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일본의 전략적 상황

 

1942년 3월 8일에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연합군을 총지휘하던 네덜란드 군의 텔 푸어텐 중장이 일본제16군 사령관 이마무라 히도시 중장에게 항복함으로써 일본군은 남방작전의 제1단계를 사실상 끝마쳤다.

비록 필리핀의 바탄반도에서는 미-필리핀 연합군이 농성하고 있었으나 미함대가 이들을 구원할 여건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체적인 전황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이제 일본의 판도는 자신들이 주장하는 2,600 년 역사상 최대의 크기로 팽창하여 북으로는 만주에서 남으로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와 뉴기니 북부, 서쪽으로는 버마, 동쪽으로는 괌과 웨이크같은 미국령을 포함하여 영국령인 길버트 제도에서 쿠릴열도를 잇는 선까지 확장되었다.

 

이 광대한 영역 내에는 일본이 남방작전에서 얻으려고 하던 지역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우선 일본의 숙명적인 아킬레스 건이었던 석유가 펑펑 쏟아지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가 있었으며 중요한 전략물자인 고무 뿐만 아니라 주석같은 귀중한 금속들이 풍부하게 산출되는 말레이 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나아가 일본본토와 이러한 남방자원지대를 연결하는 해상로를 보호할 중요한 기지인 필리핀도 있었다.

또한 버마에서 영국군이 축출되면서 1937년 이래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고 있던 중국의 생명줄인 버마통로도 차단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미태평양함대의 기지인 진주만을 기습하여 강력한 태평양함대를 절름발이로 만들었고, 그 결과 미국은 일본에 대한 반격은 커녕 웨이크 섬 뿐만 아니라 미군과 필리핀군 10만명과 함께 필리핀까지 일본의 손아귀에 넘겨준 채 하와이와 미본토 서해안, 그리고 호주와의 연락선을 유지하는데 급급한 처지로 전락했다.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를 지키던 영국군은 모두 항복했으며, 버마 주둔 영국군 또한 랭군을 빼앗기고 버마 북부로 내몰리고 있었다.

세계 최강이라던 영국해군 또한 신예전함 프린스오브웨일즈와 순양전함 리펄스를 일본군의 항공기에게 어이없이 잃은 후에 실론 방면으로 밀려났다.

동남아 지역에 주둔하던 미군, 영국군, 네덜란드군 및 호주군을 통합지휘하던 ABDA 사령부는 와해되었고, ABDA 사령부에 소속되었던 해군세력은 자바해 해전에서 치명상을 입고 이후 며칠 사이에 사실상 소멸했으며, 지상군 병력들 또한 3월 8일까지 대부분 포로로 잡혔다.

 

일본군은 불과 11개 사단과 약 2,000대의 항공기, 그리고 해군력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비교적 소규모의 군대를 투입하여 3개월 만에 이런 놀라운 군사적 위업을 달성했는데 3개월이라는 기간은 그들이 예측했던 6개월보다 무려 3개월이나 앞당겨진 것이었다.

희생 또한 적어서 진주만 기습 이후 1942년 5월 1일까지 상실한 해군함정이 척수로는 23척에 달한다지만 모두 구축함 이하의 소형 함정이라 톤수로는 26,441톤에 불과하였다.

최악의 경우 전체 보유 함정의 25% 인 30만톤까지 상실할 것을 각오했던 일본으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작은 손실이었다. 

 

(1937년 - 42년에 걸친 일본의 팽창 상황. 원본은 여기로)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적은 희생을 치르고 빠르게 얻은 커다란 성공이 일본에게 새로운 고민을 안겨 주었다.

 

일본의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제1단계 이후의 계획이 사실상 없었다는 것이었다. 

제1단계 이후의 계획에 대하여 정해진 것이라고는 진주만 기습 1달 전인 1941년 11월 5일에 정부-대본영 연락회의에서 내려진

 

'미국의 전쟁의지를 상실케하여 종전한다.'

 

는 뜬구름같은 결정 하나뿐이었다.

