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오키나와 전투

 

오키나와 전투는 태평양 전쟁 최후이자 최대의 격전입니다.

공격측인 미군의 병력은 지상군인 제10군의 병력만 6개 사단에 18만명이 넘었으며 방어측인 일본군의 병력도 10만에 가까웠습니다.

 

제10군은 1945년 4월 1일에 오키나와 중서부의 하구시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상륙한 사단은 4개 사단으로 북쪽에서부터 제해병6사단, 유진이 포함된 제1해병사단, 제7보병사단, 제96보병사단 순이었습니다.

제27보병사단은 예비대였고, 제77보병사단은 오키나와 서쪽의 게라마 열도에 상륙한 상태였습니다. 

 

제6해병사단은 오키나와 북부를 공격했고, 제1해병사단은 오키나와 중부, 그리고, 제7 및 제96보병사단은 오키나와 남부로 향했습니다.

일본군의 주력이 오키나와 남부에 있었기 때문에 오키나와 중부를 공격한 제1해병사단과 북부를 공격한 제6해병사단은 4월 중에 대부분 작전을 완료했습니다.

 

그러나 남쪽으로 진격했던 제7보병사단과 제96보병사단은 일본군의 엄청난 저항에 부딪혀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급기야 4월 18일에 예비대인 제27보병사단이 투입되었으나, 제27사단은 4월 19일에 실시된 슈리 방어선에 대한 공격에서 괴멸적인 타격을 받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중부 오키나와를 일찌감치 점령하고 비교적 한가롭게 지내던 제1해병사단에게 제27보병사단과 교대하여 슈리 방어선을 공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집니다.

이 명령에 따라 제1해병사단은 1945년 5월 1일에 슈리 방어선에 도착하고, 며칠 후 북부 오키나와의 점령을 마친 제6해병사단도 슈리 방어선 전투에 투입됩니다.

제1해병사단의 도착에 따라 큰 피해를 입은 제27보병사단은 후방으로 돌려져서 경비 및 잔적소탕 임무를 맡게 됩니다.

 

(오키나와 전투 상황도. 화살표 머리 부분이 유진이 포함된 해병제1사단이 상륙한 하구시 해안)

 

태평양전쟁 후반기의 다른 전투와 달리 오키나와의 일본군은 숫자도 많고 철저하게 요새화 된 진지에 의지했을 뿐 아니라 포병 전력도 막강하고 포병들의 훈련 수준도 높았으며 포탄도 충분히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전황이 악화됨에 따라 필리핀으로 보내려던 일본군 포병이 오키나와에서 발이 묶이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미군이 오키나와 전투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일본군의 강력한 방어진지와 더불어서 5월 이후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서 공격측인 미군에게 큰 부담을 주고 전선에 대한 보급을 곤란하게 만들었습니다.

 

오키나와 전투는 공식적으로는 1945년 6월 22일에 끝났지만 이후로도 소탕전은 6월말까지 이어졌습니다.

실제로 6월 23일에서 30일 사이에 전사한 일본군이 8,975명, 포로가 3,809명(이중에서 907명은 노동자)이나 됩니다.

 

오키나와 전투는 미군이 태평양 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전투입니다.

1945년 4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 미군 전사자는 육군 4,582명, 해병대 2,792명, 그리고 해군 4,907명 등 총 12,281명에 달합니다.

해군 전사자 중 절반 가량은 일본군의 가미카제 자살공격기에 의하여 희생된 것입니다.

 

오키나와에 투입된 미군 중에서도 특히 유진이 포함된 제1해병사단의 K/3/5 중대는 피해가 컸던 중대에 속합니다.

4월 1일 상륙 당시 K/3/5 중대의 병력은 정수를 꽉 채운 235명이었습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이전의 전투와 달리 해병대도 육군처럼 보충병을 배로 실어와서 현지에서 즉각 투입하는 방식을 채택하여 오키나와 전투 기간 중에 원래 병력보다 더 많은 250 명이 K/3/5 중대에 증원되었습니다.

따라서 실로 연인원 485 명이 K/3/5 중대 소속으로 오키나와 전투를 치렀습니다.

이들 중 오키나와 전투가 끝날 때까지 전사하거나 부상당하거나 병에 걸려서 후송된 인원이 435명에 달합니다.

결국 오키나와 전투가 끝났을 때 K/3/5 중대에 남아있던 병력은 불과 50명이었으며 이들 중 4월 1일에 상륙했던 병력은 유진과 스내푸 등을 포함한 26명이었습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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