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오키나와 전투

 

오키나와 전투는 태평양 전쟁 최후이자 최대의 격전입니다.

공격측인 미군의 병력은 지상군인 제10군의 병력만 6개 사단에 18만명이 넘었으며 방어측인 일본군의 병력도 10만에 가까웠습니다.

 

제10군은 1945년 4월 1일에 오키나와 중서부의 하구시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상륙한 사단은 4개 사단으로 북쪽에서부터 제해병6사단, 유진이 포함된 제1해병사단, 제7보병사단, 제96보병사단 순이었습니다.

제27보병사단은 예비대였고, 제77보병사단은 오키나와 서쪽의 게라마 열도에 상륙한 상태였습니다. 

 

제6해병사단은 오키나와 북부를 공격했고, 제1해병사단은 오키나와 중부, 그리고, 제7 및 제96보병사단은 오키나와 남부로 향했습니다.

일본군의 주력이 오키나와 남부에 있었기 때문에 오키나와 중부를 공격한 제1해병사단과 북부를 공격한 제6해병사단은 4월 중에 대부분 작전을 완료했습니다.

 

그러나 남쪽으로 진격했던 제7보병사단과 제96보병사단은 일본군의 엄청난 저항에 부딪혀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급기야 4월 18일에 예비대인 제27보병사단이 투입되었으나, 제27사단은 4월 19일에 실시된 슈리 방어선에 대한 공격에서 괴멸적인 타격을 받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중부 오키나와를 일찌감치 점령하고 비교적 한가롭게 지내던 제1해병사단에게 제27보병사단과 교대하여 슈리 방어선을 공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집니다.

이 명령에 따라 제1해병사단은 1945년 5월 1일에 슈리 방어선에 도착하고, 며칠 후 북부 오키나와의 점령을 마친 제6해병사단도 슈리 방어선 전투에 투입됩니다.

제1해병사단의 도착에 따라 큰 피해를 입은 제27보병사단은 후방으로 돌려져서 경비 및 잔적소탕 임무를 맡게 됩니다.

 

(오키나와 전투 상황도. 화살표 머리 부분이 유진이 포함된 해병제1사단이 상륙한 하구시 해안)

 

태평양전쟁 후반기의 다른 전투와 달리 오키나와의 일본군은 숫자도 많고 철저하게 요새화 된 진지에 의지했을 뿐 아니라 포병 전력도 막강하고 포병들의 훈련 수준도 높았으며 포탄도 충분히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전황이 악화됨에 따라 필리핀으로 보내려던 일본군 포병이 오키나와에서 발이 묶이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미군이 오키나와 전투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일본군의 강력한 방어진지와 더불어서 5월 이후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서 공격측인 미군에게 큰 부담을 주고 전선에 대한 보급을 곤란하게 만들었습니다.

 

오키나와 전투는 공식적으로는 1945년 6월 22일에 끝났지만 이후로도 소탕전은 6월말까지 이어졌습니다.

실제로 6월 23일에서 30일 사이에 전사한 일본군이 8,975명, 포로가 3,809명(이중에서 907명은 노동자)이나 됩니다.

 

오키나와 전투는 미군이 태평양 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전투입니다.

1945년 4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 미군 전사자는 육군 4,582명, 해병대 2,792명, 그리고 해군 4,907명 등 총 12,281명에 달합니다.

해군 전사자 중 절반 가량은 일본군의 가미카제 자살공격기에 의하여 희생된 것입니다.

 

오키나와에 투입된 미군 중에서도 특히 유진이 포함된 제1해병사단의 K/3/5 중대는 피해가 컸던 중대에 속합니다.

4월 1일 상륙 당시 K/3/5 중대의 병력은 정수를 꽉 채운 235명이었습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이전의 전투와 달리 해병대도 육군처럼 보충병을 배로 실어와서 현지에서 즉각 투입하는 방식을 채택하여 오키나와 전투 기간 중에 원래 병력보다 더 많은 250 명이 K/3/5 중대에 증원되었습니다.

따라서 실로 연인원 485 명이 K/3/5 중대 소속으로 오키나와 전투를 치렀습니다.

이들 중 오키나와 전투가 끝날 때까지 전사하거나 부상당하거나 병에 걸려서 후송된 인원이 435명에 달합니다.

결국 오키나와 전투가 끝났을 때 K/3/5 중대에 남아있던 병력은 불과 50명이었으며 이들 중 4월 1일에 상륙했던 병력은 유진과 스내푸 등을 포함한 26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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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존 바실론의 죽음

 

존 바실론 중사(Gunnery Sergeant)는 제5해병사단 제27연대 제1대대 C중대의 선임중사로서 1945년 2월 19일부터 시작된 이오지마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바실론 중사는 제3파로서 최초의 상륙보다 약 20분 정도 늦은 오전 9시 30분 경에 상륙해안의 거의 정중앙인 레드비치2에 상륙했으며, 그가 포함된 제1/27대대는 이오지마의 비행장 중 제1번 비행장 남단을 점령할 임무를 맡았습니다.

 

(이오지마 상륙작전 상황도. 화살표는 바실론 중사의 상륙지점, 다이아몬드 모양은 벙커 폭파지점, x 표는 전사지점입니다.)

 

제1/27대대는 바실론 중사가 상륙한 지 약 10분 후인 9시 40분부터 일본군의 강력한 박격포 공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바실론 중사는 기관총 분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소대 규모의 혼성 병력을 이끌면서 사실상 제1/27대대의 전진을 선도했습니다.

당시 해병대는 엄청난 혼란 속에 편제가 흐트려져서 여러 중대 출신들이 한 팀으로 싸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바실론 중사만 해도 C중대 소속이지만 그를 따르던 테이텀의 기관총분대는 -드라마에서는 명확하게 나오지 않지만- 사실 C중대가 아니라 B중대 소속이었습니다.

