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폭풍전야

 

미국에서는 헐 국무장관을 비롯하여 누구도 일본이 헐 노트를 받아들이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남은 것은 일본이 언제, 어디를 공격할 것이냐였다.

 

헐 노트를 전달하기 전날인 1941년 11월 25일에 스팀슨 전쟁성 장관은 5개 사단을 수송할 수 있는 약 50척의 수송선이 타이완 근해에서 발견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는 말레이 반도를 노리는 야마시타 도모유키 중장의 제25군을 수송할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의 남파함대 소속이었으나 당시 미국은 이 선단이 어디로 향할지 몰랐다.

미국은 진주만공격함대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11월 27일에 해군참모총장 해럴드 스타크 대장은 하트 제독과 킴멜 제독에게 보낸 전문에서 처음으로 전쟁 경고(war warning) 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전문은 전쟁경고로 간주하라. 태평양 정세 안정을 위한 일본과의 협상은 끝났다. 향후 며칠 사이에 일본의 공격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군의 병력과 장비, 그리고 해군기동부대를 구성한 것으로 보아 일본군은 필리핀, 태국, 크라 반도, 어쩌면 보르네오에 상륙할 것 같다. 적절한 방어태세를 갖추고 WPL46 의 실행을 준비하라."

 

WPL46 은 레인보우 5 작전에서 해군이 담당한 부분이었다.

 

(미해군 참모총장 해럴드 스타크 대장. http://en.wikipedia.org/wiki/Harold_Rainsford_Stark)

 

도조 수상은 자신이 설정한 외교 교섭의 기한인 11월 29일에 라디오로 호전적인 연설을 했다. 

그는 연설에서 대동아 공영권 건설을 방해하는 국가들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아시아에서 미국과 영국의 영향력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도조의 솔직한 심정으로서 이 시점에서 도조는 미국과의 외교적 타결을 포기했다.

진주만 공격 부대는 이미 항해 중이었다.

 

그러나 도조는 기습을 위하여 헐 노트에 대한 답변을 미루었다.

일본 정부는 헐 노트를 거부한다는 답변을 선전포고 삼아 진주만 기습 1시간 30분 전에 전달할 예정이었으나 해군 측의 주장으로 공격 20분 전에 전달하기로 결정했다.

 

(도조 히데키 일본 수상.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12월 1일, 일본은 천황이 참석한 가운데 대본영-정부 연락회의를 열고 오후 4시 12분에 미국, 영국 및 네덜란드에 대한 개전을 확정했다.

남방총군에 대한 작전 명령은 당일 발령되었으며 다음날인 2일에는 진주만 공격부대에게

 

"니이다카 산을 오르라 1208"

 

이라는 암호전문이 발신되었는데 이것은 예정대로 12월 8일(도쿄 시간)에 진주만을 공습하라는 명령이었다.

 

(히로히토 천황.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12월 2일, 도고 외상은 주미대사관에 암호전문을 보내어 4개의 암호기계 중 최종 통고를 받기 위한 하나만 남겨두고 파괴하며 암호책도 하나만 남겨두고 소각하라고 명령했다.

같은 날 호놀룰루의 일본 총영사는 진주만의 함정 정박 상황을 매일 보고하고, 대잠망 설치 여부를 확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호놀룰루의 일본 총영사관은 1941년 봄부터 진주만의 상황을 정기적으로 보고하고 있었다.

 

12월 6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파국을 막기 위하여 최후의 노력을 했다.

그는 히로히토 천황에게 직접 전보를 보내어 인류애에 호소하면서 필리핀, 말레이, 태국, 그리고 동인도제도를 위협하고 있는 남부 인도차이나의 일본군과 해군 함정들을 철수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답변은 없었다.

 

(프랭클린 댈러노 루스벨트 대통령.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일본은 14통으로 된 최후통첩을 워싱턴의 주미대사관으로 발신하기 시작했다.

14부를 제외한 13통은 일본 시간으로 12월 6일 오후 8시 30분부터 발신을 시작하여 자정을 넘긴 7일 0시 20분에 발신이 끝났다.

일본 시간으로 7일 오전 0시 20분은 워싱턴 시간으로 6일 오전 10시 20분이다.

 

워싱턴의 상업 통신국에 도달한 전문들은 6일 정오 경에 일본대사관으로 배달되어 대사관의 정보전신과에서 해독에 들어갔으며 미국 암호 해독반 또한 전문을 가로채어 해독하기 시작했다.  

미국 측의 암호 해독 작업은 6일 오후 8시 30분 경에 끝났고 9시 30분 경에는 전문이 루스벨트 대통령의 손에 들려 있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해군참모총장 해럴드 스타크 대장과 통화했으며 전문의 내용이 전쟁을 의미한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한편 주미일본대사관에서는 일이 꼬이고 있었다.

대사관의 정보전신과에서 전문 13통에 대한 해독을 마친 것은 밤 11시 경으로 미국보다 2시간 30분 정도 늦은 시간이었다.

전신과 직원들이 꼬박 11시간 동안 작업하여 해독을 마친 전문을 제출하러 서기관실에 가보니 텅 비어 있었다.

2명의 참사관과 3명의 서기관이 주말이라고 저녁에 퇴근해 버린 것이었다.

맥이 탁 풀린 전신과 직원들은 해독한 전문을 책상에 던져놓고는 당직 1명을 남겨놓고 퇴근해 버렸다.

그리하여 해독이 완료된 13통의 전문은 정서도 하지 않은 채 서기관실의 책상 위에 밤새 놓여 있었다.

 

7일 오전 2시 38분에 마지막 14번째 전문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미국 암호해독반이 해독에 들어갔다.

이 전문들은 일본대사관으로 배달되었으나 대사관 측이 전문을 본 것은 미국이 해독을 끝낸 이후였다.

 

7일 오전 9시경에 출근한 해군무관의 보좌관이 우편함에서 전보를 발견하고 비상연락망을 가동했다.

잠시 후 노무라 대사와 구루스 특사를 위시하여 대사관의 전 직원이 달려왔으며 정보전신과 직원들이 14번째 전문을 해독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서기관실 책상 위에 놓여있던 해독이 완료된 전문 13통에 대한 정서도 시작되었는데 문제가 있었다.

훈령에는 정규 외교관이 정서해야 하며 타자수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고 되어 있었는데 외교관 중에서 타자를 칠 줄 아는 것은 오쿠무라 1등 서기관 뿐이었다.

 

일본대사관이 14번째 전문을 해독하는 동시에 해독이 완료된 13통의 전문을 정서하느라고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던 오전 10시 20분에 마지막 전문이 통신국에 도착하여 대사관으로 배달되었다. 

내용은 14통의 전문을 오후 1시에 헐 국무장관에 전달하라는 것이었으며 시간을 엄수하라고 강조하고 있었다.

워싱턴 시각 오후 1시는 진주만 시간으로 오전 7시 30분으로 기습 20분 전이었다.

전문은 마지막으로 암호기계와 암호책을 모두 파기하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노무라 대사는 국무성에 연락하여 오후 1시에 헐 장관과의 면담 약속을 잡았다.

오쿠무라 서기관은 최선을 다해 타자를 쳤으나 분량이 많은데다가 마음이 급하니 오타가 나는 등 작업이 늦어져 시간 내로 정서할 수 없었다.

오후 1시가 왜 중요한지 모르는 노무라 대사는 면담을 2시로 미루었다.

 

노무라 대사와 구루스 특사가 정서를 마친 문건을 들고 국무성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시 50분이었다.

그때 헐 국무장관은 진주만이 기습 공격을 받았다는 킴멜 대장의 긴급 전문을 읽고 있었다.

헐 장관은 마닐라나 괌이 아닌 진주만이 공격받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공격을 받은 장소가 진주만이 맞는지 백악관에 확인을 요청하고 회답이 올 때까지 노무라 대사와 구루스 특사를 장관실 밖 응접실에서 기다리도록 했다.

 

(코델 헐 국무장관.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오후 2시 5분에 백악관으로부터 루스벨트 대통령이 전화를 걸어왔다.

대통령은 자신도 녹스 해군장관으로부터 진주만이 공격당했다는 보고를 들었다면서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사실인 것 같다고 말했다.

전화를 끊은 헐 장관은 오후 2시 20분에 노무라 대사와 구르스 특사의 입실을 허락했다.

 

헐 장관은 두 사람을 뚫어질듯이 노려보기만 할 뿐 의례적인 인사나 앉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노무라 대사는 인사를 하고 문건을 내밀면서 오후 1시에 전달하라는 훈령을 받았으나 해독, 정서하는데 시간이 걸려 늦었다고 사과했다.

헐 장관은

 

"왜 1시요?"

 

라고 소리를 질렀다.

두 사람은 움찔했으나 1시의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헐 장관이 화를 내는 이유도 알 수 없었다.

 

헐 장관은 문건을 받자 안경을 쓰고 읽기 시작했다.

암호 해독을 통해 내용을 알고 있었으나 처음 읽는 척 했다.

문건은 일본이 아시아의 안전과 세계의 평화를 지향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반항하는 중국을 비난하고 이어서 협상에 임하는 미국의 태도를 비타협적이고 고압적이라며 장황하게 비난한 후에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고 있었다.

 

"...고로 제국정부는 여기에 합중국 정부의 태도로 미루어 금후 교섭을 계속할지라도 타결에 이를 수 없다고 인정치 않을 수 없음에 관하여 합중국 정부에 통고함을 유감으로 여기는 바이다."

 

헐 장관은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50년 동안 공직생활을 하면서 이토록 파렴치한 허위와 왜곡에 가득찬 문서를 본 적이 없소. 난 지구상의 어떤 정부도 이처럼 거창하고 악의에 찬 수치스러운 허구를 조작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소."

 

당황한 노무라 대사가 뭔가 말하려고 하자 헐 장관은 손을 내밀어 제지하고 턱으로 문쪽을 가리켰다.

나가라는 뜻이었다.

타국 대사에게 취한 행동이라고 상상하기 힘든 외교적 결례였다.

 

국무장관실에서 쫓겨나듯 물러난 노무라 대사와 구루스 특사는 헐 장관이 왜 그토록 화를 내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들은 헐 장관이 1시간이나 기다린 것에 화가 났다고 생각했으나 정도가 심했다.

두 사람이 대사관에 돌아오자 일본기가 진주만을 기습했다는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노무라 대사와 구루스 특사는 그때서야 헐 장관의 행동을 이해했다.

 

(노무라 기치사부로 주미대사.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사실 미국 측은 노무라 대사보다 먼저 오후 1시의 중요성을 감지했다.

헐 장관과 반드시 1시에 접견하라는 내용을 담은 오전 10시 20분의 전보는 즉시 해독에 들어가 오전 11시 25분에는 육군참모총장 마셜 대장의 손에 들려 있었다.

먀셜 대장은 오전 6시 30분에 일어나 일요일의 오랜 습관인 승마를 마친 후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 때문에 일요일임에도 사무실에 나왔다.

그는 전문을 보는 순간 오후 1시의 중요성을 깨닫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훈령을 기초했다.

 

"일본 측은 금일 동부시간 오후 1시에 최후통첩으로 생각되는 것을 제출하려 하고 있다. 일본대사관은 암호기계를 즉시 파괴할  것을 명령받았다. 그 시간이 어떤 의미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적절하게 경계를 강화하라."

 

수신자는 극동 지역 육군사령부, 하와이 육군사령부, 카리브해 육군 사령부, 그리고 미본토 서해안의 방어를 책임진 제4군 사령부였다.

