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미국의 전략적 상황
1942년의 첫 4개월 간 미국 태평양함대는 일본해군과의 대결에서 죽을 쑤고 있었다.
일본해군이 1941년 12월 7일에 단행한 진주만 기습은 미해군의 자신감을 뒤흔들어 놓았다.
수십년간 미함대의 주축이었던 전함부대는 2회의 공습으로 절름발이가 되었다.
함대 주력이 분쇄된 태평양함대는 필리핀의 함락을 저지할 수 없었고,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지키기 위한 노력에 한줌의 소함대 외에는 지원할 여력이 없었다.
결국 일본군이 놀라운 속력으로 서부 태평양을 휩쓸며 급속하게 세력을 확장하는 동안 태평양함대는 지켜보는 수 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세계 최강이라고 믿어 왔던 미해군으로서는 자존심이 짓뭉개지는 참담한 상황이었다.
만일 체스터 니미츠라는 걸출한 사령관이 나타나서 태평양함대의 침통한 분위기를 추스르고 사기를 진작시키지 못했다면 이 잔인한 1942년의 상반기 동안에 태평양함대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그렇게 위축된 심리상태에서는 좋은 기회가 왔다한들 미드웨이 해전같이 모든 것을 걸고 한판 승부를 벌여 전략적 판세를 뒤집어 엎어버리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니미츠 제독도 태평양의 암담한 전황을 당장 극복할 방법은 없었고, 4월이 되자 상황은 더욱 암울해졌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가 일본군에게 무릎을 꿇으면서 호주가 일본의 침공 위협에 노출되었고, 소규모의 미국 아시아 함대는 소멸했다.
필리핀의 바탄반도에서 농성 중이던 미-필리핀 연합군의 주력은 4월 9일에 항복했다.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를 빼앗긴 영국은 버마에서도 일본군에게 쫓기면서 이제 인도가 공격당할까봐 전전긍긍하는 처지로 굴러 떨어졌다.
태평양의 정세는 말 그대로 파국적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런 참담한 패배를 겪으면서 니미츠 제독을 비롯한 미군 수뇌부는 4가지의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첫째로 전함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었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이기려면 미국은 항공모함으로 제해권을 장악하고, 잠수함으로 남방자원지역과 일본본토와의 교통로를 차단해야 했다.
진주만의 연기가 걷히기도 전에 아군의 항공모함 세력을 보호하고 증강하는 동시에 적의 항공모함을 때려잡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는 공감대가 태평양함대 내에 형성되었다.
둘째로 일본과의 전쟁은 미국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규모의 네덜란드 군은 소멸했다.
결정적인 문제로서 영국 세력 또한 태평양에서 사라졌다.
영국 육군은 인도 방어에 전념하고 있었으며, 강력했던 영국해군은 동부 인도양과 태평양 전 해역에서 영향력을 상실하여 영연방인 호주나 뉴질랜드의 방어에도 기여할 수 없었다.
태평양 지역에서 영국 세력의 이러한 갑작스럽고 완전한 몰락은 미국의 입장에서 전쟁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사태였으나 엄연한 현실이었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우수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없이 일본에 대항하기에는 인구나 산업규모가 턱없이 작았다.
셋째로 미국은 태평양에서 가장 중요한 두 지점 - 하와이와 파나마 운하 - 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파나마 운하는 일본군의 대규모 침공이 어렵다고 생각되었지만 진주만 공습을 경험한 하와이는 문제가 달랐다.
미국은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하와이를 고수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방어력을 증강했다.
1941년 10월에 30,000 명이었던 하와이 주둔군은 1942년 4월까지 70,000 명으로 늘어났고, 조만간 115,000 명까지 늘어날 예정이었다.
미국은 필요하면 하와이 주둔군을 20만이고 30만이고 그 이상으로도 늘릴 용의가 있었으며, 미드웨이와 존스톤 섬 등 하와이 외곽을 둘러싼 기지들도 강화했다.
또한 미국이 일본에게 승리하기 위해서는 호주와 뉴질랜드가 필요했으며 이들 동맹국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연락선을 확보하는 일이 중요했다.