 

소대 규모의 공격대를 이끌고 전진하던 바실론 중사는 비행장 남쪽에서 강력한 일본군 벙커와 마주치게 되고 여기서 그는 교과서적인 벙커공략법을 보여줍니다.

먼저 기관총의 엄호아래 가방폭탄을 총안에 집어넣어 적의 기관총을 침묵시킨 다음 화염방사기가 총안으로 화염을 쏟아붓습니다.

그동안 기관총을 포함한 나머지 병력들은 참호 뒤쪽으로 기동하여 화염을 피해서 빠져나오는 적을 사살하는 것입니다.

 

(기관총의 엄호사격아래)

 

(가방폭탄을 가진 폭파반이 총안에 접근하여)

 

(적의 기관총을 폭파시키고 나면)

 

(화염방사기가 불길을 쏟아넣는 동안)

 

(기관총을 비롯한 나머지 병력들은 벙커의 뒷쪽으로 기동하여)

 

(화염방사기의 불길을 피해 도망쳐 나오는 일본군을)

 

(모조리 사살)

 

이런 식으로 대대의 공격을 앞장서서 이끌던 바실론 중사는 정오가 채 되기 전에 전사하고 맙니다.

드라마에서는 그의 전사를 총상에 의한 것처럼 나타내고 있지만, 바실론 중사 부근에서 함께 싸웠던 기관총 사수 테이텀을 비롯하여 나중에 극작가로 유명해지는 랜스포드 등은 한결같이 바실론 중사가 다른 3-4명의 해병대원과 함께 적의 박격포탄에 의하여 전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미해병대 공식전사에서도 바실론 중사의 사인을 박격포탄에 의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만 바실론 중사의 사체검안서에는 그의 사인이 GSW(Gun Shot Wound), 즉 총상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아마도 하루만에 3,000 명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하는 혼란의 와중에서 군의관이 실수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총상으로 사망하는 것처럼 나와서 좀 의외더군요..

 

(존 바실론 중사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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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펠렐리우 전투 일지

 

1944년 9월 15일 : 미제1해병사단이 펠렐리우 섬에 상륙합니다.

제1해병사단은 일본군의 큰 저항을 받아 상륙 당일에만 전사자 210명, 부상자 901명으로 총 1,111 명의 사상자를 기록했습니다.

피투성이 상륙전의 대명사격인 타라와 상륙작전의 상륙 첫날 사상자 수는 약 1,500 명입니다.

 

1944년 9월 15일 - 18일 : 제1연대와 제5연대가 큰 피해를 입으면서 비행장 지역을 점령합니다.

그 동안 제7연대는 펠렐리우 섬의 남쪽을 장악합니다.

 

1944년 9월 23일 : 초기 전투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은 체스티 풀러 대령의 제1해병연대가 육군제81보병사단의 제321보병연대와 교체됩니다.

9월 19일부터 22일 사이에 유진이 포함된 제5해병연대는 펠렐리우 동쪽 지역을 점령했고, 펠렐리우 북쪽 지역을 점령하기 위하여 우무르브로골 산의 서쪽을 통하여 북쪽으로 전진합니다.

그 동안 우무르브로골 산 전선은 제7해병연대와 제321보병연대가 담당했습니다.

 

(제7편에서 제322보병연대와 교체되어 후퇴하는 중에 유진이 포함된 제5해병연대 장병과 만난 제1해병연대장 체스티 풀러 대령. 1944년 2월 1일자로 대령으로 진급했습니다.)

 

영어로 병과 이름만 달랑 나오면 연대(regiment)를 의미합니다.

즉 1st Marine 이면 제1해병연대, 3rd Infantry 면 제3보병연대, 5th Cavalry 면 제5기병연대입니다.

 

1944년 9월 23일 - 10월 5일 : 유진이 포함된 제5연대는 펠렐류 섬 북쪽의 은게스부스 섬을 비롯하여 펠렐리우 섬 북쪽을 점령하고, 일본군의 마지막이자 가장 강력한 저항거점인 우무르브로골 산 공격에 투입됩니다.

 

(제7편에서 나온 지도. 9월 말에서 10월 초에 걸친 제5연대의 작전을 대략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지도에서 보이지 않는 북쪽까지 모두 점령하고 돌아왔습니다.)

 

1944년 10월 12일 : 유진이 포함된 K/3/5 중대장 앤드류 할데인 대위가 전사합니다.

제3/5대대는 전력이 약화된 제2/5대대를 대신하여 140피트 고지 방어에 투입되었는데 K 중대장 할데인 대위는 아침에 중대가 담당할 지형을 숙지하기 위하여 정찰차 140피트 고지에 접근했다가 일본군 저격병에게 목슴을 잃었습니다.

이날 우무르브로골 능선 부근에서는 특히 일본군의 저격이 심하여 제5연대가 교체를 마칠 때까지 저격에 의하여 22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1944년 10월 15일 : 전력이 크게 약화된 제5연대와 제7연대는 육군 제323보병연대와 교대하여 우무르브르골 전선에서 물러나 해안방어로 돌려집니다.

 

1944년 10월 30일 : 제1해병사단은 파부부로 철수합니다.

 

1944년 11월 27일 : 미육군 제81보병사단에 의하여 펠렐리우 전투가 종식됩니다.

 

펠렐리우 전투에서 제1해병사단은 전사 1,252명, 부상 5,274 명으로 합계 6,526 명의 사상자를 기록했습니다.

렉키의 제1연대가 1,749명, 유진이 포함된 제5연대가 1,378명, 그리고, 제7연대가 1,497명의 사상자를 기록했습니다.

펠렐리우에 투입될 당시 정원 235명을 꽉 채웠던 유진의 K/3/5 중대원 중 전사하거나 부상당하여 후송되지 않은 사람은 85명 뿐이었고 7명의 장교 중 중대장 할데인 대위를 위시한 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습니다.

육군도 전사 542명, 부상 2,736명으로 합계 3,278 명의 사상자를 기록했습니다.