마셜 장군은 전문을 보내기 전에 해군참모총장 스타크 대장에게 전화를 걸어 원한다면 수신자에 해군사령부도 포함시키겠다고 말했다.

스타크 대장은 이미 너무 많은 경고를 보냈다면서 해군사령관들에게 더 이상의 경고는 필요 없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으나 1분 후 다시 전화를 걸어 해군사령부도 수신자에 넣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아시아함대 사령관 하트 제독과 태평양함대 사령관 킴멜 제독도 수신자에 포함되었다.

육군의 통신기로 발신된 전문은 30분 후면 수신자의 손에 들어갈 것이었다.

 

전문은 암호화를 거친 다음 12시 정각에 카리브해 사령부에, 12시 6분에 필리핀의 맥아더 장군에게, 12시 11분에 제4군 사령부에 타전되었다.

이어서 하와이에 타전하려고 할때 통신기가 말을 듣지 않았다.

워싱턴 부근 상공에 강력한 정전기가 발생하여 장거리 통신이 불가능해졌는데 하와이는 커녕 샌프란시스코까지도 통신이 도달하지 않았다.

 

통신 담당자는 이럴 경우 당시로서는 '보안을 유지하면서 가장 빠르고 신뢰성있는 수단' 인 민간 통신을 이용하여 전문을 발송했다.

암호화된 전문은 12시 17분에 웨스턴 유니언 전신 회사로 발송되어 이 회사의 유선 통신망을 타고 샌프란시스코까지 전송된 다음 RCA 사의 무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전문은 발신된 지 46분 후인 동부시간 오후 1시 3분, 하와이 시간으로 오전 7시 33분에 호놀룰루의 RCA 통신국에 도달했다.

이때 일본군 편대의 선두는 오아후 섬 북쪽 60km 이내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전문에는 '지급' 표시가 없었으므로 담당자는 쇼트 중장의 사령부와 연결된 텔레타이프로 즉시 보내지 않고 일반 전보로 분류했다.

잠시 후 전보를 배달하는 집배원 후치카미 타다오가 육군 사령부가 있는 카힐리 지역의 다른 전보들과 함께 이 전문을 가방에 넣고 오토바이를 타고 출발했다.

그때 진주만 기습이 시작되었다.

 

일본계인 집배원 후치카미는 공습 직후 호놀룰루 시내에 쫙 깔린 검문소를 지나갈 때마다 까다로운 검문을 받았고 전문은 결국 진주만 기습 이후 6시간이 지난 오후 2시가 되어서야 하와이 육군사령관 쇼트 중장에게 도달했다.

태평양함대 사령관 킴멜 대장은 2시간 더 늦은 오후 4시경에야 전문을 받았다.

 

만일 마셜 대장이 전보를 사용하지 않고 장거리 전화를 사용했다면 하와이는 적어도 기습 30분 전에는 경고를 받았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전화로는 암호화된 통신이 불가능하여 보안이 유지될 수 없었다.

일급 비밀에 속하는 내용을 보안이 안되는 전화통에 대고 떠들어댄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쇼트 장군과 킴멜 제독이 때늦은 경고를 받았을 때는 이미 불타고 갈갈이 찢긴 수천명의 미군 시체가 비행장에, 그을린 부두에, 그리고 진주만에 가라앉은 함정 속에 널려 있었다.

 

- 참고 문헌 및 웹사이트

 

<History of U.S. Naval Operations in World War II, Vol. III: The Rising Sun in the Pacific, 1931--April 1942> Samuel Eliot Morison, 1953

<Building the Navy's Bases in World War II: History of the Bureau of Yards and Docks and the Civil Engineer Corps, 1940-1946>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47

<The Organization and Order of Battle of Militaries in World War 2, Vol.4 - Japan> Charles D. Pettibone, Trafford publishing, 2007

<Peace and War : United States Foreign Policy> US Department of States, 1942

<Guarding the United States and Its Outposts>Stetson Connn, Rose C. Engelman, Byron Fairchild, University Press of the Pacific, 1964

<At Dawn We Slept :: The Untold Story of Pearl Harbor> Gordon W. Prange, McGraw Hill, 1981

<휴맨카인즈 승리와 패배- 2. 펄 하버>A.J. Barker 지음, 이창록,박대련 옮김, 동도문화사, 1982년

<타임라이프북스 - 회오리치는 일장기> 한국일보-타임라이프사, 1981년

<제2차세계대전해전사> 이정수. 남영문화사, 1981년

<니미츠 전기> E.B 포터 지음, 김주식 역, 신서원, 1997년

<연합함대 그 출범에서 침몰까지> 박재석, 남창훈 지음, 가람기획, 2005년

<대동아전쟁비사-제1권 태평양편> 한국출판사, 1971년

<대동아전사-제6권 태평양전쟁> 오바다 마츠시로 지음, 유준수 옮김, 한양문화사, 1974년

<실록대하소설 태평양전쟁 1 - 진주만 기습과 미드웨이 해전> 이호원 지음, 한림출판사, 1975년

<쇼와16년 여름의 패전>이노세 나오키 지음, 박연정 옮김, 추수밭, 2011년

<히로히토, 신화의 뒤편> 에드워드 베르 지음, 유경찬 옮김, 2002년

 

http://www.wikipedia.org/

http://blog.naver.com/mirejet (도위창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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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헐 노트

 

고노에 내각은 평화의 돌파구를 찾지 못한 채 1941년 10월 16일에 붕괴하고 이틀 후인 18일에 도조 내각이 성립되었다.

도조는 수상이 된 뒤에도 육상 자리를 내놓지 않았고 새로이 내상까지 겸했다.

해상으로는 시마다 시게타로가 입각했으며 외상은 도고 시게노리가 맡았다.

 

도조 내각의 성립은 뜻밖의 일로 도조 자신도 히로히토 천황으로부터 조각 명령을 받고 당황했다.

군국주의자인 도조를 수상으로 천거한 것은 내대신 기도 고이치였다.

기도의 기록에 따르면 자신이 천황에게 도조가 충성심이 강하면서 군부에 영향력이 크니 그에게 전쟁을 막으라는 임무를 주어 수상으로 삼으면 전쟁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고 천황이 받아들였다.

 

도조는 11월 1일에 제국국책수행요강의 날짜 부분을 수정하여 대본영과 협의를 마쳤으며 11월 5일에 히로히토 천항이 참석한 가운데 다시 어전회의를 열어 개전을 12월 8일로 확정했다.

그렇지만 일본이 외교에 의한 타결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도조는 10월 중순으로 되어 있던 미국과의 외교 교섭 기한을 11월 25일, 최종적으로는 29일까지 6주 정도 연장했으며, 일본군의 작전 계획은 마지막 순간에라도 미국과의 타결이 이루어지면 중단한다는 전제로 작성되었다.

 

(도조 히데키 일본 수상.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일본 군부는 외교와는 별도로 전쟁 준비를 진행했다.

어전회의 다음날인 11월 6일에 남방작전을 진행할 사령부 편제가 확정되었다.

남방총군 사령관에 데라우치 히사이치 대장이 임명되어 남방작전을 총지휘하게 되었으며, 필리핀을 담당한 제14군 사령관에 혼마 마사하루 중장, 버마를 담당한 제15군 사령관에 이다 쇼지로 중장이 임명되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를 담당한 제16군 사령관에 이마무라 히토시 중장, 영령 말레이 반도를 담당한 제25군 사령관에는 야마시타 도모유키 중장이 임명되었다.

 

4일 후인 1941년 11월 10일에는 남방총군 사령관 데라우치 대장과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이 남방작전의 큰 틀에 대하여 합의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루손, 괌, 말레이 반도, 홍콩, 북보르네오의 미리에 동시 상륙한다. 미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전에 공습을 가한 후 상륙한다.

2. 항공모함을 사용하여 진주만의 미태평양함대를 공습한다. 

3. 초반 공격이 성공하면 마닐라, 민다나오, 웨이크 섬, 비스마르크 제도, 방콕 및 싱가포르를 빨리 점령한다.

4. 이후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를 점령하며 그동안 중국에서의 전투는 계속한다.

 

그루 주일대사는 일본군의 자세한 내부 사정을 몰랐지만 분위기는 파악하고 있었다.

11월 3일에 국무성에 보낸 전보에서 그루 대사는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전격적으로 기습하려는 것 같다고 적었다.

 

11월 5일에 도고 외상은 노무라 주미대사에게 암호 전문을 보내어 도조가 새로 설정한 기한인 11월 25일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미국과 합의에 이르러야 한다는 훈령을 내렸다.

같은 날, 도조는 노무라 대사를 돕기 위하여 미국인 아내를 둔 거물급 외교관 구루스 사부로를 특사 자격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도조는 중국에서 철병하지 않고 석유 수입을 재개하는 것이 목표였으며 이를 위하여 모든 수단을 동원할 생각이었다.

 

11월 6일에 일본은 미국에게 도조 내각 성립 이후 최초의 제안을 했다.

암호 해독을 통하여 A 플랜이라 부르는 이 제안을 거부하면 다른 제안이 있다는 걸 알고 있던 미국은 거부했다.

 

이제 미국도 다가오는 전쟁을 느끼고 있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1월 7일에 각료들에게 일본이 영령 말레이를 공격할 경우 국민들이 일본과의 전쟁을 지지할 것인지 물었다.

각료들은 지지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구루스 특사는 미국에 도착하여 11월 15일에 노무라 대사와 함께 헐 국무장관을 만났다.

17일에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헐 국무장관과 함께 구루스 특사와 노무라 대사를 만났으나 양국 간의 입장 차이를 확인했을 뿐이었다.

 

11월 20일 일본은 노무라 대사를 통하여 최종 제안을 전달했다.

B 플랜이라 부르는 최종 제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일본의 북부 인도차이나 증원을 제외하고 미국과 일본은 동남아시아에 병력을 증원하지 않는다.

2. 일본은 미국과 합의하는 즉시 남부 인도차이나의 병력을 북부 인도차이나로 철수시킨다.

   북부 인도차이나의 일본군은 중국과의 평화가 확립되거나 아시아에 평화가 찾아오면 철수한다.

3. 미국과 일본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는데 있어 서로 협력한다.

4. 미국과 일본은 서로에 대한 자산동결을 해지하며 미국은 일본이 필요로 하는 양만큼의 석유를 공급한다.

5. 미국은 중국을 돕는 행위를 중단한다.

 

헐 국무장관은 이 제안을 미국으로 하여금 중국에서 손을 떼고 일본에게 석유를 공급함으로써 중국의 파멸을 지켜 보기만 하라는 소리로 미국에게 '협박에 굴복한 비참한 항복' 을 요구하는 내용으로 평가했다.

미국은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11월 22일, 일본은 주미대사관에 암호 전문을 보내어 교섭 기한을 25일에서 29일로 연장했다.

 

해군참모총장 해럴드 스타크 대장은 11월 24일에 마닐라의 하트 대장과 진주만의 킴멜 대장에게 전보를 보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과 타협에 이를 가능성은 희박하다..일본군이 언제든 필리핀이나 괌을 포함하여 어디든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현재의 긴장 상태를 심화시키거나 일본의 공격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유의하라." 

 

육군참모총장 마셜 대장과 해군참모총장 스타크 대장은 시간을 끌어줄 것을 요청했다.

21,000 명에 달하는 미군이 12월 8일에 필리핀으로 출발할 예정이었으며 선발대는 괌 근해를 지나고 있었다. 

이들이 도착하면 필리핀을 지킬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었다.

