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방어준비 

 

1941년 12월 7일 새벽에 미드웨이에서는 제21해군초계비행대대(VP-21) 소속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5대가 통상적인 초계활동을 위하여 이수했다.

이어서 웨이크 섬을 떠나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로 가던 도중 미드웨이에 들렀던 네덜란드군 소속의 카탈리나 2대가 남쪽으로 출발했다.

샌드 섬의 램프에서는 그날 도착 예정인 제231해병정찰폭격비행대대(VMF-231)를 마중나갈 카탈리나 2대가 예열을 하고 있었다.

 

(PBY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진주만 시간으로 오전 9시인 오전 6시 30분에 오아후로부터 해군 통신망을 통하여 진주만에 매우 심각한 사태가 발생했음을 의미하는 Z- 신호가 수신되었다. 

몇 분 후 히캄 비행장에서 육군 통신망을 통하여 진주만 기습 소식과 함께 제14해군구 사령관 블로크 소장이 이 정보를 공식적으로 확인했으며 전쟁 계획을 즉시 발동하라고 명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미드웨이 해군항공기지(NAS Midway) 사령관 시마드 해군중령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향하여 남쪽으로 비행하던 네덜란드군 소속 카탈리나 2대를 제21해군초계비행대대의 지휘 하에 편입시킨 다음 즉시 회항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6방어대대장 섀넌 해병중령은 여러가지 경로로 하와이의 정확한 상황을 파악해 보려 했으나 진주만의 통신망이 긴급통신 위주로 처리하는 바람에 좀처럼 통신망에 끼어들기가 어려웠다.

마침내 오전 9시에 섀넌 중령은 훈련이 아니라는 걸 확신하고 제6방어대대에 전원 전투 배치 명령을 내렸고, 9시 18분에 기지 사령관 시마드 해군중령이 미드웨이 해군항공기지 전체에 전원 전투배치 명령을 내렸다.

이날 미드웨이에 도착하기로 했던 제231정찰폭격비행대대를 실은 항공모함 렉싱턴은 일본항공모함을 찾기 위하여 침로를 바꾸었다.

오전까지만 해도 강도높은 실전 훈련일 것이라고 믿고 있던 제6방어대대의 병사들은 7일 오후에 들어서면서 실제로 전쟁이 발발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12월 7일 일몰 직후인 오후 6시 42분에 한 해병대원이 샌드 섬 남서쪽의 수평선 너머에서 뭔가 번쩍거리는 불빛을 발견했는데 아마도 일본함정의 불빛신호인 것 같았다.

이어서 오후 9시 30분에 샌드 섬의 레이더가 남서쪽으로부터 다가오는 정체불명의 수상함정을 포착했다.

 

진주만 공습 부대와는 별도로 1941년 11월 28일에 다테야마 기지를 출발한 일본해군의 미드웨이 공격부대는 제7구축대 사령관 고니시 대좌의 지휘 하에 구축함 우시오와 사자나미, 그리고 급유함 시리야로 구성되어 있었다. 

 

우시오와 사자나미는 12월 7일 오후 9시 30분에 미드웨이 남서쪽 25km 해상에서 마지막 급유를 마친 다음 급유함 시리야를 떨쳐버리고 전속력으로 북상했다.

잠시 후 샌드 섬의 탐조등 포대인 G 포대에서 수평선 상에 움직이는 함영을 발견하고 탐조등을 비출 수 있도록 허가를 요청했으나, 기지 사령관 시마드 중령은 좀 더 상황이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잠시 후 오후 9시 35분부터 일본구축함들이 일제사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첫번째 일제 사격이 샌드 섬의 발전기를 보호하던 콘크리트 건물에 명중했다.

포탄이 콘크리트를 뚫지는 못했으나 착탄의 충격으로 건물 내의 기지 통신소에 있던 조지 캐넌 중위와 3명의 부하들이 큰 상처를 입었으며 통신기가 고장났다.