따라서 미군의 사상자는 해병대와 육군을 합쳐 전사 1,794명, 부상 8,552명으로 합계 9,804명입니다.

 

일본군의 전사자는 기록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으나, 약 10,900 명이 전사하고, 302명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포로들 중 19명만이 일본군이며 나머지는 모두 조선과 중국 등지에서 끌려온 노동자들이었습니다.

 

펠렐류 전투를 지휘했던 제1해병사단장 윌리엄 루퍼투스 소장은 제1해병사단이 철수한 직후인 10월 말에 심장발작을 일으켜 11월 2일에 사단장 직에서 물러납니다.

이후 미본토로 돌아가 해병대 학교의 교장이 되었으나 4개월 후인 1945년 3월 25일에 심근경색으로 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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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펠렐리우 섬의 식수 부족 현상

 

펠렐리우 섬에는 지표수가 거의 없으므로 병사들이 먹을 물은 모두 수송선단에 싣고 가야 합니다.

보급으로 이겼다는 소리를 들을만큼 보급에 신경을 썼던 미군인지라 펠렐리우 상륙작전에서도 보급계획을 빈틈없이 세웠고 거기에는 식수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펠렐리우 상륙작전을 위하여 미군은 1인당 하루에 2 갤런(약 7.6L)을 5일간 보급할 수 있는 양의 식수를 싣고 갔으며 5일 이후에는 공병부대가 해안에 증류시설을 세워서 식수를 보급할 계획이었습니다.

상륙부대는 5갤런(약 19L)짜리 깡통에 든 식수를 가지고 상륙했고 후속하는 식수는 55갤런(약 208L)짜리 드럼통으로 보급했습니다.

 

(5갤런짜리 깡통)

 

(55갤런짜리 드럼통입니다. 옛날에는 도로무깡 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빈틈없는 보급계획을 세웠지만 상륙부대는 첫 3일간 극심한 식수 부족현상을 겪었고 실제로 많은 병사들이 열사병으로 쓰러졌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몇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상륙장갑차의 손실입니다.

공식적으로 펠렐류 상륙 첫날 상실한 상륙장갑차의 숫자는 26대지만, 손상을 입거나 고장을 일으켜 일시적으로 사용불능상태에 빠진 상륙장갑차가 60대를 넘었습니다.

총 248대의 상륙장갑차중 수송능력이 제한적인 공격상륙장갑차(LVTA) 를 제외하고 200 대의 상륙장갑차 중 30% 가량이 사용불능상태였던 셈입니다.

게다가 상륙 직후부터 전투가 치열하여 상륙부대의 탄약 소모량이 예상보다 크게 늘어나는 바람에 식수를 수송할 수 있었던 상륙장갑차들이 탄약 수송에 돌려졌습니다.

 

실제로 이런 현상은 타라와 전투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상륙하자마자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서 탄약 수송만 해도 허덕거릴 지경인데 상륙장갑차는 다 부서지고..

전투기간이 짧은 대신 치열한 전투가 76시간 내내 이어졌던 타라와에서도 많은 병사가 식수 부족으로 인한 열사병으로 쓰러졌습니다.

 

이러한 식수 부족 현상은 특히 제5연대가 가장 심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보급품을 실은 상륙주정들을 통제하는 Beach Party 의 지휘관이 일찍 전사해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상륙작전에서 물자의 하역에 관계되는 조직은 Beach Party 와 Shore Party 가 있는데 Beach Party 는 수송함에 실린 화물을 해안까지 운반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면 그 보급품을 해안에서 Shore Party 가 양륙하여 필요한 곳에 쌓아두거나 전선으로 보내주지요.

따라서 Beach Party 는 대부분 해군으로 이루어져 있고 해군 장교가 지휘관이며 Shore Party 는 지상군(해병대나 육군)으로 이루어져 있고 지휘관도 지상군 장교입니다.

 

제5연대의 보급을 담당했던 Beach Party 의 지휘관은 상륙 작전 초기에 전사했고 뒤이은 후임자도 곧 일본군의 저격으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Shore Party 의 지휘관인 제5연대의 보급참모가 상륙 당일 오후 늦게까지 Beach Party 를 같이 지휘해야 했기 때문에 작업의 효율이 떨어졌습니다.

 

일본군의 전술도 한몫했습니다.

해병대의 보급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숙지하고 있던 일본군은 보급품을 실은 상륙장갑차의 격파에 가장 높은 우선순위를 두고 포격을 가하여 파괴하거나 손상시켰으며 최소한 상륙장갑차의 활동을 크게 제약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제5연대는 부상자를 내려놓는 위치를 잘못 표시하여 부상자를 싣고 온 상륙장갑차가 가뜩이나 혼잡한 해안에서 여기저기 헤매는 현상까지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표지는 저녁 늦게서야 고쳐졌습니다.

 

이런 여러 문제와 더불어 펠렐리우 섬의 해병대를 괴롭혔던 문제는 식수의 질이었습니다.

식수를 담았던 55갤런 짜리 드럼통은 기름을 담았던 통인데 제대로 세척이 안되고 안쪽이 녹슬어서 식수를 컵에 부으면 유막이 둥둥 뜨고 마시고 나면 녹이 마치 커피가루처럼 남았다고 합니다.

유진의 책에 보면 유진의 동료 중 한 사람은 식수가 오염된 원인이 자신이 파부부 섬에서 드럼통을 닦을때 농땡이 부린 탓이라고 자책합니다.

물론 그것도 일부는 맞는 소리지만 가장 큰 책임은 아무래도 드럼통의 세척 상태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식수를 채워버린 보급장교에게 있다고 봐야겠지요.

기름섞인 식수 이야기는 해병대 공식전사, 렉키의 책, 유진의 책에 모두 나오며 유진은 기름섞인 식수를 마시고 복통으로 크게 고생합니다. 

퍼시픽에서는 기름섞인 식수 문제는 다루지 않더군요.

