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일본군부와 대외정책

 

메이지 유신으로 성립되어 1945년 패전과 함께 사라진 일본제국에서 군대는 대다수 민주국가와는 다른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군부는 내각보다 권위가 높았으며 1920년대를 제외하고는 외무성을 제치고 일본의 대외정책을 사실상 결정했다.

원칙적으로 일본의 모든 남성들은 현역 2년, 예비역 10년, 합계 12년의 병역을 이수해야했다.

현역 입영률은 높지 않았으나 군대는 국민개병제를 매개로 일본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75년 당시 일본군의 복장. http://en.wikipedia.org/wiki/Imperial_Japanese_Army)

 

일본의 하층 계급에게 군대는 신분 상승의 통로이기도 했다.

1927년에 일본 장교의 30% 가 중산층 이하 계층 출신이었으며 시간이 갈수록 그 비율이 높아졌다. 

병사들은 가난한 농촌 출신이 많았다.

 

일본군 내부는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철저한 상명하복의 신분사회였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신분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능과 노력, 그리고 국가에 봉사한 기간에 따라 획득하는 계급에 의하여 신분이 결정되는 군대는 하층민 출신에게는 신세계였다.  

군대는 막부를 타도하고 신정부에 반대하는 반란을 진압하면서 일본제국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후 국민개병제를 통해 근대적인 사상과 문물, 사고 방식을 사회로 전파했다.

주로 생선과 밥을 먹던 일본인들이 고기와 빵을 먹기 시작한 것도 군대에 가서 이런 음식들을 먹어본 예비역들이 고향에 돌아와서 소개한 것이 계기였다.

일본제국 시기 군대는 가장 강력할 뿐 아니라 근대적이고 혁신적이며 선진적인 집단이었다.

 

당연히 군대는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군대의 위상이 너무 높아서 미국을 비롯한 민주주의 나라처럼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를 만들어 군대의 비리나 모순 또는 어리석은 짓을 풍자하는 만화를 그리거나 개그의 소재로 삼는 일은 상상할 수 없었다.

 

1889년에 제정된 일본제국 헌법에서 군대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일본군의 규모와 전력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은 정부가 아닌 천황에게 주어졌다.

이는 일본제국의 설계자들이 강력한 군대를 근대화된 정부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겼다는 증거로 서구 열강의 군사적 침략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군대가 폭력을 독점하는 근대 국가의 특성상 정부에 의한 통제가 이루어지지 못하면 군대가 정부를 제압하는 현상이 나타나며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제1차 세계대전까지 일본군은 정부를 사실상 쥐락펴락했다.

 

20세기 초까지 일본군은 자신이 휘두르던 막대한 권한에 걸맞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일본군은 1895년에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대만을 식민지로 획득했고, 10년 후에는 서구 열강 중 하나인 러시아와 싸워 이김으로써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열강들의 말석에 자리를 얻었다.

1910년에는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 대륙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군부는 이 시기를 전후해서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전역에서 서구 세력을 몰아내겠다는 야심을 품기 시작했으며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할 때까지 이 야심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동아시아의 독일 영토를 차지할 속셈으로 영국 및 프랑스 편으로 참전했다.

일본군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산뚱반도의 칭타오, 괌을 제외한 마리아나 제도, 캐롤라인 제도 및 마셜 제도를 장악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중국에서 힘의 공백이 발생하자 1915년 1월에 일본은 중국에 21개조 요구를 들이밀었다.

중국 대총통 위안스카이는 중국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이러한 요구에 굴복했으나 중국인들은 5.4운동으로 대표되는 격렬한 배일운동을 벌였다.

 

또한 21개조는 광범위한 지역과 분야에 걸쳐 일본의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권리를 요구함으로써 중국에 대한 미국 외교의 원칙으로 유럽 열강은 물론 일본도 동의하고 있던 문호개방(Open Door) 원칙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문호개방원칙은 중국에 진출하려는 국가들은 중국의 통일과 주권을 존중해야 하며 그 바탕 위에서는 누구도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었다.

중국에 대한 문호개방원칙이 위협받자 미국을 위시한 서구 열강도 반발했다.

 

중국인들과 서구 열강의 반발에 직면한 일본정부는 워싱턴 조약에서 21개조 요구를 거두어 들였다.

21개조 요구는 중국에서 서구 열강들을 배제하려는 일본의 야심을 처음으로 보여준 것이었으며 미국과 유럽 열강들이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일본은 적도 이북의 태평양에 있던 독일영토들을 신탁통치하게 되었다.

미국의 윌슨 행정부는 국제연맹의 이러한 결정에 반발했으나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일본은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도 전에 이 섬들을 점령했으며 자신의 전리품을 지킬 각오였다.

전쟁을 통해서만 일본을 저지할 수 있었는데 그런 이유로 전쟁을 할 수는 없었다.