따라서 미국의 전쟁의지를 어떤 식으로 상실케 하여 전쟁을 마무리할 것이냐 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해석하기 나름이었는데 그 중에서는 미국에 빨리 강화 제안을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일본 외상 도고 시게노리는 개전 이후 3주 밖에 지나지 않은 42년 1월 정초에 외무성에 대한 훈시 속에서 직원들에게 앞으로 기회가 오면 즉시 미국과 강화 협상을 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라고 요구했다.

이외에도 일본정부와 의회 일각에서는 조기 강화를 위하여 미국에 강화 제안을 하자는 소수 의견이 있었으나 대본영이 반대했다.

안 그래도 미약했던 선제 강화 제안을 통한 조기 강화론은 1942년 초부터 놀라운 전승분위기가 이어지면서 2월 말이 되자 완전히 세력을 잃어버렸다.

 

이제 전쟁의 종결방식과 시기를 결정하는 일은 대본영의 손에 맡겨졌다.

그런데 대본영의 육군부(참모본부)와 해군부(군령부)는 선제 강화 제안에 반대하고 미국이 먼저 강화 제안을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은 같았으나 구체적인 실천방안은 전혀 달랐다.

그리고 해군 내부에서도 대본영 해군부와 실전부대인 연합함대 사령부의 생각이 달랐다.

 

우선 일본육군은 제1단계에서 획득한 지역 이외에 추가 점령은 절대 반대했다.

중국전선을 주요 전선으로 보고 남방전선은 중일전쟁의 연장선에서 파악하고 있던 일본육군은 남방작전에 전체 51개 사단 중에 11개 사단 밖에 내놓지 않았다.

중국에 21개 사단이 있었고, 만주에 13개, 조선에 2개, 그리고 일본본토에 4개 사단이 있었다.

육군은 남방작전의 성공으로 이제 일본의 목을 죄던 석유문제가 해결되었으니 남방지역에서는 철저하게 수세를 유지하면서 중국전선에 집중하여 중일전쟁을 마무리짓고 싶어했으며, 또한 기회가 오면 소련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고 싶어했다.

한마디로 일본육군은 해군이 주역이고 자신들은 조연일 수 밖에 없는 낯선 남방전선에 더 이상 병력을 투입하기 싫어했다.

 

일본해군은 육군의 이러한 생각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해군은 전략적 주도권을 쥐고 있을 때 이 기회를 최대한 살려야 하며 만일 여기서 멈춘다면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미국에게 반격의 기회를 줄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일본해군은 서태평양의 지배자로서 적어도 서태평양에서만큼은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따라서 해군은 이러한 주도권을 활용하여 연합군에게 한 번 더 타격을 가할 필요가 있으며 만일 이 타격이 충분히 강력하다면 미국을 강화협상 테이블로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육군은 이미 점령한 지역을 단단하게 요새화하여 이 방어선을 뚫으려는 미국에게 지속적인 피해를 강요함으로써 미국을 지쳐 나가떨어지게 만드는 것이 더 좋은 전략이라고 주장했다.

 

해군에서도 육군의 전략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진주만 기습에서 기동부대를 지휘했던 나구모 주이치 중장과 참모장 구사카 류노스케 소장이었다.

이들은 일본의 항모기동부대에게 휴식과 항공기 및 조종사를 보충할 여유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일본의 팽창이 진행되는 동안은 도저히 그럴 짬을 낼 수 없었다.

 

문제는 나구모 제독과 구사카 참모장이 진주만 기습을 가장 강경하게 반대했던 인물들이라는 점이었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진주만 기습의 주역이면서도 연합함대 내에서 두 사람의 발언권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일단 확보한 영역을 지키기만 한다는 것은 공격을 중시하는 일본해군의 전통에 정면으로 반하는 행동으로 야마모토처럼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제독이 제안했더라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킬만한 방침이었다.

따라서 나구모 제독이나 구사카 참모장같이 영향력이 없는 인물이 이런 방침을 내세우자마자 바로 무시되고 말았다.