캐넌 중위는 골반 뼈가 으스러지는 중상을 입었고, 통신병 해럴드 헤이즐우드 상병은 다리가 부러졌다.

다른 2명은 발목을 다치거나 뇌진탕을 입었다.

 

중상을 입었으나 정신을 잃지 않은 캐넌 중위는 후송을 거부하고 다리가 부러진 통신병 헤이즐우드 상병을 닥달해서 고장난 통신장치를 고치라고 명령했다.

부하들이 후송되고, 헤이즐우드 상병이 9시 53분에 결국 통신망을 복구하는 걸 확인한 캐넌 중위는 그때서야 정신을 잃고 급히 후송되었으나 너무 많은 피를 흘려서 대대구호소에 도착하자마자 몇 분 내로 사망했다.

치명적인 중상을 입고도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자리를 지킨 캐넌 중위에게는 명예훈장이 추서되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해병대 최초의 명예훈장 서훈자가 되었다. 

다리가 부러진 상태에서도 끝내 통신망을 복구해 낸 헤이즐우드 상병은 해군십자장을 받았다.

 

(조지 캐넌 중위)

 

그 동안 북상하면서 일제사격을 가했던 일본구축함들은 반전하여 남하하면서 오후 9시 48분에 다시 포격을 가했다.

기지 사령관 시마드 중령은 탐조등을 비추라고 명령했으나 첫 일제 사격 때 통신망이 끊어져 버려서 통신망이 복구된 9시 53분에야 탐조등 포대인 G 포대에 명령이 전달되었다.

탐조등이 즉시 해상을 비추어서 약 2,300m 거리에서 사자나미를 포착했다.

그 순간 G 포대의 탐조등에서 불과 몇 m 떨어진 곳에 일본군의 포탄이 떨어져 탐조등 2개 중 1개가 박살나고 1개는 폭발의 충격으로 전원 플러그가 빠져 버렸다.

G 포대원 1명이 폭발의 충격으로 비틀거리면서 어둠 속에서 미친듯이 전원 플러그를 찾아 꽂음으로서 잠시 후 탐조등 1개가 다시 불을 밝혀 사자나미를 포착했다.

 

즉시 미드웨이의 5인치 해안포와 3인치 대공포들이 사자나미를 향하여 포격을 개시했으나, 5인치 해안포 2문으로 이루어진 A 포대는 미처 초탄을 발사하기도 전에 일본군의 포탄이 포대 주변에 떨어지는 바람에 외부와의 통신이 두절되고 5인치 포들이 피해를 입었다.

포대 주변에 쌓여있던 5인치 포탄이 유폭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5인치 해안포 2문을 가진 C 포대와 3인치 대공포 각 4문으로 이루어진 E 포대 및 F 포대는 사계가 방해를 받아 포격을 할 수 없었다.

결국 B 포대의 5인치 해안포 2문이 합계 9발, D 포대의 3인치 대공포 4문이 합계 13발을 발사하는데 그쳤다.

B 포대의 5인치 해안포는 명중탄을 내지 못했고, D 포대의 3인치 대공포는 사자나미의 상부구조물에 3발을 명중시켰으나 사자나미의 피해는 미미했다.

 

오후 10시가 되자 일본구축함들이 물러가면서 25분 간의 포격전이 끝났다.

미드웨이에서는 4명이 전사하고 10명이 부상을 입었다.

발전기 건물과 A 포대가 피해를 입었으며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수상기 격납고로서 명중탄을 맞아 지붕이 홀랑 타버리고 내부에 쌓아두었던 많은 수상기용 예비부품들이 전부 소실되었다.

또 판 아메리칸 항공사 소유의 전파방향탐지기가 부서졌으며, 제21초계비행대대의 카탈리나 1대도 망가졌다.

 

12월 7일의 포격전으로 미드웨이의 취약성이 드러나자 제14해군구에서는 제21초계비행대대를 일시적으로 미드웨이에서 철수시켰다.

그러나 미해군이 미드웨이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 이후 본격적인 증강을 실시했다.