마셜 장군과 스타크 제독은 행정부에 ADB 회의에서 결정한 사항, 즉 일본이 미국, 영국 및 네덜란드의 영토나 타이, 티모르, 그리고 뉴칼레도니아를 침공하지 않는 한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파국을 막고자 3개월 기한의 잠정 제안을 준비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평화정책에 대하여 상호 선언한다.

2. 무력 진출이나 무력 위협을 중단한다.

3. 남부 인도차이나의 일본군은 북부 인도차이나로 철수한다.

   북부 인도차이나에서는 향후 철수한다.

4. 미국은 매달 민간용 수요에 한하여 일본에 석유를 수출한다.

5. 미국은 일본이 평화, 법치, 순리, 그리고 정의의 원칙에 따라 장제스와 협상을 시작하기를 원한다.

 

헐 국무장관은 이 잠정 제안에 반대하면서 일본에게 내밀기 전에 동맹국과 정부 인사들의 의견을 들어보자고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주장하여 허락을 받았다.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중국은 격렬하게 반대했으며 처칠 수상도 중국에게 가혹하다며 반대했다.

루스벨트 행정부의 인사들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스팀슨 전쟁성 장관은 잠정 제안이 미국의 명예를 짓밟고 미국과 중국의 사기를 떨어뜨리며 전 세계에 미국의 극동 정책이란 것이 말뿐이라는 점을 광고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시간을 벌기 위하여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던 마셜 장군은 찬성했으며 스타크 제독도 미온적으로 찬성했다.

그 외에는 영국의 주미대사였던 핼리팩스 경 정도만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헐 국무장관은 동맹국과 정부 인사들의 부정적 반응을 등에 업고 대통령에게 일본이 잠정 제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낮으며 만일 받아들인다고 해도 중국의 사기를 크게 꺾을 것이고 그런 부작용에 비하여 효과는 일시적이라고 주장했다. 

이 상황에서 11월 25일에 타이완 부근에서 일본 수송선들이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잠정 제안을 포기하고 국무성이 준비한 강경한 제안을 승인했다.

 

다음날인 11월 26일, 헐 국무장관은 11월 20일에 일본이 내민 최종 제안의 대답으로서 "미합중국과 일본국 간 협정의 기초 개요"("Outline of Proposed Basis for Agreement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Japan"), 줄여서 '헐 노트'(Hull note)라고 부르는 문건을 구루스 특사와 노무라 대사에게 전달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다변적인 불가침조약의 체결을 위한 노력
  2.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영토 주권의 존중과 이에 관한 협정을 체결
  3. 중국 및 인도차이나에서 일본의 육·해·공군 병력 및 경찰력 철수
  4. 중화민국 국민정부 이외의 군사적·정치적·경제적인 지원의 금지
  5. 중국에서의 일체의 치외법권의 포기
  6. 합중국 및 일본국 간에 통상협정 체결을 위한 협의의 개시
  7. 합중국에 있는 일본 자금 및 일본국에 있는 미국 자금에 대한 동결조치의 철회
  8. 엔화와 달러 환율의 안정에 관한 협정과 자금 공여
  9. 제3국과 체결하는 협정이 본 협정에 모순되게 해석되지 않도록 노력
  10. 타국이 본 협정을 준수·적용하도록 노력

 (http://ko.wikipedia.org/wiki/%ED%97%90_%EB%85%B8%ED%8A%B8 , 헐 노트의 전문은 여기로

 

일본 입장에서 헐 노트의 내용은 충격적인 것으로 인도차이나 뿐 아니라 중국에서의 철병까지 요구한 제3항과 삼국동맹의 탈퇴를 요구한 제9항은 일본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미국은 제3항, 제4항 및 제5항에서 말하는 중국의 범위를 규정하지 않았으나 일본은 만주를 포함하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중국과의 교섭도 아닌 일방적인 철군을 강요하고 삼국동맹을 탈퇴하라는 강경한 제안을 하면서 미국이 약속한 것은 자산 동결 해제 뿐이었다.

일본이 중시하는 석유 공급에 대해서는 명시적 약속 없이 제6항에 통상협정 체결을 위한 협의를 개시한다고 제시했을 뿐이었으며 일본이 요구해왔던 필리핀 증원 중단이나 장제스 정권 지원 중단에 대한 언급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일본이 보기에 헐 노트는 1941년 초반부터 9개월 간의 힘든 협상 과정을 통하여 양국 사이에 공감대가 이루어진 문제 해결의 기본적 토대 뿐 아니라 만주국 건설과 중일 전쟁 발발을 비롯하여 지난 20년 간 벌어진 중대한 상황 변화를 깡그리 무시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석유를 받고 싶으면 아무 조건없이 시계를 1922년의 9개국 조약 당시로 돌리라고 윽박지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본은 헐 노트를 더 이상 교섭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로 받아들였고 미국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헐 국무장관은 헐 노트를 전달하기 전날인 11월 25일에 정부 내의 고위 각료들과 회의를 하면서 일본과 합의에 이를 가능성은 없으며 이제 국가안보는 육군과 해군의 손에 달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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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개전 결의

 

미국이 정상회담을 위한 4가지 기본원칙을 전달한지 3일 후인 1941년 9월 6일에 일본은 히로히토 천황이 참석한 가운데 대본영-정부 연락회의를 열어 미국에 대한 전쟁을 결의했다. 

 

고노에 후미마로 수상은 회의 전날인 9월 5일에 천황을 만나 다음날 어전회의에서 다룰 의제인 '제국국책수행요령' 에 대해 설명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제국의 자존자위를 위하여 미국, 영국 및 네덜란드에 대한 전쟁을 불사한다는 결의 하에 대강 10월 하순까지 전쟁 준비를 마친다.

2. 제국은 이와 동시에 제국의 요구사항을 미국과 영국이 받아들이도록 모든 외교적 수단을 동원한다.

3. 외교교섭에 의하여 10월 상순까지 이쪽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희망이 보이지 않으면 즉시 미국, 영국 및 네덜란드에 대한 전쟁을 결의한다.

 

제2항과 관련하여 일본이 말하는 소위 최소 요구사항 및 승락할 수 있는 한계는 다음과 같았다.

 

1. 미국과 영국은 일본이 '지나사변' 을 해결할 수 있도록 버마로드를 폐쇄하고 장개석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어야 한다.

2. 미국과 영국은 비록 자국 영토라고 해도 극동에 더 이상 병력을 증강시키지 말아야 한다.

3. 인도차이나에서 일본과 프랑스의 관계에 대하여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4. 미국은 일본이 원료를 획득할 수 있도록 자유무역을 재개하고 일본이 타이 및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와 긴밀한 경제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이런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진다면

 

5. 일본은 인도차이나를 중국 이외의 국가를 공격하는 기지로 쓰지 않으며 극동에서의 평화가 확립되는 즉시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한다.

6. 일본은 필리핀의 중립을 보장한다.

 

는 내용이었다.

 

고노에 수상의 설명을 들은 히로히토 천황은 제국국책수행요령이 외교보다는 전쟁에 중점을 두는 것 같다고 말했다.

수상은 제1항과 제2항의 순서는 중요한 것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외교적 노력을 다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 전쟁을 불사한다는 의미라고 대답했다.

천황이 다음날의 연석회의에서 참모총장과 군령부총장에게도 그런 뜻이 맞는지 물어보겠다고 하자 고노에 수상은 지금 불러서 물어보라고 조언했다.

그리하여 참모총장 스기야마 하지메 장군과 군령부 총장 나가노 오사미 제독이 불려와 천황으로부터 같은 질문을 받았고 수상과 같은 취지로 대답했다.

 

천황은 이때 양 총장에게 남방작전에 대하여 이것저것 물었는데 상륙작전시 일기가 불순할 때의 대비라든가 얼마 전의 규슈기동훈련에서 비행기의 공습으로 함정 몇 척이 좌초되었던 일을 지적하면서 대응책을 묻는 등 상당히 구체적으로 질문했다.

마지막으로 천황은 스기야마 참모총장에게 대미 전쟁을 얼마 만에 끝낼 수 있냐고 물었다.

스기야마 총장이 3개월이면 끝낼 수 있다고 대답하자 천황은 언성을 높였다.

천황은 중일전쟁을 결의할 당시 육상이었던 스기야마가 1개월 내로 끝내겠다고 한 말을 기억한다면서 중일전쟁은 4년이나 지속되고 있다고 질책했다.

스기야마 총장이 쩔쩔매면서 중국이 워낙 넓어서 기동이나 보급이 예정대로 되지 않았다고 변명하자 천황은 중국이 넓다면 태평양은 더 넓은데 무슨 근거로 3개월로 예상하느냐며 몰아붙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못하는 스기야마 참모총장을 대신하여 나가노 군령부총장이 천황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은 그냥 두면 반드시 죽을 병에 걸린 환자와 같습니다. 수술은 위험하지만 성공하면 환자를 살릴 수 있습니다. 지금은 수술의 단안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다음날 열린 대본영-정부 연락회의는 히로히토 천황, 고노에 수상, 도조 육상, 오이카와 해상, 스기야마 참모총장, 나가노 군령부 총장, 하라 요시미치 추밀원 의장 등이 참석한 가운에 긴장된 분위기에서 시작되었다.

고노에 수상의 모두 발언에 이어 나가노 군령부총장이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해야 할 이유를 설명하면서 전쟁 준비를 위하여 개전 결의를 빨리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어서 스기야마 참모총장이 일어나서 나가노 군령부총장의 발언을 지지했다.

 

이때  히로히토 천황이 외교와 전쟁의 우선순위 문제를 다시 꺼냈다.

어전회의에서 천황을 대변하는 하라 추밀원 의장이 전날 천황이 한 것과 같은 질문을 정부와 대본영에 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정부를 대표하여 오이카와 해상이 외교에 주력하고 외교가 실패하면 개전한다는 뜻이라고 답변했으며 고노에 수상도 같은 취지로 발언했으나 대본영을 대표하는 참모총장과 군령부총장은 발언하지 않았다.

그러자 천황이 관례를 깨고 개입하여 대본영도 답변하라면서 언성을 높였고 이어서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할아버지인 메이지 천황이 지은 시 한 수를 읽었다.

 

"사해에 흩어져 있는 우리 모두는 형제인데

바람과 물결은 왜 이리도 거센가!" 

 

히로히토 천황은 평화를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이 시를 많이 생각했다고 말했다.

일동은 숙연해졌으며 도조 육상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다.

잠시 후 양 총장이 일어나 대본영 또한 해상의 발언에 동의한다고 말했으나 어차피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회의는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제국국책수행요령' 을 채택한 후 끝났다.

 

미국과의 전쟁을 결의한 역사적인 9월 6일의 어전회의에서 히로히토 천황이 보인 행동은 전쟁에 반대하는 뜻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렇게 보지 않는 시각도 있다.

역사학자 마이클 몽고메리는 히로히토 천황이 언급한 평화는 서구의 개념과 달리 일본 지배 하의 평화, 즉 팔굉일우를 말하며 히로히토 천황이 할아버지인 메이지 천황의 시를 인용한 것은 아시아 사람들이 일본의 지배에 순응하지 않는 현실에 대한 개탄과 좌절감의 발로라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히로히토 : 신화의 뒤편'(Hirohito Behind the Myth) 의 저자인 에드워드 베르는 히로히토 천황이 패전에 대비하여 전쟁에 반대했다는 증거를 남겨 여차하면 책임을 떠넘기려는 포석이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히로히토 천황은 9월 6일의 어전 회의 이후 개전시까지 전쟁을 막으려는 노력을 보여 주지 않았다.