 

(기동부대 사령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반면 대본영 해군부(군령부)는 호주를 침공하고 싶어했다. 

미국이 반드시 호주를 발판으로 반격을 개시하리라고 생각한 해군부는 호주를 침공하여 항복을 받아내거나 최소한 호주 북부의 항구들만 점령해 버려도 일본에 반격하려는 미국의 모든 계산을 헝클어 버릴 수 있다고 믿었다.

일본항모기동부대의 다윈 공습에는 분명히 이런 생각도 근저에 깔려 있었다.

그러나 일본육군은 호주 침공에 필요한 병력이 최소한 10개 내지12개 사단에 이르고, 일본 해군력의 대부분과 150만톤에 해당하는 수송선이 필요하다는 계산을 들고 나와 호주침공작전을 간단히 취소시켰다.

 

그러자 해군부는 대신 호주와 미국의 연락선을 차단하는 FS 작전을 들고 나왔다.

즉 우선 뉴기니 남부의 포트모레스비와 중부 솔로몬 군도의 툴라기를 점령하고 이후 뉴헤브리디즈 군도, 뉴칼레도니아(누메아), 피지를 거쳐 사모아까지 진출함으로써 호주와 미국의 연락선을 차단하고 미국이 호주를 강력한 반격기지로 사용하지 못하게 막는다는 구상이었다.

해군부는 포트모레스비와 툴라기를 점령하는 작전은 모레스비에서 따온 MO 작전이라고 이름짓고, 피지와 사모아 방면으로 진출하는 작전은 피지와 사모아에서 따온 FS 작전이라고 이름붙였다.

해군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해야만 했던 육군은 자신들의 병력이 많이 필요하지 않은 FS 작전에 호의를 보였고, 그 결과 1942년 1월 10일에 나가노 오사미 군령부 총장(해군부)과 스기야마 하지메 참모총장(육군부) 사이에 FS 작전을 실시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군령부 총장 나가노 오사미 대장.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한편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제독은 대본영 해군부와 생각이 달랐다.

야마모토 제독도 미국을 강화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려면 결정적인 승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는 호주 대신 하와이를 침공하고 싶어했다.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연합함대 참모장 우가키 마토메 제독은 진주만 기습 직후인 1941년 12월 9일에 야마모토 제독에게 불려가 하와이 침공 작전을 연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우가키 제독은 우선 하와이 외곽의 미드웨이, 존스턴, 칸톤, 그리고 팔미라 섬을 점령한 후에 오아후 섬에 상륙한다는 하와이 침공작전을 만들었다.

 

곧 연합함대의 참모들은 대본영 해군부를 상대로 하와이 침공작전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1941년 12월 16일에 대본영 해군부 작전부 작전계획반의 도미오카 대좌가 차후의 작전을 논의하기 위하여 히로시마 만에 있는 하시라지마 정박지의 연합함대 사령부에 왔다.

연합함대의 참모 구로시마 가메토 대좌는 도미오카 대좌에게 연합함대가 하와이와 사모아 사이의 팔미라 섬을 점령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팔미라 섬 점령계획이 자신이 선호하던 피지-사모아 방면 진출을 연합함대도 지지하는 증거라고 착각한 도미오카 대좌는 도쿄로 돌아가서 상관인 작전부장 후쿠도메 시게루 소장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후쿠도메 소장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육군부 작전부장인 다나카 신이치 육군소장은 연합함대의 속셈은 사모아 진출이 아니라 하와이 침공이라면서 육군은 하와이 침공에 필요한 대규모 병력을 제공하는데 절대 반대라는 점을 명확하게 했다. 

다나카 소장이 자신의 판단을 부정하자 화가 난 도미오카 대좌는 연합함대 사령부에 연락하여 계획을 설명할 사람을 대본영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1941년 12월 27일에 연합함대의 참모인 미와 요시다케 대좌가 대본영에 와서 연합함대의 계획을 설명했는데 도미오카 대좌는 이때서야 연합함대의 속셈을 알았다.