 

1941년 12월 17일에 제231해병정찰폭격비행대대 소속의 SB2U 빈디케이터 급강하폭격기 17대가 미드웨이에 도착했다.

원래 10일 전인 12월 7일에 미드웨이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진주만 기습으로 늦어진 것이었다.

이날 17대의 빈디케이터들은 하와이에 있는 해병대의 에와 기지 대신 활주로가 긴 육군항공대의 히캄 기지를 출발했다.

제231해병정찰폭격비행대대는 히캄 기지를 오전 6시 30분에 이륙하여 도중에 미드웨이에서 날아온 카탈리나의 안내를 받아 하와이에서 미드웨이까지 1,830km 의 거리를 9시간 20분 만에 무착륙 비행으로 주파하여 오후 3시 50분에 미드웨이에 착륙했다.

당시 이 기록은 단발 비행기의 집단 비행으로서는 무착륙비행 세계신기록이었다.

10일 후에 18대로 이루어지는 비행대대의 정수를 맞추기 위하여 빈디케이터를 몰고 히캄 비행장에서 미드웨이까지 날아온 리처드 블레인 소위는 카탈리나와 동행한 데다가 역풍을 맞아 무려 12시간의 무착륙 비행 끝에 미드웨이에 도착했다.

 

(SB2U 빈디케이터 급강하폭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12월 24일에는 수상기 모함 라이트가 제4방어대대의 A 포대원 및 C 포대원들과 미해군의 전노급 전함에 실려있던 구형 7인치 해안포 4문과 3인치 해안포 4문을 싣고 미드웨이에 도착했다.

새넌 중령은 새로 도착한 제4방어대대 소속의 포대원들을 A 포대 및 C 포대에 배치하고 기존의 포대원들을 새로 도착한 7인치 해안포와 3인치 해안포에 배치했다.

기존의 A 포대원들은 이스턴 섬의 남동해안에 나란히 자리잡은 3인치 및 7인치 해안포에 배치되었고, 기존의 C 포대원들은 샌드 섬에 배치된 7인치 해안포 및 3인치 해안포에 배치되었다.

 

(1942년 6월 현재 미드웨이 섬의 방어태세)

 

다음날인 25일에는 웨이크 섬 구원에 나섰다가 실패한 버니 맥콜 소령의 제221해병전투비행대대(VMF-221) 소속 브류스터 F2A-3 버팔로 전투기 14대가 항공모함 새러토가를 떠나 이스턴 섬에 착륙했다.

 

(F2A 버팔로 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이어서 12월 26일에는 수상기 모함 탠지어가 역시 웨이크 섬에 증원하려던 제3방어대대의 B 포대원, 12정의 12.7mm 대공기관총을 보유한 대공기관총 1개 포대, 제221전투비행대대의 지상요원 111명, 추가적인 레이더 및 보급품들과 함께 도착했다.

제3방어대대의 B 포대원들은 숫자가 모자란 A 포대원들을 대신하여 샌드 섬 남쪽에 자리잡은 7인치 해안포 2문을 담당했다.

 

1942년 1월 1일이 되었을 때 미드웨이 해군항공기지는 강력하게 증강된 1개 해병방어대대와 전투비행대대 1개 및 정찰폭격비행대대 1개를 보유하고 있었다.

1월 9일에 미드웨이의 항공작전을 총괄하기 위하여 윌리엄 월리스 해병중령이 부임했다.

월리스 중령은 웨이크 섬에서 마지막 보고서를 가지고 아슬아슬하게 탈출한 월터 베일리 소령의 조력을 받았다.

 

1월 25일 오후 5시 48분에 미드웨이 남방해상에서 갑자기 일본잠수함 I-173 호가 부상하여 샌드 섬에 포격을 가해왔다.

D 포대의 3인치 대공포가 즉각 반격하자 일본잠수함은 3분 만인 오후 5시 51분에 급히 잠항했다.