12월 8일을 개전일로 정한 11월 5일의 어전회의나 외교 교섭을 실패로 규정하고 대미 개전을 확정한 12월 1일의 어전회의에서 천황은 아무런 이의 제기도 없이 회의 결과를 받아들였다.

 

(히로히토 천황.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이제 고노에 수상에게는 전쟁을 막기 위하여 10월 상순까지 약 6주의 시간이 주어졌다.

연석회의가 10월 상순까지 6주라는 기한을 설정한 이유는 물론 석유 때문이었다.

일본의 원유 비축량은 1941년 4월 1일 현재 2,000 만 배럴이 넘었지만 9월30일에는 약 1,500 만 배럴로 떨어졌다.

각종 정제유의 재고는 비축 중이던 원유를 정제한 물량 덕분에 소폭 증가했지만 원유가 떨어지면 정제유도 곧 바닥날 것이었다.

외교관들이 미국을 설득하여 석유 수입이 재개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으나 그렇지 못하면 일본은 석유를 찾아 남쪽으로 가야만 했다.

 

다급해진 고노에 수상은 어전회의 당일인 9월 6일 저녁에 그루 대사를 초청해 3시간 동안 저녁 식사를 하면서 루스벨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간곡히 요청했다.

고노에 수상은 이 자리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이 제시한 4개 전제조건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이후 고노에 수상은 9월 내내 정상회담에 절박하게 매달렸다.

9월 28일, 노무라 대사는 국무성에 정상회담을 촉구하는 고노에 수상의 친서를 전달했다.

고노에 수상은 친서에서 정상회담에 육군 대장과 해군 대장도 동행할 것이므로 합의 사항을 군부도 받아들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자신과 대표단은 예복까지 포함하여 준비를 마쳤고 타고갈 배도 대기하고 있으니 미국 측에서 시간과 장소만 지정하면 어디든 당장 달려가겠다고 적었다.

 

루스벨트 대통령과 헐 국무장관은 고노에 수상에게 주어진 마감 시한에 대해 몰랐으나 그가 서두르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불행하게도 국무성은 고노에 수상을 믿지 못했다.

고노에 수상은 1937년에 제1차 고노에 내각을 이끌면서 중일전쟁을 일으켰으며 당시 고노에 내각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말을 공식적으로 처음 사용했다.

또한 고노에는 일본의 야당들을 말살하여 대정익찬회로 통합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국무성은 일본이 정상회담의 합의 사항을 멋대로 해석하여 침략을 정당화하는데 써먹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걸 막고자 루스벨트 대통령이 회담 석상에서 표현 하나하나를 따지면서 깐깐하게 굴면 회담은 결렬될 것이고 그러면 일본은 미국이 평화를 논의하는 회담 테이블을 먼저 걷어찼다고 선전할 것이었다.

어느 쪽이든 미국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경우였다.

 

오늘날에는 고노에 수상이 진심이었다는 것이 알려져 있으며 정상회담이 이루어졌다면 교역 재개를 조건으로 중국에서의 철군에 동의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정상회담에서의 합의 여부와 상관없이 고노에 수상이 중국에서 일본군을 실제로 철병시킬 수 있었으리라고 보는 역사학자는 거의 없다.

만일 철군을 시도했다면 십중팔구 군부에 의하여 내각이 붕괴되었을 것이며 수상 자신은 암살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고노에 수상을 불신하던 헐 국무장관은 9월 28일의 친서에 대하여 10월 2일 노무라 대사에게 강경하게 대답했다.

그는 노무라 대사에게 정상회담에 앞서 일본이 지금까지 추구해 왔던 공격적인 정책을 폐기하고 평화 정책을 채택할 것이라는 '명백한 증거'(clear-cut evidence)를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는 동안 10월 상순이 지나갔다.

1941년 10월 12일에 고노에 수상은 도조 육상, 오이카와 해상, 도요다 외상 등과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도요다 외상은 도조 육상에게 중국에서의 철병 없이는 외교적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도조 육상은 철병 요구를 거부했으며 어전회의에서 결정한 기한 내에 외교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니 전쟁을 결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노에 수상은 전쟁에서 이길 자신이 없으니 자신은 전쟁을 결의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도조 육상은 어찌 천황 앞에서 확정한 어전회의의 결론을 뒤집는 불충한 말을 하느냐면서 자신이 없으면 수상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소리를 꽥 지르고는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이틀 후 고노에 수상은 마지막 시도로 도조 육상과 단둘이 만나 담판을 벌였다.

수상은 미국과의 전쟁이 얼마나 위험한지 설명한 후 외교적 해결을 위하여 중국에서의 철병을 요청했다.

도조 육상은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면 또다른 요구를 들이밀 것이라며 중국에서 철병하면 육군의 사기가 떨어지고 아시아에서 일본의 체면이 깎인다는 점을 들어 거부했다.

도조 육상은 덧붙여서 자신은 일본이 미국과 싸워 이길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이제 고노에 수상에게는 사임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고노에 내각은 1941년 10월 16일에 붕괴했고 이틀후인 18일에 도조 내각이 출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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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정상회담 제의

 

일본과 미국의 군사전략가들에게 1941년 7월 26일의 석유금수조치 이후 진주만 기습까지 4개월 남짓 진행된 최종 협상은 전쟁을 준비할 시간을 얻기 위하여 벌이는 말싸움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군은 이 기간을 이용하여 진주만 기습에 투입할 조종사의 기량을 연마했다.

미군에게도 함정을 건조하고, 탄약과 전쟁물자를 대량 생산하며 필리핀에 병력을 보내기 위하여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협상에 임하는 양국 정부의 자세는 진지했다.

고노에 수상은 전쟁을 반대했으며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외무성과 함께 미국과 자국의 군국주의자들을 모두 만족시킬만한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했다.

루스벨트 대통령과 헐 국무장관 또한 양면전쟁의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일본 정부 내의 역학 관계를 평화 쪽으로 돌릴 수 있다면 어떤 기회라도 최대한 활용할 생각이었다.

 

양국 정부의 진지한 자세에도 불구하고 협상은 진전을 보지 못했다.

애당초 미국과 일본은 아시아의 정세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랐다.

 

미국과 일본은 공히 아시아의 평화를 원했으나 그 평화는 서로 다른 의미였다.

미국에게 있어 아시아의 평화는 일본이 중국과 다른 아시아 지역에서 군사활동을 중지하는 것을 의미했다.

일본이 생각하는 아시아의 평화는 일본의 지도 아래 단결된 대동아, 즉 팔굉일우의 평화를 뜻했다.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려는 고노에 내각의 본격적인 외교노력은 1941년 1월 말에 미국무성이 좋아하는 거물급 외교관인 노무라 기치사부로 제독을 주미대사로 임명하면서 시작되었다.

노무라 대사가 3월 8일에 국무성을 방문하면서 일본과 미국은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갔다.

 

(노무라 기치사부로 주미대사.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협상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미국은 일본에게 히틀러와 손을 끊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하며 중국과 평화협상을 시작하라고 요구했다.

일본은 삼국동맹은 방어를 위한 것이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는 중국과의 평화가 확립되면 철수할 것이며 방해받지 않고 일본이 중국과 논의할 수 있도록 미국이 먼저 중국에서 손을 떼라고 요구했다.

 

노무라 대사는 진심으로 협상에 임했다.

미해군참모총장 해럴드 스타크 대장은 노무라 대사와 친분이 있었다.

스타크 제독은 몇 번에 걸쳐 식사를 하면서 장시간 대화를 나누어 본 결과 노무라 대사의 진정성을 믿게 되었다.

그러나 노무라 대사는 일본 정부의 훈령에 따라야 하는 일개 공무원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에게는 미국 정부가 받아들일만한 제안을 할 권한이 없었다.

 

1941년 7월 16일에 제3차 고노에 내각이 성립되었는데 이는 단지 외상 마츠오카 요스케를 도요다 데이지로로 교체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츠오카는 독소전이 발발한 이후 남방진출에 반대하고 소련을 공격하자고 주장하다가 내각에서 쫓겨났다.

고노에 수상을 비롯한 각료들은 불과 3개월 전에 자신이 주도하여 소련과 중립조약을 맺어 놓고는 독소전이 벌어지자 소련을 공격하자고 주장하는 마츠오카의 횡설수설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미국 측에서는 삼국동맹을 주도했던 마츠오카의 실각을 협상에 호재로 생각했으나 환상이 깨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7월 25일에 일본이 남부 인도차이나에 진출하고 다음날 석유금수조치가 실시되면서 양국 사이의 긴장은 한층 높아졌다.

 

1941년 8월 6일에 노무라 대사는 국무성을 방문하여 일본 측의 제안을 전달했다.

이는 석유금수 및 자산동결 조치에 대한 일본 측의 첫 공식반응이자 신임 도요다 외상이 협상에 임하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내용은 강경했다.

미국은 일본과의 자유 무역을 재개하고, 필리핀에 대한 병력증원을 유보하며, 중국과 극동에 있는 영국 및 네덜란드의 식민지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인도차이나에 있어서 일본의 군사적,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인 특수 지위를 인정하며, 장개석 정권에게 협상에 나서도록 압력을 가하라는 것이었다.

그 댓가로 일본은 인도차이나 바깥으로는 침공하지 않고, 중국과의 평화가 확립되면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하며, 필리핀의 중립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으므로 이틀 후인 8월 8일에 국무성은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헐 국무장관은 노무라 대사가 말하지 않은 내용도 알고 있었다.

제안 이틀 전인 8월 4일에 일본 외무성이 노무라 대사에게 보내는 훈령을 미국 암호해독반이 가로채어 해독한 것이었다.

훈령은 일본이 삼국동맹을 바탕으로 모든 판단을 내릴 것이라는 문장으로 끝맺고 있었다.

이 말은 협상 결과와 상관없이 미국이 독일과 전쟁을 하면 일본도 독일 편으로 참전할 것이라는 뜻이었다.

헐 장관은 그렇다면 일본과 협상을 할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생각했으며 이후 일본의 진정성을 믿지 않았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1년 8월 9일부터 캐나다 뉴펀들랜드의 플라센셔 만에 있는 어젠셔 해군기지에서 윈스턴 처칠 수상과 회담을 가진 후 14일에 대서양 헌장이라고 불리는 합의문을 발표했다.

대서양 헌장은 나중에 국제연합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문건이었다.

여기서 미국과 영국은 일본에게 인도차이나를 넘어 침략을 개시하면 양국은 전쟁의 위협을 무릅쓰고 강력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워싱턴으로 돌아온 루스벨트 대통령은 8월 19일에 노무라 대사를 접견하고 8월 6일의 일본측 제안을 거부하면서 일본이 계속 팽창정책을 추구한다면 미국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힐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자리에서 노무라 대사는 고노에 수상이 루스벨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원한다고 말했다.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정상회담의 효용을 잘 알고 있던 루스벨트 대통령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헐 국무장관은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기본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다음에 만나야 의미가 있다고 대통령을 설득했다.

8월 28일에 노무라 대사가 국무성에 정상회담을 요청하는 고노에 수상의 친서를 전달하러 왔을 때 헐 장관은 실무자 선에서 기본 원칙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져야 정상회담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9월 3일에 고노에 수상에게 보내는 답장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정상회담에 앞서 합의가 필요한 4가지 기본 원칙을 제시했다.