 

(제5편에서 나온 장면. 파부부에서 열심히 드럼통을 닦고 있는 해병대원들)

 

이러한 식수 문제는 공병대가 해안 부근에서 우물을 파서 물을 확보하면서 완화되었고 증류시설이 가동을 시작하면서 해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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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펠렐리우 상륙

 

미제1해병사단은 1944년 9월 15일 아침에 팔라우 제도의 펠렐리우 섬에 상륙했습니다.

상륙을 앞두고 구형전함 5척, 중순양함 4척, 경순양함 4척, 구축함 14척으로 이루어진 제시 올덴도프 소장의 포격부대가 9월 12일 오전 5시 30분부터 3일간 16인치 포탄 519발, 14인치 포탄 1,845발, 8인치 포탄 1,427발, 6인치 포탄 1,020발, 5인치 포탄 12,937 발 등 총 2,255톤의 포탄을 퍼부었으나 일본군의 방어진지를 무력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상륙해안은 비행장이 자리한 펠렐리우 섬 남서쪽 해안으로 총 길이가 2km 정도였으며 북쪽으로부터 차례로 화이트1, 2, 오렌지1,2,3 으로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최초 상륙부대는 총 5개 대대로서 북쪽으로부터 제3/1대대, 제2/1대대, 제1/5대대, 제3/5대대 그리고 제3/7대대 순이었습니다.

렉키 이병은 제2/1대대 소속이니까 화이트2, 유진 일병은 제3/5대대 소속이니까 오렌지2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펠렐리우 상륙작전 상황도. 윗쪽의 화살표 머리가 렉키 이병이 상륙한 지역, 밑의 화살표가 유진 일병이 상륙하고 이동한 경로입니다. 비행장 북쪽의 화살표와 자동차 표시는 일본군 전차부대의 역습 경로입니다.) 

 

상륙해안에는 일본군의 방어진지가 상당히 많이 살아남아서 상륙하는 병력들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상륙 자체에 큰 혼란은 없었으나 일부 병력들은 자기 해안이 아닌 곳에 상륙하여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제5편에서 보면 L/3/7 중대 소속의 해병대원 한명이 자신의 상륙해안보다 북쪽인 오렌지2 해안에 상륙하여 제3/5대대원에게 여기가 제3/7대대냐고 물어봅니다.

Love 중대가 L 중대지요.

그러자 그 제3/5대대원이 오른쪽(=남쪽)인 오렌지3 해안으로가라고 말합니다.

 

(여기가 제3/7대대냐고 물어보는 L/3/7 중대 소속의 해병대원에게 오른쪽인 오렌지3 해안으로 가라고 이야기하는 제3/5대대의 해병대원)

 

(제3/5대대의 해병대원에게서 오른쪽에 있는 오렌지3 해안으로 가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L/3/7 중대 소속의 해병대원)

 

(C8C8 거리면서 일본군의 총탄을 뚫고 오렌지3 해안으로 향하는 L/3/7 중대 소속의 해병대원. 무사히 잘 갔으려나..)

 

일본군은 오후 5시경에 13대의 전차와 1개 중대의 보병을 동원하여 제2/1대대와 제1/5대대의 경계선을 공격해 왔습니다.

일본군 전차 지휘관은 평탄한 비행장에 들어서면서 해병대의 선두와 마주치자 보병들을 떼어놓고 고속으로 해안에 있는 제2/1대대 본부를 향하여 공격했습니다.

이것은 훌륭한 전술로서 만약 일본 전차가 보병과의 합동작전을 고집했다가는 당시 분대당 1문 꼴로 배치되어 있던 바주카포에 의하여 일본전차는 몰살당했을 것입니다.

대신 고속으로 해병대의 방어진지를 돌파함으로써 기습효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때 일본전차의 절반 가량에는 외부에 약 8명에서 10명 가량의 일본군이 타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5연대장 해리스 대령은 일본전차의 접근이 가능한 지역에 37mm 대전차포 12문을 배치해 놓고 있었고 해안에서는 제2/1대대를 지원하던 셔먼전차 1개 소대가 급유 중이었습니다.

셔먼전차는 40m 쯤 이동한 후 일본전차를 향하여 75mm 철갑탄 사격을 가했는데 명중탄들은 모두 일본전차를 과관통하여 뒤로 통과해 버렸습니다. 

그러자 셔먼전차는 고폭탄으로 바꾸어 사격했는데 일본전차를 잡는데는 고폭탄이 훨씬 효과적이었습니다.

잠시 후 남쪽에서 제1/5대대를 지원하던 셔먼전차 1개 소대가 북상하여 일본전차 사냥에 동참하면서 일본전차는 거의 전멸했습니다.

일본전차에 의한 유일한 위협은 75mm 곡사포를 향해 달려들었던 전차 1대였는데 곡사포의 필사적인 영거리 직사로 겨우 저지했습니다.

이로써 일본전차 13대중 11대가 격파되고 2대가 달아남으로써 일본군의 역습은 실패했습니다.

일본전차에 탔던 보병도 이 과정에서 대부분 사살되었고 일본전차를 따라왔던 약 1개 중대의 보병도 해병대와의 교전에서 대부분 전멸했습니다.

 

이후로도 일본군은 오후 5시 50분, 7시 20분과 16일 새벽에 각각 2대의 탱크를 앞세운 1개 소대 가량의 부대로 해병대를 공격했습니다.

이번에 일본군들은 보병과 전차와의 합동공격을 시도했으나 해병대는 60mm 박격포와 소화기 사격으로 일본군 보병을 전차에서 분리한 후 몰살시켰고 전차는 바주카포가 처리하거나 또는 지원차 달려온 셔먼전차가 처리했습니다.

제5편에서 일본전차가 등장하는 전투는 오후 7시 20분에 유진 일병이 소속된 제3/5대대 정면을 공격해 온 일본군의 공세를 묘사한 것입니다.

