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6월 4일부터 6일까지 3일간 중부 태평양의 미드웨이 근해에서 태평양을 주름잡던 양대 해군강국인 대일본제국의  연합함대와 미합중국의 태평양함대 사이에 건곤일척의 일대 승부가 벌어졌다.

미드웨이 해전(Battle of Midway)으로 이름붙여진 이 대규모 해전에서 미국 태평양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자신의 맞수인 일본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을 결정적으로 거꾸러뜨림으로써 그때까지 일본이 절대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던 태평양의 전략적 판세를 단번에 뒤집어 엎었다.

진주만 기습 이후 6개월간 서부 태평양과 동부 인도양 일대에 걸쳐 일본에게 절대적인 제해권을 가져다 주었던 연합함대 타격력의 실체이자 꽃인 제1항공함대는 미드웨이에서 너무나 갑작스럽게, 너무나 허망하게 몰락했다.

 

이 미드웨이 해전을 계기로 일본이 쥐고 있던 태평양전쟁의 전략적 주도권은 미국에게 넘어갔다.

일본연합함대는 미드웨이 해전 이후에도 당장 동원가능한 전력 면에서 여전히 태평양함대에 대하여 우세를 유지했으나 제1항공함대의 몰락으로 더 이상 결정적인 공세를 취할 능력을 상실했고, 이미 확보한 광대한 영역을 지키기에도 급급한 처지로 전락했다.

반면 태평양전쟁 개전 이래 일본군의 공세에 대하여 항상 수세적으로 반응해야만 했던 미군은 이제야말로 전략적 주도권을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를 선택하여 자유롭게 반격할 수 있게 되었다.

 

진주만 기습 이후 일제히 건조에 들어간 에섹스 급 항공모함들이 대거 쏟아져 나오는1943년 후반기까지 버티기만 하면 되는 태평양함대의 입장에서 미드웨이 해전의 승리는 사실상 일본과의 전쟁에서 이겼다는 것을 의미했고, 일본에게는 정확하게 그 반대를 의미했다.

미드웨이 해전은 이렇게 태평양전쟁의 승패를 일찌감치 확정지었다.

 

1. 미드웨이 

 

미드웨이는 진주만에서 서북서 방향으로 1,800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약 100km 북쪽의 구레 환초를 제외하고 하와이 제도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미드웨이의 위치)

 

일반에게는 보통 미드웨이 섬(Midway Island)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미드웨이는 환초의 이름이며 초호의 직경은 약 10km 이고 해수면 위로 드러난 섬은 남쪽의 일부 뿐이다.

(환초, 초호 및 섬과 같은 용어에 대한 설명은 여기로)

 

환초의 남쪽을 이루는 두 개의 작은 섬은 샌드 섬과 이스턴 섬이며, 약간 더 큰 샌드 섬의 길이는 약 3km 정도이고, 최고 높이는 해발 12m 정도이다.

작은 이스턴 섬은 약 1.6 x 1.6km 크기이며 가장 높은 곳도 해발 4m 가 안 된다.

 

원래 미드웨이에 식물이라고는 억센 관목 뿐이었으나 이스턴 섬에는 비료로 제격인 새똥 구아노가 대량으로 쌓여 있었다.

미드웨이를 개발한 태평양 상업 통신선 회사는 미국 농무부의 지원을 받아 토양의 유실을 막을 수 있는 잔디류들을 심고, 이어서 미드웨이에서 잘 자랄 수 있는 나무들을 찾아내어 심었다.

그리하여 1935년이 되자 샌드 섬에는 12m 높이의 하와이산 경질목과 호주산 유칼립투스 나무들이 자랐고, 그 그늘에는 풀밭과 잔디밭이 생겼다.

 

미드웨이의 뚜렷한 특징 중 하나는 새였다.

이곳에는 신천옹을 비롯하여 날지 못하는 뜸부기, 부비새, 군함새, 갈매기와 제비갈매기 등 수많은 새들이 살고 있었다.