그 내용은

 

1. 모든 국가의 영토 및 주권에 대한 존중

2. 내정간섭 금지

3. 문호개방 원칙을 포함한 평등

4. 현상 유지를 원칙으로 하며 변경이 필요할 때는 반드시 평화적으로 할 것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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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석유 문제

 

1941년 7월 26일에 전면적 금수 조치가 떨어지기 전까지 일본에 대하여 수출이 금지되고 있던 석유 제품은 1년 전인 1940년 7월 26일에 금수 품목으로 묶인 항공기용 고옥탄가 휘발유와 항공기용 윤활유가 모두였다.

정부의 눈치를 보던 미국 해운사들은 자율 규제 형식으로 중유나 원유를 포함하여 모든 석유 제품을 일본으로 운송하지 않고 있었으나 일본은 자국이나 중립국의 유조선을 사용하여 막대한 양의 석유를 미국으로부터 수입해 갔다. 

이제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해졌다.

 

영국과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도 곧 미국을 따라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을 중단하고 자산을 동결했다.

다만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는 현찰 지급을 조건으로 이미 계약한 물량의 선적은 허용했다.

그러나 많은 현금을 미국 은행에 예치하고 있던 일본 기업들은 자산이 동결되면서 석유 대금을 결제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결국 선장이 일본에 가서 힘들게 현금을 구해오는 동안 일본 유조선들은 보르네오나 수마트라의 항구에 몇 주씩 발이 묶여 있어야만 했다.

 

석유 금수 조치가 발동되면서 미국이나 일본 중 어느 한 국가가 물러서지 않는 한 전쟁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미국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인내심이 바닥난 루스벨트 행정부는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다시 일본과의 교역을 허락하고 자산을 풀어주어 일본의 침략을 방조할 생각이 없었다.

 

(프랭클린 댈러노 루스벨트 대통령.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일본 정부가 군부를 설득하여 중국에서 철수할 준비를 시작하는 동시에 남방으로 진출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다면 전쟁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일본군부 또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영국이 북아프리카에서 롬멜에게 고전 중이고, 네덜란드는 항복하여 동인도 제도가 고아 신세가 되고,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을 격파하여 만주에 대한 위협이 없는 지금이야말로 석유가 펑펑나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를 차지하여 일본의 숙명적인 아킬레스 건인 석유 문제를 영구히 해결할 기회로 보았다. 

미국의 석유 금수 조치로 자신들의 처지가 얼마나 허약한지 깨달은 일본군부에게 일시적으로 양보하여 파국을 막자는 일각의 목소리는 앞으로 정복에 나설 때마다 미국에게 허락을 구하자는 소리와 마찬가지로 들렸다.

 

일본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석유 수입이 끊긴 상태로 시간을 끌다보면 경제가 망가질 뿐 아니라 연료가 없어서 막상 전쟁이 벌어졌을 때 함대는 항구에 머물러야 할 것이고 비행기는 뜰 수 없을 것이었다.

석유금수조치 이후 일본은 자신의 꼬리를 잘라먹으면서 연명하고 있었다.

 

일본은 자체적으로 석유를 조달하기 위하여 곳곳에 시추를 하고 1937년부터 인조 석유 생산을 늘리려고 노력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1941년에 일본이 채굴한 석유는 190만 배럴, 합성한 석유는 120만 배럴로 합계 310만 배럴이었는데 이것은 소비량의 12% 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 88% 는 수입했는데 수입 물량의 약 80%를 미국으로부터 들여왔다.

 

일본은 전쟁을 앞둔 몇 해동안 가능한 한 많은 석유를 수입했다.

석유 수입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1940년 4월 1일 - 1941년 3월 31일 사이의 1년 동안 일본은 원유 2,285만 배럴과 각종 정제유 1,511만 배럴을 수입했는데 이는 일본이 1년간 전쟁을 치르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그 결과 진주만 기습 당시 일본이 비축한 석유의 양은 해군 650만톤, 육군 120만톤, 민간 70만톤으로 합계 840만톤이었다.

이것은 전쟁이 발발할 경우 약 1년 6개월 정도 사용할 수 있는 양이었다.

(원유 톤수에 7을 곱하면 대략적인 배럴이 나온다. 중유는 6.7, 휘발유는 8.5를 곱하변 대략적인 배럴을 구할 수 있다.)

 

고무, 고철, 주석, 텅스텐 등의 전략물자는 중요하다.

그러나 석유는 필수적이었다.

부족한 인조 석유 생산 능력을 고려할 때 석유 수입이 끊긴 일본은 석유를 찾아 침략을 강행할 도리 밖에 없었는데 루스벨트 행정부는 석유를 끊어버렸다.

미국인들은 이웃 나라를 침략하는 일본을 석유와 고철로 달래는데 지쳤고, 석유 금수 조치는 미국인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미국 대중들은 석유 금수 조치가 필연적으로 가져올 결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석유 수입이 끊긴 일본은 석유가 풍부한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를 점령할 것이었다. 

미국으로서는 그걸 막기 위하여 일본과 전쟁을 하든지 아니면 손쉽게 산유 지대를 손에 넣어 엄청나게 강력해진 일본과 마주해야 했다.

루스벨트 행정부는 그 사실을 솔직하게 설명할 수 없었으나 석유금수조치가 가져올 결과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제 미국과 일본은 전쟁준비에 한층 열을 올렸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석유 금수 조치를 발표한 당일인 1941년 7월 26일에 필리핀 군을 정식으로 미군에 편입시키고 필리핀 육군 원수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현역 미육군대장의 계급으로 극동지역미군사령관(Commanding General United States Army Far East)에 임명했다.

전쟁에 대비한 산업계의 동원도 더욱 빨라졌다.

 

일본도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대본영과 연합함대에서는 군사 전략가들이 말레이 반도, 필리핀, 홍콩, 북부 보르네오, 괌, 웨이크,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진주만에 대한 공격계획을 작성하고 다듬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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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경제 제재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래 미국은 극동 지역에서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미국은 일본에게 정복에 필요한 물자들을 팔면서 극동에서의 침략에 반대하고 있었고,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방대한 양의 강철, 석유, 그리고 전략 물자들을 구매하여 미군에 대항할 전력을 키우고 있었다.

 

이러한 딜레마는 군사력을 키울 시간을 벌기 위하여 불가피한 것이었다.

미국이 석유를 비롯한 전략물자의 수출을 중단하면 일본은 영령 말레이 반도나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를 침공할 것이 분명했는데 미국은 군사력을 충분히 키우기 전에 그런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일본에 대한 최초의 경제 제재는 1938년 7월부터 실시된 도덕적 금수조치(moral embargo) 로서 민간인을 폭격하는 국가에 대한 항공기와  관련 부품의 수출을 금지한 것이었다.

1940년 들어서면서 미국 내에서 일본에게 경제 제재를 가하라는 압력이 높아졌다.

1940년 2월 초에 네바다 출신의 피트먼 상원의원은 일본에 대한 전쟁 물자의 수출 금지를 요구했는데 이는 여론을 반영한 것이었다.

2월 14일에 갤럽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 유권자의 75%가 무기, 항공기, 휘발유 및 기타 전쟁물자에 대한 금수조치에 찬성했다.

그러나 과격한 금수조치가 전쟁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루스벨트 행정부는 금수 조치를 실시하되 점진적으로, 또한 일본을 덜 자극하는 방식으로 실시하기 위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940년 6월에 프랑스가 독일에게 무릎을 꿇자 충격을 받은 미의회는 7월에 "국가 방위의 강화를 촉진하기 위한 법안"("Act to Expedite the Strengthening of the National Defense"), 줄여서 국가방위법(National Defense Act)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대통령에게 별다른 전제 조건 없이 단지 국가 방위에 필요하다는 판단만으로 특정 국가에 대해 군사장비나 탄약 뿐만 아니라  전쟁물자의 생산에 필요한 기계나 공구, 또는 작전에 필요한 물자나 보급품 등 광범위한 물품의 수출을 금지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국가방위법이 부여한 권한을 교묘하게 활용했다.

그는 금수조치를 단행하면서 영연방, 중국,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 그리고 유럽의 저항세력들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을 모두 대상에 넣어 버렸다.

따라서 실제로는 일본에게 금수조치를 취하면서도 대외적으로는 몇몇 나라를 제외한 모든 나라에 금수조치를 실행하는 모양새를 취함으로써 일본 정부의 체면을 세워 주어 반발할 여지를 최소화시켰다.

 

이런 식으로 단행된 금수조치는 다음과 같다.

 

1940년 7월 5일 : 다양한 금속과 화학물질, 항공기의 엔진, 부품 및 장비

1940년 7월 26일 : 항공기 연료와 윤활유, 일부 종류의 고철

1940년 9월 30일 : 모든 종류의 고철

 

이러한 금수 조치는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

10월 20일에 실시된 갤럽 여론조사에서 미국 유권자의 90%가 정부의 조치에 찬성했으며 더 나아가 96% 가 모든 전쟁물자에 대한 완전한 금수조치를 요구했다.

 

일본은 금수조치가 지난 수년간 미국 고철의 중요한 소비자였던 일본에 대한 비우호적인 행동이라고 항의했다.

일본대사가 국무성에 찾아와 구두로 이런 의사를 전달하자 헐 국무장관은 다음과 같이 맞받아쳤다고 한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있는데 중립을 지키는 또다른 나라가 침략국에게 열광하면서 정복에 필요한 물자를 팔지 않았다고 해서 비우호적인 행동으로 비난받아야 한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소."

 

(코델 헐 국무장관.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1940년 12월 10일과 1941년 1월 10일에 미국이 추가로 금속, 철광석, 그리고 공작기계에  대하여 금수 조치를 단행하자 일본의 반발이 심해졌다.

조셉 그루 주일 대사는 1941년 1월 말에 국무성에 보낸 보고서에서 만일 미국과의 관계가 틀어지면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도쿄 시내에 돌아다닌다고 적었다.

국무성은 이 내용을 해군에 통보했으나 해군 정보기구는 신빙성이 낮다고 보았다.

사실 이때는 야마모토 제독이 진주만 기습 계획을 짜기 시작할 때였다.

 

일본은 급속히 진행되는 미국과의 관계 악화 속도를 다소나마 늦추고자 1941년 1월 말에 미국 측에서 호감을 가지고 있고 외상을 맡은 적이 있는 거물급 외교관인 노무라 기치사부로 제독을 주미대사로 임명했다.

그러나 일본은 노무라 대사의 임명과 동시에 마셜 제도와 캐럴라인 제도에 비행장, 수상기 기지 및 요새 등을 지으면서 급속히 군사기지로 개발하기 시작하여 미국과의 전쟁에 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동안 일본은 타이를 끌어들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야금야금 먹어치우는 전략을 쓰고 있었다.

타이 정부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빼앗긴 자신들의 영토를 돌려달라면서 분쟁을 일으켰고 일본은 중재한다는 명목으로 끼어들었다.

그 결과 1941년 3월에 타이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영토 일부를 가져갔고 일본은 나머지 지역들을 타이로부터 지켜 주었다는 공을 내세워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생산되는 쌀에 대한 독점 수입권과 함께 사이공 비행장을 얻었다.

사이공 비행장을 출격한 일본기는 싱가포르를 폭격할 수 있었다.

 

일본이 계속 남진하자 미국의 여론은 전쟁 불사를 외칠 정도로 악화되었다.

1941년 3월 10일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미국 유권자들 중 일본과의 전쟁을 지지하는 비율이 처음으로 절반을 넘는 51%로 나타났다.

전쟁 반대는 31%였으며 18% 는 대답을 유보했다.

