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2.26사건

 

만주사변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과 일본과의 사이는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1933년에 국제연맹을 탈퇴한 일본은 1935년에 실효된 런던 군축조약에 이은 제2차 런던 군축조약에 불참함으로써 15년에 걸친 군축 시대가 끝나고 세계는 다시 건함경쟁 시대로 들어섰다.

 

일본에서는 1936년 2월 26일에 커다란 정변이 발생했다.

도쿄에 주둔 중이던 제1사단 소속 병사들을 중심으로 한 1,483명의 반란군이 수상관저, 국회의사당, 경시청, 육군성, 육상 관저, 참모본부 등 정부와 군부의 주요 기관을 점거하거나 포위했다.

반란군들은 육군 대위였던 노나카 시로, 코다 기요사다, 안도 데루조 등의 지휘에 따라 26일 오전 4시에 병영을 빠져나와 6개로 나뉘어 오전 5시부터 오카다 게이스케 총리대신, 다카하시 고레기요 대장대신, 사이토 마고토 내대신, 와타나베 죠다로 육군교육총감, 스즈키 간타로 시종장 등을 습격했다.

다카하시 대장대신, 사이토 내대신, 그리고 와타나베 교육총감은 피살되었으며 스즈키 시종장은 중상을 입었다. 

(2.26 사건에 참가한 반란군들. https://en.wikipedia.org/wiki/February_26_incident)

반란군이 들이닥칠 당시 오카다 수상은 자고 있었으며 대신 비서관이자 처남인 마츠오 렌조 대좌가 반란군에게 수상 행세를 하다가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반란군들이 마츠오 대좌를 수상으로 착각한 덕분에 수상은 반란군의 눈을 피하여 벽장에 숨을 수 있었다.

수상은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숨어 있다가 다음날인 27일 정오경 헌병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문상객으로 가장하여 반란군에 포위된 수상 관저를 탈출했다.

당시 일본육군 내에서는 황도파와 통제파의 대립이 극에 달하고 있었는데 제1사단은 황도파의 본거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1932년 2월 22일에 제1사단에게 만주로 가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제19 및 제20사단이 붙박이로 배치된 조선주둔군과 달리 관동군에는 사단이 돌아가면서 파견되었으며 제1사단의 만주 파견도 그 일환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제1사단은 러일전쟁 이후 해외로 파견된 적이 없었으므로 황도파인 제1사단의 장교들은 통제파가 자신들을 만주로 쫓아내려 한다고 판단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반란군 수괴 중 1명인 고다 대위는 150명의 병력을 이끌고 육상 관저를 포위한 후 육상 가와시마 요시유키 대장에게 자신들의 8개조 요구사항을 전달하고 쇼와 유신의 실현을 요구했다.

8가지 요구사항은 유신회천을 바라는 자신들의 뜻을 천황에게 전달할 것, 자신들이 지목한 통제파 장교들을 체포할 것,​ 황도파의 수장인 아라키 사다오 대장을 관동군 사령관에 임명할 것 등이었다.

당시 육군 요직에는 황도파가 많아서 반란군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았다.

육상 가와시마도 황도파에 가까웠다.​

반란이 실패한 것은 히로히토 천황 때문이었다.

천황은 오전 5시 40분에 첫 보고를 받았을 때부터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오전 9시에 가와시마 육상이 들어와 반란군들의 요구사항을 보고하면서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새로운 내각을 만들 것을 요청하자 천황은 반란군을 당장 진압하지 않고 자기에게 그들의 요구사항이나 읊어대느냐며 역정을 내었다.

​이들을 토벌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참모차장 스기야마 하지메 중장은 천황의 의중을 알게 되자 반란을 진압할 부대를 도쿄로 불러들이는 안을 천황에게 제출하여 승인을 받았다.

 

천황을 만나고 나온 가와시마 육상은 궁중에서 육군수뇌부를 소집하여 군사참의회를 열었다.

여기서 참모차장 스기야마 하지메 중장은 토벌을 주장했으나 황도파로서 반란군에게 동정적인 군사참의관 아라키 사다오 대장, 마사키 진자부로 대장 등이 반대했으며 특히 토벌을 책임져야 할 도쿄경비사령관 가시이 고헤이 중장도 황도파였으므로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26일 오후에는 미사키 대장이 주도하여 가와시마 육상 이름으로 5개 항을 작성하여 고시했다.

나중에 미사키 대장은 반란군의 투항을 권고하는 의도였다고 변명했는데 고시의 내용은 반란군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으며 실제로 반란군들은 이 소식을 듣고 거사가 성공했다고 기뻐했다.

더구나 오후 3시에 도쿄경비사령관 가시이 중장이 제1사단에게 반란군들이 장악한 지역을 포함한 전시 경비 명령을 내리면서 반란군들을 제1사단 보병 제1연대 지휘 하에 두었다.

이로써 반란군들은 임지를 이탈한 상태에서 벗어나 명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26일 오후 8시 40분에 살아남은 각료들이 궁중으로 들어와 회의를 열고 계엄령을 내리기로 결정했다.

경시청과 해군은 육군이 전권을 장악할 것을 두려워하여 계엄령에 반대했으나 조속한 진압을 원하는 천황의 뜻에 따라 계엄령 발동이 결정되었다.

계엄령은 27일 오전 3시에 발령되었는데 쇼와 시대 들어와서 첫 계엄령이었다.

이제 계엄사령관이 된 도쿄경비사령관 가시이 중장은 여전히 토벌을 망설였다.