줄기차게 뿌려대는 새똥 때문에 건물에 새로 페인트 칠을 해도 마르기도 전에 더러워졌고, 1940년대까지도 산란기가 되면 미드웨이의 특정 지역은 새알을 밟지 않고는 걸어다닐 수가 없을 정도였다.

따라서 마음만 먹으면 새알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산란기에는 신선한 달걀의 보급이 당분간 끊어져도 섬에 주둔한 병력들 사이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고 한다.

 

샌드 섬과 이스턴 섬은 해면 바로 아래까지 자란 산호초로 둘러싸여 있고, 두 섬 사이에는 1938년에 미해군이 준설한 브룩스 수로가 있어서 초호 중앙의 깊은 수역으로 통한다.

샌드 섬의 서쪽으로는 웰레스 항구라고 부르는 깊은 자연 수로가 있어서 배가 진입할 수 있으나 초호 가장자리의 나머지 부분은 얕아서 배가 다닐  수 없다.

(1942년 6월 현재 미드웨이 환초의 상황)

 

미드웨이가 처음으로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1859년으로 하와이에서 운항하던 바크선의 선장인 미국인 브룩이 발견했다.

브룩 선장은 이 무인도에 자신의 이름을 따서 미들브룩 섬(Middlebrook Island) 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조국인 미국의 영토로 선포했다.

 

(바크선)

 

1867년 8월 28일에 미국 해군장관 기드온 웰레스가 파견한 미해군의 슬루프함 락카와나가 미들브룩 섬을 찾아 주변을 탐사하고 정식으로 미국령임을 선포했다.

이때 샌드 섬 서쪽에서 깊은 수로를 발견한 락카와나의 함장 윌리엄 레이놀즈 중령은 여기에 자신들을 파견한 해군장관의 이름을 따서 웰레스 항구(Welles Harbor)라는 이름을 붙였다.

 

1869년에 태평양 우편 증기선 회사(The 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가 이 섬에 석탄저장고를 설치하고 싶어했다.

태평양 우편 회사는 미의회를 움직여 수심이 깊은 초호의 중앙과 외해를 갈라놓고 있는 샌드 섬과 이스턴 섬 사이에 걸친 2m 폭의 모래톱을 준설할 예산 50,000 달러를 책정받았다.

이때 태평양 우편 회사는 기존의 미들브룩 섬이란 이름 대신에 이 섬을 '미드웨이'(Midway) 라고 불렀고, 이후 미드웨이로 불리게 되었다.

 

1870년 3월 21일에 미해군의 슬루프함 사지노가 인부와 보급품들을 싣고 준설용 바지를 끌면서 미드웨이에 도착했다.

인부들은 곧 준설을 시작했으나 7개월 후인 10월 21일이 되자 맑은 날에 작은 보트가 겨우 통과할만큼 준설이 이루어진 상황에서 그만 돈이 다 떨어졌다.

사지노는 할 수 없이 인부들을 태우고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

 

(사지노)

 

항해 도중에 북쪽으로 100km 떨어진 구레 환초에 조난자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사지노는 구레 환초에 접근하다가 10월 29일에 그만 좌초하고 말았는데, 실제로는 당시 구레환초에 조난자는 없었다고 한다.

사지노에 승선했던 사람들은 최대한 많은 장비와 식량을 챙겨 구레 환초에 상륙했다.

 

1870년 11월 18일에 사지노의 부함장 존 탈보트 대위가 4명의 수병과 함께 작은 보트를 타고 구레 환초를 떠나 오아후 섬으로 구원을 요청하러 떠났다.

탈보트 대위 일행의 보트는 31일 동안 2,400km 를 항해한 끝에 카울라이 부근에서 전복되어 수병 윌리엄 할포드를 제외한 4명은 익사했다.