다음날 최초의 렌드리스 안이 법률로 성립되었다.

 

일본에 대한 여론은 계속 나빠져 5월 초에는 70%의 유권자가 전쟁에 찬성하고 18%가 반대하여 전쟁 지지율이 최고를 기록했으며 이후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진주만 기습 3주 전인 1941년 11월 12일의 여론조사에서 전쟁 지지율은 다소 떨어져 64% 였고 반대는 다소 올라가 25% 가 되었다.

 

1941년 4월 13일에 일본외상 마츠오카와 소련외상 몰로토프 사이에 일소중립조약이 조인되었다.

이로써 독일의 침공을 예상하고 있던 스탈린은 배후의 위험을 없앴으며 일본 또한 만주에 주둔시킬 병력을 남방작전에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

 

1941년 전반기 동안 일본은 북부 인도차이나에 병력을 증강시켜 여차하면 인도차이나 전역을 석권할 태세를 갖추었다.

7월 2일, 일본정부는 100 만명 이상의 병력을 징집하고 대서양에 나가있던 자국의 상선들을 불러들이는 등 임박한 전쟁에 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1941년 7월 25일, 일본 외무성은 그루 주일대사에게 비시 정부가 일본군에게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를 허용했다고 통보했다.

일본군이 곧 남부 인도차이나로 쏟아져 들어가 인도차이나 전역을 차지함으로써 이제 일본은 남중국해를 사이에 두고 필리핀의 코 앞까지 도달했다.

 

북부 인도차이나 진출 때까지만 해도 중일 전쟁의 연장선이라고 자위하며 억지로 참았던 루스벨트 행정부는 일본이 남부 인도차이나까지 진출하자 인내심이 바닥났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과의 전쟁 위험을 무릅쓰기로 결심했다.

 

미국의 반응은 재빨랐으며 말보다 주먹이 앞섰다.

일본의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가 결정된 바로 다음날인 1941년 7월 26일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석유를 포함한 미국과 일본 사이의 모든 교역을 금지하고 미국 내의 일본 자산을 동결했다.

미국 항구에 정박 중이던 일본 선박은 8월 1일 이전에 모든 화물을 내려놓고 항구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일본의 모든 선박은 화물을 싣거나 내리기 위하여 미국 항구에 들르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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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미해군의 움직임

 

1941년 4월에 싱가포르의 ADB 회의가 끝났을 때 미해군참모총장과 국무성은 기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국무성은 루스벨트 대통령을 움직여서 태평양함대의 함정들로 하여금 영연방 국가인 뉴질랜드, 호주, 피지, 타히티를 순방하도록 했다.

당시 이들 나라들은 지구 반대편에서 독일 및 이탈리아와 사생결단을 벌이고 있는 모국인 영국으로부터 잊혀진 채 일본의 위협에 노출되어 고립감과 절망감에 휩싸여 있었다.

이들 나라에 미국함정들이 순방을 한다는 것은 앞으로 미국이 챙겨줄 것이라는 신호인 동시에 일본에게는 이들을 겁박할 경우 미국이 가만있지 않으리라는 경고였다.

해군참모총장 해럴드 스타크 대장은 훈련 일정에 차질을 빚게 만드는 이런 순방임무를 싫어했지만 어쩔 수 없이 존 뉴튼 소장의 지휘 아래 중순양함 2척(시카고, 포틀랜드), 경순양함 2척(브루클린, 서배너), 그리고 제3구축함전대를 파견했다.

 

순방은 대성공이었다.

당시 환영이 얼마나 열렬했던지 역사학자 새뮤얼 모리슨 제독이 영관장교로서 경순양함 브루클린에서 근무하던 1942년 말까지도 장교와 수병들이 특히 뉴질랜드의 오클랜드를 비롯하여 가는 곳마다 얼마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는지를 자주 화제로 삼았다고 한다. 

게다가 뉴튼 사령관이 꼼꼼하게 준비하여 순방 도중에도 열심히 훈련을 실시, 훈련이란 면에서도 지장을 받지 않았으므로 스타크 총장도 불평할 수 없었다.

 

문제는 순방이 너무나 성공적이었다는 것이었다.

순방 성공에 들뜬 국무성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바람을 넣었고 대통령은 스타크 총장을 불러 보다 많은 함정들을 이리저리 내보내어 일본에게 위압감을 주라고 말했다.

스타크 총장은 엉뚱한 요구에 화가 치밀었으나 꾹 참고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물러났다.

대통령을 들쑤신 것이 국무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스타크 총장은 이번 기회에 국무성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기로 마음먹었다.

 

스타크 총장은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하와이에서 북서쪽으로 멀리 파견하여 일본 근해에서 훈련을 실시하겠다는 계획을 작성한 다음 국무성에 흘렸다.

예상대로 국무성은 대경실색했다.

헐 국무장관이 백악관에 달려가 일본을 크게 자극할 해군의 무모한 계획을 막아달라고 대통령에게 요청했고, 이후로는 태평양함대의 함정들을 이리저리 내보내어 일본을 겁주라는 소리는 쑥 들어갔다.

 

(미해군 참모총장 해럴드 스타크 대장. http://en.wikipedia.org/wiki/Harold_Rainsford_Stark)

 

1941년 초에 미영 양국의 참모들이 워싱턴에서 회담할 때 미국의 참전이 임박하면 태평양함대의 일부를 대서양 함대로 증원하고 대신 영국은 일부 함정들을 싱가포르로 파견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이러한 증원은 예상보다 빨리 이루어지게 되었다.

수송선 호위 임무를 맡은 대서양 함대는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는데 새로 건조되는 함정의 숫자가 필요량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조레스 제도 점령같은 몇몇 작전을 위하여 함정이 필요해졌다.

 

독일의 유보트들은 대서양의 중앙으로 옮겨와 항속거리가 짧은 캐나다와 영국의 호위함들이 호위해 주지 못하는 영역에서 수송선을 공격하는 전술을 채택했다. 

1941년 4월 3일-4일 사이에 독일 유보트로 이루어진 이리떼가 캐나다를 떠나 영국으로 향하던 SC-26 선단을 덮쳤다.

유보트들은 캐나다의 호위함정들이 돌아간 후 마중나온 영국의 호위함정들을 만나기 전의 공백 지대에서 선단을 공격하여 22척의 수송선 중 10척을 격침했다.

이 사태로 영국과 대서양 함대 모두 충격을 받았고 입을 모아 태평양 함대의 일부를 대서양 함대로 증원하라고 요구했다.

 

태평양 함대 역시 일본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었으므로 전력의 여유가 없었지만 대서양의 상황이 너무 엄중했다.

3일 간의 치열한 토론을 거친 후 스타크 총장은 주저하면서 전함 3척(아이다호, 미시시피, 뉴멕시코), 항공모함 1척(요크타운), 경순양함 4척(브루클린, 필라델피아, 서배너, 내쉬빌), 그리고 제8 및 제9구축함전대를 태평양함대에서 대서양함대로 이동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동은 5월말까지 끝났다.

여름이 되자 아조레스 제도 상륙을 위하여 급유함 3척(시마론, 생가몬, 산티), 수송함 3척 그리고 보조 함정 일부가 다시 대서양 함대로 빠져 나갔다.

아조레스 제도 상륙은 나중에 아이슬랜드 점령으로 대체되었다.

이런 식으로 대서양 함대로 빠져나간 전력은 태평양함대 전력의 20% 에 달했으며 그 결과 태평양함대는 모든 전투함 부문에서 일본에 비하여 열세에 빠졌다.

 

1941년 5월 1일 당시 태평양과 인도양에 있던 연합군과 일본해군의 전력은 다음과 같다.

 

 

 미해군

 영국해군

 네덜란드해군

 연합군 합계

 일본해군(12월 7일 현재)

 태평양함대

 아시아함대

 항공모함

 3

 0

 1

 0

 4

 10

 전함

 9

 0

 1

 0

 10

 10

 중순양함

 12

 1

 4

 0

 17

 18

 경순양함

 9

 2

 13

 3

 27

 17

 구축함

 67

 13

 6

 7

 93

 111

 잠수함

 27

 28

 0

 15

 70

 64

(History of U.S. Naval Operations in World War II, Vol. III: The Rising Sun in the Pacific, 1931--April 1942, P.58)

 

물론 미국은 함정을 대규모로 건조하고 있었다.

1940년 6월에 프랑스가 넘어지면서 독일이 대서양에 도달하고 영국이 침공 위협에 노출되자 미해군 전략의 근간이 흔들렸다.

지난 3세기 동안 해양을 지배해 온 영국해군을 믿고 미해군은 1922년 이후로 일본에 대항하기 위하여 해군의 주력을 태평양으로 옮겼다.

그런데 이제 대서양이 안전한 장벽이라고 말하기 어려워졌다.

또한 일본의 위협 때문에 함대 주력을 다시 대서양으로 옮기기도 어려웠다.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에 모두 강력한 함대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1938년 5월 17일에 통과된제2차 빈슨법에 의하여 미해군은 당시 전력의 25% 에 해당하는 함정들을 발주하여 건조하고 있었지만 그것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1940년 7월 19일에 미의회는 "양대양 해군법"(""Two-Ocean Navy Bill")을 통과시켰다.

법안의 내용은 40억 달러를 투입하여 항공모함, 전함, 순양함, 구축함 및 잠수함 1,325,000 톤, 보조함정 100,000 톤을 건조하고, 5,000만 달러를 투입하여 해안경비대를 위한 경비정, 호위함 및 각종 함정들을 건조한다는 것이었다.

이 법안에 의거하여 에섹스 급 항공모함들, 아이오와급 전함 4척, 대형순양함 알래스카와 괌, 볼티모어급 중순양함들, 클리블랜드급 경순양함 대부분, 아틀랜타 급 대공경순양함 대부분, 1,700톤 짜리 브리스톨 급 구축함 대부분과 새로운 세대인 2,100톤짜리 구축함 플레처가 건조되었다.

평시 같으면 건조에 6년이 걸릴 어마어마한 분량이었으며 전시를 맞아 건조 시간을 대폭 줄였음에도 대부분 1943년 후반기부터 실전에 투입되었다.

따라서 진주만 기습 당시에는 대부분 건조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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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ADB 계획

 

1941년 1월 29일부터 3월 27일까지 워싱턴에서 미해군, 미육군, 그리고 영국군의 대표들이 모여 매일 비밀 회의를 가졌다.

그 결과는 1941년 3월 27일에 "ABC-1 참모 동의안"(ABC-1 Staff Agreement)이라는 이름의 보고서로 만들어졌는데 여기에는 미국이 참전할 경우 기본 전략에 대한 합의사항이 담겼다.

보고서에서는 대서양 및 유럽 전역이 결정적인 전역이며 다른 전역에서 미국의 노력은 이 전역의 승리를 촉진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규정하여 독일우선원칙을 확정했다.

극동 방면에서는 방어 전략을 취하여 일본이 남진하더라도 미국은 태평양에 전력을 추가배치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물론 이 합의가 태평양 전역에서 미군의 역할을 전적으로 현상유지에만 한정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합의에 따르면 태평양 해역(The Pacific Ocean Area)에서 미태평양함대의 임무는 다음과 같다. 

(태평양 해역은 적도 이북에서 동경 180도의 동쪽, 적도 이남은 동경 140도의 동쪽, 그리고 일본을 의미한다.)

 

1. 일본의 해상교통로와 마셜 제도를 비롯한 거점들을 공격하여 적의 전력을 분산시킴으로써 말레이를 방어하는 연합군의 작전을 지원한다.