실제로 가시이 중장은 계엄명령 제1호에서 반란군들을 단지 '26일 새벽에 출동한 부대' 라고 지칭함으로써 이들의 행동을 반란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사태의 진전이 느리자 천황은 짜증을 내었다.

27일 오전 8시 20분에 천황은 자신의 이름으로 반란군의 토벌을 명령하는 봉칙명령을 재가했다.

황도파인 시종무관장 혼조 시게루 대장은 반란군으로 낙인찍혀 소탕되는 상황만은 막으려고 천황에게 상주했으나 거절당했다.

27일 하루동안 천황은 혼조 시종무관장을 13번이나 불러 왜 빨리 토벌하지 않느냐고 닦달했다.​

27일 오후 12시 45분에 천황은 가와시마 육상을 불러 육군이 계속 미적거린다면 자신이 직접 근위사단을 이끌고 토벌하겠다고 말했다.

천황의 결연한 의지를 확인한 황도파는 27일 오후부터 발을 빼기 시작했다.​

마사키 대장을 비롯한 황도파 군사참의원들은 반란군이 점거하고 있던 육상관저에 들어가 원대복귀를 권했다.

28일 새벽에 반란군들은 천황이 직접 자신들을 토벌하라는 봉칙명령을 내린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28일 오후에 장교는 모두 자결하고 부사관과 병은 원대복귀시키겠다면서 자결 장소에 천황의 칙사 파견을 요청했다.

그러나 혼조 시종무관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천황은 칙사 파견을 거절했고 화가 난 반란군들은 자결 및 원대복귀 결정을 번복했다.

반란군을 토벌하라는 천황의 봉칙명령이 계엄사령부에 정식으로 도착한 것은 28일 오전 5시였다.

계엄사령관 가시이 중장은 계속 토벌을 미루면서​ 반란군과 접촉했다.

그는 일본군끼리 전투를 벌이는 불상사를 막기 위하여 자신이 직접 천황에게 쇼와유신을 받아들이도록 상주하겠다고 말했으나 스기야마 참모차장과 계엄참모가 된 전략과장 이시하라 간지 대좌가 반대하고 즉각 토벌을 주장했다.

어쩔 도리가 없게 된 가시이 중장은 마침내 28일 오후 4시에 토벌을 표명했으며 토벌 시간은 29일 오전 5시로 결정했다. 

​근위 사단을 중심으로 전차까지 포함한 약 2만명의 토벌군이 전개하여 다음날 새벽까지 반란군을 포위하고 주위 교통을 차단했다.

계엄사령부는 29일 오전 5시 10분에 토벌 명령을, 오전 8시 30분에는 공격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일선에서는 발포하지 않고 마지막으로 반란군에게 기회를 주었다.

오전 8시 55분에 라디오에서 '병사에게 고함' 이라는 제목으로 간곡하게 투항을 권유했다.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반란군 지도부는 항복을 결정하고 오후 2시까지 부사관과 병들을 원대복귀시켰다.

장교들 중 노나카 시로 대위는 자결하고 나머지 장교들은 오후 5시에 육상 관저에서 체포되면서 4일에 걸친 반란이 끝났다.

2.26사건의 처리는 엄격했다.

군사법원은 반란에 참가한 장교 중 자결한 노나카 대위를 제외한 19명 모두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13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5명은​ 종신금고형, 1명은 금고 4년형을 받았다.

기타 잇키를 포함한 민간인 5명도 처형되었다.​

반란군의 주력이었던 제3연대장은 29일 새벽에 권총자살했다.​

황도파는 몰락했다.

아라키, 마사키 등 육군참의관이던 대장 4명이 한꺼번에 옷을 벗었고, 육상 가와시마, 시종무관장 혼조도 예편되어 대장 6명이 모두 군에서 쫒겨났다.

계엄사령관 가시이 중장도 예편되었으며 반란군이 소속된 제1사단장과 근위사단장을 포함하여 3,000 명에 달하는 황도파 장교들이 강제로 예편당했다.

2.26사건 당시 관동군 헌병사령관이던 도죠 히데키는 관동군 내의 황도파 장교들을 모두 체포했다.​

황도파에서 살아남은 인물은 야마시타 도모유키 소장 정도가 유일했다.

이제 육군은 통제파의 천하가 되었다. ​

2.26사건은 군부의 쿠데타가 실패한 사건이었으나 이런 엄청난 짓을 저지르고도 군부는 세력을 잃지 않았다.

몰락한 것은 황도파 뿐으로 군부의 세력은 더 커졌다.

군부의 광기를 목격한 일본정치가들은 이후로는 감히 군부를 거스르려 하지 않았다.​

2.26사건으로 무너진 오카다 내각의 뒤를 이어 1936년 3월 5일 히로타 내각이 성립되었다.

히로타 내각에서 육군은 1호 군비를 승인받았다.

이는 1937년 - 42년까지 6년 동안 41개 사단과 142개 항공중대를 증강한다는 야심찬 것이었다.

런던 군축조약의 실효로 군축의 짐을 벗어던진 해군 또한 제3차 보충계획을 결정하여 향후 4년 동안 전함 야마토와 무사시를 포함한 함정 66척을​ 건조하고 기지항공대 14개 항공대를 증강하기로 했다.

1935년까지만 해도 20억엔대 초반이었던 국가 예산은 군사비의 급증으로 1937년에는 30억엔을 넘어섰다.

이렇듯 2.26 사건은 일본군부의 권력을 공고하게 만드는 동시에 본격적으로 군비확장에 돌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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