 

(일본군 전차와 보병을 분리하기 위하여 유진 일병의 분대가 발사한 60mm 박격포탄이 작렬하고 있습니다.)

 

1944년 9월 15일에 실시된 펠렐리우 상륙작전에서 미제1히병사단은 상륙 첫날에만 1,111 명의 사상자를 기록했습니다.

피투성이 상륙전의 대명사인 타라와 전투에서 첫날 사상자가 약 1,500 명인 것과 비교해보면 펠렐리우 전투 또한 타라와 전투에 버금가는 처절한 전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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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중대 부르는 법

 

제5편에서 유진은 파부부 섬에서 친구인 시드니 필립스를 만납니다.

시드니와 걸으면서 이야기를 하던 유진은 시드니가 소속을 묻자 간단히

 

"K, three, five"

 

라고 대답합니다.

 

(제5편에서 친구 시드니와 나란히 걸으면서 노가리를 까는.. 것이 아니고 담소를 나누고 있는 유진 슬레지 일병)

 

여기서 K 는 중대명, 3은 대대번호, 5는 연대번호입니다.

즉 제5연대 제3대대 K 중대라는 뜻이며, 보통 K/3/5 와 같이 중간에 슬래쉬(/)를 넣어서 표시합니다.

마찬가지로 제1연대 제3대대의 화기중대 H 중대 소속인 유진의 친구 시드니 필립스가 소속된 중대는 H/3/1 중대라고 표시할 수 있습니다.

렉키 일병도 시드니와 같은 H/3/1 중대지요.

 

K/3/5 중대는 간단히 K/5 중대라고도 표시합니다.

어차피 제5연대에 K 중대는 하나밖에 없으니까요..

또한 3/5 대대라면 제5연대 제3대대라는 뜻입니다.

 

보통 제1대대는 A,B,C,D 중대, 제2대대는 E,F,G,H 중대, 제3대대는 I,K,L,M 중대로 이루어지며 이들 중 D, H, M 중대는 기관총 소대와 81mm 박격포 소대를 갖춘 화기중대입니다.

J 는 야전에서 I 와 헷갈릴 염려가 있어서 중대 표시로 잘 쓰지 않습니다.

 

이러한 중대는 보통 주어진 알파벳으로 시작되는 간단한 단어로 부릅니다.

즉 A 중대는 Able 중대, B 중대는 Baker 중대, C 중대는 Charlie 중대, D 중대는 Dog 중대..

E 중대는 Easy 중대, F 중대는 Fox 중대, G 중대는 George 중대, H 중대는 How 중대..

I 중대는 Item 중대, K 중대는 King 중대, L 중대는 Love 중대, M 중대는 Mike 중대로 부릅니다.

(도움말 주신 samuel333 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알파벳에 따른 중대 명칭에 대해 더 아시고 싶은 분은 북경곰팅 님의 블로그 를 참조하시길..)

 

유진이 처음에 파부부에 상륙하여 How 중대의 위치를 물어보지요.

바로 친구인 시드니 필립스가 소속된 H 중대를 찾으려는 것입니다.

펠렐리우 해안에서는 Love 중대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

바로 L 중대를 말하는 것이지요.

밴드오브브라더스의 이지중대가 바로 E 중대란 뜻이지요.

 

한편 이때 파부부에서 만난 유진의 친구 시드니 필립스는 행운의 추첨에 당첨되어 펠렐리우 전투에 참가하기 전에 본국으로 돌아갑니다.

 

(제5편에서 친구를 태운 전차상륙함이 떠나는 광경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유진 슬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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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병력 보충 방식

 

제5편에서는 제4편에서 바니카 섬에 입원했던 렉키 이병이 H 중대의 텐트로 돌아와 동료들과 반갑게 재회합니다.

원래 렉키 이병은 글로스터 전투부터는 H 중대가 아닌 대대본부 소속이지만 글로스터에서도 숙소는 항상 H 중대의 텐트에서 동료들과 함께 지냈고, 아무도 거기에 대해 뭐라고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동료들과 재회하여 즐겁게 이야기하는 렉키 이병)

 

렉키 이병은 바니카 섬에서의 2주일 간의 입원기간을 마치고 다시 자기 중대로 돌아와서 동료들과 즐겁게 재회했지만 만일 육군이었다면 렉키 이병의 경우는 아주 예외적인 상황이 되었을 것입니다.

해병대는 원래 몇 주 정도 입원했던 병사들이 다시 복귀할 때에는 가능한 한 원래 중대로 복귀시켜 주었고, 이는 병사들의 사기를 높게 유지하는데 굉장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육군은 그렇지 못하여 육군 병사들은 해병대의 이런 방식을 부러워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육군에서는 몇 주 입원했다가 복귀할 때에는 다른 중대, 다른 대대, 심지어는 다른 사단에 배속이 되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전우를 사귀고 분위기에 적응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결코 육군 지휘관들이 멍청해서 또는 일부러  몇 주간 입원했다가 퇴원한 병사들을 전혀 다른 부대에 배속시킨 건 아니었습니다.

그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오직 미육군만이 실시했던 독특한 병력충원 시스템 때문이었습니다.

 

해병대같이 몇 주간 입원했던 병사가 원래 자리로 복귀하려면 그 기간 동안 그 자리는 비어 있어야만 합니다.

당시 미육군 사단을 제외한 해병대 사단이나 다른 국가의 모든 사단들이 그런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육군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단들은 몇 개월 또는 1년 가까이 인원 보충을 거의 또는 전혀 받지 못한 채 전투를 치렀습니다. 

그 결과 사단의 병력이 현저히 줄어들게 되면 사단 전체가 후방 지역으로 이동하여 대량의 신병들을 보충받은 다음 훈련을 실시하고 다시 전선으로 나갔습니다.

제1해병사단도 글로세스터 전투 이후 파부부에서 쉬면서 새로 충원된 4,860 명을 현지에서 추가로 훈련시켜서 펠렐리우 전투에 투입했습니다.