2. 적도 이남, 동경 155도 동쪽의 영국함대를 지원한다.

3. 태평양의 연합군 지역과 해상교통로를 방어한다.

4. 마셜 제도와 캐롤라인 제도 점령을 준비한다.

 

미육군은 해군 및 육군항공대와 협력하여 다음의 임무를 맡았다.

 

1. 오아후 섬을 방어한다.

2. 파나마 운하, 미국 및 캐나다의 서해안과 알래스카를 방어한다.

3. 남아메리카 서해안에 인접한 국가들을 지원한다.

 

이에 따르면 미국은 태평양 해역에서 영국과 협의를 거칠 필요가 없었다.

미육군과 해군의 합동위원회는 레인보우5 작전을 짜면서 개전과 동시에 마셜 제도를 점령할 계획이었으나 진주만 기습으로 무산되었다.

 

참모 동의안은 또한 극동 지역(Far East Area)에서 연합군의 작전을 다음과 같이 명문화했다.

(극동 지역이란 동쪽으로는 동경 141도, 서쪽으로는 버마의 아이카브를 지나는 동경 92도, 북쪽으로는 양쯔강 하구인 북위 30도, 남쪽으로는 남위 13도를 경계로 하는 지역을 의미한다. 이로써 인도와 호주는 제외되었는데 미국은 인도 방어에 개입하기 싫어했고 호주는 싱가포르를 제외한 말레이 전투에 병력 파견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1. 전략 수립에 각국이 협조한다.

2. 각국은 자국 영토 방어에 대한 책임을 진다.

3. 영국군인 중국 총사령관(Commander in Chief, China)이 지역 내의 영국, 미국 및 네덜란드 해군의 전략 수립에 대한 책임을 진다. (그러나 미해군은 7월에 이 조항에서 미국아시아함대를 빼달라고 영국에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따라서 아시아함대 총사령관은 독자적으로 필리핀 방어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동남아시아 지도. http://harunarcom.blogspot.kr/2011/04/perpisahan-2008.html)

 

이어서 극동 방어를 위한 회의가 1941년 4월 21일 - 27일에 걸쳐 1주일간 싱가포르에서 열렸다.

회의는 영국극동총사령관(British Commander of Chief Far East)인 로버트 브룩포팸 공군대장이 주재했는데 그는 명목상 중국총사령관인 제프리 레이턴 해군중장의 직속상관이었다.

참석자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참모총장인 하인 텔 푸어텐 소장과 호주, 뉴질랜드, 인도군 대표 등이었다.

미국에서는 아시아함대 참모장인 윌리엄 퍼넬 대령을 단장으로 하는 소규모 대표단을 파견했다.

 

회의는 난항을 거듭했다.

대서양 및 유럽 방면에서는 미국의 참전 여부를 제외한 모든 상황이 명확했다.

영국은 18개월째 독일과 이탈리아에 맞서 전쟁을 치르고 있었으며 미국은 사실상 준전시 상태에 돌입해 있었다.

따라서 명확한 계획 수립이 가능했다.

 

극동의 상황은 복잡하고 유동적이었다.

일본은 중국과 전쟁을 치르고 있을 뿐 싱가포르 회의에 참가한 어느 나라와도 전쟁을 하지 않고 있었다.

회의 참가국들 모두 전쟁은 일본의 선공으로 시작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일본의 꿍꿍이는 알 수 없었다.

 

일본은 지금처럼 중국과의 전쟁만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중국과의 전쟁을 마무리짓지 않은 채 남진할 것인가?

만일 남진한다면 어디를 가장 먼저 공격할 것인가?

마닐라? 홍콩? 말레이 반도? 태국? 아니면 보르네오를 비롯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포르투갈령 티모르? 프랑스령 뉴칼레도니아?

(회의 참가자 중 누구도 진주만을 떠올리지는 못했다.)

참가국들은 일본이 한번에 1곳, 또는 잘해야 2곳을 공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문제의 복잡성은 선전포고 문제에서도 나타났다.

만일 일본이 영령 말레이 반도,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 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공격하면 미국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해야 할 것인가?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이 말레이 반도나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를 침공하면 선전포고를 해야 한다고 믿었다.

일본이 이들 지역을 점령하여 주석, 고무 및 원유와 같은 전략물자를 얻게 되면 엄청나게 강력해질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의회의 선전포고를 이끌어 낼 확신이 없었다.

당장 평화주의자들이 들고 일어나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를 지켜주기 위하여 미국의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끌고 간다고 비난할 것이었다.

따라서 만일 반대로 필리핀이 공격당할 경우 영국과 네덜란드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미국을 돕는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것은 의회를 설득하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이었으나 브룩포팸 대장이나 텔 푸어텐 소장은 그런 약속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싱가포르는 커다란 장애물이었다.

영국은 미태평양함대를 분리하려는 시도는 포기했지만 여전히 싱가포르에 집착했다.

그들은 영국극동함대, 네덜란드 해군, 그리고 끌어모을 수 있는 모든 미국함정들을 모아 인도양에서 싱가포르를 거쳐 호주와 뉴질랜드까지 항해하는 수송선 호위 임무에 투입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호주와 뉴질랜드는 자국 근해 방어에 전념하고 싶다는 뜻을 명확히 했으며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또한 연합 사령부에 순양함 1척, 구축함 2척 및 잠수함 2척 이외에는 내놓을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미국 대표인 퍼넬 대령은 영국의 수송선 호위 전략이나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자국 근해 방어 전략이 모두 패배주의에서 나온 소극적인 전략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미국이 말레이 방어에 기여하는 가장 좋은 전략은 태평양함대를 동원하여 마셜 제도를 공격함으로써 일본 해군을 말레이 부근에서 끌어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확실히 좋은 전략이긴 했으나 일본은 12월 7일 아침에 이 전략을 무력화시켰다. 

 

싱가포르 회의는 1주일 간의 격론 끝에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경우 취할 연합방어계획을 힘들게 타결짓고 1941년 4월 27일에 'ADB 계획'('ADB Plan') 이라고 불리는 합의에 도달했다.

ADB 는 미국(America), 네덜란드(Dutch), 그리고 영국(British)의 머릿글자를 딴 것이다.

이 계획에서는 각국 정부에 다음과 같은 경우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도록 요청했다.

 

1. 일본군이 미국, 영국 및 네덜란드 영토에 대하여 직접적인 전쟁행위("the direct act of war")를 취할 때

2. 일본군이 태국에 진입하여 방콕 서쪽이나 크라 지협 이남으로 진출할 때

3. 일본군이 포르투갈령 티모르나 연합국에 충성하는 프랑스령 뉴칼레도니아를 점령할 때

 

미군 수뇌부는 ADB 계획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해군참모총장 해럴드 스타크 대장과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대장은 1941년 7월 3일에 공식적으로 ADB 계획을 거부했다.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지나치게 싱가포르 중심이라는 것이었다.

스타크 대장은 영국참모본부에 요구하여 아시아 함대를 영국군의 지휘에서 빼내었다.

 

그래도 미국은 ADB 계획이 권고한 선전포고를 위한 3가지 요건은 받아들였다.

1941년 11월 5일에 미국참모본부는 3가지 경우에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한다는 방안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올려 재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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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싱가포르 방어문제

 

1940년 9월 27일에 체결된 삼국동맹 조약으로 독일과 일본은 동맹국이 되었다.

삼국동맹 조약은 일본이 남방으로 진출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미국과 충돌할 경우 독일의 지원을 기대한다고 전 세계에 공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동맹국으로서 독일과 일본은 손발이 맞지 않았다.

독일은 1940년 7월에 영본토항공전을 치르면서 영국의 뒤통수를 치기 위하여 일본에게 영령 말레이 침공을 요청했으나 일본은 거부했다.

1941년에 들어서면서 소련 침공을 계획하던 독일은 마음이 바뀌어 일본이 시베리아를 공격해 주길 바랐으나 남방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있던 일본은 반대로 1941년 4월 13일에 소련과 중립조약을 맺어 버렸다.

 

1941년 6월 22일에 소련을 침공한 독일은 일본에게 시베리아를 침공해달라고 미친듯이 요청했으나 일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후 히틀러는 일본의 정책에 대해 관심을 끊었다.

도쿄의 독일대사관은 1941년 후반기 미국과 일본의 교섭 과정에 대하여 아무것도 몰랐고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자 독일은 미국만큼이나 놀랐다.

 

일본의 남방 진출에 대응하기 위하여 연합국이 협의를 시작한 것은 실제로 독일에 대응하기 위하여 협의를 시작한 것보다 더 빨랐으나 진전이 느렸다.

대서양에서는 미해군과 영국해군이 독일의 대미선전포고 이전부터 이미 사실상의 동맹군으로서 긴밀하게 협력한 반면 태평양에서는 진주만 기습 때까지 실효성있는 협력 방안이 마련되지 않았다.

 

1937년에 7월에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10월에 독일, 이탈리아 및 일본사이에 방공협정이 체결되자 루스벨트 대통령과 헐 국무장관은 앞으로 미국이 태평양과 대서양에서 동시에 싸워야 할 것으로 보고 해군참모총장 레이히 대장에게 대책마련을 지시했다.

레이히 제독은 미국이 일본 및 독일과 싸우려면 반드시 영국과 함께 싸워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인식 하에서 미국의 전쟁계획국장 로열 잉거솔 대령이 영국해군의 톰 필립스 대령과 1938년 1월에 런던에서 만났다.

여기서 양국은 만일 일본이 남방으로 진출할 경우 영국함대를 싱가포르에 , 미함대를 진주만에 전개하여 공동 대응하기로 했다.

 

유럽의 전운이 짙어가던 1939년 5월에 영국은 전쟁계획국에 장교를 파견하여 지중해 문제 때문에 싱가포르에 함대를 파견할 수 없다고 통보하면서 미해군이 영령 말레이 방어를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미국은 확답을 하지 않았다.

이후 미육군과 해군의 합동계획위원회는 일본과의 개전시 태평양에 영국해군이 없다는 전제 하에 레인보우1 작전을 짰다.

 

1940년 9월과 1941년 1월-3월에 걸친 미국과 영국 간의 군사회담에서 양국은 싱가포르 문제를 두고 격돌했다.

영국은 싱가포르가 영령 말레이의 방어와 인도양을 거쳐 호주로 연결되는 연락선을 확보하는데 필수적인데 영국해군이 함대를 투입할 여력이 없으므로 미태평양함대가 싱가포르에 강력한 분견대를 파견하든지 아니면 아시아 함대를 크게 증강하라고 요구했다.

여기에 대해 미국은 일본이 싱가포르를 폭격할 수 있는 거리에 비행장을 확보하면 함대를 가지고 싱가포르 방어가 불가능하며 태평양함대를 분산시켰다가는 일본에게 각개격파될 뿐이라고 반박했다.

 

미해군의 입장을 대변하는 리치먼드 켈리 터너 소장은 영국해군이 1939년 말과 40년 초반에 독일공군의 폭격으로 피해를 입은 전함 바함과 워스파이트, 그리고 항공모함 일러스트리어스의 수리를 미국에 요청한데 대해 왜 그 함정들을 싱가포르로 보내어 수리하지 않는지 물었다.

