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병력 보충 방식

 

제5편에서는 제4편에서 바니카 섬에 입원했던 렉키 이병이 H 중대의 텐트로 돌아와 동료들과 반갑게 재회합니다.

원래 렉키 이병은 글로스터 전투부터는 H 중대가 아닌 대대본부 소속이지만 글로스터에서도 숙소는 항상 H 중대의 텐트에서 동료들과 함께 지냈고, 아무도 거기에 대해 뭐라고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동료들과 재회하여 즐겁게 이야기하는 렉키 이병)

 

렉키 이병은 바니카 섬에서의 2주일 간의 입원기간을 마치고 다시 자기 중대로 돌아와서 동료들과 즐겁게 재회했지만 만일 육군이었다면 렉키 이병의 경우는 아주 예외적인 상황이 되었을 것입니다.

해병대는 원래 몇 주 정도 입원했던 병사들이 다시 복귀할 때에는 가능한 한 원래 중대로 복귀시켜 주었고, 이는 병사들의 사기를 높게 유지하는데 굉장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육군은 그렇지 못하여 육군 병사들은 해병대의 이런 방식을 부러워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육군에서는 몇 주 입원했다가 복귀할 때에는 다른 중대, 다른 대대, 심지어는 다른 사단에 배속이 되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전우를 사귀고 분위기에 적응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결코 육군 지휘관들이 멍청해서 또는 일부러  몇 주간 입원했다가 퇴원한 병사들을 전혀 다른 부대에 배속시킨 건 아니었습니다.

그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오직 미육군만이 실시했던 독특한 병력충원 시스템 때문이었습니다.

 

해병대같이 몇 주간 입원했던 병사가 원래 자리로 복귀하려면 그 기간 동안 그 자리는 비어 있어야만 합니다.

당시 미육군 사단을 제외한 해병대 사단이나 다른 국가의 모든 사단들이 그런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육군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단들은 몇 개월 또는 1년 가까이 인원 보충을 거의 또는 전혀 받지 못한 채 전투를 치렀습니다. 

그 결과 사단의 병력이 현저히 줄어들게 되면 사단 전체가 후방 지역으로 이동하여 대량의 신병들을 보충받은 다음 훈련을 실시하고 다시 전선으로 나갔습니다.

제1해병사단도 글로세스터 전투 이후 파부부에서 쉬면서 새로 충원된 4,860 명을 현지에서 추가로 훈련시켜서 펠렐리우 전투에 투입했습니다.

 

(제5편에서 파부부 섬에서의 사격훈련 도중 안전수칙을 어긴 중위를 박살내고 있는 헤이니 중사..후덜덜..)

 

사실 제1해병사단 같은 경우는 양반이었고 동부전선에 투입되었던 독일사단 같은 경우는 사단 전력의 80% 이상을 잃고 말 그대로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상태로 후방으로 돌려져서 사단 병력의 거의 대부분을 신병으로 채우고 몇 개월간 다시 훈련한 후 전투에 재투입되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따라서 몇 주 정도 부대를 떠나 입원해도 돌아오면 자기 자리는 대부분 남아 있었지요.

 

그러나 미육군은 달랐습니다.

미육군은 병력도 마치 식량이나 유류, 탄약처럼 현지에서 끊임없이 보급하는 병역 충원 시스템을 실시했습니다.

미본토에서 육군에 징집된 병사는 훈련을 마친 후 배를 타고 유럽이나 태평양의 전선에 도착하여 군단 휘하의 신병 풀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작전 중에 병력을 상실한 사단이 마치 식량이나 탄약, 유류 보급을 요구하듯 병력을 요구하면 군단의 보급품 센터와 마찬가지 개념의 신병 풀에 들어있던 병사들이 이 요구에 따라 해당 사단으로 보충되었습니다.

이런 보충병은 주로 후방에 예비대로 빠져있던 연대에 보충되었으나 급할 때에는 한참 전투가 진행 중인 부대에 전달할 보급품을 실은 지프나 트럭을 타고 같이 도착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전투 중인 사단에 병력을 상시적으로 보충함으로써 미육군 사단들은 다른 어떤 나라의 사단들보다도 오랜 시간 동안 전장에 머물면서 지속적인 전투를 감내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신병들은 대부분 전투경험이 풍부한 고참들과 함께 전투에 참가함으로써 스스로 전장에서 생존하는 법을 익힐 떄까지 살아남을 확률이 비약적으로 높아졌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충실하기로 유명한 미육군의 기초군사훈련 과정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육군의 전사자 수를 줄이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또한 병사들에게는 포인트 제도를 도입하여 일정 점수가 되면 제대하거나 후방으로 빠져서 교관으로 근무함으로써 전장에 너무 오래 머무름으로써 생겨나는 무기력증을 예방했습니다.

 

이런 병력충원 방식은 여러 면에서 유리한 방식이었으나 문제점도 있었는데 가장 큰 것이 병력을 상시적으로 수송해야 하는 이유로 수송수요가 많이 발생하여 대량의 수송선과 트럭을 가진 미군이 아니면 도입하기 힘들었습니다.

또한 이런 방식은 각 병과의 수요 인원을 정확하게 예측하여 미리미리 필요한 병과를 필요한 숫자만큼 훈련시켜야 하는데 이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미육군은 유럽 전구에서 보병과 전차병의 수요를 잘못 예측하여 종전시까지도  전차병은 남아도는데 보병은 부족한 수급 불균형 현상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병사들 입장에서 불편한 문제가 바로 앞에서 설명한 문제로 결원이 생기면 며칠 내로 즉각 보충되기 떄문에 일주일 이상 입원한 병사들의 자리는 이미 대체 인력으로 들어찬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따라서 퇴원한 병사는 신병들과 같이 군단의 병력 풀에 들어가게 되므로 자신의 중대는 커녕 심지어는 다른 사단에 갈 확률이 높았습니다. 

 

다만 미육군 사단 중에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지원제를 고수했던 공수사단은 저런 방식을 채택하지 못하고 해병대나 다른 나라의 사단처럼 일정 기간의 전투가 끝난 후에 한꺼번에 충원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BOB 에서도 이지 중대는 노르망디 전투가 끝난 후에 영국에서 한꺼번에 신병들을 보충받지요.

반면 전쟁후반기에 들어서서 징집병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해병대는 오키나와 전투에서 병력보충 방식도 육군과 같이 전투 중에 지속적으로 신병을 보충받는 방식으로 선회합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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