 

도미오카 대좌는 연합함대의 하와이 침공 계획을 저지하기 위하여 즉시 행동을 개시했다.

우선 부하인 가미 시게노리 대좌에게 보급 면에서 하와이 침공작전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증명하는 보고서를 만들도록 명령한 후 군령부 총장 나가노 오사미 대장에게 연합함대 사령부의 계획을 알리고 빨리 육군부와 FS 작전에 대해 합의할 것을 요청했다.

나가노 대장은 육군부와의 협의를 서둘러서 1942년 1월 10일에 참모총장 스기야마 하지메 육군대장과 MO 작전 및 FS 작전을 실시하기로 전격적으로 합의했다.

 

다음날인 1월 11일에 가미 대좌는 보급 면에서 하와이 침공이 불가하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상륙에 따르는 모든 문제점들을 제쳐 놓고 일단 하와이를 점령하더라도 보급문제 때문에 유지할 수 없었다.

즉 하와이는 식량의 자급자족도 안되는 곳으로 점령한 후 주민과 대규모 주둔군을 위한 보급수요가 최소한 1달에 수송선 60척에 달하며 미군잠수함의 방해가 확실시되기 때문에 실제 수송선의 소요량은 한달에 60척을 훌쩍 넘는다면서 이는 일본이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대본영 해군부의 분위기를 전혀 모르던 연합함대 사령부에서는 빨리 하와이 침공작전을 승인하라고 재촉하기 위하여 참모 사사키 아키라 중좌를 대본영에 파견했다.

사사키 중좌는 1월 13일에 대본영에 도착하자마자 가미 대좌의 보고서를 받았고, 육군부로부터는 하와이 침공에 필요한 병력을 절대로 내놓지 않을 것이라는 퉁명하고 일방적인 통보를 들었다.

게다가 3일 전인 1월 10일에 이미 나가노 군령부 총장과 스기야마 참모총장이 하와이 침공 대신 MO 작전과 FS 작전을 실시하기로 합의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너무나 뜻밖의 사태에 완전히 얼이 빠진 사사키 중좌는 찍소리도 못하고 새파랗게 질려서 연합함대 사령부로 돌아갔다. 

 

사사키 중좌의 보고를 들은 야마모토 제독은 크게 노했으나 당장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MO 작전과 FS 작전이 너무 박력이 없다고 생각한 연합함대 사령부는 차라리 인도양으로 진출하여 실론 섬에 상륙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연합함대는 실론을 장악하면 영국의 가장 중요한 식민지인 인도의 반란을 촉발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독일과 연결할 수도 있다면서 1942년 2월 20일부터 23일에 걸쳐 야마토 함상에서 실시되는 전쟁연습(War Game)에 대본영 해군부와 육군부를 초청했다.

전쟁연습 결과는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연합함대 참모장인 우가키 소장마저도 자신의 일기에 인도양 전쟁연습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적었으니 대본영의 반응이야 볼 것도 없었다.

실제로 2월 28일에 열린 정부-대본영 연락회의에서 실론 침공은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육군은 실론 침공에 최소한 5개 사단 이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만한 수의 사단을 차출할 용의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버마 전선에서의 보급수요가 예상보다 크게 늘어 영국군을 추격하는 일본군에 대한 보급이 아슬아슬한 상황에 달하고 있었다.

이런 보급상황에서 실론 침공은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또한 독일은 일본과 만나기 위하여 중동에 진출할 계획이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했다.

따라서 독일과 일본이 연결한다는 정치적 선전목적도 물거품이 되었다.

 

1942년 3월 13일에 대본영 해군부와 육군부는 MO 작전과 FS 작전을 실시한다고 정식으로 합의하고 일왕에게 재가를 받았다.

이로써 차기 작전에 대한 논란은 끝난 것으로 보였으며, 상식적으로 볼 때 끝나는 것이 순리였다.

 

그러나 야마모토 제독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중부 태평양 방면에서 공세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육군의 반감을 피하기 위하여 하와이 상륙 대신 병력이 적게 소요되는 미드웨이 침공을 들고 나왔다.