 

(제5편에서 파부부 섬에서의 사격훈련 도중 안전수칙을 어긴 중위를 박살내고 있는 헤이니 중사..후덜덜..)

 

사실 제1해병사단 같은 경우는 양반이었고 동부전선에 투입되었던 독일사단 같은 경우는 사단 전력의 80% 이상을 잃고 말 그대로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상태로 후방으로 돌려져서 사단 병력의 거의 대부분을 신병으로 채우고 몇 개월간 다시 훈련한 후 전투에 재투입되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따라서 몇 주 정도 부대를 떠나 입원해도 돌아오면 자기 자리는 대부분 남아 있었지요.

 

그러나 미육군은 달랐습니다.

미육군은 병력도 마치 식량이나 유류, 탄약처럼 현지에서 끊임없이 보급하는 병역 충원 시스템을 실시했습니다.

미본토에서 육군에 징집된 병사는 훈련을 마친 후 배를 타고 유럽이나 태평양의 전선에 도착하여 군단 휘하의 신병 풀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작전 중에 병력을 상실한 사단이 마치 식량이나 탄약, 유류 보급을 요구하듯 병력을 요구하면 군단의 보급품 센터와 마찬가지 개념의 신병 풀에 들어있던 병사들이 이 요구에 따라 해당 사단으로 보충되었습니다.

이런 보충병은 주로 후방에 예비대로 빠져있던 연대에 보충되었으나 급할 때에는 한참 전투가 진행 중인 부대에 전달할 보급품을 실은 지프나 트럭을 타고 같이 도착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전투 중인 사단에 병력을 상시적으로 보충함으로써 미육군 사단들은 다른 어떤 나라의 사단들보다도 오랜 시간 동안 전장에 머물면서 지속적인 전투를 감내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신병들은 대부분 전투경험이 풍부한 고참들과 함께 전투에 참가함으로써 스스로 전장에서 생존하는 법을 익힐 떄까지 살아남을 확률이 비약적으로 높아졌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충실하기로 유명한 미육군의 기초군사훈련 과정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육군의 전사자 수를 줄이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또한 병사들에게는 포인트 제도를 도입하여 일정 점수가 되면 제대하거나 후방으로 빠져서 교관으로 근무함으로써 전장에 너무 오래 머무름으로써 생겨나는 무기력증을 예방했습니다.

 

이런 병력충원 방식은 여러 면에서 유리한 방식이었으나 문제점도 있었는데 가장 큰 것이 병력을 상시적으로 수송해야 하는 이유로 수송수요가 많이 발생하여 대량의 수송선과 트럭을 가진 미군이 아니면 도입하기 힘들었습니다.

또한 이런 방식은 각 병과의 수요 인원을 정확하게 예측하여 미리미리 필요한 병과를 필요한 숫자만큼 훈련시켜야 하는데 이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미육군은 유럽 전구에서 보병과 전차병의 수요를 잘못 예측하여 종전시까지도  전차병은 남아도는데 보병은 부족한 수급 불균형 현상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병사들 입장에서 불편한 문제가 바로 앞에서 설명한 문제로 결원이 생기면 며칠 내로 즉각 보충되기 떄문에 일주일 이상 입원한 병사들의 자리는 이미 대체 인력으로 들어찬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따라서 퇴원한 병사는 신병들과 같이 군단의 병력 풀에 들어가게 되므로 자신의 중대는 커녕 심지어는 다른 사단에 갈 확률이 높았습니다. 

 

다만 미육군 사단 중에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지원제를 고수했던 공수사단은 저런 방식을 채택하지 못하고 해병대나 다른 나라의 사단처럼 일정 기간의 전투가 끝난 후에 한꺼번에 충원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BOB 에서도 이지 중대는 노르망디 전투가 끝난 후에 영국에서 한꺼번에 신병들을 보충받지요.

반면 전쟁후반기에 들어서서 징집병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해병대는 오키나와 전투에서 병력보충 방식도 육군과 같이 전투 중에 지속적으로 신병을 보충받는 방식으로 선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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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상륙장갑차

 

퍼시픽 제5편을 보면 유진 슬레지 일병이 펠렐리우에 상륙할 때 렉키 일병이 과달카날에서 상륙할 때 탔던 차량병력상륙정(LCVP) 과는 전혀 다른 궤도달린 수륙양용의 장갑차를 타고 상륙합니다.

이것이 바로 LVT(Landing Vehicle, Tracked) 이며, 미육군 등에서는 Amphibious Tractor 의 줄임말인 Amtrac 이라고도 부르며 우리나라에서는 상륙장갑차로 번역합니다.

(제5편에서 나온 상륙장갑차)

 

상륙장갑차는 원래 늪지가 많은 플로리다 주에서 인명구조용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미국의 젊고 부유한 발명가인 도날드 뢰블링이 발명한 궤도를 갖춘 수륙양용차량입니다.

뢰블링은 1935년에 물갈퀴가 달린 궤도를 물에 뜰 수 있는 방수차체에 부착하여 수륙양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궤도차량을 만들고는 여기에다가 '앨리게이터' 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1937년에 라이프 지에 실린 앨리게이터의 사진을 보고 흥미를 느낀 해병대는 이걸 군사용으로 사용하기를 원했지만 해군의 무관심으로 관련 예산을 확보하는데 실패합니다.

그러다가 유럽에서 전쟁이 터진 후에야 간신히 예산을 획득한 해병대는 1940년 1월에 뢰블링과 앨리게이터를 개량한 상륙용 궤도차량을 개발하기로 계약을 체결하고, 1941년 7월부터 양산에 들어갔는데 이게 바로 LVT(1) 입니다.

 

이 LVT(1)은 1942년 8월의 과달카날 상륙작전에 최초로 투입되었지만 그때는 병력상륙용이 아니라 물자수송용으로만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과달카날 상륙작전 당시 옵저버로 참가했다가 상륙장비로서 상륙장갑차의 가능성을 꿰뚫어 본 제2해병사단의 작전참모 쇼업 중령은 타라와 상륙작전을 계획하면서 최초로 125대의 상륙장갑차를 상륙작전에 투입합니다.