호주는 1942년 2월말부터 일본군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는데 자국의 정예사단들은 중동에서 영국군과 함께 전투 중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존 커틴 호주 수상에게 미국이 호주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보장으로서 이미 파견되어 있는 육군항공대와 소규모의 해군에 더하여 빠른 시간 내로 미육군의 정규보병사단 1개, 가능하면 2개를 파견하겠다고 약속했다.
호주에 미군사단을 전개한다는 것은 연락선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즉 호주와 하와이 사이의 피지, 뉴칼레도니아, 사모아 등지에 파견되어 있는 명목뿐인 호주군과 뉴질랜드 수비대를 대체할 미군 병력들이 당장 파견되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여기서 마지막 깨달음이 따라왔다.
즉 태평양에서의 병력 수요가 충당될 때까지 미국은 영국과 약속한 "독일 먼저"("German First") 원칙을 '유연하게' 해석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개전 6개월 후인 1942년 중반에 나치 점령 하의 유럽에 상륙하겠다는 전쟁 전 미국의 계획은 태평양의 골치아픈 문제들이 없었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일시적이나마 독일 우선 원칙을 뒤로 밀쳐둔다는 것은 극적인 방향전환이었다.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이렇게 어렵고 중요한 시기인 1941년 12월 31일에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니미츠 제독은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뛰어난 지휘관이었으며, 사람들을 다루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태평양함대 사령관에 정식으로 취임하기 1주일 전인 1941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진주만에 도착하여 며칠간 태평양함대의 상황을 파악했다.
니미츠 제독은 태평양함대 장병들의 사기가 지독하게 떨어져 있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진주만 기습 이후 20일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으니 당연했다.
(태평양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 자세한 설명은 여기로)
니미츠 제독은 1941년 12월 31일에 잠수함 그래일링 호의 갑판에서 취임했다.
그리고, 그날 밤에 벌어진 취임 환영회 겸 송년회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던 폭탄 선언을 했다.
즉 그는 기존 태평양함대 참모들 및 지휘관들을 전원 유임시키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연회에 참석했던 장교들은 진주만 기습으로 자신들의 경력은 끝났다고 생각했으며 취임 환영회를 자신들을 궁벽진 곳으로 좌천시키기 전에 신임 사령관이 베풀어주는 송별회로 생각했다.
그런데 니미츠 제독의 깜짝 발표가 있자 침울하던 장교들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면서 가라앉아 있던 환영회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이 소문이 태평양함대 내로 퍼져나가자 바닥까지 떨어져 있던 진주만의 사기가 하루아침에 뛰어올랐다.
이후 니미츠 제독은 최대한 약속을 지켰고, 몇몇 장교들이 이동했지만 대부분 진급을 위하여 필수적인 해상근무를 나가는 등의 일상적인 이동이었다.
니미츠 제독은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기 직전까지 미해군의 인사를 담당하는 항해국장이었기 때문에 뛰어난 인재들이 태평양함대로 배속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진주만 기습은 이들에게 책임을 물을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이렇듯 니미츠 제독은 부하들의 존경과 신뢰를 얻고 그들의 능력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사령관 취임 직전까지 해군장교의 인사를 담당하는 항해국장을 지낸데다가 사람을 보는 눈이 정확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근본적으로 니미츠 제독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인간관이 부드러운 인상과 관대하고 겸손한 태도로 나타났기 때문에 그를 만나본 사람은 친근하고 편안하며 자신이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겉모습과 달리 강인한 내면을 가지고 있어서 스트레스가 심한 상황에서도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이익과 위험부담을 계산하여 행동할 수 있었다.
평소 행동은 신중하고 조심스러웠으나 필요하면 놀라울 정도로 대담하고 공격적으로 돌변했다.
니미츠 제독은 자신의 직속상관인 킹 제독과 마찬가지로 조직화의 명수로서 조직을 통하여 임무를 달성했으며, 조직에 임무를 할당하고, 필요하면 조직을 만들고, 인물을 배치하고, 권한과 한계를 규정하고 조율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서 니미츠 제독은 자신의 뛰어난 조직화 능력을 통하여 자신의 개성을 태평양함대라는 거대한 조직의 구석구석까지 불어넣었다.