3분간의 짧은 포격전 동안 일본잠수함이 발사한 포탄 10여발이 샌드 섬과 초호에 떨어졌으나 피해는 없었고, D 포대도 24발을 발사했으나 명중탄을 내지 못했다.

 

이후 채 36시간이 지나지 않은 1월 27일 아침에 미드웨이에서 북서쪽으로 390km 떨어진 해상에서 미국잠수함 거전이 전방에서 16노트의 속력으로 수상항진 중인 I-173 호를 발견하고 어뢰 3발을 발사하여 격침했다. 

 

1942년 2월 8일 오후 6시 5분에 샌드 섬에서 남쪽으로 불과 900m 정도 떨어진 해상에 다시 일본잠수함이 부상하여 포격을 실시했다.

이번에는 A 포대의 5인치 포가 즉시 2발을 반격했고, 일본잠수함은 3발을 발사한 후에 급히 잠항하여 도망쳤다.

일본잠수함이 발사한 포탄 3발 중 1발이 탄약고에 명중했으나 다행히 강화 콘크리트를 뚫지 못하여 내부에 들어있던 소화기 탄약들은 유폭하지 않았다.

 

이틀 후인 2월 10일 오후 5시 58분에 아마 같은 잠수함으로 추정되는 일본잠수함이 같은 자리에 떠올라 포격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상공에서 대잠초계비행 중이던 버팔로 전투기 2대가 잠수함을 포착했다.

존 커리 중위와 그의 요기 필립 화이트 소위는 급히 해상으로 내려오면서 폭탄을 투하했으나 명중시키는데 실패했다.

일본잠수함은 급히 잠항하여 도망쳤으며 이후 미드웨이 해전 때까지 더 이상 일본잠수함들이 출현하지 않았다.

 

1942년 3월 1일자로 미드웨이에 주둔하던 제221해병전투비행대대와 제241해병정찰폭격비행대대를 중심으로 제22해병비행전대(MAG-22)가 창설되었고, 전대장은 월리스 중령이 맡았다.

제241해병정찰폭격비행대대는 제231해병정찰폭격비행대대가 이름만 바꾼 것이었다.

 

3월 10일 오전 10시 30분에 미드웨이 섬의 레이더가 서쪽으로 70km 떨어진 상공을 통과하는 정체불명의 항공기를 발견했다.

미드웨이의 버팔로 전투기 12대가 전부 추격에 나섰다.

4대로 이루어진 편대를 이끌던 제임스 네푸스 대위가 3,000m 고도에서 일본의 2식 대형비행정을 발견하고 공격을 가하여 격추했다.

이 2식 대정은 웟제 환초를 떠나 진주만을 기습공격하려던 2식 대정 편대의 편대장인 하시츠메 토시오 대위가 조종하던 기체였다.

 

(2식 대형비행정.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이후 5월 초까지 미드웨이의 병사들은 고도의 경계태세를 유지했으나 정작 큰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다.

물론 그동안에도 일본과 미군의 수뇌부는 미드웨이 부근에서 벌어질 일대 결전을 향하여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었으나 미드웨이에서 그런 자세한 사정을 알 까닭이 없었다.

미드웨이의 병사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지키고 있는 섬이 자신들의 조국과 일본이 태평양의 패권을 놓고 모든 전력을 결집하여 일대 결전을 벌이는 결투장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미드웨이는 너무 작았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만한 가치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전투의 한가운데 서고 싶지 않은 병사들의 희망은 1942년 5월 2일에 태평양함대 사령관 니미츠 제독이 일련의 유력한 참모들과 함께 갑자기 미드웨이로 시찰을 오면서 무참히 깨졌다. 

카탈리나에서 내린 니미츠 제독은 손바닥만한 미드웨이를 하루종일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미드웨이의 모든 곳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하루 종일 걸린 고된 시찰이 끝나고 니미츠 제독은 제6방어대대장 섀넌 중령에게 미드웨이를 지키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 보라고 했다.