 

태평양에서 실리를 거둔 일본군은 내전에 휩싸인 러시아로 눈을 돌려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과 함께 시베리아에 출병했다.

이때 일본정부가 군부에 통렬한 일격을 가했다.

1922년에 정부는 군부가 제출한 예산안을 거부해 버렸고 일본군은 시베리아에서 철병해야 했다.

 

5년 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정부의 예산안 거부는 일본제국을 통틀어 유일했던 군부에 대한 문민통제가 가능했던 시절을 상징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일본은 전쟁 특수로 호황을 누렸으며 종전 이후 국제연맹이라는 집단안전보장체제가 마련되자 일본인들은 서구의 침략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일본 역사에서 처음으로 국민들이 민주주의와 군부에 대한 민간 부문의 우위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양당제에 가까운 정치체제가 나타나고 군사비는 삭감되어 민간 부문으로 돌려졌으며 일본은 국제연맹에 가입하여 책임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했다.

 

이 시기에 일본은 유화적으로 행동했다.

일본은 1921년 - 22년에 걸친 워싱턴 조약에서 5-5-3 이라는 주력함 비율을 받아들였으며 산뚱반도를 중국에 돌려주었다.

1922년 2월 6일에는 9개국 조약에 서명했다.

여기서 일본은 미국 및 다른 7개국과 함께 중국의 영토와 주권을 존중하고 문호개방원칙을 지지하며 특권적 지위를 요구하지 않고 중국이 부당한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국의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약속했다.

1928년에는 전쟁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켈로그-브리앙 조약에 서명했다.

 

돌이켜보면 태평양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군부에 대해 문민통제를 유지하면서 양보와 타협의 정신으로 일본을 이끌던 당시의 자유주의적인 정치 세력을 고무하고 지지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당시 서구 열강에게는 그만한 지혜와 관대함, 그리고 요령이 없었으며 이는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1924년에 미국은 3년 전의 법을 더 강화한 이민제한법을 통과시켰다.

1921년의 이민제한법은 1890년 이후에 이민이 급증한 동유럽, 남유럽 및 아시아로부터의 이민을 제한하기 위하여 매년 이민을 1890년 당시 각국 출신의 3% 이내로 제한한 것이었다.

1924년의 이민법은 이 제한을 2%로 강화하면서 아시아에 대해서는 아예 이민을 금지했는데 여기에 일본이 포함된 것이었다.

일본정부는 최소한의 숫자만이라도 허용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무시당했다.

 

이민법에 일본을 예외로 두어 매년 200 명 정도만 허용했어도 좋았을 것이다.

1년에 200명이라는 한 줌도 안 되는 인원으로는 법의 실효성에 아무런 악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었지만 그것으로 일본정부는 체면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민이 전면 금지되면서 일본은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함께 남유럽이나 동유럽 국가들보다도 낮은 취급을 받은 꼴이 되었다.

비록 아시아에 속해 있지만 자국이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는 격이 다른 열강의 하나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일본인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일본인들은 분개했고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에 협조하는 대외 정책에 대한 반발이 터져나왔다.

이로써 미국은 전해인 1923년 간토 대지진 때 미국 여론이 보여준 특기할만한 동정과 재정 지원으로 우호를 돈독하게 만들었던 효과를 간단히 날려먹었다.

 

워싱턴 군축조약도 일본군부를 자극하고 자유주의적인 정부를 약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군부도 서구 열강, 특히 경제력이 월등한 미국과의 건함경쟁보다 군축조약이 일본의 안보에 이익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가 체결한 군축조약에 의하여 건조 중이던 함정이 폐기되고 해군의 전력이 제한되는 상황은 헌법이 보장해 준 군부의 특권, 즉 군대의 규모와 전력에 대하여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무너뜨렸다.

이제 정부는 필요하면 외국과의 조약을 통하여 군대의 규모와 전력을 조절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한 셈이었고 군부는 칼자루를 쥔 정부에 끌려다니게 되면서 자신들이 주도권을 쥐고 정부를 좌지우지하던 좋은 시절은 추억으로만 남게 될 것이었다. 

군부내 강경파인 군국주의자들, 특히 워싱턴 군축조약과는 직접적인 관련도 없는 육군까지 군축조약에 대하여 그토록 반발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욕망에서 군축조약을 미국과 영국이 일본을 열등한 상태로 묶어두려는 음모에 정부가 가담한 것이라고 선동하면서 일본인들의 국가적 자존심에 호소했다.

군부의 이런 시도는 다른 요인들과 맞물려 일본인들의 호응을 이끌어 내면서 정부를 약화시켰고 1931년의 만주사변을 기점으로 정부에 의한 문민통제가 끝나게 된다.

길게 보았을 때 군비 감소를 위하여 미국과 영국이 추진한 군축조약은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에게 절호의 선전거리를 제공함으로써 자유주의적인 정부를 약화시키고 군부가 다시 권력을 차지하는데 일조하는 뜻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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