야마모토 제독이 이러한 결정을 내린 데에는 1942년 2월 초부터 실시한 미군 항모기동부대의 작전이 큰 영향을 끼쳤다.

 

즉 미해군은 1942년 2월 1일에 엔터프라이즈와 요크타운을 내보내어 길버트 제도와 마셜제도를 폭격한데 이어 2월 20일에는 렉싱턴을 동원하여 라바울을 폭격하려고 시도했다.

렉싱턴의 라바울 공습은 일본군 정찰기에 미리 들키는 바람에 실패했지만 이때 렉싱턴의 와일드캣들은 요격을 위하여 날아온 제4공격대 소속의 1식 육상공격기 17대 중 15대를 격추했다.

미군의 피해는 와일드캣 2대뿐으로 함정의 피해는 전혀 없었다.

 

2월 24일에는 엔터프라이즈가 웨이크 섬을 폭격하더니 3월 4일에는 마르쿠스 섬을 폭격했다.

3월 10일에는 렉싱턴과 요크타운이 104대의 함재기를 내보내어 뉴기니 북부의 라에와 살라모아에 상륙하는 일본군을 공격했다.

기습을 받은 일본군은 전체 수송선의 2/3를 상실했다.

상륙작전 자체가 대참사로 끝나지 않고 성공한 이유는 대부분의 수송선들이 목적지 바로 부근에서 공격을 받아서 해안에 좌초함으로써 수송 중이던 병력과 장비 및 보급품들이 대부분 무사히 상륙했기 때문이었다. 

 

(미국항모기동부대의 초기 공격도. 출처 : 태평양전쟁, 맥아더, 그러나 니미츠, P73)

 

이러한 공격들은 전술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었으나 야마모토 제독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불쾌한 일이었다.

게다가 3월 4일에 공격을 받은 마르쿠스 섬은 일본본토에서 불과 1,800km 떨어져 있었다.

 

여기서 야마모토 제독은 일본의 가장 큰 위협은 바로 미국의 항공모함 그 자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묘하게도 야마모토 제독의 맞수인 태평양함대 사령관 니미츠 제독도 같은 결론에 도달해 있었다.

이제 미국 태평양함대와 일본연합함대는 서로 상대방의 항공모함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기회를 노렸다.

당시에는 일본연합함대가 주도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싸움터는 연합함대가 고르게 되었고, 야마모토 제독은 미드웨이를 택했다.

 

이러한 상황판단 하에서 야마모토 제독은 3월 중순부터 미드웨이 공략을 거세게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해군의 실전부대인 연합함대의 사령관이 대본영 해군부가 이미 육군과의 협의를 끝내고 정식으로 발효한 작전계획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사태가 벌어진 데에는 일본군 통수 체계의 허점이 자리잡고 있었다.

일본제국의 헌법에 따르면 군 통수권은 정부가 간섭할 수 없는 일왕의 고유한 대권으로서 이러한 통수권 행사를 보조하기 위하여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대본영이 따로 존재했다.

대본영의 역할은 일본군 최고사령관인 일왕을 위하여 작전을 짜고 군사 분야에 대하여 전문적 조언을 하는 역할로서 엄밀하게 말하면 실전부대에 직접 작전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은 없었다. 

하지만 일왕은 전통적으로 그러한 통수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지 않았으므로 실제로는 대본영이 작전을 짜고 실전부대에 명령을 내리는 군령권까지 행사했다.

하지만 이 경우 대본영의 군령권 행사는 어디까지나 편의적 해석으로 이론적으로는 실전부대에서 이러한 대본영의 군령권 행사를 거부하고 일왕에게 직접 자신들의 의견을 말할 권리가 있었다.

육군의 사단장 이상, 해군의 함대 사령관 이상이면 이런 권리가 있었으나, 해군의 경우 연합함대 사령관이 각 함대 사령관을 대표하여 이러한 권리를 행사하게 되어 있었다.

