으로 예상한 미국의 항모기동부대를 수색했다.

그러나 미국의 항모기동부대는 일본해군의 예상보다 훨씬 북쪽에서, 예상보다 훨씬 먼 거리에서 둘리틀 공격대를 발진시키고는 회수하지도 않고 그대로 철수해 버렸으므로 일본항공모함들은 미항모기동부대를 찾을 수 없었다.

 

폭격으로 인한 물적 피해는 미미했다.

육군항공대의 둘리틀 중령이 지휘하던 16대의 B-25 폭격기 중 13대가 도쿄를 폭격하고, 3대가 한신공업지대를 폭격하여 사망 45명, 부상 153명, 가옥피해 680채의 피해를 입혔다.

요코스카에서 건조 중이던 경항공모함 류호가 폭탄 1발을 맞아 가벼운 피해를 입었고, 나고야의 미츠비시 항공기 조립공장도 폭탄 1발을 맞았다.

 

그러나, 둘리틀 폭격이 일본에게 던져준 정신적인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대낮에 미군 항공기가 일왕이 있는 일본의 수도 도쿄를 공습하여 일왕을 위험에 빠뜨린 것이었다.

정부와 군은 다같이 격노했고, 특히 해상으로부터의 공격에 대하여 본토 방어의 책임을 진 일본해군의 충격과 분노는 더욱 컸다.

벌건 대낮에 도쿄가 폭격을 당하자 군령부 총장 나가노 오사미 대장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라고 넋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으며, 야마모토 제독은 야마토 함상의 자기 선실에 틀어박혀 하루종일 두문불출했다.

(둘리틀 폭격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미국의 항공모함이 없었다면 이런 공격은 불가능했다.

이제 1942년 4월 18일 이후로 미국의 항공모함은 의심할 여지없는 일본의 가장 큰 적으로 떠올랐다.

동시에 미국 항공모함의 격멸을 목적으로 한 야마모토 제독의 미드웨이 침공작전은 최고의 가치와 우선순위를 인정받게 되어 아무도 감히 딴지를 걸 수 없는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도쿄 폭격 다음날인 4월 19일에 대본영 육군부의 작전부장 다나카 신이치 육군소장은 해군부의 도미오카 대좌에게 육군은 미드웨이 침공작전인 MI 작전을 무조건 지지한다고 말했다.

대본영 육군부는 20일에 MI 작전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며 필요한 육군병력을 요청하는 즉시 파견하겠다는 의사를 해군부에 정식으로 전달했다.

더 나아가 다나카 장군은 도미오카 대좌에게 연합함대가 주장하던 하와이 상륙작전에 대한 자세한 자료를 요청했다.

4월 25일 대본영 육군부는 해군부에 공문을 보내어 만일 해군이 요청한다면 항공모함의 기지 자체를 말살해 버리는 하와이 점령작전에 필요한 병력도 기꺼이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공식적으로 전해왔다.

실제로 이날 제2사단과 제7사단이 하와이 침공을 위한 상륙작전 훈련에 돌입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며칠 후에는 제53사단과 1개 독립공병연대, 그리고 1개 전차연대가 같은 명령을 받았다.

하와이 침공을 위한 상륙훈련은 9월 말까지 완료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제 미드웨이 침공을 위한 연합함대의 MI 작전은 갑자기 탄력을 받게 되었다.

 

MI 작전을 살펴볼 때 우선 알류샨 열도 점령을 위한 AL 작전은 미드웨이 점령을 위한 MI 작전과 별개의 작전이라는 것을 알아두어야 한다.

AL 작전은 애투, 애닥 및 키스카 섬을 점령하는 1단계(6월 8일까지), 예상되는 미군의 반격을 물리치는 2단계(6월 20일까지), 그리고 점령 지역을 확보하는 3단계(6월 20일 이후)로 나뉘어진다.

각 단계마다 참가하는 함정들이 다르고, 단계가 바뀔 때마다 일부 함정들은 MI 작전에서 AL 작전으로 돌려지기도 하고, 또 일부 함정들은 MI 작전을 위하여 빠져나가기도 한다. 

 

MI 작전에 투입되는 함대는 크게 항공모함 중심의 제1기동부대, 미드웨이 침공부대, 그리고 야마모토 제독이 직접 지휘하는 주력부대로 나뉘어진다.

이들 중 미드웨이 침공부대는 수상기 모함 전대, 수송대, 근접지원전대, 소해대, 그리고 미드웨이 침공부대의 본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MI 작전은 AL 작전에서 더치하버를 공습하는 날짜와 같은 6월 3일(미드웨이 날짜, 도쿄 날짜로는 6월 4일, 앞으로는 모두 미드웨이 날짜)에 시작한다.

6월 3일 아침에 나구모 중장이 지휘하는 제1기동부대는 미드웨이 북서쪽의 발진위치에 도달한다.

