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이었던 1941년 12월 7일 오전 7시 55분(현지 시각), 6척의 일본항공모함에서 출격한 360대의 함재기들이 미태평양함대의 모항인 진주만을 공격했다.

선전포고도 없이 이루어진 기습으로 미태평양함대는 치명적 타격을 받았고 이후 일본군은 태평양함대의 방해를 받지 않은 채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말레이, 싱가포르, 필리핀 및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석권함으로써 남방작전의 제1단계를 완수했다.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은 2년 3개월에 걸친 중립을 깨고 연합국으로 참전했다.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서유럽을 거쳐 소련, 북아프리카, 그리고 중국에서 진행되던 전쟁은 이제 세계대전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세계적 규모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진주만 기습 이틀 전에 소련군이 모스크바의 코 앞까지 다가온 독일군을 저지함으로써 조국을 구했다.

미국의 참전과 소련의 생존은 연합군의 승리에 기여한 결정적 요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승부는 1941년 12월 첫째주에 결정되었다.  

 

1. 팔굉일우(八紘一宇)

 

미국은 1853년에 페리 제독을 보내어 도쿠가와 막부의 성립 이래 250년간 쇄국정책을 유지하고 있던 일본을 개항시켰다.

일본은 개항 이후 미국이 남북전쟁에 휩쓸리고 다른 열강들이 중국에 집중하면서 생긴 힘의 공백을 이용하여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고 근대화에 성공했다.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1895년에 벌어진 청일전쟁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확장에 나섰으며 1905년에는 서구 열강 중 하나인 러시아와 맞붙어 승리함으로써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열강들의 말석에 자리를 얻었다. 

 

(쓰시마 해전 당시 기함 미카사 함상에서 지휘하는 도고 제독. http://en.wikipedia.org/wiki/Battle_of_tsushima)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미국은 일본을 지지했다.

러일전쟁 때 미국 여론은 압도적으로 일본을 편들었으며 테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이 쓰시마 해전에서 승리하자 시의적절하게 종전을 주선하여 국력의 한계에 달해있던 일본의 패배를 막아주었다.

이후 일본은 미국의 묵인 하에 1910년에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미국과 같은 편에서 싸웠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처리를 두고 일본과 미국은 대립했으나 일본이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얻은 산뚱반도를 포기하고 미국은 일정기간 준비를 거쳐 필리핀을 독립시키기로 타협점을 찾았다.

워싱턴 군축조약과 그에 따른 태평양의 비요새화 협정도 양국의 해군장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나 미국과 일본의 충돌 가능성을 줄이고 태평양의 긴장을 완화했다.

 

경제적으로도 미국과 일본은 이해가 일치했다.

미국인들은 일본의 수출품인 명주실을 좋아했으며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고철과 공작기계,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석유를 수입했으므로 교역은 양국에게 모두 이익이었다.

미국 내에는 일본과의 전쟁을 바라는 유력한 세력이나 이해관계가 없었으며 일본 또한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은 열강 중에서 미국을 가장 친근하게 생각했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양국의 군사전략가들은 상대와의 충돌을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으나 일반 국민들의 정서는 달랐다.

적어도 1920년대까지 평균적인 미국인이나 일본인들 중에서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처절한 3년 8개월 간의 전쟁을 치르면서 서로에 대한 적개심이 극에 달하여 미국이 폭격을 가하여 일본의 도시들을 초토화시키고 원자폭탄을 2발이나 떨어뜨리게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이렇듯 오랜 기간 사이가 좋았던 미국과 일본을 틀어지게 만든 건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 차이였다.

미국은 중국의 통일과 주권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했으나 일본은 중국을 자국의 식민지로 삼고자 했다.

 

태평양전쟁에 패한 후 일본은 좁은 국토에 인구 과잉이라 식량과 공간이 부족하여 식민지로서 중국을 원했다고 변명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분명히 일본은 캘리포니아 주만한 국토에 7,300만에 달하는 인구를 품고 있었으며 산지가 많아서 식량의 자급자족이 어려웠다. 

그러나 일본은 당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된 공업국가였으며 공업국이 식량을 수입하여 충당하는 일은 흔한 일로서 식량의 자급자족이 어렵다는 사실이 식민지를 원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과밀에 따른 공간 부족도 마찬가지다.

1931년에 일본이 만주국을 만든 이후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기까지 6년간 만주국으로 이주한 일본인은 30만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들은 대부분 교사, 기술자, 상인, 철도 관리자 등 중산층 이상의 계층이었다.

일본보다는 오히려 중국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만주국으로 이주했다.

 

다른 식민지도 비슷하여 조선을 비롯한 식민지로 이주한 일본인들은 일정 수준 이상의 학력이나 기술 또는 자본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즉 당시 식민지로 이주한 일본인들은 중산층 이상의 기반을 가진 사람들로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 식민지로 이주하여 지배층을 형성했다.

일례로 1945년에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났을 때 미군이 진주했던 남한 지역의 내과의사 3,000 명 가운데 150명만 한국인이었고 나머지는 일본인이었다.

 

일본의 변명대로 과밀한 본토에서 고생하던 일본인들이 숨 쉴 구멍을 찾아 식민지를 획득했다면 과밀의 직접적인 피해자인 하층민들이 대량으로 이주했을 것이다.

또한 일본이 점령했던 자바 섬의 인구 밀도는 일본보다 훨씬 높았다는 점을 보아도 과밀로 인한 공간 부족 때문에 식민지가 필요했다는 설명은 설득력을 잃는다.

 

일본은 인구 밀도와는 상관없이 식민지 쟁탈전에 뒤늦게 뛰어든  또 하나의 제국주의 국가로서 서양 열강들이 지난 몇 세기에 걸쳐 했던 것처럼 자국의 산업을 위한 원료 생산지이자 자국 상품의 소비처로서 식민지를 원했던 것이다.

문제는 일본이 중국을 식민지로 삼고자 했을 때에는 그런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미 충분한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유럽 열강들과 본토 안에 광대한 미개척지와 거대한 시장을 가진 미국은 새로운 식민지를 만드는 대신 현지 주민을 대표하는 정부와 주권을 인정하면서 자국의 이익을 챙기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었으며 중국에서 그런 경향이 두드러졌다.

하지만 뒤늦게 근대화에 성공하여 제국주의의 막차를 탄 일본은 민족자결주의와 인도주의를 들먹이며 더 이상의 식민지 건설을 막으려는 서구 열강의 논리에 반발했다.

 

뒤늦게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이 서구 열강의 논리에 분개한다고 한들 정면으로 맞붙기에는 무리였다.

만일 일본이 민주주의 국가로서 국민의 뜻이 정치에 잘 반영되는 체제였다면 식민지를 획득하려고 서구 열강과 부딪히는 대신 현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세계 질서 속에서 진로를 모색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1920년대 군부에 대한 문민통제가 이루어지던 시기 일본은 식민지를 얻기 위하여 서구 열강과 대결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불행히도 일본은 민주주의 국가라고 보기에는 태생부터 군부의 입김이 너무 셌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력을 잃었다가 1920년대 후반에 회복한 일본군부는 1931년에 팔굉일우(八紘一宇)를 기치로 내걸고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건설했다.

이로써 일본은 새로운 국제 질서에 순응하여 진로를 모색하는 대신 군부에 이끌려 식민지 획득을 위하여 서구 열강과 전쟁을 불사하는 길로 들어섰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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