 

대본영 해군부인 군령부의 경우 군령부 총장이 해군의 최고위직이자 대부분 연합함대 사령관의 선배였으므로 연공서열이 뚜렷한 일본군에서 보통 별 문제없이 돌아갔지만 만일 실전부대인 연합함대 사령관이 대본영의 작전계획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끝까지 버틸 경우 엄밀하게 따져서 대본영 해군부가 이를 강제할 수 있는 공식적인 권한은 없었다. 

이런 상황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 바로 진주만 기습과 미드웨이 침공의 결정 과정이었다.

 

야마모토 제독은 1942년 4월 2일에 와타나베 야스지 대좌를 대본영에 파견하여 3일간 해군부와 미드웨이 침공을 둘러싸고 치열한 토론을 벌이게 했다. 

와타나베 대좌는 야마모토 제독의 논리를 그대로 전개하면서 미드웨이를 방어하러 나오는 미국 항모기동부대를 격멸하는 것이 호주와 미국 사이의 연락선을 차단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대본영 해군부에서는 도미오카 대좌와 그의 부하들인 야마모토 유지 중좌 및 미요 다츠키치 중좌가 반격에 나섰는데 특히 항공장교인 미요 중좌가 맹활약을 펼쳤다.

미요 중좌는 3가지 요지로 논리정연하게 미드웨이 침공작전을 비판하면서 와타나베 대좌를 몰아붙였다.

 

첫째로 미드웨이 침공은 지상발진 항공기의 지원을 받을 수 없다.

제1단계 작전에서 일본군이 거둔 놀라운 성공은 대부분 지상발진 항공기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졌다.

 

둘째로 미드웨이를 함락한다고 해도 가까운 하와이에 기지를 두고 활동하는 잠수함을 막을 방법이 없다.

따라서 미드웨이에 대한 보급은 미군 잠수함에 의하여 큰 타격을 입을 것이며 이미 한계에 달한 일본의 수송선 사정을 감안할 때 이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부담이다.

게다가 미드웨이는 작아서 소수의 항공기밖에 주둔할 수 없으며 이런 소규모의 항공대로는 수백대에 달하는 미군 항공기가 지키는 하와이를 압박할 수 없다. 

 

셋째로 따라서 미국의 항모기동부대가 미드웨이를 지키러 오지 않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미드웨이에 대한 보급의 곤란성과 소규모의 항공대 밖에 주둔할 수 없는 사정은 미군 또한 잘 알고 있을 것이며 따라서 무리하게 맞대결하는 대신 일단 미드웨이를 내주고 일본함대가 물러가면 잠수함을 동원하여 보급을 차단하고 지속적인 공습으로 약화시킨 다음 탈환하려 할 수 있다.

 

거기에 비하면 FS 작전의 이점은 명확하다.

미국으로서는 전쟁에 이기기 위하여 호주가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호주와의 연락로를 차단하는 FS 작전은 미국에게 미드웨이 침공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위협이며 따라서 반드시 항모기동부대를 보내어 저지하려 할 것이다.

그러면 연합함대의 항모기동부대는 이미 점령한 지상 비행장에서 발진하는 항공기의 지원을 받는 훨씬 유리한 조건에서 미국항모기동부대를 격멸할 수 있다.

 

미요 중좌의 논리정연한 비판에 와타나베 대좌는 할 말을 잃었으며 원통함에 눈물만 뚝뚝 흘렸다.

2일 밤에 와타나베 대좌의 보고를 받은 야마토 함상의 야마모토 제독은 만일 미군이 지키러 오지 않는다면 미드웨이라는 중요한 전초진지를 쉽게 장악하는 셈이라고 말했으나 보급문제와 미드웨이에 주둔 가능한 항공대 규모에 대해서는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논리에서 밀린 와타나베 대좌는 3일과 4일 이틀동안 비판에는 귀를 틀어막은 채 오로지 앵무새처럼 기존의 주장만 되풀이했다.

야마모토 제독은 4일 밤에 와타나베 대좌의 보고를 들은 다음 자신의 승부사적 기질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지시를 내렸다.