제1기동부대는 제1항공전대(아카기, 카가), 제2항공전대(히류, 소류), 제5항공전대(쇼가쿠, 즈이가쿠)의 항공모함 6척을 중심으로 제3전대 제2분대(하루나, 기리시마), 제8전대(도네, 치쿠마), 그리고 경순양함 나가라를 기함으로 하여 구축함 11척으로 편성된 제10수뢰전대, 그리고 급유함 5척과 호위를 위한 구축함 1척으로 편성된 보급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날의 공습에 동원될 함재기는 약 160대였으며 단 1번의 공습으로 미드웨이의 항공력을 전멸시키고 비행장을 무력화시킬 예정이었다.(실제로는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6월 4일에는 제1기동부대의 함재기들이 하루 종일 미드웨이의 방어시설을 폭격할 예정이었다.

미함대는 미드웨이 폭격이 시작된 이후에야 진주만을 출항할 것이므로 3일 이내에 도착하기는 어렵지만 만약에 대비하여 10대의 97식 함상공격기로 미드웨이 남방 640km 지점까지 경계망을 펼칠 예정이었다.

 

6월 5일에는 제1기동부대의 함재기들이 미드웨이를 폭격하는 동안 후지타 류타로 소장이 지휘하는 수상기 모함 전대가 미드웨이에서 북쪽으로 100km 떨어진 구레 환초에 상륙한 후 수상기 기지를 건설하여 미드웨이 근해에서 미국함대와 대결할 일본함대를 지원할 예정이었다. 

수상기 모함 전대는 미드웨이 침공부대 소속이었다.

 

6월 6일 아침에는 미드웨이에 대한 상륙작전이 실시될 예정이었다.

오타 미노루 대좌가 지휘하는 제2연합해군육전대 1,500 명은 샌드 섬에, 이치기 기요노 육군대좌가 지휘하는 이치기 지대 1,000 명은 이스턴 섬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참고로 연합육전대를 지휘한 오타 미노루 대좌는 소장으로 진급한 후에 1945년 6월에 제32군 휘하에서 오키나와의 오로쿠 반도를 방어하다가 미해병제6사단의 공격을 받아 전사했다.

이치기 기요노 육군대좌는 8월 21일에 과달카날의 일루 강 하구에서 벌어진 테나루 전투에서 전사했다.

 

미드웨이 상륙은 샌드 섬과 이스턴 섬의 남해안을 통하여 실시될 예정이었으며, 약 100 명 정도가 탈 수 있는 다이하츠라는 일본식 상륙주정을 사용할 예정이었다.

 

(다이하츠.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2,500 명의 전투병력 이외에 설영대 2개 대대, 기상관측 요원, 기타 미드웨이 기지를 수리하고 유지할 인원 등 2,500 명의 비전투 요원을 포함하여 상륙병력은 총 5,000 명이었다.

수송선들은 이외에도 대공포 96문, 기관총 40정, 소형잠수정 6척, 어뢰정 5척 등 미드웨이를 강력한 전초기지로 만드는데 필요한 장비들을 싣고 있었다.

또한 6월 중순까지 추가 잠수정과 육지에 설치할 어뢰 발사관, 200mm 해안포 12문 등이 배치될 예정이었다.

 

해군육전대는 요코스카와 구레에서 승선하여 사이판에서 이치기 지대와 합류한 다음 다나카 라이조 소장의 지휘 하에 수송대를 형성하여 미드웨이로 향할 예정이었다.

수송대는 수송선 1척, 제1차 세계대전형 구축함을 개조하여 해군육전대를 수송하던 경비함 3척, 그리고 급유함 1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호위는 경순양함 진츠와 구축함 10척으로 이루어진 제2수뢰전대가 담당했다.

 

수송대 전방에는 제7전대(구마노, 스즈야, 미쿠마, 모가미)와 제8구축대(아사시오, 아라시오), 그리고 급유함 1척으로 이루어진 구리타 다케오 중장의 근접지원대가 앞장서 나갔다.

제7전대의 중순양함 4척이 보유한 8인치 주포 40문으로 미드웨이 상륙작전시 함포 지원사격을 실시할 예정이었다.

 

수송대와 조금 떨어져서 소해함 4척, 구잠함 3척, 수송선 2척, 탄약수송선 1척으로 이루어진 소해대가 뒤따르고 있었다.

 

뒤쪽에서는 곤도 노부다케 중장이 지휘하는 침공부대 본대가 항진할 예정이었다.

침공부대 본대는 제3전대 제1분대(공고, 히에이)를 중심으로 제4전대 제1분대(아타고, 죠카이) 및 제5전대(묘코, 하구로)로 이루어져 있었다.

경순양함 유라를 중심으로 구축함 7척으로 이루어진 제4수뢰전대가 호위를 맡았고, 경항공모함 즈이호와 구축함 미카즈키로 이루어진 항공전대가 딸려 있었다. 