할포드는 오아후에 도착하여 미국 영사관에 도움을 청했고, 미국 영사의 요청을 받은 하와이 국왕 카메하메하 5세는 증기선 킬라우에아를 파견했다.

킬라우에아는 1871년 1월 4일에 구레 환초에 도착하여 사지노의 조난자 전원을 무사히 구조했다.

 

(사지노의 조난)

 

이후 30년간 미드웨이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 기간 동안 미드웨이를 찾은 것은 판매를 위한 새의 깃털을 모으러 상륙하는 일본인들 뿐이었다.

 

1903년에 태평양 상업 통신선 회사(Pacific Commercial Cable Company)가 마닐라-괌-호놀룰루를 잇는 통신선을 구축하기로 결정했다.

이 회사가 미드웨이에 괌과 호놀룰루를 연결하는 유선통신소를 설치하기로 결정하면서 미드웨이는 다시 역사에 등장했다.

미국 대통령 테어도어 루스벨트는 미드웨이를 해군성이 관리한다는 내용의 법안에 서명했고, 1903년 6월 3일에 슬루프함 이로쿼이가 미드웨이에 도착했다.

이로쿼이가 도착했을 때 미드웨이에서는 지난 30여년간 늘 해왔듯이 몇 명의 일본인들이 상륙하여 열심히 새의 깃털을 모으고 있었다.

험악한 인상을 가진 이로쿼이의 함장 휴 로드먼 소령이 상륙하여 일본인들에게 당장 꺼지라고 고함을 버럭 지르자 일본인들은 혼비백산하여 배를 타고 달아났다.

그리하여 1870년대 초반부터 30여년간 자유롭게 미드웨이를 드나들면서 새의 깃털을 모아왔던 일본인들은 미드웨이에서 영영 쫓겨났다.

 

(이로쿼이)

 

곧 미드웨이에는 해저 통신선이 깔렸고, 통신소가 만들어졌다.

해군은 미드웨이 부근의 정박지에 부표를 설치하고 샌드 섬에 등대를 만들었으며, 21명으로 이루어진 해병분견대가 1908년까지 미드웨이에 주둔했다.

 

이때 연결된 호놀룰루와 미드웨이 사이의 해저 통신선은 태평양전쟁 초기인 1942년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태평양함대는 큰 작전을 준비하면서 통신량이 급증하면 늘어난 통신량은 모두 해저 통신선으로 처리하고, 무선 통신량은 평소 수준을 유지했다.

따라서 일본군은 태평양함대가 큰 작전을 준비하고 있어도 통신량의 변화를 통하여 낌새를 알아채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1942년 5월에 태평양함대의 암호해독반이 알아낸 일본군의 공격목표 AF 가 미드웨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미드웨이 수비대에게 증류기가 고장났다는 가짜 전문을 무선통신으로 발송하라는 내용의 비밀 명령도 도청이 불가능한 이 해저 통신선으로 전달되었다.

 

(미드웨이의 유선통신소. 샌드 섬에 정말 모래 밖에 없던 20세기 초반에 미드웨이에 근무하던 해병대원이 찍은 사진이다.)

 

1920년 10월 10일에 미해군의 비행정 1대가 미드웨이의 초호에서 이수에 성공함으로써 비행정 기지로서 미드웨이의 가능성을 증명했다.

그러나 워싱턴 해군군축조약의 후속 조약으로 미국과 일본이 맺은 조약에 의하여 하와이 서쪽에서 모든 미군 기지의 건설이 중지되었으므로 미드웨이도 이후 15년간 거의 변화가 없었다.

 

1935년에 일본의 거부로 인하여 제2차 런던조약의 발효가 실패하면서 15년간의 군축조약시대가 막을 내리게 되자 미드웨이도 다시 개발되기 시작했다.