와타나베 대좌는 5일 아침에 도미오카 대좌를 만나자마자 만일 미드웨이 침공작전이 채택되지 않는다면 사임하겠다는 야마모토 제독의 말을 전했다.

 

지난 3일간 와타나베 대좌를 상대하느라 완전히 녹초가 되어 버린 도미오카 대좌는 이 말을 듣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상관인 제1부장 후쿠도메 소장에게 사안을 넘기고 뻗어 버렸다.

야마모토 제독의 굳은 결심에 직면한 후쿠도메 소장은 나가노 군령부 총장에게 연합함대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고 보고했다.

나가노 총장은 야마모토 제독을 깊이 아끼고 신뢰하는 입장으로 진주만 기습 때에도 사임하겠다는 압력에 눌려 작전을 허가했었다.

그런 그가 이제 진주만 기습과 연이은 승전으로 일본에서 국민적인 영웅이 된 야마모토 제독의 사임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1942년 4월 5일 오후에 나가노 군령부 총장은 연합함대의 작전안을 받아들인다는 결정을 내렸다.

 

야마모토 제독은 이로서 대본영 해군부에 승리했으나 거기에는 댓가가 따랐다.

우선 연합함대는 MO 작전에 항공모함 2척을 지원하기로 약속해야만 했다.

이 약속에 따라 MO 작전의 지원을 위하여 투입되었던 항공모함 쇼가쿠와 즈이가쿠가 산호해 해전에서 피해를 입어 미드웨이 해전에 불참하는 바람에 일본해군이 참패하는데 중요한 빌미를 제공했다.

 

야마모토 제독은 또한 미드웨이 공략작전과 동시에 알류샨 열도도 공격하기로 대본영 해군부와 합의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달리 알류샨 열도 작전은 미드웨이 침공작전과 전혀 별개의 작전이며 이는 대본영의 해군부 일각과 특히 육군부에서 선호하던 작전이었다.

해군부는 알류샨 열도를 점령함으로써 미국이 북태평양을 거쳐 일본을 공격하는 걸 막으려고 했으며, 또한 미본토 공격시 디딤판으로 사용하고 싶어했다.

소련을 침공하여 노몬한 전투의 복수를 하고 싶어하던 육군부는 소련에 대한 미국의 렌드리스 통로 중에서 가장 비중이 큰 미서해안-블라디보스톡 통로를 차단할 수 있는 알류샨 열도 침공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대본영 해군부는 미드웨이 침공에 동의하는 댓가로 알류샨 열도 작전을 끼워 넣었다.

이 알류샨 열도 작전으로 연합함대 전력의 상당 부분이 북쪽으로 빠져나감과 동시에 미드웨이 해전의 무대가 엄청나게 넓어졌으며 그 결과 일본해군의 함대들이 넓게 분산되어 결과적으로 미드웨이 참패의 큰 원인이 되었다.

 

한편 미드웨이 침공을 가장 격렬하게 반대하던 대본영 해군부의 도미오카 대좌는 이제 대본영 육군부에 미드웨이 침공작전을 설명하고 동의를 얻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도미오카 대좌의 설명을 들은 참모본부(육군부)의 작전부장인 다나카 신이치 장군은 미드웨이 침공을 하와이 침공의 사전 포석으로 의심하여 절대로 동의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4월 16일에 군령부 총장 나가노 제독이 일왕에게 육군의 협조를 전제로 한 미드웨이 작전에 대하여 보고했을 때 스기야마 하지메 참모총장은 감히 반대하지 못했다.

일왕의 재가가 떨어짐으로서 이제 MI 작전이라고 명명된 미드웨이 침공작전은 공식적으로 실시가 확정되었다.

 

연합함대는 일단 결정이 나자 최대한 빨리 미드웨이 침공작전을 실시하려 했으나 열의가 없던 육군과 대본영 해군부는 제대로 협조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틀 후에 야마모토 제독에게는 천군만마와도 같은 구원군이 태평양으로부터 도쿄 상공에 도착하여 미드웨이 해전으로 향하는 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Posted by 대사(P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