 

제1기동부대와 미드웨이 침공부대 후방에는 야마모토 제독 자신이 이끄는 주력부대가 자리잡고 있었다.

주력부대는 제1전대(야마토, 나가토, 무츠)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일본함대에서 가장 강력한 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호위는 경순양함 센다이와 구축함 8척으로 이루어진 제3수뢰전대가 담당했으며, 경항공모함 호쇼와 구축함 유우카제로 이루어진 항공전대가 딸려 있었다.

이외에 미드웨이에 배치할 소형잠수정들을 적재한 수상기 모함 지요다와 닛신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급유함 2척이 따라다니고 있었다.

 

이외에 잠수함 15척으로 이루어진 선견부대가 진주만과 미드웨이 사이에 전개하여 미함대의 출동상황을 감시하기로 되어 있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함대가 참패한 원인으로 함대 간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상호 지원이 불가능했다는 사실이 항상 지적되어 왔으며, 특히 강력한 화력을 가진 야마모토 제독의 주력부대가 후방에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 집중적인 비판의 대상이 된다.

분명히 옳은 지적이기는 하나 야마모토 제독이 왜 그렇게 주력부대를 멀리 후방에 위치시켰는지 알려면 미드웨이 해전 당시 일본해군의 마음가짐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미드웨이 해전 당시 일본해군에는 개전 이후 6개월 동안에 걸친 연속적인 승리에 취하여 미해군을, 특히 미해군의 사기와 의지를 너무 얕잡아보는 경향이 만연해 있었다.

서방측의 역사가들은 당시 일본해군의 이러한 경향을 가리켜 '승리병'(Victory Disease)이라는 다분히 냉소적인 용어로 부르는데 야마모토 제독도 승리병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MI 작전에서 야마모토 제독이 가장 우려한 사태는 미해군의 반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작전이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미해군이 겁을 집어먹고 싸우러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미함대가 6개월 간의 연속적인 참패에 완전히 기가 꺾여서 감히 일본함대와 정면으로 승부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야마모토 제독은 미함대를 안전한 진주만에서 꾀어내기 위하여 세심하게 작전을 짰다.

 

야마모토 제독의 계획에서 사실 전함 공고와 히에이를 보유한 곤도 중장의 침공부대 본대는 미끼였다.

공고와 히에이를 잡으려고 미함대가 출격하면 나구모의 제1기동부대와 잠수함들을 포함한 일본함대들이 달려들어 미해군의 주력을 약화시키고 이후에 야마모토 제독 자신이 주력부대를 이끌고 나타나서 마무리를 짓는다는 시나리오였다.

따라서 강력한 전력을 가진 주력부대는 미드웨이가 점령될 때까지 미군 정찰기의 행동반경 밖에 머물러야 했다.

야마토를 위시한 주력부대의 막강한 위용을 보고 나면 미함대가 겁을 집어먹고 안전한 진주만에 웅크리고 앉아 나오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이없을 정도로 오만하고 어리석은 사고방식으로 전쟁사학자들이 승리병이라는 냉소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결코 심한 것이 아니다.

 

야마모토 제독의 예상에 따르면 미해군은 미드웨이가 점령된 이후에야 도착할 것이었다.

따라서 일단 미드웨이가 점령되면 나구모 제독의 제1기동부대는 미드웨이 북쪽 800km 해상으로 물러가서 숨는다.

주력부대는 나구모 제독의 서쪽 480km 해상에서 대기한다. 

주력부대의 북쪽 480km 해상에는 AL 작전에 참가했던 다카수 시로 중장의 호위함대가 대기한다.

다카수 함대도 제2전대(휴가, 이세, 후소 , 야마시로)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함대였다.

나구모 제독의 제1기동부대 북쪽 480km 위치에는 역시 AL 작전에 참가했던 가쿠다 가쿠지 소장의 제4항공전대(류조, 준요)가 대기한다.

이 상태에서 공고와 히에이를 보유한 곤도 함대는 미드웨이 남쪽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미함대를 꾀어낸다.

 

항공모함과 구형 전함으로 이루어진 미함대는 미끼로 던진 곤도 함대를 잡으려고 안전한 진주만을 떠나 서쪽으로 항진한 다음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미드웨이로 접근한다.

도중에 일본잠수함들이 미함대를 포착하여 보고를 한 다음 공격을 가하여 전력을 약화시킨다.

미함대가 발견되면 나구모 제독의 제1기동부대와 가쿠다 제독의 제4항공전대는 남쪽으로 내려와 함재기로 미함대의 전력을 추가로 약화시킨다.

그동안 다카수 제독의 함대는 남하하여 야마모토 제독의 주력부대와 합류한다.