1934년 2월에 수상기모함 AV-1 라이트가 미드웨이의 상황을 조사한 다음 미해군은 미드웨이를 1개 초계비행대대를 운용할 수 있는 수상기 기지로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수상기모함 AV-1 라이트)

 

이 소식을 들은 판 아메리칸 항공사는 호놀룰루와 마닐라를 연결하는 자사의 클리퍼 장거리 수상비행정을 위한 중간 기착지로서 미드웨이를 개발하겠다는 제안을 했고, 미해군은 예산을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판 아메리칸 항공사는 샌드 섬에 수상기용 램프와 관련 시설 및 숙소 등을 건설하고, 초호 쪽에 작은 호텔도 하나 지었다.

공사는 1935년 4월 15일에 시작되었으며, 동년 6월 6일에 최초의 클리퍼 기가 미드웨이에 도착했다.

 

1935년에는 또한 미드웨이에서 상륙작전 훈련이 진행되었고, 훈련에 참가했던 제6해병연대 제1대대가 잠시 동안 샌드 섬에 주둔하기도 했다.

 

(1935년에 촬영한 샌드 섬의 사진. 오른쪽 해안에 제6해병연대 제1대대의 주둔지가 보인다.)

 

미해군은 1938년 말부터 수심이 깊은 초호의 중앙부와 외해를 연결하는 수로를 본격적으로 준설하기 시작하여, 1940년에 소해함 스완이 브룩스 수로로 이름붙인 이 수로를 최초로 통과하여 초호 내로 진입했다.

 

(소해함 AM-34 스완)

 

1938년 12월 27일에 <미합중국의 해안선, 영역과 자산 보호를 위한 추가 해군 기지의 필요성에 대한 보고서>("Report on Need of Additional Naval Base to Defend the Coast of the United States, Its Territories and Possissions") 가 발표되었다.

조사를 담당한 위원회를 이끈 헵번 제독의 이름을 따서 햅번 위원회 보고서, 또는 간단히 헵번 보고서 라고 부르는 이 보고서는 제2차 세계대전에 대비한 미국의 해군기지 개발에 큰 영향을 끼친 중요한 보고서였다.

이 헵번 보고서는 미드웨이를 태평양의 방어에 있어서 하와이 다음으로 중요한 전진기지로 지목하고, 13,040,000 달러를 들여 미드웨이를 강력한 항공기지 및 잠수함 기지로 개발하라고 권고했다.

이 권고에 따르면 미드웨이에는 수상기로 이루어진 2개 초계비행대대, 육상기인 2개 전투비행대대, 그리고 잠수함 2개 분대를 수용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추도록 되어 있었다.

헵번 보고서의 권고에 따라 1939년 초부터 미해군의 주도 하에 미드웨이의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미해군과 계약을 맺은 민간인 노동자들과 건설장비 및 자재들이 미드웨이로 쏟아져 들어왔고, 여러가지 시설들이 건설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이스턴 섬에 건설된 비행장이었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폭 90m 짜리 활주로가 삼각형으로 건설되었는데 각 활주로의 길이는 1,000m, 1,400m, 그리고 1,600m였다.

주기장과 엔진 예열 장소가 딸린 격납고가 2동 건설되었고, 이외에도 보급품 창고와 항공기 정비창이 들어섰다.

비행장은 진주만 기습 직전에 완성되었다.

 

샌드 섬에는 수상기 운용을 위한 대형 콘크리트 램프와 격납고, 그리고 보급창과 정비창들이 들어섰다.

9,500 리터짜리 강철탱크 22개로 이루어진 항공유 저장소도 만들어졌으며, 해군병원도 들어섰다.

해병대와 해군 장병들을 위한 숙소와 각종 편의시설들도 들어섰으며 샌드 섬의 발전기는 강화콘크리트로 보호되었다.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한 후 1939년 12월 20일에 미드웨이를 포함한 하와이 주변의 방어를 담당하는 제14해군구가 설치되어 클로드 블록 소장이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40년 9월 29일에 제3방어대대의 일부가 미드웨이에 상륙함으로써 이제 미드웨이에 해병대가 상주하게 되었다.

