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일본해군(1)
1921년의 워싱턴 조약에서 일본은 주력함을 미국 및 영국에 대하여 10 :10 :6 의 비율로 제한하는 안을 받아들였다.
1931년의 런던 조약에서 일본은 주력함 비율에서 10 :10 :6 을 유지했으나 보조함 비율에서는 10 :10 :7, 잠수함은 동률을 인정받았다.
제2차 런던조약을 앞두고 군국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던 일본정부는 미국과 영국에게 주력함과 보조함 모두에서 동률을 요구했다.
이는 태평양에서 일본해군의 압도적 우세를 인정하라는 소리로 미국과 영국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고 일본 또한 그 점을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일본은 1936년 1월 15일에 군축조약에서 탈퇴했고 연말에 런던조약의 시효가 만료되면서 세계는 건함경쟁시대로 돌아갔다.
1922년 워싱턴 군축조약이 체결되던 당시, 1936년 군축조약이 실효되었을 때, 그리고 1941년에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미국, 영국, 및 일본의 전투함 배수량을 비교해보면 일본해군의 배수량이 늘어났다는 것이 눈에 띈다.
1922년 워싱턴 조약에 의하여 초과분을 폐기한 이후(단위 : 만톤)
|
미국 |
영국 |
일본 |
전함 및 순양전함 |
52.6 |
55.9 |
30.1 |
항공모함 |
1.3 |
8.8 |
1.5 |
순양함 |
18.3 |
39.3 |
14.2 |
구축함 |
36.3 |
24.5 |
6.5 |
잠수함 |
4.9 |
7.6 |
2.4 |
합계 |
113.4 |
136.1 |
54.7 |
1936년 런던군축조약 실효시(단위 : 만톤)
|
미국 |
영국 |
일본 |
전함 및 순양전함 |
46.4 |
47.5 |
31.2 |
항공모함 |
8.1 |
11.5 |
6.8 |
순양함 |
24.9 |
35.9 |
24.2 |
구축함 |
21.6 |
19.1 |
9.6 |
잠수함 |
6.8 |
5.2 |
6.6 |
합계 |
107.8 |
119.2 |
78.4 |
1941년 진주만 기습 당시(단위 : 만톤)
|
미국 |
영국 |
일본 |
전함 및 순양전함 |
53.4 |
44.3 |
35.7 |
항공모함 |
13.5 |
16.1 |
17.8 |
순양함 |
32.9 |
47.1 |
29.9 |
구축함 |
23.7 |
26.8 |
15.4 |
잠수함 |
11.7 |
5.5 |
10.7 |
합계 |
135.2 |
139.8 |
109.5 |
1922년에 워싱턴 조약이 발효되었을 때 일본해군의 배수량은 미해군의 48%, 그리고 영국해군의 40% 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19년 동안 미해군은 218,000 톤이 늘어나고 영국해군은 겨우 37,000 톤이 늘어나는 동안 일본해군은 548,000 톤이 늘어서 2배가 되었다.
따라서 진주만 기습 당시 일본해군의 배수량은 미해군의 81%, 그리고 영국해군의 78% 에 달하였으며 태평양에서는 연합군 해군을 합친 것보다 우세했다.
게다가 일본해군의 함정들은 잘 정비되었고 대규모 개장을 실시하여 성능 또한 좋았다.
육군과 해군을 통틀어 일본군 최고사령관은 천황이었으며 천황의 통수권 행사를 돕기 위하여 군사참의관회의가 있었다.
군사참의관회의에는 육상, 해상, 참모총장(육군), 군령부총장(해군)과 군의 원로인 군사참의관들,그리고 필요할 경우 내각의 각료들이 참석했다.
작전은 참모본부(육군)와 군령부(해군)에서 짰으며 전쟁시에는 이 두 기관을 합쳐 대본영을 만들었다.
히로히토 천황은 중일전쟁이 터지자 1938년 11월에 대본영을 만들면서 군사참의관회의를 유명무실화하고 그 기능을 대본영-정부연락회의로 옮겼다.
연락회의의 구성원은 기본적으로 천황, 수상, 외상, 육상, 해상, 참모총장, 그리고 군령부총장이었으며 천황이 참석하기 때문에 어전회의라고도 불렀다.
미국 및 영국과의 개전을 결의한 것이 바로 이 대본영-정부연락회의였다.
해군의 작전은 군령부와 연합함대사령부에서 짰으며 협의를 통하여 의견을 조율했다.
만일 육군의 도움이 필요하면 참모본부와도 협의해야 했다.
육군도 상륙작전같은 경우 해군과 협의를 거쳐야 했다.
고위 레벨에서는 이런 식으로 육군과 해군 사이에 의사교환이 일어났으나 그 아래로는 거의 의사교환이 없었다.
일본의 육해군은 알력이 심하여 통합전력 발휘에 지장이 많았다.
전쟁 후반기의 섬 전투처럼 고립된 전장에서도 섬 사령관인 육군 장교가 휘하의 해군부대를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일본은 섬나라였지만 해군은 육군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존재였으며 일본의 오랜 전통에 뿌리를 박고 있는 조직이 아니었다.
해군의 훈련이나 조직은 영국해군의 영향을 받았으며 러일전쟁 당시 함정들도 대부분 영국에서 건조한 것이었다.
이후 일본은 함정의 국산화에 박차를 가하여 제1차 세계대전 즈음에는 함정을 대부분 국내에서 건조했다.