섀넌 중령이 필요한 것들을 말하자 니미츠 제독은

 

"만일 자네가 필요하다고 말한 이 모든 것들을 내가 준다면 대규모 상륙공격에 대항하여 미드웨이를 지킬 수 있나?"

("If I get you all these things you say you need, then can you hold Midway against a major amphibious assault?")

 

하고 물었다.

섀넌 중령은

 

"예."

("Yes,sir")

 

대답했다.

니미츠 제독은 만족한 표정으로 섀넌 중령에게 요구사항을 문서로 정리하여 정식으로 태평양함대 사령부에 제출하라고 말한 다음 자신의 힘이 닿는데까지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참모들을 우루루 이끌고 다니는 해군대장이 마치 중대장처럼 미드웨이의 방어시설을 하루종일 걸려서 구석구석 꼼꼼하게 시찰하는 모습을 지켜본 미드웨이의 병사들은 태평양함대 사령부가 미드웨이를 결전장으로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미드웨이를 시찰 중인 태평양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대장. 병사들을 위한 지하 대피호를 둘러보고 나오는 길이다.)

 

섀넌 중령은 기지 사령관 시마드 해군중령과 의논하여 요구사항을 적은 문서를 5월 7일에 정식으로 제출했다.

니미츠 제독은 약속을 지켰으며, 실제로 미드웨이에는 요구했던 것 이상의 지원이 주어졌다.

 

며칠 후 니미츠 제독은 시마드 중령과 섀넌 중령에게 편지를 보내어 미드웨이의 준비태세를 최고의 수준으로 유지한 데 대하여 크게 칭찬한 후 일본군의 공격이 5월 28일쯤에 예상된다고 적었다.

니미츠 제독은 격려하는 차원에서 두 사람을 대령으로 진급시키고 은으로 만든 대령 계급장을 보내 주었다.

미드웨이 해전이 승리로 끝난 후 다른 곳으로 전출하면서 인사차 들른 시마드 대령에게 니미츠 제독은 당시 대령 계급장은 두 사람의 장례식에 사용할 조화를 보낸 셈이었다고 말했다.

 

니미츠 제독이 약속한 지원이 5월 25일부터 미드웨이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경순양함 세인트루이스가 도착하여 37mm 대공포 1개 포대(8문)와 제2습격대대의 C 중대와 D 중대를 상륙시켰다.

이로써 제6방어대대는 기존의 제22 및 제23임시소총중대에 더하여 정예병력으로 이름이 높은 습격대대의 2개 중대를 추가로 확보하여 기동예비대의 전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37mm 대공포들은 즉각 샌드 섬과 이스턴 섬에 4문씩 배치되었다.

 

또한 이날 일본군의 공격이 5월 28일에서 6월 3일경으로 연기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다음날인 5월 26일에는 수상기모함 키티호크가 도착하여, 진주만에 배치되어 있던 20mm 대공기관포 1개 포대(18문), 제3방어대대의 3인치 대공포 3개 포대(총 12문), 5대로 이루어진 경전차 1개 소대, 돈틀레스 16대, 와일드캣 7대를 양륙했다.

 

(SBD 돈틀레스 급강하폭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27일에는 해군의 카탈리나 16대와 아벤저 뇌격기 6대, 육군항공대의 B-17 폭격기 17대와 어뢰를 장비한 B-26 쌍발폭격기 4대, 그리고 추가로 돈틀레스 3대, 버팔로 9대 등이 도착했다.

 

(TBF 아벤저 뇌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5월 31일이 되자 미드웨이에는 107대의 해병대, 해군 및 육군항공대 항공기들이 득실거렸고 하루에 사용하는 항공유만 250,000 리터에 달했다.

해병대는 버팔로 전투기 21대, 와일드캣 7대, 돈틀레스 19대, 빈디케이터 17대 등 총 64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육군항공대는 B-17 폭격기 17대, B-26 쌍발폭격기 4대로 21대, 그리고 해군은 아벤저 뇌격기 6대에 카탈리나 16대로 22대였다.