이후 전함 7척으로 강력해진 주력부대가 현장에 도착하여 미국함대를 전멸시킨다.

 

전투가 끝나면 나구모 제독의 제1기동부대는 6월 16일과 20일 사이에 트럭으로 물러가고, 전함들은 일부는 본토로 철수하고 일부는 북상하여 AL 작전에 참가한다.

이후 나구모 제독의 항공모함들은 뉴칼레도니아를 거쳐 피지, 사모아로 진출하는 FS 작전을 지원한다.

8월에는 존스턴 섬에 상륙하여 하와이를 더욱 고립시키고, 어쩌면 FS 작전으로 고립된 호주 본토에 상륙하여 호주의 항복을 받아낼 수도 있었다.

하와이 또한 함대를 잃어버리고 일본의 전진기지에 둘러싸인 채 약화되면 최종적으로 상륙해서 점령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일본해군으로서는 참으로 가슴 벅찬 시나리오였다.

 

야마모토 계획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단 한번의 작전으로 너무 넓은 영역에서 너무 많은 목표를 동시에 추구했다는 점이었다.

그 결과 함정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버려 200 척 가까운 대함대가 동원된 작전에서 일차적으로 가장 중요한 목표인 미드웨이의 무력화에 투입된 함정 수는 22척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이 22척도 제5항공전대(쇼가쿠, 즈이가쿠)를 포함한 숫자였다.

 

알류샨 열도는 쓸데없는 목표물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었다.

더치하버를 공습하고, 애투와 키스카를 점령하는데 50척 가까운 전투함을 투입한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만일 나구모 제독이 미국항모기동부대를 섬멸하면 알류샨 열도는 언제든지 점령할 수 있었다.

반면 나구모 제독이 실패하면 알류샨 열도는 아무 가치가 없었다.

 

실제로 일본의 항공모함 4척을 격멸하고 덤으로 미드웨이까지 지켜낸 미국 입장에서 애투와 키스카를 상실한 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미드웨이 해전이 끝난 후에 일본군이  애투와 키스카에 상륙하기 위하여 상당한 전력을 할애했다는 것을 알게 된 해군장관 프랭크 녹스는 다음과 같은 간결한 표현으로 야마모토 제독의 계획을 평했다.

 

"일본은 현대전을 이해할 수 없거나 그것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

("Japan was either unable to understand modern war or not qualified to take part in it.")

 

일본이 참패한 또다른 요인은 쇼가쿠와 즈이가쿠로 이루어진 제5항공전대가 MO 작전에 참가했다가 큰 피해를 입어 미드웨이 해전에 불참한 사실이었다.

만일 나구모 제독이 6척의 정규항공모함을 운용할 수 있었으면 계획 자체에 존재하던 모든 불리한 여건을 극복하고 미드웨이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MO 작전에 제5항공전대를 참가시키고, MI 작전과 동시에 AL 작전을 실시하도록 야마모토 제독에게 강요한 것이 대본영이라는 점에서 미드웨이 해전의 참패에는 대본영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야마모토 제독의 또다른 큰 실수는 상대인 미해군을 너무 몰랐다는 점이었다.

그의 생각과 달리 미해군은 전혀 주눅이 들어 있지 않았다.

미국 항공모함기동부대의 장병들은 결코 자신들이 일본의 항모기동부대보다 실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니미츠 제독도 자신의 부하들을 완전히 신뢰하고 있었다.

미해군은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일본함대와 결정적인 전투를 벌여서 진주만의 원수를 갚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야마토의 모습을 본다고 해서 미해군이 움츠러들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굳이 주력부대의 존재를 숨길 이유가 없었다.

 

만일 야마모토 제독의 주력부대가 전면에 나섰다면 미드웨이 해전 전체의 판도를 바꿀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주력부대가 제1기동부대와 함께 행동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최고 속력이 27노트인 야마토는 그럭저럭 같이 행동할 수 있어도 야마토보다 2노트 정도 느린 나가토와 무츠는 소류나 히류보다 10노트 가까이 느렸다.

따라서 제1기동부대와 같이 행동하는 것보다는 주력부대가 제1기동부대 전방에 나서서 행동했으면 실제 역사에서 제1기동부대로 집중된 미군의 항공력을 상당부분 흡수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또 한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구리타 중장이 지휘하던 제7전대의 운용이다.

침공부대 본대인 곤도 중장의 함대가 전함 2척과 중순양함 4척을 보유하고 있는데 굳이 다른 방향에서 중순양함 4척으로 이루어진 제7전대를 따로 미드웨이에 도착하도록 만들 이유는 없었다.

만일 제7전대가 나구모 중장의 제1기동부대와 함께 행동했더라면 4척의 중순양함이 보유한 수상정찰기들이 제1기동부대의 정찰능력을 크게 높여주어서 적시에 미군항모를 발견할 확률이 훨씬 높았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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