타라와 상륙작전은 그야말로 전사에 길이 남을 피투성이의 상륙작전이었지만 그나마 상륙장갑차가 없었다면 상륙작전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을 것이라는게 타라와 작전의 교훈을 도출하기 위한 해군과 해병대의 공동 회의에서 나온 결론이었습니다. 

이후 상륙장갑차는 개량을 거듭하면서 상륙작전의 총아로 자리잡게 되었고, 현재도 우리나라를 비롯한 대부분 국가의 해병대가 LVT 의 직계 후손인 AAAV 등의 상륙장갑차를 대량으로 운용하고 있습니다.

 

퍼시픽 5편에서 나온 상륙장갑차는 개량형인 LVT(2) 로서 길이 8m, 폭 3.3mm, 승무원 3명, 적재량 3톤 또는  24명, 출력 100마력, 속력 수상 5.4노트, 지상 40km/hr, 항속거리 수상 140km, 육상 240km, 무장 50구경(12.7mm) 기관총 1정, 30구경(7.62mm) 기관총 1정입니다.

 

(제5편에서 잘 보면 왼쪽 기관총과 오른쪽 기관총이 다르다는 것이 보일 겁니다. 구별이 되시는지요..이거 구별되면 군필, 아니면 미필?ㅋㅋ..)

 

기왕이면 상륙장갑차에다가 상륙한 보병을 엄호하는 기능을 추가하면 어떨까요?

이런 생각으로 만든 것이 바로 LVT(1)을 개량한 LVT(A)1 입니다.

이것은 LVT(1)의 수송기능을 상당부분 희생하는 대신 37mm 포를 장착한 포탑을 얹은 것입니다.

LVT(A)1 의 승무원은 6명, 무장은 37mm 포 1문과 30구경(7.62mm) 기관총 3정입니다.

 

(뒷쪽에 화살표로 표시된 포탑을 얹은 LVT(A)1 이 보이지요?)

 

이런 LVT(A)1 은 원래 수송용 상륙장갑차보다 먼저 해안에 도달하여 수송용 상륙장갑차들이 안전하게 해안에 도착할 수 있도록 외곽 방위선을 편성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원래 이러한 LVT(A)1 들은 상륙제1파의 선두에서 가장 먼저 상륙하며, 수송용 상륙장갑차들은 그 뒤를 따르는 것이 보통입니다.

실제로 펠렐리우 전투에서도 LVT(A)1 이 수송용 상륙장갑차보다 먼저 상륙했습니다.

드라마에서는 수송용 상륙장갑와 거의 평행하게 달리는 것처럼 나오지요.

 

상륙장갑차의 단점으로는 수상속력이 차량병력상륙정같은 상륙주정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점이 가장 컸습니다.

 

초기형 상륙장갑차의 또다른 단점 하나..

LVT(1), LVT(2), LVT(3) 는 적재함에 따로 문이 없어서 내릴 때 옆으로 뛰어내려야 합니다.

평소라면 큰 상관은 없지만 적의 총탄이 빗발치는 해안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요.

 

(LVT 에서 내리다가 재수없으면 이런 사태가..)

 

그래서 개량형인 LVT(4) 에서는 적재함 뒷쪽에 문을 달아서 병력들이 뒤로 내릴수 있도록 했습니다.

LVT(4) 는 1943년 12월부터 생산이 개시되어 펠렐리우 전투에도 투입되었습니다.

그러나 유진이 탄 상륙장갑차는 구형인 LVT(2)였기 때문에 병력들이 옆으로 뛰어내려야 했지요.

렉키가 탔던 상륙장갑차는 뒷쪽에 문이 달린 신형 LVT(4) 였으나 앞에서 기관총을 맡고 있던 렉키 이병은 상륙장갑차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하여 상륙장갑차의 옆으로 뛰어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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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파부부 섬과 포인트 제도

 

글로스터 지역을 비롯하여 뉴브리튼 섬의 절반을 점령하고 육군제40사단에게 방어를 인계한 제1해병사단은 1944년 4월 26일부터 5월 4일에 걸쳐 과달카날 동북부에 있는 러셀 제도의 파부부 섬으로 이동합니다.

 

과달카날에는 잘 준비된 주둔지가 있었으나 남태평양 해역군의 해병대를 지휘하던 가이거 해병소장은 제1해병사단이 과달카날에 갔다가는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하역작업에 인부처럼 동원될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여 파부부 섬으로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원래는 제1해병사단이 도착하기 전에 제15해군건설대대가 막사나 식당, 기타 편의시설 등을 건설할 예정이었으나 파부부 섬 건너편의 바니카 섬에 1,500 병상을 갖춘 병원을 짓는데 예상보다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 막상 제1해병사단이 도착했을 때에는 파부부 섬에 정글과 늪지만 있었다고 합니다.

 

(러셀 제도의 파부부 섬. 남동쪽에는 과달카날 섬이 있고, 북서쪽으로는 차례로 뉴조지아 섬, 부겐빌 섬을 거쳐 글로스터 전투가 벌어졌던 뉴브리튼 섬이 있습니다.)

 

과달카날과 글로스터라는 힘든 전장을 거친 제1해병사단 장병들의 사기와 체력이 저하되자 해병대 사령부에서는 1944년 7월 말에 새로 4,860명의 병력을 제1해병사단에 증원합니다.

이에 따라 제1해병사단 장병들 중 24개월 이상의 근무경력을 가져서 과달카날과 글로세스터 전투에 모두 참가했던 병력 중 약 절반이 본토로 돌아가게 됩니다.

 

(본토로 돌아갈 행운의 병사를 추첨하는 장면. 원작에 보면 렉키 이병은 자신과 처클러같이 징계를 먹은 병사들은 아예 철모 속에 이름 자체를 써넣지 않았을 것이라고 의심합니다.)