따라서 그의 지휘 하에서 태평양함대는 신중하고 용의주도한 면과 대담하고 공격적인 면을 동시에 갖춘 효율적이고 강력한 전쟁기구로 변모했다.
(미함대총사령관 겸 해군참모총장 어네스트 킹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니미츠 제독은 에섹스 급 항공모함이 쏟아져 나오는 1943년 후반기가 되기 이전에도 적절한 기회가 온다면 자신이 가진 항공모함 전력만으로도 일본해군의 주력, 특히 일본의 항모기동부대를 충분히 격멸할 수 있다고 믿었다.
1942년의 전반기에 일본 항모기동부대의 능력에 대하여 모두들 히스테리에 가까운 공포심을 품고 있을 때에도 니미츠 제독은 자신의 항모기동부대 승조원들과 함재기 조종사들이 일본 항모기동부대와 맞서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물질적인 열세로 인하여 니미츠 제독은 일본해군에게 결전을 강요할 수 없었고, 일본해군의 움직임에 대응하면서 기회를 노리는 수 밖에 없었다.
태평양전쟁 개전 당시 미해군이 보유한 항공모함 7척 중에서 일본의 정규항공모함들과 맞대결이 가능한 것은 시험적 성격이 강한 레인저를 빼고 6척이었다.
1942년 4월 1일 현재 6척 중 가장 작은 와스프는 아직 대서양에 있었고, 새러토가는 1942년 1월에 일본잠수함의 어뢰를 맞아 미본토에서 수리 중이었으며, 가장 늦게 취역한 호넷은 곧 태평양으로 투입될 예정이었다.
니미츠 제독은 사용가능한 렉싱턴, 요크타운, 엔터프라이즈를 사용하여 1942년 2월과 3월에 태평양의 일본군 외곽 기지들을 공격했다.
이러한 공격은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주지는 못했으나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항공모함 기동부대는 실전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사기와 공격정신을 강화시겼다.
1942년 4월에 태평양함대는 미함대 총사령관 겸 해군참모총장인 킹 대장의 명령에 의하여 특이한 작전을 수행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태평양 전쟁 초기부터 진주만의 원수를 갚고 미국민과 미군 장병들의 사기를 높이며 일본국민들에게 간담이 서늘한 경고를 주기 위하여 일본제국의 수도인 도쿄를 공습하는 방법을 연구하라고 킹 제독을 압박했다.
도쿄를 공습할 수 있는 거리에 미군 비행장이 없는 상황에서 대통령의 압박을 견디다 못한 킹 제독과 참모들은 항공모함에 항속거리가 긴 육군항공대의 B-25 쌍발폭격기를 싣고 도쿄 부근에 다가가서 이함시킨 다음 도쿄를 폭격하고 중국으로 향한다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리하여 태평양으로 파견되는 신예항공모함 호넷이 샌디에이고에서 B-25 쌍발폭격기 16대를 싣고 태평양함대에서 파견한 항모 엔터프라이즈의 호위를 받으면서 도쿄 부근으로 다가가서 이함시켰다.
제임스 둘리틀 육군중령이 지휘한 이 B-25 쌍발폭격기들은 도쿄를 공습하고 중국으로 도주했다.
'둘리틀 공습' 이라고 불린 이 도쿄 공습으로 일본이 입은 물질적 피해는 미미했다.
하지만 대낮에 미군 폭격기에 의하여 수도인 도쿄가 공습당했다는 사실이 일본국민과 군부에 준 충격은 어마어마하여 차기 작전 방향을 두고 대립하고 있던 일본군 수뇌부의 혼란상황을 종식시키고 야마모토 제독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리하여 둘리틀 공습은 맞수인 일본 연합함대의 야마모토 제독과 미국 태평양함대의 니미츠 제독이 서로 바라던 기회, 즉 상대방의 항모기동부대를 말살해 버릴 수 있는 결전장인 미드웨이 해전으로 두 사람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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