함정의 절반 가량은 요코스카, 구레, 사세보, 그리고 마이즈루에 있는 4대 해군조선소에서 건조했으며 나머지는 민간조선소가 건조했다.
일본의 조선소는 훌륭한 함정을 건조했으나 대량 건조 기술을 개발하거나 전시에 자재가 모자라는 상황에서 함정을 건조하거나 수리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데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일본전함들은 미국의 구형전함들보다 빨랐으며 다른 면은 비슷했다.
일본이 건조한 야마토 급 전함은 기준배수량 64,000 톤에 460mm(18.1인치) 주포 9문을 장착하여 기준배수량 45,000 톤에 16인치(406mm) 주포 9문을 장착한 미해군 최대의 전함 아이오와 급보다 훨씬 컸다.
(일본전함 야마토.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태평양 전쟁 개전 당시 일본은 세계 최대, 최강의 함대항공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의 항공모함 세력은 정규항공모함 6척(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 쇼가쿠, 즈이가쿠)을 포함하여 10척의 항공모함, 배수량 178,000 톤으로 항공모함 7척에 배수량 135,000 톤을 보유한 미해군이나 역시 7척에 배수량 161,000 톤을 보유한 영국해군보다 규모가 컸다.
함재기도 뛰어나 전투기인 제로기나 뇌격기인 97식 함상공격기는 당시 동급 기종들 가운데에서 최고의 성능을 자랑했다.
엄청난 경쟁율을 보이는 지원자 중에서 까다롭게 뽑아 혹독한 훈련을 거친 다음 중일전쟁에서 실전경험을 쌓은 일본해군의 조종사도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게다가 일본은 세계에서 최초로 여러 척의 항공모함을 뭉쳐 운용하는 방식을 채택하여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위력을 극대화했다.
한마디로 태평양전쟁 개전 당시 일본의 항공모함 기동부대는 세계 최강이었으며 진주만 기습을 비롯하여 태평양 전쟁 초기 일본군의 놀라운 성공은 강력한 일본의 항모기동부대에 힘입은 바 컸다.
(제로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군축조약 시기 만들어진 일본의 중순양함들은 조약이 실효한 후 대규모 개장을 실시했다.
개장으로 배수량이 30% 가까이 늘었으나 기관 출력 또한 증가하여 속력은 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태평양전쟁 개전 당시 일본의 중순양함들은 미국 중순양함들보다 훨씬 컸으며 속력은 비슷했다.
무장은 8인치 주포 10문을 갖추어 9문인 미국 중순양함보다 화력이 강했으며 미국 중순양함들과 달리 어뢰를 보유하고 있었다.
일본의 경순양함들은 10,000 톤에 육박하는 미국 경순양함의 절반 정도 크기였으며 대부분 구축대의 기함을 맡았다.
여러 임무를 소화하는 만능함의 성격이 강한 미국 구축함에 비해 일본 구축함은 대함 전투에 특화된 경향이 있었다.
일본 구축함의 50구경장 5인치 양용포는 미국 구축함의 38구경장 5인치 양용포보다 대공포로서는 열세였으나 함포로서는 우수했다.
일본해군은 구축함의 주포인 5인치 함포의 배치 방식에서 미해군을 앞서갔다.
1928년에 취역한 후부키 급에서 5인치 양용포의 폐쇄형 연장포탑을 채택한 이래 일본 구축함들은 흔들림없이 5인치 양용포의 폐쇄형 연장포탑이라는 기조를 이어갔다.
미국은 1935년에 취역한 포터 급에서 5인치 함포의 폐쇄형 연장포탑을 채택했으나 당시의 5인치 포는 양용포가 아니었으며 이후 미국은 연장포탑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단장과 연장 포탑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결국 미국이 구축함의 5인치 양용포를 폐쇄형 연장포탑에 장착하는 방식을 확정한 것은 1944년에 취역한 알렌 섬너 급부터였다.
일본의 잠수함 부대는 20톤짜리 잠수정부터 기준배수량 3,530톤에 3대의 수상기를 실을 수 있는 대형잠수함까지 골고루 갖추고 있었다.
주력은 I 형 잠수함이었으며 보다 작은 구형 Ro 형 잠수함이 보조 역할을 했다.
I 형 잠수함은 미국의 함대형 잠수함들보다 배수량이 크고 속력이 빨랐으나 수중 소음이 심한 편이었는데 이는 일본해군의 잠수함 운용 사상과 관련이 있었다.
잠수함을 통상파괴의 수단으로 사용한 다른 나라들과 달리 일본해군은 잠수함을 함대결전에 앞서 정찰을 하고 뇌격을 가하여 적의 전력을 깎아두는 역할을 하는 전투함대의 보조전력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전투함들과 합동작전을 펼 수 있도록 속력이 중요한 요소였으며 수중 소음 문제는 우선 순위가 떨어졌다.
1931년 이전의 일본해군은 상륙작전 능력이 빈약했다.
그러나 중국과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상륙작전 능력 향상에 심혈을 기울여 상륙주정, 소형 수송선, 초계정 및 포정을 다수 확충했다.
일본의 대형 상선들은 간단한 개조를 통하여 수송함, 급유함, 수상기모함 등으로 바꿀 수 있었다.
이러한 상선들은 만들 때부터 전시 징발을 조건으로 건조비의 상당 부분을 정부로부터 지원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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