 

제가 추첨장면을 보면서 한가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던 점은 엄연히 포인트 제도가 있는데 왜 굳이 추첨이라는 방식을 통하여 미본토로 돌아갈 병사를 뽑았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해병대나 육군의 포인트 제도는 병사들이 전장에 지나치게 오래 머무름으로써 나타나는 무기력증을 예방하면서 객관적인 방법으로 병역을 마치고 귀향할 병사를 정하기 위하여 도입된 제도입니다.

기본적으로 군대에 복무한 1개월당 1점의 포인트가 주어지며 해외 파병의 경우에는 매달 1점이 가산됩니다.

또한 과달카날 전투나 글로스터 전투같이 종군휘장이 주어지는 전역(Campaign)에 참가하면 5점이 추가되고, 훈장을 받을 경우 다시 5점이 가산됩니다.

이런 식으로 계산하여 포인트가 특정 점수에 달하면 병역을 마치고 귀향하게 되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에는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주로 85점 정도를 획득하면 귀향할 수 있었습니다.

주로 전략폭격에 종사했던 미육군항공대 병사들도 일종의 포인트 제도가 있었는데 서유럽같은 경우 25회 출격을 마치면 병역을 마치고 귀향할 수 있었고, 상대적으로 위험이 덜했던 지중해 전구에서는 50회의 출격을 달성해야 병역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파부부 섬에서의 추첨 상황은 렉키의 책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나는만큼 분명한 사실인 것 같은데 왜 포인트 제도를 적용하지 않고 추첨으로 귀향할 병사를 뽑았는지에 대해서는 특별한 설명이 없더군요.

 

그리고 이때 제1해병사단에 새로 증원된 병력들 중 일부는 해병대 사상 최초로 징집병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943년까지 고집스레 지원제를 유지하던 해병대도 조직의 급속한 팽창에 따른 병력 소요를 지원병으로만 충당하지 못하고 결국 이때부터 징집된 병력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반면 해병대와 같이 지원제였던 공수사단은 종전시까지 지원제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펠렐리우 전투 이후 퍼시픽 후반기의 주인공을 맡게 되는 유진 슬레지 일병도 이때 파부부 섬에 증원된 병력 중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유진 일병은 징집병이 아니라 지원병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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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글로스터 전투

 

1943년 12월 26일, 제1해병사단은 뉴브리튼 섬 서부의 글로스터 지역에 상륙작전을 실시합니다.

 

(제4편에서 항공모함을 동반하여 글로스터로 향하는 미함대의 웅장한 위용..그러나..뻥입니다요~~. 글로스터 지역은 미군이 이미 장악한 핀샤펜 지역 및 부겐빌 섬과 지척이라 항공지원은 오로지 육상에서 출격한 항공기들이 전담했고, 항공모함은 정규항모든, 경항모든, 호위항모든 1척도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렉키 이등병이 포함된 제1해병사단 제1연대 제2대대는 글로스터 지역에 상륙한 제1해병사단 주력과 달리 댐피어 해협 대안인 타우알리 북쪽 해안에 상륙하여 해안을 따라 나있는 오솔길을 차단함으로써 남쪽으로부터 올라가는 일본군의 증원 시도를 차단하고, 나중에 글로스터 지역에서 남쪽으로 달아나는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작은 화살표가 렉키 이병이 상륙한 지역, 큰 화살표가 제1해병사단 주력이 상륙한 지역입니다.)

 

과달카날에서 호주로 철수할 당시만 해도 일등병이던 렉키는 호주에서 군기위반으로 징계를 받아 이등병으로 강등되고, 벌금 50달러와 영창 10일을 선고받지만 영창은 4일 만에 플려납니다.

징계를 받게 된 사유는 제3편에서도 대략적으로 나오지만 실상은 전혀 관계없는 일이지요..

사실상 제3편은 거의 픽션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참고로 과달카날에서 상병으로 진급했던 렉키 친구 '처클러' 도 이때 같이 걸려서 일등병으로 강등되고, 벌금 50달러를 선고받지만 영창만은 피했습니다.

 

이후 렉키 이병은 제2대대의 화기중대인 H중대를 떠나 제2대대 정보참모 휘하로 들어갑니다.

제2대대의 정보참모가 바로 제4편에서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렉키 이병의 보관함을 뺏어서 렉키 이병이 죽이니 살리니 난리치던 그 중위입니다.

사실 말이 정보참모지 전장에 나온 대대에서 따로 정보참모가 펜대 굴리고 서류 업무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정보참모의 주요 임무는 대대의 정찰 임무와 지도 작성이었습니다.

따라서 렉키 이병도 상륙과 동시에 정찰대의 일원으로 제2대대에서 가장 많은 정찰활동에 참가하면서 대대 전체를 통틀어 제일 고되고 위험한 임무를 맡아 고생하게 됩니다.

 

제2대대가 점령한 지역에서 정찰대끼리의 소규모 전투를 제외하고 유일한 큰 전투가 바로 1943년 12월 30일 새벽에 실시된 일본군의 공격입니다.

일본육군 보병제51연대 제1대대 제3중대 및 제4 중대원 116명으로 이루어진 병력이 12월 30일 새벽 1시 55분부터 아침 7시까지 제2대대에서 가장 돌출한 지역을 방어하던 G 중대의 방어선에 4차례의 돌격을 시도했다가 89명이 전사하고, 5명이 포로가 되는 등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공격에 실패합니다.

당시 제2대대의 병력이 약 1,200 명이고, 지원병력을 포함하여 약 1,500 명이 지키는 교두보를 불과 116명이 공격한 것이었지요.

제2대대에서는 7명이 전사하고 17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글로스터 전투에서 제1해병사단 제1연대 제2대대의 전체적인 전투경과에 대해서는 여기를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제4편에서 무리한 공격 끝에 전사한 일본군 시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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