이후 미드웨이 해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해군의 카탈리나 16대와 해병대의 빈디케이터 4대가 추가로 도착하여 6월 4일 아침에 미드웨이가 보유한 항공기 수는 총 127대에 달했다.

 

(F4F 와일드캣 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미드웨이 수비대는 일본군의 폭격으로 항공유 저장소가 폭파될 경우에 대비하여 유조차를 격납고 내의 옹벽 뒤에 안전하게 숨겨 놓았으며 항공유를 가득 채운 드럼통들을 격납고와 활주로 주변을 중심으로 이스턴 섬 전체에 수없이 많이 묻어 두었다.

또한 일본군의 폭격을 유도하기 위하여 격납고 부근에 정성들여 가짜 비행기들을 만들어 두었다.

 

섀넌  대령은 일본군 상륙부대를 물리치기 위한 준비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샌드 섬은 전 해안선이 이중 철조망으로 둘러 싸였으며, 샌드 섬과 이스턴 섬의 주요 건물들은 모두 각각의 철조망으로 보호를 받고 있었다.

해안의 산호초에는 강철로 만든 상륙 장애물들을 배치했고, 장애물 사이의 통로에는 배관파이프 내에 폭약을 가득 채워 만든 대주정용 기뢰를 설치해 두었다.

해안선에는 촘촘하게 지뢰를 깔았고, 나무곽에 다이너마이트를 넣고 주변에 잘게 자른 철사를 가득 채운 사제 지뢰도 잔뜩 묻어 두었다.

대전차 지뢰도 묻었으며 혹시 일본군에게 전차가 없을 경우 전기로 격발시킬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다.

3인치 대공포부터 12.7mm 대공기관총까지 모든 대공화기는 필요하면 지상사격도 가할 수 있도록 별도로 훈련했다.

각 포대와 참호마다 전투식량과 탄약을 비축했으며, 일본군의 전차에 대비한 화염병을 모든 거점마다 비치하고 있었다.

 

미드웨이의 방어력은 강대했다.

해상의 적을 겨냥하여 해군의 7인치 해안포 4문과 3인치 해안포 4문이 있었고, 해병대의 5인치 해안포 6문도 배치되어 있었다.

대공화기로는 3인치 대공포 24문, 37mm 대공포 8문, 20mm 대공기관포 18문, 12.7mm 대공기관총 48정이 있었으며, 이들 대공무기는 필요하면 언제든지 지상전투에도 투입될 수 있었다.

이외에 개인화기를 제외한 지상부대의 공용화기로서 구형의 37mm 야포 4문, 81mm 박격포 4문, 60mm 박격포 4문, 14mm 대전차총 4정, 7.62mm 중기관총(액냉식) 48정, 7.62mm 경기관총(공냉식) 4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모든 포대는 모래 주머니와 흙을 쌓아 올려서 상당한 수준의 방어력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6월 4일에 108대의 일본기에게 공습을 당했어도 미드웨이의 포대들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기동예비대도 기존의 2개 임시소총중대와 정예병들인 제2습격대대의 2개 중대에 더하여 경전차 5대까지 가세하여 강력했다.

경전차들은 기습효과를 최대한 노려서 샌드 섬 북쪽의 구석진 곳에 정성들여 숨겨 놓았다. 

 

미드웨이 해전 당시 미드웨이 방어병력이 총 몇 명이었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역사가들마다 약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새뮤얼 모리슨 제독은 당시 미드웨이 방어병력을 총 3,027명으로 기술하고 있고, 니미츠 전기를 지은 포터 교수도 대체로 이 의견을 따르고 있지만 섀터드 소드의 저자인 조나단 파샬과 앤터니 털리는 최대 4,500 명까지 가능하다고 본다.

어쨌든 손바닥만한 미드웨이를 지키는 데에는 충분한 병력이며, 당시 미드웨이의 방어력이 전투병력 2,500 명과 비전투병력 2,500 명으로 이루어진 일본의 미드웨이 상륙부대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전력이라는 점에는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동의한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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