해럴드 로버츠 소령이 이끄는 177 명의 미드웨이 분견대는 2문의 5인치 해안포로 이루어진 1개 포대를 포함하고 있었다.

참고로 분견대장인 로버츠 소령은 대령으로 승진한 후 1945년에 제22해병연대장으로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했다가 일본군의 저격을 받아 전사했다.

 

1941년 2월 14일에 제3방어대대의 주력이 미드웨이에 상륙함에 따라 미드웨이는 593명의 해병대원과 5인치 해안포 3개 포대(A, B, C 포대, 총 6문) 및 3인치 대공포 3개 포대(D, E, F 포대, 총 12문)를 갖추게 되었다.

 

1941년 8월 18일에 미드웨이 섬은 미드웨이 해군항공기지(NAS Midway = Naval Air Station Midway)로 승격되어 초대 기지 사령관으로 시릴 시마드 해군중령이 취임했고, 곧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12대로 이루어진 제21해군초계비행대대(VP-21)가 전개했다.

9월 11일에는 784명으로 이루어진 제6방어대대가 상륙하여 제3방어대대와 교대했다.

해럴드 섀넌 해병중령이 지휘하는 제6방어대대는 미드웨이에 자신들의 5인치 해안포와 3인치 대공포를 가져오는 대신 제3방어대대의 해안포와 대공포를 인수했다.

대신 제3방어대대는 하와이로 돌아가 제6방어대대의 해안포와 대공포를 인수했다.

 

1941년 11월 말에 파탄 직전에 이른 미일 교섭의 돌파구를 찾기 위하여 구루스 사부로 특명전권대사가 판 아메리카 항공사의 클리퍼 수상기를 타고 도쿄에서 미국으로 가는 중에 미드웨이에 들렀다.

제6방어대대장 섀넌 중령은 기지 사령관 시마드 해군중령에게 무력시위를 하자고 제안하여 허가를 받았다.

 

구루스 특사가 수상기에서 내려 샌드 섬에 상륙하자 눈에 보이는 끝까지 해병대원들이 모두 착검한 채로 약 2m 간격으로 행군하고 있었으며, 미드웨이 항공력의 전부인 카탈리나 12대가 격납고 앞에 빽빽하게 모여 있었다.

기지 사령관 시마드 중령은 샌드 섬 북부의 호텔로 가는 승용차 안에서 원래 구루스 특사를 맞이하기 위하여 훈련을 빼려 했지만 훈련 일정이 워낙 빡빡하여 할 수 없이 일부 병력만 훈련을 실시하는 중이라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사실은 행정병에 취사병까지 모두 동원되어 총을 들고 행군하는 중이었다.

 

구루스 특사가 호텔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자 잠시 후 호텔 바로 옆에 배치되어 있던 F 포대의 3인치 대공포들이 포격연습을 시작했고 이어서 다른 포대들이 합세했다.

마침 그날 저녁부터 날씨가 나빠져서 3일 후에야 수상기가 뜰 수 있었는데 시마드 중령은 그동안 안전을 이유로 구루스 일행을 호텔에서 한발짝도 나오지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3일 후에 미국을 향하여 미드웨이를 출발할 때 구루스 일행은 꼬박 3일간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새 없이 쏘아대는 포성 때문에 귀가 멍멍한 상태였다.

 

1941년 11월 19일에 제231해병정찰폭격비행대대(VMSB-231)의 지상정비요원들이 미드웨이에 도착했으나 정작 항공기의 도착은 늦어졌다.

마침내 12월 5일에 항공모함 렉싱턴이 제231해병정찰폭격비행대대를 싣고 미드웨이를 향하여 출항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제231해병정찰폭격비행대대는 1941년 12월 7일에 미드웨이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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