영국 측은 싱가포르에는 주력함의 수리에 필요한 인력, 예비 부품 및 수리 설비가 없다고 대답했고, 터너 소장은 그렇다면 미해군이 무엇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싱가포르를 지켜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리치먼드 켈리 터너 제독. https://en.wikipedia.org/wiki/Richmond_Kelly_Turner)

 

교섭에 참가했던 호주 대표단은 자국의 미미한 해군 세력에서 일부라도 싱가포르 방어에 차출하는 것을 거부하고 태즈매니아 해 방어에 전념하게다는 뜻을 피력했다.

실제로 영국을 따라 대독 전쟁에 참가하고 있던 호주는 독일 통상파괴함의 공격을 막는데 진력하고 있었다.

독일의 통상파괴함 쉬프45호는 소련 북해안을 따라 항해한 다음 1940년 9월 5일에 베링해를 통하여 태평양에 진입한 후 호주 근해에서 60,000톤의 선박을 격침하고는 아프리카를 돌아 독일로 돌아갔다.

쉬프16호는 1940년과 41년에 걸쳐 인도양에서 145,000 톤의 선박을 격침했으며 쉬프41호(코모란)는 동인도양에서 호주해군의 경순양함 시드니와 싸워 격침되었으나 전투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은 시드니도 호주도 돌아가는 도중 침몰했다.

 

교섭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1941년 2월 10일에 양국 대표단의 보고서에서 영국은 싱가포르의 확보를, 미국은 태평양함대를 온전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입장 차이를 확인했다.

 

교섭이 결렬될 위기에 빠지자 결국 영국이 물러섰다.

영국은 일본과의 전쟁이 발발하면 미해군이 지중해 방면에서 도와주는 것을 전제로 최소한 6척의 주력함을 싱가포르에 파견하는데 동의했다.

그러나 진주만 기습은 이 모든 것을 다 헝클어뜨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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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삼국 동맹

 

미함대의 훈련이 진행되던 1940년 4월에 일본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 대해 석유 수출을 포함한 통상 조약을 맺자고 추근대면서 압력을 넣었다.

미국의 헐 국무장관이 이러한 일본의 움직임에 대하여 경고하자 일본은 조약 체결에서 물러서는 대신 고압적인 태도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 구매 사절단을 보냈다.

 

독일군은 1940년 5월 10일에 프랑스를 침공했고 프랑스는 6주 만인 6월 22일에 항복했다.

유럽 제일의 육군 대국으로 자타가 공인하던 프랑스의 어이없는 참패는 미국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당장 일본이 이 기회를 어떻게 살리려고 할지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프랑스의 패색이 짙어진 6월 7일,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대장은 하와이에

 

'서쪽에서 대양을 건너오는 호전적인 국가의 공격'

 

에 주의하라고 경고했고 리처드슨 제독은 오아후 서쪽 해상에 대하여 항공초계를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육군의 장비를 몽땅 잃어버리고 병력만 간신히 빼내온 영국은 독일의 침공 위협에 노출되었다.

다른 곳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던 영국은 일본의 압력에 굴복해 1940년 7월 18일에 중국으로 통하는 버마로드를 폐쇄했다.

이로써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이 외부 세계와 연결되는 통로는 프랑스령 북부 인도차이나의 하노이 항만이 남게 되었다.

영국본토항공전이 영국의 승리로 끝나자 영국은 버마로드를 재개통했다.

 

독일이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석권하자 일본에게는 손쉬운 정복의 기회가 열렸다.

중일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본국이 함락되어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가 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는 먹음직스러운 먹이였다.

이제 독일이 자신의 강력함을 증명하자 연합국 측에 호의적이었던 일본해군의 고위 장교들 사이에서도 연합국과의 충돌 가능성을 무릅쓰고 남방으로 진출하고픈 욕망이 커졌다.

 

프랑스가 항복한 1940년 6월 22일에 일본에서는 제2차 고노에 내각이 성립되었다.

육상으로 도조 히데키 중장이 입각했고 외상은 친독파인 마츠오카 요스케가 맡았다.

10대 시절을 미국에서 보낸 마츠오카 외상은 당시 일본인 중에서는 영어가 능숙했고 미국과 미국인을 잘 알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한정된 경험으로 미국과 미국인을 모두 안다고 생각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마츠오카가 아는 미국인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을 피하려고만 하는 사람들이었다. 

 

고노에 내각 아래에서 일본의 전체주의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정부는 경제의 큰 부분을 이루는 재벌에게 특혜를 주면서 유착하여 거의 지배했다.

정당은 해체되어 대정익찬회로 통합되었고, 노동 운동은 탄압을 받았으며, 국민들은 근검절약을 강요받았다.

 

1940년 8월 30일, 프랑스의 페탱 정부는 일본의 요구에 따라 북부 인도차이나에 일본군의 진주를 용인했다.

일본군의 북부 인도차이나 진주는 미국이 주장하던 동남아시아의 현상유지 정책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미국은 대단히 불쾌했지만 남방으로의 진출이라기보다는 중국전선을 지원하기 위한 의도라고 보았기 때문에 즉각 행동하지는 않았다.

이로써 장제스 정권은 외부와 통하는 유일한 항구인 하노이 항을 잃었다.

 

1940년 9월 27일,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삼국동맹조약을 체결함으로서 공식적으로 추축진영에 가담했다.

일본은 독일 주도의 '유럽 신질서'를 지지했으며 독일과 이탈리아는 일본 주도의 '대동아 신질서'를 지지했다.

 

또한 삼국 중 누군가 유럽전쟁과 중일전쟁에 참가하고 있지 않은 세력의 공격을 받으면 서로 돕기로 했는데 이는 공공연히 미국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 조항이 나중에 일본의 진주만 기습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는 근거가 된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양면전쟁의 위협을 가하여 미국을 중립상태로 묶어 둘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일본 또한 삼국동맹으로 미국의 배후에 위협을 가함으로써 미국이 일본의 팽창정책에 간섭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비록 중립을 지키고 있었지만 태생을 보나, 정치 형태를 보나, 국민들의 정서를 보나 추축진영을 적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었고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다.

삼국동맹조약의 체결로 일본은 추축 진영으로서 독일 및 이탈리아와 한배를 타게 되었고 이제 미국으로부터는 확실한 적으로 분류되었다.

 

(삼국동맹조약 조인식. http://en.wikipedia.org/wiki/Tripartite_Pact)

 

고노에 수상은 삼국동맹을 내켜하지 않았으나 우유부단한 성격 탓에 마츠오카 외상에게 밀려 조약 체결을 저지하지 못했다.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은 삼국동맹을 반대했다.

그는 삼국동맹조약 체결 직후 고노에 수상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저는 만일 뒷일을 생각하지 말고 마음껏 싸우라는 명령을 받는다면 6개월이나 1년은 마음껏 설칠 자신이 있으나 2년, 3년째는 전혀 자신이 없습니다. 삼국동맹은 이미 체결되어 이제는 손 쓸 도리가 없습니다. 총리께서는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함대 총사령관 제임스 리처드슨 대장은 위에서 시킨다고 고분고분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일본이 동남아시아를 침공하건 말건 아시아 문제는 미국이 신경쓸 일이 아니었으며 미해군은 본토를 지키는데 집중해야 했다.

 

리처드슨 대장은 보급과 정비 문제 때문에 진주만을 싫어했다.

진주만을 모항으로 하는 함대에 보급하기 위해서 수송함들이 미서해안으로부터 3,000km 넘는 거리를 쓸데없이 왕복해야 했다.

연료의 비축량이 모자라서 함대는 마음껏 훈련할 수 없었으며 장비와 보급품의 수급에도 지장을 받았고 수병을 모집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미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하와이에 근무하게 된 장병들은 사기가 떨어졌다.

호놀룰루에는 백인 여성이 거의 없고 상점이나 식당의 여자 종업원들도 미본토의 예쁜 백인 여자 종업원들보다 못 생긴데다가 불친절해서 수병들이 싫어했다.

리처드슨 제독이 생각하기에 일본과의 전쟁이 임박할 경우 함대는 진주만보다는 시설이 좋고 수병들의 충원이 용이한 미본토 서해안에서 전쟁준비를 더 잘 갖출 수 있었다.

 

진주만으로 옮긴 직후부터 리처드슨 제독은 해군 참모총장 해럴드 스타크 대장에게 함대를 미본토 서해안으로 철수시켜야 한다고 계속 주장했으나 묵살당했다.

그러자 그는 1940년 7월과 10월에 워싱턴으로 날아가 국무부와 의회를 포함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함대가 미본토 서해안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0월 8일에 리처드슨 제독을 불러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

이 자리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함대가 하와이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 일본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으며 이 견해는 헐 국무장관도 동의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로도 리처드슨 제독이 계속 의원들을 만나 함대의  서해안 철수를 주장하고 다니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해임해 버렸다.

 

뻣뻣한 리처드슨 제독의 태도에 화가 난 루스벨트 대통령은 전투부대를 태평양함대로, 정찰부대를 대서양함대로 만들고 상징성이 큰 명칭인 미함대 사령관직을 폐지해 버렸다.

미함대 사령관직은 전쟁이 터진 이후에 부활한다.

 

태평양함대 사령관은 젊은 장성 중에서 뽑기로 했다.

해군장관 프랭크 녹스는 소장파 장교 중에서 유능하다고 손꼽히는 2명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추천했다.

항해국장 체스터 니미츠 소장과 전투부대 순양함사령관 허즈번드 킴멜 소장이었다.

녹스 장관은 니미츠 소장을 염두에 두고 의사를 타진해 보았으나 뜻밖에도 사양했다.

이유는 50명이 넘는 선배들을 제치고 그런 중요한 자리에 가게 되면 질시에 휩싸이고 그러면 임무를 수행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태평양함대 사령관 자리는 니미츠 소장의 3년 선배인 허즈번드 킴멜 소장에게 돌아갔다.

킴멜 소장은 1941년 2월 1일에 임시 대장으로 진급하면서 사령관으로 취임했고 킴멜 제독의 취임과 함께 전투부대는 태평양함대로 이름이 바뀌었다.

 

(허즈번드 킴멜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만일 전투부대를 진주만에서 미본토 서해안으로 철수시키자는 리처드슨 제독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면 태평양함대는 진주만 기습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야마모토 제독이라도 미본토 서해안까지 항공모함들을 끌고 와서 미함대를 기습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리처드슨 제독이 진주만을 싫어한 까닭이 적의 항공공격에 대한 우려라기보다는 주로 보급과 후방지원 문제였기 때문에 그에게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태평양함대의 주력이 진주만에 전진배치된 일은 전쟁 초반에 기습을  당해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는 원인이 되었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덕분에 진주만의 급속한 개발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1940년 5월부터 태평양 함대가 주둔한 이래 1년 만에 진주만의 해군공창에 근무하는 민간인의 수가 2배로 늘었고 해군 소속의 인원은 몇 배로 늘었다.

공창을 확장하기 위하여 드넓은 땅을 매입하는데 예산이 아낌없이 투입되었다.

공창에서 일하는 해군과 민간인의 숙소가 건설되고 새로운 건선거가 만들어지고 넓은 대지에 주물공장, 기계공장 및 공구공장이 들어서면서 진주만은 본토의 대기지와 맞먹는 함선 수리 및 정비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진주만 기습 이후의 복구 과정이나 미드웨이 해전 당시 요크타운의 수리를 비롯하여 전쟁의 여러 국면에서 진주만의 뛰어난 함선 수리 및 정비 능력은 큰 도움이 되었다.

진주만이 짧은 시간에 대규모로 개발될 수 있었던 이유는 태평양 함대의 모항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태평양 함대가 미본토 서해안으로 돌아가 버렸으면 진주만의 개발은 그렇게 빨리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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